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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원형은 하늘의 뜻을 땅에 이루려는 예수운동이었다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2월 3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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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2월 02일 (토) 14:13:24
최종편집 : 2013년 02월 02일 (토) 19:48:16 [조회수 : 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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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편지에서 기독교 영성에 대해 말씀드린 데 이어 오늘은 기독교가 갖는 운동성을 주제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류 역사에 큰 아픔을 안긴 교리의 기독교를 넘어서고 영성의 기독교와 운동의 기독교가 갖는 귀한 가치와 신앙을 되찾는 일은 우리 한국 교회와 교우님들이 반드시 짊어져야 할 권리이자 사명입니다.

1.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릴 때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살아가는 것, 저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삶 전체로 가르쳐주신 복음의 원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 지를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0~21, 공동번역)

우리 기독교는 이웃들로부터 현실의 아픔과 모순을 외면하고 미래로 도피하는 나약한 종교라는 비판을 종종 받습니다. 심지어 우리 기독교를 반대하는 분들로부터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며 미래로 도피하는 종교, 그것이 비록 현실 기독교의 한 단면임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한 오류의 결과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묻는 랍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태복음 22:37~4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둘은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수직관계로만 끝나서는 아니 되며, 수평으로도 이어져 존재하는 모든 것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비로소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사회와 자연, 이웃들의 삶의 현장에는 별 관심 없이 오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만 몰두하는 교우님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하나님만 생각하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영성 충만한 삶이라고 배워왔기에 순전한 마음으로 신앙생활과 교회공동체의 삶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충만한 신앙이 아니라 균형을 잃은 신앙입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 이 둘은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영성이 수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사회와 단절될 뿐 아니라 이웃으로부터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됩니다. 때로는 사회의 정의롭지 못한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억압과 폭력을 방관하거나 조장할 수도 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우리 한국의 주류 교회들은 이런 일을 막거나 극복하지 못하고 조장해 온 측면이 있습니다. 자연이 파괴되고 사회가 고통을 받으며 생명이 소홀히 여겨지는 현실에 눈과 귀를 막고 자기 공동체의 확대에만 주된 관심을 보여온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처신은 이런 엇나간 영성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2.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맺어진 관계가 심오할수록 하나님의 사람은 현실세계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기독교 영성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계를 하나님과 분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그분의 품이며 거룩한 몸으로 인식하기에,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일그러진 실존세계에 대해 아파하며 본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이 초월성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세계에 이루기 위한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에 서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종교 조직 안에 가두고 독점하려는 당시 종교인들의 독선에 항거하고,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왜곡된 사회 구조에 맞서 가난하고 억눌린 백성을 일으켜 세우고 해방시켜 주는 레지스탕스(저항) 운동이 예수 운동의 원형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뿌리는 이미 서기전 8~9세기경부터 구약성서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를 필두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 등으로 이어지는 선지자들의 예언은 기득권자에 항거하여 힘없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고통스런 삶의 현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당시 종교 권력자들과 그에 야합한 무리를 향해 이렇게 질타하였습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을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1~24)

아모스의 예언은 수평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종교행위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악한 위선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폭로합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정의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억압과 착취를 버젓이 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예언자는 묻고 있습니다.

아모스의 사자후는 마치 성전에서 온갖 기물과 제물에 대한 상업적 독점권을 갖고 호사를 부리던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지도자들, 아니 종교 장사꾼을 질타하고 그들의 상을 뒤엎으신 우리 예수님의 격노를 연상케 합니다.


3. 예수님은 절대평화와 절대정의의 세계를 꿈꾸며 행동하셨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모든 폭력과 억압의 가능성이 완벽하게 사라진 절대정의와 절대평화의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무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 (이사야 11:6~9)

아, 놀랍습니다. 아, 위대합니다. 전율이 흐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양과 염소들이 사자와 표범을 물리치고 약자들만의 천국을 만들 것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양과 염소가 사자와 표범과 함께 뒹구는 상생과 평화의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고, 어린 아기가 독사와 장난치며 함께 노는 세상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브루주아를 타도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천국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함께 어깨동무하고 사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이미 이천육백여 년 전에 꿈꾸고 노래하며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온갖 어려움과 핍박을 견디며 수백 년을 이어온 이 예언자 운동은 우리 예수님에 의해 그 절정을 이룹니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이 이사야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4:16~21)

누가는 예수를 예언자 운동의 맥을 잇고 완성하기 위해 오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에서는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고 하늘 위로 도망가려는 현실도피 신앙의 근거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예수님은 왜곡된 현실세계에서 정의와 평화, 행복이 숨쉬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저항운동의 중심에 서계십니다. 이처럼 올바른 기독교 영성은 필연코 왜곡된 모든 것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집니다.



4. 우리 한국 교회는 과연 예수님 편에 서 있는 걸까요?

오늘날 한국의 주류 교회들, 특히 대형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난받는 백성들의 삶의 자리는 외면한 채, 조찬기도회를 만들어 권력자의 안위와 번영을 빌어주는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우리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 그들은 우리 예수님과 아무 상관도 없을뿐더러 상반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행태를 보면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신을 모독하고 백성들을 속일 뿐 아니라 기득권자 편에 붙어 제 잇속을 챙기는 ‘거룩한 장사꾼’들에 의해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은 지난 이천년 동안 끊임없이 능멸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진정한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을 이어가는 선각자들은 남아 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신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민중의 모습으로 고난의 현장에 가계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하여 민중신학 이론으로 정립할 뿐 아니라 몸소 살아내신 안병무 박사님, 이 땅의 갈라진 현실을 참지 못하여 북으로 달려가 김일성의 목을 끌어안고 이제 제발 그만 싸우자고 외치신 문익환 목사님, 굶고 병든 이 땅의 백성들을 외면하지 못하여 그들의 삶의 자리로 달려가 함께 먹고 마신 허병섭 목사님 등은 진정한 예수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 전체로 보여주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들께 마음 깊이 경의를 표하며, 우리 교우님들도 예수님과 선각자들을 본받아 신앙과 삶의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 사이트 댓글이나 이메일로 질문이나 답글을 주시는 분께 일일이 답장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질문 내용 중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따로 적어두었다가 주일 편지를 통해 의견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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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3 07:12:09
지금의 천국없이는 내세의 천국도 없다!!
구약에는 스올만이 있을 뿐입니다. 스올이라는 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과 같은 것이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죽은영혼이 땅 밑에 위치한 곳(스올)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단순히 죽음의 상태에 머무른다는 뜻이겠지요.

눈을 씻고 보아도 구약에는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내세관은 구약과 신약중간기에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당시 이미 내세에 대한 대중적인 믿음의 히브리인 가운데 이미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조로아스터교 또는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외래사상이라고 보야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독극물을 마시기전 내세가 있을것임을 확신하며 요동없는 편안한 죽음을 맞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땅의 천국을 저는 세가지 측면으로 봅니다. 첫째는 우리가 살아 가면서 만들어 가는 천국의 삶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고 또 하나는 이 땅에 장차 궁극적으로 임하게 될 새하늘과 새땅이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악했던 맘이 예수의 가르침으로 가득할때, 이웃과 평화할때,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속에 진정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이 바로 이런 천국입니다.

정통기독교의 복음서 누가복음에서 뿐만 아니라, 그 반대세력이었던 영지주의의 대표적 복음서인 도마복음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마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하면 하늘의 새가 먼저 날아갈 것이고 물속에 있다하면 물고기가 앞설것' 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며 천국은 우리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아군과 적군이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서로가 동일한 이야기를 하는것을 보면 '천국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가르침은 예수님께 직접 육성으로 생생하게 가르치신 것으로 간주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예수님은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하여는 그리 큰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깊은 관심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과 같이 이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이었습니다.

기독교의 ISSUE는 예수믿고 천당가는 것이 결코 아닌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주제이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와 왔다고 했고, 예수님은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이들은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고 더러는 이곳에는 천국이 없다고 하며 죽은 후에만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세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의 천국이 없으면 내세의 천국도 없다는 것입니다. 귀있는 자는 들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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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
개혁본부 (211.234.205.0)
2013-02-03 15:17:55
내가 봤을때 내세 부정 하고있는데요?
단지 교회다니고 있으므로 전격적인 발언을 자제 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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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
참빛 (24.141.4.52)
2013-02-03 17:04:46
분명히 마지막 문장에 내세를 부정하지 않는다 했건만... ㅉㅉ 영 말귀를 몬알아 들으시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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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3 13:35:47
질문 하나 하지요.
예수가 죽어서 가는 천국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면 예수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예수가 정말로 부활했나요? 아니라면 복음서에 부활사건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 부활사건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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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6
참빛 (24.141.4.52)
2013-02-03 16:56:40
안녕하세요, 피키님. 잘못하다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이 될수도 있을것 같아 조심스럽네요. ^^ 제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을 조금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는 바로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저승에서의 천국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가고, 부자가 떨어뜨린 음식 찌끄러기나 주워먹다가 죽은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거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그 부자와 같이 욕심만으로 살지 말고 나누어 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주시기 위함에 목적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피키님의 부활에 관한 질문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같아 보입니다. 저를 약간의 곤란에 빠뜨리시려는 뜻도 있어 보입니다만, 저를 깨우치시려는 의도를 알고 있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해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인 부활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파하시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저항으로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는 신과 다름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제자들 사이에 이해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믿었고, 그러한 믿음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으로써 자연스럽게 설명되었으며 이것이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저는 성경의 많은 부분이 저자들의 신앙고백인 것처럼 부활도 제자들과 사도들의 신앙고백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자의 첫열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기 위해 살다간 사람은 예수님 처럼 다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한다는 사실 즉 영적부활을 경험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영적부활을 부인하고, 실제적으로 죽어 썩은 육체가 부활을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이단이던지 부활의 참의미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수천년간 간직해온 이 부활은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구심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에 닥쳐오는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도록 하는데 미래의 희망과 소망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피키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는 한결같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않는 자들을 '죽을자'로 말하지 않고 '이미 죽은자'라고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예수를 품고사는 사람은 부활한 자이며 영생을 이미 살고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는 삶을 사는 자는 이미 죽은자입니다. 죽었으니 그런 사람에게는 말할것도 없이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는 것이 되겠지요.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교만스러울 정도로 독선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힘의 논리 성공의 논리에 평만해 있다고 보며 예수의 원복음과 가르침은 상실된 채 교리적인 면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의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보고있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기독교가 나와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대로는 절대 않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의 계시, 영감, 부활, 기도의 능력 등을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는 유신론적인 감성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찬송가를 부를때면 눈믈이 자주 흘립니다. 말씀을 읽으면 감동이 됩니다. 기도를 마치면 평화가 찾아옵니다. 제게는 아름다운 성도들과의 교제가 그렇게도 좋을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번 기독교를 떠나 무교회주의자가 되려 하였습니다. 함석헌, 김교신 정도는 바라볼 수도 없는 주제에 불과하지만 그냥 집안에 들어 밖혀 있더라도 우선 교회를 멀리 떠나서 성경이나 파 보려고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정작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에 대한 애정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있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 기도의 능력 이러한 신비한 부분들을 믿고 있기 떄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부활도 지금이고 하늘나라도 지금이고 영생도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없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이러한 것들이 지금 없으면 내세에는 더더욱이 없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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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5 12:57:33
류 목사님
고독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의 심정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서 류 목사님의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선구자는 고독한 법입니다. 류 목사님이나 저나 그 길을 택할 때에 이미 그것을 알고 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양심을 속이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결과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류 목사님이 수년전에 한 학생을 놓고 겪으셨던 일과 유사한 일을 저도 비슷한 시기에 겪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찾았고 예수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가는 길은 달라도 종착역은 같다고 봅니다.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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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6 12:20:15
피키님... 그 '유사한 일'에 대하여 궁금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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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6 13:23:53
개인적인 일이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고

