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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슬퍼하고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2월 24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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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2월 23일 (토) 07:52:38
최종편집 : 2013년 02월 23일 (토) 20:44:59 [조회수 : 3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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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긍정의 힘’에 담긴 함정에 대하여

   
▲ 류상태 목사
우리 한국 교회 강단에서는,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하는 설교가 자주 선포됩니다. 하지만 슬퍼하고 고민하는 신앙과 삶을 더불어 강조하시는 목사님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이 슬퍼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설교하시는 목사님이나 그렇게 생각하시는 교우님들도 가끔 만납니다. 물론 기쁨과 감사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면 감사와 기쁨이 절로 우러납니다. 하지만 그 기쁨과 감사가 왜곡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자신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악과 모순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고 세상에 악과 모순이 존재하는데도 슬퍼할 줄 모르고 오직 기뻐하기만 한다면, 그건 믿음이 성숙하지 못했거나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교우님들께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둡고 칙칙한 감옥이 바울이 누리는 영적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환경을 초월한 기쁨’이 바울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도 영적인 기쁨을 누렸던 사도 바울은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로마서 12:15, 공동번역)라고 권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4. 개역성경에는 “애통해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도 세상의 불의와 모순에 대해 슬퍼하며, 또한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면서도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웃들과 함께 울며 애통해하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특히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무책임한 낙천주의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순이나 갈등, 아픔에 대해 같이 아파하고 그 모순이나 갈등을 극복해서 다 같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 애쓰기보다, 그것을 피해가거나 외면하고, 또는 그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편리한 삶만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낙천주의자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2. 슬픔과 고뇌가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 주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고민하고 슬퍼하셨으며, 우셨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밤을 새고 기도하며 고민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평생 웃지 않고 사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가난하고 억눌린 이웃들과 어울려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시고 함께 웃으시며 먹고 마시기를 즐겨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뻐하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성서기자들과 편집자들은 그런 듣기 좋고 보기 좋은 모습보다 오히려 주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시는 장면들을 더 많이 기록으로 남겼을까요?

그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의미가 슬픔과 고난에서 출발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앙과 삶도 중요하지만, 어둠의 세력이 여전히 뿜어내는 모순과 불의를 극복하고 만 백성이 함께 누리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복음의 정신이라고 생각했기에, 우리 주님의 고난의 삶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그렇게 고뇌하며 슬퍼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못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 하며, 어둠의 세력과 싸워 이기고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눈물 흘리신 우리 주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고뇌하며 울 줄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선각자들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받아야 하는 그런 고통과 슬픔에 직면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가진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멸망을 예고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방탕한 삶을 사는 동족을 향해 이방족속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할 수밖에 없었던 이 고독하고 슬픈 예언자를 향해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매국노라고 욕하며 거짓선지자라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부딪쳐오는 핍박과 고통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예레미야는 차라리 예언자직을 내려놓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며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레미야는 고난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고난과 핍박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하여 위대한 선지자의 반열에 올라 지금까지 우리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산적인 고민,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이웃에 대한 짙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슬픔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민중교회를 비롯하여 일부 열린 교회들이 생명평화 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세상에 평화를 심으며 헐벗고 고난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울고 아파하는 그 아름다운 교회들을 외면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불편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우리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 주십시오.

요즘 우리 기독교인과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존경은커녕 비난을 사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인터넷에는 많은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존재합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교회를 비난하는 분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교회가 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자기 신념에 대한 지나친 확신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회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난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우리가 잘 새겨듣고 뼈저리게 반성할 부분도 적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십자가가 있었기에 영광의 부활이 있는 것이며, 부활의 영광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의미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고난과 영광,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고난과 기쁨, 고뇌와 감사, 이 두 요소가 우리의 삶 가운데 조화를 이루어야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교우님들은 어떠십니까? 우리 주님의 은총과 사랑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동시에, 본래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된 이 세상의 질서가 하나님을 떠나 제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답게 온전한 모습으로 성화되어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뇌하며 아파하고 계십니까?

