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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차례와 제사문화를 존중해야 한다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2월 10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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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2월 07일 (목) 04:16:09
최종편집 : 2013년 02월 07일 (목) 11:35:32 [조회수 : 8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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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2월 10일)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날이기도 합니다. 하여 전통적으로 설날 아침에 지내온 차례 문화와 관련하여 교우님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어 며칠 앞서 편지를 드립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제사 문제로 인해 항상 마음이 편치 않다는 교우님들이 계십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고민이지만 교회가 적절한 지침을 제시해 주지 않거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교리적으로만 다그치는 바람에 믿지 않는 가족들과 늘 보이지 않는 갈등에 휩싸여 명절이 다가올수록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는 교우님들도 적지 않습니다.

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이고 추도예배를 드리는 가정은 문제가 없을 수 있겠으나 차례를 드리는 가정에 참여해야 되는 교우님들은 마음고생이 많으실 것으로 사료됩니다. 전통문화와 교회의 가르침이 충돌하는 이 문제를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옳을까요? 이 쉽지 않은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이삼백년 전 한반도에 찾아온 갈등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제사문화에 대한 초기 천주교의 이해

제사문제는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선교 초기부터 맞닥뜨린 풀기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개신교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는 고인을 위해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십계명의 첫 계명과,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는 두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천주교는 결국 제사문화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런 천주교인들의 태도는 조상에 대한 효를 인륜도덕의 기본으로 삼는 당시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조상의 은공을 부인하는 불효막심한 죄이며, 그런 파렴치한 일을 옳다고 가르치는 천주교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악한 종교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엔 당파 싸움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주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파 학자들이 천주교에 많이 귀의했기에 당시 집권 정치인들로부터 대대적인 박해를 받아 수많은 천주교 교우님들이 생명을 잃는 엄청난 비극을 겪었습니다.


2. 조상을 공경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오랜 갈등 끝에 천주교는 일부 형식을 바꾸기는 했지만 우리의 제사제도를 아름다운 전통문화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개신교회는 대부분 제사제도를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사를 허락한 천주교회에 대해서 우상숭배를 한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신교회에서도 소수이지만 제사를 지내도 괜찮다고 가르치시는 목사님이나 신학자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제사 문제가 교회마다 해석이 다르고 혼선을 빗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사문화에 윤리적 성격과 종교적 성격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이어주신 조상님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효심임에 틀림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서의 가르침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제사문화에는 종교적 의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상을 단지 존경하고 감사하는 차원을 넘어 여전히 그 인격이 혼으로 살아있고 제사를 잘 드려야 가문이 복을 받고 잘 살게 된다는 조상신 숭배의식을 포함하고 있기에 우리 교회와 교우님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도 달리 해석할 여지는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종교적 요소보다 윤리성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상을 신으로 섬긴다는 의식은 점차 사라지고 효심에 근거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이런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는 우상숭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제사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견해입니다.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일부에서 제사문화를 허용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제사문화를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명절이나 기일에 조상님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절은 부모님이나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상숭배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상숭배의 사전적 의미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만든 신상에 절하고 비는 것’ 또는 ‘하나님 이외의 사람이나 물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기초 개념을 바탕으로 우리 기독교가 이해해야 하는 우상숭배란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을 하나님과 동등한 절대적 위치에 두고 의지하며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돈이나 권력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은 명백한 우상숭배입니다. 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물리쳐야 할 우상은 ‘사람보다 돈을 더 중히 여기는 물질적 가치관과 삶’이며, 또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배타적인 교리와 문자 안에 가두어 이웃들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여 세상에 평화를 심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는 독선적 신앙’입니다.

한국 교회는 제사문화를 우상숭배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독선적 배타 교리를 절대화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를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우상숭배가 아닌지 깊이 돌아보아야 하며, 조상님에게 절을 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해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3. 제사문화를 긍정하더라도 짚어볼 점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도 우리의 제사문화를 존중하고 그 의미를 계승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조심스럽게 건의하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조상님을 공경하는 전통예절의 내용은 보전하되 제사제도의 형식은 절대화하지 말고 현대사회에 맞게 좀 더 탄력적으로 적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사제도의 형식을 그대로 계승하려면 음식 장만에 따르는 경제 비용도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 여성에게 집중되는 과도한 노동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성들에게는 즐거운 명절이 여성들에게는 중노동이 되는 현실은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남성들에 의해 애써 외면당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이런 불균형을 기뻐하실까요?

남성들만의 명절 또는 어린아이들만의 명절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즐기는 명절로 보낼 수는 없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명절에 발생하는 노동문제를 여성과 남성이 함께 지는 것부터 실천해야 하겠지만, 노동의 양을 줄이고 가족이 다같이 모여 충분히 대화하며 즐길 수 있는 명절로 분위기를 바꾸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사제도의 형식을 좀 더 간소하게 바꾸고 다른 형식의 추모방식을 함께 허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에서 드리는 추도예배도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제도를 우상숭배로 거부하는 배타적 외래문화로서의 추도예배가 아니라, 형식은 바꾸더라도 조상님께 감사하고 공경하는 옛 제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내용으로 계승하는 추도예배라면 훌륭한 대안문화의 하나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통문화로서의 제사의례와 지금까지 교회에서 장려해온 추도예배 중에서 교우님들이 자유롭게 선택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추도예배를 무가치한 외래문화로 규정하고 제사제도만 옳다고 주장한다든가, 전통적인 제사의례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추도예배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극복해야 할 문화적 배타주의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차제에 우리 한국 교회가 민족의 전통문화와 기독교문화를 모두 긍정하고, 교우님들로 하여금 각 가정의 특색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가족간 갈등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우님들의 선택에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제 경우를 하나의 사례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유교문화를 중시하는 가정에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의 삼강오륜 강독을 듣고 자랐으며 전통적인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목사가 된 이후에도 제사에 참여했지만 절은 하지 않고 기도만 드렸습니다. 보수 기독교 신앙을 갖고 계신 고모님을 생각하여 제 나름대로 선택한 고육책이었지만 다행히 아버지께서 저의 무례한(?) 태도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셔서 큰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장손인 형님이 가족회의를 소집하여 저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께서 이끌어오신 가문의 제사는 형식의 변화 없이 계속될 것이며 혹 마음에 불편이 있더라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따라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해왔듯이 절을 대신하여 기도로 참여해도 괜찮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형님이 주관하시는 첫 제사에서 아무 망설임 없이 아버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돌아가셨지만 어렸을 적부터 어루만져주셨던 아버님의 손길이 세밀히 느껴지는 자리에서 그냥 서서 기도만 하는 것을 제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부모님 앞에서는 그냥 서서 기도할 수 있었는데, 아버님 앞에서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이후로도 제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형님이 주관하시는 제사 때마다 아버지께 깊이 절을 드렸고, 이후로는 조부모님 제사 때도 절을 올렸습니다.

