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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교회도 흥해야 하나역사상 가장 흥한 교회는 중세 교회
신성남  |  canavillage@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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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10월 31일 (수) 11:05:42
최종편집 : 2016년 03월 06일 (일) 16:21:01 [조회수 : 8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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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많이 혼탁하다 보니 과거에는 신도들이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토론했는데, 요즘에는 반대로 '교회 내에 구원이 있는가'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부패와 관련하여 일부에서 흔히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가 최근에 와서 갑자기 타락했다는 인식입니다. 하나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닙니다. 선교 초기에는 매우 순수했던 한국교회가 그 이후 점차 세속화하여 60년 전만 해도 이미 불순한 교권주의가 심각했었고, 30년 전 또한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 최대의 장로교 교단이 신도들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교권을 탐하는 목사들의 물욕적 세력 다툼으로 인해 수십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여 만신창이 되었고, 룸살롱에 출입하거나 교회 여신도와 불륜을 저지른 유명 목사들이 백주에 활보하였습니다. 교회 사유화나 공금 횡령 역시 은밀하고 폭넓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한 세대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받기 십상이니 노회나 교단 총회에 가급적 참석하지 말라는 말이 그 시대에도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다만 대다수 순진한 교인들이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교회 세습 역시 그때 뿌린 쭉정이 씨앗을 지금 심은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1950년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신사참배를 하며 일본에 협력하던 교권주의 세력들이 공적인 회개나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한국교회의 기득권과 인맥을 그대로 유지하며 교권을 상속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현재처럼 상층부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 부패한 구조가 체질화되었습니다.


거짓된 지도자들과 맹신도

다행히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순수하고 충성된 직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개신교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극평이 있을 정도로 현실은 위기 상황입니다. 직장이나 사업 등 개인적 사정으로 타지방에 이사를 해 보신 분들은 실감하실 것입니다. 새로 교회를 선택하기가 겁이 납니다.

매주 설교의 결론은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무속적 교회, 돈이 없으면 부끄러워 갈 수 없는 교회, 십일조를 강요하여 미자립 교회나 가난한 교인들은 대충 돕고 나머지 목돈으로 교회 증축이나 목사 자녀 유학 보내는 교회, 선교는 허울일 뿐이고 국내나 외국에 법인을 세워 돈을 빼돌리거나 부동산 장사하는 교회, 등록 교인 350명에 목사 연봉이 1억이 넘는 교회, 재정을 공개하지 않고 영수증 없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교회, 겉으로는 진실한 척 성경적 설교를 구사하나 뒤로는 교회 소유 부동산을 사모 앞으로 등기한 교회, 그리고 추잡한 교회 세습을 끝까지 목회 승계라고 우기는 이런 여러 교회가 양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큰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이들 세습 목사들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북한의 정권 세습도 정치 안정을 위한 탁월한 승계가 되고, 재벌들의 족벌 세습도 경영 안정을 위한 뛰어난 선택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수구 기득권 교회들은 불과 11세의 재벌가 어린아이가 453억 원의 주식을 소유하고, 5세의 대통령 외손자가 9억 원의 주식을 가진 불편한 현실을 결코 비판하지 않습니다.

최근 어느 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위증이 약 430배 이상 많고, 무고는 무려 540배 이상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살기가 힘들고, 한국에서는 거짓말을 안 하고 살기가 힘들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정말 큰 충격이며 시급히 고쳐야 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설사 그런 통계를 글자 그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한국에 유난히 거짓 목사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한국교회 부패의 배후에는 항상 거짓된 지도자들과 무지한 맹신도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고귀한 것이며 예수님은 생명이신데 종교 업자들은 유다처럼 자신의 영혼을 팔아 금과 은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단순한 수치적 부흥이 복음을 대체하고, 물질적 번영이 진리를 대신하는 악순환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흥한 교회는 중세 교회

그러나 우리는 역사상 가장 흥한 교회가 중세 교회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황제가 교회에 출석하고 권력자들과 재력가들이 줄줄이 그 뒷자리를 채웠습니다. 교회에 힘과 돈이 넘치게 되니 큰 건물을 짓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예수를 진심으로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결정해서 안 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교회는 심지어 세력 확장이나 경제적 필요에 의해 대규모 전쟁도 교사했습니다. 거룩한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국땅에서 헛되이 죽거나 비참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비극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근 천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중세 교회는 성스러움으로 포장한 교회당 건물 속에 안주하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무수한 영혼을 어두운 지옥으로 조용히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아무 교회나 무조건 흥해야 할까요. 수많은 중세 교인들이 천국 문으로 알고 들어간 교회당이 사실은 지옥으로 안내하는 문이었습니다. 과연 성경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중세 신도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천국에 갔을까요. 큰 건물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간판만 달면 모두 교회일까요.

