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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에서 꿈꿨던 공동체문화영덕의 한밭골에서 경험했던 농촌과 농업의 대안
류기석  |  yoogise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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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2월 15일 (금) 10:26:48
최종편집 : 2013년 02월 15일 (금) 12:40:20 [조회수 : 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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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 내리다가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산맥이 백두대간이다. 이에 비해 낙동정맥은 태백산 피재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의 동쪽을 따르는 산줄기로 동해안 지방의 담장 역할을 한다.

이 낙동정맥과 태백산맥을 따라 이어진 산맥이 백암산을 거치면서 독경산을 이루는데 이 깊은 산속 자락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서면 영덕군 창수면 너른 분지의 옛 마을이 커다란 밭들을 하나로 품은 한밭골과 만나게 된다. 인근의 제일 가까운 마을인 인천리와 갈천리에서도 족히 4~5Km를 더 들어가서야 만날 수 있는 골짜기가 한밭골이다.

   
▲ 2003년 경북영덕의 쓰레기 농촌마을과 희망이 없는 토지 ⓒ 2003 류기석

이곳에는 10여개의 작은 교량들이 줄지어 있기 때문에 큰비만 오면 넘치는 오지이다. 이런 한밭골과 인연은 2004년 초, 하늘 그리운 사람들 카페를 통해 자율네트워크형 마을공동체로 뜻을 모으던 중 이웃마을 이장으로부터 이곳을 소개받아 많은 분들과 교류를 나누면서 시작되었다.

과거 10여 가구가 살던 이곳은 종중 땅으로 독경산을 중심으로 나뭇잎이 머금은 물줄기가 동쪽으로 떨어지는 거의 모든 곳이 포함된다. 지금은 초라한 농가 세 채와 조그만 재실 한 채만이 남아 고단했던 산속생활의 이면을 보여준다.

   
▲ 한밭골의 안녕을 기원하는 까마귀 솟대를 만들어 세운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 ⓒ 2004 류기석

기존 농부의 과도한 시설투자 욕심으로 급기야 망하게 된 영덕 한밭골의 황폐한 땅과 주변시설을 대하면서 도시민들이 편안하게 다녀갈 수 있는 쉼터를 생각하게 되어, 2004년 한 해 동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구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행동으로 옮겼다. 그와는 별개로 이 땅의 주인인 종중 어른들께는 귀농과 공동체에 대한 꿈을 현실화 시키겠다는 의지표현을 다른 방편으로 담아 제안했다.

그때 종중 어르신이 삼보그룹 전 회장이셨던 분으로 서너번 만나 "한밭골을 장기적으로 임대함과 규모화 된 관행적인 영농방식이 아닌 친환경적인 농업을 하고 한 가정의 귀농이 아닌, 농촌마을의 대안(Model)을 제시하기 위한 두세 가정이 함께 마을을 이루어 도시와 농촌을 이어주는 휴식처를 만들겠다."는 내용도 전했다.

   
▲ 하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릉도 벌개미취를 풍경농업의 일환으로 심고 가꾸었던 골짜기 밭 ⓒ 2004 류기석

어찌됐든 1년 동안 전국에 계신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마을을 복구하고 환경친화적인 방법으로 농작물을 키워내고 경관도 살리면서 토속적인 채소로 쓰일 수 있는 풍경작물로 울릉도 벌개미취, 울릉도 섬초롱 등을 실험적으로 재배했다.

초기에는 우리가족의 귀농지로 생각했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누구든 초기 한밭골에 들어와 사는 귀농자에게 모든 관리를 맡기기로 했다. 한곳에 집단으로 모여 니것 내것 없이 하나가 되는 종교적 신념의 공동체가 아닌 조금은 느슨하지만 생태적 삶의 문화로 연결지어진 자율적 생활이 보장되는 네트워크공동체로 모색했던 것이다.

이 실험은 귀농초기 누구든 낮선 곳에서의 귀농에 대한 두려움과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도록하는 계기로 한시적으로 시행했었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집수리 자재, 농기계 등을 필자의 남양주 집에서 옮겨갔고 전기료와 전화료도 안해가 해결해 주었다.

