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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 교리 넘어서야 기독교 영성 회복할 수 있다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1월 27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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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1월 27일 (일) 12:29:14
최종편집 : 2013년 01월 27일 (일) 18:15:29 [조회수 : 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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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년 역사를 이어온 기독교의 맥을 크게 세 줄기로 나누면 ‘교리의 기독교’와 ‘영성의 기독교’ 그리고 ‘운동의 기독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줄기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별개로 전해진 것도 아닙니다. 서로 얽히고설킨 채 시대에 따라 어느 한 쪽이 두드러지기도 하면서 긴장관계를 이루며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중 인류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단연 교리의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굳이 기독교를 세 줄기로 구분하여 말씀드리는 이유는, 인류 역사에 너무나 큰 아픔을 안긴 교리의 기독교를 넘어서고, 영성의 기독교와 운동의 기독교가 갖는 귀한 가치와 신앙을 한국 교회가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교리의 기독교’는 배타적인 교리와 그에 따른 독선으로 세상에 갈등을 일으켜온 기독교의 부정적인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며, 기독교 교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1. 교리는 배의 닻과 같습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는 “교리란 배의 닻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닻이 강이나 바다의 모래바닥에 너무 깊이 박히면 배는 움직일 수 없게 되어 결국 고철덩어리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바닥에 든든히 고정하지 않으면 배는 이리저리 표류하게 됩니다. 교리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교리가 갖는 위험한 성격을 잘 짚어내면서도 교리 자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잘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 교리가 교회와 회중에 끼친 영향력은 존 스토트가 지적한 양 극단의 위험을 피하며 조화를 이루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조직이란 마치 생명체와 같아서 어느 단계에 이르면 스스로 생존하고 팽창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마련인데, 그 조직의 생리를 제어하지 못한 교회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주 교리를 무기로 삼아 그 구성원들을 옥죄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지난 역사를 통해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비대해진 교회조직 자체의 생리와, 조직의 상층부에 자리한 사제계급, 그리고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여 조직이 생장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해준 신학자들에 의해 인류사회에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존 스토트의 비유대로라면 닻이 바닥에 너무 깊이 박혀 배가 썩어가며 자신과 주변에 심각한 문제를 생산해낸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인류역사에 큰 슬픔을 안긴 ‘교리의 기독교’를 한국 교회와 교우님들이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서야 하며, 이 일에 실패한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교리 기독교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활발한 학문적 논의와 영적 성찰을 거쳐 배타 교리의 함정에서 거의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기독교회의 일부, 근본주의가 횡행하는 미국, 그리고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교리 기독교가 교회를 지배하는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2.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는 영성과 운동성에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많은 분들이 영성의 기독교를 주목하기에, 영성이란 무엇이며, 과연 기독교의 영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먼저 교우님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운동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기독교의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성의 사전적 의미는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신령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비가시적이면서 초월적인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분들이 ‘영성’을 생각할 때 어떤 현상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기적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기도 하고 신과 직접 대면하거나 대화를 주고받는 등의 초월적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기적이나 병고침, 신과의 대화나 대면 등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영성의 결과일수는 있어도 그 자체를 영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이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현상’에 집착하게 되면 진정한 영성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의 중심개념은 ‘초월자와의 관계성’입니다. 초월자란 실존자와 구분되며 실존자의 한계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실존자의 상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보다 상위의 존재나 우주의 법칙, 원리 등을 말합니다. 제가 초월자의 개념에 우주의 법칙이나 원리까지 포함시켜 교우님들이 불편을 느끼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속성을 인격체 안에만 가두지 말고 초인격적 속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원화된 세계에서 이웃종교와의 원만한 대화가 불가능하며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속성을 인격체 안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 기독교회가 신관의 배타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독선과 한계에 계속 갇혀있게 됩니다.


3.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나님은 무엇인가? (What is God?)’라고도 물읍시다.

신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해 어느 학자는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나님은 무엇인가? (What is God?)’라고도 물읍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제안대로 “하나님은 무엇인가?”라고도 묻는다면, 그분을 우주의 이(理)나 법(法), 또는 공(公)으로 이해하는 이웃종교와의 폭넓은 대화가 가능해질 것입니다. 하여 우리 기독교가 교리적으로 갖고 있던 독선과 배타로부터 빠르게 벗어나 지구마을의 아름다운 종교문화와도 어깨동무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혹 일부 교우님께서는 “하나님을 감히 ‘그것’이라고 폄하하다니, 신성모독이 아닌가?” 또는 “다른 종교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가?”하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웃종교와 문화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인격’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히는 것이 오히려 신성모독이고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인격이 아니라 ‘신격’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개념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지면을 할애하겠습니다. 이 주일편지는 올 한 해 동안 계속될 예정입니다.)

기독교 문화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말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은 말격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고 동물에게도 동물에 맞는 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격은 당연히 그에 걸맞는 하나님격 즉 초인격적인 ‘신격’이어야지 그분을 인격으로(만) 이해하려는 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결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초인격적 속성으로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한다고 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갇혀 있던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나와 더욱 깊고 풍요로운 기독교 영성으로 진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찍이 하나님의 궁극적 속성을 ‘존재라기보다는 지성’으로 파악한 중세 신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도달했던 기독교 영성의 절정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런 보다 깊고 넓은 이해는 이웃종교 및 동양사상과의 폭넓은 대화를 가능케 하여 심각한 종교간 갈등을 겪고 있는 21세기 우리 지구마을에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오늘날 당신의 자녀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절실한 명령으로 우리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한국 교회의 과제이며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4. 기독교의 영성은 ‘현상’이 아니라 ‘관계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성의 궁극이 인격이건 인격을 뛰어넘는 초인격적인 그 무엇이건, 우리 기독교의 진정한 영성은 ‘현상’이 아니라 ‘관계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쉽게 말하면 방언을 하고 기적을 하는 것이 영성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진정한 영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이 풍부하다”든가 “영성이 꽃피었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그분(또는 그것)과 하나가 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 영성이 한 인격체 안에서 발아할 때,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된 삶을 살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기독교 영성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라도 함부로 다루거나 해치지 않습니다. 돌뿌리 하나,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의 손길이 담긴 것으로 보고 귀하게 여깁니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이 발아하면 삶의 모든 영역으로 그 풍요로움이 흘러넘쳐 세상과 자연,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우리 인생을 깊이 사랑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과 어울려 살아가게 됩니다.

기독교 영성이 발아하면 모든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로 봅니다. 그리하여 환경이 어떻건 외모가 어떻건, 돈벌이나 학벌, 스펙이 어떻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격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사람을 귀히 여기며 존중합니다.

기독교 영성이 풍부한 사람은 세상을 진취적이며 적극적으로 살아낼 힘과 소망을 갖게 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은 신과 하나로 합일되어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입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대하기에,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심는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영성이 꽃핀 사람에게는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인 교리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란치스코나 마이스터 에카르트를 비롯한 중세 신비주의자들, 이슬람교의 영성을 꽃피운 수피들, 천주교 사제이면서 인도에서 종교간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든 앤소니 드 멜로 신부 등은 한 인격체 안에서 영성이 발아할 때 그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개인의 인격을 넘어 분출하는 그 향기가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지 보여준 산 증인들입니다.