중세 교회는 외부의 침공을 받아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극심한 부패와 타락으로 침몰했습니다. 성직자들은 돈과 명예를 탐하였고, 신도들은 진리에 무지하였고, 그리고 가장 순수해야 할 수도원마저 탈선하여 지하에 수많은 영아들의 사체를 버렸습니다.

이렇듯 교회가 일단 본격적으로 타락하면 수도원도 소용없고, 기도원도 못 막습니다. 새벽 기도회나 철야 기도회가 무색하고, 부흥회도 무당 굿판이 됩니다. 과연 한국교회에 예배와 기도회가 부족해서 이 모양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주일 내내 각종 예배와 기도회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오히려 너무 자주 모여 균형 있는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입니다. 아마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단순히 '자주 모이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주 모이고 분주하여도 진리를 떠나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그냥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계속 썩어 갈 뿐입니다. 위선적 바리새인들은 결코 참된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 준 교회 부패의 생생한 교훈입니다.

거짓 목사들은 언제나 교회가 평안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모두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본래 종교 업자들과 정치 독재자들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조용히 포식하는 것이 최적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기만당한 우매한 백성은 언제나 독재자에게 표를 몰아주고, 무지한 신도들은 거짓된 지도자를 지지합니다. 그리고 그런 거짓 선지자는 세상에서 호사를 누리고, 참 선지자는 고난을 받습니다.

신도들을 약탈하며 속이 텅 빌 정도로 심하게 썩었어도 겉으로는 평안하고 조용했던 교회가 중세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런 타락한 교회가 무려 천 년이나 유지된 것은 바로 '그 조용함' 때문입니다. 물론 중간에 간간이 개혁의 목소리가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이단으로 몰려 무자비한 박해를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서슬 퍼런 교권의 칼날이 워낙 무서운 점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절대다수의 신도들이 너무 무지하였기에 내부에서의 조직적 저항이나 자체 개혁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거짓으로 위장된 평안

우리는 중세 교회의 아픈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위장된 평안 속에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교회당은 더 이상 '예배당'이 아니라 '니골라당'입니다.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부패한 교회이고, 부패한 교회는 더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교회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습 교회는 목사가 교회의 주인 행세하는 전형적인 표본입니다. 만일 세습 목사들이 정말 충성심이 불타서 그토록 대를 이어 목회를 간절히 원한다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자식들을 배부른 중대형 교회가 아니라, 일꾼이 너무 부족한 농어촌 미자립 교회에 보내 거기서 평생 충성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필자의 견식이 부족한 탓인지 몰라도 그런 멋진 세습을 하는 목사님을 본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결국 이들은 복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비만한 배를 위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동네마다 너무 많아서 차고 넘치는 것이 교회당인데 하필이면 그런 고약한 세습 교회가 흥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부패한 교회가 부흥하면 결국 중세 교회처럼 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여러 대형 교회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이런 중세적 부패와 흥행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교회의 문제가 매우 복잡한 것 같지만 그 결론과 대안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신자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무지한 신도는 거짓된 지도자를 보위하여 결국 부패한 교회를 만듭니다. 한국교회의 문제가 외견상 직분자들의 부패인 것처럼 보이나, 정작 문제의 진짜 핵심은 신도들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은 값없이 거저 받았지만, 제자 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안일한 자세로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신자들은 바르게 알고, 바르게 가르치고, 그리고 바르게 실천해야 합니다.

한 세기 만에 놀라운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는 이제 성숙의 문턱에서 크게 좌절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덩치가 커져 매우 기뻐했는데 어느 순간에 조로증을 거쳐 그만 치매에 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이 치매에는 별 효과가 없습니다. 신약과 구약 모두 들이대도 환자는 다 뱉어내고 엉뚱한 오물만 집어 먹습니다.

