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변경수칼럼
유다복음서 '유다 배신은 예수의 요구?'
변경수  |  12345pks@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06년 04월 10일 (월) 00:00:00 [조회수 : 4685]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26쪽짜리 [유다 복음서]가 번역되어 발표되었다.(2006.4.8.한겨레신문)
"유다 배신은 예수의 요구"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그 내용 일부가 소개되었다.
이런 말 한마디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거나, 성경은 잘 모르면서 이성적으로만 사고하려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유다 복음](번역.주석서 제목: 예수와 유다의 계시에 관한 비밀스런 대화)의 내용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리라 생각하였다.
신약 성서는 이런 류의 주장에 대한 반론과 변증에 의한 산물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유다 복음]서의 주장을 계기로 우리가 믿는 바를 확인하고 점검해 보고자 한다.


1.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허구(픽션)가 된다.

   
"유다의 배신은 예수의 요구였다"는 말에는 '기독교는 조작된 것'이라는 냄새가 짙게 풍겨난다. 그러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배신을 허용했다'는 주장은 신약성서에 그려진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며, 그분의 행적과 말씀을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예수는 우리와 달리 '언행일치'의 분이셨고, 하늘의 뜻을 잘 받드는 아버지 하나님의 효자셨다. 그런 분이 유다에게 배신하도록 종용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유다복음서는 1,700년전 문서로서 오래된 문서라는 가치 외에는 없다할 것이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영에 붙들린 경건한 자의 삶이었다. 그는 자의적으로 자신의 삶을 구약의 예언에 맞추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는 수많은 이단자들이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고 주장했던 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삶은 결과적인 삶의 내용이었다. '결과적'이라는 표현은 관찰자의 표현이지 예수 삶의 우연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삶의 내용은 복음서의 내용과 같았다. 그럼에도 '결과적인 삶의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한 복음서의 서술 의도가 전적으로 저자들에게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저자들은 수많은 사건과 가르침 가운데 의도되어진 방향에 필요한 내용을 적어놓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저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형식을 가지고 예수 삶을 조명하며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설명과 해답을 주려고 했다. 그 형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복음서가 네 권인 것은 이런 이유이다. 복음서가 네 권인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다행한 일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예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고민에 빠졌다. 나무에 달려 돌아간 저주(유대법에 의하면) 받은 스승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생애를 너무도 비참하고 실패한 스승과 마찬가지로 저주 받은 삶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보호해야 했고, 자신들이 예수를 따랐던 일이 헛된 일이 되지 않도록 그때, 그 일을 해석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따라다닐 때는 몰랐던 스승 예수의 모습을 되짚어보면서 상당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약에 펼쳐진 예언들을 예수의 삶에 대비시켜 보았더니 너무도 일치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십자가 사건 이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제자들의 태도는 달랐을 것이다. 예수가 잡힐 때 하나같이 도망가거나 배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몰랐다. 스승 예수의 죽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유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예수만이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알았다. 그래서 예수는 잡히기 바로 전 올리브산에서 기도를 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죽음의)잔을 내게서 돌려주십시오"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예수가 유다에게 예언을 성취할 수 있도록 '배신으로 나를 도와달라'라고 말했다면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 할지라도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벌써 2여년 전부터 회당 출입이 금지된 위험 인물이었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예수를 잡아들이려고 하는 정탐꾼이 가는 곳곳마다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예수를 잡으려고 했던 이들은 유월절이라는 큰 명절 전에 그를 없애야하는 시간적 쫓김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수를 동원해서라도 예수가 있는 곳을 알아냈을 것이고, 유다가 아니라 할지라도 마침내 예수를 잡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예수는 도망가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예수 체포에 왜 유다가 등장했을까? 이것이야말로 유다의 배신이 단독범행이고 실제 있었던 사실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유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가 이후에 목매달았다는 기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오판'에 대한 괴로움을 자살로써 나타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수가 빨리 움직여주길 원했다. 정치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여 예루살렘을 압제자들로부터 탈환시키길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미 '다윗 스스로가 그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마가복음 12:37)라고 말한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오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제자들 중 유다만 배신한 것이 아님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오히려 유다의 배신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너그러움, 자애로운 마음을 봐야하지 않을까?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끝까지 제자를 사랑한 스승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얘기해도 알아들을 귀가 없는 이들에게 호통을 쳐봐야 바뀔 수 없음을 안 예수는 유다가 하려는 일을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 아닐까? 이것을 '유다를 통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예수의 방치 또는 책략(?)'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예수는 능력의 사람이었다. 구름이 끼면 곧 비가 올 것을 아는 것처럼, 예수는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충분히 예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 길을 걸어갔다.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고통을 알고도 십자가의 길을 홀로 걸어갔다.