한국 교회와 교우님들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 못지않게, 고민하고 슬퍼하는 삶도 살아주십시오. 생산적인 고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그런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산적인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생각하고 기뻐하며 찬양한다면,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균형과 조화가 무너진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기도 열심히 하시는 교우님들께 부탁드립니다. 교우님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따뜻해 질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주위에 여전히 남아있는 모순과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도 알고, 우는 이웃들과 함께 울 줄도 아는 진정한 예수사람이 되어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은 우리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해달라고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동참하며, 우리의 신앙 이대로 좋은지 함께 고민하며 돌아보시는 뜻 깊은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 Michelangelo, 1512, Sistine Cha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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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138)
2013-02-24 20:18:11
이땅에 기독교 와 목사들이
제할일을 하고있을까요...그저 믿으면<교회생활열심> 된다는 단순한 장사 논리가 이땅에서 자칭 기독인들에게 80% 통한다는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힘니다...믿으면 되고 기도하면되고 교회다니면되고 십일조및 20여가지 헌금에 열심히 동참하면되고...ㅎㅎ...교리에 억매여 혹 두려워서 먹사도 도망가고 신학교수도 도망가고 그시대 천덕꾸러기 사마리아 사람만이..예수를 돌봄니다...예수는 늘 슬퍼하고 고민했습니다 그 시대 잘못된 하느님을 약한자와 천대받는자를 통해 하느님답게 하셨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큰아들과 작은 아들의 불순종과 순종을 통해 바리세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셨습니다...........그런데 이땅에 기독교와 목사들이 그런 잘못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며 미친 개수작들을 떨고있다는 것입니다
류 상태 목사님 님의 고통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가 조롱의 대상이 됐듯이 류 목사님도 그런 상황 이겠지요
교단에서 찍어 내침을 당하시고 좀 알고 느낀다는 목사님들도 침묵하며 입다물고....그러나 목사님 평범한 교우들이 목사님께 침묵의 박수를 보내며 이땅에 기독교의 희망을 만들어 가고있습니다
인생이 80이요 강건하면 90입니다...그냥 세상을 사는동안 그분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십시요...순수하신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여 애 쓰시는 목사님께..주님의 모습을 봄니다...평화가 함께 하소서
슬퍼하며 고민하겠습니다...그리고 오로지 실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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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02 09:52:12
마음을 울리는 글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놓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 예수님은 그들의 어떤 모습을 칭찬하십니다.
사도적 복음과 다른 그 당대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들이 받은 책망은 처음 사랑을 저버렸다는 것이었고 회개하지 않으면 주 예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촛대를 옮기신다는 것은 주 예수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신 손을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의 모습은 교리 사수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후자의 모습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주 예수님은 전자도 중요하고 후자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이 부분에 대해 언제나 깊이 인식하고 벗어나지 않으려고 힘을 쏟고 있습니다.

저는 류상태 목사님의 전자에 관한 입장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늘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글을 접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예수 동아리 교회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언제나 강건하시고 교회를 교회답게 세움에 있어서 필요한 내용의 글을 지속적으로 적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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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170.20.186.188)
2013-02-26 03:16:49
항상 듣는 말이지만
먹사들의 부패에 대하여 비난하면 기독교인들은 모든 목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그렇죠. 모든 먹사들이 다 그랬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거죠.

그러나 표본은 전체를 대표한다는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제도화된 기독교 내에서 그런대로 성실한 목사라고 부를만한 목사가 보인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목사의 기본적 인격이 그 정도까지 다다를 정도라는 것을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존경받고 신실한 목사가 있다면 그런 목사는 목사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 종사하였더라도 동일한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인간의 인격을 변화시킨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기독교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개차반으로 살던 사람이 교회를 다니면서 인격적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와 같은 타종교에 귀의했어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즉, 기독교라는 특정종교가 아니라 종교가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경건함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에 변화가 있는 것이지 기독교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런 사실은 통계를 보아도 쉽게 증명이 됩니다.