우리가 바른 교회를 다시 가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자신의 교회가 치매에 들어 소통이 전혀 안 되는 교회라면 거기서 헛되이 다투지 말고 이제라도 과감하게 나오시는 것이 낫습니다. 거기서 중세적 부패와 약탈에 동참하는 것보다는 바른 교회를 찾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 주변에 바른 교회가 없다면 소수라도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합심하여 따로 모이는 것도 좋습니다. 형편에 따라 유급 사역자가 없어도 무방하고,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초기 교회나 지하교회는 유급 사역자가 없어도 잘 견디어 냈습니다. 반드시 신학 전공 사역자가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오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신학 전공자가 몇이나 있었나요. 또한,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냥 둘러앉아 성경을 함께 읽고 기도하는 단순한 공동체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아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가 점차 성숙해지면 지역사회를 위한 적절한 사역을 얼마든지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교회의 순결입니다. 따라서 부패한 교회보다는 차라리 가정 교회나 지하방 교회가 훨씬 낫습니다. 직분자들이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 그리하여 복음이 바르게 증거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선한 공동체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공동체

이를 위해 우선 당장 몇 가지라도 구체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강요적 헌금 대신에 자발적인 무기명 연보를 격려하고, 군림하는 계급적 직분 대신에 함께 대등하게 섬기고 동역하는 직분자들을 세우고, 유급 직분자는 최대한 검소하게 살고, 노회나 연회는 목회 파송제와 순환제를 적극 실천하고, 봉건영주적 담임 목회제보다는 공동 목회와 공동 사역을 추구하고, 강한 자를 대접하기보다는 약한 자를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자기 구원이나 자기 수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또한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사람들만의 공동체도 아닙니다. 우리의 공예배가 어느 서부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반드시 멋있게 정장을 하고 엄숙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예배는 제물을 바치고 숭배하는 구약의 수직적 예배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친구 되신 주님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수평적 예배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예배에 '바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삯군 목사들은 차라리 구약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시었고 신도들은 이미 그 지체가 되어 신자의 삶 자체가 바침이 되었는데, 매 주일 예배마다 무엇을 그리 더 바치라는 것입니까. 연보는 본래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려운 형제와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이제 교회는 신분의 차별이나 빈부의 구별 없이 모두 사랑으로 하나 되는 담백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 중에 열심히 일하다 지친 몸으로 다소 간편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온들 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신데 아버지 앞에 자녀들이 항상 정장을 입어야 하나요. 아버지께서는 자녀들과 따뜻한 대화를 원하시는 것이지, 거창한 회담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가능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쓸데없이 높은 문턱을 제거해야 옳을 것입니다. 사정에 따라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오는 사람에게도 앉을 자리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소박한 예배보다 엄격하게 격식을 갖춘 장중한 예배가 좋은 예배라고 너무 허풍 떨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십자가 정신의 상실에 있습니다. 많은 신도가 달콤한 성장과 번영에 취해 그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세속적 성취가 순결, 겸손, 섬김, 절제, 희생, 배려, 검소, 그리고 나눔을 대신하고 교회 내에서 잘나고 많이 가진 자가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흥해야 할 새로운 교회는 권력자와 지식인이 겸손해지고, 부자가 마음을 비우며, 가난한 자가 당당하고, 삶에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나누는 진솔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의 교회와 중세 교회는 그 큰 건물과 함께 무너져야 마땅할 교회이었습니다. 성경의 참된 가르침을 대적하고 사욕에 따라 제도와 관습을 악용한 상업적 종교인이 넘치던 교회입니다. 주님은 없고 제사장, 서기관, 교황, 주교, 사제, 그리고 귀족들이 실질적인 상전 노릇을 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 허망하기 그지없는 세속적 복을 탐하여 거짓된 지도자들을 따르며 또 다시 그런 배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그냥 덧없이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초라한 한 죄인이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하여 기필코 주님 십자가의 도를 따라 한번 바르게 살아 보겠다는 놀라운 결단을 하는 '진리의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샬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 하시니라(막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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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222.98.132.163)
2012-11-01 08:05:16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교회 담임목사 제도를 없애야합니다

교회의 담임의 폐단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담임을 교회 책임관리자로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걱정은

천주교를 보시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진정 올바른 교인이라면

담임 목사님을 딴 곳으로 보내 드려야 합니다

교단에서의 파송 목사님을 수용해야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고요? 그런 목사님이 아니라구요?

