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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원형은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었나?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3월 31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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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3월 30일 (토) 10:43:11
최종편집 : 2013년 03월 30일 (토) 15:50:58 [조회수 : 6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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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당당뉴스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오늘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부활신앙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져야 하는지 교우님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1. 몸의 부활을 믿어야 할 것인가?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불과 20~30년 전까지도 기독교인은 화장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셨듯이 우리들도 언젠가 무덤을 열고 부활할 때가 올 텐데 재료가 남아있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매장보다 화장을 선호하는 교우님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관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재료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화장을 해도 우리 몸을 다시 살아나게 하실 수 있으며, 그때 살아나는 것은 썩어질 육신이 아니라 신령한 몸”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부활에 대한 이런 믿음은 성서의 기록에 의해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네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예수께서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거의 20년이나 앞서 기록을 남긴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예수님 뿐 아니라 신자들의 몸의 부활을 지지하는 글이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을 가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몸의 부활에 대해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인데, 썩어질 몸(physical body)으로 심고 신령한 몸(spiritual body)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하여 성서의 기록이 문자적으로 옳다면 ‘몸의 부활’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변화된 몸이기는 하지만 이전과 똑같은 인격체로 다시 살아나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 바울이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질서를 거스르고 역행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한번 죽은 사람이 동일한 인격체로 다시 살아난다는 건 자연 상태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몸의 부활을 믿으려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을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기적이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의 개입에 의해 발생한다면 기적을 일으키는 주체는 그 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서에는 예수 부활 뿐 아니라 수많은 기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런 놀라운 기적 사건을 기록한 동시대의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성서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 기적을 은유나 설화가 아닌 실제 사건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서의 기록과 교리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아,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이집트 탈출) 설화에는 수많은 기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멈추게 하셨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무사히 건너게 하셨는가 하면, 갈라졌던 물이 다시 합쳐지게 하여 뒤따라온 이집트 병사들을 몰살시키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는 파라오의 강퍅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아무 잘못도 없는 이집트 백성들의 맏아들 뿐 아니라 짐승들의 처음 난 새끼들까지 모두 죽였다는 기록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분이 자신이 만든 자연법칙을 스스로 깨뜨려가면서 그토록 무서운 형벌을 이집트의 죄 없는 일반 백성들에까지 내리신 것일까요?

기적 행위의 주체자인 하나님의 무자비한 형벌과 선택받지 못한 백성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이방민족의 고통과 파멸, 그 잔혹한 기록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기독교인들이 겪어야 했던 곤혹스러움과 두려움, 마음의 갈등, 제기되는 의문들을 기독교 전통 신학은 ‘인류의 조상이 지은 원죄 때문’이라는 설정으로 모두 묻어버렸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네 권의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기적적인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기적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오랜 전승 과정을 거쳐 기록된 설화이며, 부활에 대한 기록 역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예수께서 죽으신 후 40년 이상 지나서 기록된 ‘전승설화’입니다.

이제 그 기록들을 대하는 우리는,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그것을 사실이 아닌 설화로 받아들일 것인지, 우리의 이성이 제기하는 의문을 계속 억누르며, 세상과 자연의 법칙과는 따로 움직이는 성서의 문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라 살 것인지 정직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만드신 자연법칙을 스스로 거스르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열린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적 이야기에 대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은유나 설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예수님의 부활 전승에 대해서만은 설화라고 말하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몸이 부활하셨다는 성서의 중심사상을 부정하면 기독교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기독교라는 조직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조직의 근간을 거스를 수 없는 한계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기적설화들은 실제 사건일 수 없지만 예수님의 몸의 부활만은 예외라고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2. ‘지금 이 자리에서’ 보지 말고 ‘그때 그 자리에서’ 보기

예수님이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고,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끝없이 호강을 누리며 살 것이라고 믿었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교우님들과 함께 가상의 타임머쉰을 타고 이천 년 전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이 최소한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겪어왔고 그때 당시에도 조금만 깊이 관찰하고 생각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은 수많은 별들, 그 가운데로 유유히 항해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달, 새벽이 되면 찬란한 빛을 내뿜고 떠오르는 태양, 그것은 너무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존재’를 뚜렷이 보여주는 증표였습니다. 누구나 눈만 뜨면 확인할 수 있는 그 사실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땅 위 저 높은 곳에 아름다운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을 최상위 존재인 하나님을 수호하는 천사로, 또는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신적 존재나 천사로 이해한 것도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와 아울러,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구마을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화산 폭발과 용암의 분출, 지진의 발생 등을 목격한 사람들은 솟구치는 그 불덩어리와 갈라지는 땅을 보며, 땅 속 깊은 곳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며, 거기에는 꺼지지 않는 불로 사람들을 심판하는 신적 존재가 살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천체의 운행, 땅 속 용암의 존재, 지각의 움직임 등을 알 수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세계를 관찰하고 사유한 결과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너무나 정직하고 당연한 결론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우주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천상의 세계를 동경하고, 땅 속 세계를 두려워한 것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념은 이렇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지구마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문제는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이런 원시(무지하다는 뜻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앞선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과학에 의해 투명하게 밝혀진 지금 시대에도 일부 사람들에게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학보다 교리가 옳다는 교회의 오랜 가르침으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어느 시점에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난다거나, 다시 오신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불러 모으고 예수님 좌우에 두 편으로 나누어 한 쪽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하고, 다른 쪽은 지옥에 처해져서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벌을 받게 한다는 신약성서의 기록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우주관을 토대로 우리에게 주신 은유적 교훈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린 아이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금쪽같은 말씀이지만,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셨고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그대로 사실로 믿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면 그 신념은 여러 가지 해로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성서가 묘사하는 신자들의 몸의 부활, 그들에게 약속된 공간적 천국, 그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에게 형벌로 주어지는 지옥의 존재, 그것은 이삼천 년 전 사람들의 원시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믿으면 우리의 이성과 판단력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교우님들이 그 교리적 신념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그 신념이 현대과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과 정면으로 충돌할 뿐 아니라, 우리 교우님들의 삶도 왜곡시키고, 이웃들과의 소통도 불가능하게 하여 여러 가지 갈등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3. 부활한 것은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 그분의 삶과 정신입니다.

지난 편지들에서, 저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여전히 제 신앙의 중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교리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 십자가와 부활의 전승 안에 담긴 소중한 의미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부활신앙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그토록 품고자 하셨던 소외된 민중과 제자들의 가슴 속에 다시 살아난 그 분의 삶과 정신이지 몸의 부활이 아닙니다. 아래 내용은 저의 책 <당신들의 예수>(2007년 7월 7일, 도서출판 삼인 출간)에 실린 내용으로, 교우님들과 다시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나는
내 주님의 대속을 믿는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죄가 사해졌음을 믿는다.

그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셨기에
그 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

나는 또한
본 훼퍼 목사님의 대속을 믿는다.
그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기에
그 피로
오늘의 내가 구원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대속을 믿는다.

많은 의로운 피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수많은 생명으로 피어남을 믿는다.

나는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

내 주님 예수께서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숨 쉬고 계심을 믿는다.

예수는
내 가슴에 영원히 살아계시며
지금도 나에게
끊임없이 생명의 말씀을 부어주고 계신다.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진실로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내 마음 가운데
살아 숨 쉬고 계신다.

부처, 노자, 공자,
짜라투스트라, 톨스토이, 슈바이쳐, 간디,
원효, 유영모, 김교신, 문익환...
인류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수많은 성현들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내 마음 가운데 살아 숨쉬고 계시듯이...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의미를 되찾은 민중과 제자들 가운데는 주님의 부활을 저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고 고백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저는 추측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살아계신다.”고 전한 것은 이렇게 자신의 가슴과 삶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20여년이 지난 후 바울의 서신에, 그리고 40년이 지나서는 복음서에 ‘몸의 부활’로 기록되었습니다.


4. 예수님은 여전히 저에게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어쩌면 그 동안 저를 이해하고 지지해주신 교우님들 중에 크게 실망하신 분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기독교인으로 남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사실 저에게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예수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지금도 저는 누군가 “당신 기독교인이냐?”라고 물으면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라는 전제 아래 묻는 것이라면 저의 대답은 “그렇습니다.”이지만, “기독교인은 반드시 정통 교리에 동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묻는 분들에게는 “아니오.”라고 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내 얘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제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저에게 아내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저와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며, 밥상을 마주하고, 잠자리까지 함께 하는 ‘저의 특별한 사람’은 제 아내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아내는 저에게 이렇게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을 신랑으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하는 글이 종종 등장합니다. 신약성서에도 교회와 신자를 신랑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로 비유하는 글이 발견됩니다. 교리를 통해 이 비유를 읽으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와 신자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권위자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비유를 교리가 아니라 관계성으로 읽습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저와 함께 동행하시며, 저와 함께 먹고 마시는 제 인생의 동반자이십니다. 성서가 제시하는 비유의 틀에 의하면, 저는 제 인생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저의 신랑이며 저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저는 어느 면에서는 예수님보다 부처님을 더 존경합니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새겨듣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매우 답답한 기독교인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부처님은 저의 스승이시며 저에게는 그런 스승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이라 하더라도 스승이 신랑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저에게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제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오셔서 제 손을 잡아주셨으며 저의 눈물을 닦아주셨고, 저는 그분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분과 결혼하였습니다. 지금 그분은 제 안에, 저는 그분 안에 있어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과 맺은 ‘관계’에 의해서입니다. 어쩌면 예수님보다 도덕적으로 더 훌륭한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이 저의 구세주이며 저의 영원한 신랑이십니다.