한국의 재소자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율이 우리나라 전체 국민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율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몇 년전에 미남가주의 한인 재소자를 놓고 조사한 통계자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욕의 한인기독교인의 비율은 70% 정도가 넘는다는 통계가 있었는데 뉴욕에 가면 한인타운에 늘어나는 것은 술집이요 노래방이요 룸싸롱입니다.

이런 유흥업이 늘어나는만큼 교회도 늘어납니다.

이런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지요?

약 십오년전에 제가 뉴욕북부에서 장기간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다니던 한인교회가 발칵 뒤집혀진 적이 있습니다. 교인이 약 200명 정도되는 작은 교회인데 그 교회에 수십년 다니던 집사가 장로를 포함해 교인 몇 가정과 계를 만들어 계주를 하다가 곗돈 수십만불을 가지고 도망간 것이죠.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그때까지는 그 계주가 무슨 비즈니스를 하였는지 아무도 몰랐다가 계주를 추적하느라 돈을 떼인 교인들이 여기저기 수소문 한 결과 그 계주가 동양인 여성들을 모아서 성매매 영업을 하는 소위 포주였다는 것이죠.

이런 일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뉴욕에서 가장 큰 교회의 장로가 예배가 끝나고 헌금을 계수하는 작업중에 혼자 있는 틈을 타서 헌금봉투를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이 감시카메라에 직통으로 걸려서 교회에서 쫓겨난 사건이 있었죠.

그런데 이런 사건들은 교회가 덕이되지 않는다는 이유때문에 조용히 처리하거나 쉬쉬하지만 결국은 다 알려지게 되어있습니다.

교회란 곳을 뒤집어 까보면 정말로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죠.

물론 교회 생활을 몇년 하지 않은 교인이나 그냥 겉으로만 교회를 다니는 평범한 교인들은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릅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러죠. 이런 비윤리적인 사건은 아주 드문 일이라고.

웃기지 말라고 하세요.

목사보기에 챙피하다고 교인들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을 목사에게 쉬쉬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부터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된 사람들은 양쪽에 다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에 교회내의 썩은 냄새들이 어디서 나는지 다 압니다.

제가 있던 교회에서는 성가대 지휘자가 새로 왔는데 성가대원 가운데 음악을 전공하는 몇몇 교인들이 지휘자의 실력이 형편없는데 어떻게 저런 수준의 지휘자를 구했는지 목사의 인사행정에 불만을 가지고 저에게 하소연을 하고 목사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른채 시간만 나면 지휘자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바쁘고.

별별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개독들 때문에 극소수의 신실한 교인들이 욕을 먹는 것이지 그 반대라고 착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작년에 어떤 먹사가 쓴 글을 읽고서 박장대소를 하였습니다.

그 먹사 왈 "개신교가 이 사회의 비영리적인 목적으로 복지분야에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지 아냐? 이것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복지행정 수준은 완전히 바닥이었을 것이다."

이 개념없는 넘의 먹사가 돈 자랑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개독교가 먹여 살리고 있다고 찪가을 하는 것인지 뭇음만 나더라고요.

세금 한 푼도 내지 않는 먹사 입에서 저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뇌아라는 소리이고 또 한국의 개신교라는 지하경제에서 운용되는 자금의 규모를 생각할 때에 그들이 생색내기 용으로 쬐끔 떼어서 사회봉사에 사용되는 액수는 새발의 피도 아니며 또 각 교회에서 사회복지와 관련된 구제헌금과 같은 명목으로 지출되는 액수가 교회의 전체 재정에서 평균 5%를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웃을 수밖에 없는 거라는 거죠.

본 기사에서 말하는 내용이나 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며 글을 쓰거나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서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부패의 뿌리가 뭐냐는 겁니다.

본 기사를 놓고도 동일한 질문이 가능합니다.

먹사들이 삶에 대한 고민과 예수를 따르려는 고통을 외면하거나 무시한다면 그들이 왜 그런 약장수가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아무도 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는 거죠.