진짜 참 목사님이라구요?

그렇다면 더욱 더

목사님은 지금의 교회를 버리셔야 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처럼 담임을 떠나 선교하셔야 합니다

교인 또한 담임 목사님을 보내 드려야합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99%가 가짜 목사 가짜 교인들입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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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9
신성남 (49.50.206.22)
2012-11-02 06:54:04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작은 교회는 인적 자원에 제한이 있기에 담임목회제가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대형 교회는 얼마든지 담임목회제를 폐지하고 공동목회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경우 목회 전문화를 통한 유익이 있고, 또한 교권 집중을 완화하여 교회 부패를 크게 견제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부교역자들이 모두 대등한 동역자가 되어 보다 능동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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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
李振豪 (218.235.201.167)
2012-11-12 12:31:35
부패했는데도 흥해나간다고한다면 흥하다는 의미를 금전적으로 환산해보는 습성에서 나오는 의미일 것으로 판단하고 싶다.

교회가 흥하다 라고하는 의미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 의미와 맛이 달라질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자들중에는 양심적으로 하여 흥하는자와 비양심적(비 양심적이라는 의미를 궂이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사회인들은 평균적을 알고있다.) 사업주에 비해보자.

양심적인 사업가가 흥한다는것은 소비자 또는 상대 구매력을 가진쪽에서 인정한 상품을 생산판매하고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반면 비 양심적으로 사업을 영위하는자들에게는 나 아닌 상대를 꼼수로 속여서 치부하려는 기교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이 후자는 상대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하여 망하는길로가게 된다.

그렇다면 교계가 흥하다 쇄하다라고 판단하려는 기준을 어디에다 두고 조명하려 하는가부터 알고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교계에서도 양심적이면서 정열적으로 순수한 신앙으로 나아감을 교인들이 깨달음으로 인해 번성하는것과, 사업계에서 기교가 두드러진 성품으로 꼼수사업을 잘하여 치부하는자와 같은 교직으로 성도들을 인도하려는 쑈맨쉽적 이미지가 풍부하여 번창해 가고있는 대형교계들이 있다면 과연 우리들은 어느것에 현혹되기 쉬운가를 자기자신부터 현 위치가 어딘가를 판단해야 한다.

결코 어렵지 않으면서도 어려운 것들이 바로 이러한 현상들로 인한 흥해나가는 교계와 쇄퇘해지는것과 같이 보이는 교계내부를 진실되게 판단할 능력을 가저야 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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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바람의 언덕 (116.44.17.54)
2012-11-07 00:10:04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세력이면서, 가장 큰 부패를 일삼는 장로교를 보면 2천년 전의 유대교의 바리새파가 오버랩됩니다.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을 가장 핍박했던 자들이면서, 겉으로만 거룩한척 외식하는 자들이었죠.

심판이 두렵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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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
김정아 (121.185.201.11)
2012-11-06 22:56:16
돈을 사랑함은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만으로도 간음한것이라고 했다. 교회도 이미 말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말씀이 없으니 구원 얻고자하는 성도들이 무엇을 보고, 믿고 신앙을 하겠는가? 부흥 안되는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부족해서 부흥이 안되는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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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
심마니 (59.26.219.52)
2012-11-03 21:33:08
굶겨야 바른사람 됩니다.
신성남 형제님! 좋은 글 자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불교의 경전은 (인간의) 삼독<3가지 독이 되는 요소-탐욕. 진에. 치정->을 금하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인 "돈과 하느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태.6:24>는 예수님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귀한 말들이, 우리나라라 목사들(모두는 아님)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목사들이, 하느님 믿으면 복받아서 부자되고, 만병이 치유되고, 귀인된다고, 모일 때마다 목청 높이니, 우매한 신도는, 그게 사실인 줄 알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긁어다 교회에 바치니, 형제님 말씀대로 썩은 교회 방탕한 목사들이 양산되는 까닭이, 팔할 이상 신도에게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횟돈 수십 억을 목사가 횡령해서 형사법정에 끌려가고, 징역 언도를 받아도, 그 목사가 좋은 사람이라고 그 교회 교인들 중, 그를 두둔하는 교인이 반도 넘으니, 이게 바로 한국교회 교인의 수준이라고 생각됩니다.