제가 아직도 기독교 공동체에 남아 있는 이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리스도인으로 남으려는 이유는, 이렇게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도록 안내해 준 기독교가 이웃종교에 비해 ‘객관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저의 아버지보다 훌륭한 분들이 세상에 많다 하더라도, ‘그리운 내 아버지’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5. 예수정신과 예수운동 이어가기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새롭게 살 소망을 주신 그분의 정신과 운동도 중단된 채, 예수사건은 하나의 역사적 이벤트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현실세계에서 이루고자 그토록 애썼던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도 한낱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그분이 기득권 세력에 체포되어 가혹하게 처형된 이후에도 예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신과 삶에 여전히 현존해 계신 ‘살아 계신 주님’을 증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미래의 저 천국’을 그리는 소박한 신앙은 그나마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가게 하는 위로와 소망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예수님 잘 믿어서, 죽은 후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다시는 병들거나 늙지도 않고 죽음도 고통도 없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박한 믿음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리적 부활론은 그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온갖 특혜(?)로 마음의 위로를 주지만, 결과적으로 기독교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을 선포함으로써 이웃종교와 문화를 부정하고 기독교 교리에 순복하기를 내용으로 강요한다는 점에서 매우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반사회적인 교리입니다.

또한 교리적 부활론은 우리 삶을 왜곡하고 예수정신을 거스르며 비현실적인 도피신앙으로 유도하기에, 한국 교회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숙제 중 하나입니다. 하여 이제는 우리 교우님들도 몸의 부활을 믿는 교리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을 이어가는 진정한 예수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가슴과 삶 속에 살아계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전 세계 그리스도교 자매 형제님들과 함께 기뻐하며 찬미합니다. 주일편지를 나누는 교우님들에게도, 우리 주님의 부활의 은총과 인도하심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여,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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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69.148.188.51)
2013-04-01 09:16:53
참 수고 하십니다.
몸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삶과 정신이 부활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죽으시고 더 이상 (변화된)육체로 살아계시지 않다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그 근거는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할 때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데...

그러면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부터 부정해야 옳지 않을까요?
모든 기적을 부정하면서 예수님의 기적적인 탄생은 어떻게 인정하는지 궁금합니다.

결국 어떤 한 존재 곧 예수를 상정하고(이 예수는 분명 성경의 예수와는 다른 존재임이 확실합니다.) 허구로 꾸며진 모든 내용(소설이지요)에서 이루어진 그의 삶과 정신을 본받자는 주장일 따름입니다.

이런 소설은 이스마엘 도끼님 전문이지요.
이분의 소설이 훨씬 재미있고 오히려 본받을 것들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야훼의 **"는 참 많이 생각하게 했습니다. 거시기에 집착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이지요.

아뭏든 없는 예수를 두고 그 삶과 정신을 부활시키려 하시니 무척이나 고단하시겠습니다.
차라리 스승되는 부처의 삶과 정신을 따르자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겠습니다. 그는 진짜 살았던 사람입니다.
리플달기
10 2
부탁 (24.36.119.34)
2013-04-08 23:47:16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정말 부탁이니 글쓰지 말아주십시요. 가슴아픈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을 아는 사람으로써.... 정말 부탁합니다.
리플달기
4 2
나그네 (61.73.84.27)
2013-04-06 17:23:17
배타적이고 성경을 왜곡해서 먹고 사는무리들 하나님을 욕보이는현실 천국은 있을까 가장 중요한 사랑앞에 자유로울수없음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배타적인건 성경을 오독하고 있음을 깨달아야한다
리플달기
0 2
포이멘 (183.109.98.59)
2013-04-04 13:02:15
성도입니까? 삯꾼종교가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성령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이들을 우리는 성도(saint)라고 부릅니다.

무지랭이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
고행과 교육과 예절 등 도에 이르는 모든 도를 닦지 않아도
부처보다, 공자보다, 마호메트보다, 교황이나 사제보다,
라이센스 받은 목사보다, 이만희보다, 무당보다, 유명한 종교가나 사상가보다
한차원 위에 있는 성도(saint)가 됩니다.

백날 힘들게 도를 닦아도 도에 이르지 못하는 불쌍한 민중들을 위해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배타적입니까?
성도들은 그러한 마음이 없습니다.
거짓 종교가(중, 교황, 사제, 목사, 등)들에 속는
민중들이 불쌍할 따름이지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성도(saint;성자)가 되는 데

이 좋은 것을 전파하는 것이 배타적입니까?
아니면 나만 알고 지내는 것이 배타적이고 이기적입니까?

단지 삯꾼종교가들이 회원들 많이 끌어 모으느라
폭력적인 언동을 하고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의 대가리에 오르려고 힘을 쓰는 것이
현재 종교계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종교다원주의 운운하며
밥그릇 싸움하는 것이지요. 저의 눈에는 그렇게 비칩니다.

개신교에 있어선
삯꾼 목사들이 성도인지 우선 의문이 듭니다.
신학교에서 얻은 라이센스만 가진
아무 자격없는 니골라당이 교회를 머리를 차지하고 무당짓을 하는
삯꾼 목사들은 문제이지요.

그리고 인간들이 만든 교리와 원칙을 가지고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며 싸우는 삯꾼 종교가들이 문제이지요.
이들 종교가들은 생산력이 없습니다.
예수 팔아서 먹고 사는 장사치들 입니다.
이 글을 쓴 분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성도입니까? 삯꾼종교가입니까?
리플달기
8 5
Ismail-x (112.222.123.131)
2013-04-02 09:19:20
참빛 선생에게...
예수님 재림시
죽은 자가 육체적으로 부활을 할 때
현재 우리 몸의 성분과는 다른 성분으로 변화하여 부활할 것입니다.
(이 때를 가리켜 우리는 새 세상에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새 세상은 지금의 원소나 질량, 에너지와는 다른 세계로 변화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 자 또한 홀연히 새 세상에서의 변화를 겪을 것이지만
사람이 분해된다고 하는 가정도 일리가 있으나
또한 순식간에 변화할 것입니다.

홀연히 변화할 때 새 세상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원소를 가지고
썩지 아니할(현 세상의 육체를 구성하는 원ㅅ들은 썩을 것들이지만)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 참빛 선생...

정말 이런 사람하고 대화가 가능하다고 믿습니까?^^

미친 놈들이 입에 거품을 물어야만 미친 게 아닙니다.


의학적으로도 미친 경우는 여러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조용히 미치는 놈들도 많죠.

책 사 보실 필요없이 의학사이트 들어가서 보세요.



내가 말했잖아요.

개독들과 상대하는 방법은 오직 조롱 뿐이라고...




이런 넘들의 대가리는 산타클로스가 왜 겨울마다 찾아오는지에

대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1,000 가지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타클로스가 실존한다는 증거를 10,000 가지는 증명할 수

있죠.




이런 넘들을 이기겠습니까?^^




.
리플달기
3 10
Philip Im (70.62.49.64)
2013-04-02 09:40:08
Ismail-fox?
나름 Ismail-x다운 글들이라 지금까지 여겨왔는데 ㅈㅈㅈ

이제는 Ismail-fox라 함이 어떨런지?
손 안대고 코 푸는 것도 가지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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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
당근 도끼 (112.222.123.131)
2013-04-02 09:35:45
좀 더 덧붙이면...
.


이 놈들 진보신학이나 자유신학 전혀 모릅니다.

책도 읽어보지도 않았고 읽어 봤자 한 두 권 얼핏 보고

또 지들 대가리에서 망상을 조립해서 키보드 두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애초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죠.


그리고 이 놈들 대가리로 진보신학에서 말하는 내용 이해 못 합니다.

가끔 가다가 저도 내용이 어려워서 몇 번 되풀이해서 보는 것도

제법 됩니다.


단언컨데 창*이든 빌*이든 얘들 대가리로는 절대 이해 못 합니다.




5년 전인가 슐라이어마흐의 <종교론> 읽는데도 이해가 쉽게 안 되서

3번을 반복해서 읽고 나니까 아... 이런 주장이구나 하고 끄덕였는데

저 돌대가리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ebs 다큐에서 공부에 대한 내용을 많이 방영했는데 이해 능력은

다양한 학문을 많이 접할수록 커지게 되어있습니다.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때 공부 못 해서 신학대학 가고 또 대학 나와서도 절대

책은 안 읽는 저런 버러쥐 같은 인간들이 뭘 제대로 이해하겠습니까?


그냥 초등학생 데리고 가르치는게 훨씬 빠릅니다.


그리고 참...


목사들 성경 안 읽습니다.


몇 년전에 뉴조에서 기사 났잖아요.

크리스천투데이에서도 나고...


목사들 정말 성경 안 읽는다고.


도리어 평신도들이 더 많이 읽습니다.



나는 개먹사 넘들이 도대체 자신들이 뭘 알고있다는 건지

진짜 궁금합니다.


도대체 뭘 안다는 걸까?


그러면서도 성경을 지 혼자 다 이해한다는 듯이 게거품을 물죠.

참 기도 안 찹니다.


머리 나쁜 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





























































뱀발 : 너희 둘...

그래 너희 둘 말야.



그럼 뭐 다른 사람인 줄 알았냐?



왜 사냐?


진지하게 물어본다.



...