저는 40대 초반에 장로가 되었는데 교회에서 장로로 재직할 때에 제 양심에 지진이 일어났었죠. 교회와 목사들의 부패를 보면서 많은 고민을 하던 중에 근본주의 기독교가 제 머리속에 꽉 처넣은 것들을 벗어버리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몇몇 머리가 돌아가는 교인들에게 무지에서 벗어나라고 권하기도 하고 목사가 교회에 들여와 무당짓거리같은 무슨 전도 프로그램을 놓고 목사에게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대표기도를 할 때에는 축복이니 은혜니 이따위 단어들은 다 때려치우고 썩어가는 목사들과 예수없는 교회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난하는 기도를 하기도 했죠. 예배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교회에서 무언의 시위를 하기도 하고 본당에서 목사가 학생들에게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할 때에 저는 옆방 청년부실에서 젊은이들에게 예수를 믿으려거든 마음에 칼을 대고 세상의 찌꺼기들을 도려내는 마음의 할례부터 한 후에 고난의 삶부터 살기 시작하라고 피를 토하며 설교했죠. 그따위로 살 바에야 어디가서 예수믿는다는 소리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후로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슬슬피하며 저에게 말을 걸지 않더군요. 그리고 목사에게 이런 저런 긴 말을 하지 않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 싶은 것이면 닥치는대로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이 열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후에 저에게 너무나도 깊은 가르침을 주신 선배님이자 스승님을 만났고 세상을 제대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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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2-06 13:54:51
우와~ 박수를..
대~단 하십니다.

피키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틀린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용기..

그런데 그 해박하고 혜안적인 달란트를 오히려 끝까지 교회에 남아서 사용하셨으면 더 좋았었을지도 모르겠다 싶고요 지금이라도 다른 교회라도 가셔서..

평생 교회와 살아왔는데 어느날 철학을 하는 아들녀석이 읽고 있던 러셀의 책을 넘겨 보다가 재미가 나서 계속 읽다보니 그 분의 전집을 다 읽게 되었고 그때 이성이 무엇이고 바르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죠. 그후 마구잡이로 독서를 엄청 했고요.

저도 지금 그 근본주의 사상을 벗어 버리려고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저는 피키님처럼 성정이 강하지도 못하고 남이 상처 받을까 봐서 행동으로 강하게 옮기지를 못하고 이렇게 있습니다. 저도 한 두어사람 붙잡고 깨우쳐 보려고 여러 방면으로 시도해 봤는데 도저히 않되더라고요. 얼마나 세뇌가 되었는지 저의 말귀도 잘 못 알아 듣더라구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무슨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ㅠㅠ. 저만 힘들어 지고...

그래서 나 혼자만이라도 이성적인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 겠다 결정했지요. 교회 사람들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서.. 같은 족속 (Clan)이니까 같은 운명으로 같이 가는 것이죠. 언젠가는 꺠우치지 않겠나 하는 심정으로요.

물론 교회를 떠나서 무교회주의자가 되려고도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않되더라고요. 물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듯이 교회를 떠나서 살 수는 없을 것 같더라구요. 특히 외국에서 이민생활에 벗이 필요한데 인구도 없는 곳에 혼자 그러면 정말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구요.

하였튼 피키님으로 부터 엄청난 지식을 배웁니다. 더하여 정말 Picky 하실 정도로 오차없이 논리정연한 면과 불같은 용기도 함께 배우고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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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6 14:58:00
ㅎㅎㅎ
저는 한 교회만 거의 30년을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때 친구들과 함께 다니던 교회이고 거기서 결혼하고 애낳고 집사되고 장로되고...

목사와는 총각시절에 성가대에서 옆에 앉아 지내던 사이입니다.

다른 시무장로들과는 형님 아우 하던 사이입니다. 교회에서 제가 청년 때에 태어난 아이가 가운데 지금은 신학교에 다니고 곧 목사가 됩니다.

그런 교회를 떠나려고 마음 먹었을 때에는 황무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교회를 떠난 이후로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과는 아예 연락을 끊었습니다.

인간적인 연민 때문에 무뇌아 시절로 돌아간다면 저의 인격과 제가 추구하던 이성적인 삶의 가치와는 완전히 결별한다는 각오를 다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주위 사람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도 저희 식구들은 제가 무슨 이유 때문에 그 정든 교회를 나오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지 자세히 모릅니다. 다만 저의 종교관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만 압니다. 다 큰 자식들에게는 충격이 되지 않을만큼 조금씩 눈을 여는 작업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내는 그냥 놔둘렵니다. 크게 교회로부터 피해받을 일도 이제는 없을 것 같으니 그냥 이대로 살면서 소소한 기쁨이라도 누리는 것을 막을 권리가 제게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저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지라 진리니 이성이니 논리니 하는 것들을 그냥 교회생활레 익숙하다보니 그런 것들은 귀찮아 하는 성격입니다.

님도 편한대로 사세요. 강물은 흐르는 대로 흐르게 놔두어야 합니다.

4대강 공사 한다고 들쑤시는 바보가 아니라면 말이죠.

어차피 한번 사는 세상인데 자기 마음대로 사는게 최고죠.

부처나 공자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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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72)
2013-02-06 20:38:04
아멘
영원히 아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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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05 11:52:37
"예수님이 내 편이다"고 외친다 하여 예수님이 내 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는 예수님 편이다"하여 예수님이 내 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편이 먼저 되어주셔야 합니다. 그에 따른 우리의 반응이 예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랬고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찾아 나서는 구도자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벗어나 인간의 머리에서 만든 예수 편에 선다면 절대로 예수님은 내 편이 되어 주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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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5 12:18:21
이제 편가르기 그만했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 삽니다.
니편 내편 때문에 세상이 이토록 싸우는 것 아닙니까?

당당한 사람은 편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만족하기 때문에 외부의 원조가 있건 없건 그다지 관여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한 사람은 외롭지만 무소의 뿔처럼 고독히 앞으로 밀고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저는 류상태 목사님이 그러한 분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진실로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누가 두려워서 편을 만드려고 합니까?
입빌립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썩어 빠진 목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레퍼토리 입니다.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제가 보기에 '니편내편' 편가르시는 그런 분 절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순전한 믿음을 지니신 임빌립님과는 충돌하는 것이 정말 싫은데요. 또 다시 듣기 싫으실 글을 올려 드려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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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72)
2013-02-05 21:58:30
참빛님....예수님은
삶속에서 이미구별 하시고 선별하신분입니다...그시대 기득권자들에대한
입장과<독사의자식.가식과 위선> <연약한 민중에대한 끝없는사랑>
참빛님 니편 내편이 아닌 가식 위선에 매몰된자들과 공의와 평화를지향하는 분들의 구별될수밖에 없는 상황 입니다...예수님을 믿는것은 너무쉬우나 따르는 삶을사는것 너무힘들수밖에 없지요....그래도 그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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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05 12:50:13
진리에 설 것인가 비진리에 설 것인가
참빛님
편가르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류상태씨의 글이 편가르기 하는 것 아닙니까?
참빛님 또한 저의 댓글이 썩어 빠진 목사들의 레퍼토리라고 하는 것 자체가 편가르기라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썩어빠진 목사와 많이 싸웠습니다. 줄기차게 싸웠습니다.거의 20년은 된 것같습니다.
저는 썩어빠진 목사의 소리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것이 아니라
제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니편내편하는 것이 분열을 조장하는 것같아 안 좋지만 진리 앞에서는 진리와 비진리로 나누일 뿐입니다.
진리 편에 설 것인가 아닌가?
물론 다들 자기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하니 그 평가는 각자 혹은 타인들이 하겠지요.
또 성경이 그렇게 한다고 말할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성경에는 사람의 말도 있고 신화도 있고 꾸민 것도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성경을 거론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저는 성경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진리의 편에 서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원래 인간은 모두 하나님이 편들어 주셨고 그래서 모두 하나님 편이었지요.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편에서 떨어져나가 다른 편을 만들었지요.
조에 노예가 된 자들을 향하여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며(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겠다고) 자유를 주시려고(진리를 주셔서)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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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2-05 14:15:47
진리의 판가름은 그리 쉽게 되어지지 않는 겁니다.
임빌립님,
계속해서 평행선을 서로 그어 가는것 같군요. ^^
다른 것은 우선 접어 두고, 성경의 진리에 대해 조금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제작되어진 즉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위대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안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포함되어 있다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가르치기에 유익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경안에는 저자들의 지리적 시대적 교육적 문화적 등 여러가지의 제한적인 한계요소로 인하여 고의던 실수였던지 간에 하나님의 계시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오류와 낭설도 함께 동반하고 있습니다.

고로, 성경 자체로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Contradiction도 무지하게 많이 수록되어 있고 틀린 점들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보시고 견해를 조금만 넓혀 보시면 이 부분은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인식해야 할 것은, 진리란 반드시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눈만 열면 어디에서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바른 말을 하면 그 말도 진리의 말입니다. 옛 성인들은 비록 삼척동자에게도 그가 올은 말을 하면 큰 절을 올리고 지나 갔다고들 하지요.

성경이 진리라고 고집스럽게 믿는 것은 순전한 믿음을 이루려 하는 목적에는 부합할 수는 있으나, 그렇게 되면 성경 조차도 우상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구약 39권의 책에다 27권의 신약책 총 66 권의 책을 모아서 정경으로 하기로 결정된 집합체 입니다. 66권의 책이 성경으로 결정되기 이전에 수백가지의 다른 성서들도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아시고 계실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중에 66권이 선택 받은 것이지요. 사람들에게요..

말씀드리자면, 성경안에는 금관도 있고 돌맹이와 똥막대기도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유일한 진리의 출처(The Only Source of Truth)는 결코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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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06 06:17:13
참 진리
구의 표현처럼 이제는 언어의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진리'를 '다른 진리'와 대조하기 위하여 '참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할 것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진리'라고 할 때 타 종교에서 모두 각자 '진리'를 말합니다.
지금 참빛님은 어린 아이의 바른 말도 '진리의 말'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참 진리'일까요?

과학의 여러 법칙을 두고도 '진리'라고 표현합니다.
과연 '참 진리'일까요?

철학에서도 존재론적, 도덕적, 인식론적으로 '진리'를 찾고 있고 나름대로 답변을 하지만 '참 진리'일까요?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진리'라고 인식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습득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한 때 참빛님도 어떤 목회자의 말을 듣고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이곳에 댓글 다시는 분의 말씀을 '진리'라고 인식하시는 것같습니다.

한 때 이 사이트에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던 두 분이 계셨습니다. 저들은 각자 ‘진리’에 대하여 소신껏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타협하신 것으로 압니다.

