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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담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1월 20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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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1월 20일 (일) 08:35:46
최종편집 : 2013년 01월 20일 (일) 17:56:14 [조회수 : 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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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탐험가의 비애

오늘은 먼저 인도의 영성가이며 예수회 사제였던 엔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잠언(지혜의 말씀) 한 편으로 편지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탐험가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신바람이 나서
아마존에 관한 모든 것을 샅샅이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탐험가가
거기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나
한밤에 숲 속의 소리를 들었을 때에 가슴에 용솟음치던,
그 때의 그 느낌을
어찌 말로 다 옮길 수 있겠는가?

혹은 야수의 위협을 알아차렸을 때,
혹은 변덕스런 물살을 가로질러
쪽배를 저어갈 적에 마음 졸이던 그 절박감을
무슨 재주로 전달할 수 있었겠는가?

“몸소 찾아들 가 보시지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아무튼 길잡이 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마존 지도를 한 장 그려주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지도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것을 액자에 넣어 마을 회관 벽에 걸었고,
제각기 사본을 떠가기도 했다.

사본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아마존 전문가로 자처했다.

아마존 강의 이 굽이와 저 소용돌이는 어디이고,
이곳 너비와 저곳 깊이는 얼마이며,
급류는 어디 있고 폭포는 어디 있는지,
아닌 게 아니라 어느 것 한가지인들
모른다는 게 없었다.

탐험가는
지도를 그려준 일을 평생 내내 후회했다.

아무 것도 그려주지 않았던들
차라리 나았을 것을...




2. 엘리사 전승의 진실

몇 년 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구약 폐지론을 주장하다 개신교와 가톨릭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의 의도가 이해되었고 부분적으로 동의하고 싶기도 합니다. 성경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성경의 기록 전체를 신의 전갈로 간주하는데서 오는 폐해 때문입니다.

성경은 수천 년 인간사의 온갖 비극과 희극, 욕망과 질투, 음모와 암투, 그로 인해 벌어지는 처절한 삶의 장면들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담아냅니다. 하지만 성경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은 당시 사람들이 만나고 인식한 하나님이 얼마나 무섭고 무자비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기에 ‘성경의 거룩함에 동참하려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음은 그런 당혹스런 기록 가운데 자주 언급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콤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사십 이 명을 찢어 죽였다.” (공동번역 열왕기하 2장 23,24절)

이 구절은 선지자 엘리사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나타내는 사례로 기록되었지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정리된 신약성경의 신관은 물론이고 사랑보다는 법과 정의를 먼저 요구하는 구약성경의 신관으로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놀렸다는 이유만으로 42명의 생명을 몰살시키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게다가 희생자들은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이름만 대도 다 알만한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은 이 구절을 근거로 “목사가 잘못이 있더라도 교인이 함부로 목사를 비판해서는 안된다. 목사의 잘잘못은 하나님께서 직접 물으실 것이다.”라고 설교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우님들은 이 구절을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믿었기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교우님들 중에는 이 기록을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믿는 분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보다 더 많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교우님들은 아마도 “그 때는 율법의 시대였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므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런 일을 하시지는 않는다.”는 한국 교회의 보편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며 불편한 마음을 달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이 기록이 문자 그대로 실제 사건일 수는 없지만 당시에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시대의 한계와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신의 징계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전승을 타고 전해져 성경에 기록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지난 편지를 읽은 어느 독자분은 이 엘리사 이야기를 상징으로 해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상징으로 해석할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상징과 비유, 묵시 등에 대한 해석 문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해야 할 복잡한 난제로, 나중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마리아인의 비유, 또는 다니엘서나 계시록을 다룰 때 좀 더 깊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엘리사 전승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전승이 구전으로 유통되거나 단편으로 기록될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사제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성경에 삽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오늘날 어떤 스캔들을 일으킨 일부 목회자들이 해명을 요구하는 교인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하여 이 구절을 들이대며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차단하려고 시도하듯이 말입니다.



3. 성경은 정련되기 이전의 원석(금광석)과 같습니다.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성서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실제 가능성이 큰 해석을 무시해 버리면 진실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엘리사 전승을 시대적 한계와 무지에 사로잡힌 당시 사람들의 한계로 해석하는 진보적 성서학자들의 견해는 가능성 있는 해석으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지배계급의 의도적 왜곡에 대한 가능성 역시 충분히 검토되고 논의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학자들이 별로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성경 안에 시대 상황에 따른 한계는 있어도 고의에 의한 왜곡은 없다고 믿고 싶은, 또는 그렇게 믿거나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인(?) 사정이 그들 진보 신학자들에게 내제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문제도 충분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으로, 후에 ‘조직 안에 속한 학자들의 한계’와 관련하여 따로 지면을 할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는 담겨있지만 고의적 왜곡은 없는 진실의 경전’과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고의적인 왜곡까지 담겨 있기에 진실과 허구를 반드시 가려내야 하는 경전’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습니다.

성경의 오류나 고의적 왜곡에 대해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학자들의 시각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자면, 성경에 대한 애정으로, 또는 교우님들이 받을 충격을 고려하여 보다 유연한 해석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해석자의 그런 유연함(?)이 결과적으로 성경에 관련된 진실을 덮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에 남아나는 가치가 도대체 무엇인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면 우리의 신앙도 무너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염려하는 교우님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 옛 신앙을 잃을 수 있으나 오히려 새롭고 참된 바른 신앙을 갖게 됩니다. 제가 교우님들께 주일편지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천 년 전에 몸소 가르쳐주신 그 신앙, 복음의 원형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아, 그날이 속히 오기를...

