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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대신 십일조를 지고 가는 교회모든 헌금은 각자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
신성남  |  canavillage@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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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12월 03일 (월) 10:23:22
최종편집 : 2016년 03월 06일 (일) 16:20:41 [조회수 : 8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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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성도들은 가톨릭과 유대교는 물론 전 세계 대부분의 교회에서 하지 않는 현대 십일조를 왜 미국의 일부 교회와 한국교회만이 유독 강조하고 있는지 큰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율법의 십일조는 그 임무를 완료하여 종결되었고, 중세 십일조는 그 어처구니없는 부당성으로 인해 스스로 폐지되어 강물처럼 멀리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많은 교회는 그 흘러간 물을 한 줌 떠다가 부패한 역사의 물레방아를 다시 돌려보겠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글에서는 아직도 십일조 존속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그 정당성에 대해 간략히 재론하고자 합니다.



율법의 십일조와 중세 십일조

먼저 구약 율법의 십일조가 왜 생겼는지 그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구약 의무적 십일조의 우선적 역할은 '성전 제사 제도'에 기인합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농사일이 아닌 제사직을 수행해야 할 레위 지파만이 토지 분배를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지파들은 '토지소산'의 십 분의 일을 성전에 가서 레위 제사장들에게 현물로 바쳤습니다.

이는 제사 업무가 국가 행정의 최우선 순위에 있던 공적 직무이었으며 오직 '신정국가'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일조의 다른 부가적 기능을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을 주고 남은 재원으로 가난한 과부나 나그네를 돌보고 또한, 일부는 성전 관리비로 충당했습니다. 이 모두가 국가적 복지나 관리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구약 유대 지역의 특수한 종교적 세금으로 보는 것은 매우 타당합니다. 실제 십일조와 유사한 형태의 세금이 이스라엘 주변의 다른 고대 근동 국가에도 있었습니다.

물론 율법 이전에도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십일조가 성경에 언급되고 있지만, 이는 일회적인 것이었으며 의무적 십일조가 아니므로 현대 십일조와는 그 적용에 있어 크게 다른 별개의 사안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십일조, 야곱의 십일조, 그리고 율법의 십일조 모두 그 정신은 동일하나, 그것을 적용하는 방법과 조건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적용의 문제'입니다.

아울러 신약 초기 교회에서 일부 교부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어떤 종류의 십일조가 제기되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율법에 규정한 본래의 십일조가 아니라 마치 후대의 중세 십일조처럼 임의로 '변형된 십일조'임을 밝힙니다.

현대 십일조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도들의 교회와 신약 교회에 구약 율법에 따른 십일조는 결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어떻게 단정하냐고 반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사실 초등학생이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주후 70년 헤롯 성전은 로마군에 의해 포위되어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당시 수십만의 거주민들이 몰살했습니다.

신정국가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더는 성전과 제사장이 없는데 어떻게 십일조를 바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 누가 일부러 먼 예루살렘까지 가서 꼭 바치고 싶더라도 기술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세기 동안 잠잠하다가 한참 나중에 교회가 점차 비만해지자 마치 몸속의 종양처럼 새로운 '변종 십일조'가 등장했습니다. 구약 십일조를 제멋대로 변형하여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냥 각 지역 교회에 와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미 성전과 제사가 사라진 지 아주 오래인데 과거처럼 다시 현물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법령으로 강제성을 지니게 된 것은 겨우 주후 800년경 샤를레망(Charlemagne) 대제 때의 일입니다. 어째 그 모양새와 하는 행동이 요즘 한국 교권주의자들의 주장만큼 억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십일조를 정당화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배부른 종교 지도자들의 자의적 해석과 탐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중세 교회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강력한 철퇴를 맞고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현대 가톨릭조차 그런 억지 십일조의 부당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폐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가톨릭을 개혁한다고 나온 한국의 개신교가 이런 중세적 십일조에 다시 몰입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면 직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동반하고, 그 악한 열매는 항상 헌금을 많이 걷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모습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말라기 시대, 바리새인 시대, 중세 시대, 19세기 영국 교회, 그리고 작금의 한국교회가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십자가 사역을 대적하는 십일조의 부활

우리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것은 구약 제사 제도의 종결과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전이 없으면 제사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전 제사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 제사는 십자가 사역을 예표하였다는 점에서 십일조의 역할 역시 십자가 사역으로 완결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더는 십일조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단지 연보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구약 십일조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 외형적 이유가 제사이든 구제이든 결국 그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이웃 사랑의 정신이 신약에서는 연보로 계승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만큼 용감 무식한 주장입니다. 십자가 사역 이전까지는 예수님 역시 십일조는 물론 할례와 안식일과 절기 등 구약의 율법을 모두 지키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율법의 십일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지금도 중보적인 구약 제사 제도가 필요하다는 억지 논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교권주의자들도 율법의 원칙에 따른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는 감히 직설적으로 주장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수십 년 동안 고심해서 겨우 만든 논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하자'는 것입니다. 참으로 살다 살다 이렇게 미끌미끌하고 요상한 논리는 처음 봅니다. 구약 율법의 십일조 자체가 의무적이며 강제적인 것인데 무슨 '자원하는 십일조'가 다 있을까요. 자원하는 십일조란 더는 십일조가 아닙니다. '자원하는 세금'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는 마치 붕어가 없는 붕어빵처럼 모조품일 뿐입니다. 더구나 성전과 제사장이 필요 없는 신약 교회에 무얼 하겠다고 그런 쓸데없는 자원을 해야 합니까. 이는 언어의 조잡한 유희에 지나지 않으며 중세 십일조보다 더 질이 나쁘고 그 의도가 더 간교합니다.