왜 사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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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
Philip Im (70.62.49.64)
2013-04-02 08:10:07
영적 부활이라 함은
원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여 육체적으로 죽고
영만 살아있는 것을 영적 부활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하여 영적 부활만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영에 관하여는 크게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영이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영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이 소멸된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은 아예 영의 부활을 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함은
육체의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이유 가운데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 재림시
죽은 자가 육체적으로 부활을 할 때
현재 우리 몸의 성분과는 다른 성분으로 변화하여 부활할 것입니다.
(이 때를 가리켜 우리는 새 세상에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새 세상은 지금의 원소나 질량, 에너지와는 다른 세계로 변화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 자 또한 홀연히 새 세상에서의 변화를 겪을 것이지만
사람이 분해된다고 하는 가정도 일리가 있으나
또한 순식간에 변화할 것입니다.

홀연히 변화할 때 새 세상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원소를 가지고
썩지 아니할(현 세상의 육체를 구성하는 원ㅅ들은 썩을 것들이지만)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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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
Philip Im (70.62.49.64)
2013-04-02 01:44:08
유사복음
부활에 대한 기록을 양보하여 기록자들의 신앙고백이라 할 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할 때)
저들은 예수님의 삶과 정신의 부활을 주장하였습니까?

분명 저들의 기록에는 몸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가 성경 속에서 찾을 것은 몸의 부활입니다.
(이것의 진위 여부는 각자의 판단과 믿음에 맡깁니다.)

어떤 다른 부활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든 신앙공동체의 고백이든 관계없이)
부활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이 비록 사람의 글이고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부 담겨있다 할지라도
성경을 근거로 하여 부활의 모습을 말한다면
성경대로 해야할 것입니다.

아예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성경의 내용을 인용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성경에 빗대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유사복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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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4
Ismail-x (112.222.123.131)
2013-04-01 16:39:21
유일신 사상은 안타깝지만 엉터리랍니다.^^
.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른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나 말고 다른 남자 만나면 안 돼!"

라고 말하면 다른 남자가 있다는 전제가 당연히 성립하죠.


그러므로 유일신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주장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야훼를 가리켜 'he'라고 3인칭 대명사를 씁니다.

he 라는 단어는 반드시 she 라는 단어가 존재해야 성립하는 개념이죠.

즉, 쌍으로만 존재합니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있으니까 성립하고

빠른 것은 느린 것이 있으니까 성립하죠.

그러니까 야훼 이외에 최소한 여신이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개독들이 쓰는 단어 중 '궤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개독들이 궤변이란 단어를 올리면 그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논리적으로 네 말이 옳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을거야."

"네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즉, 개독들이 상대방의 주장을 '궤변'이라는 말을 붙이려 한다면

이 때는 위와 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궤변과는 전혀 다르죠.




.




























아... 깜박했다.


비슷한 경우로 게거품을 물면서 상대를 정죄하고 재판하기 바쁘던

개독들이 갑자기, 서든리,


'관용'

'수용'

'포용'

'이해'

'용서'

'공감'


따위의 단어와 무척 친해지려 애쓴다면

이 때는 이 경우 외엔 없습니다.


먹사들이나 개독들이 악랄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죄악이 드러나서 사람들에게 비난과 질타를 당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질시하고 상대와 싸우기에 바쁜

무리들이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고 온화하게 접근한다고 하면

결단코 이 이외에는 없습니다.


예를 들 것은 수없이 많지만 대표적으로 2007년에 있었던

'아프간의 질할'이 있습니다.


이 때 개독들이 지껄였던 말들을 검색해서 찾아보시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개독들이 주특기인

'살인'

'공금횡령'

'폭행'

'감금'

'파괴'

'불륜'

'성폭행'

'성추행'

'땅투기'

'불법세습'

'공갈'

'협박'


등 수많은 범죄가 저질러 질 때 아무런 뉘우침도 없다가 이게 이제

언론이나 여론에 오르고 알려지면 다급해지기 시작하죠.


이 때 자주 나오는 말들이,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용서하자.

이해하자.

다윗도 범죄했었다

우리 먹사님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기도만 하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등 웃기는 개소리들을 흩뿌리며 광견병에 걸린 개색희처럼 날뛰기

시작하죠...



그러면 아...


또 저 시펄럼들...



사기쳤구나.

누구 여성도 빤스 내렸구나.

땅문서 갈취했구나.

성도들을 감금 폭행했구나.

목양실에서 여중생 성도를 성추행했구나.


등의 범죄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개독들의 거짓 화해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놈들은 그 순간만 넘기면 그만이라는 해괴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잠시 돌아가서 2007년 아프간의 질할 때 많은 정상인들은

예측을 했죠.


저 쓰레기 개독 색희들이 우리 국민이 정부가 구해준 것을 가지고

분명히 하늘의 야훼가 자신들을 구해주었다고 온 동네 방네 교회

다니면서 간증 질할을 하고 다닐거라고 말입니다.




이 예측은 정확히 맞았죠.


뭐 이처럼 개독들의 행태는 안 봐도 뻔하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글쓰는 도중에 일이 생겨서...



그럼 뭐...


수고들 하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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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
Ismail-x (112.222.123.131)
2013-04-01 16:14:01
근데 왜 마리아가 동정녀인가요? 마리아는 성관계를 했잖아요???
.


참 수고 하십니다.

☞ 뭘요^^

몸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삶과 정신이 부활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죽으시고 더 이상 (변화된)육체로 살아계시지 않다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그 근거는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할 때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데...

☞ 그렇죠.

그러면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부터 부정해야 옳지 않을까요? 모든 기적을 부정하면서 예수님의 기적적인 탄생은 어떻게 인정하는지 궁금합니다.

☞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가 존재하든 안 하든 별 상관없습니다. 예수와 관련된 기적은 모두 부정하는 것은 맞고, 예수가 동정녀에서 태어났다는 것 역시 부정하죠. 요셉하고 마리하하고 뭘(?)해서 낳았죠.

결국 어떤 한 존재 곧 예수를 상정하고(이 예수는 분명 성경의 예수와는 다른 존재임이 확실합니다.) 허구로 꾸며진 모든 내용(소설이지요)에서 이루어진 그의 삶과 정신을 본받자는 주장일 따름입니다.

☞ 반대로 이야기 하는군요.^^ 자연의 법칙과 동떨어진 거짓 예수를 몰아내고 참 예수를 따르자는 겁니다.^^

이런 소설은 이스마엘 도끼님 전문이지요. 이분의 소설이 훨씬 재미있고 오히려 본받을 것들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 오호... 놀라운데요?^^ 소설은 개독경이 소설이죠. 저는 그냥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의문 나는 내용을 물어본 것뿐인데요.^^ 야훼의 고추가 어찌해서 소설입니까? 엄연히 야훼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는데?^^ 빌립님의 주장이 소설이죠.

"야훼의 **"는 참 많이 생각하게 했습니다. 거시기에 집착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이지요.

☞ 아, 당연히 집착해야죠. 뭐든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것에 집중하고 이치를 깨달을 때 까지 파고들어야죠. 빌립님 같은 분은 안 그러기 때문에 머리가 나쁜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겠죠?^^

아뭏든 없는 예수를 두고 그 삶과 정신을 부활시키려 하시니 무척이나 고단하시겠습니다. 차라리 스승되는 부처의 삶과 정신을 따르자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겠습니다. 그는 진짜 살았던 사람입니다

☞ 오바할 필요는 없구요.^^ 예수가 존재했건 안 했건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는 뭐 빌립님을 비롯한 개독님들이 설득력이 있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

















뱀발 : 아... 참...

창진님과 빌립님 글은 쓰면서 내 질문은 또 피하는군요.

예수는 그가 죽은 다음에 왜 기적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본 기적 정도는 보여주어야 믿지요.

자...


다시 기다립니다.

빌립님, 창진님~!^^

답변 해주시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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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
참빛 (24.141.4.52)
2013-04-01 15:25:03
도끼님의 궁금증에 대하여
..

"그렇게 많은 기적을 옆에서 지켜 본 베드로도 부인하는데 왜 저를 비롯한 성도들은 아무런 기적도 보지 못한 채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몇번에 걸쳐 진짜로 이유를 알고자 하셨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나서서 설명하지 않아서
대신 제가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가뵈얍게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과연...


1. 예수 재세때 성행했던 기적적인 기사들이 사도시대까지는 계속 되었으나 그 이후 부터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나님이 기적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고 교회에서는 말합니다. 물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궁색한 변명을 당연히 알아 채지만 개독들은 모두 그 말에 아멘 합니다. 고로, 지금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의 체험을 원하시는 도끼님의 바램을 채워드릴 수 없다 합니다. 죄송~

2. 그렇게 기적체험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교회에서는 말합니다.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안고 믿는 것이 더 갚지다 라고요. 얼버무리기 식으로 시간을 우선 벌고서 질문하는 사람이 곧 잊어버린 채로 빨리 넘어가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겠죠. 죄송~

3. 기적을 체험하려면 기도원 같은 곳으로 가서 죽자살자 기도에 전념하면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고도 교회에서는 말합니다. 그 말 그대로를 믿고 시행하시면 됩니다. 산속에서 금식해 가며 나무뿌리 붙잡고 몇밤을 기도해 보세요. 정말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비몽사몽간에 뭔가 헛개비 같은 것들이 어둠속에 나타나는 것이 진짜로 보여요. 그런 기적이라도 체험하시려면 직접 기도원을 가세요. 요건 가능~

4. 마지막으로 어쩌면 베드로가 목격했던 예수의 기적들은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기적이 아닌 은유적 표현일 가능성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베드로도 기적을 보지 않았던 것이 되겠지요.


