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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어디서오나?본능에 이끌리던 삶에서, 말씀을 따르는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의 초대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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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11월 08일 (목) 19:05:53
최종편집 : 2012년 11월 21일 (수) 15:54:02 [조회수 : 1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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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되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누가복음 3장 15절~22절)


사람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한다

누가복음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행하는 사건을 통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유대인들은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녀요, 모세의 규례와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로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주저없이 비판한다. 세례요한에 따르면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이기심과 탐욕을 쫓아 살던 나는 죽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쫓아 사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한다.' 부모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첫 번째 출생이라면, 두 번째 출생 곧 ‘거듭남’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거듭남의 고백과 증표가 ‘세례’다. 세례는 단순히 물로 씻기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신고식 따위가 아니다. 세례의 본질은 ‘거듭남’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이요, 탐욕에 이끌려 살던 삶에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으로의 근본적인 회심이다. 세례는 본능을 쫓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사는 새로운 삶으로의 출발점이다.

요한의 물세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중대한 메시지를 증거한다. 첫째, 세례는 마음(중심, 동기와 목적)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동기와 목적, 가치관과 세계관)이 송두리째 뒤바꾸는 ‘회심’이다. 이전에는 이기심과 욕심, 본능을 쫓아 나의 만족과 유익을 구하며 살았다면, 이후로는 진리의 말씀과 영원한 가치를 쫓아 사는 삶으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둘째, 참된 세례는 반드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해야만 한다. ‘이전까지’ 내 멋대로, 내 뜻대로, 형편과 조건에 따라, 타고난 성질대로 살았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진리의 말씀을 쫓아 살겠노라 결단하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여기까지가 세례요한이 증거한 ‘죄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 곧 물세례의 대략이다.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세례요한은 진정한 거듭남(변화, 새로남)을 위해서 또 다른 차원의 세례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성령세례, 그 충만한 영력을 얻는 비결"(R.A Torrey)

 

16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되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요한은 자신이 베푼 세례 곧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가 '물세례' 라면, 예수께서 친히 베푸실 또다른 차원의 세례를 가리켜 ‘성령세례’ 곧 ‘불세례’라고 증거한다. 요한은 왜 ‘성령세례’를 가리켜 ‘불세례’ 라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물세례와는 또다른 차원의 세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한이 전한 물세례 곧 '죄사함을 얻게 하려는 회개의 세례'는 스스로의 의지적인 결단에 따른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한마디로 나로 부터, 아래로 부터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삶(거듭남)은 이것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 자녀로 태어나는 거듭남은 물세례로 시작되어서 마침내 성령세례를 통해서 온전케 되는 까닭이다. 다시말해, 성령세례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타올라서 삶을 온통 불사르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다. 즉, 밖으로부터 비롯되서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열매맺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즉, 성령세례란 본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결심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실력을 부어 주신다는 말이다.

이러한 성령세례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로마서8장3절)  인간의 의지와 결단만으로는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것을 지속적으로 완수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신령스런 능력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로의 거듭남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인 ‘물세례’로 시작되지만 하나님의 권능인 ‘성령세례’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용서해야지, 사랑해야지’ 결심해보지만 현실에서는 잘 안된다. 자꾸 실패하고 넘어지기 일쑤다. 그 이유는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한 탓이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높은 파도처럼 변화를 가로막는 유혹과 상황이 너무 어렵고 큰 까닭이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상태가 단번에 치료될 수 없는 만성질환처럼 매우 고질적이고 완악하기 때문이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신앙에 안주하랴

이처럼 내외적인 장애물로 인해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의 길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포기한채 좀 더 쉽고 편리한 길을 선택하는 유혹에 빠진다. 몇 가지 신앙행위를 실천하는 것으로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 것으로 쉽게 간주해 버리는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소위 눈가리고 아웅하는 신앙행위에 안주하며 거듭남을 제멋대로 ‘하향평준화’시켜 버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완고함과 연약함을 자백함으로 죄악을 씻어야내야 하는데 화장을 넘어 변장으로 자신을 '의롭다'고 위장해 버린다.

<진정으로 깨끗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흠없고 순결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인정하고 날마다 세수하고 목욕하며 더러운 죄악을 씻어내는 수고를 감당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결백을 억지로 주장하며 온갖 향수를 뿌려 추악한 냄새를 감추고 각종 화장품으로 덧칠을 해서 깨끗한 것처럼 위장하는 위선자가 아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의 죄악을 폭로하는 용기가 아니라 죄악을 애써 감추는 비겁함을 선택함으로 자신을 속이고 또 남을 속인다.