결론적으로, 성경은 이삼천년 전의 시대적 정황 아래 기록되었기에 때로는 시대의 한계와 기록자의 인식의 한계까지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계급이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한 기록도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정금 자체가 아니라 정금을 포함하고 있는 금광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원석에서 정금을 얻어내려면, 즉 성경에서 진정한 신의 말씀을 들으려면, 이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펄펄 끓여 모든 이물질을 분리해내야 합니다. 이 작업은 어떤 교리적 전제에도 매이지 않고 과학과 이성에 의해 성경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열린 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혹독하고 정직한 정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비로소, 성경 안에 섞여있는 사람의 말과 정금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서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행복한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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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21 01:50:51
류상태 목사님의 글을 매 주일마다 기다리면서 잘 읽고 있습니다. 평소에 제가 가졌던 생각과 비슷하고, 성경에 대한 여러가지 난해한 점들과 오해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는 것 같아 좋습니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바르고 합리적인 접근은 '뭇지마' 식의 일방적 정통적 해석으로만 해결해 보려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만 하겠습니다. 앞으로 살아 남으려면 그렇게 할수 밖에 없을 것이고요.

우리 기독교가 이제는 편협적이고 독선적이다 못해 우매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부터 상식적이고 보편적이며 품어 안아주는 모습으로 변해야 할 텐데요. 저 부터 말이예요.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리플달기
9 6
무릇돌 (218.38.160.207)
2013-01-26 20:38:35
엘리사 전승은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다.
다른 성경의 말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그런 하나님 그런 신이라면 몸둥이로 패 주어야 하니까.

엘리사 전승은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다.
다른 성경의 말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그런 말씀을 통해 얼마나 많은 무지한 인간들이
서로 속이고 속고 하는지를
깨달으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한울성경서당-
리플달기
0 4
참빛 (24.141.4.52)
2013-01-24 02:32:21
피키님께
안녕하세요. 피키님으로 부터 또다른 각도의 성서레슨을 배웁니다. 통찰력과 풍부한 성서지식에 감탄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심오한 심벌과 메타포어,알레고리가 감추어져 있었는가에 놀랍고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합니다.

엘리사 이야기에 대한 류목사님의 의견 즉 초기 교부들에 의해 언젠가 성경에 삽입되어졌을 가능성과 picky님의 의견 즉 문자적으로 나타나 있는 그 뒤에 숨은 알레고리칼 적인 내용 그 어느 쪽도 무시할 수 없고 모두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느쪽이 과연 진실인가 하는것은 타임머시인을 타고 과거로 가서 직접 확인해 보지않는 이상 100% 옳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지난번에 잠깐 말씀드린적이 있지만, 지나친 Allegorical 해석은 무리수가 따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자꾸 괴롭히는군요...

중세기에 널리 유행했던 그러한 풍유적 해석을 종교개혁 후에 금한것은 바로 끝이 없도록 펼쳐질 수 있는 해석의 자유성에 따른 위험성에 대한 염려에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칫하면 ‘귀에걸면 귀거리 코에걸면 코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물론 picky님은 공부도 많이 하신분 같고 또 그 계통으로 오랜동안 연구를 하신분 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에 대한 알레고리칼 해석을 예를 우선 들어 보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르키는 것이고 강도는 사탄이며 강도에게 매를 맞고 쓰러진 불쌍한 사람은 교인들을 지칭하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맞은 사람을 데리고간 그 모텔은 교회가 되는 것이며 그 모텔의 지배인은 목회자를 상징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떠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여 재림하실 것을 약속하는것 이라는 식의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참 상식적으로도 말도 않되는 내용같습니다. 결과적으로, 풍유적 해석에는 기준이 참 애매한 면이 있다는 겁니다.

Picky님께 질문 한가지 있는데요. 이성과 과학으로는 예수님의 육적부활을 포함한 성경의 여러 기적적 사건들을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맥락은 이성과 과학적인 눈으로 성경을 바라 보야야 한다는 논지와는 사뭇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닌가요? 신비는 신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표현적 방편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신비까지 이성으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요청이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계시와 신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이라한 면도 없다면 노른자없는 달걀이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적 이성적 사고를 가지고 성경을 접하여야 하고 한편으로는 영성과 영감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궁극적으로 소유하여야 할 양날개가 아닌가요?