위의 네가지의 방도로써 님의 궁금증에 답변해 드렸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또 다른 내용의 재미있는 글을 써 주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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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소리 (99.111.60.193)
2013-04-01 15:05:55
부활체가 지금의 육체와 같을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이를 고민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성경내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질문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 부활을 전제로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몸의 부활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름을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천사와 같을 것이라 하셨는데 그렇다고 영의 부활로만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잠긴 문을 통해 들어오신 예수님이 못자국을 보이시며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영원히 썩지 않을 신령한 부활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육체의 부활인가 영의 부활인가를 말함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위와 같은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그리고 어느 한 선택만을 나의 이해체계의 일관성을 위해 스스로 계속 요구한다면 결국은 나 자신을 근본주의,자유주의,혹은 무신론등으로 규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부활의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저의 신앙고백은 영생의 소망이며 영원히 함께하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입니다. 그리고 오늘 목사님이 말씀하신 부분에서 또 부활의 의미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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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76.23.169.116)
2013-04-01 14:28:03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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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69.148.188.51)
2013-04-01 13:18:49
영적인 부활만? 육적인 부활도 함께!!
누가복음 24장 36-43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리플달기
1 0
Philip Im (69.148.188.51)
2013-04-01 13:22:56
이상하다
앞에 어떤 분의 글이 있어서(그 분은 영의 부활만 주장) 글을 올렸는데 바로 지워졌네요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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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36.38.199.252)
2013-04-01 00:42:42
당신의 뱃속에는 누구의 씨가 자라고 있는가?
.


소통이라는 단어는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영어의 단수와 복수의 차이와 같습니다.

여기서 야훼와 나의 관계를 설정해봅시다.
성경에서 보이는 관계는 4가지입니다.

1. 주인과 종
2. 부모와 자녀
3. 신랑과 신부(부부)
4. 친구

위의 4가지 관계는 서로 독립적입니다.
즉, 4가지의 각 관계는 서로 중첩될 수 없습니다.
흠, 3번과 4번은 특수한 경우 양립이 가능할 수 있군요.
하지만 4번의 경우는 이성 친구 보다는 동성 친구를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게다가 성경이 쓰인 당시의 개념으로 본다면 3번과 4번은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사실 예수쟁이들은 정신병자들이 대부분이라 저 위의 4가지 관계가 서로 중첩된다고 주장할 자들도 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개독님들 중 누군가는 야훼와의 관계와 소통에서 누군가는 1번을, 혹은 2번을, 혹은 3번을 나머지는 4번을 택할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건 저는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야훼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자신과의 관계설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1번과 동시에 2번을 선택한다든지, 3번과 동시에 4번을 선택한다든지, 혹은 1번, 2번, 3번을 동시에 선택한다든지 1, 2, 3, 4번을 동시에 선택한다든지 하는 정신병적 선택이 아니라면 어느 것이든 단수로 선택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개독님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논의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저 4가지가 복수 선택 될 수 있다고 믿는 자와는 논의를 거부합니다. 정신병자와 말 섞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요.

좀 말이 길었는데...

저는 야훼와 저와의 관계를 4번으로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는

1번은 내가 누구의 종으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내가 종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물론 내가 주인이고 야훼가 종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분 같아서는 야훼를 내 종으로 부리고 싶지만 저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뭐, 전지전능하다고 하고 전선하다고 하는 둥 잘난 놈을 종으로 부리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만 여하튼 그런 관계는 별 관심 없습니다.

2번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인데 이 경우는 야훼와 같이 잔인한 자를 부모로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야훼는 부모의 자격이 전혀 없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잔인하고 어리석고 게다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두고 이르는 경고는 참 야비하기까지 하죠. 이런 자가 내 부모라면 나는 천륜이라도 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야훼의 부모가 되는 것 역시 거부합니다. 저렇게 잔인한 자식은 두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손이 없이 살겠습니다.

3번은 아주 현실적인데 나는 남자라 신부 역할을 해 본 적이 없고 상상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야훼가 신부일 경우 역시 2번과 같은 이유로 거부합니다. 이런 끔찍하고 잔인한 여성을 아내로 맞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4번이 나의 선택입니다. 사실 2, 3번과 같은 이유로 친구조차 거절하고 싶지만 반드시 야훼와 관계 설정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4번을 택하겠습니다. 그래도 친구는 상대가 악하면 뺨을 때려서라도 충고할 수 있잖아요. 술도 한 잔 하면서 마음을 터놓을 수도 있고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야훼와의 관계를 4가지로 설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든 어떤 선택을 하든 상관 없습니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한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택을 하도록 4가지를 보여주었고 그 어떤 선택을 하든 자신의 자유의지기 때문입니다.

곧, 1번을 선택한 사람이 2번 혹은 3번 혹은 4번을 선택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거나 정죄하거나 재판할 권한이 없고 다른 번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4번을 선택해서 야훼 혹은 예수와는 친구 사이로 지내기에 특별히 내 친구를 숭배하거나 거룩해 할 필요나 이유를 느끼지 못 합니다. 물론 친구의 인품이 훌륭하면 존경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친구가 친구를 숭배하고 찬양하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냥 훌륭하고 좋은 친구일 뿐이죠. 친구를 숭배하고 찬양한다면 이미 친구의 관계가 깨어지는 거죠. 그리고 만약 야훼라는 친구가 그런 것을 바란다면 이미 좋은 친구를 포기하는 겁니다. 친구끼리는 그러는 거 아니니까요.

나는 여러분들이 어떤 선택을 하건 반대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선택과 다른 선택을 다른 사람이 했다고 해서 비난, 비판, 정죄, 재판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하건 존중받는 것처럼 여러분 역시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만약 1번을 선택한 사람이
“나는 야훼의 종으로 살아가는 데 너는 얼마나 교만하길래 2번을 선택하느냐 혹은 3번을 혹은 4번을 선택하느냐”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번을 선택한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야훼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자유의지 속에는 야훼와의 관계설정 역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피조물인 인간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과 같은 피조물입니다.

설사, 야훼가 피조물들이 하는 선택을 기분 나빠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야훼와 어떤 선택을 한 피조물 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다른 피조물이 또 다른 피조물에게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물어볼 어떤 권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친구를 신으로 모시는 것 역시 거부합니다. 만약 내 친구 야훼가 신이라면 나 역시 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이 아니므로 야훼 역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설사 야훼가 진짜 신이라고 해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그가 신이든 아니든 내 친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야훼가 내 친구가 되는 것은 나와의 관계 때문이지 그가 신이거나 인간이라는 조건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내 친구인 야훼를 주인으로 모시건 부모로 생각하건 남편으로 생각하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선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저 사람은 그런 선택을 했나보다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내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야훼와 나와의 사이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우리 둘 사이를 이간하고 모략하는 것은 용서하지 못 합니다.

야훼의 종으로 살건, 자녀로 살건, 아내로 살건, 친구로 살건 선택한 사람 각자의 권리를 서로 존중합시다. 종은 종노릇을 충실히 하고 자녀는 부모의 말을 잘 따르고 아내는 남편과 잘 소통하고 친구는 또 친구로서 야훼에게 충고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각자 역할에 충실합시다.

감사합니다.
















































뱀발 : 종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주인의 재산을 탐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헌금은 주님의 돈이지 당신들 먹사들의 돈이 아닙니다.

종의 본분을 지키십시오.


자녀로 살아가는 자들은 부모의 가르침을 따르고, 또한 악행을 그만

두십시오.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은 그만 두십시오.


아내로 살아가는 자들은 다른 남편인 맘몬과 바알과 그만 간통하십시오.

야훼의 아내라고 말하면서 다른 남자인 맘몬과 바알에게 몸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맘몬과 바알의 씨는 논쟁과 비판과 정죄와 반목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야훼의 씨일 뿐입니다.



.







































뱀발2 : 참빛님 제 이야기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니까요.

저는 오직 '개독'만 팹니다.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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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
참빛 (207.210.3.147)
2013-04-01 00:13:41
단도직입적으로요
신학의 불필요성을 강조하시는 분들의 심정을 이해는 충분히 합니다.
탁상공론을 끝내고 실존적인 삶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저도 실제적인 삶에 관심을 두자는 부분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인정하셔야 할 것은요.
신학적 바탕없이는 믿음의 체계가 바로 설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의 바탕은 역시 철학적 사고가 깔려야 하구요.

탄탄한 신학위에 신앙이 더욱더 영글어 가는 것이지요.
아니.. 자동차 법규없이 각자 맘대로 차선이고 뭐고 몰고 다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상한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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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박평일 (72.196.234.24)
2013-04-01 02:10:39
제가 신학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신학은 일반학문으로 써 요구되는
증명과 검증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이나 신념의 차이로 종결이 나는 것이 신학입니다.

저는 Ismail-x 님이 주장하는 네가지
신앙관에 깊은 공감을 합니다.

우주의 창조원리는 다양성 속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다양성 속에서만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자유나 사랑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이 창조원리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획일성을
강요하는데서 비롯 됐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전쟁이 그 좋은 예지요.
종교전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주보다 귀하다는 생명을 살인하고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일종의 죄악이고
범죄행위입니다.
그런 무지한 범죄행위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까? 미국에서만
2천만 명이 넘는 원주민 인디안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까?