목회자건 공무원이건 비행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은 굶겨야 바른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런 목회자가 있는 교회의 교인들은 거기서 나오는 게 상책입니다.교인이 20명이나 30명 정도 되어서 목사의 생계가 곤궁해져 피골이 상접해져야, 언행이 일치하는 교역을 할 것입니다.

교역자입네 하고서, 흰가운(또는 검은 가운) 입고서 특권이 있는 체 언성 높이는 꼴을 보면 너무도 역겹습니다.그런 모습보다는 남루하지 않은 평상복 입고, 모든 신도가 눈을 크게 뜨고 경청해야 될 설교를 해야 훌륭한 목회자 아닐까요? 이 세상은 무엇이든지, 속이 비어있으면, (남에게 얕보이기 싫어서) 겉을 번지르하게 꾸미지요.

'교회'는 목사의 입장에서 말할 때,"가르치기 위한 모임"입니다. 또 입장을 바꿔, 신도의 입장에서 보면, "배우기 위한 모임"입니다. 나는 '가르치기 위한 모임<교회>'보다는 "배우기 위한 모임<학회>"이 훨씬 좋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교회에 수십 년 다녔지만 교회가 신도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과연 가르치고 있는지, 늘<지금도 역시> 의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교회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의'와 '자비'를 가르치는 게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성남 형제님도 아마, 그런 생각 아니신가 추측합니다. 위 두 가지를 여러가지 케이스에서,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가르쳐서 신도들이 집과 마을 에 돌아가면, 정의와 자비를 실천할 수 있게 "가르쳐야"(깨우치고 배우게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형제님 지적대로, 십일조를 강조하고 가지가지 사유를 달아, 돈 내라고 하는 것은 교역자의 일이 아닙니다. 참다운 종교인은 '내 재물, 내 능력'으로 약자를 돕는 것입니다. 종교는 무슨 종교이든 "약자 보필"이 그 생명인데, 한국 교역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친 일(방향)과는 정 반대로 가고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사회가, 부패한<인간의 '삼독'에 빠져있는 현실> 교회를 심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완전히 전도<뒤집힘>된 상태입니다.

신성남 형제님의 삼사십편의 글을 반 이상 읽어봤지만 거기에 그른 말은 한 도막도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형제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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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0
신성남 (49.50.206.22)
2012-11-04 06:23:56
"참다운 종교인은 '내 재물, 내 능력'으로 약자를 돕는 것입니다."
댓글에서 큰 배움을 얻습니다. 요즘 당당뉴스 기사 요소요소에 반짝이는 여러 댓글들을 보며 큰 기쁨을 느낍니다. 허심탄회하게 상식을 말하는 글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함께 공명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지적하신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울러 계속적인 충고와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따뜻한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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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
공동목회 (112.171.136.97)
2012-11-03 17:47:26
지방 또는 연회별로
담임목사제를 폐하고 공동목회제를 통하여 다양한

설교를 접하게하면 목회자들이 성경연구에

더열심을 낼 수 밖에 없고 목회자의 사례비가

부익부 빈익빈에서 벗어나서 안심하고 목회에 전념한다.

목회자에게 잘보이려는 악한 경쟁이 사라지고 성도간에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진다.

교회에 만연한 각종 악행이 근절 될 수가 있다.

진정한 주님의 공교회가 빛을 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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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
신성남 (49.50.206.22)
2012-11-03 20:00:43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지적입니다. 거기에 나중에 파송제나 순환제까지 보완하면 더욱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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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2-11-03 21:34:53
아주 좋은 착상입니다.