어린 아이, 과학자, 철학자 저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말이 ‘진리’를 드러낼까요?
저들은 어떤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도 어떤 근거가 있는데 그것이 성경입니다.
어린 아이, 과학자, 철학자 저들도 결국은 외부에서 나에게 들어오는 것을 걸러내고 나머지를 ‘진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 성경이 주시는 말씀을 ‘참 진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떤이는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논리에 갖힌 분이 아님을 여러분들이 주장하시는 것 아닙니까? 교리에 빠지지 말라고.
사람이기 때문에 순환논리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오류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관점이 중요합니다.
성경 속에 사람의 말이 들어 있다는 주장이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름을 아시는지요?
성경을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종교적인 교훈만 얻으면 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사람의 말로만 인정합니다.
저는 사람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주신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사람이 한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원석이 아니라 모두 보석입니다. 원석은 버릴 것이 있지만 보석은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 보석들이 어울려서 빛나는 의의 면류관을 만듭니다. ‘참 진리’를 드러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각주구검’과 같습니다. 그 진리의 근거는 늘 흔들립니다. 세상의 조류이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참 진리’는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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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6 07:55:49
마지막으로, 재차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고자 함에 유익한 지침서이지 성경자체가 진리(또는 참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냉정하게, 성경은 활자로 되어 박혀있는 종이 책에 불과한 겁니다.

달을 쳐다 보라고 가르키는 손가락이 바로 성경입니다. 쳐다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자꾸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성실한 댓글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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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ip Im (70.62.49.64)
2013-02-06 09:13:18
참빛님의 글은 성경을 바라보는 저와의 시각차를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오직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혹 참빛님은 성경 외 어디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물론 성경책은 종이책입니다.
엄동설한 얼어갈 때 불쏘시개로도 사용할 수 있지요.
활자로 표현되지만(우리는 이 묶음을 성경책이라 하지요) 그것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 하지요.

제가 사용하는 성경이란 용어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뜻을,계획을 담고 있는 책이자 동시에 말씀 그 자체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님과 같이 성경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 손가락 마저도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님과 다른 것 같습니다.
무수히 많은 손가락들이 달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달이 아닌 엉뚱한 것을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타종교라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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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6 10:33:30
임빌립님.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경은 오직 유일한 진리의 출처 (The Only Source of Truth) '는 결코 아닙니다. 근본주의자들의 결국적 발언은 늘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이 유일한 진리의 소스이다' 라는 것이지요..

끝내 그렇게 믿으시겠다면 어쩔수가 없군요. 그냥 그렇게 사시는 거죠.

그러나 성경에 있는 말씀 죄다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면 큰일납니다. 근본주의자가 되면 자기교만, 우월적 자기도취와 극단적 편협성에 빠져서 상식선을 넘는 위험한 행동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무지한 행동들이 그들에게는 자랑꺼리까지 되기도 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오로지 유일한 진리의 출처라고 떠들며 맹신자(평신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말도 않되는 부분을 그대로 진리로 믿으라고 억압합니다. 그리고 맹신자들은 그대로 행하고… 그래서 지금의 개독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보십시오. 그렇게 떄문에 제가 이렇게 애써 근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논의에서 타 종교를 갑자기 끌고 들어오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기독교적인 범위내에서의 이야기이고요. 저는 사실 타 종교의 서적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눈으로 보려고 하였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버릴것은 버리고 하지요.

동양사상, 서양사상, 여러 성인들의 말씀들과 타 종교의 기르침을 배우고 알아감으로써 (그렇다고 그들의 종교적 예식은 따르지 않습니다.) 나의 좁았던 하나님에 대한 눈이 더 넓어지고 풍성하게 되었다면 믿겠나요?

하나님은 성경안에만 갇혀 계실 그런 얄팍한 분이 아닙니다!! 귀 있으시면 꼭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상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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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06 11:02:24
저는 근본주의자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 가운데도 성경을 절대무이의 진리로 받아들인다고 알고 있습니다.

참빛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성경에 있는 말씀 죄다 그대로 행동에 옮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시의 점진성에 대하여 생각할 때 율법을 그대로 지키지 않지요. 저는 토요일이 안식일이라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요일을 주일이라 하면서 그날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매일매일이 우리에게는 안식일이라 믿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이 예배 장소요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의미 없다고 믿습니다.
이 정도의 신앙 고백이면 참빛님이 걱정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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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6 11:22:31
성경을 절대무이의 진리로 받아들인다 = 근본주의자
절대무이가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아시고나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복음주의자는 주로 근본주의자가 근본주의자라는 나쁜 이미지를 면하기 위해 주로 쓰는 가면적 명칭이라오..

그리고 성경이 '절대무이' 하다면 그대로 믿고 적힌 그대로 100% 마땅히 행해야지 왼 딴소리를 하시는지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요. 한입으로 다른 내용의 말씀을 하시니 스스로 모순을 보이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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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05 11:40:13
[류상태의 다른기사 보기]를 클릭하셔서·
[칼럼] ‘화해와 소통을 위한 봉축 108배’ 드리기를 권합니다. [새창] 류상태 2010-05-12 를 보시면 류상태씨의 글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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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02-05 08:01:04
성찰과 숙고에서 산출되는 류상태 님의 귀한 글
아마도 거의 모든 것을 내던지셨었기 때문에
류상태 님은 지금 이런 글을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다수의 목사라는 자들은 또 그들에게 세뇌되어
스스로는 아무런 생각조차 못하는 적지 않은 맹신도들은
류상태 님의 이런 글들에 딴지를 걸고 자신들의 무지를 자랑합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이전의 거의 모든 전통과 신학을 송두리째 집어던지고
이제 걸음마를 다시해야 합니다.
그래도 당당뉴스가 희망적인 것은 류상태 님의 귀한 글들을 이렇게 실어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마도 장로교 계통의 골통 매체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이곳 당당에도 뉴조에서와 마찬가지로 머리없는 맹아들이
허접하고 공로도망케 하는 댓글들로 본질을 흐리고
죽음의 맹신을 찬양하는 글들을 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상태 목사님, 당당뉴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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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72)
2013-02-05 22:00:42
아멘..................
아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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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자득 목사님 (203.226.222.148)
2013-02-04 19:41:50
목사 로서 그것도 주일날 절(불교) 에 가서
108번배 했다면 그것은 목사 의 직분을 거두어야 합니다ㆍ

지금 이글을 쓴 류상태 목사 가 정말 그랬다면 당연히 파직 시켜야하므로
정말 이글을쓴 류상태 목사 가 정말 그리했는지 대화형식 으로 꼭! 취재하여
여기 당당에 밝혀 주십시오 아니면 정말 큰혼란에 휩쌓입니다ㆍ

꼭 취재 부탁 드립니다 ㆍ
포탈 사이트에 "류 상태목사" 검색 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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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03.226.222.148)
2013-02-04 19:31:04
보슈들 류상태 를 혹시 보호 하려고 이리 긴 글들을
쓰고 있 씀까? ㅎㅎ

다움넷을 비롯한 포털사이트에 "류상태 목사" 이리 검색 하면
주일날 절간에 가서 108번배 그런거 했다고 뜨든데ᆢ
그 장본인 이 이글을 쓴 류상태 목사 가 맞습니까?

왜 침묵속에 본인을감추고 있습니까?
당당한 본인의 의도가 있었다면 밝혀야지요!

그답을 기대하고 기다려볼게요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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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72)
2013-02-05 22:03:44
개악본부는 개콘인가
개악 본부여...자네보기에는 그분이 뭘 보호받는다는 한심한 생각을하는가...그분은 이미 십자가를지셨네 자네같은 개악본부가 무뇌아에서 심장이 뜨거운 사람으로 구원하기 위하여....아시겠는가...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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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4 16:37:34
참빛님,
제가 질문을 드린 이유에는 특별히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제가 참빛님의 글을 읽고 참빛님이 부활에 대하여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가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참빛님이 말씀하여 주신 부활에 대하여 저도 그다지 다르다고 할 수 없는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부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은 아마도 기독교의 생명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 사건이 기독교에서 처음부터 이런 정도로 핵심적인 사건으로서의 비중을 가지고 다루어졌을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그리고 부활 사건이 기독교에서 지금과 같은 중요한 신학적 중심점이 되어가는 과정을 이해하다보면 본 기사에서 말씀하시는 영성과 운동의 기독교가 교리의 기독교로 되어버린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참빛님뿐만 아니라 본 기사를 읽는 독자들이 그 점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물론 그에 앞서 참빛님처럼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구하며 열린 자세를 지니신 분들이 부활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가도 궁금하기도 했지만요.

초기의 기독교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들이 여러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초기 기독교의 성장이 이루어지면 그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유대인 그룹에서 그리스 로마인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심점의 이동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바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음의 촛점이랄까 아니면 그 기독교의 중심적 개념을 복음이라고 부르는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예수의 부활로 옮긴 사람이 바로 바울이라는 것이죠. 그 이후에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의 종교로부터 예수으 부활의 종교로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본 기사에서 언급한 내용과 평행선상에 말하자면 예수는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노출시키는 것을 말하였고 그것이 바로 한 개인의 마음과 생각의 변화라고 가르쳤지요. 한 개인 개인의 생각과 세계관이 바뀌면서 천국은 한 개인으로부터 사회로 퍼져나간다는 원리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개념을 확실히 믿는 것이 마로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신념을 굳게 가질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시화적 확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면에서 한 개인의 차원에 국한된 채 볼 때에 삶의 전반적 가치관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율법적인 삶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당시의 율법적 도덕과 사회윤리의 차원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개혁을 각각의 인간에게 요구하였던 것이죠.