진보적인 견해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걸어 온 길을 답습해
나간다면 폭력밖에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성은
칼보다 강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성적인 사람들 일 수록
마음이 차갑고. 폭력적이며,타협을 할 줄 모릅니다.

아주 좋은 예로 부부간 싸움을
흔이들 물로 칼베기라고 합니다.
대부분 부부싸움이 감정적인 동기에서
비롯되기 떄문에 쉽게 화해하고 아뭅니다.
.
그러나 부부간 싸움이 이성적 싸음으로 발전하게
되면 칼로 물베기가 아니라 도끼로 나무자르기로
변해 버립니다. 가정이 깨지고 맙니다.

저는 종교간 대화의 목적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눔에 있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득에는 이성적 폭력이 따르고 폭력은 전쟁이
뒷따르기 마련입니다.
.
서로 다른 의견이나 주장은 선물과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선물을 받아들이 든지,
버리든지, 변화를 받던지,
분노하던지 하는 결정은
상대편의 자유권에 속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Ismail-x 님도 말씀 하셨습니다만 예수의
열두 제자들은 3년간 예수와 동거동락을 함께 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수없는 기적을 직접 지켜보고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수에 대한 믿음고 신앙관은
각기 달랐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만 해도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죽을 때 때까지 몇 백번을 더 예수를
부인했는지는 아무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마다 그의 신앙관이 바뀌고
변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집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나 나나, 또 Ismail-x 님이나
지금의 견해나 믿음이 순간순간 변할 것입니다.
어떠한 위대한 철학이나 사상도 한 곳, 한 순간에
머물고 있으면 죽은 지식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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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
Philip Im (70.62.49.64)
2013-04-02 04:43:51
창조원리
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원리는 다양성 속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다양성 속에서만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자유나 사랑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궁금한 것은 "우주의 창조원리가 다양성 속에 있다"는 말씀의 정확한 뜻입니다. 무슨 뜻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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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박평일 (72.196.234.24)
2013-04-02 21:21:42
성경을 읽고, 기도할 필요까지 없습니다.
이 세상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면.
해답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 선생님이나,아내, 자녀들과
똑같은 분들만 존재해야 합니까?
만약, 선생님의 믿음로 그런 세상을 창조한다면
그런 세상에서 인간들이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지옥이지요.

한국에서 미국에 오는 방법이 대한항공 밖에
없고
이 세상에 한가지 꽃들, 한 가지 나무들 밖에
없다면요?
그런 세상이 천국입니까? 아니지요, 지옥이지요.
그런 세상에서 인간들이 행복은 커녕
살 수도 없지요.

선생님이 꿈꾸는 천국이 그런 곳은
아니겠지요.

진리나, 사실을 깨닫은 첫 걸음은
아무런 편견이 없이 그냥 주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원리도
세상도 보이지요. 그 있는 그대로를
감사하는 것이 신앙이고요.
리플달기
2 4
Philip Im (70.62.49.64)
2013-04-03 02:49:00
다양성 속의 통일성
감사합니다.
이제 님의 생각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창조의 원리를 다양성에만 국한한 것 같습니다.

전번에도 누군가가 말하였지만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한국에서 미국 갈 때 대한 항공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행기만 아니라 배도 있겠지요.
이 다양함을 묶어 여객 수단이라고 통일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 일어나는 다양한 것들을 묶어
어떤 법칙이니 원리니 하지 않습니까?

다양성도 인정하지만
우리는 그 다양한 것을 묶어 통일하지 않으면
생활하기가 매우 어렵지요.

이점을 사람들에게 적용해 보면
각자가 생각한대로 옳다고 주장할 때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여러 규칙들이 정해집니다.
다양한 차량들이 다양한 속도로 달려가지만
그 가운데는 일정한 규칙대로 움직입니다.

특히 도덕 윤리면에서
가장 보편 타당한 것을 찾지 않습니까?
그냥 그대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이 당당뉴스에도 댓글 쓰는데 있어서 다양성을 인정하지만
그 가운데도 규칙이 있듯이 말입니다.

우주의 창조원리 속에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상관 없이
창조 원리라 하셨으니 창조 자체를 믿는다고 가정을 하고)
는 다양함과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좁게 다양성만 보았지
넓게 통일성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통일성을 찾으려고 많이들 노력하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설정하고
폴리스에서, 그들의 신들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양한 것을 모두 품을 수 있을 만큼(통일성을 가질 만큼)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과는 배나 복숭아를 품지 못합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그 다양한 것들을
모두 품을 수 있는 통일성(진리, 원리, 법칙)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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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그건 (112.222.123.131)
2013-04-02 09:41:43
님의 성경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

남에게 묻기 전에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빌립님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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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참빛 (207.210.3.147)
2013-04-01 06:42:27
선생님 앞에만 서면 왜 이리도 초라해 지는지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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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도끼 (36.38.199.252)
2013-04-01 01:00:23
솔직히 말하면...
.


이상하다기 보다

좀 웃기는 거죠.(조롱은 아니구요^^)

상황이 재미있다는 거죠.


저 역시 피키님 글 아주 좋아합니다.


근데 그게요.

저는 저의 질문을 개독님들께 드리는 거랍니다.

물론 참빛님이 대신 말씀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제 글이 좀 장난이 많다보니 그냥 조롱한다고 여길 수도 있는데

정말 궁금한 것들이죠.

안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정말 궁금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요 부분요...

'신학적 바탕없이는 믿음의 체계가 바로 설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의 바탕은 역시 철학적 사고가 깔려야 하구요.

탄탄한 신학위에 신앙이 더욱더 영글어 가는 것이지요.'


그래요. 바로 이 부분인데...

이런 주장은 보수건 진보건 그 누구건 항상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부 자신의 신학이 바르다고 보고 있지요.

그래서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정말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볼 때 무의미 하다는 겁니다.


님이 하신 비유를 하나 더 활용할게요.

'자동차 법규없이 각자 맘대로 차선이고 뭐고 몰고 다니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이 주장 이 비유 역시 개독들도 똑같이 합니다.

차별화가 전혀 안 되는 거죠.


참빛님 같이 똑똑하신 분이라면 님의 주장에 어떤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지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
























아...


노파심에서...



자동차 법규를 만들려고 하는데 전혀 합의가 안 되어 결코 만들 수 없는

상황인 겁니다.


즉, 진행하는 신호등의 색을

어느 놈은 초록으로

어느 놈은 빨강으로

어느 놈은 노랑으로

어느 놈은 보라색으로

어느 놈은 검은색으로

어느 놈은 흰색으로....




이런 상황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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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
참빛 (207.210.3.147)
2013-04-01 01:53:00
도끼님의 말씀은 당연지당한 극도로 상식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차원에서 저의 뜻을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진리란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하여 하루하루 투자하고 배우고 가는 겁니다.
그것을 공부라고 하지요.
그래서 공부가 진리로 가는 과정이다 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신학적인 토의를 아무런 소용없다고 하는 말도 다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필요악식으로 해야합니다.
그래야 공부가 되거든요.

보수건 온건이건 자유이건 간에, 서로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신념을 발표하고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침도 주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 사는게 인생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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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Ismail-x (36.38.199.252)
2013-03-31 21:52:12
도마복음과 삽질
.



도마복음은 저도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실은 뭐 영어로 된 책도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지주인 A라는 사람이 소작농인 B라는 사람에게 봄에 땅 1만 평을 주고 각종 농기계, 비료 및 일꾼 100명을 지원해서 가을에 옥수수를 100톤 수확하라고 했고 당당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각자 땅 100평을 주고 삽 한 자루를 준 뒤 한 사람 당 200톤 혹은 100톤을 수확하라고 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참고로 B가 정상적으로 열심히 일을 했을 때 거둘 수 있는 양이 옥수수 100톤입니다)

여러분은 지주인 A의 요구가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논리, 이성, 지성, 합리성 이런 단어조차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보는 겁니다.
예수의 12제자 및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가 일으킨 수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특히 예수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예수의 기적을 가장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합니다.

저는 말입니다. 단 한 번의 기적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횡포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베드로와 같은 수의 기적을 보여줘야 평등하고 동등한 것 아닙니까?

단순한 산술로 생각합시다.

베드로와 똑같은 기적을 보았다.

이 때

1. 예수를 부인한다.
2. 예수를 믿는다.

1번일 경우 베드로와 같은 조건이므로 베드로 보다 믿음이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즉, 같은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번일 경우는 베드로 보다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 물론 나중에 뭐
‘베드로는 뉘우치고 사도로서의 역할을 다 했다.’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이 있을까봐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그런 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먼저 같은 조건으로 기적을 보여줘야죠.

저는 개인적으로 신학적 논의는 모두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적 논의에 앞서 이런 간단한 의문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슨 뭐 ‘구구단’도 못 하면서 미적분에 대한 논의를 왜 하는 겁니까?
특히, 빌립이나 창진 같은 분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옆에서 지켜 본 베드로도 부인하는데 왜 저를 비롯한 성도들은 아무런 기적도 보지 못한 채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부탁인데 성경구절 가져오지 마시고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저도 두 분 못지않게 성경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사실은 더 많이 공부했죠.

여러분 개신교인 여러분이 입만 열면 성경은 합리적이다, 이성적이다, 과학적이다, 논리적이다 이런 주장을 하시니까 충분히 성경 구절 같은 것을 가져오지 않고서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두 분 말고 다른 분도 좋습니다.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할 수 있는 분 계신가요?
진지하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곤란한 질문은 회피하기 바쁘신데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 글 다 읽으시잖아요.
당당에서 제일 재미있는 글인데 설마 못 본다고 하시지는 않으시겠죠?^^

미리 감사합니다.