며칠전에 한 케토릭 신부님과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독일에서 신학을 마치시고, 이스라엘 유태인 성서대학을
졸업하신 후, 세계 여러 성당에서 사제로 봉사하셨던 분입니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독일 중심으로 한 유럽교계에서는
신교와 케토릭이 성당이나 교회를 함께 사용해서
예배를 보는 예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더군요.
종교간의 대화, 지구의 자연자원보호, 일석이조의
아주 바람직한 경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의 오래됀 도시의 중심가에 아름다운 옛 대형교회 건물들이
유물로 비어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것이라면 내 교회건물 네 교회건물의
구분이 있을 수 없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성전 하나밖에 없었던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교회건물에 대한 집착은
좀 유별난 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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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
황명수 (74.72.203.83)
2012-11-03 07:56:26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
대다수 신학자들이 21C를 '그리스도교 이후의 시대' - Post Christianity Era - 라고 하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교회현실을 보면 자명하다.
텅 비어버린 교회, 교회건물...내가 사는 동네(한국으로 말할 것같으면 구,區)에도 일년이면 수십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다. - 미국교포임 -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교회에 가보면, 70 ~ 80 먹은 늙은이 열댓명이 모여 예배를 보고있는 판국이다.

웬만한 신학교는 학생이 없어서 문을 닫고, 명성이 있던 신학교는 미국학생들의 지원이 줄거나 全無해 해외 유학생으로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미국 남학생들은 신학교를 지원하지 않는다. - 거길 왜 가느냐고 묻는다.- 여학생들이나 지원하는 것쯤으로 안다.

프랑스에 사는 친구의 전언에 의하면, 프랑스에는 개신교 신학교가 없다. 그나마 파리에 목사를 양성하는 강습소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도 최근에 문을 닫았단다. 그럴리야 없지만 프랑스에서 프랑스사람이 개신교 신학을 공부하려면 이웃 독일이나 벨기에.. 등..으로 유학을 가야한다. (가톨릭도 마찬가지임.)

왜, 이렇게 됐을 까?

그런데...(죽는 소리를 하지만) 한국교회는 왜 아직도 문전성시일까?
이게 얼마나 갈 까?
21세기가 끝날 쯤, 90년후의 한국교회 모습은 어떨 까?

단언하건데,한국교회도 유럽,미주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법없다.

솔직히, 작금의 교회 모습을 보면, 한국교회- 하루라도 빨리 망하는 것이 좋다. 하루라도 빨리 망하라고 기도한다.

왜? 한국교회 자신이 자정하는 능력이 없기때문이다.
거짓교회, 거짓교리, 거짓설교, 거짓목사...無知한 신자들...

대안은...
빨리 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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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박평일 (72.196.234.24)
2012-11-03 23:38:59
저도 미교포의 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견해에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미국의 불교인구가 2천만 명 정도라는
통계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문화,인종, 종교 면에서 멜팅팟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미국에서의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미국백인들의 습관적 생활문화지요.

미국의 유명 일간지인 워싱톤 포스트에
한 주에 한두페이지 종교란이 실립니다.
종교가 미국인들의 관심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반영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곳에 발행되는 한국교포신문들은
온통 교회소식으로 범벅되어있습니다.
교회신문으로 착각이 들 정도지요.

저도 기독교인이지만
구독료를 지불하는 독자로써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문사에 그 부당성을 여러차례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했습니다.
신문사의 운영이 대부분 교회광고료에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사정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신문구독을 여러 해 전에 중단했습니다.

미국 교포사회가 그렇습니다.
종교적으로 중세 종교암흑시대와 비슷하지요.
사람들을 만나면 " 어느 교회에 나가느냐? 목사가
누구냐? 신도수가 몇명이나 되느냐? 하는 교회이야기로 부터
대화를 시작합니다. 종교가 모든 것이지요.
일요일에는 교포들의 행사를 개최할 수가 없습니다.
주일을 법한다는 교회의 반대로 참석인원이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교포들의 교회에 대한 집착정도가 거의 병적수준입니다.
이민사 초기에 교회가 교포들의 이민생활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실은 누구도 감히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신앙라는 구실로
신도들을 한국교회안에만 묶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교포들이 타 이민자들과 어울려 미주류사회에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도와주는
발판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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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
Picky (24.60.52.23)
2012-11-04 15:24:21
21세기 중반을 넘지 않아서 기독교는 지난 시절의 위용을 잃어버릴 것은 분명합니다.