무슨 근거로 사도들조차 하지 않은 '현금 십일조'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전도 아닌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중세 십일조가 그나마 '변형적 십일조'라면, 한국교회 십일조는 아예 '기형적 십일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교회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었는지 그래도 율법대로 '토지소산'인 '현물 십일조'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모든 소득'에 대한 '현금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원래 율법에 따르면 목수나 이발사처럼 서비스업의 소득에는 십일조가 부가되지 않았습니다. 토지를 배당받은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소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무조건 '소득이 있기에 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정복 시 '토지를 배당받았기에 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 십일조는 '토지소산'의 십분의 일로 명확히 제한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 누가 무조건 '소득의 십일조'를 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아무런 성경적 또는 논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종교적 사기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상당수 교회들은 여기에 '자원하는'이라는 바리새적 누룩을 슬쩍 발라 놓고 신도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부터 '힘에 지나도록' 솔선수범해야

그래서 필자는 한번 역으로 묻고 싶습니다. 그런 유치한 논리라면, 귀족 목사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재산의 반을 거룩한 교회에 바치라고 권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지 정말 궁금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왜 더 안 바칩니까. 그러면 아마 그들은 성경 어디에 재산의 반을 바치라는 말이 있느냐고 얼굴을 붉히며 반발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자원하는 십일조'를 하라는 가르침은 절대로 없습니다. 신구약 어디에도 아브라함과 야곱의 일회성 십일조를 본 받아 그 후대에서도 그런 '자원적 십일조'를 했다는 그 어떤 유사한 기록도 없습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그 어떤 형태의 십일조 대신 단지 '힘에 지나도록, 기쁘게, 그리고 자원하는 연보'를 가르쳤습니다.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고후 8:3)."

그런데 참 희한합니다. 요즘 귀족 목사들은 십일조는 죽기 살기로 강조하면서 정작 그 십일조의 중요한 용도인 구제는 별로 언급을 안 합니다. 웬만해서는 '힘에 지나도록' 구제(연보)하라고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를 자주 들어 보셨나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일조는 얼마든지 강조해도 자신들에게 별로 무탈하지만, 이 '힘에 지나도록' 하는 구제 설교는 자승자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정말 글자 그대로 힘에 지나도록 구제하려면 자신들은 모두 마치 중세 수도사처럼 소박하게 절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과연 힘에 지나도록 구제하고 난 후에도 고급 승용차를 탈 수 있을까요. 수십억대의 재산, 고가 주택, 해외 나들이, 자녀 유학, 그리고 호의호식 등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온갖 부와 권력이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위선이 되고 기만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설교를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종교 상인들은 체질상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구제 생활을 할 능력도 없고 또한 그리 할 의사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는 더욱 철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허구한 날 이미 유효 기간이 끝난 십일조를 가지고 잔 수 부리지 말고, 사도들의 권면대로 '힘에 지나도록' 하는 구제를 직분자들부터 성실하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족 목사들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대형 교회를 만들겠다고 무리하지도 않을 것이고, 아울러 고생길이 뻔한 교회 세습도 굳이 안 할 것입니다.

하여튼 주변에 혹시 필요 이상으로 부유한 목사를 보시면 일단 '힘에 지나도록' 하는 구제를 지극히 소홀히 하는 삯꾼 목사로 의심해도 무방함을 분명히 알려드립니다. 특별한 예외는 다소 있겠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자면 사실 신도들은 직분에 관계없이 결코 큰 부자로 살 수가 없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주고 나누기 바쁜데 언제 부를 쌓을 여유가 있겠습니까.



신도의 개인적 구제가 중요하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과연 교회가 열심히 십일조를 걷어 신도들이 궁핍할 때에 정말 열심히 도와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실직한 내 동생, 파산한 처남, 학비가 없는 조카, 비정규직에 힘든 외삼촌, 셋방살이 하는 고모, 은행 빚에 허덕이는 시동생, 그리고 홀로 사시는 이웃의 독거노인을 얼마나 도와주던가요. 그런데 이들을 외면하고 교회에 십일조만 잘 바치면 고르반(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다고 만족하십니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신도들이 먼저 자신의 형제와 가까운 이웃을 손수 돌보기 원하십니다.