후에, 제자들은 이 이상한 스승 예수의 행동을 깊이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엠마오로 힘없이 내려가던 두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그 끔직한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고 심각한 허탈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맥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갔을까? 그는 충분히 뒤엎을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왜 그렇게 미련한 선택을 했을까?"

이런 고민들의 결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다'(누가복음 24:31)

"아!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그 분의 삶이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눈먼 자여서 그 분이 가셨던 그 길을 보지 못했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그 분의 '명확한 뜻'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 본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기 때문이었다.


2. [유다 복음]서에 관하여

이 문서는 2세기경 그리스어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원본의 이집트 콥트어 번역판으로 3~4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0년대 이집트의 사막에서 발견되었지만 3백만 달러라는 고가를 부르는 바람에 세상의 빛을 보고 있지 못하다가 네셔널지오그래픽사의 끈길진 노력으로 며칠전 영문번역과 주석서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런 문서의 발견과 발표는 흔치는 않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1947년에 20세기 최대의 발견인 이스라엘 여리고 사해라는 곳에서 다량의 문서가 발견되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사본들이 발굴되고 발표되고 있다.
'복음서'는 네 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다. 도마복음(예수의 말씀만 묶어놓은 '예수 어록' 오쇼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해]라는 책이 있슴), 빌립복음([다빈치 코드]의 근거가 된 책) 등등 여럿인데 그 중에 하나가 발견되어 이번에 발표된 것이다.

이 문서는 영지주의 문서라고 하여 정통기독교 내에서 버려진 책이다.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위험한 이단이었고, 교회를 어지럽게 한 무서운 교리였다. 우리는 교회의 이상을 말할 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사실 초대교회는 교회내 이단들과 힘겹게 싸우며 [예수 그리스도]를 지켜내던 싸움터였다.

이런 배경을 안다면 유다 복음서나 빌립 복음서가 말하는 내용에 흔들리거나 놀랄 이유는 없을 것이다.


3. 반 박

① 유다복음 주석서를 쓴 성서학자 로돌페 카서는 "예수는 자신을 육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사람이 필요했으며, 적보다는 친구를 고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발언 자체가 영지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영지주의는 육신의 예수를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육신을 더럽게 여기는 극단적 금욕주의 속성과 육신을 감옥으로 여기고, 하찮게 여기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자신의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이 해탈을 위해 육신을 벗어나는 등신불 사상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의 죽음은 필연이었고, 그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죽은 대속적인 죽음이었다. 이 대속의 죽음은 이후 제자들이 발견한 신앙고백이었다.


②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학술패널에 참여하고 있는 크레이그 에번스 교수는 "예수와 유다는 (밀고 문제를 놓고) 사적인 대화를 했기 때문에, 이런 내용이 예수의 공개발언을 기록한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에는 실리지 않았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인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누가복음 22:22) "나와 함께 이 대접에 손을 담근 사람이, 나를 넘겨줄 것이다"(마태복음 26:23)라고 했다. 만약 유다복음서의 주장대로 유다를 다른 사도들보다 더 '선택받은 존재'라고 하고, 왕국의 비밀을 그에게만 따로 말해주었다고 했다면 예수와 유다의 사적인 말에는 어패가 있다.

예수는 자신의 개인 경험을 늘 함께 나누셨던 분이셨다. 한예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은 사건은 예수의 육성을 그대로 들을 수 있는 성스러운 대목이다. 목격자가 아무도 없었는데 기록되었다는 것은 스승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조용한 어조로 얘기해줬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따로 비밀스럽게 유다에게 왕국의 비밀을 말했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유다복음서의 주장이고, 신약성경 전체 특히, 복음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이기적인 주장이다.
변경수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77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1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24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