입이 닳도록 애기했지만 개신교의 부패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 부패의 역사는 천주교를 비롯한 기독교 전체를 놓고 볼 때에 어느 시대나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도끼님은 손봉호 교수의 말을 인정하지만 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기독교 2,000년 사에서 우리나라의 개신교가 가장 타락한 기독교가 아니라 근래 들어서 그 타락한 모습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의 발전이 그렇게 보이게 할뿐이라는 것이죠.

물론 자본주의의 팽창과 개신교의 부패가 무관하지는 않지만 한국의 개신교의 역사를 볼 때에 부패와 비리와 비도덕적인 면은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언제나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에게부터 그런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18-19세기 개신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그 이전의 유럽의 기독교 사회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장로교가 세력을 모아가기 시작하던 네덜란 개신교의 16-17세기의 상황은 한 마디로 처참했구요.

간단히 말해서 기독교의 역사는 썩은 내 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들이 미화하고 은폐하고 진실을 폐기하는 과정이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져 오다가 이제는 오히려 그 반대로 진실을 추구하고 수정주의 역사관을 가진 자들이 어떤 물리적 압력도 없이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갑작스레 이런 부패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앞에서도 얘기하였지만 한국의 개신교에서 추앙하는 몇몇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거나 그들이 담임으로 있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보면 그들도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전에 바울에 대하여 제가 애기할 때에도 바울의 개인적인 욕망때문에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했다는 말을 했는데 보통 사람들은 바울이 무슨 신적인 권위가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에 대하여 비도덕적인 것은 커녕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을 하면 그때부터는 대화가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완전히 예수의 복음을 망쳐놓았죠. 그의 의도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이건 부인할 수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 뒤에 세상에 나타난 종교적 야심가들이 바울을 이용해서 기독교라는 정체불명의 종교를 세워서 여기까지 온 것이구요.

그리고 원래 종교라는 것이 매우 고매한 사상을 가지고 시작이 되다가 사회의 하류층 사람들이 현실적 불만을 해소하려는 염원을 만족시키기 그 종교로 몰려들기 시작하면 변질이 시작됩니다.

이건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하류층 사람들을 집단내에 지속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해 그 종교의 지도자들은 종교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지향점을 수정하기 시작합니다. 현실적 만족에 다가갈 수 있는 대안점이 그 종교에 있는 것처럼 말하기 시작하죠. 그러면서 본래의 종교적 지향점이 길을 잃기 시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지향점과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종교집단은 정치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집단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율법적인 종교체제로 변모합니다. 그리고는 초기에는 종교집단의 일원이었던 교인들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 시기를 보내면서 종교는 국가나 집단이 속한 사회전체로 영향력을 미치게 되지만 결국은 내부에서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자연히 도달하고 붕괴, 와해 혹은 괴멸의 운명을 겪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아주 극명하게 이런 사실이 드러납니다.

개독들이 아무리 기독교가 선한 종교라고 외쳐대도 그건 어디까지나 개가 짖는 소리이고 이미 이 사회는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성숙한 사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국가라면 기독교긔의 본질이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

개독들이 아무리 버텨도 역사의 파도는 막지 못하죠.

기독교가 인류의 역사에 어떤 선한 것을 남겼는지 역사를 더듬어가며 조사해 보면 답은 명확히 드러납니다.

기독교에서 추앙하는 많은 인물들 - 기독교내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인류 전체의 역사를 놓고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리플달기
5 1
Seeker (211.192.90.233)
2013-03-01 03:24:27
선생님의 여러 댓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우연히 당당뉴스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어 글들을 읽는 가운데 류상태 목사님의 글들에 달린 댓글들이 재밌어서 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의 댓글을 읽어보면서 감탄도 하고 의문도 생겼습니다.