우리 교우님들도 영성이 꽃피는 아름다운 신앙인이 되시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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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나누기(3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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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211.207.89.198)
2013-01-28 14:52:29
전체적으로 공감이 갑니다만.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 어떻게 '관계로서의 하나님'과 연결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무엇'물음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규정하여 오지 않았나요?
그리고 인간이 인격이 아니면 하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관계합니까? 인격자체가 이미 규정 불가능한 것인데, "인격안에 하나님을 가두려 한다"는 표현은 또 뭡니까?
교리를 구원인양 붙들고 늘어지는 것들에 대한 일침은 시원합니다만, 인격을 통해 예수를 만나고도 충분히 그 인격너머에 계신 예수를 신앙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오해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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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참빛 (24.141.4.52)
2013-01-30 14:36:55
임빌립님,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스피노자는 그의 에티카에서 말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유를 알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가끔씩은 그런 일들에 대한 이유를 모르는 것이 오히려 더 유익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나, 일에 대한 이유를 알아 보고자 하는 본능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수많은 옛성서들 가운데 27권의 신약정경에 거의 포함되려다 실패한 복음서 ‘도마복음’이라고 있습니다. 이 성서는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던해 1945년 이집트의 Nag Hammadi라는 곳에서 콥틱어로 쓰여진 파피루스로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의심 많은 도마로 배웠고 제자들 가운데 가롯유다 다음으로 본받아서는 않될 사람으로 알았던 그런 도마였습니다. 그런데, 근이천년 만에 발견된 그 도마복음에서는 도마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고 매우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오직 도마에게만 전해주는 예수님의 심임이 두터운 제자로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도마복음이 어록 (행적에 대한 기록없이 말씀만 기록)이기 때문에 사복음서 보다도 더 오래전에 쓰여졌고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기록하였다고도 합니다. 어쨋든, 제가 도마복음을 여기서 끌고 들어오는 이유는 ‘우리는 한쪽의 이야기만 필터함 없이 일방적으로 들어 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란 ‘사실아닌 사실을 사실인양 믿는 것을 믿는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이 혹시 아닐런지 한번 생각해 봄직합니다. 한국 교회는 ‘그냥 믿어. 묻지말고 믿어라’ 합니다. 그러면서도 맹신적인 믿음은 배척한다고 말합니다. 묻지도 말고 설명도 없이 믿는 것 자체가 바로 맹신이 아닌가요?

한국 기독교 신자들은 목사들의 주입식 교리설교에 길들여져 스스로 공부하고 생각하는 방법을 잃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만민제사장설’을 그의 개혁 핵심의제로 두었습니다. 개신교 교회라면 어디에서나 이 만민제사장설을 주장하고 옹호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교회는 실제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목사들이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면서 그들은 그들과 같은 제사장인 신자위에 군림하려는 작태들을 보이고 있는 현실태는 잘 알고 계실겁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공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아야 하고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공부하여야 합니다. 그저 목사의 설교에만 의지하면 그의 생각과 그의 세계관 이상은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임빌립님, 성경은 꼭 정독해 보도록 하셔요. 신약의 사복음서를 읽으실때는 순서대로 읽는것 보다는 평행적으로 사복음서를 상호 비교하면서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지식의 창조자가 되고 지식의 소비자는 되지 말라’라는 어느 노학자의 외침의 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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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Picky (170.20.186.188)
2013-01-31 05:58:56
사족입니다만
도마에 관하여 사족을 달겠습니다. 참빛님은 이미 아시겠지만 기독교에서 보통 도마를 말할 때에 의심많은 도마라고 하지요.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할 때에 못자국을 보고서야 믿은 사건을 가지고 도마를 그렇게 칭합니다.

그런데 도마를 의심많은 제자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굳혀나간 것도 기독교의 종교적 선전의 하나에서 정통주의의 종교지배계급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도마를 의심많은 제자라고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통주의자들이 기독교 시장을 장악하고 난 후에 도마라는 인물을 보면서 처리해야할 문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일반 기독교인이 도마처럼 의문을 가지고 그들이 만든 교회내의 제도, 권위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적 이론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회의를 품는 사태가 나타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도마를 의심많고 바람직하지 못한 신앙적 태도를 지닌 인물로 그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참빛님이 언급하신 도마복음을 읽어보면 그것이 정말로 도마가 썼는지는 몰라도 정경에 들어있는 사복음과는 차원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의 교부들처럼 정통주의자들이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영지주의에 대하여는 거짓을 더하면서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나갔고 눈에 보이는대로 영지주의 문서라고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태우거나 폐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천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나그함마디에서 그들의 문서가 발견된 것이죠. 당시에 정통주의 영향 아래 들어간 교회의 감독들이 영지주의 문서의 폐기를 명했지만 그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기독교인들이 항아리에 몰래 숨겨서 수도원에서 좀 떨어진 곳에 파묻은 것입니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될 때에 지금 정경에 속한 다른 복음서들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에 당시의 기독교인은 정경에 있는 사복음서와 도마복음서의 내용에 대하여 동등한 가치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내려온 정통주의 기독교는 왜곡과 은폐와 미화와 거짓을 통해 복음이 아닌 종교적 권력을 추구해왔고 예수가 남긴 정신의 본질을 훼손한 정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비평학과 사본학을 통해서 이제서야 밝혀진 여러가지 사실 가운데 주시해야 할 것은 정통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성경의 문장은 교묘하게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면서까지 자신들의 세속화된 종교적 세력을 키우려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작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거나 출교조치를 취하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 앗아가면서 종교적 폭력성을 서슴없이 보여주었지만 역사속에 이런 폭력성에 대한 기록도 은폐되거나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통해 철저히 그 권력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마치 신성함만이 지속되었던 것처럼 위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은폐된 역사가 빛을 보고 폐기된 줄 알았던 역사의 기록이 사막의 모랫속의 세월을 견뎌내어 지금 우리의 손에 들려지기 시작하고 학자들이 이런 발굴을 통해 숨겨졌던 사실을 밝혀내기 시작한 것이 100년이 되지 않습니다.

정통기독교의 교리와 그 기초가 되는 성경에 대한 해석은 이처럼 그 포장지를 벗기고 나면 알맹이 없는 빈상자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데 이 포장지가 워낙 오랜 시간 동안에 하나의 포장지 위에 또 하나의 포장지가 덧입혀졌고 또 많은 세월동안 단단히 굳어버려서 일반인들에게는 포장지 자체가 그 알맹이로 보인다는 사실을 학자들은 지적하는데도 정작 교회에서는 이런 소리를 무시해 버리거나 배교적 혹 이단적 소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교인들은 이런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이 없는 것이죠. 하루 하루 바쁘게 먹고 사는 일에 전념하는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잘 알고 때로는 이 점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조차도 이런 새로운 사실들이 이 시대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교인들에게도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사실을 은폐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기독교와 성경에 관하여 어떤 연구를 하는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눈은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회의적 신앙의 첫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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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170.20.186.188)
2013-01-30 05:08:34
참빛님,
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매한 사람들에게 충동을 주고 진신을 말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접근 방법에 많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서구유럽에서는 님의 의도와 동일한 의도를 가진 학자들이 이미 300년전 부터 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십년이 채 되지도 않습니다. 서구사상에 뿌리박힌 잘못된 기독교의 교리와 그 배경에 있는 그릇된 신학적 이론을 파헤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님이 질문하신 것처럼 제풀에 지쳐서 대중으로 부터 외면당한 후 스스로 몰락할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거라고 제가 가끔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이유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릴 수 없다는 의미로 말할 때입니다. 모든 역사의 흐름은 그 매개체가 인간의 지적 활동입니다. 그리고 그 지적 활동이 원동력이 되어서 행동으로 나타나는거죠.

역사에서 변혁이 일어나는 것은 역사적으로 있어야 할 시대의 상황과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적 상황 사이의 간격이 지나칠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가 되면 어떤 인물에 의해 혹 우연처럼 보이는 어떤 사건에 의해 변혁이 일어나든 변혁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16세기의 종교개혁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역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도 아닌데도 루터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일으킨 변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루터가 아니었어도 그리고 종교라는 사회의 영역이 아니었어도 당시의 독일의 시대적 상황은 변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어떤 다른 누군가에 의해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을 통해 기독교가 십수세기동안 지켜온 권좌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이 전개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변혁은 인간의 지적 활동을 매개체로 이용하기 때문에 그런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자는 것이 저의 기본적 취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먼저 잘 파악해야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근본주의자들이 지니고 있는 정통주의적 기독교관을 향해서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먹혀들어가지 않습니다.

