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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고난신앙에서 벗어나기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3월 24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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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3월 23일 (토) 07:50:05
최종편집 : 2013년 03월 23일 (토) 12:57:44 [조회수 : 3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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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다는 기록에 따라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이 날로부터 닷새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교회는 이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정하여 지켜왔습니다. 하여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의미에 대해 교우님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1. 고난 자체에 의미를 두어선 안 되겠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사순절 특히 고난주간에 예수님께서 받으신 수난에 동참한다며 스스로 고통 받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자기 몸을 의자에 꽁꽁 묶거나 못을 박은 방석에 앉아 고통을 체험하는 수도사들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십자가에 누워 직접 손과 발에 못을 박으며 예수님의 수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독실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체험이, 그리스도의 수난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직접 느껴보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면 나름대로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고난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신앙수련이 과연 하나님과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만일 어느 자식이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해 보겠다며 자신의 몸을 해치고 굶는다면 부모 마음이 어떠실까요?

자식이 이유 없이 고난 받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물론이고 예수님도 우리가 가능하면 고난 받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꼭 필요하지만, “나도 고난을 체험하거나 금식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부담은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수련에 전념하는 수도사들이 고난주간 일주일이나 사순절 내내 금식기도를 하는 건 의미가 있습니다. 농경사회의 농한기라면 일반 교우님들도 그런 신앙수련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직장생활로 바쁜 현대 사회에서 교우님들이 무리하게 금식하며 기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적 열정이 이웃에게 누가 된다면 절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평화를 준다 하더라도, 몸이 지쳐 직장 일을 제대로 감내하지 못하면 직장 동료에게 폐가 됩니다. 신앙의 자유를 누리되 이웃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이며 도리입니다.

대학 시절, 저는 주님의 고난에 참여해 보려는 마음으로 사흘간의 금식기도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일주일이나 사십일 동안 금식하는 분도 있는데 사흘을 견디지 못하다니...”라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의 부담을 안고 살았습니다.

영락교회 교구전도사로 일하던 1984년 여름, 다음 해가 되면 목사 안수를 받고 새로운 임지로 떠나야했던 저는 동기 전도사들과 영락교회 원로목사이자 한국교회의 큰 어르신으로 존경받는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교회를 떠나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 목회에 대한 가르침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전도사들이 여러 질문을 드렸고 목사님은 자세히 도움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는 목사님께 금식기도를 얼마나 하셨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저는 오랫동안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글쎄요, 금식은... 제가 육이오 때 하룬가 했나 안했나... 그게 전부올시다.” 웃으시며 말씀하시는 목사님의 인자한 얼굴을 뵈며 저는 속으로 이렇게 쾌재를 불렀습니다. “아, 이젠 됐다. 한경직 목사님도 하룬가 하셨을까 말까한 금식기도를 나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나 더 하지 않았던가...”

부모에 대한 가장 큰 효도는 무언가를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잘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가장 큰 효도도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고난을 자처할 필요가 없습니다.


2 배타 신앙과 공격적 선교로 받는 비난은 예수님의 고난과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딸 아들로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경우입니다. 다음은 그에 대하여 복음서에 기록된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조금 길지만 함께 나누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마태복음 5:1~12, 공동번역).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산상수훈의 첫 말씀으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여덟가지 행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조금 달리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누가복음 6:20~26, 공동번역)

마태의 기록이 주로 ‘마음의 행복’에 관한 것이라면 누가의 기록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할 평화와 행복’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의 조건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등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지금 우는 사람’이라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편지에서 말씀드렸듯이, 복음서는 여러 전승을 통해 전해진 기록을 기초자료로 사용했기에, 복음서마다 또는 한 복음서 안에서도 상이하거나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 중 어느 한 쪽만 맞고 다른 쪽은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선택의 문제라기보다는 조화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마음의 행복을 강조하는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참다운 영성을, 또한 사회 정의를 강조하는 누가복음에서는 기독교가 갖는 큰 장점이자 매력인 사회성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성과 사회성이 조화된 신앙, 이것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교우님들은 누가복음보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설교자들도 마태복음의 말씀을 압도적으로 많이 인용합니다. 왜 그럴까요? 신약성서에서 제일 먼저 배치되었기에 마태복음이 복음서를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거나, 마태복음이 산상수훈을 가장 자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도 원인의 하나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끌어안는 누가복음의 생생한 말씀이 한국 교회 강단에서 적극적으로 선포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교회가 소외된 이웃을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보다, 현세에서도 복을 주고 나중에 우리를 저 천국으로 인도하실 ‘만복의 근원 예수님’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더욱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누가복음의 후반부 말씀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과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기득권 계층을 대비시켜 소외계층에게는 행복을, 기득권 계층에게는 가혹하리만큼 불행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당시에 예수님을,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하러 오신 혁명가로 이해한 제자들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우주만물이 조화를 이루듯이 이 땅에서도 공평과 정의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세계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교우님 중에는 이 말씀을, 열심히 전도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길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며 안하무인으로 전하는 전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신앙의 진정성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무례한 행동과 언어로 오는 주변의 비난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고 슬퍼집니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교회들이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은 예수님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배타적 교리에 근거한 독선적 신앙과 공격적인 선교로 인해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3.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배타 신앙과 무례한 전도로 인한 사회의 비난을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처럼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이고, 소외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며 그들을 고통스런 삶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인해 핍박이 올 때 기꺼이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한국 교회의 선교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리를 전하는 선교에서 사랑을 전하는 선교로, 이웃의 삶과 문화를 부정하고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는 선교에서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삶의 자리가 개선되도록 도움을 주는 선교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 억눌리고 고통 받는 이웃을 해방하는 선교, 이 땅에서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와 공평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선교로 방향을 바꾼다면, 우리 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며,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웃들도 다시 우리 기독교와 교회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하여 교우님들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이웃들로부터 “우리 동네에 교회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큰 교회로 성장 시키겠다.”는 생각을 혹 갖고 계셨다면 제발 그 생각을 포기해 주시고 “우리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교회로 만들겠다.”는 새로운 비전을 가져 주십시오.