어쨋던, Picky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내용들을 담고 있는 책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 런지요? 더 알고 싶은데요. Amazon을 통해 구입할수 있는 책이라면 더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Picky님의 좋은 글들을 많이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리플달기
0 0
Picky (76.23.169.116)
2013-01-24 15:58:11
참빛님,
제가 지금은 급한 일이 있어서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간단히 알레고리에 대하여 먼저 그 기준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알레고리란 어떤 문장에 나타난 단어에 숨겨진 뜻을 가지고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동일한 단어가 항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 '암콤 = 이방인'이라는 수학적 등식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상징적 단어는 그 단어의 속성을 잘 살펴야 그 단어속에 숨은 상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 단어는 많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같은 단어라도 다른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독수리라는 단어가 그 예입니다.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으는 독수리의 속성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지향해야 할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썩은 시체를 먹는 습성을 상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성경에서 두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단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단어들도 문맥을 보면 어떤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쓰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알레고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대목에서 알레고리적 표현이 나타나지만 어떤 사건을 기술할 때에 일반적인 표현으로 문장을 이어나가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구분하기 위한 어떤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군다나 알레고리적 표현으로 쓰여진 문장이라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읽다보면 일반적인 문장처럼 보이는 경우가 흔합니다. 앞에서 예를 든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라고 예수가 말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입니다. 성경의 기자들은 자신들에게 전수된 성경을 먼저 읽고 그 안에 내재된 상징적 단어를 대부분 잘 파악하고 자신들이 또 다른 성경을 썼습니다. 물론 모든 저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차후에 새로운 내용을 삽입하거나 변개시킨 사람들도 (아시겠지만 성경은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그 내용을 수정하기도 하고 추가로 삽입하기도 하고 일부 내용을 누락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도 상징성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에서 간음한 여인에게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는 내용은 원래에는 성경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나중에 삽입된 것이죠. 그런데 이 내용에도 중요한 두 가지 상징적 단어가 등장합니다. 알레고리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내용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그럴싸한 내용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 내용이 알레고리를 이용한 표현이라는 것은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도 자세히 읽어보면 조금은 엉뚱한 부분에 삽입되어 있어서 문맥의 흐름상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레고리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이 그 반대로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을 읽게 됩니다. 결론은 이 부분을 삽입한 사람도 알레고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알레고리의 표현으로 쓰여진 단어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일관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논리적 결과입니다. 성경의 기자들이 자신이 어떤 성경의 부분을 쓰던 자신의 손에 주어진 성경의 내용을 보고 알레고리를 배웠으니 당연히 그도 동일한 알레고리 단어를 사용하였을테니까요. 숫자의 알레고리는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당연히 성경 전체에 걸쳐 일관성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이야기는 알레고리적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유적 표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강도는 사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에 대한 개념은 현재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탄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고 또 고대의 유대인들의 내세관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해보면 천사와 사탄에 대한 개념이 언제부터 변질되어 지금의 정통주의가 주장하는 사탄의 개념으로까지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사탄이 마치 하나님을 배반하고 적으로 변신한 그런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은 천사처럼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이며 그 역할이 천사의 반대 역할인 것입니다. 즉 인간을 유혹하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유혹이 있어야 옥석을 가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맡은 것이죠. 악역을 맡은 것 뿐입니다. 그래서 욥기에 보면 사탄이 하나님에게 나와서 욥을 어떻게 해도 되겠냐고 물으면서 허락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라면 어떻게 적장에게 와서 허락을 구합니까? 그리고 신약에 보면 천사와 사탄이 모세의 시신을 놓고 다투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하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두 존재의 모습일 뿐입니다. 사탄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한 이 문장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인간을 유혹해서 시험에 빠지게 하고 그 시험은 제대로 된 하나님의 자녀를 구별하는 시험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천사는 그 반대의 역할을 맡은 것이구요. 성경에 따르면 영을 가진 존재는 딱 네가지 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천사와 사탄입니다. 그런데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과 인간이고 천사는 선만 그리고 사탄은 악만 행할 수 있도록 피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악은 알되 행하지 않죠. 그렇지만 인간은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는 존재가 될 때에 그 인간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인간이 신이 된다는 표현이 어색하게 들리시겠지만 성경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고 또 예수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현 기독교가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안목으로 보면 죽어도 이해 못할 얘기일 것입니다.