모든 구제를 교회에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내 형제나 친척까지 그 사정을 알아 일일이 직접 돕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교회가 구제에 힘쓰는 것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구제 전문 기관은 아닙니다. 따라서 신도들은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너무 비대해진 중대형 교회라면 이미 이천 년 전에 시효가 말소된 십일조 대신에 그저 교회 운영에 필요한 약간의 연보만 하시기를 권면합니다. 반대로 미자립 교회나 작은 교회에는 가능한 많은 연보를 하십시오. 그리고 내 주변의 친인척과 친구들과 이웃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생계를 걱정하는 사촌에게 우선 쌀 한 가마니라도 보내 주십시오. 절약하며 고생하시는 형수님께 반찬값이라도 자주 쥐어 드리십시오. 이번 휴가 때는 장모님을 모시고 꼭 치과로 가십시오. 해산한 직장 동료에게 아기 옷을 들고 찾아 가십시오. 월세를 못 내 한숨 쉬는 후배에게 작은 봉투를 전해 주십시오. 가난한 이웃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십시오. 그리고 끼니를 거르는 기아 국가 어린이를 후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이 변하고, 친인척이 변하고, 직장이 변하고, 그리고 이웃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십일조의 정신이며 동시에 신자가 기쁘게 져야 할 십자가의 짐입니다. 왜 요즘 전도의 문이 잘 안 열릴까요. 신도들의 피땀 어린 헌금으로 고작 직분자들이 호사를 누리고 툭하면 건물이나 삽질할 궁리만 한다면 그런 교회를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모든 헌금은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

신도들은 이미 충분한 세금을 국가에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세적 십일조로 이중과세하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자기 십자가를 잘 지고 가라고 했더니 시킨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엉뚱하게도 철 지난 십일조를 무겁게 지고 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업 방향과 예산과 관심과 설교가 온통 이 십일조에 쏠려 있습니다. 과연 요즘 중대형 교회 직분자들의 기름진 모습에서 정말 십자가의 정신이 보이십니까.

한국교회 초기에는 십일조란 매우 드물었고 이는 믿음이 좋은 극소수의 직분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아주 특별한 헌금으로 생각했습니다. 십일조를 몰라도 교회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요. 십일조 안 내면 마치 정상적인 신자가 아닌 것처럼 교회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권주의자들의 꼼수입니다. 따라서 십일조 개혁 없는 교회 개혁은 공허합니다. 한국교회는 온통 돈으로 부패하였고 그 안에서 기생하는 종교 업자들의 비대한 밥줄이 바로 이 중세적 십일조입니다.

이제 그 썩은 줄을 끊어야 합니다. 신약 교회에 십일조란 결코 없습니다. 개혁 교회는 흘러간 저질 유행가보다도 더 천박한 그 십일조 복 타령을 그만 멈추고 바울의 가르침을 성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각자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 : 7)."

한국교회는 이렇게 명쾌하고 훌륭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왜 딴청을 부리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 논쟁은 단순한 신학 토론이 아닙니다. 이는 진실과 거짓이 겨루는 비장한 영적 싸움입니다. 여기서 양측이 모두 함께 옳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양의 탈을 썼으나 속은 늑대인 거짓 목동들에게 절대로 속지 마십시오. 십일조를 복의 근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는 단지 예수님 십자가 사역의 그림자인 성전 제사 제도를 밑받침하던 '한시적 도구'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진정한 복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샬롬!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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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JIcHILD (116.84.246.147)
2013-02-08 16:52:00
전적 공감
옳습니다. 십일조는 성경해석과 이해에 근거해서 해야 합니다. 물론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여지도 줍니다. 하지만 훨씬 신약적이고 기독론적 신학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자가임을 분명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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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0
삼무교회 (183.109.98.59)
2012-12-22 01:00:53
성전이 없어야 하고
목사가 없어야 하고
십일조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초대교회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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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
바두기 (24.127.248.25)
2012-12-30 01:58:57
아니, 소돔과 고모라가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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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가나안 (76.125.25.59)
2014-09-30 04:23:25
교회에서 가장 안믿는 부류!
목사들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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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빌 팤 (72.196.234.24)
2012-12-10 02:23:27
신선생님과 PICKY 분의 성경해석에 대한
논쟁에서 많은 새로운 성경지식을 배우고 갑니다.
성심에서 나온 진지한 논쟁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의견이 서로 다름은 절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와 사랑을 약속하는 희망입니다.

혼돈과 다양성 속
조화와 질서가 하나님 창조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너와 나는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이해의 대상입니다.

진리는 역설적이고, 삶은 변증법적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체험적입니다.
신앙은 각자의 개인적 체험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에덴동산에 나오는 선악과 열매를
지식의 열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진리로 신봉하고 우상으로 섦기는 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예수님께서 깨달음을 땅에 뿌린 씨앗으로 비교하시면서
지적하신 옥토는 지식과 논리에 물들지 않는
어린애같이 순수하고 순진한 마음입니다. 그런 어린이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인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 도
한 양치기 소년을 통해서 전달되었습니다.


평화와 화평이 아닌 것들은 예수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사도 바올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지적한 사랑의 속성이
아닌 것들은 사랑이 아닙니다. 요란한 꽹과리 소리들입니다.

PICKY 님의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처럼,
저도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율법인 사랑" 을
설명하는 수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
저는 일상생활 속에서 훌륭한 기독교 신앙인들과
가끔 마주칩니다.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 구원의 확신을 남에게 자랑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적으로 남은 판단하고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빚진자라고 생각하며
항상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사도 바올같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화평과 평화가 함께합니다.
그들은 따사하고 훈훈한 햇빛같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한 송이 꽃같습니다.
예수님같습니다.