형님은 몇 년 전 지병으로 연세에 비해 조금 일찍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장남의 역할을 이어받은 저는 가족회의를 소집하여 제사와 추도예배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상황에 적합한 지 허심탄회하게 의논하여 결정하자고 하였습니다.

은퇴권사이신 어머니께서 추도예배로 드리자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양쪽 전통이 모두 소중하지만 조상을 기리는 의미에는 다를 것이 없으며, 며느리들이 주로 겪어야 하는 여러가지 말못할 부담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며 내놓으신 의견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 의견에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모두가 동의하여 이후 저희 가정은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렸던 이전과 추도예배를 드리는 지금, 저희 가족에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를 모시고 3대에 이르는 대가족이 함께 모여 아버님과 형님께서 남겨주신 소중한 가르침과 베푸심을 기리고 감사하며 간소한 음식과 덕담을 나누는 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한국 교회의 대승적 결단을 기대합니다.

과거 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목사님 몇 분이 제사문화는 우상숭배가 아니며 차례를 드려도 괜찮다는 의견을 설교시간을 통해 발표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문제가 발발하고 교계의 추궁을 받게 되자 아쉽게도 본인들 스스로 소신을 접고 말았습니다. 교단의 눈초리가 무서워 소신대로 목회하지 못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는 깨어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제도를 전통문화로 존중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이로 인해서 한국 교회 안에 새로운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갈등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사회의 존경을 받는 공동체로 거듭나려면 창조적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책임 있는 목사님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배타적인 교리로 인해 본의건 본의가 아니건 우리 사회와 이웃종교에 무례가 되는 일을 너무 많이 해왔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동안 교회가 전통문화를 무시하거나 부정한 행위에 대하여, 또한 이웃종교를 존중하지 못하고 배척할 뿐 아니라 심지어 물리적 위해를 가한 모든 잘못에 대하여 우리 사회와 이웃종교에 진정으로 사과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개신교 각 교단 차원에서, 또한 개혁단체들과 진보기독교언론, 깨어있는 교회들이 이 일에 적극 나서주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또한 이 문제로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하고 계시는 교우님들은, 제사와 추도예배 중에 어느 것이 자신의 가정에 적절한 지 충분히 검토하여 아무 두려움 없이 편한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님들을 기리며 예를 표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내용으로 계승하되, 추모 형식에 대해서는 가족회의를 거쳐 각 가정의 상황에 맞는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가족과 친지간 화목을 꼭 이루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모이는 명절에 지금까지 겪어왔던 문화충돌이 극복되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 넘치는 명절로 보내게 된다면, 가정에서부터 평화를 이루어가는 우리의 선택에 대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설날을 맞이하여 교우님들 가정에 우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만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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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예수!! (183.109.138.242)
2013-02-09 21:01:55
귀신과 교제하지 마라!!
고린도전서 10장20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제사에 대해 단호히 우상숭배임을 분명히 명시 했습니다. 내 생각과 전통이 아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건만 어찌 이런 글을 목사가 쓸수 있단 말인가? 제사 자체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요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정신차리시고 제사는 분명 하게 가르쳐서 성도들의 영혼을 우상숭배로부터 지켜야 한다. 이 글을 보는 모든 성도들이여 이 글의 미혹 당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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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7
나익성 (180.228.234.49)
2013-02-13 12:22:37
목사님말이맞습니다.
저는상조업을하면서 종교문제로 싸우는유족들의모습 많이봅니다.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과 문자적으로 설교하는 수많은 한국식기독교의 피해를 수사로 목격하는사람입니다.
조상의기일에 제사를하는것이 우상숭배라고 주장하는것은 남족문화와 전통사상을거부하는 너무 싸구려 한국식기독교생각같습니다.
왜? 보편타당성을 가지지 못하고 윤리와 전통위에 군림하려는 기독교사상은 한국사회에서 많은멸시와 천대를 받을수밖ㅇ레 없는것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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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
어처구니 (112.161.51.187)
2013-02-12 18:46:17
감리교단이 이래서 이단으로 몰린다
그리고 불교도 이스람도 모두 존중한다는 다원주의가 감리교회를 이단 종파로 몰고간다
한심한 먹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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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9
이사야 (121.129.19.72)
2013-02-09 22:29:39
우리의 생각을
법륜 스님에게 즉문 즉설 로 들어볼까요
당당 뉴스 관리자님
혹시 감리교의 큰선생님이신 변 선환 선생님께 문의해볼까요
모든것을....마음으로하시면 됩니다...제사던 추도예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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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ryu (122.153.41.66)
2013-02-09 15:00:56
공감하는 부문이 많습니다.
젊었을 때 고등학교 윤리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종교는 나름대로 이론과 가치추구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의 바탕은 우리의 전통적 토속적 신앙의 바탕 위에 조화롭게 정착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원주의적 신앙관은 잘못된 신앙관이 아니라고 봅니다. 기독교 자체적으로도 여러교파들이 생멸하고 있고 기독교에서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들도 기독교라고 주장하며 선교활동을 하는 현실적 상황에서 나만이 올고 너는 잘못이라는 종교관은 오히려 문제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대화를 통한 다원주의적 신앙관은 나의 존재와 함께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랑의 구현이라고 생각됩니다. 독선적인 기독교적 신앙관은 적대감과 갈등을 유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에 역행한다고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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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
Picky (76.23.169.116)
2013-02-09 14:24:16
내 정말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본 기사에 양 손들고 반대하는 분들,

기독교에서 성경적이라는 말을 무지 좋아하니까 하는 말인데, 도대체 당신들은 성경의 어떤 근거를 가지고 제사가 우상숭배라고 주장하는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정말 제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문맥상의 논리와 함께 통전적인 논리와의 일관성까지 보여주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후하게 술 한잔 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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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0
술을 사다니 (211.38.125.79)
2013-02-10 01:56:55
술을 마시는 것은 성경에 어긋납니다
성경에 술취하지 말라 하였거늘 왜 성경대로 안사시려고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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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8
Picky (76.23.169.116)
2013-02-10 23:40:27
달라질 게 없다니까
술 마시고 취하면 뭐가 문제죠?