얘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지만 어쨌든 알레고리에 대하여는 하루 이틀에 눈을 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성경을 뚫어져라 본다고 해도 그리고 무슨 책을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세상을 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이런 지식은 좀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쉽게 열게 해 줄 뿐이지 특별히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설명만 해주어도 쉽게 눈이 열리는 분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무슨 도를 깨우치거나 영감을 받아서 뿅~ 하고 단번에 눈이 열리는 그런 신비적인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님도 제가 만일 창세기, 이사야, 전도서, 마태복음, 이 네가지 책만 가지고 설명을 드려도 이외의 다른 책을 혼자 보면서 어느 정도는 알레고리적 의미를 발견하시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사야서 같은 경우는 온통 상징적 표현입니다. 아마도 설교 시간에 목사들이 이사야서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을 거의 들어보신 일이 없으실 것입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간단한 문장을 가지고 설교하거나 이사야서의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만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무지 상징의 내용을 풀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죠. 문자를 가지고 해석한다면 천년 만년 보아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이사야서입니다. 어디 이사야 뿐입니까? 에스겔, 예레미야 등등 대선지서는 그냥 문장 그대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한 장을 제대로 해석하기가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일단 상징적 의미만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사야서 66장도 한 일주일이면 충분히 그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실 대선지서는 말하고자하는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소선지서는 상징적 표현이 적기 때문에 쉽게 눈에 들어오고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이사야서 18:1-3까지만 보겠습니다.
1: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2: 갈대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 경첩한 사자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도다
3: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거하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호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찌니라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 내용을 알려면 우선 창세기부터 알아야 하지만 간단히 성경전체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관되게 말하려는 내용 가운데 하나만을 우선 간단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신의 뜻을 좇아 열심히 하늘을 향한 삶을 살다가도 부패하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양상이 역사를 통해 계속 반복되는다는 것을 분명히 그려주고 있지요. 그리고 그 부패는 종교적 집단에서 시작하고 종교적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부패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시고 다시 이사야서 18장을 아주 간단히 몇몇 단어만 가지고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구스의 강'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지명이나 인명이 나올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지명이나 인명이 지닌 의미를 통해 저자가 말하려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죠. 이것은 이미 기존 기독교에서도 인정하는 것이지만 자기들 편할 때에만 사용합니다. 즉 알레고리를 거부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알레고리라는 말은 하지 않고 써먹는 것이죠. 모세가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모세=물에서 건져낸 자. 모세에 의해 출애굽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세의 출생도 그렇고요. 저자가 그냥 모세라는 인물을 생각한 것이 아니죠. 이 공식은 목사들이 자주 써먹는 공식이죠. 그런데 구스=공포라는 공식은 배운 적이 없으니 써먹질 않습니다. '구스의 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스'란 공포라는 뜻입니다. 즉 공포의 강물이란 뜻이 '구스의 강'이란 뜻인데 이게 왜 '공포의 강'이어야 하는지는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아야 합니다. 계시록은 처음부터 '나는 알레고리를 이영해서 책을 쓰겠다'고 아예 공포를 하는 책입니다. 계시록의 시작이 어떻게 시작되죠? 계시록의 저자가 자기가 밧모섬에 갇혀있을 때 계시록을 쓴다고 하는 말로 시작하죠? 그럼 밧모섬이란 무슨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우선 섬이란 단어부터 봅시다. 섬이란 바다에서 우뚝 솟아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즉 섬이란 세상과는 떨어진 존재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도 쓸데 없이 배위에 올라가서 설교를 했구요. 겉으로 보면 쓸데 없는 짓죠 안 그렇습니까? 그러나 상징적으로 보면 정 반대죠. 상징적으로 보면 자신은 세상과는 구분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분명히 나타나죠. 그리고 밧모라는 이름은 송진이라는 뜻입니다. 송진은 치유의 능력이 있는 성질을 이용해서 성경에서는 치유자 혹 치유라는 상징을 지닌 단어입니다. 즉, 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은 이제 세상과 분리되어 세상을 등지고 예수처럼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영적 위치에서 이제 글을 쓴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계시록은 시작됩니다. 참고로 계시록은 무슨 세상의 종말이나 대 환란이나 그런 것을 다루는 내용이 절대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공포의 용이 나오고 지하갱이 나오고 어쩌고 하지만 다 상징적인 내용이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성경 65권에 비해 전햐 새로운 내용이 없습니다. 그냥 다른 성경 65권의 축소판 혹 종합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작 가장 어려운 것은 구약입니다. 창세기에 비하면 계시록이나 다니엘은 새발에 피라고나 할까요. 창세기의 상징은 정말로 찾아내기 힘이 듭니다. 물론 나중에 다 알고 나면 어렵지 않지만요. 보통 사람들에게 계시록은 겉으로 보기에 너무도 난해해 보이니까 사람들이 해석을 못하는 것이고 창세기는 눈으로 대강 보아도 옛날 이야기가 흐르듯 어렵게 보이지 않으니까 동네 개들이 들어도 웃을 정도의 수준으로 마구 해석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 반대입니다. 성경은 시대적으로 계시록부터 창세기로 거꾸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알레고리적 표현이 점점 강하게 나타난다는 얘기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사실적인 표현에 조금씩 더 노출되었기 때문에 상징적 표현을 조금씩 덜 쓰게 된 것이죠. 구약의 문체와 신약의 문체가 다른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죠.

다시 이사야서로 돌아가서, 그리고 강이란 하나님의 공의가 흐르는 세상의 이치를 말합니다. 공의가 흐른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말씀이 흘러내리는 자연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죠. 말씀은 언제나 구름이 머금고 있다가 하늘에서 비를 통해 산으로 내려서 물이 모이고 그것이 강이 되어 세상으로 상징되는 바다로 흐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세상으로 흐르게 됩니다.

지금 18장은 이사야가 패역한 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퍄역한 뱍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워래의 공의를 회복하기 위하여 말씀의 강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강들이 나뉘었다는 표현이 나오고 구스의 강은 그 건너편에 날개치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 건너편이란 패역한 자들이 있는 반대의 편입니다. 그곳에서는 패역한 시대에 제대로 하나님을 믿으려는 순전한 백성들이 모인 곳이죠. 그래서 날개치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가 그들을 보호한다는 상징적 의미죠. 그래서 이 패역한 종교집단의 지도자들이 강물에 갈대배를 띄웁니다. 이게 뭔 말이냐? 갈대란 인간의 사고를 말합니다. 연하디 연한 그리고 결국 썩어 없어질 것이 갈대입니다. 갈대배를 띄웠다는 말은 따라서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온 자신들의 종교적 이론이나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배를 탄 사람은 누구를 향해 대적하기 위해 가고 있습니까? 원래부터 강성하고 준수한 백성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하면 당시에 종교적인 지도자들이 구약을 들여다보고 이런 저런 종교적 싸움질까지 해가며 원래 성경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의미는 제쳐두고 자기들 배만 불리는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래 여호와의 뜻은 이게 아니다! 성경은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종교적 이론과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본질을 회복하겠다!"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바로 찾으려는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강 저편에서 점점 더 강하게 자라나고 있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기성 종교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수하 가운데 교리와 종교적 이론들에 능숙한 사람들을 무장시켜서 그들에게 저항하는 새로운 세력을 '이단, 사이비, 배교자'라는 이름으로 처벌하려는 것이 바로 갈대배를 띄우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외칩니다. "이 세상 사람들아! 이제 영적 전쟁이 시작할터이니 내 말을 듣거라!" 라고 말이죠. 성경에서 나팔을 분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적 전쟁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산 위에 기호를 세운다는 말에서 산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되는 나무들이 모여있는 곳 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10장19절에서는 그 삼림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산할 수 있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던 것이 소위 종교적 지도자라는 인간들이 모두 잘라먹었다는 뜻이죠. 구스가 왜 구스여야 하는지 이제는 이해하실 것입니다. 부패한 구세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새로이 나타는 세력은 이론적으로 당하기 어렵고 또 그들의 머리로 만든 어떤 이론도 먹혀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공포의 강으로 다가오는 것이죠.