돌직구를 던지기 보다는 스스로가 눈을 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말하는 돌직구란 신학적 이론이나 교리들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일입니다. 물론 이렇게 직접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적 이론에 대한 모순들을 지적하면 다시 한번 자신이 지녀온 종교적 신념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고 깊게 생각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류에 들어가는 사람은 대부분 기성세대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바뀐다고 해도 크게 손해를 볼 것이 없을만큼 아직은 살아야 할 세월이 남아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미 기성세대에 접어든 평범한 기독교인은 입장이 아주 다릅니다. 먼저 그들은 많은 세월을 투자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종교적 정체성으로 채웠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자신이 지닌 종교적 가치가 그 평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도전을 받게 되면 방어본능이 자동적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근본주의 기독교인은 다수의 경우에 종교적 신념의 뿌리에 사회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고 회의하는 신앙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와 의문 그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순종이란 단어를 의문의 반대말로 인식하게끔 조종당하였다는 것을 모르죠.

결론적으로 기성세대를 상대로 교리적 신학적 논쟁을 한다는 것은 말싸움이 될 가능성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특히 토론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한국의 사회적 정서를 볼 때에 토론을 통한 정상적인 논쟁은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물론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밝혀진 사실과 논리적인 검증을 거친 사실을 통해 기존의 정통주의 교리와 신학적 이론의 모순을 지적하면 그 문제를 놓고 고민할 수 있는 기성세대 교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한국의 뉴스앤조이에서 댓글을 통해 저에게 눈을 열게 해주신 분을 만났고 그 이후에 그분과 같이 댓글을 올리면서 저의 글을 읽고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통해 저에게 많은 것을 배우려하시는 기성세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프라인으로 여럿 기독교인들을 가르친 적도 있지만 역시 기성세대를 지난 기독교인의 생각을 열게 한다는 것은 거의 가뭄의 콩나듯 하다는 것이 저의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곳에서도 지독한 근본주의자 몇 분이 계속해서 글을 올리는 내용을 보시면 아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쉽고도 적절한 방법은 역사에 대한 사실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상당부분이 왜곡되고 미화되고 은폐된 채 가르쳐졌다는 것을 보여주면 스스로 의문을 지니게 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이런 역사의 사실 가운데 특히 성경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하면 당황해 하는 기독교인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역사냐?'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가지로 할 수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다른 사회의 집단도 마찬가지이지만 기독교 또한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교리의 정당성과 종교적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가르친 역사가 진실된 역사가 아니면며 실제의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입증한 많은 연구가 종교적으로 최소한 반기독교적인 시각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평가한 사가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고대의 교부나 역사가들 혹은 어떤 유명한 인물들의 말을 인용하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기독교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말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목사나 신학자들이 편향된 평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죠.

교회에서 거의 말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할 때에 그들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에를 들어 예수가 신으로 인정된 것은 기독교 초기부터가 아니라 4세기 초반에 투표에 의해서라고 말하면 최소한 그것은 근본주의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할 말이 없죠. 물론 말도 안되는 별별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또 교회에서 왜곡하여 가르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경우도 유사한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밖의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왜곡되고 미화돠어 가르쳐진 경우 중의 하나가 기독교에서 대단한 신앙적 인물에 대한 역사인데 그런 사람들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말하면 최소한 자신이 교회에서 배운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겉으로는 직접 이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요. 예를 들어 장로교에서 떠받들고 있는 루터, 칼빈이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귀를 막으려고 하지요.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거스틴에 관한 예가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천주교에서는 성인의 반열에 든 사람이고 기독교의 교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사나 신학자를 포함하여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어거스틴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사실은 그가 헬라어를 읽을 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는 제롬이 읽어서 번역해주는 라틴어로 성경을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성경에 대하여 얼마나 가까이 접근을 해서 교리적 해석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거스틴이 성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가 펠라기우스와 신학적 논쟁을 하면서 정치권력에 뇌물을 주고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이 논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을 교회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접할 때에 많은 평범한 교인들은 그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아예 벽창호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요.

성경에 관한 비평학적 그리고 사본학적 연구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이 쓴 서신이 아니라 위조된 서신이며 이같은 사실은 신학계에서는 큰 반대가 없이 다수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사실이라고 말하면 겉으로는 '웃기고 있네!'라고 할지 몰라도 속으로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이 남긴 유적은 정통기독교의 주장과는 달리 돌맹이 하나도 찾지 못하고 있다던가 아니면 다니엘서는 그 책의 배경이 된 시대보다 몇백년 뒤에 쓰여진 책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면 충격은 계속됩니다.

또 아주 자주 쓰이는 예수의 어록 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예수의 독창적인 말이 아니라 당시에 사회의 개혁을 주도하려던 유대의 열심당 (젤롯당)의 구호였다는 것을 말해도 조금은 동요를 받게 됩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벽창호한테는 동요라는 것 자체가 기대할 수 없는 것이구요.

그런데 비록 귀를 막으로려고 하면서 이런 얘기를 거부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자기가 들은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또 다시 다른 사람에 의해 유사한 이야기를 듣게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에는 동요가 일어나지요.

제가 한국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를 자주하는데 그 변화는 서점에 가서 기독교와 관련된 서적을 보면 이런 사실이 실감이 납니다.

약 10년전만해도 한국의 서점의 기독교관련 코너에는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의 정서에 맞는 책들만 즐비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를 들어 거의 십년도 지난일이라고 기억하는데 동아일보출판사에서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번역하여 출간하자 마자 기독교계의 거센 반발로 인해서 일주일도 채 못되어 폐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몇 년전에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번역물이 아닌 한국내의 작가에 의해 기존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 도전하는 책들이 속속나오고 있습니다. SBS의 '신의 아들 인간의 아들'이란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렇고 이제는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출판사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출판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BBC나 히스토리채널의 사시프로그램을 보면 예수의 역사성을 다루며 많은 사실들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은 미약한 편이죠.

이런 사실을 전달할 때에 한발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다면 역사전체를 흐르는 중요한 사실들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류의 역사에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이 권력의 중심에 다가오지 못하도록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 지식의 독점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의 독점을 기독교는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런 지배게급의 악행에 더 이상은 속지 말라는 경고를 주는 것이죠.

잘 알다시피 중세까지만 해도 성직자외에는 성경을 소유는 커녕 읽지도 못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사실을 말하면서 종교개혁 이후에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종교개혁이 가지고 온 결과를 높이 평가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들으면 종교개혁에 대한 평가는 당연히 긍정적으로 밖에 내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보여주어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로 기독교인이 정말로 성경을 읽고 성경에 대하여 많은 이해를 하게 되었을까요? 진실은 그와는 반대죠.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을 많이 찍어냈기는 했지만 서구사회에서 문맹이 사라지는데 까지는 산업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산업혁명 이후에도 영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의 문맹률은 낮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인이 대학과 같은 곳에서 고등학문에 접근할 기회는 지금처럼 크게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성경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얻는 길은 오직 성직자가 되는 길이었으며 교회에서는 성경공부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길을 막은 장본인이 바로 칼빈입니다. 주석성경같은이 성경의 배경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을 더하고 각 구절에 대하여 잔략한 해석을 더함으로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도 미국에서 20세기의 초반에 나타났습니다. 평범한 교인들이 성경에 대하여 좀 더 폭넓은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불행히도 처음 발행된 주석 성경이라는 것도 세대주의 물들고 신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스코필드라는 술 주정뱅이가 쓴 책이었습니다. 비평학적 접근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 채 영감설과 무오설을 기반으로 주석성경이 쓰여진 것을 사람들은 읽고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대로 자신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굳혀버린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여 세력이 키워진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가 아무런 여과도 없이 반강제적으로 한국에 파송된 미국의 근본주의 교단의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것이구요.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목사들을 양성할 때에 한국민을 아주 무식한 종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목사들에게 제대로된 신학교육을 포기하고 기초적인 성경교육만 시키고 현장에서 조선인을 상대로 교세확장을 모색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본국의 파송교회에 실적을 보고하기 위한 쉬운 방법을 쓴것입니다. 한국의 개신교 초기의 선교역사만 다루저라도 밝혀야 할 사실이 많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이 신앙과 신학은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교리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목사는 성경공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주입하고 있고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밝혀진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사실은 자신이 신학교 때에 배운 왜곡된 것을 그대로 가르칩니다. 예수가 말하듯 소경이 소경을 구덩이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그리고 목사와 같은 종교적 지배계급이 21세기인 지금도 지식에 대한 독점을 의식적이든 아니면 무의식적이든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만은 중세의 암흑시대가 드리웠던 그림자가 결코 거두어지지 않은채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지식의 독점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역사의 흐름을 그들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역할이 중요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던 시대가 지나가니 진실이 점차로 들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님께서도 이와 같은 일에 동참하기를 권합니다.