길에다가 오줌 싸니까? 그럼 화장실 옆에서 마시면 되겠네.

하여튼 근본주의자들은 생각이란 게 없으니까 달라질 것도 없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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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0
익명 (218.39.77.67)
2013-02-09 09:19:26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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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
Picky (76.23.169.116)
2013-02-09 14:16:48
당신이 말하는 감리교의 발전이
당당뉴스가 생각하는 감리교의 발전이라는 가정에 문제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치 않죠?

그래서 기독교가 문제라니까. 뭐든지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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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sldlfjs (119.204.230.83)
2013-02-09 08:50:00
참으로 이런 글을 이곳에 게시 해야하는가?
차례와 제사를 문화라고?
참으로 한심하다...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에 화가 나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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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3
땅바닥이 하늘을 봄 (59.14.191.217)
2013-02-09 03:44:17
어불성설 종교다원주의 주장입니다
형님이 주관하시는 제사 때마다 아버지께 깊이 절을 드렸고, 아무 망설임 없이 아버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 (이것은 아버님 혼이 그 자리에 온다는 조상신 숭배와 같은 맥락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버님의 이름에 예를 표했다고 하면 몰라도.. 그리고 그동안 교회가 전통문화를 무시하거나 부정한 행위에 대하여 우리 사회와 이웃종교에 진정으로 사과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했는데 무당이 굿판을 벌이며 귀신을 부르고 섬기는데도 전통문화니까 함께 춤추며 동참해야 합니까? 우상숭배인줄 뻔히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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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2
Picky (76.23.169.116)
2013-02-09 03:43:19
예배, 제사, 예배, 제사 도대체 예배가 뭐고 제사가 뭔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종교적 제도와 도덕률에 관한 내으로 시작하자.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과학적 사실을 놓고 논쟁을 벌일 때에는 논쟁의 방법이 양자가 서로 합의하는 객관적이고 검증된 사실의 집합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런 논쟁은 언젠가는 결론이 내려지고 양쪽 중에 한 쪽의 승리가 판가름나게된다.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를 놓고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논쟁은 그와는 다르다. 우선 노쟁의 쟁점이 되는 도덕률과 문제 자체를 가름하는 기준은 사실이 아니라 신념 혹은 전통과 같은 비객관적인 명제들로 이루러져 있고 또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서로 합의하지 않는 분리된 기준체계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논쟁은 평행선을 이루며 끝이 없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왜 동일한 기독교내의 두 기독교인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논쟁처럼 끝없는 평행선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이 두 기독교인은 비록 이름은 같은 기독교인이고 모두 기독교의 도덕률의 규정을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두고 있지만 그들이 인식하고 수용하는 도덕률은 실제로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기독교인들은 서로 교집합이 되는 부분만 가지고 서로의 신앙생활을 공통적으로 수행하기는 하지만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하여는 모른척하고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혹은 개인적인 관심사가 논쟁으로 등장하고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서 각자의 도덕률이 도입되야 하는 경우에는 마찰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은 현재의 기독교의 상황을 보면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만개가 넘는 기독교 교파의 존재가 바로 증거이다. 이처럼 수많은 기독교의 교파는 간략이 설명하자면 성경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각각 교파의 이해가 완전히 독립적이어서 교집합을 전혀 이룰 수 옶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교차되는 이해를 따라 그들은 상호간의 암묵적인 존재의 승인을 용납한다.

여기까지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해관계가 형성이 되면 이들은 끝없는 평행선의 논쟁이 될 것을 알면서도 싸우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도덕률의 잣대로 상대를 비난한다는 말이다.

짜장이 맛있는가 아니면 짬뽕이 맛있는가를 비교하는 것과 같은 영원한 논쟁을 벌이면서 서로의 우위를 가름하려고 하는 것이다.

본 기사에서 제사제도에 대하여 우상숭배라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기독교인은 별로 없는 것 같으나 어떤 분은 "생명과 인격이 없는 제사음식을 차려놓고 더구나 현고학생부군신위라고 하는 조상이 그 제사자리에 신으로 오셔서 자녀들에게 절을 받고 잔과 음식을 잡수시는 시간까지 있는 제사는 기독교적인 신앙입장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 라는 말씀을 가지고 제사제도에 대하여 반대를 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명절에 발생하는 노동문제를 예를 들어 추도예배로 대치할 것을 권하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한다.