지금 이사야서 18장의 세 절만 가지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짧게요. 원래는 단어 하나하나를 가지고 설명하면서 그 단어가 성경의 어떤 다른 내용에서 동일한 의미로 일관되게 사용되는지를 다 설명하여야 하는데 지금 제가 뭐 가르치는 입장도 아니고 하니까 그냥 맛배기로 듬성듬성 설명한 것입니다.

부활과 이성 과학 그리고 요청하신 책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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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1-23 16:02:28
이번 글을 읽고
지난번 글을 읽은 후에 저는 계속되는 글을 읽은 후에 제 소견을 적어보겠다고 했습니다. 이번 글을 읽고 나서 부분적이나마 류 목사님의 기독교관이 보입니다.
두 가지 문제를 제시하겠습니다.
첫번째는 엘리사의 사건에 관한 문제입니다. 류 목사님이 제시한 고대의 전승을 구약에 기술하였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그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당시의 지배계층이었던 종교 지도자의 권위의 방어 혹은 권위의 옹호라는 주장도 저는 수용합니다. 사실 제가 말한 질서의 문제는 약간 표현만 바꾸면 권위의 방어라는 개념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류 목사님은 이 사건의 기술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적지는 않으셨지만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말씀하시지 않은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성경의 해석학에서는 상징적 해석을 긍정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아왔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통신학이 지난 십수세기를 지배하던 시대가 남긴 유물입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상징적 해석이 통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사건뿐만 아니라 성경의 많은 사건들이 단지 전승을 삽입했다고만 말하면 이해가 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가 차후에 구약에 삽입되었든 아니면 성경의 원 저자가 상상력을 동원해서 창작해낸 이야기이든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구성이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성경 저자의 의도를 오히려 희석시킨다는 점입니다. 고대 사람들의 이성적 사고가 지금 현대인들의 그것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고 해도 엘리사 사건같은 것은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적 권위에 의지해 선지자가 된 사람은 일반 사람보다 영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또 도덕적으로도 훨씬 성숙한 태도를 지녔다고 그들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유도 아니고 아직도 철이 덜든 어린 아이들이 자신을 대머리라고 놀렸다고 신적 능력을 이용해 곰을 불러내어 아이들을 갈기 갈기 찢어 죽이는 모습을 보는 당시의 성경의 독자들은 지금 우리와는 달리 공포와 경외심과 신적 권위에 대한 위엄성을 느꼈을까요?
또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당시에 성경과 같이 종교적 경전을 쓰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지도자적 위치에 있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의 학식과 지식을 소유한 자입니다. 자배계층이자 상류계층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맹자가 대부분을 이루었던 당시의 사회에서 성경을 쓴다는 것은 그 독자를 지식을 소유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그리고 문서도 매매계약서나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종교적 경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토씨 하나라도 깊게 생각하고 경전을 써가는 사람들이 교훈과 종교적 의미를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이처럼 얼토당토 않은 내용을 썼을까요? 만일 엘리사의 이야기가 전승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면 더더욱 성경의 기자는 그 이야기가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 글을 읽을 대상이 무식한 일반 백성이라면 몰라도 사회의 지배계급에 있는 지식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더더욱 그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더 조심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전승이든 아니면 상상속의 이야기이든 성경에 집어넣으려 했다면 외적인 이야기의 내용속에 담긴 상징을 이용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를 가지고 신비함과 신성함이 함축된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기술하면서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은밀하고도 신비스러운 그리고 영적인 계시가 드러나 보이는 문장을 만들려면 상징적인 표현만이 가능합니다. 고대 유대교에도 영지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 경전 자체가 영지주의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겉으로 보기에는 엘리사의 이야기는 앞뒤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갑자기 이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올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식으로 문맥에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바벨탑의 이야기가 또 하나의 예입니다. 창세기에서 바벨탑의 이야기는 노아의 족보를 설명하는 부분에 속합니다.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을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바벨탑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노아 후손의 족보를 계속합니다. 아무리 고대인이라도 이렇게 문맥이 끊기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의 저자는 이렇게 쌩뚱맞은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의 중간에 삽입하였을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뿐 아니라 고대의 비문이나 종교적 혹 영적 내용을 담은 글들은 대부분 이런 형식을 취합니다. 길가메쉬의 서사시를 읽어보아도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서 엘리사의 이야기든 바벨탑 이야기든 그 안의 상징적 의미를 따라 앞뒤의 문맥과 함께 해석을 하면 아주 자연스러운 문맥의 흐름을 읽게됩니다. 어떤 특정한 사건을 소재로 사용하지만 정작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범벅이 된 이야기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노아의 후손의 족보를 나열하는 것도 완전히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의 족보를 열거할 때에 두 개의 복음서가 서로 다른 족보를 나열하고 또 구약에 분명하게 예수의 조상이 아닌 인물을 예수의 조상으로 끼워넣은 이유도 상징적인 의미를 연결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이름 그 자체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구약이든 신약이든 족보가 나타나는 경우는 단지 족보의 나열이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누구 누구의 아들이자 누구 누구의 손자요 누구 누구의 아버지인 누구'라고 소개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렇게 족보의 나열이라는 상징적 수단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는 중간에 삽입된 바벨탑 사건을 상징성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열어보면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쉽게 말해 겉으로 읽혀지는 내용을 벗겨버리고 상징성을 통해 그 안의 내용을 볼 수 있게 될 때에 전체의 주제가 매우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류 목사님이나 일반인은 이런 상징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징적 해석이 드러내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면관계상 간단히 베발탑 사건을 가지고 설명하겠습니다.
노아의 족보를 나열하는 창세기9 장을 상징적 기법을 이해한 후에 자세히 보면 홍수 사건 이후에 또 다시 인간이 부패하고 있다는 것을 창세기의 저자는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이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을 짓는 장면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고자 탑을 쌓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닿는다는 것은 신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좀 더 신앙적으로 열심을 보인다고 표현할 수 있겠죠.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나중에는 변질된 종교로 가게 되기는 합니다만. 대부분 교회에서 가르치기는 인간들이 교만해져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나 그 시대나 변함없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사실을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탑을 쌓습니다. 종교적으로 일치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나쁜 것이 아니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탑을 쌓는지를 창세기 10장은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들이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신의 뜻에 더 가까이 가려고 하였지만 그것이 잘못된 열정 때문에 부패하고 분열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보여주면서 탑을 쌓는 모습을 자세히 쓸 이유가 있을까요? 하지만 창세기의 저자가 탑을 쌓는 모습에 대하여 세밀한 방법을 묘사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상세한 묘사 가운데 숨겨진 상징성을 보게 되면 이해가 됩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에 창세기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그냥 벽돌로 쌓았다고 말하지 않고 돌 대신에 벽돌로 쌓았다고 말합니다. 