일요일 아침이군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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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신성남 (49.50.206.22)
2012-12-10 13:54:03
박 선배님의 글에는 언제나 경륜이 주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저 역시... 지식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겸손하게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리플달기
0 0
Picky (170.20.186.188)
2012-12-07 02:32:11
율법과 계명을 폐했다?

신성남님과 논쟁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현 기독교에서 율법에 관하여 주장하는 내용이 (신성남 님의 주장도 이와 유사합니다) 성경의 내용 자체와 모순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님은 히브리서 7장의 몇구절을 가지고 율법이 바뀌고 계명을 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한시적 도구라고 주장하십니다. 문자주의적 해석에 길들여진 모습을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구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근거를 가지고 계명이 폐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님은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히브리서 전체의 주제와 구절들을 이루는 문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두 세 구절만 가지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언약을 맺으면서 영영히 맺는 언약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합니다. '영원히 지킬 언약', '영영히 맺을 언약'이라는 표현이 구약에는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영원히 지키라고 강조하며 전해준 율법이 님의 주장처럼 애초부터 시한적 도구였다면 이것은 여호와의 명백한 기만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 시한적 도구라는 사실도 모르고 죽으라고 제사 지내고 뼈빠지게 농사지어서 십일조 바치면 구원을 얻을 줄 알고 살아왔다라는 결론만 남습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무슨 근거로 계명이 폐해졌다고 하는 것입니까? 7장 18절만 가지고 계명이 폐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에수가 율법을 온전테 하려고 왔다고 말하는 내용에 모순되는 내용입니다.

님이 인용하신 7장 12절을 자세히 보십시요. 그리고 6장과 이어지는 8장을 자세히 보시지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8장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즉, 원래부터 십일조나 제사제도와 같은 것은 모세의 율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아브라함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나타난 것이며 그것이 율법에 의해 전수되어 오다가 이제는 본래의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는 예수에게 이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서 기자가 7:12에서 말하는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의 의미는 아론의 후손으로 이어지던 레위지파의 제사장의 직분이 이제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유다지파 출신인 예수에게 이양되었고 따라서 행위의 규례로 주어졌던 모세의 율법의 제도적인 부분은 수정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말하지 않고 바꾸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말한다면 율법이 지니고 있는 제사제도 또한 폐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제사의 직분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정해 놓은 레위지파의 제사장 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예수가 단번에 자신을 드림으로 본래의 속죄제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드러냄으로 인해 그 본질적 의미를 담고 있던 외형적인 규범인 율법에 변화가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가장 핵심은 제사입니다. 제사제도의 본질적 의미는 자신을 죽여서 거듭남을 여호와 앞에 증명하는 것입니다. 속죄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십일조의 의미도 속죄제의 의미와 동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것이 바로 제사를 지낸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즉 십분의 일을 10%로 이해한다면 십일조에 담겨진 의미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한 짓입니다. 바리새인을 비난하는 예수의 포인트가 바로 그것이고 히브리서 기자가 제도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포인트가 그것입니다.

십일조 규례뿐만 아니라 율법의 모든 규례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의미는 영적인 의미이고 표면적인 의미는 육적인 의미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의 정결법과 같은 규례를 공중 보건에 관련된 규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결법은 공중 보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민을 이루어가는 거룩한 집단의 정결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건과 위생을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각을 가지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많은 규례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도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제도적인 형식만 대대로 전해주게되었고 알맹이를 잃은 율법은 결국 선민 집단의 부패를 불러오고 그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에 에수가 출현하여 율법의 본질적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종교적 제도로서의 율법을 보던 시각을 벗어나게 되었고 히브리서의 기자도 마찬가지로 그런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율법에 대한 이해를 히브리서를 통해서 쓰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은 여호와와 인간과의 간격을 제사라는 영적인 제도를 통하여 좁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자신을 죽이는 상징적 의미의 구현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시작부터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말하고 있고 성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인 욥기에서도 욥은 자신의 자식들의 생일때마다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욥기에서 말하는 생일이란 자식이 태어난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거듭난 때, 즉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죠. 욥이 영적으로 잉태하여 거듭나게 된 영적 자녀들은 자신을 드리는 영적 제사를 통해 거듭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오경이 쓰여지기도 전에 그들에게는 제사에 대한 의미를 매우 강하게 못박아 놓았습니다.

이런 제사에 대한 개념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율법에 문자적인 규례로 나타나 예수시대까지 온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지못하고 하나의 종교적 관습으로 치부하며 대강 대강 제사를 치른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선지서에 보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내에서 영적 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예수가 자신의 목숨을 드리는 속죄제의 희생제물이 되었으니 우리들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그 의미를 그대로 실현하려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다는 가르침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교인이 있습니까?