그 이유로는 첫번째 전통적인 제사의 형식을 어느 정도로 지킬것인가는 각자가 결정할 문제이다. 어느 누구도 제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까지 그 전통적 형식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형식은 언제나 바뀌게 되어있다. 기독교에서 예배라는 형식이 이 천년전 그대로인가? 아니다. 교회마다 다르고 아주 조금씩 때로는 급작스레 변하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가 제사라는 것을 제도로 바라보는 그 시각에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율법으로만 바라보면서 유대교는 부패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가정마다 형편에 맞게 제사상을 차리는 것에 대하여 그 결정은 그 가정이 내리는 것이다. 지나침이 있는 집도 있을 것이고 또 너무 간소화한 집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은 아예 제사상을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배달해주는 영업도 있다고 한다. 기독교내의 문제도 그렇고 우리의 생활속에 나타나는 정신적인 면을 다루는 문제도 모두 마찬가지로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 왜형적인 면들 혹은 비본질적인 면들만 가지고 논쟁이 오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상이 그 제사자리에 신으로 오셔서 자녀들에게 절을 받고 잔과 음식을 잡수시는 시간까지 있는 제사"라는 내용에 대하여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현대인 가운데 얼마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의 조상들의 생각이지 지금 우리들의 생각이 아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철저하게 무속신앙이 몸에 베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기독교인의 범주로 넣을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전통적인 제사를 준비하거나 참여한다면 당연히 이런 무속신앙적인 생각을 가지지도 않을 것이며 혹 그런 생각을 지닌 부모님들과 함께 제사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것은 부모님의 생각이지 자신의 생각이 아닌바에야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부모님의 세대가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뭐 그리 큰 문제가 되는가? 그들 세대의 생각이 이성적으로 옳지 않다고 하지만 그것을 굳이 바꾼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며 또 우리도 잘못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려는 태도는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한 후에 취해야 하지 크게 문제의 소지도 없는 것까지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류 목사님이 절에서 108배를 올린 것을 가지고 계속 물고 늘어지는 물귀신 같은 사람이 있는데 108배를 드리든 아니면 일천배를 드리든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낮아지고 비우는 자세로 세상을 사는가이지 두 눈 지긋이 감고 눈물 찔끔찔끔 흘리면서 '주여, 주여' 외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예수가 언제 울면서 찬송했는가? 예수가 언제 '아버지~ 아버지~'하면서 미친놈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이성적인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질타하고 가르침을 전하고 하늘을 향해 자신의 길을 구하였다.

바울에게는 제사상에 올린 음식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영향을 받을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런 행동을 자제하겠다고 했다.

먹사들 대부분이 이 내용을 가지고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 잘못된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은 자제하라고 말한다.

이건 한 마디로 웃기는 개소리다.

이게 왜 개소린가하면 먹사들은 여기서 하는 말이 다르고 저기서 하는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좀 더 거시적으로 말한다면 정통주의를 외치는 거의 모든 먹사들은 성경의 해석은 현대의 시각에서 그리고 그 적용은 그 시대의 시각으로 한다는 말이다.

이게 왜 문제냐? 원래는 가꾸로 해야 하는데 이것을 뒤집어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말로는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정작 그 원리를 보면 멋있고 그럴싸 한 말이 지닌 목적이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스스로가 자각할 때에는 미리 선수를 치면서 합리화거나 정당화할 내용을 또 만들어낸다.

성경은 그 당시의 문화와 상황에 녹아들어서 해석을 해야한다. 이건 기본 중에 가장 기본이다.
그 후에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한 후 다시 현재로 돌아와 그것의 적용이 이 시대의 시대적, 문화적 상황하에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고려해보고 그것의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폐기해 버리고 만일 적용이 가능하다면 원래의 그 취지대로 아니면 현대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면 되는 것이다.

근데 이 먹사라는 작자들은 이걸 거꾸로 한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자기들의 이익과 관련된 것은 죽자 사자 문자 그대로 당시의 관습이나 전통등은 완전히 무시하고 목숨 걸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가장 큰 예가 바로 우상숭배라는 웃지도 못할 소리다.

누가봐도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에서 여호와를 숭배하지 않고 다른 이방종교를 숭배하는 것이다.

이런 걸 설교시간에 교인들에게 가르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사지내면 우상숭배라고 가르친다. 절하면 우상숭배다? 명절 때에 부모님에게 절하지 않는가? 사찰에 가는 것마저도 우상숭배다?

정확히 현대 기독교의 우상이 뭔지 말해보자.
성경,
교회건물,
목사,
신학,
교리,
감투,
박사학위,
주일예배,
십일조,
성경공부,
제자훈련,
선교,
전도 등등

이게 다 우상숭배다.
몇몇 가지는 쉽게 이해가 갈 것이지만 나머지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 나머지에 대하여 왜 그런지는 각자 생각해보라.

두번째로는 추도예배라는 것이다.
이 추도예배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각종 경축사에 에배라는 이름을 붙여서 예배의 형식을 취하는데 이 예배라는 것도 성경에 나타난 예배와는 아주 다른 의미의 종교적 행위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성경에서 예수는 '예배하는 자'라는 말을 한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예배보러 간다'는 말은 틀린 것이고 '예배 드리러 간다'는 말이 맞다고 가르치는데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는 것이다.

그럼 '예배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초대의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던 예배에 대한 개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인들의 예배에 관한 기록은 별로 없다. 그들은 그저 모여서 누군가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예수의 복음에 대하여 가르치고 그 가운데 질문이 있으면 질문하고 그리고 나서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전통민요같은 것을 부르는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것이 예배의 원형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이것이 발전해서 예전이 생기고 에배의 형식이 생겼다고 말한다.

이게 사실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초기의 기독교인은 공동체 속에서 어떤 형식적인 종교적 모임이나 제사 혹은 예배라는 것을 갖추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기존 모든 이방종교가 취하던 어떤 종교적인 형식의 행위를 자신들의 공동체내에 들여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예전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종교적인 어떤 예식행위도 세워나갈 의도조차 없었다.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삶 전체의 각부분 부분이 예배라는 의미가 숨어있다고 여겼다.

우리는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그리스는 로마의 사상과 문화를 정복했다고.

마찬가지로 초기의 기독교는 기독교의 다른 분파를 정복하고 이방종교를 정복했지만 영지주의와 같은 기독교의 다른 분파와 이방종교는 기독교의 사상을 정복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초기 정통주의자들은 그들이 종교적으로 적이라 간주했던 영지주의나 이방종교들과의 종교 싸움에서 그들을 물리쳤지만 그들이 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그들의 것을 모방하거나 수정하여 자신들의 기독교 사상에 가지고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자신들에게 있던 것은 모두 그리스철학이나 이방종교의 철학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연적인 귀결이다. 기독교는 원래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작하였고 유대교의 전통적 사상을 간직하면서도 예수의 가르침을 접목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통주의가 들어서면서 정통주의자들은 유대교와의 단절을 선언했고 그들만의 종교적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구약의 여호와를 자신들의 종교사상에 게속하여 신으로 존속시키려했지만 유대교적인 사상과는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쉽게 말해 유대인들에 대한 거부감을 간지하면서도 유대교가 지니고 있는 유대경전인 구약의 여호와를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따라서 유대의 율법은 거부하되 그 안의 여호와는 그대로 옮긴 후에 예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는 의도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다른 글에서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삼위일체의 개념이 2세기경에 나타나 4세기가 되면서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교리의 중심이 된 이유도 부분적으로 반유대적인 사상을 유지하고 정당화하려는 의도때문이다. 만일 구약의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보고 예수를 선지자로 여긴다면 그들이 만들려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는 유댜교의 아류 혹은 하위 종교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초기의 정통주의자들은 자신들 외의 모든 다른 종교, 심지어는 예수를 따르는 다른 기독교 분파까지도 몰살시키고 난 후에 맨 땅에 시작했다. 따라서 맨 땅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창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상, 교리, 종교적 의식 등등 모든 것을 새로 만들려고 그들은 노략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작업을 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과저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지녀온 타종교나 영지주의와 같은 기독교의 다른 분파에 대한 이해가 개입되고 그것이 기독교의 곳곳에 스며들어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고 또 여러면에 있어서 이미 밝혀졌다. 기독교의 신학은 그리스 철학의 신플라톤주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의 근본주의 기독교가 그 원형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시되는 여러가지 종교적 의식이나 주장 또한 영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학문적 주장 또한 매우 설득력이 있는 연구결과이다.