부정부패를 일삼던 일부 못된 정치인들이 교회가 무서워 더 이상 비리를 저지르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건전한 경제활동에 힘쓰기보다 부동산 투자로 떼돈을 벌고, 임금을 착취하여 불로소득을 챙기는 일부 그릇된 경제인들이 교회가 무서워 더 이상 불법을 저지를 수 없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 한국 교회가 무서워서 정부가 국민들을 제대로 섬길 수밖에 없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힘써 노력해 주십시오.

하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분들에게는 언제든지 위로와 희망이 되는 교회, 그래서 언제라도 따뜻하게 안길 수 있는 그런 교회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다가 핍박이 오고 고난을 받게 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런 핍박을 받으셨으며,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 등 하나님의 위대한 예언자들도 그런 고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종교와 민족의 구별 없이 모든 인류가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함께 평화를 누리며,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의미 없는 맹목적 고난신앙이나, 배타 교리에 의해 왜곡된 고난신앙을 반드시 넘어서고 극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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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삶니다 (211.218.123.176)
2013-03-30 13:20:16
역설만을 진리로 오인하는 현대판 이사야
진리를 불의로, 관념을 개악의 적으로,아멘을 아니요로,부정하고 기독교를 개독교로, 목사를 먹사로,폄하 하는 현대판 가짜 이사야는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가 아닌가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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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공동번역 (24.36.119.34)
2013-03-30 00:37:25
제목이...
누가 왜곡되었는지.....
왜 공동번역을 써야 하는지....
아무튼 희안한 세상입니다.
편안하게 학교에 있었으면서,
현장에서 고생하며,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책상머리 생각으로 ....
아무튼 고생을 좀 더 해야 그 의미를 알겠지요.
세상은 당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데,
요즘은 이런 사람 뵙기가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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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개혁본부 (61.108.182.10)
2013-03-26 10:05:12
제가 그동안 종교매체및 일반매체 2~3곳
종교 TV 1곳 의 기자님들과 미팅을 하였습니다.
공중파는 통화만 하였습니다.

제가그들과 같이 고민하고 파악한 것은 다 알다시피 두가지 입니다.

류상태 는 누구인가? 또한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떻한가?
당당뉴스는 어떤매체 이고 밖에서 볼때의 평가는 어떻한가?

물론 노~코멘트 하겟습니다만...

한가지! 당당이나 류상태씨 는 진정한 주님과의 대화~ 고요한 새벽에
꼭! 하시기 바랍니다.

혹자들은 매스컴이 뭘 필요로 하는지 잘 알기에 한번 튀어볼려고
눈에뛰는 짓들을 골라서 행동합니다.

그런사람 없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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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
이사야 (121.129.19.190)
2013-03-28 04:18:57
개혁본부는 누구인가
개혁이 아닌 개악 일뿐이고 관념적 신앙의 원조이며 이땅에 개독교인 중 대표일 뿐이다...그대는 예수를 그만 믿고 예수를 살아 살아서 예수를 향한 믿음에 진정성을 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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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이사야 (121.129.19.190)
2013-03-25 23:16:56
모든 목자들이 이와 같아라
아멘 아멘.......아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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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Philip Im (70.62.49.64)
2013-03-24 05:30:23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의 죄 때문임을 잠시 잊어버린다면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됩니다. 이 땅위에서의 잠간 누리는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영생 얻기 위하여 상고한 그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곧 그리스도인들이 어찌하여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0-23)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 곧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의 고난(마26:39)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할 일입니다.