결론적으로 역사에 대하여 기독교의 실상을 그리고 초기 기독교가 어떤 경로를 거쳐서 변질에 변질을 거듭했으며 따라서 지금 우리의 손에 남겨진 기독교라는 것은 원래의 예수의 정신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종교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보통 기독교인과 대화를 하면 그들은 은혜, 믿음, 구원, 성경적 혹 삼위일체와 같은 용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그런 용어와 그 용어가 지닌 개념들이 마치 기독교가 시작할 때부터 기독교내에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이런 용어가 언제부터 기독교내에 들어왔으며 그 의미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동일하게 기독교의 서클내에서 인식되어왔는가하고 말이죠.

오십년전의 기독교인과 백년전의 기독교인과 오백년전의 기독교인 또 초기 기독교가 생성될 때의 기독교인 그리고 미국의 기독교인과 한국의 기독교인과 독일의 기독교인이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해주는지에 대하여 그들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가장 옳은 기독교를 지향하고 있다는 착각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 복잡한 모든 것들을 때로는 믿음이라는 단어 또 다른 때에는 은혜라는 단어 하나로 대치하였으니까요.

이런 것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역사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될 때 뿐입니다.

제가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는데 님은 세번째의 유일신의 문제점을 말씀하시면서 성경에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구약의 저자가 독창적으로 쓴 내용이 아닙니다. 그 이전 시대의 전승을 그대로 베껴온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신다면 유일신의 문제는 성경을 가지고 이런 방법으로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순환적 모순을 야기하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고대문화뿐만 아니라 고등비평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생각에 의해 쓰여진 가장 강력한 증거는 성경에서 신을 인격적인 신으로 묘사한 부분입니다. 인간의 생각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나 고대나 인간이 신을 상상하면서 인격적인 신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 모습에 초월성을 더하여 전지전능하다느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말하면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에 나타날 수 있다고 상상되는 모습을 부여한 것이죠.

그래서 결국 그 정도의 신으로 밖에 표현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의 고대인의 상상의 한계이니까요. 만일 현대인이 성경을 썼다면 우주를 넘나들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무너뜨리는 그런 우주의 법칙을 이용하여 인간에게 나타나고 인간이 신이 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경험하면서 세상의 종말이나 미래를 경험하는 그런 이야기를 성경에 담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아는 것만큼 보이고 아는 것만큼 상상합니다. 인격적 신까지만 상상할 수밖에 없는 이성적 사고의 한계를 성경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제가 시도하는 방법은 제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혹은 오프라인으로 저에게 배우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눈을 열고 귀를 열어 세상을 보는 방법을 깨우치고 다양한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하여 눈을 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폭넓은 시각과 지식의 세계로 스스로를 노출한 후에는 많은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고 그에 대한 해답은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인간이 지닌 본능적 욕구에 의해 스스로 찾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다른 기사에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저의 글은 답보다는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저는 여러번 들었습니다. 제가 의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따지고 합리성을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이성적 사고는 논리적일 수밖에 없고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도 분명한 이성적 논리에 근거하지 않으면 무너질 모래성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논리에 대한 훈련이 충분치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본능적으로 뿌리박힌 맘모니즘과 같은 세속적 욕망이 자신의 신념을 좌지우지하며 비논리적인 주장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각을 하기 위한 지적 사고에 있어서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이 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입니다. 그 길 밖에는 없습니다. 최후의 결론은 자신이 내려야 합니다. 그 결론을 최면에 걸린 것처럼 몽롱한 상태에서 내리기 때문에 저는 깨우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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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1-30 04:21:48
1.“넘어서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교리의 기독교’는 배타적인 교리와 그에 따른 독선으로 세상에 갈등을 일으켜온 기독교의 부정적인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며, 기독교 교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2.교리가 갖는 위험한 성격을 잘 짚어내면서도 교리 자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잘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 교리가 교회와 회중에 끼친 영향력은 존 스토트가 지적한 양 극단의 위험을 피하며 조화를 이루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상의 글들은 류상태씨의 글에서 따 왔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첫째로 류상태씨는 기독교의 교리를 인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글을 비교해 보면 그런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배타성이 있는 교리는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교리가 배타적인지 그리고 류상태씨께서 인정하는 교리는 무엇인지 간단히 말씀하시면 고맙겠습니다.

둘째로 그 배타적인 교리로 부정적인 가르침 때문에 갈등을 일으킨 것은 어떤 것인가요?

셋째로 존 스토트의 예를 들었는데 양 극단의 위험을 피하고 조화를 이룬다면 배타적인 교리가 있어도 상관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배타적인 교리가 있으므로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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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178)
2013-01-29 14:58:52
자득득 편집장님
클릭수가 500도 안됬네ᆢ 이론ᆢ

더 깃발 날렸어야는데ᆢ
그러니 이런글 앞으로 싣지마슈 인심만 사나워져
광고 잘 안들어와~

나도 꿋꿋이 글 반대편에 서서 질렀건만 ㅡㅡ쩝!
별 효과 없었넹~

힘만 낭비 했네ᆢ
이단 스러운애들은 그리로 가서 활동 하라 그래요ㆍ
화면 첫컷 제목들 난무해 ㅡ

감기 조심 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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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72)
2013-02-01 07:00:42
개악 본부 그대수준에서는
도저히 접수가 안되지....맹종자요 무뇌아가 알길이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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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1-29 08:38:16
1.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시되 사랑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한면을 보고 사랑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2.교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3.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이시며 유일하신 신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신이 있다는 전제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이 신이라고 만든 그것을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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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30 01:21:34
임빌립 님,
그대는 단언하건데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교리로 주입받은 믿음을 믿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을 여시기 바랍니다.

저의 글에 대하여 1,2,3 번호까지 붙혀가며 조목조목 반박하시려는 것은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만, 이런식으로 다 알고 있는 정통기독교 교리 내용을 앵무새처럼 짧게 내뱉지만 마시고 증거를 통한 논리적 설명으로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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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1-30 04:48:18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 교리에 대하여 왜 공부하지 않았나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거의 설교 말씀 듣는 외에는 교리에 대하여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 자체도 스스로 읽은 적은 거의 없지요.

그런데도 교리로 주입받은 믿음, 혹은 교리 내용을 앵무새처럼 내뱉는다는 말을 들을까요?