따라서 영적 운동성과 사회적 운동성이 결합된 개혁의 개념을 예수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지금 우리가 언급하듯 사회적 운동성이니 영적 운동성이니 하는 개념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이런 개념들을 얼버무린채 그대로 시행에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분석하여 나누는 이성적 활동이 필요없이 순수하게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노력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유대인 그룹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스펙트럼은 단순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부패하였지만 전통적인 유대교의 종교관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개혁적인 취지를 가진 유대교의 한 지류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들은 어떤 새로운 종교운동은 전혀 상상하지도 않고 그들만의 유대교적 종교관의 확장 내지는 개혁적 기치를 내걸고 예수운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죠. 즉, 이들에게는 예수란 인물이 남긴 정신은 그들의 집단에서 실행에 옮길 가치가 있는 새로운 정신적 운동으로 평가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그리고 에세네파처럼 유대교에도 많은 유대교적 이데올로기의 지파들이 존재하였는데 이들도 예수의 새로운 운동을 그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에서 그들만의 지파를 형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는 기독교를 만들려고 한 적도 없고 그의 제자도 마찬가지라는 의견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여러 학자들도 유사한 갼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가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는 의도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죠. 그렇다면 어떻게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생하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예수의 영적 운동성과 사회 운동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처럼 예수의 사후 이후에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에게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던 모습이 불과 2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바뀌게 된 변화의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울입니다. 이 즈음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바울도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기독교라는 신흥 종교의 길을 연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 흔히들 하는 말이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를 비롯하여 많은 부분에 걸쳐 다양한 사실들을 이해하여야 하기 때문에 류상태 목사님은 본 기사에서 그 결론적인 부분만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예수의 오히려 예수를 잡으려고 다니던 유대교의 열성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생각이 바뀝니다. 신약에서 바울이 예수를 영적으로 만나는 장면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동안 들어온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아, 바로 이거다!'라는 식으로 깨달음이 있었다는 표현입니다. 바울이 사흘 동안 안질이 생겨서 앞을 보지 못했다는 것도 그리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이라는 표현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다메섹이라는 도시 이름을 거론했는지도 모두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바울은 다메섹으로 갈 아무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간과하지만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어쨌든 바울은 구약에 정통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가 한 말을 놓고 구약을 펼쳐가며 굳이 대조를 하지 않아도 예수가 말하는 내용이 구약의 어떤 부분에 해당되는 내용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예수가 말한 비유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죠. 그 비유속에 숨어있는 상징성을 가지고 구약을 훑어갈 때마다 구약에 있는 내용이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특히 구약 가운데 율법을 다루는 부분을 놓고 볼 때에 예수가 말하는 내용이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면서 바울은 아마도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경전뿐만 아니라 그리스철하과 같은 당시의 신학문에도 정통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말라기 선지서가 쓰여질 때부터 그 이후 예수의 출현까지 약 300년 정도는 유대교의 암흑기이자 혼돈기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많은 다양한 유대교적 분파가 나타났죠. 바울은 그런 시대의 말기에 때어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바꾸어 말하자면 바울은 토라를 성스러운 문서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쓰여진 율법에 충실한 유대교인이었을 뿐 율법과 토라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에 대하여는 접근이 금지된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대적으로 영적인 암흑기의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다군다나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고고학이나 여타 학문을 통해 토라가 그 이전 고대국가의 신화로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고 원래의 히브리어로 된 토라가 아닌 그리스어로된 70인역이 오히려 더 보편화된 세대였기 때문에 바울을 포함한 많은 유대인들은 희석된 유대교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그리스 문화가 이미 500여년 가까이 중근동지방을 지배한 후여서 노예로 살아온 유대민족에게는 오래 전 그들의 선조가 지녀 온 율법의 핵심적 사상에서 많이 멀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도 이미 사상적으로 그리스 사상과 전통적 유대사상이 혼합된 사상적 기틀을 가지고 단지 혈통적 전통만을 따라 유대교를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바울의 사상적 체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때서야 예수가 남긴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고 예수가 유대교의 배교자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들과 같은 존재와는 달리 야훼가 보낸 선지자 혹 그 이상의 어떤 영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수년간을 생활하면서도 예수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이 무식한 어부 출신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던 율법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다른 제자와 유사한 형태의 율법에 대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지만 많은 학문을 섭렵한터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능력은 달랐을 것이고 따라서 예수의 복음에 대하여 제자들과는 달리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바울 자신도 그 깨달음 이후에 예수가 사용한 비유처럼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의 신앙적 견해를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 사용했습니다. 지금 신학에서는 이 사실에 대한 접근이 가장 취약한 부분입니다. 제가 자꾸 상징적인 표현에 대한 강조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있으실지는 몰라도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울의 서신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바울이 자신의 서신들을 통하여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었으며 또 바울이 지닌 예수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본래 복음서에 나타난느 예수의 보긍ㅁ과는 무엇이다른 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내용은 그냥 저만의 상상이 아닙니다. 학문적으로도 여러가지 근거가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는 상징적 표현과 구약 그리고 예수의 비유에 나타나는 상징적 표현 리 세가지가 어떻게 일치하는 지를 바울의 서신을 가지고 먼저 설명을 드리면서 이해를 구한 뒤에 바울이 지니고 있던 복음에 대한 이해, 즉, 바울의 신학적 기틀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많은 예가 있지만 우선 고린도서의 예를 가지고 보겠습니다.
아직도 신학적으로 풀리지 못하는 문제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교회에서는 여자는 잠잠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라고 합니다. 또 교회에서 여자가 질문할 것이 있거든 집에 가서 남편에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보면 성차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는 성차별이라고 할 만한 그런 내용을 입에 담은 적도 없고 또 여자 사도들에게 문안을 하라는 안부의 내용을 볼 때에 고린도전서의 내용은 남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학자들도 여기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은 있지만 정확히 설명을 하는 주장은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학자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함정은 바울이 학문적으로 당시에 신식학문을 배운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그리고 그의 글이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논리적 구성이 질서정연하다는 사실때문에 바울의 글에 어떤 알레고리적인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사상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에는 여기 저기에 알레고리적인 표현이 숨어있습니다. 예수의 비유를 혼자서 풀어낼 정도이니 자신이 그런 알레고리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이 여자에 관하여 말하는 내용을 알레고리적으로 풀어보면 너무도 논리정연하고 당연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는 성차별과 같은 문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가 성차별을 할만한 그런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 그가 성차별적인 발언을 했을 리가 없는 것이죠.
좀 복잡한 내용이기 때문에 설명이 길어지겠지만 일단 이해를 하고 나시면 성경을 이해하시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본문의 몇 구절을 옮겨보겠습니다. 고린도 전서입니다.
11: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11: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11: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또 여자에게 관련된 다른 구절입니다.
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14: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교회에서 여자의 위치에 관련되어 11장과 14장의 두 내용을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11장의 경우에 남자는 머리에 뭔가를 쓰지말고 여자는 뭔가를 쓰고 기도하라는 말인데 이게 구약에도 어떤 근거가 없는 내용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14장의 경우에도 율법 어디에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옵니까? 없습니다. 구약은 오직 제사법과 정결법인데 거기에 남녀의 구별이 있는 경우는 딱 하나 여자의 출산후의 정결법에 관련되어 사내 아이와 여자 아이를 낳릉 경우에 대한 정결법입니다. (물론 이것도 모두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규례들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든 아니면 상징적으로 해석하든 여자가 성전이나 회당에서 입다물고 있으라는 규례는 없지요. 그럼 바울이 틀린 것인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율법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면서 그 원리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는 육적으로 남녀의 성구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영적인 성을 가지고 구분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즉, 남자라는 표현이 나올 때에 생물학적인 남자가 아니라 영적인 남자 그리고 여자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여자를 상징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남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남녀를 차별할 때에는 영적인 질서를 가지고 영적으로 남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과 여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여 영적인 질서에 대한 가르침을 줄 때에 차별하는 것 같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영적으로 여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도 성숙함에 도달하면 영적인 남자의 위치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상징적 표현을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여호와는 남자는 밭을 가는 수고를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당한다는 운명론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이 문장은 문자적으로 보아도 아주 간단한 애기죠. 남자는 일하고 여자는 애 낳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이처럼 당연한 이야기가 사실은 매우 깊은 영적 의미를 지닌 이야기라는 것이죠. 남자가 밭을 간다는 말에서 영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가 남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끊임 없이 자신의 마음밭을 갈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안으면 부패해지는 것이 남자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부패해지면 그 다음은 끝이죠. 구약의 역사나 한국의 교회를 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남자는 여자에게 씨를 뿌립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죠. 그래서 지도자의 위치가 아니라 말씀을 배워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자는 모두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씨를 받아 새로운 영적 생명을 잉태한 여자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기 위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생명이란 가장 처음에는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을 죽여서 스스로가 중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여호와가 장자를 찾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다시 태어나게 되면 여호와 앞에 장자가 되는 것이죠.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도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알아야 왜 야곱이 차자임과 동시에 이삭을 속이고 장자권을 가지고 있는 에서를 속였는데도 장자권이 이삭에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매우 간단한 원리이기 때문에 이런 상징적 의미만 알면 아주 간단한 이야기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인데 그걸 모르기 때문에 목사들이 이 이야기를 꿰맞추느라 별별 상상을 다 동원해서 말을 꼬고 또 꼬아서 자기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처음에는 여자로 있다가 해산의 고통을 통해 자신 스스로가 다시 태어나고 그 이후에는 또 다른 생명을 낳기도 하고 영적으로 더 성숙해지면 남자가 되어 말씀의 씨를 뿌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율법에 여자와는 달리 남자에게만 할례가 있고 또 할례가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행위가 된 것도 모두 이런 영적인 원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말씀의 씨를 뿌리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그 생명의 씨가 나오는 부분을 상징하는 남자의 성기가 표피로 덮여 있어서 세상의 먼지처럼 더러운 물질이 있으면 부정한 씨로 인해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생명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이처럼 구약의 율법은 모든 것이 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할례를 팔일만에 하라는 규례 가운데 하필이면 팔일로 명한 것도 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 정도면 남자와 여자가 영적인 구분을 위한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바울은 이전에는 그냥 율법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는 있었겠지만 이런 상징적인 의미는 예수의 복음에 대하여 고민을 하다가 깨달았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도 구약의 표현을 그대로 차용하여 알레고리적인 표현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는 교회내의 질서적인 면에서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질서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려고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장에서 영적인 남자와 여자가 교회내에서 준수해야 할 질서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지녀야 할 영적 태도와 그 지도자의 가르침을 배워야 할 영적 여자들의 지녀야 할 태도를 가르치는 내용이 바로 11장의 내용과 14장의 내용입니다. 물론 다른 장들도 그런 내용이지만 특히 이 두장은 영적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분명히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지요. 11장 4-5절을 간단히 말하면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지 말고 여자는 그 반대로 머리에 뭔가를 쓰고 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머리란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진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삼손과 잠언의 예를 가지고 설명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로 표현된 남자가 머리에 뭔가를 쓰게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를 가리는 것이므로 머리에 뭔가를 쓰지 말라는 것이고 여자는 머리에 뭔가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질서적으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영적 남자보다 더 위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리라는 말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지도자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충분히 드러내고 반면에 영적 지도자에게 배움을 받는 자들은 자신의 지혜를 사람들 앞에 뽐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가시면 14장의 문제도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14장의 경우에는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하는 것 또한 질서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가 있는데 아직 지도자의 위치에 있지 않은 영적 여자가 좀 안다고 가르쳐 들지 말라는 이야기이죠. 그리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보라는 것은 자신에게 정해진 지도자에게 묻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이라는 것은 영적 가정을 말하는 것이고 남편 또한 자신에게 영적 씨앗을 뿌려주는 영적인 남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자기 담임목사죠.
간단히 말해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인 교린도 교회에서는 아직도 교회가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옳다 아니다 네가 옳다를 말하며 싸움박질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내의 질서란 지도자에게 배움을 받는 자는 입을 다물고 지도자의 말을 듣고 만일 의문나는 것이 있거든 자신을 가르치는 지도자에게 따로 물어보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는 것이죠. 시장통처럼 서로 잘맛다고 떠드는 시장통과 같은 곳에서 질서를 가르치는 것이죠. 물론 바울이 말하는 질서도 구약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질서의 이치를 그대로 영적인 상징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지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구약도 그 안에 선민이라는 영적 집단이 지켜야 할 영적 질서에 대하여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이방인 여자를 취하는 것을 보고 불만을 터뜨렸을 때에 저주를 받아 문둥명에 걸리는 것도 이처럼 질서의 문제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표현을 통한 가르침이고 아론과 미리암 중에 미리암만 문둥병에 걸린 것도 질서의 이치에 따른 것입니다. 그냥 문자적으로만 보면 절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 성경의 난제중의 하나죠.