전공이 이런 계열이 아니신데, 공부를 많이 하셨구나 하는 감탄과 어떻게 공부를 하면 이렇게 체계적으로 지식을 쌓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저는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굉장히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계속 하고, 성경을 읽을수록 고민이 더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내가 어떤 지식 체계안에 갇혀있구나 하는 생각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걸 벗어나는 것도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야 , 내가 가지고 있는 신조를 바꿀 용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굉장히 유용하기에 (내면의 욕망을 다스리고 선한 삶을 지향하는 면에 있어서 입니다.) 몇가지 모순점들을 근거로 신앙을 접을 마음은 별로 없기도 합니다.(그런 부분은 성경무오설이라는 전제만 벗어나도 해결이 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단순 변증이나, 단순 반박이 아니라 지적 세계의 확장을 가져오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질문들이 관습처럼 굳어져있는 사상들로부터 저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러던 중 선생님이 댓글을 통해서 제기하셨던 많은 문제제기들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알고 싶어하는 무엇인가가 여기에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런 변화를 고민하는 사람이 어떤 지점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어떻게 이끌어가면 좋을지 한번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선생님도 누군가를 만나서 눈을 새롭게 뜨게 되셨다고 했듯이 말이지요.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답을 주시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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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01 23:28:56
다른 글에서도 님의 댓글을 보았습니다.
조만간 답글을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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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27 05:54:31
개독들이 아무리 기독교가 선한 종교라고 외쳐대도 그건 어디까지나 개가 짖는 소리이고 이미 이 사회는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성숙한 사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국가라면 기독교긔의 본질이 뭔지는 알고 있습
성숙한 사회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숙한 사회를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라고 말들합니다.
맞습니다.
비록 사람들 가운데 잔인할 정도의 행동을 하더라도 존중할 것은 사람에게는 사람됨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기독교도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됨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짐승같은 놈이라 욕을 먹는 자라 하더라도 사람됨이 있습니다.
이 사람됨이 여타 피조물과 다른 점입니다.

이 사람됨이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비인격적인 시간과 우연에 의해서라면 사람은 사람됨이 없습니다.
단순한 물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선한 종교라 외쳐도 개 짖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람됨을 상실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개가 개소리를 낸다고 지적해 봐야 욕이 되지 않는 것은 사람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됨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성숙한 사회는 기독교의 본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됨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사람됨을 상실한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우리주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신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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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27 05:33:33
쉽게 말해 존경받고 신실한 목사가 있다면 그런 목사는 목사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 종사하였더라도 동일한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인격이 제대로 갖춰진 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렇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인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인격이 괜찮다해서 어디에 있든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죄용서함을 받았느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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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2-26 12:56:45
쉽게 말해 존경받고 신실한 목사가 있다면 그런 목사는 목사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 종사하였더라도 동일한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인간의 인격을 변화시킨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기독교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는 종교의 문제라기 보다는
지식위주의 교육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현대학교교육은
지식의 전달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방법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식위주의 교육이지요.
실제의 삶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평생 사업을 해 온 사업가입니다. 나의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사업에 대한 이론과 지식이 많은 사람일 수록
실제로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성경지식과 신앙과는 별로 상관이 없지요. ㅓ

재미있는 2차대전 당시 이야기입니다.
전술전략에 대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하사관 출신 히틀러가 전투를 지휘할 때마다
연합군들이 전투에서 패하곤 했습니다.
"꼭 이겼어야 할 전투인데? " 병법에 뛰어난 연합군 장군들이
그 이유를 알수가 없었습니다.
처칠수상이 그 비밀을 처음 알아냈습니다.
히틀러는 전투를 할 때마다 전통적인 병법을 무시하고
점성가들의 조언을 따랐다는 사실을.
그러니 전혀 예측이 불가능 했었지요.

그래서 처칠도 점성가들의 조언에 따라
전투를 했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월남전에서 패전이유도 웨스트포인트 윤군사관학교의
병법교육 탓이라고 비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과서적 병법이 베트공들의 케릴라전투에 전혀 먹혀들러가지
않았다는 논리지요..

마찬가지로 성경지식, 기도, 믿음, 교회생활과
실제의 삶이나 그사람의 인격과는 전혀 무관할 수가 있지요.
위선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인간들의 삶이지요.

