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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보다 ‘말씀’, '필요'인지 '탐욕'인지, 그것이 문제로다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까닭은?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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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11월 12일 (월) 23:02:25
최종편집 : 2012년 11월 13일 (화) 18:04:30 [조회수 : 6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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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눅 4장 1절~8절)

 

시험에 예외는 없다

1절~2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예수께서 성령충만함을 입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에게도 시험은 찾아온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다. 시험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누구나 예외없이 시험을 당하지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성령충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차원의 믿음이 아니다. 예수를 삶의 주관자 곧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차원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입술의 고백을 넘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시험에 걸려 넘어진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도리어 시험을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한다. 마치 똑같은 돌부리를 만나더라도 걸려 넘어지면 ‘걸림돌’이 되지만 도리어 딛고 일어나면 ‘디딤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참된 믿음이란 삶에서 만나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우리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원치 않는 시련이나 치명적인 실패를 이겨내는 힘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다. 거친 물살이 노련한 뱃사공을 만들어 내듯이 인생의 시험은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을 만들어 낸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시험이 없는 평탄한 길을 요청한다. 하지만 참된 기도는 시련이 없는 무사안일이 아니라, 시험을 물리치고 마침내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청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이길 능력을 부어 주시고 언제나 시험을 극복하도록 도와 주시는 분인 까닭이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간 시험을 받으셨다. 광야의 사십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했던 광야 사십년을 연상시킨다. 이집트에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엑서더스(Exodus)’를 감행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출애굽기는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기 위해서(출8:8)’ 곧 예배하기 위함이라 증거한다. 한마디로 이집트의 파라오를 섬기던 노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변화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들을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옮겨 놓지 않으셨다. 그들은 무려 사십년간의 험난한 광야의 여정을 통과해야만 했다. 광야의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Rites de passage)’였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백년간 길들여진 노예근성을 극복해야 했다. 그곳에서 아집과 편견 같은 옛습관들이 뿌리 뽑혀지고 거칠고 모난 성품들은 곱게 다듬어져야만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경외하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단련되어야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구약성경은 출애굽기와 레위기, 민수기와 신명기를 통해서 이러한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결심한다고 해서 곧바로 천국 같은 삶이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마땅히 광야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만으로 모든 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여기며 구속의 전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버린다. 이것은 마치 오경 전체의 내용과 맥락을 무시하고 오직 유월절사건이 기록된 출애굽기 13장에만 머물러 있는 격이다. 결국 그 이후에 이어지는 시내산에서의 계명, 성막의 건축, 하나님의 임재 등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놀라운 여정을 간과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광야는 고난이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변화되고 고통을 이겨낼 때 비로소 성숙에 이른다. 이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 시험을 당할 때, 어려운 순간에 불평과 원망하기보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이 시련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숨겨진 본심을 찾고 하나님의 섭리를 궁구하게 된다. 마침내 이기게 하실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간구하는 성숙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때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충만함을 받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었던 놀라운 은혜의 순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도리어 잘나갈 때, 승승장구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며 겸비할 것을 권면한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어려울 때, 환란이 찾아올 때 감사하며 찬송하라고 가르친다. 이와 반대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잘나갈 때 더욱 겸비하며 겸손히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면한다. 예수께서 항상 깨어 있으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일에서부터 나쁜 일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숨겨진 섭리를 발견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라는 준엄한 메시지요. 너무 잘된다고 자만하지 말고 너무 안된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필요와 탐욕을 분별하는 지혜