그렇다면 예배라는 것은 어떨까?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예수는 종교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는 예수가 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가 말하는 예배라는 것에 어떤 종교적인 형식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형식적인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초기 정통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세우고 있는 새로운 종교의 의식은 당연히 그들이 이미 보고 듣고 행해왔던 이방종교에서 따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이방종교는 모두 현실 세계의 문제에 대하여 신으로부터 해답을 얻으려는 무속종교라고 볼 수 있다. 신에게 어떤 제물을 바쳐 신의 마음을 흡족케하면 신은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이 원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라는 바램을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고안해낸 특정한 의식을 갖추고 행함으로 성취된다고 그들은 보았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교인들이 모여서 유사한 형태의 예식을 행하지만 다른 것은 이방종교와 같은 제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종교에서 바치던 물질적 제물 대신에 각자의 헌신이나 교인들이 가지고 오는 헌물을 제물로 둔갑시켰을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부연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서구인들의 신관은 이처럼 조악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신을 겨우 인간들이 필요로하는 물질이나 충족시키고 병을 고쳐주는 정도의 신으로 생각하는 그 수준이 너무도 한심한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신에 대한 개념이 이와는 수준부터 다르다. 우리의 선조들은 제사라는 것을 지낼 때에 저 높은 산에 올라가 평평한 곳에 막대기 하나 꽂아놓고 하늘을 향해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그리고는 준비한 슬과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마음껏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선조들의 의식에는 신이란 인간을 이롭게 하는 존재이며 이 세상의 세세한 인간사를 줘락 펴락하는 그런 째째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제사라는 개념은 신 앞에서 '자~ 우리 한바탕 신명나게 놉니다!' 라고 천제(天帝)에게 고한 후에 함께 즐기고 놀면서 기쁘을 나누는 것이었다. 서양의 제사와 우리 선조의 제사를 비교해 보라. 인간에게 공포의 존재요 두려움으로 다가오면서 고통만 안기는 게 서양의 신이다. 기껏해야 자기 맘에 드는 인간 몇명만 보호하고 그들에게 물질 좀 나누어 주는 그런 존재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의 종교라는게 참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심지어는 예수도 이런 게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지만 교회에서는 기껏해야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사탕 하나 던져주면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포와 분노와 두려움과 복수의 화신이 된 하나님을 무마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신관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쪽이 아무리 애를 써도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교리와 성경에 대한 그리고 예수에 대한 이해가 바뀌지 않는 한 에큐메니칼이나 진보나 근본주의나 보수나 그 어느 쪽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기독교 전체를 왕창 뒤집어 엎어서 다시 처음부터 재구성을 하지 않는 한은 눈에 보일 정도의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배의 얘기로 돌아가서 현대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예배도 동일하다. 다만 현대화되고 세련되고 외형적인 모습만 변형시킨 후에 성경에서 근거한 것처럼 정당화시켜 적절한 단어로 된 이루어진 의미만 부여함으로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그리고 거부감을 완화하고 또 종교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까지 취함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마다 먹사마다 예배에 대한 형식마저도 다르고 때로는 서로 서로가 성경적이니 아니니를 따지면 싸우기도 하는 것이다. 십일조가 가장 좋은 예이다.
한 가지 예로 예배 때에 왜 사도신경을 외우는가? 누가 예배 때에 그것을 하라고 가르치던가? 예수던가 아니면 베드로던가? 전통에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리고 다른 교회에서도 그렇게 하니까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것을 예전에 집어넣었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고 그게 역사에 뿌리를 내린 이후로는 누구도 왈가왈부하지 않으니까 공연히 그것을 가지고 트집잡아 화를 자초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 뿐이다.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그런 머리를 가지고는 평생 무지를 면치 못한다.

십일조에 대하여 요즈음은 신약시대에 십일조는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글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니까 궁색한 변명으로 십일조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마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먹사들은 말한다. 그런데 그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성경대로 말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성경의 다른 부분은 암시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나 은유적으로 이런 내용을 가르치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문장에서 그대로 잘 나타난 것이 히브리서이다. 따라서 히브리서만 제대로 본다면 이런 사실은 금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먹사들은 헛소리를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먹사들은 성경도 제대로 모르면서 군림하는 법만 그리고 머리속에 넣은 성경의 구절들을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 시키고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만 아주 잘 사용한다. 심지어는 십의 이조, 삼조도 아깝지 않다고 주장한다. 완전히 미쳤다. 우주를 만든 창조주가 인간의 물질이 왜 필요하며 모든 것을 안다고 하는 전능자가 인간이 뭔 행동을 해야 그때서야 인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가?

십일조에 대하여 이렇게 신앙의 고백이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니 하는 식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 아는가? 오래 된 얘기가 아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십일조를 완전히 신약적 율법으로 가르쳤고 축복의 도구로 가르쳤다. 거기에 무슨 사랑의 증거니 믿음의 증표니 하는 수식어가 붙은 적이 없다. 조용기와 김홍도는 아직도 옛 방법을 고수하면서 "무조건 직진!"하고 있는 것이고 좀 젊은 먹사들은 세상의 눈치를 봐가며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조심스레 가는 차이만 있는 것이다.