고린도 교회라는 곳이 하나의 개교회가 아니라 고린도 지역의 교회 전체를 말하는 것이니 만큼 더 이해가 쉽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몇몇 가정이 모여서 작은 모임을 가지고 말씀을 배우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회당 같은 곳에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교회라는 단어를 지금의 교회와 혼동하면 안됩니다. 그 당시에 교회라는 개념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지 지금처럼 목사가 있고 교인들 등록을 하는 그런 제도적인 종교로서의 교회가 아닙니다. 차라리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교회보다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체계적인 제도도 없이 지금과는 달리 상주하는 담임목사 같은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듣고 난 이후에는 조직적인 질서가 없어서 모두가 자기가 생각하고 배운게 옳다고 논쟁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는 이방인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행위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무질서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려고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이죠. 바울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보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이후에 정통주의자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천주교에서는 여자들이 미사시간에 머리에 하얀 수건 같은 것을 쓰는 전통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신부나 목사가 되지 못하는 웃기지도 않은 성차별이 기독교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구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기독교는 예수의 복음은 둘째치고 바울의 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종교가 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예를 더 가지고 설명을 드린 뒤에 바울이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들의 조상이 여호와 앞에 저지른 범죄들을 나열하며 자신들은 그런 범죄에 빠지지 말자는 취지의 글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 가운데 재미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바울은 8절을 포함하여 그 전후에 이어지는 문장을 구약의 사건들을 예로 들면서 유사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은 신학자들이 영 엉뚱한 말을 하는 구절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구약의 어떤 사건을 가지고 바울이 말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설명을 하곤하죠. 제가 찾아본 대여섯가지의 주석서를 보면 모든 주석가가 하나같이 바울이 말하는 이만삼천명이 죽은 사건은 민수기 2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여자와 간음하다가 염병에 걸려 죽은 사건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민수기 25장에서 죽은 자의 수는 이만사천이라고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사본학적으로도 이 부분에는 어떤 문제가 발견된 적이 없죠. 그런데 주석에는 이만삼천과 이만사천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정말로 어이없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반올림의 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민수기를 쓰면서 반올림을 했다면 바울은 당연히 모세가 반올림을 한 이만사천이라는 숫자를 그대로 썼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반올림을 했다는 얘기인데 바울이 수 천년전의 일을 어떻게 알고 반올림을 하겠습니까? 이게 말이 되지 않는 얘기죠.

그러나 상징성을 이해하고 성경을 읽으면 바울이 구약의 무슨 사건을 가지고 8절을 이야기하는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울은 민수기 25장이 아니라 바로 뒤에 이어지는 26장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26:62 레위인의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모든 남자가 이만 삼천 명이었더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들에게 준 기업이 없음이었더라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이만삼천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곳은 민수기 26장과 바울이 말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0장 뿐입니다. 결국 바울은 민수기 25장이 아니라 26장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맞을까요? 바울은 지금 자신의 조상 가운데 간음하다 죽은 자가 이만삼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6장은 다만 레위 족속의 인구를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 두가지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바울이 말하는 간음이란 육적인 간음이 아니라 영적인 간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 간음을 한 자신의 조상은 바로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어야 제사장들, 즉 레위족속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영적 간음이 자신들의 조상을 부패한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구약의 민수기의 숫자를 가지고 증거하는 것이죠.
여기서 눈여겨 볼 단어는 간음이란 단어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육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와 같은 간단한 내용을 다루기도 하지만 아주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적인 내용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쓰인 단어는 모두 영적인 가르침을 다루는 단어이기 때문에 그대로 해석하면 완전히 엉뚱한 이야기가 됩니다.
간음도 마찬가자입니다. 간음은 영적인 간음을 말하는 것이지 육적인 간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죽이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간음과 같이 성적인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유난히도 많은 이유는 간음이라는 것이 우상숭배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표현되기 때문이고 또 질서적인 부분에 있어서 영적인 아내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대신에 또 다른 영적 지도자에게 주어진 영적 아내를 탐하는 것을 질서의 차원에서 엄격히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자의 경우를 쉽게 말하자면 이미 다른 교회에 다니면서 그 교회의 목사에게 성경을 잘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르쳐 들려는 그런 욕심이 인간에게 나타나는데 이것을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심지어는 한 지도자가 다른 지도자를 가르쳐들려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성경은 남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여자쓰기를 버리고 오히려 역리로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질서를 망각하고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내세우며 다른 지도자들을 가르치려 든다는 말이죠.
신학자들 가운데에 당시에 성전 남창이 있는 이방종교에 대한 예를 들면서 남색의 경우를 바울이 지적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로마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교회내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방종교의 문제 때문에 발생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동성애에 관하여 기독교가 얼마나 멍청한 실수를 통하여 수도 없이 사죄를 해도 모자랄 수치스럽도 죄악이 넘치는 역사를 써나갔는지는 책으로 써도 시리즈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서를 가지고 왜 동성애에 대하여 죄라고 하는지도 이제는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성경은 동성애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영적 교훈을 위한 책이라는 것이라는 것만 말씀드리죠. 기독교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규장한다고 주장하는 성경의 모든 구절이 잘못된 해석과 잘못된 번역때문입니다. 구약의 소돔성 사건이나 사사기 19장의 사건이나 로마서나 모두 한마디로 무지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무지가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적인 무지는 맹신을 낳고 맹신은 자칫 잘못하면 대량학살까지도 이르게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단지 한 개인의 패가망신으로 끝이 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근본주의의 무지를 고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고 지금도 피곤하지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정신을 회복시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거나 아무런 가치 없는 일에 희생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막는 것이죠.


제까지 말씀드린 것을 이해하신다면 바울도 예수처럼 그의 글 가운데 많은 부분을 알레고리적인 표현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에 대한 이해를 서술했다는 것을 내용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바울에 관하여 얘기해 보죠.

자,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의 복음에 대하여 얼마나 이해를 하고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신약 가운데 바울이 쓴 13권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복음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바로 전하고 있을까요?

그 답은 아시겠지만 'No' 입니다.

지금까지 오래 교회생활을 하셨으니 눈치채셨을지도 모르시겠지만 보편적으로 목사들이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복음서를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바울의 서신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정통주의 기독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울이 기독교 신학과 교리의 초석을 세웠다거나 아니면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잘 이해하여 그 원리를 로마서나 고린도서를 통하여 잘 정리하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말한다면 기독교의 교리는 바울이 세웠고 예수의 복음은 그 재료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길게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으니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 가운데 부활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면서 부활이란 개념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복음에 있어서 부활은 가장 주변의 변두리에 있는 개념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삶과 동시에 세상과 떨어짐입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사랑이 예수의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복음을 구약과 평행선상에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새계명으로 사랑을 말했지만 그것은 계명일뿐입니다. 계명은 명령이고 그 최종 목적은 그 명령을 따르고 난 후에 나타나는 것이죠. 지금은 이해를 하실지 모르겠지만 사랑이란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삶이란 지극히 개인의 영역에 국한 된 것이라는 차이를 이해하신다면 결국 사랑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인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가치이지만 결국 인간은 홀로 남아 세상과 싸우는 고독한 존재란 것을 볼 때에 사랑이란 집단적인 가치에 머무르는 것이죠. 예수도 자신의 삶 가운데 제자들에게 그리고 넓게 본다면 온 인류를 향해 사랑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예수 자신의 삶 속에서는 끝없는 고독을 경험하며 세상과의 관계를 끊어냄으로 인해 세상을 등지고 세상에서 마음을 떼어내는 작업을 하면서 살아갔죠.

그래서 예수가 '사랑하라!'라고 외치며 공생애를 시작하는 대신에 '자신을 부인하고'라는 말을 가지고 시작한 것입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말은 인간적 본성은 세상으로 향하지만 그것을 버리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을 향한 뜻임과 동시에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이죠.

바울은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는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구요.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것의 끝에 부활이라는 사건을 너무도 크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부활이 얼마나 강하게 강조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울은 예수가 말하는 재림을 실제적인 육적 재림으로 오해한 것이 가장 큰 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오기 전까지 가급적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려고 무진 애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한번도 방문한 적도 없이 베드로가 세운 로마교회에 편지까지 보내고 그 편지에서 자신의 신학적인 사상을 증명하면서까지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물질적 후원을 얻어 스페인까지의 전도여행을 준비한 것이죠. 사도들관느 껄끄러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바울이기에 당연히 로마교회의 인정을 받는 것은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보면 동족인 유대인의 편을 들기보다는 그들을 오히려 혹독할 정도로 비난하면서까지 그들의 율법주의에 대하여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 언급할 것은 바울은 예수가 말한 '속히 오리라'는 내용을 잘못 이해함으로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내의 ㅇ여적인 질서에 대하여는 분명한 태도를 조여주었으나 실질적인 조직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이 없었던 것이죠.

아주 간략하나마 바울이 가지고 있던 예수의 복음에 대한 이해오 오해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바울과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내의 복음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지니고 있던 복음에 대한 이해는 복음은 예수의 가르침인 반면에 바울은 그 가르침의 촛점을 흐리게 할 정도로 예수의 부활에 무게중심을 옮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바울과 사도들의 사후에는 그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려서 '복음=예수의 가르침'이라는 공식이 정통주의자들에 의해 '복음=예수의 부활'로 변하게 되고 결국은 복음은 예수가 가르친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은 예수에 고나한 이야기가 됩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복음은 원래에는 Story Jesus told라고 이해되던 것이 Story about Jesus로 변하게 되었죠.

그래서 정경이 정해질 당시에 바울의 글이 27권중 13권이나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정통주의자들의 입맛에 아주 딱 맞는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바울도 종교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종말이 곧 올텐데 종교를 세우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죠.

그러나 바울 이후에 정통주의자들은 결코 예수가 곧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처럼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면 예수가 곧 다시 와서 세상에 종말이 오고 심판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를 세워나가기에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가 곧 오리라고 말한 복음서는 정경에 집어넣었죠.

이런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바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바울의 종교가 된 기독교는 따라서 영성운동을 말할 정도는 커녕 자신들의 신학적 모델이자 교리의 기초를 제공한 바울의 글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개혁을 말하는 피지배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중심에 우뚝선 지배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영성과 사회의 정의는 기독교에 걸맞는 단어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왜 기독교가 평화와 사랑이라는 구호를 앞세운 종교이지만 오히려 전쟁과 폭력 그리고 맹신과 무지를 강요하고 억압과 독선과 배타성만이 가득한 종교의 역사를 써왔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또 하나의 단면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류상태 목사님이 말한 교리의 기독교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태생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복음이라고 부르는 대신에 예수를 신으로 숭상하는 고대의 이방종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니 거기에 무슨 예수의 정신이 있었겠습니까?

기독교는 복음을 복음으로 알고 실천한 적이 역사에서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편한 진실이지만 고백하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이름은 남아있을지 몰라도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성읍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확대하여 보면 왜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부정과 부패와 윤리적 타락과 심지어는 일반인이 보여주는 인격과 도덕적 수준에도 못미치는 행동을 보여주는지 이제는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긴 얘기였지만 필요하실 것 같아서 그리고 혹이나 관심이 있는 다른 분이 읽으시면 유익할 것 같아서 적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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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2-05 01:20:01
먼저 늘 그랬듯이 좋은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몇가지 제 생각을 첨부해 보겠습니다.

얼마전 가까이 지내는 몇 분들과의 대화중에 그 분들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기독교의 교주는 누군가?' 라고요. 어이없게도, 한 분은 예수님이라 답했고 한 분은 '하늘의 열쇠를 부여받은 수제자 베드로'라고 하더군요.