예수를 따르려면 고난의 길을 가다가 십자가에서 자신 스스로 피를 흘려 자신을 희생제물 삼는 제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러호게 단 한번만 드리면 구약의 율법처럼 계속해서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님의 말처럼 히브리서 기자가 십일조 제도가 한시적 도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성전에 가서 물질을 드리는 그런 행위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그런 행위를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런 행위가 제도적으로 폐하여졌기 때문도 아니고 십일조 제도가 그 유효 기간이 지나서 더 이상 유효한 법이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는 외형적인 제도가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를 그대로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계명이 폐하여졌다고 말하는 것이지 유대의 조상들이 받았던 계명이 기한이 지났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제도의 형식만 따르는 것은 더 이상 그 본질을 만족시키는 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여호와가 영원한 언약을 줄 때에는 그 언약을 통하여 선민들이 여호와의 의도를 발견하고 그 제도가 지니고 있는 여호와의 뜻 (예수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라고 말할 때에 표현한 아버지의 뜻)을 제도적인 행위를 통해 구현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영영히 맺을 언약이라고 한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여호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꾀를 내어 율법의 행위를 단지 종교적인 제도로만 여기고 관습과 전통으로 만들어갔습니다. 그래서여호와는 제사 드리러 오는 백성들을 보고 마당만 밟고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결국 율법을 저버린 것은 여호와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교만함과 세상을 향한 욕망이 교묘히 율법을 악용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은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만 지니고 있던 당시에도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지닌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그 한 예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이 사람을 온전치 못하게 한다는 의미는 율법 자체에 흠이 있거나 불완전한 법이어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법 자체를 악용하면서 그것이 유대교 전체를 오염시켰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세상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세법이 있는데 국민들이 비록 그 세법에 불완전한 모습이 있다고 해도 그 세법의 본래의 취지를 바로 알고 충실히 세법을 따라 세금을 낸다면 세법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세법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꾀를 내기 시작하여 교묘히 법망을 피해나가려고 하고 겉으로는 법을 지키는 것 같지만 그 법을 악용하려고 든다면 그 법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 아닙니까?

구약의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불완전하여 폐하여졌다고요?

그럼 예수도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단번에 자신을 드리는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죠. 예수가 제사장이 되어 자신을 희생제물 삼는 그런 제사법은 모두 율법의 제사법에 명시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이 폐하여 진것인가요? 십일조가 한시적 제도인가요?

외형적인 행위의 규범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내면적 본질을 아니죠. 오히려 완성이 된 것이죠. 율법의 본래의 의미는 그 내면에 담겨진 여호와의 의도에 있는 것이니까요.

돼지고기를 먹거나 오징어를 먹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돼지와 같은 영적 굽을 가진 인간과 오징어처럼 비늘이 없는 인간과 같은 자들에 대한 영적 상징 아닙니까?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산모에 대한 정결법이 왜 달라야 합니까? 남아 선호사상 때문에요?
아니죠. 오로지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마에 반점이 있으면 뭐가 문제죠? 원래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으로 이마에 반점이 있는 사람은 영원히 부정한 백성인가요? 아니죠. 이 또한 상징적 표현을 통한 영적 의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 우리처럼 사실적 표현을 통해 종교적인 교훈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들로 가득한 책이 됩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비록 과학적인 논증 방법은 몰랐지만 나름대로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추구했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상징적인 기술법이라는 것이 지금 사람들과 달랐을 뿐입니다.

성경이 온통 상징적인 표현으로 가득하다는 저의 생각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가 말한 내용을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예수는 교훈을 말할 때에 비유로 말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왜 비유로 말했을까요? 그 이유는 구약이 온통 비유로 쓰여져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인용하면서 예수 스스로도 비유를 들어 구약의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비유를 들어 가르치는 이유를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알아듣지 못하게 함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이처럼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비유를 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거룩한 길을 가는 사람들을 선별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개나 소나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하면 가룩함이 쉽게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보면 여호와가 비밀을 말하고 보여주는 사람은 여호와의 뜻에 합한 택한 백성입니다. 아무나 구약을 읽는다고 해서 여호와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도 비밀을 말하는 것이고 비유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눈이 열려있고 귀가 열려있는 사람들에게만 그가 말하는 비밀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현재 기독교에서는 더 이상 비밀은 없다고 말하지요. 이런 주장은 성경의 내용과 모순이 됩니다. 어느 시대나 영우너히 비밀은 존재합니다. 그 비밀이란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참 의미를 깨닫는 자에게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이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비유는 어떤 방법으로 해석해야 하지요? 비유입니다. 비유에 나타난 상징성을 바로 알아야 하고 비유가 전달하려는 원래의 의미를 구약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구약의 비유와 그 비유에 나타난 상징성을 이해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구약이 쓰여질 당시의 사람 가운데에는 구약에 담겨진 상징적 의미를 볼 수 있는 깨달음이 있었기에 그 의미를 제대로 구현한 사람이 그나마 있었습니다. 그들을 놓고 여호와는 마음에 합당한 자라고 부릅니다. 여호와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자가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에 율법이 지닌 본질적 의미를 마음에 새긴 자를 여호와의 마음에 합당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율법의 영적 상징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따라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하나의 종교적인 관통고 관습으로 전락시켰다는 말입니다. 세대가 너무 부패하여지면 선지자와 같은 사람들이 그 영적 의미를 깨닫고 여호와의 선지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순환됩니다. 불행히도 예수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한 사도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 기독교를 세운 사람들은 유대인들도 아니고 그리스 로마 문화에 물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유대교 경전을 보면서 그 안의 상징적 의미를 전수해 줄 수 있는 선조의 피를 이어받지 못했고 당시에 유대인 가운데에도 구약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고 있는 유대인도은 사라졌습니다. 사도들도 사라지고 난 뒤 이삼백년 뒤에 그들은 성경을 만들고 해석을 하면서 교리를 세워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상실한 종교적 제도로서의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고 사도들에 의해 쓰여진 신약 또한 구약의 영적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보지 못하고 문자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약의 내용에 대하여 상징적 의미를 복원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고대 셈 언어와 당시의 문학적 표현에 대하여 학문적 연구가 20세기 중반을 지나서야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중세에도 성경을 보면서 희미하게나마 상징적 표현이 들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상징적 이해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역사와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있었기 때문에 시도로만 그쳤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 상징적 해석은 완전히 금기시되었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종교적 르네상스를 갈망하며 초기 기독교시대를 꿈꾸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꿈꾸던 초기 기독교란 예수 당시가 아닙니다. 어거스틴이 활개를 치던 4-5세기를 말합니다. 그들에 의해 개신교가 세워지고 우리는 그들에 의한 교리와 성경해석만 듣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에 기독교의 교리가 예수의 정신을 그대로 본받아 전수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는 절대로 구약의 가치를 축소하거나 율법의 의미를 변질시킨 적이 없습니다. 예수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지 않았지만 율법의 정신은 완전히 구현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의 정신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여호와의 말을 가지고 영적 성전을 쌓아 그 성전에서 자신이 제물이 되어 자신을 죽여 피를 흘리는 제사를 통해 여호와 앞에 거룩함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함을 입은 무리들이 선별된 성도가 되어 선민이라는 집단을 이루어 여호와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선별되어 거룩한 무리들 가운데에도 정결함을 더럽히고 가룩함을 훼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영적으로 구분하여 정결함을 회복하거나 거룩한 무리에서 축출해야 할 기준을 규정하는 정결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가 말한대로 볼 눈도 없고 들을 귀도 없는 자들에 의해 유대교가 변질되고 예수는 그것을 회복시키려했지만 또 다시 예수 이후에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이 기독교의 교리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말합니까? 아닙니다. 바뀌어졌다고 말합니다.