또 단순하게 진흙을 사용했다고 말하는 대신에 역청 대신에 진흙을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꼭 이렇게 썼어야 할까요? 그냥 벽돌과 진흙을 이용했다고 하면 돨 것을 '무엇 무엇 대신에'라고 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표현들 하나하나가 다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쓴 것입니다. 돌과 벽돌을 비교한 이유는 돌은 말씀을 상징하고 벽돌은 인간의 생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돌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상징하는 반석을 이루었던 부분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를 상징합니다. 그 돌들을 차곡차곡 제대로 모아 성을 쌓으면 하늘에 닿는 것이고 그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안식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이유는 그 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의 썩어질 것으로 세워진 성입니다. 바벨탑에 쓰여진 벽돌은 흙과 물을 적당히 섞어서 불에 구운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위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흙은 인간이 죽으면 돌아갈 것이니 인간의 생각으로 빚어낸 것이죠. 역청과 진흙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는 역청을 가지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노의 홍수 사건 때에 배를 만드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도 이런 상징성 뒤에 숨어있는 본래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성전을 만들 때에 높이 넓이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모두 다 상징입니다. 제사장의 옷에 대하여 어떤 색의 어떤 보석을 어디에 달아야 한다는 등 자세하게 기술한 모든 것에 상징적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단순하게 옷 만드는 법을 기술한 것으로 밖에 읽혀지지 않습니다. 종교적 경전에 제사장의 옷 만드는 법이 왜 중요하겠습니까? 민수기의 그 많은 숫자도 하나도 빠짐 없이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상징적 단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성경 전체에서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지난 글에서 류 목사님이 숫자 몇개를 가지고 그 의미를 언급하셨는데 성경 전체에서 그런 숫자의 의미는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관되게 사용됩니다.
결국 바벨탑의 이야기는 쉽게 말하자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 하늘에 다가가야 하는데 인간들이 자신의 종교적 권위와 명성 그리고 육신적 욕망을 버리지 못해서 인간의 사상과 철학처럼 썩어질 흙과 같은 것을 하나님의 가르침과 섞어 만들기 시작하면서 종교적 분열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바벨탑의 사건을 통해 창세기의 저자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이라면 돌을 역청으로 연결하여 탑을 쌓아 하늘에 가까이 가야 하는데 돌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 들어간 벽돌과 썩어질 흙을 섞어 만든 진흙으로 종교적 교리와 이론들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탑 사건이 나타나는 10장을 전후로 9장과 11장은 이런 인간의 부패가 어떻게 노아로 상징되는 택함 받은 후손에게도 계속되었는지 족보속의 상징성을 통해 계속이어집니다.
쉽게 말해 노아의 방주 사건은 인간의 영적부패가 홍수 사건 이후에도 계속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결정판이 바벨탑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면서 어제 있던 것도 오늘 있던 것도 계속해서 내일 또 다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죠. 인간 세상에서 심지어는 하나님을 잘 믿던 사람들도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지나면 부패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겉으로 보여지는 내용속에 숨겨진 의미들을 상징적 표현을 벗겨가면서 보면 전체가 매우 조화로운 연결을 가지고 일관된 교훈과 가르침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여호와는 비밀과 은밀한 것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기자는 이처럼 숨져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자들을 어떤 영적계시가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구약에서 비밀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정통주의 신학에서는 이 비밀이 예수에 의한 구원을 가리킨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말도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도 비밀이란 단어가 여러번 나옵니다. 만일 비밀이라는 것을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이해한다면 앞뒤가 맞이 않는 내용이 많습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비밀이 무엇인가는 구약에서 말하는 비밀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확히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구약에서는 말하는 비밀이란 상징적 단어들을 풀어내어 성경을 보았을 때에 드러나는 내용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은밀한 것을 보여주겠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은 성경의 은밀한 내용들을 이해한 것이지만 그 수가 적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것입니다.
알레고리적 상징성에 대해서는 그것이 눈으로 보여지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내용입니다. 특히 구약은 매우 어렵습니다. 비평학, 초기 기독교사, 고대문헌학, 셈족 계열의 언어에 대한 이해 그리고 고대문화에 대한 이해를 쌓은 후에 신구약 성경 전체를 가지고 하나 하나 풀어서 해석하고 난 후에 성경이 얼마나 논리적이며 비록 여러 저자들이 썼지만 일관된 주제가 분명하게 나타나는지를 보고 난 후에야 논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많은 신학생들과 젊은 청년들을 가르칠 때에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도 창세기 한 두장과 복음서 두권만 풀어서 가르치고 나면 그 때서는 눈이 뜨이는 것을 계속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은 동일합니다. 성경은 정말로 대단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종교적 경전이라는 개념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와 신학교에서 배운 성경의 해석은 어린 아이 수준의 해석이라는 것을 말하기를 잊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단이나 사이비처럼 사람들을 모아서 종교단체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와 예수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바로 종교적 집단을 만들어서 종교놀음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비유로 거의 모든 것을 가르칩니다. 비유란 상징 즉, 알레고리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말합니다. 들을 귀 있는자와 볼 눈이 있는 자가 알아들을 것이고 자신이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왜 예수는 비유를 사용해서 심지어는 자신의 제자까지도 잘 알아듣지못하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예수는 구약만 가지고 있었고 구약은 온통 비유 즉 상징적 기법으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쓰여진 비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문자적으로 읽어도 약간 머리가 갸우뚱해지기는 해도 그런대로 넘어 갈 수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레고리 혹 상징적 표현이라고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아예 해석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난제라고 부르기도 하고 인간은 성경을 100% 알 수 없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아주 엉뚱한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신약의 예를 들면 예수는 작은 아이 하나라도 실족케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을 비유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마치 예수가 '바다에 빠져 죽어버려!'라고 강하게 표현하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약을 읽으면서 여기에 나타난 두 개의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단 한번도 예외가 없이 동일한 의미를 일관되게 보여주는 상징적 단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눈에 예수가 말한 이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개의 중요한 상징적 단어는 연자 맷돌과 바다입니다. 예수가 왜 "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라"라고 하지 않고 굳이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라고 했을까요? '돌을 매고'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지 않나요? 연자 맷돌이라는 매우 특별한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구약에서 맷돌이 상징하는 것을 예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 예수가 말하려는 내용이 바로 그 연자 맷돌이 지닌 상징적 의미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설명을 드리지는 않겠지만 참고로 구약에서 맷돌이라는 단어가 쓰여진 경우는 여러번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맷돌의 윗짝 아랫짝을 구분하는 경우가 여러번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맷돌이라는 단어가 쓰여질 때에는 한 경우도 예외없이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궁금하시면 나중에 기회를 봐서 말씀드리죠.