기독교가 지닌 교리는 인간의 이성적 사고에 대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또 역사적 사실이 시대가 지나면서 기독교가 지난 수십세기 동안 주장하던 본질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논하기 시작하고 기독교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들이 성경에 대하여 진실을 요구하는 열망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사후 그리고 천국과 지옥 같은 증명할 수 없는 주제에 관심을 가질 정신적 상태를 인간은 벗어난 지가 오래입니다.

서양인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불교에서 보여주는 동양적 사상은 지금까지 기독교 사상만 맛 본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심오하고 신선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불교를 포함한 동양 사상을 오랜 동안 공부해 보았지만 서구의 사상과 비교하였을 때에 월등하다고 보입니다. 동양사상이 서양사상에 비하여 단 한 가지 취약한 점은 실용적인 면입니다.

불교는 신을 섬기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와는 다릅니다. 동양의 사상도 신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동양철학에서 신이란 인간세계와는 동똘오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비롯하여 동양 사상은 인간과 우주와의 조화를 그 틀로 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옛 어른들은 어릴 때에 천자문부터 가르쳤습니다. 천자문은 각 구절마다 심오한 이치가 들어있습니다. 그 시작부터 이미 우주의 이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지현황이란 네 글자는 이 우주의 기묘함을 가르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저 이 구절을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가르치는 줄로 생각하지만 천과 지는 그렇다치고 검을 현(玄)자와 누를 황(黃)자가 지닌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대인은 우주에 대한 매우 심오한 깨달음을 가지고 인간 세계를 그려나갔습니다.

히브리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의 많은 부분이 바빌론 혹 수메르의 신화와 같이 그 이전의 신화를 옮겨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성경을 비하하는 무신론자나 안티들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베꼈다고 표현하지만 히브리 창세기의 저자는 단지 베끼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던 그 이전시대의 신화를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로 남기려고 한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가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을 히브리 성경에 옮긴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현 인류가 고대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의 단합과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과장된 표현도 많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생에서 찾을 수 있는 깨달음과 심오한 통찰이 그대로 들어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신약시대에 들어오면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발생하고 기독교의 교부들은 유대인의 경전을 기독교의 경전으로 둔갑시켰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기독교는 이것은 조화시키려는 억지를 부리면서 구약을 꼬고 또 꼬면서까지 왜곡된 해석을 하였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분명히 유대교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온전케 하고 선지자를 온전케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그의 가르침 전체 가운데에서 유대교의 본질적 정신을 회복하려는 모습을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부패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질타를 하지만 유대교가 지닌 사상과 전통의 핵심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을 인용하거나 구약의 인물들을 가리키며 구약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강조합니다.

예수 이후에 그의 제자들도 모두 예수의 이런 사상을 이해하고 그대로 따르려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도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의 연장선상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할례도 계속하고 절기나 제사도 그대로 지키는 모습 가운데 유대교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를 그들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노력속에서 예수는 그들이 구약을 통해 기다리던 메시아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에게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의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여럿 유대인의 조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 가운데 메시아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울이란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다른 열한명의 예수의 제자와는 상당히 다른 이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최소한 그의 서신과 역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유대교의 종식과 동시에 단절로 이해하였고 따라서 유대교의 율법을 폐하고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새로운 종교적 교리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는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 사이에 갈등을 낳게 되고 결국 유대인 중심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바울의 신학적 기반으로 무게중심을 돌렸던 로마교회 혹 고린도교회와 같은 당시의 대형교회는 로마사회의 시민들을 모으게 됩니다.