계명이 폐하여졌다고요? 원래의 계명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폐한다고요? 구약에도 없는 사랑이란 개념을 예수가 독창적으로 고안해 냈을까요? 아닙니다. 구약의 율법은 여호와가 인간들을 향해 품었던 사랑이란 개념을 율법이란 상자속에 꽁꽁 숨겨놓았을뿐 그 모든 핵심은 원래부터 사랑 그대로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담고 있던 외형적인 상자에서 사랑을 꺼내어 직접 보여준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주는 새 계명도 사랑입니다. 옛 계명은 단지 사랑이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인간들이 악용을 한 것 뿐입니다.

레위기와 히브리서 다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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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170.20.186.188)
2012-12-06 06:32:32
무식하면 당한다

십일조 폐지론에 대하여는 더 이상 언급할 것이 없으나 한 가지 더 할 말이 있다.

십일조 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통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십일조 제도에 대한 이해와 함께 복음적인 측면에서 신약에서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십일조 폐지론자들의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이 바로 마태복음 23:23이다. 이 구절은 신약에서 유일하게 그것도 예수의 입에서 십일조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된 구절이다.

그런데 십일조 폐지론자들은 마태복음 23:23을 인용하며 주장하는 십일조 지지론자들의 반론에 대하여 변변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십일조 폐지론자들의 주장에도 오류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고 십일조가 존속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본 기사의 끝부분에서 '십일조는 단지 예수님 십자가 사역의 그림자인 성전 제사 제도를 밑받침하던 '한시적 도구'였을 뿐입니다.' 라는 주장은 율법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에서 비롯한 잘못된 주장이다. 십일조와 제사는 하나도 상관이 없다. 그리고 반대로 십일조 그 자체가 지닌 의미가 제사이다. 이런 관계를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율법이 한시적 도구라는 주장은 예수의 출현을 놓고 보았을 때에는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율법 이전의 시대에 대하여는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설명을 할 방법이 없다. 율법이 한시적 도구라면 예수가 말하는 율법을 완성시킨다는 의미에 대한 보다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한시적인 도구를 온전케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왜 여호와는 모세 이후로부터 예수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도적인 구원방법을 제시하고 모세 이전과 예수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제도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결여되고 있다는 말이다. 에녹이나 엘리야는 율법 없이도 하늘에 올라갔고 예수 이후에는 어떤 율법적인 행위가 요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경의 전 세대를 놓고 볼 때에 율법시대의 사람들은 매우 불공평한 구원론적 방법에 얽매여 있던 사람들이다. 율법을 한시적 도구로 보았을 때에는 그렇단 말이다. 율법시대의 사람들은 율법이 한시적 도구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영원히 계속될 제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 제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 그리고 그것이 여호와의 뜻이라면 모세와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 어느 특정한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반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치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난 것처럼. 법이란 것이 어떻게 공적으로 반포도 거치지 않고 유효해 지는가?