예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책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외식하는 신앙의 추악함은 자신은 회개하지 않은채 두드러진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들을 자행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의 근본적인 죄악은 회피하면서 눈에 띄는 타인의 죄악을 정죄해서 상대적으로 자기 의로움을 드러낼 만큼 비열하다. 이처럼 눈가리고 아웅하는 신앙의 심각한 문제점은 결국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감추고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사실상 단 한걸음도 새롭게 변화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자력구원인가, 타력구원인가

이와 같은 추악한 인간의 실존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하게 거듭날 수 있을까? 세례를 통해서 중심을 새롭게 결단한다. 그리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날마다 끊임없이 실천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마치 우리의 몸을 지구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처럼 또다시 죄악의 심연으로 끓어내린다. 그 이유는 물세례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숨겨진 탐욕과 죄악이 이토록 무섭고 고질적인 까닭이다. 사람의 가치와 목적, 성품과 삶은 결코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 너무 완고하고 매우 완악하다. 광야 사십년의 세월을 모질게 통과해도 쉽게 변화되지 않을 만큼 지독하다. 따라서, 온전한 삶의 변화는 나의 의지와 결단만으로는 언제나 역부족이다.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한다. 이것이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성령세례의 본질이다.

 

   
성령세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삶의 변화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포기하고 낙심하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 주심을 믿기에 그 믿음으로, 넘어지고 쓰러져도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변함없는 사랑을 품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신뢰)의 영역이다. 이러한 믿음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또 다시’ 일어나게 한다. 이와 같은 신령스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다윗은 시편37편 24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이것은 마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번지점프>를 연상시킨다. 내가 줄을 굳세게 부여 잡는 것이 아니라 줄이 나의 온몸을 휘감아 끊어지지 않토록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낙하의 순간 내가 온힘을 다해 부여 잡았던 줄을 놓쳐 버릴찌라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붙잡고 계심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결단과 노력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연약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붙들고 계시다는 부인할 수 없는 믿음(신뢰와 의뢰)으로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믿음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장 37절)...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장39절)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와 진정한 거듭남을 위해서는 물세례와 더불어 성령세례가 요구된다. 인간의 책임적인 결단과 더불어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거듭남’에 대한 이해는 ‘자력구원’(철저히 인간적인 공덕과 노력에 의한 구원)이나 ‘타력구원’(일방적인 대속에 의한 구원)등으로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양분해왔다. 이제 거듭남은 누가복음이 증거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통해서 상보적이고 중층적인 차원으로 새롭게 이해되고 극복되어야 마땅하다.


알곡과 쭉정이, 그리고 인생의 타작마당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누가복음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다시한번 긴박한 회개를 촉구한다. 타작마당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메세지다. 요한이 증거하는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알곡과 쭉정이는 겉모양이 똑같다. 다만, 속이 다를 뿐이다. 이처럼 심판의 기준은 겉으로 보이는 외적인 행위와 공덕이 아니라, ‘내면적인 회심’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 다시말해, 거듭남의 여부에 달려 있다. 다시말해, <삶의 중심에 무엇을 품고 살아가는가> 탐욕인가, 성령인가, 이기심과 탐욕인가, 의와 평강인가, 인간 내면의 중심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고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다. 하지만 심령을 감찰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꿰뚤어 보시고 공의롭게 판단하신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중심이 판가름나는 타작마당은 인생을 마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마지막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의 타작마당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는 날’ 곧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위기의 순간에 숨겨진 본심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 갑작스런 사고와 알 수 없는 환란,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문제와 갈등과 혼란 가운데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에 비로소 우리는 속이 꽉찬 알곡인지, 겉만 번지르한 쭉정이 였는지 판가름이 나게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위기의 순간에 하는 '말(언어)'을 통해 숨겨진 본심이 드러난다. 또한, 그 말로 심판에 이르게 된다.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마태복음12장3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평상시에 하는 말이나 설교, 기도시간에 하는 번지르한 말이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말을 통해 우리의 숨겨진 본심이 드러난다. 쭉정이와 알곡은 같은 교회, 같은 말씀, 같은 목회자에게서 배우고, 같은 직분을 가진 이들에게서 겉모습은 똑같은 것 처럼 보인다. 아니 많은 경우 쭉정이가 더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교회와 가정에 어려운 문제와 고난을 만나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기심과 탐욕에 붙들려 불평과 원망 속에서 두려워하고 절망한다. 이와 달리 어떤 이들은 도리어 거룩한 성령에 붙들려 기도와 감사로 찬양하며 절망을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한다. 이와 같은 삶의 차이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곧 내면에 숨겨진 중심, 동기와 목적에 따라서 삶의 결과가 달라지는 까닭이다.