3절~4절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의 본뜻을 이해하려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란 예수님을 향해서 반복하고 있는 마귀의 대사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께서 받는 시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는 시험이요,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가늠하는 테스트와 같은 성격이기 때문이다. 떡은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의.식.주를 일컫는다. 떡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적이며 동시에 물질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사십일간 금식하신 예수께서도 배가 고프셨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반드시 ‘필요’와 ‘탐욕’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필요는 ‘일용할 양식’을 가리킨다. 다시말해 필요는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들이다. 이와 달리, 탐욕은 ‘필요, 그 이상의 것’을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 곧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지 결코 우리의 탐욕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신앙생활과 경건생활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오직 영적인 것만 소중하고 떡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거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타부(taboo, 禁忌)시 하는 것을 마치 독실한 신앙인냥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현실의 필요를 무시하는 ‘금욕주의’나 현실을 외면하는 ‘피안주의'가 아니다. 삶에 있어서 떡은 두말 할 것 없이 소중하다. 따라서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마땅히 구해야할 정당한 청원이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떡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존재함을 증거하고 있다. 떡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이기에 반드시 떡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영적인 존재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창세기는 인간은 흙(물질적인 존재)과 생기(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흙과 생기’는 ‘마음과 몸’, ‘영과 육’, ‘말씀과 떡’을 의미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오직 육체적인 만족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필요를 넘어 탐욕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거기서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은 본디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영적으로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은 풍요로웠다. 하지만, 그들은 일평생을 파라오를 위한 벽돌 만들기와 벽돌쌓기에 자신의 삶을 허비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영원하신 말씀을 추구하는 삶으로 인도해 내셨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Exodus)의 본질이요, 광야는 그 출발점이었다.

 

   

 

엑서더스(Exodus)

우리는 종종 삶에서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서 먹느냐'를 고민한다. 그 이유는 ‘먹고 살기 힘든’ 치열한 현실 때문이다. 각박한 생활이 계속되면 미래의 꿈도, 영원한 가치도 바쁜 일상에서 쉽게 매몰된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말하면서 정작 바쁜 일상으로 가족들과 사랑은 커녕 대화할 시간조차 없다. 참으로 삶의 아이러니요, 인생의 비극이다. 히브리 노예들이 출애굽을 감행했던 참된 의미는 여기에 있다. 물질의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떡을 위해서 살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는 삶으로의 전환이었다. 이와 같은 삶의 전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광야는 먹을 것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삶의 목적과 우선순위가 바뀐다.