다시 예배라는 것으로 돌아가서, 이방종교로부터 차용한 형식에 더하여 설교라는 예전의 중요한 부분까지 가미함으로 종교지도자의 권력 유지와 함께 지식의 독점권을 확보한 것이다. (언제부터 설교시간에 교인들은 입다물고 꿀먹은 벙어리 마냥 듣고만 있었는지 역사를 찾아보라. 처음에는 사도와 같은 지도자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설교였다. 그런 가르침이 행해지는 동안에 누구라도 질문이 있으면 묻고 또 그에 대한 대답을 설교자가 하였다. 쉽게 말해 그 당시의 설교라는 것은 지금으로 치자면 배우고 가르치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바울이 가르칠 때에 베뢰아에서 온 교인들이 바울의 가르침이 정말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성경을 들여다 보았다는 기록을 보라. 이게 상당히 의미 심장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내용이지만 일단 이 문장을 통해 알기 쉬운 한 가지만 본다면 당시에는 설교자가 가르치는 내용에 대하여 '닥치고 믿어!' 라는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가르치는 내용이 의심이 나니까 그들은 구약을 뒤져가며 바울의 말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여즈음에 그런 교인이 있는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저 앵무새처럼 '아멘 아멘' 대답하면서 머리를 깨끗이 청소하는 일에 분주하다. 더군다나 먹사들은 뭐? 아멘으로 화답하라고? 자기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삼위일체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하면서 아멘으로 화답하라고? 어린 애들이 소꼽장난 때에 어른들이 하던 짓을 아무런 의미도 모르면서 따라하는 것처럼 먹사들도 다른 목사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한다. 설교가 유행 따라하기인가?

원래 현대의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설교라는 것은 없었다. 성경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고 하는 말이 그 때문이다. 성경에는 예배라는 의식행위를 가리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구약의 제사가 사라졌는데 무슨 예식행위가 따로 있겠는가?)

예수가 종교를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닌데 무슨 예식행위가 필요한가? 그러니 기독교를 종교화하려던 사람들이 모든 종교적 예식행위를 어떤 근거와 원리에 의해 만들었겠는가? 그들이 이단이라고 비난하던 자들과 이방종교의 예식행위 밖에 더 있겠는가?

주일예배, 금요예배, 새벽에배, 추도예배, 가정예배, 장례예배 등등 이 모두가 예수가 말하는 예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예수의 정신을 기리는 일도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예배란 끊질긴 생명력으로 나를 괴롭히는 내 자신을 죽여가는 나의 고통스런 삶의 과정이 바로 예배이다. 그래서 예배는 바치거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순간순간, 매일매일의 삶의 과정을 거쳐 행하는 것이다. 자기를 완전히 죽일 준비를 하면서 영적 제사를 준비할 때에 말씀으로된 돌로 마음의 성전을 쌓고 그 성전이 완성되어 자신을 제물로 제사를 드릴준비가 되면 말씀의 칼로 자신의 마음을 쿡 찔러 마음 속에 속한 세상을 향한 더러운 부분을 잘라내어 마음의 할례를 한 후에 하나님 앞에 온전히 정결케 됨을 보이면 그때에는 더 이상 십자가를 질 필요도 없고 예배를 행할 필요도 없고 이 세상에서 마음을 온전히 떼어내어 공중을 나는 새처럼 하나님이 먹이시는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추도예배니 뭐니 하는 것들을 막을 필요는 없다. 성경의 예수의 가르침과는 하나도 상관없는 인간들이 만든 전통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최소한 유익한 면이 있다면 왜 굳이 말리겠는가? 돌아가신 부모님의 뜻을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된다면야 추도예배를 열번 스무번 아니 하루에 백번을 행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문제는 본질의 의미는 사라지고 종교적인 형식으로 율법화되어 사람들에게 이것을 행하면 좋은 인간이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이고 이것을 행하지 않으면 믿음도 없다거나 죄인이라거나 아니면 사칸에 빠진 자 혹 악한 자라고까지 하는 그런 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이 말했듯이 현대인의 율법은 먹사들이 만들어서 인간에게 죄의식만 가득하게 하고 종교적 멍에만 계속 씌우고 있다.
예수는 자유케 하려 왔지 멍에를 씌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예배는 없다. 당신이 바로 예배여야 한다.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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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6
박평일 (72.196.234.24)
2013-02-09 07:14:41
예수는 자유케 하려 왔지 멍에를 씌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저도 그리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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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we조 (112.150.131.231)
2013-02-08 22:28:00
윗글을 읽고
한 사람이 틀렸다 말하면 틀린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틀린 것도 맞다고 공감하면 옳은 것인지 ~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으려 글을 올리셨는지 ~
옳은 것은 옳다하고 틀린 것은 틀리다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으셨나요
그나마 창조론을 반대하지 않는 것이 다행인 것같습니다.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얄팍한 사람의 잣대로 절대 안되는 것은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인지 묻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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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
박평일 (72.196.234.24)
2013-02-08 07:30:37
저는 개혁본부가 자연인, 개인이 아니고
단체, 혹은 조직이라고 가정하고 이 글을 씁니다.
법인체인 당당뉴스, 그리고 이글의 필자인 류상태 목사님께도
드리는 글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혁본부 단체의 신앙관을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 법적권한도 없고요.
신앙은 헌법이 보장해 주는 기본권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개혁본부라는 단체가 당당뉴스 운영에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당뉴스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법적절차를 밟아 설립된 법인체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문사의 문을 닫아라,신문기사,투고글 의 내용을
바꾸라고 협박하는 것은 한국의 실정법에 위배되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다른 한 가지는 자기와 신앙적인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필자의
직업을 바꾸라고 협박하는 것은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은 신앙 이전의 문제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당당뉴스와 류목사님께서 법적대응을 할 수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당당뉴스를 파괴하려는
단체적인 음모나 공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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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9
익명 (207.210.3.147)
2013-02-08 07:44:03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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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
나도 한마디 (14.39.139.94)
2013-02-08 11:00:53
그래도 개혁본부가 개인이라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만 빼고는 장시간 컴퓨터 알에 앉아 계신 인터넷 매니아가 아닐까 추측됩니다. (인신공격성 표현은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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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
박평일 (72.196.234.24)
2013-02-08 09:07:32
미국 같으면 이미 법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저는 당당뉴스의 책임도 크다고 봅니다.
당당뉴스가 필자들의 인격과 인권을 보호해 줄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봅니다.
변호사비용의 일부를 개인적으로 부담할 각오도 있습니다.
이정도는 신앙논쟁의 한계를 벗어 공갈협박입니다.
당당뉴스 발행인들에게 간곡히 드리는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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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110)
2013-02-08 02:58:09
당당뉴스 는 앞으로 감리교 안에 머물지 말고
초교파적으로 이단집단 까지 수용하는 매체로
감리교 밖 으로 튀어 나가길 바랍니다ㆍ

