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변경수칼럼
나귀 등 위에 앉아서.... <마가복음 11:1-10><예수 일기>
변경수  |  12345pk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06년 04월 10일 (월) 00:00:00 [조회수 : 2049]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예수 일기라는 형식을 빌어 일인칭 시점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그려 보았습니다 >
   
수백만명이 모이는 유월절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다시 내려오지 못할 길이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나의 십자가를 져야하는 길이다.
마지막 예루살렘 순례 여정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주어야 할까?

그 옛날 아히야 예언자가 했던 것과 같은(왕상 11:29-32) 극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면 나의 메시지는 군중의 숨소리에조차도 묻혀버리게 될 것이다. ‘나의 나됨’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스가랴 선지자의 말이 떠올랐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래! 이 장면을 연출해 보는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너무도 극적인 방법이 되겠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이 이 예언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금방 나의 메시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거야! 평화시에 왕들이 나귀를 탄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내가 나귀를 타고 가는 것은 ‘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일이지...

“어린 새끼 나귀가 필요해! 그것도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말이야!”
나는 제자들 모르게 어린 나귀 새끼 한 마리를 준비시켜 놨다. 제자들은 뭔가에 잔뜩 들떠 있어서 세 번씩이나 거듭된 나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나의 포퍼먼스를 소홀히 할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예루살렘이 멀리 내다보이는 올리브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근처에 도달했을 때 나는 제자들을 시켜 맞은편 마을로 가서 준비된 나귀 새끼를 가져오게 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나의 지시에 놀란듯 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해야하는 말을, 마치 접선 암호 같은 대화 내용을 일러주었다.
반신반의하는 제자들은 안갈 수도 갈 수도 없는 갈등이 얼굴에 역력해 보였다. 길을 가는 동안 두 제자가 나눌 대화는 뻔해 보였다.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함께 다녔건만 여전히 어린애처럼 모든걸 설명해 줘야 하다니....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의 길은 확실했고, 돌아설 수 없을만큼 너무 많이 와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두 제자가 돌아왔다. 입가에 반신반의 하던 일을 해냈다는 대견한 자랑스러움이 감춰지지 않았다. 어린 나귀 새끼가 어미 나귀를 찾는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커다란 눈꺼풀을 껌뻑거렸다. 선해보였다.
오늘 나와 함께 ‘나의 나됨’을 증거할 친구다.
힘없는 새끼 나귀를 타다니... 가엽지도 안나! 하고 생각할 이도 있겠지만 그것은 나귀의 강한 힘을 몰라서 하는 염려지...

내가 탈 수 있도록 한 제자가 겉옷을 안장 삼아 나귀 등에 얹혀 주었다. 드디어! 올라탔다. 납작하게 짜부러질 것 같은 가분수형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겠지만 그 모습에 사람들은 스가랴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150여년 전 마카비 형제가 리워야단보다 더 흉악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저항하여 성전을 정결하게 한 것을 기억하면서 그때 흔들었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생나무들을 길 위에 비단처럼 깔아 놓기 시작했다.
그 위를 나는 걸었다.

앞서 가는 사람도, 뒤 따라오는 사람도 모두 하나가 되어 흥겨운 춤과 노래를 부르며 좇아 왔다.
‘아! 나의 이 극적인 행위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구나! 성공이다. 이 사람들이 비로소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구나!
그래!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한번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처럼 순결하고 겸손하며 온유한 나라, 평화의 나라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몰려들었고 나는 이 행위를 통해 충분히 ‘나’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사람들의 찬양 소리가 들려왔는데, 이 행진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주저할 만큼 절망스러운 소리였다.
“호산나!”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아! 순간, 깊이 좌절했다. 나의 이 극적인 메시지 전달도 왜곡되어 전해졌구나!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나’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의 전조로, 징표로 삼다니! 내 그것을 그렇게도 경계했건만...
어찌 스가랴 선지자의 이 예언을 그렇게 들을 수 있는가?
평화의 왕을 말하는데, 생각하는 것이 고작 정복자 다윗이란 말인인가?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희망을 얘기하는데, 고작 다윗의 왕조란 말인가?
어린 나귀 새끼 등에 앉아 나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십자가만이, 십자가여야만이 저들을 일깨울 수 있단 말인가!
고통이 밀려들었다....
   

변경수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18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1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24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