대다수 신자들이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수십년을 교회에 다녔어도 이런 기초적인 상식도 모른 채로 다닙니다. 기독교의 교주는 바울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피키님께서 자세히 말씀해 주셔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함석헌 옹께서는 기독교 신앙을 보화가 가득찬 궁궐로 보시지 않았고 생명력을 품고 자라나는 나무로 보았습니다. 발전하고 무럭무럭 커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기독교도 역사와 함께 그러한 과정을 지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신학도 교리도 조금씩 다 변하며 새로운 생각들이 첨가되기도 하고 기존의 수용되었던 것들이 잘려 나가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알레고리칼 해석에 대한 저의 소견을 올립니다. 저는 최근 피키님의 알레고칼 적인 해석에 감명을 받고난 후 다각도로 이 부분에 대한 공부를 나름대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중 난제들 또 어불성설한 애용들 난해한 부분들은 몇가지 정도는 알레고리적인 해석으로 설명된다고 할 수 있다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많은 성경의 내용을 그러한 방법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스스로 위험에 처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어떤 것이라도 너무 지나쳐 버리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녀에 관한 차별적인 바울의 언지는 저는 아레고리컬적인 면으로 보지 않고 이 부분에 저자가 자기의 개인적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바울의 생각과는 위배되는 말을 첨가하지 않았겠나 합니다. 다시말해, 남성여성의 차별을 문자 그대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사실 바울의 메세지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말이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남녀차별 문제의 해결은 도마복음에서 찾았습니다. 바로 '남성안에 여성이되고 여성안에 남성이될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니라' 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00% 지위적 남녀평등을 외치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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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5 04:41:17
오해하시지 마시기를
알레고리적 해석을 제가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인 성경의 해석의 기준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문자주의에 치우친 성경 해석이 오늘날의 기독교를 만들어왔듯이 알레고리적인 해석으로 치우치는 것도 유사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이유는 문자주의적인 해석이 아닌 다른 해석 방븝으로도 성경은 충분히 이해할 수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대하여 열려있어야 함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바울의 서신에 누군가가 차후에 삽입한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학게에서는 이런 견해가 아직은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오래된 사본이 또 발견되고 그 사본에는 이 부분이 다른 식으로 적혀있거나 아니면 아예 없다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도있죠.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발견이 없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은 없다고 봅니다. 그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죠.

도마복음의 경우는 아주 조심해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문자 그대로 그 의미를 전달한 경우는 없습니다. 영지주의 자체가 신비주의에 가까운 영적 이해를 도모한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문서는 도마복음을 포함해서 아주 난해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정경에 속한 복음서나 다른 글들과는 달리 겉으로 보기에도 아리송한 문장들이 많지 않습니까? 도마복음에도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죠. 영지주의 저자가 이 비유를 도마복음에 삽입한 이유도 이 비유가 어떤 영적 상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비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비유로 푸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요. 하지만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 모두가 비유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제가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적용할 때에는 비유, 즉 알레고리적인 표현이라고 분명히 판단되는 부분만입니다.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판단되는 부분까지도 억지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우를 범하지는 않습니다.

참빛님께서 인용하신 도마복음의 내용도 매우 난해한 내용입니다. (참빛님이 어디서 그 구절을 인용하셨는지는 몰라도 정확한 긴용이 아닌듯 싶습니다.) 그 구절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구절이 비유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구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내용이 됩니다. 그 문장에서도 하늘, 새, 바다, 물고기등 단지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단어들이 도마복음에는 즐비합니다. 예를 들어 56번째 구절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누구든 세상을 안 자는 시체를 보게 되고, 누구든 이 시체를 본 자에게는 이 세상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세상을 알았다는 말은 눈이 열려 이 세상을 바로 본다는 표현이고 시체를 본다는 것은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죽은 영혼들만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런 세상의 실체를 본 자는 이 세상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잠언과 전도서에 말하는 내용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66번째 구절을 보죠. "건축가들이 거부한 돌을 나에게 보이라. 그것이 주춧 돌이니라." 이런 문장을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찾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건축다르은 누그를 의미합니까? 그리고 그들이 거부한 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가 전에 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씀드렸죠? 이 문장에서 건축가란 유대교의 교리들을 세워나간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과 의로움은 버리고 겉으로 보이는 율법적 행위만을 가지고 유대교를 지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그 건축가가 버린 돌은 하나님의 의와 공평이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그것이 주춧돌, 즉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초석이 된다는 말입니다.
105번째 구절은 정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구든 애비 에미를 아는 자는 창녀의 자식이라 불리우게 하라" 이 문장이 구약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지 지적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이런 구절이 알레고리적 문장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이 알레고리적 문장이 되겠습니까?

님은 글의 끝에 남녀평등으로 보이는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114번째 구절을 봅시다.
"시몬 베드로가 말하기를 마리아로 떠나게 하소서. 여성은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나이다. 예수가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그녀를 남성으로 만들어 인도 하겠다. 그래서 너희 남성들을 닮은 살아 있는 영이 될 수 있게 하리니, 모든 여성 중 그녀 자신을 남성으로 변화 시키는 여성들도 천국에 들어 가리라" 이게 남녀평등에 관한 내용이라고 보십니까? 저는 오히려 제가 말하는 남자와 여자에 관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말한 내용이 오히려 더 의미를 깊고 바르게 전달한다고 보입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고요. 여자가 남자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을 놓고 볼 때에 제가 앞에서 설명한 영적 남성과 영적 여성의 의미가 가장 적합하다고 보이지 않습니까? 최소한 저의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따라서 님께서 인용한 22번째 구절도 남녀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구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님께서는 그 구절의 일부만 인용하면서 남녀평등을 나타내는 구절이라고 하셨지만 정말로 그런지 봅시다. 그 구절을 보면 "둘을 하나로 만들어 안을 겉과 같이 그리고 겉을 안과 같이 또 위를 아래와 같이,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어 남자는 이미 남자가 아니며 여자는 이미 여자가 아니라 할 때에 눈이 있을 자리에 눈을, 손이 있을 자리에 손을, 발이 있을 자리에 발을, 형상이 있을 자리에 형상을 둘 때, 그러하면 너희가 (천국에) 들리라"라는 내용입니다. 이 문장은 단지 여자와 남자만을 다루고 있지 않고 안과 겉, 위와 아래, 손과 발, 형상과 같은 단어들을 통하여 그 단어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예수가 천국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알레고리적 해석에 집착을 하기 때문에 이 문장이 그런식으로 보일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런 편견이 없이 이 문장을 보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문장은 최소한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도니다는 것쯤은 동으할 것입니다. 이 문장은 남녀 평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 수 없는 문장이라고 봅니다. 위, 아래, 남자, 여자등은 영적 질서에 관계된 단어이고 눈, 손, 발, 형상은 깨달음이 발현되는 이치를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으시겠지만 성경 전체에서 이런 단어들의 알레고리적 용례에 익숙한 저로서는 아주 쉽게 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남녀차별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것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남녀의 차별이 인간사회의 평등이나 권리라는 가치에 모순된다는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고대로부터 서구인들은 여자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여성들 스스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남녀차별을 다룰만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진 성경기자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결국 남녀평등에 관한 문장처럼 보이는 문장은 현대인에게 남녀차별이라는 개념이 머리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레고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저는 말하는 것이고 알레고리도 당시의 문화와 사상의 틀 안에서 시도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최소한 저에게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지금으로서는 성경의 여러부분을 보다 한발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많은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성경에 알레고리적인 표현이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님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님은 아직 저처럼 성경 전체가 하나의 강물처럼 유연하게 흐르면서 논리를 전개하고 그 논리가 하나도 틀림이 없이 딱딱 이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거부감이 있으실 것입니다.
님과 저를 포함한 현대의 모든 사람들은 문자주의적 해석에 길들여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자주의란 교회에서 지금까지 행해 온 성경의 해석적 방법만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사실적으로 바라보는 인지적 형태를 말합니다. 매우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사고의 기틀을 통해 현상과 사상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고대의 사람들은 아주 달랐습니다. 그들은 우선 역사라는 개념부터 달랐습니다.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역사의식과는 아주 다른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죠. 따라서 어떤 자연적인 현상이나 일상생활에서 발생되는 사소한 사건도 그것을 이해하는 접근법이 지금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에 대한 이해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고대인의 생각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불가능해 집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그 당시의 사람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것이 전부도 아니고 또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또 다른 방법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가 얼마나 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자료와 정보가 주어졌느냐이죠. 사실 당시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정보가 우리의 손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직도 조금 문을 여는 단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 님과 저의 견해가 다른 것처럼 당시의 사람들도 성경을 보는 견해가 다양했습니다. 이런 다양성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님께서 인용하신 도마복음의 구절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든 아니면 제가 말하는 내용을 이야기하든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을 때에 내가 옳든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옳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화란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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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5 06:19:56
구구절절히 맞는 말씀입니다.

평화란 열려진 다양한 가능성에을 인정할때 이루어 지는 것 믿습니다. 이웃과 평화한다는 것도 다른 종교라 할찌라도 그들의 믿는 바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님의 알레고리적 방법은 제가 오해했던 것 같고요, 오해를 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우려했던 부분은 Marcion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의 전체를 죄다 Allegorical Interpetation 방식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심볼로 가득찼지요. 비유와 풍유로도 가득찼고요. 한편 실제적인 이야기로도 다북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현명하게 성경을 해석하여야 될 것 같아요..

가급적 심한 심볼적인 요소는 그대로 놔두는 것도 현명하고 미덕인 것 같습니다. 그 한 예가 요한계시록인 것 같습니다. 다들 해석한다고 덤벼 들다 다들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것 아니겠습니까? 묵시문학을 어떻게 어떠한 재주로써 해석한단 말인가요? 물론 구약의 심볼적인 요소와 대조하여 설명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묵시문학의 환상적인 내용을 현시대에 적용하려는고 시도하는데에 문제가 매우 크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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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5 08:36:38
끝으로
계시록은 선입견부터 잘못 되어있습니다. 묵시문학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책이 아닙니다. 그런 내용처럼 보이는 것 뿐입니다. 신화는 현재와 과거의 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들어있지만 결국 그 이야기의 주제나 소재는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작자의 경험에 한정되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현실에 대한 고발이 담겨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조셉 켐벨이 고대신화에 관하여 쓴 책을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묵시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내용이 들어있지만 작자의 상상은 과거의 경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작자의 과거를 보면 그가 예언하는 미래의 일을 어느정도는 짐작하게 됩니다.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에 일어날 사건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그 사건은 구약과 복음서에서 추출하고 상상할 수 있는 소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 계시록은 성경 65권의 종합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문체나 단어, 그리고 문장의 구성이 지극히 상징적인 것이어서 현대의 독자에게는 신비감을 더하고 이질감마저 느끼게 하기 때문에 신비의 책으로만 여겨지는 것이죠. 계시록은 가장 나중에 쓰여진 책이니 만큼 저자는 성경의 거의 모든 내용을 읽고서 그것을 바탕으로 상상을 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전에 쓰여진 65권이 보여주는 내용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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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왕 (210.57.234.7)
2013-02-04 10:46:42
대체로 동의하면서 이러면 자연스럽게 비판이 되지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정말 뭘까요?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 안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아십니까?
사람들이 지적하고 비판하면서도 그렇게 안되는 방법을 제시 못하지요?
거기까지는 모르니까? 그런가요?
다 핵심을 놓치는 아는게 아니라 헛다리잡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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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211.207.89.198)
2013-02-04 10:15:27
역시 전체적으로 공감이 됩니다.
물론 기독교 영성은 왜곡된 모든 것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납니다. 귀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저항하기 위해 멀쩡한 것을 왜곡한다든지, 또는 전통속에 있는 귀한 가치들마저 일거에 쓸어 버리려고 한다면 그 방법 역시 적절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누가는 예수를 예언자 운동의 맥을 잇기 위해 오신 분으로 묘사한다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누가복음의 주제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하는 것입니다. 누가가 말한 예수가 예언자 운동의 맥을 잇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그건 저항을 위한 저항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때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로서의 저항입니다.