.







































































































뱀발 :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죠?^^

오늘 진달래도 철쭉도 개나리도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푸른 초목과 화사한 꽃들이 함께 만발한 자연을 보며

이처럼 주님께서는 무소부재 하셔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따뜻한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우리 주님을 좁은 교회 건물에 가두고

성도들을 노예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늑대와

승냥이 무리들의 폭정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병들고, 외롭고,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고 내가 옳으니 너는 틀리니 이게 정통이니 저건

이단이니 하면서 하나님을 욕보이고 그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자들이 득시글 거리는 것을 볼 때 그저 마음 한 켠이 아려옵니다.


예수는 신학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사랑을 말씀하셨고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잠자며 그들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파는 자들은 신학이 어떠니 교리가 어떠니 이단의

구별은 어떠니 하면서 서로 손가락질 하고 싸우기 바쁩니다.



언제 이 미친 짓을 그만 둘 겁니까?

정말 궁금합니다.


.
리플달기
3 5
Philip Im (69.148.188.51)
2013-04-01 13:31:17
님의 댓글로 반론에 대신합니다.
Ismail-x (112.222.123.131)
2013-03-29 01:59:59

세상에 이단 따위는 있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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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야훼는 자지를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어느 무식한 개독놈 한 마리가 뭘 안다고 왈왈거리면서 내게 반론을 제기했는데 사실 귀찮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일일이 재반론 하지는 않았다.
리플달기
4 3
박평일 (72.196.234.24)
2013-03-31 22:51:10
100 % 동감합니다.

저도 신학은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신념에 기초한 성경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사랑이나 평화를 가져오는 학문이 아니라
미움과 다툼, 분열을 가져오는 학문이지요.

빛은 어둠과 다투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빛입니다.

목마른 이웃에게 물 한 컵을 주는 것이
지난 이천년 동안의 신학보다는 훨씬 더 값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물 한 컵은 한 사람의 생명은 살리지만
관념적인 신학은 단 한 사람의 생명도 살리지 못합니다.

신학자들, 성직자들의 배와 머리를
채워주는 것이 지금까지의 신학이었지요.

물에 빠진 자가 신학으로
살아 남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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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
이사야 (121.129.19.190)
2013-03-31 20:13:39
류 상태 목사님
주신 말씀 감사 합니다
리플달기
3 6
송창섭 (121.168.221.85)
2013-03-31 13:34:48
이것도 비평 좀...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

눅24:38-39 표준새번역
리플달기
5 3
목사 (84.101.163.12)
2013-04-02 23:14:38
실제 일어난 일인가 ? 아닌가?
살과 뼈가 있으신대
문이 닽힌 벽은 어떻게 통과 하셔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을까?
그 살과 뼈는 어떤 살과 뼈일까?
ㅋㅋㅋ
이렇게 고민하고 따지고 그러다가
귀찮타
그냥 믿어 믿어 ,,,, 그래야 할까?
생리학적이고 물리적인 실체란 촛점에만 맟추어야만 우리신앙이 성립이 될까? 그것도 참 우스운 논리...
도마에게 증언하는 부활증언의 의미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이 모여있는 문닫힌 방에 등장한 부활한예수의 등장의 의미 ..
또 여러 부활증언후 등장하였다는 이야기, 증언들의 배후에 얽혀있는 의미를 파악하면서 오늘의 설교, 선교증언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복음서의 처음증언자인 마가는 그가전한 복음서에 '예수께서는 살아나셨다'라는 소식으로 끝을 맺으며 부활한 예수는 등장하지 않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또 요한이 증언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여러번 등장의 증언은 그것을 봤다는 자들의 권위에 대한 권력적 경쟁이 담겨있는 교회의 기록이라는 요즘 연구가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증언에 대한 몸의 실체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자는 기사를
마구잡이 식으로 신앙을 파괴한다고 몰아 부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신앙이란 물질적 실체적 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물질적 실체적이 아닌것에서는 신앙이란 성립되지 않는가?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것 아님)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가르친 신앙은
기적,신비 가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고 믿을 때 신앙이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논리로 신앙을 정의한 것으로 보는데
사실 신앙이란 어떤 미래를 위해 온몸을 던지는 태도와 행위라고 보는데 그것이 옳은 신앙의 이해라고 한다면 증언된 예수의 신비, 기적, 등등을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예수와 예수기적,신비가 지향하는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통치) 를 지향하고 구현하려고 온몸을 던지는 것이 신앙이 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어떤 신비,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망상일 뿐이고 광신일 뿐입니다.
그러한 기적이 실지로 일어났고 안일어났고 논쟁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복음서 기록자들은 그걸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죠.
리플달기
1 3
이사야 (121.129.19.190)
2013-03-31 19:59:02
송 창섭 님...........
누가복음 등 사복음서는 예수 십자가 사건 70년후부터 쓰여진것입니다
70년 경과후를 유념해주시면.해답이 안될까요....평화가 함께 하시길
리플달기
2 2
참빛 (24.141.4.52)
2013-03-31 15:00:36
송선생님의 말씀에 대한 답변입니다.
1. 고전 15:50-52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2. 밷전 3:18-19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3. 고전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어찌하여 당황하느냐 라고 물으시기 전에 제자들은 유령이나 귀신으로 알고 매우 두려워 놀랐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제자들이 본 예수의 모습은 죽으실 때의 육체 그대로가 아닌 전혀 다른 육체 였다는 증거입니다. 알아보지 못하고 귀신으로 보았다고 했으니까요. 즉, 예수님은 육적인 실체의 몸이 아닌 영적인 상태로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합니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 (당황하느냐). 나는 귀신아니야! 예수라고~ 너희 선생 예수!! 의심하지 말아라. 유령이 아니라니깐! 확인해 보고 싶으냐? 그래 만져봐라, 살과 뼈가 있잖아. 나 귀신아니야. 예수란 말이다.

선생께서 적어주신 눅 24장의 말씀의 핵심은 '육체로 부활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다' 라는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을 귀신으로만 알고 전혀 못알아 보는 제자들을 향해 본인이 바로 예수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단도직입적이고도 노골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으로는 죽으시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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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송창섭 (121.168.221.85)
2013-03-31 16:50:38
표현의 차이였군요.
어쨌든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알 수 없는 영의 부활을 믿는다니 의외이면서도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몸은 분명히 '영의 몸'입니다.
몸의 부활이란 '영의 몸'으로써의 부활이구요.
참빛님의 영의 부활도 분명 이 맥락과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본문 글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몸이 아니라 삶과 정신의 부활을 말하고 있지요.
그 점이 아쉬운 것입니다.
'존재'는 3차원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실체 없는 부활에 근거한 신앙은 헛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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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예언자 (1.250.120.91)
2013-03-31 12:38:23
성경책을 한장한장 찢어봅시다.
예수는 몸이 부활하지 않았다. 도마도 손가락을 넣지 않았다.
예수의 행한 기적들, 오병이어, 나사로의 부활, 병자 치료, 술과포도주..
예수의 잉태는 동정녀에게서가 아니었다.
모세의 열재앙은 상징이다. 노아의 홍수는 국지적인 홍수이다.
아담과 하와전에 이미 사람이 있었다. 천지창조는 표현에 불과하다...
그럼 뭐하러 하나님이 필요한가요? 죽어서 천당(?)도 지옥(?)도 없고 죽으면 끝나는데...
영지주의란 육을 지배하는 영의 상태이고,
육적인 사건은 당연히 일어났다는 가정하에서 영적인 해석을 하고 믿는 것이지
영적이란 비물질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 육적인 사건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듯 한데
불교는 "무"이고 하나님은 "유"입니다.
우리가 기적이라고 말하는 육적 현상들은 영적으로 볼때 너무 쉽고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현상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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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Picky (76.23.169.116)
2013-03-31 13:51:58
불교는 "무"이고 하나님은 "유"입니다???
누구에게 불교를 배웠는고?

그리고 누구에게 성경을 배웠는고?

불교는 '무'다? 그게 불교가 가르치는 것인가? 불교가 뭔가를 가르치는 종교인가?

오히려 가르치는 그것 조차 마음에서 벗어버리라고 말하는게 불교의 가르침 아니던가?

그럼 성경은? 성경도 똑 같이 말하고 있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따르라고 예수가 말하던데...

그게 그말 아닌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자유하려면 '유'가 편한가 아니면 '무'가 편한가?

원래 無라는게 무슨 의미의 한자이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만 가지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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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
박평일 (72.196.234.24)
2013-03-31 22:15:58
저도 선생님의 견해에 공감을 합니다.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자유함은
무, 빕 속에만 가능하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차있는 공간에서는 자유가 불가능하지요.

붓다, 노자의 눈으로 보면
예수의 가르침은 보다 깊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붓다나 노자에 대한 이해도
예수의 눈으로 보면 보다 깊고,
싑게 이해할 수 있기는 마찬가지고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 조화를 이루는 관계라고 할까요.

주위에서 붓다, 노자에 대한 책을
단 한권도 직접 읽어보지 못한 분들이
일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단정적으로
말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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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
예언자 (1.250.120.91)
2013-03-31 14:15:05
무와 유
오히려 가르치는 그것 조차 마음에서 벗어버리라고 말하는게 불교의 가르침 아니던가? --- 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유)를 따르라고 예수가 말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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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참빛 (207.210.3.147)
2013-03-31 11:33:52
육체적 부활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대하여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외부로 부터 차단된 독립적 개체가 지닌 총체적인 에너지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입니다.
형체는 바뀔수 있을 지언정 에너지의 총합계는 일정합니다.