교리에 대하여 공부한 적은 없지만
나이들어 말씀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으로 설교 말씀에 귀기울이고 스스로 성경을 읽는 가운데 깨달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내가 몰랐던 소위 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교리는 이런 나의 믿음의 여정 가운데 깨달은 것을 정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류상태씨께서 존 스토트 신부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공감합니다.
또한 프란시스 쉐퍼가 지적한 한계선의 양 극단을 조심하라는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양 극단, 절벽에 떨어지지 않고 본을 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한 쪽 극단이 교리를 배타적이라고 오해하게 한 행위들일 것입니다.
저들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고 잘못 행한 것이 배타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고 말씀대로 정리한 교리는 배타적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말씀대로 정리된 교리는 절대적입니다.
말씀을 벗어난 교리는 교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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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5.178)
2013-01-29 04:44:43
난 솔찍히 지금까지의 글들을 접 하면서 이 새벽에 문득
"여호아의 증인들" 이 생각 나네요ㆍ꼭 나쁜뜻은 아닙니다만 ㅡ

나와 친한친구들중 여화와의증인 여럿 있거든요ㆍ
한30년 가까이 된 친구도 있죠 물론 한때 피튀기게 논쟁 했죠ㆍ
지금은 서로 편안합니다 ㆍ

혹~ 감리교 밖으로 나가실생각, 더 정확히 기독교(개신교) 밖으로
나가실 생각 없으신지요?
더넓은 종교의자유를 찾아서 말이죠 그 다음 이런글을 접 한다면
인간적으로 편안 해 질것같습니다 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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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68.92.238.197)
2013-01-28 17:37:11
하나님은 누구인가 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은 일견 하나님에 대하여 좀더 넓은 관점으로 바라보는듯 합니다.
인격의 하나님이 아니라 곧 사람과만 관련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만물과 관련된 초인격의 하나님으로 그 폭을 확대하여 하나님을 보다 높이는 듯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초인격적인 무엇 곧 우주의 힘이나 에너지와 같은 존재로 표현한다는 것은 결국 물질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불러서는 안된다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의 창조주를 부정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만물의 그 무엇으로 지칭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되 사람을 그 만물 위에 두시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어떤 물질의 하나로 지칭해야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어떤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지칭하여 어떤 우상을 만든다하여 결코 성경의 하나님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인간이 자기가 만든 어떤 신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만물의 하나님이 초인격적인 하나님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비인격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마저도 비인격의 물질로 격하시키는 모양이 됩니다.
우리는 비인격적인 존재인가요?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치부하고 그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은 곧 우리가 비인격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말씀을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만 머무르게 할 뿐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철학을 한다는 차원에서 생각을 하더라도 사람은 만물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비인격적인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제외한 만물에는 신의 성품이나 인품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신의 성품이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그것이 심히 부패하였고 온전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신의 성품을 일부 갖고 있는데 사람이기에 인품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에게 주신 성품 외에 하나님 만이 가지신 고유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품을 만물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격을 지니신 분으로 높이고자 하는 심정은 이해하나 그런 성품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만물의 그 무엇으로 부른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그래서 엉뚱한 신을 만들고 섬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는 범신론 혹은 범만물주의의 한 변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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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01-28 19:17:11
유물론=유에너지론=유심론=유신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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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28 13:24:05
이렇게 간결하고 절제된 주옥같은 글체에 장확한 판단의 지성적 메세지를 실어 주시니 류목사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제가 평소에 말하고 싶었던 생각들을 어쩌면 이렇게도 꼭 집어서 말씀해 주시는지요. 정말로 답답하게 막혔던 가슴이 높은산 정상에 오르고난 후의 그 느낌처럼 파~악 트이는것 같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저는 정통 기독교 교리에서 치명적인 신학적 실수 몇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 첫번째는, 하나님을 지나치게 의인화 시켰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신적인 존재 즉 우리가 장확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 바로 형용사적인 대상이나 원리, 힘 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식하고 우매한 생각없는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을 하얀수염 달린 산타 할아버지 처럼 만들어 버리고 천국이라는 장소에서 보석으로 쌓여진 의자에 앉아 있는 그런 환상적 형상으로 만들어서 교인들을 그렇게 믿으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하나님 즉 거룩한 신을 참으로 우스꽝 스러운 모습 즉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하나님은 피조물이 이니기 때문에 어떠한 형상의 몸을 입고 있는 실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신을 죽었다 깨어나도 다 알 수 없고 인간의 말로써는 표현할 수도 없는 그 무었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시기를 즐려 하십니다’라고 하지 않고 등식형으로 하나님=사랑 이라는 공식을 던졌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바울은 하나님을 실체로 보지 않았고 형용사적 원리나 힘 즉 ‘사랑’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기독교 신학의 큰 실수는 바로 기독교 교리를 통해 하나님을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으로 잘못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또 무엇보다도 많이 알고 계시고 큰 능력은 있지만 전지전능 하지는 않습니다. 전지전능은 기독교 교리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자기이기적 욕심에서 우러난 희망사항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성서에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는 부분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하나님은 전지하시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지하다면 후회할 일이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후회하실 이유도 없겠지요. 후회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뜻하여 어떤 일을 시행하였는데 그 일이 뜻한바 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 그 시행한 일을 시행함에 대한 누우침과 시행전의 상태로 되돌리려 하는 의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미리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다 알고 있는 분 (전지한 분)이 그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한다는 것은 모순되는 논리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성경은 전체가 터무니 없는 것이 되버리고 맙니다. 전능하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은 방지할 수 있어야 하고 설사 잘못된 사건이 일어 났다고 할찌라도 그 일어난 일을 사건전의 상태로 환원시킬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의 본문은 아타갑게도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분명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능(어떤 일이든지 모든 것을 100% 다 할 수 있는)한 하나님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세째로, 유일신 문제입니다. ‘유일신’이라는 말 자체가 ‘신은 하나밖에 없다’ 는 뜻인데 신이 과연 하나밖에 없는지 한번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겨 주셨다는 그 십계명 제 1계명에 명확하고도 확실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본인께서 스스로 하신 말씀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십계명 제 1계명을 통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도 있다는 전제를 두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겁니다. 성경은 많은 신들 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능력이 가장 많으시고 다른 신들보다도 높으신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 ‘신은 하나 곧 여호와 밖에 없다’ 는 식으로 성경은 그 어디에서라도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언급한 세가지의 신학적 실수에 더하여 정통 기독교는 여러가지의 신학적 문제들을 많이 안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 까지만 올리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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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1-29 13:29:06
참빛님,
님께서 왜 이런 주장을 하시는지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죄송한 말씀이지만 님의 주장에는 논리적인 결함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문제를 논하면서 님께서 설명하신 부분에 대하여는 정통주의 기독교에서 이미 4세기부터 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씨름해 온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학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과 신학으로 해결해서는 안되는 문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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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30 01:35:45
감사합니다.
picky님의 조언을 달게 받겠습니다.

더 신중히 생각하고 올렸어야 하는데.. 하도 답답해서 우매한 사람들 좀 읽어보고 그들에 마음에속에 충동의 파장이 조금이라고 일어나게 돌을 정면으로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럼 어떤 접근으로 해결해야 하나요? 지난번에 picky님께서 말씀하신것과 같이 제풀에 지쳐서 대중으로 부터 외면당한 후 스스로 몰락할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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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1-28 06:04:18
질문이 있습니다.
차후에 제 의견을 소상히 쓰려고 합니다면 지금은 간단한 질문 하나만 하지요. 류 목사님의 의견은 평소에 제가 늘 하던 말이기도 하고 또 제가 류 목사님에게서 듣고싶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이 문제를 다룰 때에 몇걸음 더 깊이 들어가곤합니다.

배타교리를 넘어서야 한다고 하시는데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무엇이 배타교리인가요?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면 기독교가 지닌 가치에 변함이 없나요?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초는 유일신과 예수의 대속론입니다. 성경의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이고 예수는 여호와의 아들이며 성육신한 예수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어 사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죠. 조직신학적인 면으로 볼 때에 기독교의 신론과 구속론이 기본 교리의 근간입니다. 이 두 가지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자체가 배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타종교의 신관이나 구원론과 어떤 절충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이미 이 두 가지의 기본적 교리를 버린 기독교인이 아주 많습니다. 미국도 그런 추세로 기독교의 모습이 변합니다.

이 두 가지의 기본적 교리를 넘어서야 배타성을 넘어서는 것이고 다른 종교와의 대화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개인의 도덕과 윤리 그리고 사회윤리를 다루는 종교가 된다는 의미죠. 더 이상 기독교에는 종교적 교리가 남아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저는 종교가 구원을 교리에 삽입시켜서 사후의 세계를 말하고 천국을 말하는 한 그것은 더 이상 종교로서 이 사회에 자리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에 미국의 Robin Meyers 목사가 몇년전에 쓴 책이 한국어로 이제서야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제가 그 책을 대하기도 훨씬 전에 유사한 내용을 다루는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은 류목사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기독교가 버려야 할 것으로 가장 먼저 손꼽는 것은 예수를 신이라고 여기는 교리라는 사실입니다.