두번째 문제입니다. 이미 글이 길어졌으니 아주 간단히 묻겠습니다. 아래에 어떤 분이 이미 질문하신 내용입니다.
류 목사님이 말하는 과학과 이성으로 볼 때에 예수의 부활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요? 성경만 놓고 과학과 이성을 통하여 보아도 예수의 부활 사건은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입니다. 더군다나 비평학과 사본학을 공부하고 나서 본다면 복음서를 예수의 언행과 당시의 사건을 제대로 기록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요. 여기에 더하여 저처럼 복음서의 상징적 표현까지 이해하고 있다면 부활의 사건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그리고 왜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예수를 종말론적 예언자라고 생각하는지 이해가 갑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성경에서 무엇이 영감을 받아 쓴 내용이고 무엇이 인간이 쓴 내용인지 구분하는 그 기준은 영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것입니까? 만일 과학적이라면 그 기준을 어떻게 설명하실 것이며 영적이라면 그 기준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납득시키실 것인지요? 과학과 이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예수를 신으로 받아들이는 신념은 단지 신념이고 과학과 이성과는 별개입니다. 그런데 류 목사님은 과학과 이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때로는 영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아 보수 교인들로부터는 진보라는 말을 듣기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를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의 선을 넘지는 않으려는 태도가 보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니다. 예수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들이자 신으로서 믿습니까? 아니면 이 천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 나타났던 종말론적 예언자 혹 선지자로 생각하십니까? 만일 전자라면 삼위일체와 신의 아들이란 개념은 과학과 이성적 사고를 가지고 어떻게 설명을 하실 것입니까?
한 번 신앙적 양심에 대하여 고민하신 분이시니 두 번의 고민은 어렵지 않으리라 봅니다. 참고로 저도 류 목사님과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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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199.48.147.37)
2013-01-24 01:13:20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이 분은 합리성에 대한 집착이 상당한거 같다. (본업과 관계가 있을지?) 때문에 단순하게 보아도 될 부분까지 지나치게 조합하여 정합적으로 떨어지게 만든다거나, 종종 본인의 견해를 위해 해명된것들을 무시하고 재구하기도 하는 등의 문제점이 보이는것 같다.
뭐, 보기 싫다는건 아니고, 가끔씩이지만 잘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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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1-23 04:37:58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류상태씨께서는 원석같은 성경에서 정금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 들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의문은 성경에 담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방식으로 섞여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사람의 말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따로 구별되이 나와 있는가
아니면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 표현된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자라면 그런대로 우리가 구별하기 쉽겠지만 후자라면 어렵겠지요.