누가복음을 단 한번만이라도 찬찬히 읽어보셨다면, 혹시 성서문자주의자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읽고 싶은 부분만 뽑아서 읽고 그 구절만 붙드고 늘어지시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실제로 목사님의 지적처럼 기존 교회 안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교리적 벽이 오히려 생명을 가로막는 일이 자행되고 있음에 부끄러움도 느낍니다. 그러나 그리로 향한 열심은 없애 버려야 할 '다름'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할 또다른 동력이자 힘입니다. 마치 모든 원인이 (변화되어야 할) 보수적인 기독교에 있다고 뒤집어 씌우는 것은 (도리어 변하지 않으려는) 역사적 예수운동 추종자들의 치명적인 오류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글을 써 놓고 보니까 한편 죄송한 마음도 듭니다.
(어떤 친구의 말대로) 모두 그렇게 교조적인 분들만은 아니실텐데 말입니다.
류목사님도 그렇게 진짜 좀 사랑많은 분이셨음 좋겠습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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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04 09:52:28
절대 정의와 절대 평화의 세상이 현 지구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대단한 믿음일까요?
이는 우리가 비판하는 기복신앙이나 맘몬신앙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으로 교만하기 짝이 없는 신앙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까닭입니다.

선지자들이 꿈 꾼 그 시대들이 때로는 짧은 순간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조금 맛보게 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고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위로 받게 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이 땅에 건설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 이 땅에서 하나님을 그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너희'들에게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이웃 종교와 화해하면 참 평화가 있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그리스도인들이 검을 들고 평화를 파괴한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선포할 때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대적자들이 가지는 거짓 평화를 참된 평화로 인도한다는 말씀입니다.
거짓 평화를 가진 자들을 인정하고 저들과 화합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조심해야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잘못했기 때문에 타 종교에 대하여 용서를 비는 것은 마땅히 할 일입니다.
그것은 타 종교라는 것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일이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일이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108배를 부처 앞에서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는 용서를 빌 수 있어도 우상에게는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마치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예수님의 정신을 따른다면 그 말씀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포용할 넉넉한 사랑을 가져야 하지만 우상을 포용할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우상을 섬기는 자들까지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우매한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 사랑없는 우리의 모습에 대하여 반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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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2-04 12:26:12
임빌립님의 생각은 잘 이해합니다.

유목사님의 108배는, 제가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가 저질러 왔던 불교에 대한 독선적 자태 및 언어폭력 등 그동안 쌓여왔던 여러가지 갈등에 대하여 목사로서 나름대로 사과드리고 싶었고 화해를 청하고 싶었지 않았나 합니다. 본인의 진심을 그렇게 나타내었던 것으로 봅니다. 물론 제 생각이 100% 맞는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저는 나름대로 류목사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상숭배로 판단내리지 말아 주시고 이웃사랑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절에 가 본적이 없는 교회에서만 평생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스님들에 대하여 어떠한 거부감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 분들도 나와 동일한 사람들이며 내가 대우받기를 원하는 만큼 그 분들도 그럴것이라고 생각하며 차별의식을 없이하려 노력합니다. 아니 그들은 나와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나의 이웃들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웃사랑을 말씀하셨나요?. 우리끼리 끼리끼리 서로 아끼고 좋아하면 그것이 이웃사랑인 건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은 이방인도 다 한다고 하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잘 보십시오.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들은 다 비켜갔지만 유대인등이 모두 경멸하는 천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도와 주었고 예수님은 누가 참으로 너희의 이웃이냐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시며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렇게 인간다운 사람이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고 하였습니다.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귀 있는 자들은 들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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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4.252)
2013-02-03 21:44:32
다움넷 을 비롯한 포털사이트에 "류상태 목사"검색
하면 뜨든데 ㅡ
뭐가? 주일에 절간에 가서 108번배 한것 등등
그게 이 글을쓴 류상태 가 맞는지 본인한테 묻는데ᆢ

당당이 왜?글을지웁니까?

류상태씨 답글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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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72)
2013-02-03 16:54:37
작은소자 하나를 위하여
애쓰시는 류상태님 감사를 전합니다 ... 예수를 장사하며 종교권력과 맘몬에 함몰되있는 이땅의 80%먹.막사들에게 찔림이되는 말씀 입니다 결국 예수도 하늘님을 믿는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지요...그들은 기득권이 침탈당하거나 빼앗길까바 하늘님의 이름으로 사기치며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지금 이땅에 먹막사들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이신칭의>믿음<예수천당 불신지옥> 논리로 개수작들을 떨고있습니다
참으로 편리한 목회 입니다 자신들은 그리살지도 못하고 살 의향도 없는것들이 입으로만 그리 개수작을 떨고있으니 이땅에 인구5.000만중 기독교인이 1.000만이라 합니다...그란디 왜 요모양 요꼴인가요
대형교회가90% 주범이요 허접스러운 먹.막사가 문제겠지요 또한 그들에게 길드려진 무뇌아 맹종자들이 이땅에 기독교를 개독화 하는데 앞장서고있는것입니다....목사님 언제라도 선지자의 길을 가시고 이시대에 외로운 길이겠으나 모든 하늘님의 참 사람은 그리 살았음을 성경은 말하고있습니다....류 목사님....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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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4.252)
2013-02-03 15:34:56
내가 이사람류상태 글 이 하두 이상하여 다움넷 에 류상태 목사 를
검색 했더니 2009년5월11일 자 어는 블로그에 모뉴스지에 난
일 을 곱씹고 있더만요ㆍ 내용인즉 주일날 절 에 가서 108번제 를
했다는군요ㆍ 만약 동명이인이 아닌! 이글을쓴 류상태목사 가 맞다면
정말 큰일 이글요ㆍ 이사건이 정말 인지 당당뉴스 는 꼭 취재하여
본지에 그 결과를 밝혀 주시길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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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2-03 12:03:1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주님의 기도를 인용하면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살아가는 것, 저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삶 전체로 가르쳐주신 복음의 원형'이라고 류상태씨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하늘의 뜻'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표현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많은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만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원형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이곳에 표기된 '하느님'도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전제로한 것이라 추측됩니다. "하늘 같은 님?"

'하나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림자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빌붙어 부귀영화 누리는 종교 삯군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없습니다.
이웃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도 없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인가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그 이웃을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게할 사명을 지닌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라 고백한 자들 사이에 하나님 나라가 있고
이웃에 사랑을 베풂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고
고통의 땅에서 참된 안식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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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3 15:10:13
전형적인 한국 기독교인의 성경해석
요한복음 6:40만 보면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는 말이 맞는 것 같죠. 그런데 40절은 그 이전의 이야기와 계속되는 후반부의 이야기와 연결이 되어야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믿는다는 것을 결국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 40절에서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산다고 말하지만 요한은 이미 천국이 가까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연결하여 얘기하자면 마지막 날이란 천국을 맞이하기 바로 전 날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소유하는 자는 이미 그 마지막 날을 경험한다는 의미와도 같은 얘기죠.

예수는 당시에 내려오던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인간이 창조주의 뜻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제자들은 이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은 예수의 종말론적 세계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곧 온다던 예수는 이천 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예수가 말했던 종말론이 틀렸든지 아니면 예수가 말한 종말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기 시작하기 위해 맞이하는 개인적 영적 종말을 의미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복음서를 가지고 볼 때에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거지 나사로를 천국에 데려가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준 그 사건때문입니다. 부자는 지옥, 즉 이 땅에서 온갖 번민을 가지고 고통하고 신음하며 살고 있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거지 나사로는 천국을 마음에 소유하고 그런 고통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이죠. 이 장면을 복음서의 기자도 저처럼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예수의 천국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랫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가 승천할 때에 그 곳에 있던 천사가 제자들이 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보고는 하늘은 왜 쳐다보느냐고 했던 거죠. 예수가 하늘에서 구름타고 다시 오는게 재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천사가 말하죠. 예수는 하늘로 올라 간 그대로 다시 온다고 말입니다. 즉, 천국을 마음에 소유하여서 더 이상 이 땅에 마음을 붙이지 않는 예수의 영적인 모습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의 재림이라는 것이죠.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제자들은 그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뭔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영 동문서답만 하고 있었죠. 하지만 그 이후에라도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자기도 예수처럼 세상에서 마음을 완전히 떠어내어 천국이 마음에 이를 정도가 되는 그 때에는 예수가 가르친 그 말씀이 예수가 되어 자신에게 임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재림인 것이죠. 즉, 초림은 예수의 가르침을 처음 귀로 듣는 것이고 재림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가 말하는 것을 잘 보면 초림때에는 누구나 귀로 듣지만 성령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재림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가 자기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비유로 가르치고 또 모든 것을 다 가르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성령이 와서 자신이 가르치지 않은 것을 다 가르치고 자세히 가르친다고 말했지요? 이게 바로 그 말이지요. 제자들과 있을 때에는 비유를 들어 말하면서 그 비유의 의미를 풀어서 가르쳐주지 않았지요. 그래서 예수는 다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많은 부분을 모두 다 가르치지도 않았구요. 그런데 예수가 가르친 비유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면 구약의 상징적 내용들이 눈에 보이기 사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런 과정을 성령이 와서 다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구요. 이렇게 구약의 진정한 의미가 보아ㅣ기 시작하면 예수가 말한 복음이란게 뭔지 그때서는 불을 보듯 환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천국을 맞을 준비가 되는 것이고 또 그런 삶을 살면서 결국은 천국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죠. 그런 때가 되면 예수가 승천하는 그런 영적 상태를 자신도 경험하는 것이니 예수를 다시 맞이하는 것이죠. 그게 재림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올라간 그대로, 다시 말해 예수가 가르친 내용 가운데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그대로의 천국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처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왔다고 했으니 재림은 육신이 말씀이 되어서 임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속히 오겠다고 말하였고 곧 오겠다고 말한 것이죠. 교회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예수가 지체하기 때문에 재림이 느려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건 정말 속히 빤히 보이는 거짓말 아니겠습니까? 갈수록 기독교는 종교적인 면은 말할 것도 없고 윤리적인 면 마저도 부패하고 빛과 소금은 커녕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교회 다니는 사람의 수가 줄어드는데 뭘 언제까지 기다린다는 말인지요? 예수가 정 기다리다 못해 "이제는 다시 세상에 가야겠다"라고 마음먹고 내일 와서 당장 세상에 종말이 오고 모든게 내일 모레에 결정이 난다면 다음주부터 예수 믿으려고 교회에 가겠다고 동네 목사와 굳게 약속한 사람은 어쩌지요? 예정론을 가지고 본다면 이 아저씨는 예정에 없던 사람인가요?
그리고 이처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그런 삶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보장하는 행위였다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천국을 간다는 기독교의 주장은 틀린 것이고 따라서 천국은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거나 아니면 행위를 통하여 죽은 뒤에 가는 곳이라는 결론만이 가능합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기독교의 구원론은 틀린거죠. 이 말은 정통주의의 구속론도 틀린 것이구요. 예수가 온 인류든 아니면 자신을 믿는 몇몇 기독교인이든 누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구속론의 전제조건으로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죄라는게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원죄라고 하죠. 그러나 이런 원죄라는 것이 아예 존재를 하지 않는데 대속이란 개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죠. 이제 갓 태어난 아이에게 무슨 죄를 들이대면서 예수믿으라고 할 것인가요? 그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모든 사람은 살아가면서 지은 자신의 죄는 자신이 죄값을 치르는 것이고 그것이 공평한 세상의 이치입니다. 구속론이 맞다면 예수 이전의 사람들은 억울해서 어떡하죠? 구약시대에 태어나려고 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에녹이나 엘리야는 대속자인 예수도 없이 어떻게 승천한 것이죠?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논리가 얼기설기 얽혀있지만 이것을 따지기 시작하면 왕따를 당하니 교회에서는 입다물고 있거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게 분명히 있을꺼야"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믿습니다"하는 거죠. 차제에 언급하겠지만 교회론도 틀린 것입니다. 예수는 제도적 종교로서의 교회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바울과 그리고 그 나머지는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교회론도 틀린 것이구요. 이렇게 따지다 보면 조직신학자체가 처음부터 엉뚱한 방향으로 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천년 동안 수 많은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연구한 신학의 중심 체계가 어떻게 틀릴 수 있는가?"라구요. 그럴 때에 저는 딱 한마디 합니다. "지동설을 공식적으로 천주교에서 인정한 것이 언제냐?"라구요. 다수의 생각과 오랜 세월이 진실을 보증하는 보증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자체가 여러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복음서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요한복음서도 최소한 예수의 복음에 대하여 기본적인 진실은 담고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가지고도 복음이 천국이니 지옥이니 아니면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당간다는 헛소리는 원래 예수가 말하려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죠.