   
▲ 하늘 그리운 사람 조형주(바위섬님)과 김영님이 농작물을 키워내는 밭에서 공생농업에 대하여 진지한 대화 ⓒ 2005 류기석

초창기 서울과 영덕을 주말마다 오가며 농가주변의 폐자재와 농토에 깔린 지저분한 폐비닐을 제거하는 등 쉴틈없이 일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연순환농업방식의 다품종 농작물을 보살폈다. 하지만 오지중의 오지인 영덕의 한밭골은 거리가 멀고 험준한 산골이라 해마다 지속적인 돌봄은 어려웠다.

매주말 서울에서 영덕으로 찾아가던 햇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면서 그곳에 정착한 분들과는 소원한 마음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귀농자 스스로 삶의 전반에서 자급자족의 활로를 찾는 것이 중요한데... 즉, 홀로 설수 있을 때 함께 할 수 있다는 공동체의 단순한 원리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던 것 같다.

하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아 오지의 농촌마을 한곳을 집중적으로 섬겨왔던 관계망이 3년차가 되니 차츰 시들해졌다. 몸도 지쳐가니 자연스래 마음도 멀어져 간것 같다. 그렇지만 2006년 초여름, 이곳을 거쳐간 분들 중 옛 정을 잊지않고 초대해주었다.

칠보산 자락 오지의 골짜기 빈 농가를 수리해 살면서 4년동안 발효시킨 약주의 시음축제 및 한밭골짜기도 들러볼 겸 서둘러 영덕으로 향했었다. 집단으로 공동화된 농촌마을 한밭골의 폐가된 농가와 농토를 복구했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감회가 깊지만 왠지 서운함도 느껴진다. 그렇다 생태적 삶을 이루려는 공동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공동체란 매주일 서로가 소원하게 생각했던 작은 부분들을 찾아 끊임없이 밝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삶의 관계를 잘 나누어야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고 수용해 주는 태도가 성격이나 문화수준, 경제적인 역량 등을 수용하게 된다.

앞으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개인의 자율과 공동체의 적정한 어울림이 만들어지는 자율적인 네트워크를 생각한다. 다양한 지역, 다양한 분들과 협력적인 관계를 기대하면서 사람들이 떠나간 오지의 농촌에서 '골짜기문화'라는 화두를 가지고 마을공동체를 엮어갈 꿈을 꾸면서 말이다.

   
▲ 비료와 농약,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키워낸 고추의 생명력 2005 류기석

오랫만에 찾은 한밭골은 아랫마을 사람들이 관행적으로 심어놓은 투기성 무우, 배추가 제초제와 농약으로 뒤범벅되어 자라고 있어 안타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집뒤 한쪽으로는 정직한 농부로 살기위한 바위섬(닉네임)님의 농토를 보면서 희망도 본다. 천지기운을 받아 자유롭게 성장하고 있는 다품종들의 작물이 잘 추수되어 우리들의 밥상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전날밤에 도착, 맛난 먹거리와 가양주로 축제를 치룬 일행은 다음날 오후2시쯤 한밭골짜기에 도착, 그곳의 귀농자와 인사를 나누고는 바위섬님이 손수 수리한 토담집에 들어가서 지나온 이야기로 회포를 풀었다. 이윽고 함께했던 지인과 밭에서 작물의 생육상태와 농사방법, 제초와 병충해 방재 등에 대한 이야기와 수확후의 유통문제에 이르기까지 고루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한밭골 후미진 뒷뜰에는 다품종의 농작물이 풀과 어우러져 자라고... 2005 류기석

초창기 지인들과 심어놓은 울릉도 벌개미취는 어느새 수많은 꽃망울을 터뜨려 식물원이나 관광농원에 와있는 착각을 일으켰다. 깨끗하게 자란 고추며, 고구마, 참깨와 들깨, 여러 종류의 콩들이 싱싱하게 커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정직한 농심(農心)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일이 상황설명을 마친 바위섬님이 상기된 표정으로 현재의 마음을 털어 놓았다. “뜻이 맞는 분들과 본격적으로 자연농사를 지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농사를 힘들게 생각하고 기피했는데 이제는 농사가 재미있고 무슨 농작물을 심고 가꾸든 자신 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밭골을 서서히 돌아나와 갈천리로 향했다. 산비탈을 가다가 밭에 지천으로 널린 무우를 보니 뽑아가란 귓뜀을 한다. 장사꾼이 사놓은 것인데 무슨 원인인지는 모르지만 다 버리고 갔단다.