후자의 경우 그 구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해 냅니까? 사람의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은 원석이 아니라 모두가 보석인데 제각각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보석들이 서로 조화롭게 제시될 때 마치 아름다운 목걸이나 반지처럼 더욱 빛을 발한다.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때 느끼지 못했던 보석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을 설교자들은 보석을 다듬는 자들처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리는 류상태씨의 주장처럼 원석에서 뽑아낸 보석들이지요.

엘리사의 이야기에서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냅니까? 그것이 곧 교리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에서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이끌어 냅니까? 예수님이 천지의 주재시다? 자연 법칙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모습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신다? 어느 것이든 모두 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실 때에 하나님의 역사, 인간의 역사,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사역들, 선지자의 노래, 사도들의 고백 이 모든 것들을 다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내가 원하는 한 마디만 하고 끝내지는 않습니다. 이런 저런 어쩌면 쓸데없어 보이는 것까지 말하지만 그 말이 주어짐과 동시에 우리의 감정, 마음들을 함께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된 모습을 밝히실 때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에서 굳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가 글을 읽을 때 행간을 주의하여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는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적절한 글자와 문장과 내용을 통하여 더 깊은 뜻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적절한 선지자와 적절한 사건과 글자와 문장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종교적이고도 교훈적인 의미만 주기 위해 없는 사실을 꾸며서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주는 교훈이요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적 의미일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신 일에서 알 수 있습니다.장로의 유전이 곧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이끌어내는 교훈과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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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01-21 23:24:55
성경은 사실 제도종교의 기득권 선언문이다.
그렇다면 이 엘리사 전승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전승이 구전으로 유통되거나 단편으로 기록될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사제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성경에 삽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오늘날 어떤 스캔들을 일으킨 일부 목회자들이 해명을 요구하는 교인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하여 이 구절을 들이대며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차단하려고 시도하듯이 말입니다.

경전이란 어쩔 수 없이 제도화의 끝자락에 위치하는 권위의 상징이며 원천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에수운동의 변종인 기독교의 자기선언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낱 우상숭배자의 나약한 중생에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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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22 03:26:15
무릇돌 님의 글에 한편으로 동의합니다. 우리가 예수운동을 망각하고 제도와 교리안에 쌓여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한가지는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안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본문에서 말한것 처럼, 성경을 원광석이라고 보았을 때 그 안에서 순금을 추출하는 것이지요.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의 자기선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녕 하나님의 뜻을 보아야 합니다. 이 부분 만큼은 결코 잃어 버려서는 않될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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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01-22 07:24:40
적어도 이제는 성서-성경을 유상태 님처럼 볼 수 잇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관점일 것입니다.
허나 기독교와 교회는 성경-성서를 전통적인 눈으로,
교리적 관점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아니, 교리적도 아니지요. 성서-성경을 통하여 세속적인 축복이나 성공을 우선시하고
그런 것을 정당화하며 찬양하는 태도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와 강단의 현실입니다.
이에 편승하여 각종 추악한 이단들 사이비들이 싹을 틔우고 만개하기도 하지요.
성서-성경은 예수운동이 기독교로 화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생성하고 권위를 부여한 문서들입니다.
뭐 금광처럼 정련해야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숙고하면서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 성경-성서입니다.
여하튼 성서-성경에 대한 관점을 바꾸지 않는한 기독교와 교회의 미래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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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18.148.114.189)
2013-01-21 14:36:48
질문드립니다.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내는 잣대는 "과학과 이성" 이라고 말씀하셨는데...그렇다면 기독교의 근본적인 문제를 질문드립니다.

1.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복음서의 말씀은 사람의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2.예수 부활 이야기를 과학과 이성적으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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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72)
2013-01-21 22:49:55
님의...양심을걸고
사람의 언어입니다......이런질문보다 님이 예수의삶을살려 애쓰십니까
그증거를 말해보세요....사람이곧 하늘님이되야합니다..우주가 하늘님입니다....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신앙이깊어도 자신을 하늘님이라 말못할뿐이요 그리하면 어리석은자가됩니다...지들이 하늘님인것처럼행하는 먹사나 막사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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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18.148.114.189)
2013-01-22 13:58:32
늘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고자 노력은 하는데 항상 부족하기에 매일 저녁 잠들때마다 하루를 돌아보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실망을 보이는 부분이 너무 많거든요...류상태님은 쓰신 글말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셨습니다.

1.그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인지 궁금합니다.
2.이사야님은 댓글에 신앙인과 목사들에 대한 평을 하셨군요. 그런데 제가 드린 질문은 복음의 핵심을 묻는 질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인데 만약 이 부분을 인정하신다면 과학과 이성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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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72)
2013-01-23 04:48:11
글로말씀드리기는......
장소를 말씀하시면 만나서 말씀드리고싶습니다...제가 차나 저녁을사지요
주일날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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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22 15:54:58
질문님의 댓글을 읽어 내려가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복음의 핵심에 대하여...

예수님의 부활은 과학과 이성으로는 결코 설명할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믿음으로 보고 듣고 받았던 부활사건을 성서에 기록하여 주었고 우리는 그대로를 믿음의 선조들을 따라 믿는 것이지요. 과학을 신앙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신앙을 어떻게 과학이나 이성으로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본문에서 류상태님의 취지는,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접근법으로 성경을 대하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없는 주입식의 '뭇지마' 맹신이 되기 쉬우며 즉 자기도취에 불과한 허상이 될수도 있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님처럼 잠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삽니다. 예수를 살아간다는 자체의 첫 시작이 바로 이와 같은 하루하루의 반성과 회개일 것입니다. 감동적인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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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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