마가복음은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표현한다.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이끄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생애의 시작 곧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함이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삶의 우선순위 곧 목적이 바뀌어야한다는 중대한 사실을 증거한다. 이제까지 남부럽지 않은 번듯한 삶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반듯한 삶으로의 변화이다. 경쟁하고 비교하던 삶에서 만족과 자족하는 삶으로, 풍요로운 삶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편안한 삶에서 평안한 삶으로, 군림하는 삶에서 섬기는 삶으로, 손해냐 이익이냐를 먼저 따지던 삶에서 옳고 그름을 묻는 삶으로, 성공적인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이제까지 사람에게 칭찬 받는 삶이였다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으로, 그 목적과 가치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적인 곤경과 육체적인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삶의 가치와 목적,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이다.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사용하는 일이다. 그들은 광야라는 체험학습을 통해서 이것을 철저히 배우고 익혀야만 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 각박한 현실 속에서 매주 예배를 드리고 그것도 모자라 제자훈련, 수요성서대학, 매일 새벽을 깨워 기도 하는 수고를 감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기심을 넘어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나아가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거룩한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와 같은 교회공동체의 본질을 ‘광야교회(행7:38)’라고 한마디로 정의한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물질과 탐욕의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예배하는 삶으로의 ‘엑서더스(Exodus)’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교회의 본질과 정반대의 길로 역주행 하고 있다. 신앙생활이 물질과 탐욕을 더 많이 안정적으로 얻기 위한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한국교회의 갱신은 바로 이와 같은 세속적인 흐름에 저항하며 거슬러 오르는 근본적인 전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5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본질을 망각한 한국교회는 오늘날 세상으로 부터 천박한 종교로 취급을 받으며 온갖 지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하지만, 본디 기독교가 서구문화와 정신의 밑바탕이요, 성경이 수많은 문학작품들의 화수분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아마도 구약의 욥기와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는 장면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마귀가 오늘 당신에게 동일한 제안을 한다면 과연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권력과 인기, 돈과 명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매력적인 대상이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총선에서 모든 정당과 후보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라와 국민’을 말하지만 그걸 순진하게 믿는 국민은 별로 없다. 모든 정당의 목적은 '정권쟁취'이고 실상은 권력과 명예, 인기와 돈을 더 많이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까닭이다. 재벌기업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감동적인 광고를 하고 대기업의 총수들이 수천억원을 사회에 기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경영이나 고객감동을 통해 세상에 공헌하기 위한 숭고한 차원이 아니다. 그 목적은 더 많은 돈과 명성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심지어 오늘날 많은 교회와 종교지도자들도 이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마귀의 도발적인 발언을 통해서 우리는 권력과 인기, 명예와 물질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탐욕에 의해서 결정되는 성질임을 깨닫게 된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인간의 ‘필요(일용할 양식)’를 채우시는 분이시고 반면에 마귀는 ‘필요 이상’의 탐욕을 채워주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 곧 필요 이상의 권력과 인기와 힘과 돈은 매력적이지만 이것이 인생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어김없이 권력의 노예, 인기의 노예, 힘의 노예, 돈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탐욕이 주는 기쁨과 달콤함을 만끽할 수 있을찌 모르지만 결국 하나님과의 단절 곧 영혼의 황패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세속적인 권세와 영광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파우스트’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도 유혹이 되었다. 하물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유혹은 마치 짐승을 잡는 부비트렙(booby trap)처럼 피할 수 없는 함정처럼 치명적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 심지어 종교지도자들 마져도 ‘탐욕의 노예가 된들 어떠하랴!’ 권력과 인기, 힘과 물질 앞에 영혼을 맥없이 팔아넘긴다. 도리와 의리를 져버린채 거룩한 직분과 지위를 매각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권력과 인기, 돈이 주는 무한한 매력을 아셨지만 그것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더 귀하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길을 기꺼이 선택하심으로 시험을 이겨내셨다. 이것이 광야시험의 두 번째 영역이다.

 

   

 

쉐마복음

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

예수께서 마귀의 매력적인 유혹을 떨쳐 버리신 이 말씀은 구약성경 신명기의 인용이다. 신명기 6장은 일명, 쉐마(shema)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원리’다. 쉐마는 "들으라, 오 이스라엘이여"로 시작되는 신명기 6장4절의 첫 어휘이다. 예수께서는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마22:34-40, 막 12:28-34)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쉐마로 응답하셨다. 쉐마는 수백개에 달하는 계명 가운데서 예수께서 복음의 핵심을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가치로 뽑아내신 내용이다.