패망의 선봉, 교만한 마음

18절~20절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세례요한은 헤롯왕과 헤로디아와의 불륜에 대해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했다. 하지만, 분봉왕 헤롯은 요한에게 도리어 누명을 씌워 옥에 가두고 그를 살해했다. 강퍅한 헤롯 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판과 책망의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특별히 신앙의 연조가 깊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과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이 높을수록 이런 모습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책망을 듣기 싫어하는 마음을 가리켜 성경은 ‘교만’이라고 정의한다. 교만해지면 진심어린 충고가 들리지 않는다. 교만한 사람이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한 변화와 거듭남을 위해서는 반드시 책망에 귀기울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특별히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지위와 영향력을 미치는 권위를 가진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책망에 귀기울일 수 있는 지혜는 오직 겸손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겸손한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과 한계를 아는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시고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나갈 것을 요청하신다. 하지만, 세례요한의 책망을 듣지 못한 헤롯처럼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 내 경험, 내 신념, 내 능력, 내 체면을 과신하는 교만 때문이다. 이러한 교만이 가져오는 가장 무서운 재앙은 더 이상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은 자연만물의 소리와 역사의 소리, 양심의 소리와 말씀을 읽고 듣는 가운데, 대부분 귀에 거슬리는 듣기 싫은 소리를 통해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하지만 많은 경우 헤롯처럼 무시하고 묵살하곤 한다. 교만한 이들이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사랑하는 아들과 독사의 자식들

 

21절~22절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가복음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동시에 일어났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 결과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진정한 아들이심이 드러났고, 동시에 하나님의 기뻐하는 아들로써의 공생애의 본격적인 시작을 증거하고 있다. 이와 달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율법적으로 흠결없는 모세의 후예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오히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요단강에서 벌어지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독사의 자식들’간의 차이를 아주 명확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물(의지적 결단과 실천)'과 '성령(지혜와 능력)'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세례요한은 분명하게 선포한다. 물세례를 통해서 중심이 회심해야 한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해야 한다. 나아가서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했지만 너무 힘든 유혹, 어려운 환경 때문에 자꾸 실패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다시’ 그 중심을 반듯하게 세워 나가야 한다. “주여 또 넘어졌습니다. 도와 주시 옵소서. 주님, 나는 이것 밖에 안됩니다.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나를 온전하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간구하고 의뢰 할 때,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께서 새 힘을 부어주신다. 그 순간 없던 힘이 생겨나고 피할 길이 열려진다.


가롯유다와 베드로의 차이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변화되지 않는 모습, 현실 앞에 무기력한 신앙, 열매 없음에 실망한다. 그래서 너무 쉽게 포기하고 절망한다. 그보다 더 많은 경우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신앙으로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외면한채 적당히 타협한다. 남 얘기가 아니라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전문적인 신학수업을 받고, 15년간 성경을 읽고 가르치며 10년간 담임목회를 감당했던 목회자인 나 자신의 얘기다.

하지만, 나는 수제자에서 배신자로 전락했던 베드로를 통해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본다. 그는 주님과 삼년간 동거동락하며 주님의 말씀을 직접 전수 받았던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였다. 놀라운 기적을 몸소 체험했던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결코 적었던게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부족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베드로는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선생되신 예수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베드로의 모습에 실망했다. 누구보다 베드로 스스로가 자신에게 절망했다.

내가 섬기는 강릉예향교회는 상가월세교회의 실존이다. 5년에 걸쳐 200평의 대지를 모두 매입했고, 지난 9월 150평의 설계를 마치고 강릉시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았다. 십년전 교회를 개척하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참으로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 은혜와 기적 만큼의 실패와 좌절도 함께 감내해야만 했다. 나의 목회지는 열악하고 척박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총체적인 난관과 위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오직 말씀과 신앙으로 발버둥쳐 보지만, 현실의 장벽은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스럽고 숨 막힐 정도로 버겁기만하다. 특히, 지난 5년간 ‘본의 아니게(?)’ 시작된 교회건축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한계와 말할 수 없는 좌절을 경험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쉼없이 말씀의 씨앗을 뿌렸지만 더딘 변화와 열매 없음에 대한 실망이요, 무엇보다 여전히 흔들리는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절망이다.

   


‘아~나는 정말 이것 밖에 안되는 존재인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절망의 한가운데 머물고 있던 베드로에게 친히 찾아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누가복음의 결론에 해당한다. 누가복음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 1장 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실패한 베드로의 실존은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는 못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을 예표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전혀 기도에 힘썼다. 마침내 그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날 이후로 베드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성령세례였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타인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비로소 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 실패했던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임했던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제자 가롯유다는 예외였다. 그것은 가롯유다의 죄악이 베드로의 그것보다 더 심각해서가 아니였다. 은30냥에 예수를 판 가롯유다와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 이둘의 죄악은 저울로 달아보면 단 한치의 차이도 없었다.