오즉했으면 사도바올이 천사의 말을하고 바위를 움직이는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소리에
불과하다고 한탄을 했겠습니까?

그런점에서는 근본주의 신앙인들이나 진보적인 신앙인들이나
별로 다름이 없다고 봅니다.
입장이나 처지, 이해관계의 다를 뿐이지요.

당당뉴스에 글을 쓰고 댓글을 쓰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지요. 모두들 신앙때문에 심한 상처를
받은 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요.
어떤분은 학연때문에 좌절된 자기의 진로를
진보적인 신앙인들 탓으로 돌리고 분풀이를
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 어떤분은 개인적인
불행이나 스트레스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헐뜯고 비난해서 보상하려는 분들도 있지요.

결국 예수가 이웃간 싸움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는
셈이지요.
.
미국교포사회들은 다수가 기독교인들입니다.
좋은 점도 많지만 그만큼 문제도 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교회들의 싸움판이지요.
싸음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싸움에는 정도도 법도 통하지 않지요.
일종의 무법지대고 법이 통하지 않는 사각지대지요..

저의 경우 단어 하나,문장 한 구절을 쓸때마다
법적인 관점에서 신경을 쓰며 조심을 합니다.
대부분 사업적 전화는 녹음을 하고 녹음을 당합니다.
언제 어디서 고소사건이 터질지 모릅니다.

한번은 내가 한 교통경찰관을 법정에 세운 적이 있습니다.
그 교통경찰이 빨간 신호등에서 속도때문에
정지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나에게 $60 짜리 벌금팃켓을 주었지요.
나에게 티켓을 건내면서
"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을 한 것이 화근이 됐지요.
내가 인종차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그 경찰관을 고소를 했습니다.
결국 그 말의 해석을 두고 담당판사가
경찰의 손을 들어주어서 내가 재판에서 패하고 말았지요.

이것이 바로 미국사회입니다. 법으로 보호받고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나라가 미국사회입니다.

한국인들이 이정도 이민생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들의 공로가
제일 크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동안 초기성직자들이 알게모르게
희생과 고생도 많이 했고, 뒤에서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훌륭하고 헌신적인
목회자들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지면에서 교포교회들이
달라 질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교회문제는 성직자들의 탓만은
결코 아닙니다. 대부분이 신도들 탓입니다.
신도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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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
익명 (112.222.123.131)
2013-02-25 22:43:17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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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26 03:12:26
목사들과 신학자들을 신격화하지 마십시오. 옳습니다.
바울을 신격화하지 마십시오. 당연합니다.행14;15에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사람을 신격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님의 말씀대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깨어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님은 "예수님이 말씀 하신 사랑 말고는 어떤 것도 믿지 마십시오."라고 하시는데 그것만이 깨어있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와 함께 사랑이 행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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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익명 (112.222.123.131)
2013-02-25 21:16:08
이단감별의 권한을 누가 준 것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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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26 04:08:15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외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오해하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유익을 구할 수 있는 내용으로 해석하고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일부 목사들은 대오각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비록 일부 목사들이 행위에서 잘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가르침의 내용이 바르다면 그 가르침, 말씀은 좇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23:3)라고 하셨습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 발람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 입에 이스라엘을 축복하라는 말씀을 주시매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해석이 중요하다 하여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과 성경적인 해석을 하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절대진리가 없고 인간의 각자 소견대로 해석한 것을 존중하라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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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개혁본부 (203.226.199.216)
2013-02-25 23:02:32
글 도 테크니컬 해야하니?
정신 차려라이!

말장난은 입술에서 끝나고
진실은 가슴 에서 끝나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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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
저기 (36.38.194.181)
2013-02-25 23:27:47
저기... 선생님.
.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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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
익명 (112.222.123.131)
2013-02-25 20:10:04
한 때 개독이었던 류상태 선생이 같은 종족이었던 그들에게 사랑으로 쓴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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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Philip Im (70.62.49.64)
2013-02-27 11:28:26
뱀발 : 개독님들이 입만 열면 주장하는 일부 개독님들에게 쓰는 글이니 자신이 정신병자 개독이 아니라고 여기는 분들은 신경 끄시면 됩니다.