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나는 쉐마를 읽을 때마다 매번 한 가지 중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란 말인가! 부모도 사랑해야 하고, 아내도 사랑해야 하고 자녀도 사랑하고, 학업과 일도 사랑해야지 도대체 '마음과 성품, 힘을 다하여'(전부, 몽땅, 백퍼센트)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씀은 마치 광신도가 되라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정말 이렇게 살다가는 인생의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쉐마가 증거하는 참된 의미는 4절 말씀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오직 하나님은 여호와 한분 뿐이시니” 쉐마가 증거하는 핵심은 결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겨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제아무리 소중한 것이 있을찌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준엄한 명령인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하나님은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돈'이다. 돈이면 못할게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질만능주의’는 돈을 전지전능 하다고 여기는 확고한 신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기꺼이 돈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물론 돈과 권력, 인기와 명예는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것들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결코 하나님 자리를 대신할 순 없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생의 마지막 날 뒤늦게 깨닫는다. 돈과 권력, 인기와 명예는 영원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들이요,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두고 가는 것들이고 내맘대로 안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에서 ‘다하여’는 말은 문자 그대로 ‘백퍼센트’, ‘전부(All)’를 말한다. 99%가 아니라 전적인 헌신이다. 문자 그대로 보면 불가능해 보일 만큼 부담스런 대목이다. 온전한 십일조도 힘든데, 일주일에 한번 하는 예배출석도 힘든데, 어떻게 ‘전부’를 다하란 말인가! 정말 ‘다했다’ 가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놀라운 사실은 쉐마는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자녀를 가르치는 교육철학이요, 유대인들의 변함없는 삶의 원칙이라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쉐마를 아침, 저녁으로 가르친다. 언제 어디서나 삶에 적용한다. 그런 유대인들이 과연 오늘날 세상에서 뒤처지는 낙오자로 전락하고 있는가? 노벨상 수상자 중 87명이 유대인이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슈퍼파워로 불려지는 미국에서 유대인들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진다. “유대계 미국인은 약 650만명으로 미국 전체인구의 단 2.2%에 해당된다. 하지만 미국의 대부호 100명 중 22명이 유대인이며 미국 대기업의 CEO 중 17.5%가 유대인이다. 미국의 4대 일간지의 경영 및 집필진의 35%가 유대인이며 미국 TV 유명 방송국(CBS, ABC, NBC, CNN)의 경영진, 보도진이나 앵커에 유대인들이 포진하고 있다. 아이비리그의 총장 및 교수진의 40%가 유대인이며 미국 50대 영화사의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캐스팅 담당, 감독 중 60%가 유대인이다. 미국 대도시에 있는 로펌에 종사하는 변호사의 50% 이상이 유대인이다.(월간조선 2008년 12월호)” 이들이 숱한 고난 속에서도 적은 민족이지만 세계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와 영향력 있는 인물을 낳은 이유는 바로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며 살아가는 ‘쉐마복음’ 때문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부를 내주고도 갈 길은 간다’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는 광야의 시험 가운데서 선택하며 살아간다.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소중한 삶을 허비할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의 뜻을 쫓아 살아갈 것인가’. 삶의 우선순위는 종교적인 영역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해당된다. 예외는 없다. 삶에서 찾아오는 마귀의 유혹은 실로 만만치가 않다. 매우 달콤하고 아주 매력적이다. 아담을 실낙원하게 했던 선악과 만큼이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 인생에서 만나는 광야의 시험은 결코 장난스럽게 넘길 수 없다. 그럴듯하게 폼이나 잡고 허세 부리는 껍데기들은 아예 살아남지 못할 만큼 살벌한 ‘진검승부’다. 회심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들 조차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한없이 흔들리게 할 만큼 냉혹하다.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쫓았다. ‘모든 것’을 버리다니 참으로 비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그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부벼 먹을 만큼’ 굼주렸고 가난해지고 말았다. 어느날 예수께서는 산 위에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자신을 따르고 있는 처량하고 가난한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는 이 말씀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모든 것’을 오직 그분께 기투하는 제자의 삶을 기꺼이 선택한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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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청천 (119.197.214.84)
2012-11-13 13:32:37
영혼을 살찌우는 글에 감명을 받고
세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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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7
김성은 (121.67.57.12)
2012-11-15 14:00:20
왜 떡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가?
떡 보다 왜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요1:1~5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요, 이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했으며 그 말씀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있기 때문이다.
슥12:1절에서는 사람안에 심령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이 심령은 무엇으로 창조하는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창조하는 것이다.

눅8:11절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니 하나님의 씨로 난 자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러하기에 우리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나님의 씨로 난 자들이 되는 것이고 그 말씀의 씨로 우리의 심령을 창조한 거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창조하셨겠는가? 고전3: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속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는 말씀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할수 있도록 거룩해 져야 하는데 무엇으로 거룩해 지는가? 요17:17절의 말씀과 같이 말씀으로 거룩해 지기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피요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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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삼월 (124.28.150.146)
2012-11-21 12:04:07
마4장에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3번이나 시험을 받을 때에도 다 말씀으로 이기셨으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매 순간 순간마다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야 함을 잘 설명해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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