그리고 감리교 사태를 비롯하여 감리교의 어떻한
사안도 취재하지 마십시오!

그게 싫으면 이런 허접한 신앙관을 가진 악마의글 은
다 지워 주시기 바랍니다 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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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
참빛 (207.210.3.147)
2013-02-08 07:29:03
개악본부는 다름과 틀림의 차이도 모르고 혼동하고 있는가.
나와 다른 생각을 악마니, 허접하니 이단이니 이런 극단적인 표현으로써 정죄하려 하는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켰던 사울의 모습을 당신을 통해 보는것 같소.

당신은 진정 맹신도요 Zealot 이오.
회개하시오.
그리고 예수의 복음이 과연 어떤것인지를 배우시오.
하루속히 예수님의 은혜가 이 자에게 임하여야 할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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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8 06:51:54
허허~, 당신은 이웃사랑, 예수님 말씀, 복음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오. 단언하건데 당신은 예수님의 예자도 모르는 자요. 교단, 교리, 이단, 권위주의 등 쓸데없는 것들에만 가득 채워진 자이오. 정녕 눈먼 율법주의자, 바리새인 같은 독사의 자슥이라 불리움을 자청한단 말인가.

한번 근본주의자가 되고나면 사람 말귀를 영 못 알아 듣는다 하더니만, 그대를 두고하는 말이오. 어찌하다 이 모양 이꼴까지 되어버린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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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2-07 23:51:49
개혁본부 보시오
당신은 지금 스스로도 무슨말을 하고있는지 모르는 채 성질만 부리고 있소. 사람은 누구나 어느정도의 선입견은 다 있게 마련인데, 당신은 우째 전체가 선입견으로 꽉 들어차 보이오.

류목사님이 친절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실제상의 경험까지 곁들어 가면서 설명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사는 나쁜것" 이라는 주입된 고정관념을 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류목사를 악인으로 평가하시려 하는구려.

갈대보다 나무가지가 더 쉽게 뿌러지듯이 본인의 그 강한 성정이 어느날 갑자기 주의 은혜로 녹아질 날이 있을 것이오.

기억하시오.
류목사, 당당, 이사야 이런 존함들을..
죽기전에 언젠가는 이 사람들이 무척이나 고마울 때가 반드시 올테니까.. 그땐 큰 절 한번씩 올리시고 밥한끼 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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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110)
2013-02-08 00:29:32
보슈~
당신들은 물타기선수들 이오!
난 지금 위에글 도 못 마땅 하지만 더 중요한!

목사 가 주일에 절간에 가서 108번배 한 것에대한
정당성 을 답 하라는것이니 그 근본적인 물음의 답을
기대해볼것 이고 ㅡ

밥 은 내가 열끼 라도 살테니 조용히 주님과 대화들이나
해 보슈

나도 친한 지인들중 스님 신부 여화증인 안식일 심지어
남미호랑게교 도 있고 무당들도있쏘 난 사회생활을 치열하게
한 사람이고 아직도 치열히 살고있소 한때 그들과 동거동락
하면서 수많은종교이야기들 했고 당신들보다 더한 목사 교수들
과 많은시간 같이 고뇌 했지만 인생을 흘려보내면 보낼수록
원칙 ㆍ주니의원칙의 중요함이 더 또렸해 집띠다ㆍ 아닌것은
아닌것 이지요ㆍ

류상태가 직접 답 해보슈
주일에 절간에서 108번배 한 정당성 을 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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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110)
2013-02-08 00:32:18
주니의원칙 ㅡㅡㅡ 주님의 원칙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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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110)
2013-02-08 00:50:20
내 자랑은 아니고 내가 한때 엄청놀때 소위 죄짓는것 빼고
다 해본사람 이외다 그당시 친한친구 두어명이 다 불교였지 ㅡ
난 단한번도 기독교를 강요한적 없지만 어느날부터 스스로 염주
집어 치우고 교회 나갑띠다ㆍ할렐루야
지금 생각해보니 내원칙이 있었쏘 그들은그것을 은연중에
보아왔고 주님이 도와주셨다 고 생각 하외다 ㆍ

나 그들보다더 잘놀구 더 기분파 외다
한가닥 하죠ㅡ 하지만 아닌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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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8 01:45:16
물타기 할 이유가 뭐 있겠소이까.
그대의 고집스런 모습을 스스로 한번 돌아 보기를 바라는 마음뿐인 것을.

가만히 보아하니, 님은 기독교 교리를 믿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간단히 질문합시다. 예수를 믿는거요? 교리를 믿는거요?

틀에서 벗어나시오.
예수의 참다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깨닫고 눈을 뜨시기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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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61.72.191.153)
2013-02-07 22:44:55
좋은 글 이네요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합리적이고 설득력있고 공감되는 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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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9.136)
2013-02-07 22:13:44
당당은 감리교안에서 활동하는 또한
감리교안에 속한 매체라고 우길 려면

타교단의 이단적인 글쓰기를 즉각! 중단하고
다시는 일반성도가 접 하여 번민스러운 글을 싣지
마시기 바랍니다ㆍ

이따위의글에 얽메이려거든 감리교사태를 비롯한
감리교 지 가들어가는 모든취재를 멈추어 주시고
감리교 밖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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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9.136)
2013-02-07 22:16:06
감리교 지 를ㅡㅡㅡ감리교 자 로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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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신자 (211.107.34.236)
2013-02-07 19:38:39
성당에서는 아주 조화롭게 실천하고 있던데요
전통제사와 미사를 함께 드리는 천주교 성당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다.
설날이면 성당에 매년 참석하고 있는데, 성당안에 차려진 제삿상을
바라볼 때 가슴이 절로 찡해집니다.