님이 쓰는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통주의 기독교와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가 가르친 틀속에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아주 충실하게 맹신의 교본처럼 보입니다.

벗어나십시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도 기대를 하지는 않습니다만.

끝으로 님의 글 맨 끝에 쓰인 내용에 쓴 웃음이 나오네요.

"....고통의 땅에서 참된 안식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기독교가 서구의 세계를 지배한 지금까지의 세월 동안에 안식, 평화 이런게 있었나요? 오직 전쟁의 소식만 가득했죠. 셀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갔구요.
기독교 때문에.

제가 교회를 다녔던 30년의 세월 동안에 개처럼 집사니 장로니 하는 명함하나 달랑 주고는 교회에서 부려먹느라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현대인의 율법생활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나오니 비로소 평안과 안식을 느끼겠더군요.

천국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곳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실컷 이 세상을 즐기다가 죽기 바로 전에 예수 믿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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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119.196.128.72)
2013-02-04 15:33:58
천국이 가까운 것은 예수께서 오심을 말하고,
따라서 천국을 사는 것은 예수로 사는 것이고,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는 것은 예수를 품고 살라는 것이지요.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맹종 시키려고 내세 천국만 강조하여
그것만 소망하도록 눈과 귀를 멀게 한게죠.
홍도야 울지마라 추종자들이...
그들에게 있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돈이고, 권력욕이죠.
그리고 예수를 가진 자들에게는 빨갱이 몰아 십자가 형을 시키죠.
결국 예수로 살다가는 죽게 된다는 것이고,
그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라 예수로 다시 살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지금 예수로 살면 영원히 예수로 사는 것이지요.
죽든 살든....예수살기는 우리의 지상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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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2-03 07:12:09
지금의 천국없이는 내세의 천국도 없다!!
구약에는 스올만이 있을 뿐입니다. 스올이라는 곳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과 같은 것이 의미가 아닙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죽은영혼이 땅 밑에 위치한 곳(스올)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단순히 죽음의 상태에 머무른다는 뜻이겠지요.

눈을 씻고 보아도 구약에는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내세관은 구약과 신약중간기에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당시 이미 내세에 대한 대중적인 믿음의 히브리인 가운데 이미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조로아스터교 또는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외래사상이라고 보야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독극물을 마시기전 내세가 있을것임을 확신하며 요동없는 편안한 죽음을 맞게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땅의 천국을 저는 세가지 측면으로 봅니다. 첫째는 우리가 살아 가면서 만들어 가는 천국의 삶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고 또 하나는 이 땅에 장차 궁극적으로 임하게 될 새하늘과 새땅이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악했던 맘이 예수의 가르침으로 가득할때, 이웃과 평화할때,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속에 진정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이 바로 이런 천국입니다.

정통기독교의 복음서 누가복음에서 뿐만 아니라, 그 반대세력이었던 영지주의의 대표적 복음서인 도마복음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마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하면 하늘의 새가 먼저 날아갈 것이고 물속에 있다하면 물고기가 앞설것' 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며 천국은 우리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아군과 적군이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서로가 동일한 이야기를 하는것을 보면 '천국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가르침은 예수님께 직접 육성으로 생생하게 가르치신 것으로 간주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예수님은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하여는 그리 큰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깊은 관심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과 같이 이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이었습니다.

기독교의 ISSUE는 예수믿고 천당가는 것이 결코 아닌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주제이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와 왔다고 했고, 예수님은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이들은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고 더러는 이곳에는 천국이 없다고 하며 죽은 후에만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세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의 천국이 없으면 내세의 천국도 없다는 것입니다. 귀있는 자는 들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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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0)
2013-02-03 15:17:55
내가 봤을때 내세 부정 하고있는데요?
단지 교회다니고 있으므로 전격적인 발언을 자제 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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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2-03 17:04:46
분명히 마지막 문장에 내세를 부정하지 않는다 했건만... ㅉㅉ 영 말귀를 몬알아 들으시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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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2-03 13:35:47
질문 하나 하지요.
예수가 죽어서 가는 천국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면 예수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예수가 정말로 부활했나요? 아니라면 복음서에 부활사건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 부활사건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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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2-03 16:56:40
안녕하세요, 피키님. 잘못하다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이 될수도 있을것 같아 조심스럽네요. ^^ 제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을 조금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는 바로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저승에서의 천국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가고, 부자가 떨어뜨린 음식 찌끄러기나 주워먹다가 죽은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거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과 지옥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그 부자와 같이 욕심만으로 살지 말고 나누어 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주시기 위함에 목적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피키님의 부활에 관한 질문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같아 보입니다. 저를 약간의 곤란에 빠뜨리시려는 뜻도 있어 보입니다만, 저를 깨우치시려는 의도를 알고 있기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해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인 부활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파하시다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저항으로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는 신과 다름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제자들 사이에 이해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믿었고, 그러한 믿음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으로써 자연스럽게 설명되었으며 이것이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저는 성경의 많은 부분이 저자들의 신앙고백인 것처럼 부활도 제자들과 사도들의 신앙고백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자의 첫열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기 위해 살다간 사람은 예수님 처럼 다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한다는 사실 즉 영적부활을 경험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영적부활을 부인하고, 실제적으로 죽어 썩은 육체가 부활을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이단이던지 부활의 참의미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수천년간 간직해온 이 부활은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구심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에 닥쳐오는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도록 하는데 미래의 희망과 소망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피키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성경에서는 한결같이 하나님과 함께 하지않는 자들을 '죽을자'로 말하지 않고 '이미 죽은자'라고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예수를 품고사는 사람은 부활한 자이며 영생을 이미 살고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는 삶을 사는 자는 이미 죽은자입니다. 죽었으니 그런 사람에게는 말할것도 없이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는 것이 되겠지요.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교만스러울 정도로 독선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힘의 논리 성공의 논리에 평만해 있다고 보며 예수의 원복음과 가르침은 상실된 채 교리적인 면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의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보고있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기독교가 나와야 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대로는 절대 않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의 계시, 영감, 부활, 기도의 능력 등을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는 유신론적인 감성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찬송가를 부를때면 눈믈이 자주 흘립니다. 말씀을 읽으면 감동이 됩니다. 기도를 마치면 평화가 찾아옵니다. 제게는 아름다운 성도들과의 교제가 그렇게도 좋을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번 기독교를 떠나 무교회주의자가 되려 하였습니다. 함석헌, 김교신 정도는 바라볼 수도 없는 주제에 불과하지만 그냥 집안에 들어 밖혀 있더라도 우선 교회를 멀리 떠나서 성경이나 파 보려고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정작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에 대한 애정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있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 기도의 능력 이러한 신비한 부분들을 믿고 있기 떄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부활도 지금이고 하늘나라도 지금이고 영생도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없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이러한 것들이 지금 없으면 내세에는 더더욱이 없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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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0)
2013-02-02 21:34:13
그래 아저씨의 속뜻은 무엇입니까?

이단들은 수많은 성결구절 중에서 자기논리와 닮은 성경구절을 드리댑니다
그구절 그대로의 직역으로 대변합니다 ㆍ 하지만 자기가 남한테 이야기 할때는
다른잣대로 피력합니다 ㆍ심지어 성경을 신화 로 까지 얘기 하면서 말이죠ㆍ

오늘의 글 저번처럼 심한 피력을 하지 않으면서 남을 의식 하기 시작 했네요ㆍ
하지만 맨 위에보면 성경 그구절만 딱! 따가지고 내세관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제가 받아본 워치타워 에서 발간한 여호증인의 책자와 아주 흡사한 내용전개 입니다 ㆍ

전 개인적으로 내세가없으면 예수믿을필요없다고 생각 합니다ㆍ
아니! 모두 그러실겁니다!
마지막시대에 바로곁에서 그것도 목사가 종교는 다 같은것이니 ᆢ 라고 지꺼린다면 ㅡ
깨어 기도할때 입니다 ㆍ
당당 편집장님 앞으로글 가려서 싣지 않으시면 그것도 적그리스도 침입 방조!
입니다 ㆍ

아저씨 낼 새벽에 가부좌틀고 엄지검지 동그라미 그리고 참선 할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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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0)
2013-02-03 15:14:01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않고 어린아이들이 짐승들과 뛰어노는 천국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닌 "지상낙원"ㅡㅡㅡ여호아증인들이 전도 다닐때 꼭 빼노치
않는 구절이죠ㆍ

뮬론 찬송가 에서도 나오지만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어디나 하늘나라 ㅡ
ㆍ 주니의나라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말씀 이야 말로 잘 해석해야죠ㆍ
이미 구원받고 내세를 믿고있는 모든이에게는 당연한것 ㅡ그뜻을 내세의천국은없고 지상의 천국 이라고
유도하는 그 심보! 누굴위한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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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4.252)
2013-02-03 22:04:07
류상태씨 한테 주일날 절간에 가서 1008번배 같은거 정말
했는지 꼭 물어보셔 포탈에 류상태목사 검색하면 위내용 나오던데ㅡ
그짓 한 그 류상태 목사가 이글쓴 장본인 맞는지 말이유 아주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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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72)
2013-02-04 19:49:58
개악본부
1008 이 아니고108배란다...108배의 의미가 붠지도모르면서...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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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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