이 땅위에서 정의,평화를 이루고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노력이 없어서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님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삶에는 행복이 영원히 머무르지 않음을 잘 압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고자하는 하늘나라도 잠간 비취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목표로 삼고 하나님 주시는 위로 안에서 이 땅 위에서 받는 고난 가운데 평강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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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박평일 (72.196.234.24)
2013-03-24 15:58:17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천국에 대한 기술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각기 다른점,
그리고 선생님이 직접 체험하신
천국의 모습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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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Philip Im (70.62.49.64)
2013-03-27 03:07:41
회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저는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평범한 그리스도인임을 먼저 밝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제가 배우고 깨닫고 믿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세상 나라의 3요소를 잘 아실 것입니다.
비록 미국에 산다 할지라도 한국 시민이면 한국인으로서의 주권을 가지고 한국의 법 통치 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살기 때문에 미국법에 영향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면 이 땅의 영향도 받지만 하나님 나라의 주권에 따른 하나님의 법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주권이 통치하는 그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믿습니다.
제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살아간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곳입니다.
당당뉴스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향 아래 있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곳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곳에 없습니다.

마음이(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법)에 따른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른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자는(아마도 이런 자들은 자신의 의를 믿는 자들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의 말씀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관점의 차이라고 믿습니다.
마태는 영적인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의 종교성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지적하는 쪽으로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5:20)

반면에 누가는 약자에 관심이 많은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이 땅에서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완전히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 나라로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이 땅에 그림자로 비취는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약자로서 가난한 자들에게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부자로 대표되는 불의에 대하여 가난한 자로 대표되는 의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제가 체험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는 제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쓰고 싶습니다.

부끄럽지만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괴로운 가운데서도 소망을 갖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제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이것이 제가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마약과 술과 담배 등을 인생을 즐길 뿐만 아니라 잠시의 괴로움을 잊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얼마나 좋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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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3-24 02:47:49
배타 신앙과 공격적 선교로 받는 비난은 예수님의 고난과 관계가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 또한 배타적이셨습니다.
왜 유대인, 유대교에 대하여 그렇게 비판적이셨습니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왜?
예수님이 절대적이신 분으로서 자기를 섬겨야 하는데 알지 못하고 멸시하고 있으니까요.
바리새인들이 외식적이라고 비난하는 그 배경은 예수님 곧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을 가리킴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동일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 정신으로 타 종교까지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정신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타 종교를 비난했기 때문에 고난 받으신 예수님, 더 본질적으로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 민족, 타 종교를 떠나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마음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저들이 도끼들고 날뛴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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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3-24 02:15:30
고난 자체에 의미를 두어선 안된다.
예수님의 사역 중 특별히 십자가의 고난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그 의미는 우리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다만 '고난 자체' 즉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여 어떤 고난의 행위를 하는 것은 저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힘든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어떤 어려운 일을 하면서 그 일을 극복해 나가면 부모가 마음은 아플 수 있지만 오히려 더욱 뿌듯한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무엇보다 우리를 위하심을 생각하며 고난에 동참하는 행위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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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28 12:21:45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하하하하

이게 무슨 말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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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23 14:48:21
기독교의 교리가 배타적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배타적이었죠?

처음부터 아니면 나중에?

그것을 이제는 밝혀야죠. 그래야 바른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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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3-25 20:50:18
비단 기도교뿐 아니라 중동에서 나온
유일 신을 믿는 유태교, 모슬람교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습니다.
제 나름 데로 생각은 가지고 있읍니다만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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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27 08:29:22
지금에서야 보았습니다.
이 문제는 종교학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설명을 하지요.

지금 지구에 존재하는 종교들 가운데 유일신관을 가지고 있는 종교는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하는 종교입니다. 이 사실을 직시하면 답이 그리 복잡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기원을 가지고 유대교를 파고 들어가면 어느 정도의 답은 나옵니다.

학계에서도 유대민족의 기원도 아직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추측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추측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유일신관이 그들에게 왜 필요했었냐겠죠. 유대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다신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그들은 너무 약소한 민족이었죠. 그리고 그 당시의 유물을 보아도 유대인들을 다신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뿌리치고자 하는 저자의 염원이 담겨있다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는 주장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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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9 14:17:26
유대인의 기원에 대한 연구의 결과가 몇년전에 발표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100개 이상의 DNA 샘플을 이용한 연구를 통해 몇가지 추정하였던 일들이 있었는데 적어 봅니다.

1. 과거에 난무했던 여러가지의 설을 정리하고 가능성을 좁혀 주었다. (어떤이는 유대인의 기원은 인도다 라고 주장하였음)

2. 레바논과 시라아에 살고 있는 드루즈인들과 사이프러스인들의 NDA를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이 내려졌고요.

3. 목축을 하며 살던 사막지역의 베도우인의 DNA도 약간 섞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싸이프러스인과 베도우인의 피를 받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원주민들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피키님 말씀대로 왜 유일신 사상이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인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앞으로 필요하겠지만, 저는 지금으로서 몇몇 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에스라를 중심으로 그들의 성경을 편집할 때에 고안해 내어 성경에 삽입한 내용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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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29 21:18:27
맞습니다.
인류학적인 측면에서 연구된 결과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언어학자들이 언어의 기원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인류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또 나름대로의 연구를 하면서 자기들만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있죠.

그런데 문제는 이런 연구들이 서로 상호교류를 통해 어떤 합일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학문간의 통섭이 거론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좀 더 활발하게 협력 연구가 이루어지는 때가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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