이래도 여러분 개독들과 대화하겠다고 하겠습니까?

제가 글을 쓴 후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개독들과 대화나 소통을 하려고 ‘뫼비우스 띠 돌기’ 나 ‘시지프스의 돌 굴리기’를 시도할 것입니다. 제 글이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글이 순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개독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이 의미없고 덧없는 ‘돌기’나 ‘돌굴리기’를 하며 인생을 허비할지 모르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비계덩어리? 모순덩어리!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10장 19절)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전도서 5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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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박평일 (72.196.234.24)
2013-02-25 22:03:40
People are illogical, unreansonable, and self-centered,
but Love them anyway.
인간들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라.
미국 하바드대 Kent M Keith 의 지도자의 역설적인 십계명에
나온 첫번째 계명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의 조건없는 일방적인 사랑을 낭만적이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계산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예수의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 "고 하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의 말처럼 손에 공의의 검을 들고
대항했을 것입니다..

이 시대 예수의 부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미움과 증오의 어두운 무덤을 헤치고
피어나는 한 송이 사랑의 꽃. 백합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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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12.222.123.131)
2013-02-25 21:37:26
예수는 당신에게...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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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03.226.199.216)
2013-02-25 22:50:18
당신은 이미 예수의 사랑을 왜곡하고
남한테 안지킨다고 허풍떨고 장난치고 있는게지ㅡ
제발 정신차리고 기도 하시게나 ㅡ
당신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신 주님
마이 추우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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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
Picky (76.23.169.116)
2013-02-25 14:54:05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그런데 이 문장은 번역이 영 엉망으로 된 많은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래 여기서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란" 표현은 원래에는 그냥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말씀을 가지고 장사(카펠류온테스)를 하는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적혀있습니다.

결국 종교 장사꾼들이란 말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장사꾼이 하는 말을 듣고 슬프고 고민이 생기면 장사가 되겠습니까?

세상을 등지라고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가라고 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면 누가 그 장사꾼 앞에 다시 나타나 돈 몇푼 던지고 그 장사꾼이 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겠느냔 말이죠.

한국이나 미국이나 소위 유명하다는 목사, 존경받는다는 목사, 신실하고 기독교계의 리더 혹은 대표라는 말을 듣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조용기나 김홍도 그런 사람들 말고 이동x, 김동x, ㅇㅎㅎ, 등등 좀 그럴싸하게 보이는 목사들이 많죠.

그런데 그들도 장사꾼임에는 별반 차이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먼저 목사가 되어서는 안되는거죠. 제도권내의 목사가 되었다는 말은 예수의 제자되기는 글렀다는 말과 동의어라고 봐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예수 이름 팔아먹는 종교가 된것이죠.

슬퍼하고 고민을 해요?

그들에게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럴바에야 예수 믿을 이유가 없죠.

그게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복음이 되었으니까요.

몇몇 목사들은 고상한 척 그리고 자신들은 세속적인 다른 목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말로는 고난이니 어쩌니 하지만 결국 그들도 설교시간에 말만 그렇게 하지 실제 교회에서 하는 일은 다 똑 같아요.

좀 고 품질의 물건을 팔려는 상술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책도 많이 읽고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죠.

그래야 항상 신상품을 개발하고 고품질의 제품을 개발할 수 있으니까요.

예수 이름 가지고 장사한지는 이천년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제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뿐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도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게 아니라면 에수 믿는 것 때려 치우겠다고 하는 사람이 계속 재뿌리고 잇지 않습니까?

목사 가운데 저런 사람 많습니다. 목사라는 타이틀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험한 말은 못해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저보다 더한 먹사들 수두룩해요.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고민과 슬픔을 말합니까?

당당뉴스에 게속해서 올라오는 이단 처쩌구 저쩌구라는 글을 보세요.

그저 패대기 치고 죽자 사자 싸우는 모습이 시장에서 장사꾼들이 하는 짓거리하고 하나도 다를 게 없지요.