그덕에 차에 한가득 무우를 싣고 서울로 향하는 고개를 넘었다. 굽이굽이 갈천마을에 다다르니 2년 전 귀농하여 기존의 마을 분들과 함께 열심히 담배농사와 고추농사를 짓는 귀농부부를 만났다. 억척스럽게 대단위로 짓는 이 부부의 농사는 벌써 경제적인 자립을 이룬지 오래다.

   
▲ 2005년 경북영덕의 쓰레기 농촌마을과 토지를 아름다운 들꽃이 피는 마을로 탈바꿈한 풍경 ⓒ 2006 류기석

고추밭에서 일하고 있는 바깥주인과 담배농작물의 수매를 앞두고 이웃주민들과 열심히 담뱃잎을 가려내고 있는 안주인과 인사를 하고는 바쁘고 거친 삶을 잠시 뒤로 하고 술 한 잔을 나누었다. 하지만 몸과 마음에는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시골에 사는 즐거움 보다는 고달픈 기색이 역력했다. 두부부의 배웅을 받는 자리에서 앞으로 정확히 7년 후에는 좀더 여유로운 몸과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지리산 쪽으로 제2의 귀농을 하고 싶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동안 살이 많이 빠지고 얼굴도 검게 그을린 김**(41세)님과 여전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그네를 챙겨주고 웃어주는 그의 아내가 영원히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굽이굽이 이어진 창수령을 넘어 새로운 만남을 위해 길을 재촉했다.

본 글은 필자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우리나라 내륙 중 가장 오지중의 하나인 경북영덕 창수면 한밭골이라는 골짜기에서 농촌과 농업의 대안문화를 꿈꾸며 공동체적인 삶을 실험했던 내용의 기사로 2006년 연재했던 내용을 새마갈노에 다시한번 나눔한다.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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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17 10:03:15
저도 그런 공동체를 꿈꾸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공동체 삶은 현실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것 같아요.
다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발동하기 때문인가 봐요.

얼마전, 저희 집에서 집사람과 교회 여권사님 두분 이렇게 셋이서 함께 배추와 양념을 준비해와서 함께 다듬고 몇 박스의 김치를 담구었습니다. 수다도 떨어가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 옆에서 저는 가만히 지켜만 보았는데요 그 모습과 그 자리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너무도 아름다운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나눌때 저희 식구가 제일 많다고 저희의 적극적 만류에도 불구히고 저희 집에 가장 많은 김치를 배분해 주신거예요.

'아 이렇게 함께 협력하고 나누고 하는것이 공동체이고 바로 이것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작은 천국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감성적인 글이 더 자주 올라왔으면 합니다.
적극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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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박평일 (72.196.234.24)
2013-02-15 22:55:02
저도 절은 시절에 기독공동체를 꿈꾸어 본 적이있습니다.
몇년간 뜻를 함께한 친구들과 열심히 연구도 하고
실제로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실험도 해 봤습니다.
우선 친구 신혼여행에 동지가족들과 함께가서 며칠간
공동생활교육과 수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
그 당시 도봉동에 문동환 목사가 시도하셨던
기독공동체 "새벽의 집"이 저희들의 모델이었습니다.
"능력대로 벌고 필요한 만큼 쓰자" 참 가슴이 뛰는
기치였지요.그러나 얼마 못가서 실패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공동체 동지들 간에
직업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을 것입니다.
직업적 생산성이 서로 다르면서 소비를
공평하게 평균화할 수가 없었지요. 인간들의
본능적 탐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키부츠 집단농장들은 역사가 길지요.
그런데로 성공한 케이스 로 알고 있습니다.
일단 육체적 노동을 기초로 한 농장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
저의 경험으로는 가족들이 같은 가치관과
생각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남짜들끼리 의기투함을 해도 여성들의
질투, 시기, 소유욕 그리고 미에 대한 사치성의
벽을 헐고 넘어 갈 수가 없지요. 새대가 다른
자녀들도 마차가지고.

미국에 아직도 퀘이커 교도들의 집단농장이 일부
남아있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직접 방문해 본적은
없지만 노후에 가서 몇 년간 살아볼까 하는 생각은
가끔합니다.

그분들은 현대이기문명과 아예 담을 쌓거나
거리를 두고있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테레비, 신문, 자극적인 광고등.....

그러나 요즈음같은 인터넷 시대에
외부와의 차단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현대문화 문명자체가 너무 탐욕적이고, 자극적이고
유혹적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공동체생활이
과연 가능할지? 그렇다고 꿈과 시도조차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옛 젊은 시절 꿈을 회상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리플달기
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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