그렇다면, <가롯유다와 베드로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는 과연 무엇이였을까>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성령의 무한하신 능력을 훼방할 수 있는 능력이 가롯유다 자신에게 있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가롯유다의 죄가 더 무거워서가 아니였다. 그는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참회하고 회개하지 않았다. 성령에 의한 변화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것은 죄책감과 후회가 아니라 ‘포기’였다. “모든 죄는 용서받지만 성령을 훼방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한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무한하신 성령의 능력을 훼방할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거한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충분히 절망스럽게 하는 삶의 무게 앞에서 가롯유다의 길을 선택한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의뢰하며 기다리지 않는다. 그져 얄팍한 자신의 제한적인 판단과 노력에 절망하고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여기서 ‘성령세례, 그 충만한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다.

   


신앙의 족보, 하나님의 직계자손

 

23절~38절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누가복음의 족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혈통의 족보’가 아니라, ‘신앙의 족보’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족보가 증거하는 메시지는 예수께서 수많은 제사장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믿음의 조상들을 거슬러 올라가서 마침내 하나님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신앙의 족보를 통해서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거듭해서 증언하고 있다.

특별히 족보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창세기 39장에 등장하는 유다와 베레스 이야기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베레스는 유다가 며느리 다말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서 낳은 아들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름답고 좋은 일을 통해서만 이루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실패자들을 통해서도 이어 가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누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인가'라는 질문을 서로 다른 사건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증언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앞서 살펴 본 ‘세례’와 ‘족보’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해서 아주 명쾌하게 응답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증거한다. 나아가서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해서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누가복음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반문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로 사셨던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거룩하고 존귀한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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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 (124.28.150.146)
2012-11-21 11:51:13
성령은 진리
성령은 진리, 때에 따라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마24:45)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 거듭나면 삶이 변화가 되지요. 핍박하는 삶에서 축복의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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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9.198.34.13)
2012-11-17 12:17:57
정말인가요?
"하지만, 새로운 삶(거듭남)은 이것만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 자녀로 태어나는 거듭남은 물세례로 시작되어서 마침내 성령세례를 통해서 온전케 되는 까닭이다. 다시말해, 성령세례란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타올라서 삶을 온통 불사르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다. 즉, 밖으로부터 비롯되서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열매맺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즉, 성령세례란 본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결심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실력을 부어 주신다는 말이다."

이 논리라면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거나 결심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되는데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여기에 분명히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요. 그렇다면 고린도교회는 말씀대로 살아가고 결심한대로 실천하는 신자들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그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가요?

성경의 성령세례를 바르게 진술하였다고 생각되지 않는 글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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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 (121.185.201.11)
2012-11-08 23:10:21
두번 태어난다는 것 맞네요.
사람이 두번 태어나야 된다는 것 맞다. 육으로 한 번, 하나님을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은 초보적인 신앙이다. 초림에는 사단 아래 놓여 있던 자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즉, 사단의 씨로 난 자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나는 것 아니겠는가? 다시 난다는 것은 무언가로 이미 낳았기 때문에 다시 낳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다. 영이 잘못 창조 되었기 때문에 다시 제대로 된 영으로 나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초림대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계18장에 만국이 사단의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고 사단과 결혼하고 음행한다고 햇으니 이런 잘못된 씨로 난 자들이 계시록이 이루어진 계시 말씀으로 다시 나야 된다. 이것이 거듭나는것, 다시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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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교주 (211.246.78.46)
2012-11-09 13:48:48
신천지OUT
좋은 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잡설 달렸네요.
맛있는 음식에 파리가 먼저 앉은 격이네요.
신천지는 교주 이만희를 보혜사성령이라 주장하며
엉터리 성서해석으로 혹세무민하는
사이비집단이랍니다. 님의 댓글에서 그런 흔적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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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211.246.73.118)
2012-11-10 00:42:29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 밖에 안보인다.
그래도 성경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보니 무조건 다른 교단을 이단시 하는 윗 분보다는 훨 났네요,,
옛 말이 생각 납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 밖에 안보인다는 말이 있듯 당신이 꼭 돼지 같습니다. 적어도 남을 비판하려거든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고 인정이 되도록 해야지 무조건적인 욕설은 이제 OUT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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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아웃!!! (183.78.236.165)
2012-11-10 17:29:23
그럼 <한마디>님은 <부처님>인가요? <신천지>인가요?
저는 신천지를 기독교의 분파나 다른교단이 아니라 <사이비이단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님께서 이런 저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으시면계시록6장6절을 논리적(?)으로 해석해 보세요. '내가 네 생물 사이로 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 에 밀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세요. 신천지는 이 말씀을 신천지 교주와 신천지 지도자들로 아주 엉터리로 해석하던데...

그리고 가능하면 이 본문에 대해서 김명섭목사님의 해석도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루카스의 애독자의 한사람으로 꼭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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