이게 뭔 종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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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66.138.19.14)
2013-02-25 16:10:11
고후2:17의 말씀은 님의 해석이 맞군요.
그러나 적용에 있어서 저와는 다르군요.
바울의 말씀은 님이 지적하시는 삯군 목사와는 달리 "하나님이 보낸 사람답게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증거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바울의 고백과 같이 행하지 않는 목사가 많다할 지라도 님이 싸잡아 비난할 만큼의 모든 목회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 또한 님이 말씀하시는 삯군 목사 밑에서 많은 고생하였으나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었고 고난이 저에게 많은 유익이 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런 삯군 목사 때문에 지금도 주님은 눈물 흘리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보다도 더 그래서 주님을 멀리하는 분들을 향하여 오늘도 기다리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분들을 향하여 진정 고민하고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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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03.226.198.86)
2013-02-25 12:44:27
미안한 얘기지만 류상태를 비롯
그 류 에속한 동조자들 만 정신차려도 기독교는
바로섭니다ㆍ

류상태씨는 아직도 남의 교단에서
얼정거리고 있군ㆍ

인정해 주는데로 가서 안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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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
박평일 (72.196.234.24)
2013-02-24 11:43:36
저의 주위에는 자신들을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분들,
교회와는 담을 쌓거나 멀리하시는 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갑니다.

그 주된 이유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직접 만나고 체험해 온
주위 기독교인들에 대한 실망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은
일반인들 보다는 진실하고, 도덕적이며
평소에 사랑,자비,용서,화평과 평강을 실천하며
살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분들은 기독교인들의 성경지식,신앙, 믿음
소망, 기도,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냐가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집정원 땅 속 깊숙히 묻어두고 있는 금은보화는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단 돈 한푼이라도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 한..


제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한 은퇴목사가
계십니다.
맨손으로 시작해서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일구시고 은퇴하신 분입니다.
오래전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이웃으로
몇 년간 산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집에 가면 변변한 가구 하나가 없었습니다.
입고다닌 옷이라곤 소매가 낡아 헐어빠진
몇 십년된 양복 한 벌,아주 검소한 생활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받는 목사사례비는
모두 헌금으로 내고 약사로 일하는 사모의 수입에 의존하는
청빈 한 삶을 살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기독교인,비 기독교인들 불구하고
아직껏 모든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다른 한 분은 인도의 간디입니다.
하루는 간디를 존경하고 따른는 추종자 한 분이
간디를 찾아 왔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너무 단 음식을 좋아해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의사들과 내가 충고를 해도 도데체 말을
듣지 않습니다.
평소에 선생님을 우상처럼 믿고 존경하고 있는 놈이니
선생님의 충고라면 반드시 따를 것입니다" 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부탁을 받은 간디는 자기에게 한 달간의
시간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약속 대로 한달 후에 그 자녀를 불러
"단 음식이 몸에 해로우니 끊으라" 고 충고를했고
그 자녀는 간디의 충고에 따라 당장 단음식을
즐겨 먹는 버릇을 끊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아버지가 간디를 찾아가
"그렇게 쉽게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를 두고
왜 한달씩이나 기다리게 했느냐" 고
간디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간디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사실은 나도 단 음식을 좋아한다.
그동안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버릇을
남에게 끊으라는 총고를 할 수 있겠느냐.
나의 버릇을 끊은 데 최소한 한 달이 필요했다"
고 고백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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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24 03:55:13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특히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무책임한 낙천주의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직 사랑만이 충만하신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롭 벨'같은 목사는 지옥이 없다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기쁨에만 치우칠 때 '무책임한 낙천주의자들'이 양산되듯
사랑에만 치우칠 때 '무책임한 감상주의자들'이 양산됩니다.

더 나아가 창세기의 말씀을 신화로 치부하는 것은
'무책임한 이성주의자들'이며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더욱 깨어 준비할 때입니다.

기뻐할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습니다.
기뻐할 것이 있고 슬퍼할 것이 있습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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