신격화된 예수가 기독교에 자리하고 성경을 신성시하며 유일신의 개념을 강조하고 삼위일체와 같은 무지의 전통을 쓰레기통에 내팽개쳐버리지 않는 한 기독교는 배타성과 독선주의에 함몰된 모습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죠.

저는 100% 동의합니다. 핮디만 지금 이 글을 보니 그런 문제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는 것 같아서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 신의 아들이며 예수의 가르침만을 통해서만 인간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 교리를 계속 손에 움켜잡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타종교와의 대화가 가능한지요?

존 스토트의 글을 보면 참 좋은 말을 많이 하고 새겨들을만한 말이 많은 것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까지만 이었다는 것을 저는 느낍니다. 그 이상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다면?" 이라는 질문에 대하여는 입을 다물고 있지요. 따라서 복음주의자로서 존 스토트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애매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 신의 존재가 종교적 교리와 무관하지 않은 모든 종교는 모든 문제의 종착역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문제입니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지만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루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하여 매우 열려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지만 어떤 특정한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그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하여 교리화시키는 그 어떤 종교도 가장 초보적인 문제로 유신론에 대한 문제부터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기독교가 바로 그런 종교 아니겠습니까?

인간세계의 세세한 것에 관여하는 인격적 신이 아닌 류 목사님의 표현대로 '그것'이라고 표현되는 신을 가정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요.

지금까지의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참 애매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말씀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때로는 유신론자의 말처럼 또 때로는 무신론자의 말처럼 그리고 어떤 때에는 기장에 속한 목사의 말처럼 또 때로는 좀 생각이 열린 예장쪽의 목사의 말처럼 들리는 말들 때문에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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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28 14:35:27
Picky 님. 저는 엄한 가정과 고집스럽도록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된 이후 늦었지만 Bertrand Russell의 책들을 접할 기회가 생겼고 그로부터 이성의 눈이 열린것으로 기억하며 그 이후 철학, 심리학, 고고학,고전 등 열린마음으로 다양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평생동안 저를 괴롭혔던 크나큰 의제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풀어 보려고 신학에 관련된 책들도 계속 읽어갔습니다.

Shelby Spong 책들을 접하고는 '무신론적 유신론자'로 진화했고 그런던 중 몇년전부터는 현존하는 과정신학의 대부 John Cobb의 저서들을 만나게 되었고 과정신학에 대해 부단히 공부하여 왔습니다. 놀란점은 PROCESS THEOLOGY가 기존의 정통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은 해결해 주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정신학이 앞으로 기독교 신학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방향되지 않을까 보고 있는데요 피키님의 이에 대한 고견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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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1-28 16:48:33
질문에 답합니다.
과정신학뿐만 아니라 현대의 많은 신학의 시도들은 (현대신학에 있어서) 단지 신학이라는 학문의 다양한 갈래의 한 선택입니다. 그것이 신에 대한 대답을 가져다 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원래부터 신학은 신이라는 존재를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연구한 학문이란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신에 대하여 아무런 답을 주지 못합니다.)
저는 불가지론적 이신론자입니다. 스퐁주교의 생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고 도킨스의 생각과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반대로 이들의 의견과는 반대의 견해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학을 넘어서서 세상을 볼 때에 정작 신학에서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특정 학문이나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날 때에 진정으로 그 학문과 종교가 제대로 보이는 법이죠. 그런 면에 있어서 신학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신학내에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또 인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을 함께 접해보면 최소한 자신의 사고가 폭이 넓어진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윌슨이 통섭이라는 개념을 생물학을 중심에 놓고 주창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학문적 통섭에는 발전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저는 현대신학에 관하여 논하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 현대신학의 조류가 어떻든 한국의 개신교라는 종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가 가장 관심사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끝까지 읽으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미 수년전에 한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학자가 과정신학과 열린신학등을 거론하며 뭔가 이상한 이단적 신학의 조류라고 못박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보면 과정신학이 무엇을 하는 건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가르친 목사들이 주류교단의 목사로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현재의 신학이 어쩌고 고고학적 연구의 흐름이 어쩌고 역사가 어쩌고 사본학적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하는 말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저는 물리학자입니다. 하지만 상경학과 공학도 공부하였고 다양한 인문학을 스스로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한 것 가운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신학입니다.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모든 다른 학문은 인간의 이성이 닿을 수 있는 한계가 점차 넓혀지는 것이 눈에 보이고 또 그 족적을 남깁니다. 그런데 신학이라는 학문은 도무지 학문이라고 부를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 초월적인 존재라고 규정지은 신을 대상으로 학문적 연구를 한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종교적 연구라고 불리워야지 학문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비평학이나 종교학이라면 모를까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으로만 보여집니다. 그래도 인간의 문화와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가 차지했던 자리가 큰 만큼 버릴 수 없기에 그것을 놓고 학문이라는 테이블 위에서 이성적 연구를 한다면 그런대로 이해가 가겠지만 사실 한국과 같은 경우에는 그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뭐 교단의 시녀노릇을 하느라, 이단사냥꾼 노릇하느라 정말로 학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과정신학 같은 경우는 사실 신학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에 가깝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의 학문적 가치는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이런 접근을 취하고 있는 신학은 사실 현실의 기독교와는 무관합니다. 그냥 학문적 흐름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따라서 정통 기독교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새로운 열쇠를 건네 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그들이 학문적인 토의를 하는 테이블에서만 가능한 얘기입니다.
과정신학은 아시다시피 인간의 이성적 사고가 변함에 따라 신에 대한 이해도 변한다는 것이기도 하고 반대로 신은 변하기 때문에 우린 지금 그 변하는 과정속에서만의 신을 인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이상학적 논제에는 몇가지 중요한 결함이 있습니다. 자세히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변함을 인간이 어떻게 인지할 수 있으면 또 인간의 인지라는 과정은 어떻게 뇌속에서 나타나는지에 대하여 정확히 밝히지 않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과정신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적 영역내에서만 보았을 때에는 아주 획기적인 시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기존의 신에 대한 이해 혹은 신을 이해하려는 방법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시도하는 것이 과정신학의 가장 큰 가치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그런 가치가 과정신학이 지니고 있는 가치의 전부입니다.

제가 위의 댓글에서 이야기했듯이 기독교에서 역사적 예수, 예수의 신성, 구원론 그리고 성경의 역사성에 대하여 정통주의자들의 주장을 조금이라고 부정하게 되면 기독교를 더 이상 종교가 아니라 학문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정통기독교의 교리를 그들 스스로가 포기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신학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를 통해서 그들의 정통주의 기독교가 걸어 온 길의 본래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얘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 같군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 현대신학에서 나타나는 정통주의 기독교신학에 대하여 이질감을 보여주는 야러가지 시도는 시대의 조류일 뿐입니다. 다만 신학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목회의 현장에서 그리고 신학자들의 서클에서 커밍아웃하는 목사와 학자들도 들도 꽤 있습니다. 스퐁주교도 그렇고 작년에 책을 쓴 롭 벨 목사도 그렇고 이미 잘알려진 바트 에어만과 존 크로산도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오래전 분터 나타났죠. 슈바이처 그리고 그 이전에 슐라이어마허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들수 있겠죠.
그런데 이런 현상을 문화의 흐름을 놓고 볼 수 있을 때에 이해가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이나 문화인류학적인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한 것이죠. 쉽게 말하면 이제는 세상이 바뀔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서구적 사상체계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얘기인데 헤겔의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가지고도 설명이 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서양인들의 사상은 철저히 이원론적인 사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기초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얘네들은 모든 것을 항상 하나의 극단적인 흐름으로 이끌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냐 아니면 공산주의냐 양단간에 결정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완전한 것이라든지아니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진리리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쉬운 논리적인 결론입니다. 그리고 만일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은 그것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기에는 유한성에 갇혀있기 때문에 접근을 못하죠. 그래서 항상 종교든 경제든 아니면 문화나 정치사상이든 심지어는 학문적 이론이든 어느 한 쪽으로 치닫다가는 그것의 수명을 다하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게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달려가던 반대방향에 관심을 가지고 결국은 그 쪽으로 다시 돌아가게됩니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고 나면 또 두 개의 방향이 충돌하기도 하고 아니면 합일점을 모색하면서 제 삼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탄생합니다. 헤겔의 생각을 빌자면 정반이 충돌하여 합을 이루는 것이죠.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대로 서구사상은 이 두 가지외에는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동양사상은 다르죠. 충돌이 아니라 조화이고 두 개가 아니라 무한한 수의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놓는 사고를 가집니다.