예수의 복음은 율법의 행위에 관련되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적 의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이다. 그 본질적 정신만을 강조할 수 없는 시대의 사람들이 율법시대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도적인 행위를 통해 그들에게 본질적 정신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 율법에 들어있었는데 그것을 종교적 행위만으로 전락시키는 부패를 예수는 비난하면서 그 정신의 부활을 율법을 온전케한다는 말로 대신하는 것이다.

예수도 율법의 구원론적 조건을 충족하였고 성경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인물들이 동일한 조건을 충족하였다. 그리고 그 조건이라는 것이 율법의 핵심 내용이다. 율법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이 예수의 복음이다. 따라서 '복음 = 율법'이라는 등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뭔지도 율법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는 생각은 예수를 기독교 역사의 정점에 놓고서 기독교를 만들어 간 사람들의 시각에서나 할 수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구원의 논리를 재구성하고 확장하며 복원시킨 것이 예수라는 생각으로 보면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아주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성경 전체를 꿰뚫고 있는 매우 일관적인 주제를 볼 수가 있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의 교리는 이처럼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하여 역사적 문화적 배경도 모르고 또 유대교를 배척하고 예수가 중심이된 종교적 교리를 세워나갔기 때문에 어거지 교리를 가지고 무너지는 성읍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중세에는 카톨릭교회와 사제들의 부패를 그리고 현 시대에는 목사와 교회의 부패를 불러오는 것이다.

왜 율법이 한시적 도구가 될 수 없으며 그 반대로 아담부터 예수 이후까지 모든 시대를 걸쳐서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온전한 구원론적 방법이 되는 지에 대하여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설명을 하겠다.

여기서는 마태복음 23:23에 관하여만 보자. 마태복음의 문제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간단한 번역의 오류일 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무식하면 당한다'이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 성경에는 잘못되고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 매우 많다. 마태복음 23:23도 그 중 하나이다.

목사라는 사람들은 신학교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우지만 그들의 지식 수준은 겨우 학점만 따고 목사고시를 패스할 정도의 수준 정도이다. 사본학은 물론이거니와 비평학에 대하여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커녕 중학생 정도의 영어 문법실력만 가지고도 판별할 수 있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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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12-06 07:45:43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성경에는 분명히 율법이 바뀌고 계명도 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래 히브리서 7장을 참조 바랍니다.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일부 율법이 한시적이 아니라는 주장은 너무 주관적이군요. 유감스럽게도 Picky님의 글은 항상 이런 식이기에 다른 빛나는 좋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나머지 주신 의견 중에 다른 부분에도 역시 토론의 여지가 많지만... 과거처럼 또 시간 낭비적인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자 더 이상의 집중 토론은 생략하겠습니다. 독자들이 판단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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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24.60.52.23)
2012-12-06 12:09:12
신 선생님이 제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죠. 만일 이해한다면 본 기사와 같은 내용을 썼을 리도 없구요. 님이 인용한 히브리서의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시면 제 말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19절에서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여호와는 온전케하지 못하는 율법을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을까요? 예수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준비한 내용이 율법입니까? 그렇다면 선민이라고 부르던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사기당한 민족이 됩니다. 제 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내영은 아전인수식 해석에 따른 것입니다. 님께서 기성 기독교의 주장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시각과 선형적 세계관이 아닌 세계관을 가지고 구약의 내용과 율법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면 히브리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가 됩니다. 기성 기독교의 구원론과 대속론 그리고 조직신학적 틀 안에 갇혀서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만 말씀드리죠.

그리고 일부 율법뿐만 아니라 율법 전부가 한시적이 아닙니다. 율법은 지속됩니다. 문제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입니다. 제가 보기에 님은 아직도 율법을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육적인 행위의 규범으로만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님과 같은 이해때문에 이스라엘이 부패하고 여호와의 분노를 산 것이고 그 결과가 예수를 불러온 것이죠. 죄송하지만 제가 자주 말한대로 님의 성경에 대한 이해도 결국은 기성 기독교의 신학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해를 가지고는 성경은 보이지 않습니다. 님은 저의 주장이 주관적이라고 하지만 기성 기독교의 성경에 대한 해석은 주관적인 것을 벗어나 비논리적입니다. 일관성도 없고요. 아마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글들을 보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실 것은 확실합니다만 틀린 것은 틀린 것이죠.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지난 이천년 가까이 기독교가 주장해 온 교리가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일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반발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옥이 존재하나요? 삼위일체가 정말 맞는 얘기인가요? 예수의 실존만 믿으면 구원을 받나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나요?

세상에는 정말 종말이란 것이 있고 그때에 예수가 다시 구름타고 오나요?

정말 그런가요?

이런 의심을 하면 지옥 가나요?

성경을 다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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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47.79.113)
2012-12-06 10:56:45
마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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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170.20.186.188)
2012-12-06 06:31:25
십일조는 단지 예수님 십자가 사역의 그림자인 성전 제사 제도를 밑받침하던 '한시적 도구'였을 뿐입니다???

십일조 폐지론에는 동의하지만 십일조가 한시적 도구라?