이를 우주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총 에너지는 동일합니다.
50억년 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 50억년 이후에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3차원의 세계안에 삽니다.
3차원 세계의 물질은 질량을 가지고 있고 아인스타인의 유명한 방정식에 따라 이 질량은 에너지와 정비례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저는 어렸을적 이러한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당시 저는 육체적 부활을 철떡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모든 생물이나 물질이 죽거나 소멸하게 되면 결국은 가장 작은 원소로 환원하게 되는데 이 작은 원소들이 우주로 퍼져 나아가 다른 형체의 바탕으로 다시 쓰여질 것입니다. 만약 육체부활이 현실로 이루어 진다면, 다시말해 지금껏 죽었던 모든 인류가 심판을 받기 위해 육으로 살아나게 된다면, 우주에 퍼져있던 원소들은 이미 다른 모습과 형태로 변해 있을텐데?!?

만약 그 원소들이 과거에 살았던 사람을 다시 형성시키기 위해서 모여 든다면 현재 그 원소들로 이루어진 우주안의 개체들 즉 사람이든 빌딩이든 공기이든 그 무엇이라도 다 깨어져 버리고 완전 Chaos적인 상태로 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밖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공급되어 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요.

이에 대하여 설명을 조금 더 자세히 해 보겠습니다. 500년 전에 죽은 A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몸이 썩어져서 전부 다 원소로 분해되었고 우주 전역으로 퍼져 나갔는데 그 분해된 원소의 극히 소량이 현재를 살고있는 B라는 사람의 눈동자를 이루고 있는 세포의 핵을 만드는 원소로 남아 있다고 합시다. 육체적 부활의 때에, A 라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하여 B 라는 사람의 눈동자를 형성하고 있는 원소가 빠져나가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주어야 된다는 것이 잖습니까. 그렇다면 B 라는 사람은 실명을 할 수 밖에 없겠고 연줄연줄로 해서 B 는 결국은 다 붕괴되고 맙니다. A 역시 살아 부활할 것 같지만 그도 분명 그 전에 죽었던 누군가를 살려내기 위해 붕괴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참 우스꽝 스러운 이야기로 보이지만, 육적부활의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일 것 같아서 이렇게 중구난방이나마 저의 어렸을때의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육적부활은 부활사상을 강하게 세우기 위하여 신앙의 선조들이 믿음의 고백으로써 그려낸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니까 다 할 수 있다' 라고 한다면 더이상 할 말이 없겠지만요...

부활은 영적인 부활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참 소망되신 부활의 주님을 영으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Happy E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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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
송창섭 (121.168.221.85)
2013-03-31 13:30:40
영이 뭔가요?
영이 뭔지 이성적, 과학적으로 설명 좀...
이왕이면 존재 증명까지...

과학적 근거를 동원하여 육의 부활을 부정할 정도니
충분히 답변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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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31 14:01:15
송선생님께서
제가 언제 영을 과학으로 해석할 수 있다 했던가요?
님께서 영이 무엇인지를 먼저 말씀해 보시지요.
그러면 제가 저의 나름대로의 영에 대한 답변을 드리지요.

육의 부활은 말 그대로 입니다.
육이라는 것은 질량을 소유하고 있기에 에너지로 모두 환원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육체적 부활은 우주안의 삼차원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증명하였습니다.

육의 부분을 육(과학)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매우 합당한 것이지요.
어디 잘못된 것이 있는가요?

영(믿음)의 부분을 육으로 설명해 보라고 하시니 이런 질문은 무슨 의도를 가지고 하시는 건가요?

그러지 마시고, 님께서 먼저 과학으로든 믿음으로든 영이 무엇인지를 해석을 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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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섭 (121.168.221.85)
2013-03-31 14:19:38
...
참빛님은 육의 부활이 없다는 근거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언급하셨지요.

그렇다면 믿는다는 그 영의 부활도 어떤 근거를 갖고 있을 거라 보았기 때문에

여쭈었던 것입니다.

있다면 말씀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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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31 15:55:29
영적 세계에 대하여
얼마전 수학과 교수를 지내신 어느 한 분과 영의 세계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수학을 하는데 자기가 아무리 풀어내려 하여도 답이 도저히 나오지 않는 것이 있더랍니다.
어떤 경우에는 답이 여러개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영의 세계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저는 그 머리 좋으신 분께서 어떻게 수학문제가 풀리고 않풀리고를 가지고
영의 세계의 존재여부와 연결을 시킬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참 놀랐습니다.

영의 세계는, 제 소견으로는,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세계인 것 같습니다.
순수한 믿음의 눈 없이는 영의 세계를 알 도리가 없겠지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철저하게 받고 있는 인생들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영적 세계를 무슨 수로 알수가 있겠습니까.

그 존재여부를 따지는 것도 맞지 않을 텐데요.
존재라는 말 그 자체도 삼차원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영의 세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어거스틴의 시간론을 읽고
하나님의 차원에서는 시간이 어떻게 이해되어 지겠고
인간의 차원에서는 어떻게 이해되어 지는지를 알게 되었고
매우 흥분했더랬습니다.

제 나름대로, 영의 세계란 시간을 원하는 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영적부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2 천년전 예수의 부활이 지금 나의 부활이고 예수는 매일 죽고 부활하며 나도 역시 매일 죽고 부활합니다.
이것이 제가 알고있는 영적인 부활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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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박평일 (72.196.234.24)
2013-04-01 00:45:36
2 천년전 예수의 부활이 지금 나의 부활이고 예수는 매일 죽고 부활하며 나도 역시 매일 죽고 부활합니다.
이것이 제가 알고있는 영적인 부활의 의미입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성경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야 만
옳바른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더
육적이고, 비영적인 믿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분들이 선생님과 같은 성경해석을
인본주의적 성경해석이라고 비난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도 자신들의 생각, 지식, 경험으로 성경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인본주의적이거든요.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이중 잣대로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다른 한 가지점은 신교는 인본주의시대인
르네쌍스와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중세 이전의 케토릭 시대를 신본주의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도 않다면 역사상 어느 시대가
그분들이 주장하는 이상적인 신본주의시대였는지?

역사까지 굳이 논할 것도 없겠습니다.
그분들이 주장하는 신본주의 신학에
기초한 오늘날 일부 교회들에 아무런 문제들이 없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더 싸움질도 많고 시끄럽지요.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변명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면 언제, 어디에 그런 이상적인 믿음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고 존재했었느냐고 그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분들 주장은
믿음이 부족해서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주장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아주 간단하지요.

그분들이 그런 믿음으로 물위를 걷는 모습을
직접 보여줌으로 써 자기들의 믿음을 증명하는
방법이 있겠지요.

아니면 그런 신앙관에 따르는 수만, 수십만이
모여드는 행복한 교회를 실제로 보여 주시던지.

그렇지 않다면
자기자신도 확신하고 체험해 보지 못한
공상적 궤변에 불과하지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그런 만화같은
이야기들은 쉽게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증명할 필요도,
책임질 필요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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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
박창진 (42.82.105.143)
2013-03-31 10:44:51
참 안타까운 것은...
몸의 부활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예수 정신과 예수 운동 이어가기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그 당대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실제로 몸의 부활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려고 할까요?
과학이 좀 발달한 시대에 산다는 우월의식으로 그 당대의 사람들을 그렇게 바보로 만들면 즐거운지 모르겠네요.

앞의 제 글에서도 적었지만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정직하기라도 한 것이건만.

몸의 부활과 관련하여 그 당대의 신자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문자가 자신들에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몸의 부활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고 살았던 그 당대의 신자들은 노예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였습니다.
노예 제도 자체를 거부하진 않았습니다만.
아직 그들의 의식이 그 정도로까지 깨어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 받는 자들을 생각하였습니다.

몸의 부활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며 사는 저는 이 시대에서 지금의 상태보다 더 진보한 사회를 꿈꾸며 나름대로 힘을 쏟습니다.
헌법에 담긴 정신을 지금보다 더 온전하게 실천하며 진보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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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섭 (121.168.221.85)
2013-03-31 10:30:39
실체 없는 부활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질문
예수는, 오늘, 과연 존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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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190)
2013-03-31 20:06:40
우리가자신이 하늘님도 예수도 거룩한 영이 돼야만 합니다
예수의 삶을 살고자 하는사람들을 통해서 존제하심이 안믿어진다면 할수없는 것이지요.....예수를믿는다는고백을 언제까지 해야합니까...우리들이 삶에 일부지만 예수가 돼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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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31 07:18:39
도마는 우리가 아는 '의심많은 도마'가 아니었을 수도
아래 송창섭님과 파괴 뒤 소생님께서는 도마가 직접 예수의 옆구리 창자욱에 손사락을 넣어 확인해 보았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육체적인 부활로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에 대한 저의 소견을 몇가지만 올립니다.