러셀을 언급하셨기에 러셀이 한 이야기를 해보지요. 러셀은 동양인은 서양의 수학을 배우는데 일년이 걸리지만 서양인은 동양인의 사상을 배우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그 깊이와 놃이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러셀은 알고 있었죠. 하지만 동양사상의 단점은 실요성에 있어서 많이 뒤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힘에 눌려 살아온 것 아니겟겠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서양의 사상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는 결국 시계추가 한 방향으로 가다가 언젠가는 다시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듯이 종교를 포한한 모든 인류의 문화도 역행을 할 때가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는 지금 그런 시점을 맞이했습니다. 이미 계몽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기독교는 지배력을 상실하는 문고리를 잡고만 것입니다. 기독교는 아시다시피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님이 언급하신 과정신학처럼 불과 50년전만해도 꿈도 못 꿀 그런 신학적 이론들이 나오고 십수세기를 지배하던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길러놓은 신학교에서 공부한 목사와 신학자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라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저는 그 어떤 형태의 신학적 시도라고 해도 그것은 단지 지난 시대의 문화의 흐름에 대한 반향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학뿐만 아닙니다. 서구사회의 사상적 기초위에 성립된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민주주의도 언젠가는 수명을 다하면서 사회주의 혹은 어떤 다른 새로운 정치적 형태와의 융합을 통해 변할 것이고 기독교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도 사회 영역의 일부로서 윤리와 도덕적 차원의 문제만을 다루는 분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것을 다루기를 고집한다면 외면당하여 사라질 것이구요. 이런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가지 예로 사회학자들은 앞으로 50년내에 유럽에서는 이혼율이 감소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결혼이라는 전통적 제도 자체에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지 않고 따라서 공적인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이혼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냥 좋으면 같이 살다가 애를 낳고 싶으면 낳고 그렇지 않으면 훌훌 털고 그냥 혼자 사는 것이죠.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도 이제는 필수가 아닌 옵션으로 변하는 시대가 왔다는 말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했었습니다. 결혼제도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인간에게 그것이 생로병사의 한 부분처럼 필수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종교도 그런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런 사이트에서 욕을 먹어가며 댓글을 쓰는 이유는 저 때문이 아니라 저의 다음세대 때문입니다. 세상이 제가 말한 것 처럼 인류의 문화적 프레임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는 그 때는 앞으로 아마 최소한 50년 이상이 지나고 난 후일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의 자녀와 같은 다음세대는 변하는 시대의 소용돌이속에서 많은 혼란을 겪거나 당황하면서 인생을 소비하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사실 그런 혼란스러움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직접 만나보고 그들과 얘기를 나눈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하여 절감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히 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혼자서 개인적인 배움이나 깨달음만을 위해 수고하시기 보다는 지금까지 배우고 꺠달으신 것들을 젊은이들과 나누시는 것이 어떨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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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1-28 00:41:56
저는 기독교신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아니 평소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무식한 편입니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신앙을 체험합니다.
선생님이 지적하시는 근본주의신앙문제로
갈등과 고통을 겪으며 고민합니다.
다른분들의 신앙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정생활 속에서 매일 겪고
있는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저의 처는 부모들로부터 근본주의신앙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교회에
나간 사람입니다. 같은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입장차이는
한국의 정치적보수와 진보처럼 첨예하게 다릅니다.
저는 그 다름을 당연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다소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처의 순수한 처의 신앙적열정을 존경합니다.
서로 다른 신앙적견해를 일상생할 속에서
좁혀가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

저는 케토릭, 퀘이커,장로,감리,무종파, 순복음교회.등
교회자체에 대한 특별한 거부감은 없습니다.
종파를 가리지 않고 가까운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행 중에는 교회를 찾지 못하면
다른 종교성전에 들려서 나름데로 예배를 보기도 합니다.

케톡릭,통일교,불교, 힌두교, 모슬람,유태교,
아주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습니다.
그들과 아무런 벽이 없이 솔직하게 종교적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면 개인적인 친구로 사귀면서
우리 집에 초대하곤 합니다.

대부분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습니다.
아마도 근본주의신앙인들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접한 그분들의 기독교에 일부 반응은 이렇습니다.

유태교 신도들은 예수를 똑똑했던 젊은 랍비,
혹는 이단, 민족배신자로 봅니다. ,
모슬람 신도들은 모세와같은 예언자로 존경합니다.
불교신도들은 깨달음을 얻은 한 부처로 봅니다..
힌두교도들은 성경복음서 내용이 자기들의 가바가드기타와
너무 유사하다며 예수를 자기들의 경전에 통달한
성인으로 존경합니다.

대화 중에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경우는 여지껏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
고맙다. 대화가 유익했다. 다시 만나서 대화를 나누자 하며
아쉬운 마음을 품고 헤어집니다.

그분들의 예수님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은
간디가 " 나는 예수를 존경한다. 그러나
예수를 닮지 안은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 와 비슷합니다.

아프리카 대륙은 현재 기독교인구와 모슬람인구가 반반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점점 모슬람 신도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지요.

그분들에 그 이유를 물어 보면 식민지시대
기독교인들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은 그런 역사적 기독교인들의 잘못을
아주 아쉽게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나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대화는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처음부터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는
다툼으로 시작해서 싸움으로 대화를 끝냅니다.
헤어질 때는 친구가 아니라 원수관계가
될 경우가 허다합니다.
.
대화가 주로, .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느냐?" "구원의 확신을 받았느냐?"
"기독교만 생명의 종교다" ".Yes 와 No 로 대답하라".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이다." ...등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일방적으로 결론이 나있습니다.
대화의 목적이 상호이해가 아니라 설득이고
흑백논리의 폭력입니다.

이견은 믿음이 부족하던지, 구원이 확신이 없던지,
아니면 이단입니다.

우리들이 살고있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흑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저의 체험입니다.
천사람이면 천사람, 만사람이면 만사람
생각, 지식, 교육, 입장, 처지, 경제적지위, 체험..
등이 각기 다릅니다. 하나도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부부, 가족들 간에 원수관계로 갈라서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이 살고있는 세상입니다.

또 대부분 근본주의 신앙인들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과 실제
삶이 정반대 일 경우도 많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 커녕 자기들과 의견이
조금만 달라도 원수보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내가 체험한 일부 근본주의 신앙인들입니다.

다른 종교의 근본주의자들로 마찬가지입니다.
흰두, 모슬람, 유태고,불교인 들 중에서도
종교의 기본정신과는 멀리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차 있는 분들이
근본주의 신앙인들입니다.
미국의 kkk 들도 철저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입니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인 세계평화를
헤치고 파괴하는 있는 사람들이
각종교의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미국모슬람 신도들의 숫자가 2천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만일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모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충돌하면 언제고
중동지역과 같은 종교전쟁터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런 가능성을 첨치고
계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인들에 대해서
평소에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우려입니다.
서로 이해하고 아끼는 세상이 됐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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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펠리페 (113.216.191.156)
2013-01-28 13:47:10
모든 댓글이 이럴 수 있다면,
그리 책을 많이 못읽는 저로서는 picky님의 짧은 댓글들에서 배우는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유식한 picky님의 글보다는 오히려 생활인인 박선생님의 글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면, picky님의 문제 제기는 항상 제게 생각할 거리를 주는데, 박선생님의 댓글에서 나름대로 해결의 tip을 얻어 가기 때문입니다.