이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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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12-06 07:31:35
위의 본문이 의미한 '십일조'는 <율법의 성전 십일조>입니다. 달리 확대 해석은 안 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의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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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강 (121.1.78.145)
2012-12-04 23:41:38
현행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
돈에 물들고 세상에 물든 교회, 십일조는 그런 교회들의 생명줄입니다.
세상에 기생하는 교회들이 고의적으로 성경을 오독하여 십일조를 조작하고 성도들에게 멍애를 지우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길옆 교회중심적 사고를 뛰어넘어 말씀중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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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기 (121.186.223.11)
2014-07-01 18:09:46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말씀중심에 이단 찾고 하면서 목사가 성경내용 설교 내용도 모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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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12-06 07:33:25
성호강님,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 기쁩니다.
주신 의견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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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47.43.199)
2012-12-05 08:54:42
논리적인 잣대로 성경구절구절 집어보면서 나열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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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12-04 15:29:46
현행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
제 글의 요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예수님 십자가 사역과 예루살렘 멸망으로 '성전 십일조'는 분명히 폐지되었다.
2. 그 '성전 십일조' 외에는 신구약 전체에 '하나님께서 의무적으로 명령하신' 다른 십일조란 없다.
3, 현행 십일조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중세 십일조처럼 사람이 임의로 만든 십일조이다.
4. 성도들은 그런 십일조를 할 의무가 없다.

여기에 다른 오류가 있다면 항목별로 지적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십일조'라는 말은 이제 식상합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십일조를 하라고 명시되어 있는지요. 정 감사하고 싶으시면 그냥 감사헌금을 하면 되지, 왜 구태여 '수치적 강제성'을 지닌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지요? 그리고 왜 그런 일방적 요구의 십일조로 직분상, 사역상 차별을 하는지요. 이것을 고치자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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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강 (121.1.78.145)
2012-12-04 23:54:07
필자의 주장에 완전 공감합니다. 한국교회들에서 십일조는 마치 성경의 근거가 있는 것처럼 성도의 보편적인 의무로서 설교되고 선서되고 맹세되고 시행되고 있습니다.
마치 한국의 교회들은 십일조라는 이상한 세금을 곗돈으로 내는 특이한 계모임 같습니다. 곗돈을 내지 않으면 계원이 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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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1
개혁본부 (211.247.43.199)
2012-12-05 08:55:19
지나친 망상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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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47.45.230)
2012-12-04 16:27:08
하나물어 봅쎄다~
1. 구약 은 뭐하러 성경 맨앞에 붙어있나요?
(그럼 댁은 구약은 그냥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치부하고 무시하고
신앙생활에 참조 안하실 겁니까?)

2. 신약에 들어서서 예수님이 십일조 하지말아라 어디에 그리말씀
하셨나요?

3. 흔히들 말라기 3장 7절~쭉~ 의 인용으로 십일조 강조 하죠.
그거 지워 버릴까요?

4. 교인들 중에서 십일조 하고 정말 축복받으신분들 많습니다.
그런 간증들은 빈수레가 요란한 간증들 입니까?

십일조 이든 감사헌금이든 매주일 주일헌금이든...
강제적으로 억지로 들이는것은 주님이 원치 않습니다.
"온전히" 드리는것을 받으시지요. 과부가 드리는 한데나리온 처럼...

그리 십일조 드리는 분들이 이 글을 보면 속이 시원해 질거라 생각
하십니까??????????

각자의 신앙정도 에 맡겨 두는것 입니다.
굳이 이런글을 써서! 무엇이 주님께 이롭습니까?
무엇이 각 지교회들에게 이롭겠습니까?

분위기를 헤하는 자도 모임을 헤하는자 와 같습니다.
반드시 당신은 주님으로 부터 큰 경고의 메세지가 도달될 것입니다.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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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47.45.230)
2012-12-04 16:44:24
한가지 더!!! 예수님도 구약시대의 율법 지키라 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23:2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위에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

여기의 주어 는 무엇입니까?
"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입니다.

그것들도 뭐라? 소홀히 하지 않아야~ 그죠?
기도많이하시고 글쓰세요~ 공부도좀 하시고요~ 나같이 비전공자 에게 이런 반박의글! 창피 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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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본부 (211.247.45.230)
2012-12-04 15:01:54
아~ 저번에도 그러더만~
반대의 글을 찐하게 쓰면 어떤넘이 들어와 분탕질 해노쿠
그 이유를 핑계로 글을 "삭제" 하는 작전!

요즘은 머리가 좋아야 이렁것또 운영하나바~

분명 십일조를 굳지 하지말라 글쓴 너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교인 맞기는 맞는거여~

십일조든 감사헌금이든 열심히 해서 내교회 재정 늘려 주님의 일
하는데 쓰겠다는데...누가 말리냐고라고라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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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121.139.177.252)
2012-12-25 22:16:49
평신도 입장에서 이해 안되는 논리는 예수믿으면 구원 받는다 해놓고는
막상 믿으려고 교회 나가면 십일조해야 한다고 설교하는데
십일조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것을 도둑질 하는 사람이라 하니
결국 예수 믿으려고 교회 갔다가 십일조 때문에 도둑놈으로 몰리는 이 슬픈 현실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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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222.108.127.167)
2013-09-29 14:14:28
필자의 글에 동감입니다.성도들의 피를 빠는 삮꾼들이 판을치는 통탄할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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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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