추도미사 중에 갖는 전통제례를 통하여-대개 강론 후에 이루어짐-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이 절로 추념되며 영적으로 또한 연결되어 있음을 절로 체험하곤 합니다.

또한 돌아가신 선친들을 위해 미사 전에 바치는 구성진 연도와 추모미사는 선친들과의 교감과 일치를 잘 이루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전통제례와
추도미사는 아무 갈등없이 조화를 잘 이룬다고 생각되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류상태 목사님의 제언은 참으로 시의적절함은 물론, 바로 하느님의 뜻이
목사님 말씀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못난 화살들이 날라와도 좌고우면함 없이,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주님의 길만을 황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땅속에 묻힌 보물이요 진주같으신 분인 류목사님을, 아직도 우리는 몰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류목사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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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바닥 신자 (59.14.191.217)
2013-02-09 03:24:15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귀신과 교감하는게 아님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이 절로 추념되며 영적으로 또한 연결되어 있음을 절로 체험하곤 합니다. 또한 돌아가신 선친들을 위해 미사 전에 바치는 구성진 연도와 추모미사는 선친들과의 교감과 일치를 잘 이루게 해줄 뿐만 아니라, ... 무당은 접신하는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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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14.39.139.94)
2013-02-08 10:51:59
아프리카의 카톨릭은....
벌써 50년전이 되네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카톨릭은 전례(예배의식)의 토착화를 추구하며, 지역 주교단의 자율성에 많은 부분을 양도하였지요. 아프리카에서는 지역 부족신 내지 조상신들을 집단으로 세례를 주어 아예 미사가 조상신들에게 전구(중보기도)를 청하는 연도로 시작한다고 하네요. 부족의 신령들이 천주교의 성인성녀로 시성된 것일까요? 남미 안데스 지역에서는 새해 첫날 미사를 끝내고, 예수상을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순행식을 하는데, 예수를 부르는 이름은 지역 토착신의 이름입니다. 인도 카톨릭은 말할 것도 없구요. 미사 독서 중에 힌두교의 경전을 읽는 것은 다반사이구요. 성당 안은 여기가 천주교당인지 힌두 사원인지 얼핏보면 구분이 안된다는 군요. 한국 천주교? 저는 물론 가보지 않았지만, 사진 보니까 추석이나 설 명절 위령미사때 제대(성찬상) 앞에 아주 신위를 세우고 홍동백서로 차례상을 진설하고 배례한다고 하더군요. 분향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만... 저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사도적 교부적 전통에 세워진 그리스도교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는 것입니다. 전통제례와 그리스도교 전례(미사)를 함께 하는 성당의 예를 성서적 그리스도교를 본령으로 삼는 기독교에까지 본받으라고 추천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사나 차례는 어디까지나 가례입니다. 집안에서 결정하여 할 일이고, 거기에 기독교 신자들은 신앙 양심과 가정의 평화를 생각하며 적절한 수준에서 참여하든지 말든지 결정할 일입니다. 차라리 류상태님의 사례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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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9.136)
2013-02-07 19:10:51
류상태 는 목사 의 직을 스스로 반납 하시기 바랍니다ㆍ
해당교단은 조속한 법집행 을 하시기 바랍니다 ㆍ

주일 에 절간에 가서 108번배 한 류상태는 주님의날 인 주일 이란
단어 사용을 중지하고 본인의 프로필 에서 목사 란 직함도 거두길
바란다 ㆍ

당당뉴스 는 문제성 있는 타교단 의 이단적인 글 을 계속 연재하는
이유 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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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118.33.223.121)
2013-02-07 16:46:35
정말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가요?
그런데 왜 꼭 밤 늦게... 그것도 창문을 열어 놓고... 왜 숫가락은 꽂아놓고... 그러고 제사를 지내는 걸까요?

단순히 조상을 기억하는 거라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조상의 영혼을 불러오는 초혼제의 성격이 더 짙은 게 아닐까요? 또한, 제사지내는 그 마음도...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 보다는, 조상신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를 바라는, 두려운 마음이 더 큰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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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6
Picky (76.23.169.116)
2013-02-09 14:14:37
조상이 왜 괴롭혀?
이 사람 21세기에 사는 사람 맞나?

기독교 밖의 것은 무조건 삐딱하게 보는 이 시선. 그래서 개독이라고 욕 먹는 거라구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당신만큼의 이성을 지니고 있고 당신만큼의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당신만큼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산다구요.

지독한 독선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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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5
엘사 (123.142.33.60)
2013-02-07 15:36:10
물론 제사가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고 자손들에게 효의 정신을 물려주는 것은 성경적이지만, 앞에서 말씀하였듯이 물질 즉 생명과 인격이 없는 제사음식을 차려놓고 더구나 현고학생부군신위라고 하는 조상이 그 제사자리에 신으로 오셔서 자녀들에게 절을 받고 잔과 음식을 잡수시는 시간까지 있는 제사는 기독교적인 신앙입장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바람직한 방법은 추도예배라고 보고요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은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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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7 14:39:27
존중
우리나라 개신교에는 그런 단어가 없습니다. 류 목사님이 그 단어가 있는 제대로 된 국어사전 하나 사주신다면야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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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1
익명 (24.141.4.52)
2013-02-07 13:45:52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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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2
김연국 (112.173.232.159)
2013-02-07 16:17:20
안녕하세요. 류목사님! 당당뉴스라 그런지 소신이 정말 당당 하신데요. 궁금한 사항이 있는데 어느 교단에 소속 되어 있는지,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구원관이 무엇인지 궁금 합니다. 저는 기독교대한 감리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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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1
Philip Im (70.62.49.64)
2013-02-08 08:56:51
<류상태의 다른 기사 보기>클릭하셔서 ·[칼럼]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질 때부터 기독교를 떠나기까지 [새창] 류상태 2007-12-26 를 보시면 어느 정도 아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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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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