당당뉴스의 모든 댓글의 수준이 이정도만 된다면...감히 최고라고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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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
개혁본부 (211.234.204.72)
2013-01-28 10:29:16
저도 제 개인일을 약간 밝히죠~
소위 화류계 30년 이상 종사한사람이구요 저도 제 지인들중
스님 신부 건달 여화증인 등의 이단 다 있습니다 ㆍ
저도 종교적인 열띤공방전을 가끔했죠ᆢ 그러다고 서로 의 상한적
없습니다 하지만 절때 굽히지 말아야 하는 기본적인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대화또는 인정 으로 그자리를모면 하지는 않습니다 ㆍ
여러번방송일로 샤머니즘 즉 무당들과 동행한 적도 있습니다 그즐은
나를 단번에 예수쟁이라고 알아보더군요ㆍ 그렇게 적그리스도들은 예민하고
민감 합니다 우리들은 뭡니까? 제발 정신들 차리세요ㆍ
여담으로 후배절 숙소에서 스님과가스펠 부를 정도의 교감은 합니댜
하지만! 아닌것은 정확히 아니라고 하는것이 맞습니다 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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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
개혁본부 (211.234.204.206)
2013-01-27 22:06:59
세상에 좋은일 을 할때야 타 종교들과 협력ㆍ협조 할수있지만 ㅡ
신앙적 으로는 연대 할수 없습니다 ㆍ

아저씨의글 은 항상 저 밑바닥에 숨죽이고 기회를 도사리고있는
루시퍼의 숨결을 느끼는 오싹함이 매번 말초신경을 자극함은
ᆢ 어쩔수없는 현상인것 같습니다ㆍ
여러분! 자녀들 신학교선택 잘해 주세요ㆍ

감리교 사태가 시발이 됬지만 다원주의 신학도들을 배출하는 학교와
그러치 않은 학교로 감리교는 나누어져 있는것같습니다 ㆍ

이들과 하나가 될수 있을까?
도저히 답 이 나오질 않네요ㆍ
아주 ᆢ 무거운심정의 주일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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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0
익명 (24.141.4.52)
2013-01-28 11:23:49
수구꼴통은 과연 누구일까요?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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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
아무나 수구꼴통 (211.187.2.91)
2013-01-28 15:26:27
자기 잣대로 보지 마라
진보나 보수 모두 자기 잣대로 보기 때문에 치우치는 것이다. 비판하지 말고 그저 먼저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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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34.204.72)
2013-01-28 12:40:39
진보적 이지 않으면 부정하려하는그댄 진짜로 수구 꼴래리 걸랑 ㅋ
공부? 글쎄 기본개념도 파 헤치는 인간들이 하는 공부 안해되 돠~
치열한 삶의현장을 몸소 겪어보지도 못한것들이 눈으로ㆍ머리로만
판하며 논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날날이 진보나 은혜와실질적인
신앙체험도 못한것들이ㆍ구원의확신도 없는것들이 한뼘도안되는 뇌 로
방대한주님의세계를 공부 랍시고 짖어대는 것들이나 쎔쎔 이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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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
익명 (24.141.4.52)
2013-01-28 13:19:39
두손 두발...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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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개혁본부 (211.234.204.72)
2013-01-28 13:30:49
오랫만에 칭찬한번 했구료 ㅡ 단세포
주님 섬기는데야 단세포 가 최고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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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
Picky (76.23.169.116)
2013-01-28 09:15:23
루시퍼?
루시퍼가 뭔지도 제대로 모르고 무슨 사탄의 우두머리 정도로 해석한 것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님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이 전혀 이상치 않군요.

루시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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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개혁본부 (211.234.204.72)
2013-01-28 10:09:12
왜? 이상하슈?
공통점 이 있잖어
주님의편이었던 천사가 홀라당 변심해서 주님을 감히 해석하고 부정해서
적그리스도 의 대장 이 된것이나 지금 성경을 신화이니 주님이 무엇인가 로
생각 해보라는식으로 서서히 논리적인 잣대로 주님 ㆍ성경 그대로를 감히 의심하게
만드는 술수를 쓰면서 변이 되는 당신들 ㅡㅡ 점점 루시퍼 쪽으로 닮아 가고잇는것이나
ᆢ 뭬 다를게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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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7
Picky (76.23.169.116)
2013-01-28 12:40:15
여보슈
루시퍼는 계명성이란 뜻이고 성경에서 계명성이란 예수와 같은 선지자들을 일컫는 말이오. 해와 같은 여호와의 공의가 사라진 새벽에 그나마 빛을 비추어주는 존재라는 뜻이오. 사탄이 야훼를 배반해서 대적하고 그 우두머리가 루시퍼라고 하는 미치광이같은 소리는 기독교가 생기고 난 한참뒤에 세대주의자들이 주절대는 종말론에서나 등장하는 말이오. 잘못된 해석이 가지고 온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가지고 마치 신과 사탄의 세력다툼장이 이 세상인양 착각하는 꼴이란...

갈수록 무식한 꼴을 의기양양하게 자랑하고 있으니 정말로 근본주의의 대표주자 답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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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개혁본부 (211.234.204.72)
2013-01-28 12:51:12
그러니까 당신들만의 세계에 갇히는거지 ㅋㅋ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표기 하자 했다가 결국 발음대로 짜장면 도
맞다 라고 얼마전 고쳤지 모든검색에 루십서를 치면 당신처럼 인식하는사람
어디있드나? 그게 대중언어이고 인식 이라서 이미 악마의 대명사 격 으로 존재하는
루시퍼 의 인식이 맞는 거징~~ 그럼조타! 걍 후련하게 악마 적그리스도 이리
존칭해주지 ~ 적그리스도들아!

그 신핵꾜출신들이 다 이러치는 않을진데ᆢ단1% 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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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
개혁본부씨 (211.187.2.91)
2013-01-28 15:30:24
신앙은 교리가 아니다
신앙은 교리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자기의 교리 안에 갇히지 말고 큰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진보든 보수든 자기 생각에 갇히고 자기 교리에 갇히는 것이 불신앙입니다. 내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 말고, 그저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자애로운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교통하고 모든 사람과 교통할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먼저 가지려고 애쓰세요. 그러면 참 신앙이 무엇인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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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4
개혁본부 (211.234.204.72)
2013-01-28 18:28:56
불교의 최고는 성불이 되는것이고 보통은 매일매일 참선을 통하여
또는 여타의 수행을 통하여 자기를 수양하는것이죠ㆍ
내가 교리에만 빠져있다고 오도 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ㆍ
주님의길은 어정쩡 한 수양 이 아닌 확실한 구원의 무리에
속하는일 이죠 그게 아니면 뭐하러 예수 믿습니까 내세관의 불확실함 을
방관 하시려거든 걍 주일에 교회보다는 절간에 가서 곡차 한잔 하심이
더 유익합니다 ㆍ주님의뜻 은 분명함 입니다 ㆍ
분명히 성경에나와있죠ㆍ득도하시려거든 절 에가십시요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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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8
무릇돌 (218.38.160.207)
2013-01-27 23:23:01
허접한 개혁운운 하지 마시고
공부좀 하시길 바랍니다.
이 유상태님은 참으로 유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얼라 하나라도 다치지 않도록 아주 유하게
이 정도의 글에 개혁운운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교리기독교의 젖먹이에 불과합니다.
개혁은 무슨 개혁입니까?
교리기독교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결국에는 자신도 재단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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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9
한마디 더! (211.234.204.206)
2013-01-28 00:06:32
하나님이 물건이냐!

하나님이누구인가?
이것도 이율배반 인데ᆢ

뭐!
하나님이 무엇인가!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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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7
공감 (211.187.2.91)
2013-01-28 15:33:40
공 공감
'하나님이 누구인가?'로 바꾸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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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4
개혁본부 (211.234.204.206)
2013-01-28 00:01:59
당신같은 사람들이 뭐하러 매주 교회 나가나?
매주 번갈아 다니면서 절 ㆍ천주교ㆍ천태산종 이리 순회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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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1
박평일 (72.196.234.24)
2013-01-27 19:40:32
좋음 말씀 잘 읽고 갑니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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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9

류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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