먼저 그 요한복음 20장의 내용은 왜 요한복음에만 있느냐는 것을 의아해 해 보신적이 없으신지요?
저는 이 부분 부터 의심하였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의 저자들은 의심많은 도마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를 말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어록과 행적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지만 요한복음은 저자가 예수의 말이나 행적보다는 그가 누구인가 즉 신학적인 견해를 펼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다 아실 것입니다. 왜 공관복음에 없는 내용이 요한복음에는 나오는가요?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었다면,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적고 있는 공관복음의 세명의 저자들이 모두 다 놓친 이유가 있을까요?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도마를 끌어들여 이용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석이조의 역활을 톡톡히 보게되는 구절을 쓰게 되는 것이겠지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확증하고 도마의 믿음없음을 확인시켜서
도마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적인 사상의 다른 분파들을 폄하시키는데 금상첨화이었겠지요.
도마를 형편없는 놈으로 비하시키는데 제격이 되는 것이지요.

요한복음에 반하여 도마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진술을 합니다.
여러 비밀스러운 것을 예수는 도마에게만 개인적으로 해 주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마를 예수가 최고 신뢰하는 제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Peter나 James를 중심으로 하는 무리와 도마를 따르는 무리 사이의 갈등에서
Peter파가 최종적으로 이겼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기자는 그러한 내용을 당당하게 썻지는 않았을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웅에게는 늘 전설이나 설화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죽은 후에 삼천마리의 학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김일성의 시신을 모셔가려 하였으나 인민들이 너무나도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보고 학들도 모두 슬퍼 울며 그 분을 그냥 두고 돌아갔다고 인민들에게 공개방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북한 인민들 가운데 그러한 황당무개한 방송을 듣고도 반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사람을 기리기 위한 설화를 말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기에 그대로 받고 아무도 거기에 반박을 가하지 않는 것이지요.

본문에서도 언급한대로, 예수가 죽으신 후에 약 20-40년 후에야 신약이 처음으로 쓰여졌는데 사람들에게 특히 감정적인 충격이나 정신적인 쇼크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믿으려고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False Memory가 작동할 수 있듯이 너무나 훌륭한 분을 기억하며 성서를 써가는 과정에 과장을 섞음 설화를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연스럽게 성서내용에 첨가 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모로 보아,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의 '의심많은 도마'의 내용은 실제가 아닌 설화였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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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파괴 뒤 소생 (183.90.149.39)
2013-03-31 10:27:30
도마가 접촉하고 경험한 것이 과연 육체에 남겨진 상처 뿐이었을까요?

요한복음의 도마는 폄하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경험을 확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만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상 보고서 믿었다는 점에서 다른 제자들도 도마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도마가 좀 더 분명하려했다 뿐이지요.)

물론 도마가 왜 그 사건의 등장인물로 되어있냐는 점에선 말하신대로 고려해볼만 하다고 봅니다.
참빛님의 주장을 좀 가져다 쓰자면, 당시 몸의 부활을 소홀하게 여기는 측에서 도마를 끌어들이니, 요한복음의 기자가 다른 것들과 함께 교정하는 차원에서 도마를 선택했을 것 같이는 보입니다.

참고로 전 도마복음을 신뢰하지 않구요. 그리고 동양적이라는 것도 뭔지 잘 모르겠네요. 뭘까요? 동양적이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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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31 11:26:43
진지한 말씀에
감사를 올립니다.
동양적이라는 것은 말로써 설명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동양 고전을 많이 읽어 보시라는 것 외에 따로 어떻게 말씀드리기가 난해합니다.

우리가 아는 '정'과 '한'을 서양인이 알 것 같은가요?
노자 사상을 철학을 모르는 평범한 서양인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원래 히브리인의 사고체계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헬라적 사고 보다는 현실에 철저한 동양의 것과 더 유사하였다는 것은 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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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Picky (76.23.169.116)
2013-03-31 13:38:15
동양적이라는 것은 말로써 설명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참빛님,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은 말로 설명하려는 순간 아미 정답이 아닌 것입니다.

그게 서양과 동양의 차이입니다.

아래에 보니 노자가 어쩌고 동양의 정과 한을 서양인도 표현한다는 분까지 계십니다. 심지어는 신학적 용어인 '텍스트'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 노자의 사상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분도 있구요.

이런 분들하고 동양사상을 얘기할 수는 없지 않나요?

논리학과 분석학을 배우고 변증법과 수사학만 배운 사람들과 어찌 도덕경을 논하겠으며 어찌 서경속의 인간사를 논하겠는지요?

그런 사람들의 눈으로 어찌 구약의 기자들이 보여준 세상의 이치를 발견하겠는지요?

유대인이 동양인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대화도 가능한 것입니다.

안 그런가요?

동사양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차이가` 뭔지를 경험해 보지 못한 까닭인데 굳이 여기서 그 차이를 설명하려는 헛수골랑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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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
파괴 뒤 소생 (123.141.95.237)
2013-04-01 22:23:10
이건 뭐...
뜬구름 잡는 소리로 인신공격할 시간에 논증하는 편이 더 나을텐데요? 논증이 힘들다면, 그 이유를 논증하면 됩니다. 주화입마 걸린 듯한 발언은 집에 가서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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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참빛 (24.141.4.52)
2013-03-31 13:49:52
사실 황당함을 금할길이 없지만... 그래도 진지함이 조금은 있어 보이길래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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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1.250.120.91)
2013-03-31 13:06:41
동 서양의 차이?
우리의 "정"과 "한"을 서양인도 알고 표현합니다.
노자사상은 철학을 모르는 평범한 동양인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아시아 국가죠? 히브리인, 아랍인 모두 아시아인입니다.
아니 어쩌면 동양인이니 서양인이니 구별이 없다는 말이 더 맞습니다.
똑같은 하나의 인간이며 한 조상의 분파이며 지금은 퓨전화 되고있습니다.
호랑이를 바다에서 만나기 쉬울까요? 산에서 만나기 쉬울까요?
예수를 알기위해 금강경, 화엄경 다 외우고 선방에서 선문답도 하며 공자, 맹자, 노자, 순자 다 일고 분석하고 코란과 탈무드를 파헤치며 살아야겠죠..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보고 석가의 고뇌와 해탈을 라마들과 함께 겪어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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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1
참빛 (24.141.4.52)
2013-03-31 13:33:48
예언자님의 말씀은
표면적으로 일리가 있어 보이나 맞는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한가지 동의하는 것은 현대로 접어 들면서 동서양의 교류가 많아 짐으로 인한 퓨전현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서양인들 중에 우리의 정을 알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애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지 어려서 부터 부모나 사회로 부터 받음 무의식 가운데 형성된 개념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동서양의 차이는 엄격하게 다릅니다. 요즈음도 동양인과 서양인의 생각의 차이가 엄청납니다. 이러한 동서양의 사고체계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 지고 있는데 놀랍게도 너무나도 다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연속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 왕래가 드물었던 몇 백년전이나 몇 천년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님께서는 설마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체계가 같다고 정말 그렇게 믿으시는 건가요?

예외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예외를 들고서 반증을 하시면 안됩니다.

전체적이고 대다수의 확률적인 내용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논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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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2
파괴 뒤 소생 (183.90.149.39)
2013-03-31 12:53:58
아... 질문이 보여서 댓글을 다시 답니다.
음... 애매하네요. 예시로 드신 정과 한은 분명하게 합의된 개념도 아니라서 사람마다 말이 다르고, 노자 사상 역시 텍스트를 읽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제대로 이해하진 못할 듯 합니다.

그리고 언급하신대로 동양인 조차 동양 고전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동양적인 것의 실체란 건 여전히 불분명하게 느껴지네요.

히브리인들의 사고체계가 헬라의 철학적 사유와는 좀 달라보이는 건, 아마도 체계화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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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31 07:57:39
참빛님
여기에 비평학 강의 코너를 하나 차리시죠.

참 자~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간음한 여인을 놓고 죄있는 자는 돌로 치라고 예수가 말하는 사건이 있죠. 이것도 원래에는 요한복음에 없는 내용이죠.

그런데 왜 이게 나중에 들어갔을까요?

게다가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도 요한복음에만 있죠.

이건 또 왜일까요?

님이 언급한 Proto-Orthodox와 다른 sect의 교리적 차이를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런 이유에서 요한복음은 정경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거구요.

도마가 의심많은 제자라는 생각을 주입하기 전에 성경을 읽으면 도마는 실증주의적 이성을 지니고 있는 아주 똑똑한 제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교인이 싫었던게죠.

그리고 바로 선전정책을 동원해서 교인들에게 도마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집어넣기 시작합니다.

부활신앙?

이건 완전히 바울의 작품입니다.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오직 바울만이 부활을 강조하면서 부활의 예수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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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 뒤 소생 (183.90.149.39)
2013-03-31 04:41:19
몸이란 대체 뭘까요? 가시적인 육체? 관계적인 신체? 어떤 기관? 연장된 부위?

종종 회자되는 예수가 어떤 정신적인 유형으로써 특정 집단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관점은, 현대인에게 적당히 받아들여질 수는 있겠지만, 역시 텍스트와는 잘 맞지도 않고,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아 보입니다.

애초에 몸을 버려둔 채, 정신만을 가지고서 삶을 말한다는 것 자체도 환상이고요.

텍스트에 기록된 도마가 경험한 것, 그를 직접적으로 자극한 것이 예수의 육체였다는 건 특기할만 합니다. 그는 경험 가능한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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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섭 (121.168.221.85)
2013-03-31 00:07:26
신영지주의에서 벗어나시길...
그런 다음에,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20:27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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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31 03:04:45
영지주의가 뭔지 알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도마가 의심 많은 제자로 보이십니까?

교회가 그렇게 가르친 것이죠.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신영지주의? 원래 영지주의는 정통주의 속에 숨어서 지금까지 기독교에 항상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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