로마교회나 고린도교회와 같은 교회가 초기 기독교 사회에 중심으로 자리잡고 종교적 세력을 더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유대인이 중심이 된 교회는 로마시민에게는 매력이 없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노예계급의 유대인들이 다수로 구성되어있고 또 문맹자들이 대부분인 유대인 속에서 당시의 최고 교육을 받은 로마시민이 매력을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율법의 지속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이방인으로서 새로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다루는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할례의 문제입니다. 그 이유가 로마교회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즉 로마 혹 그리스인들이 섞여있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기의 기독교는 로마교회나 고린도교회처럼 이방인들이 철저히 유대인들을 배척한 상태에서 기독교를 세워나갔고 이런 교회의 감독이나 당시의 교부들은 모두 그리스식 교육을 받은 사람임과 동시에 당시의 이방종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원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아무런 영향을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신약에 제자들이 남긴 글은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가운데 베드로서는 베드로의 작품이 아닌 것은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사실 성경의 저자는 대부분 알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죠.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어부였던 베드로와 요한을 포함하여 많은 제자들이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그리스어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죠. 따라서 베드로서나 야고보서가 그들이 쓴 글이라고 믿는 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신약 가운데 복음서가 4권 그리고 바울의 서신이 13권, 계시록은 원래 논란이 많았던 책이고 따라서 나머지는 당시에 기독교의 중심에서 정경을 만들어가던 교부들과 감독들에 의해 선택된 책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구약은 70인역을 번역으로부터 출발한 몇번을 거친 다른 번역입니다. 예수 당시에도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는 아주 다른 언어입니다. 히브리어는 셈족 언어로서 지금도 바른 의미가 분명치 않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70인역을 번역하는 가운데 히브리 성경(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은 선과 악에 대하여 현재 기독교인이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선과 악이란 동양적 사고에 따른 선과 악에 가깝습니다.
선이란 한자만 보아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 善이란 착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착하다는 의미보다는 좋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 글자는 원래 羊자 밑에 말씀 言자를 두 개 쓴 것이 변하여 지금의 善자가 되었습니다. 양고기를 고르게 썰어서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동양인에게 선이란 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어입니다. 구약도 선함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율법 모두가 인간 사이의 관계의 규정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만 결국 신의 뜻이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뜻 뿐입니다. 십일조도 인간 사이의 물질적 공평함을 위한 것이고 정결법도 인간 사회의 건전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신을 숭배하는 일을 말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일을 말한 것입니다. 그게 구약의 율법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말이 그것을 가장 잘 증명합니다. 제사는 신의 명령이기에 그것을 행함은 신에게 순종하는 것인데 왜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하였겠습니까? 제사는 신의 뜻이 단겨진 그릇이기 때문에 그릇의 내용물을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행위이구요.

구약의 선에 대한 이런 개념이 인간에게 복을 주고 벌을 주는 존재가 신이라는 개념이 고착되어있는 고대 이방종교적 관념에 젖어있던 교부와 같은 초기 기독교 지도자등에 의하여 변질이 되었고 그들에게는 그들 고유의 선의 반대 개념인 악과 함께 구약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지금까지 자기들이 모시던 신은 잘 숭배하면 복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신이었기 때문에 구약속의 신도 그런 식으로 보인 것이죠.

원래 악이란 선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惡이란 글자가 보여주듯이 버금 亞자가 마음 心자 위에 있는 의미는 최선의 마음이 아닌 차선의 마음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선의 반대 글자가 될 수 없죠. 亞자는 사방이 막혀있는 형상을 보여줌으로써 억눌린 상태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나쁜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억눌리거나 답답하면 바르지 못한 심성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대의 동양에서는 나쁜 것이 따로 존재하는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양식 사고를 가지고 볼 때에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서 good과 bad의 대결구조로 성경을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악은 막혀있는 상태의 마음을 말한다고 한다면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 혹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인 상태가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기독교 그 자체가 악이되는 셈이죠. 예수가 보았을 때에 현재의 기독교는 악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구약에서도 선이 지나치면 악이 된다는 가르침이 기독교의 역사에는 가득하죠. 예수를 위한다는 충성심이 인간들을 수천만이나 죽이는 역사를 불러왔죠.

구약에서 잠언이나 전도서를 보면 현재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선과 악이 결국 동일한 귀결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을 위해 수고를 하다보면 그것이 지나칠 때에는 악으로 행하게 된다는 가르침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동양의 음양의 사상과 유사합니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동양의 사상을 고대 히브리인들도 깨닫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책이 철저히 그리스식 사상과 종교로 몰든 초기 기독교의 교부와 감독들에 의해 완전히 godd과 bad의 대결구도를 그리고 있는 책으로 둔갑하게 됩니다. 여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자가 바로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의 City of God을 읽어보면 극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교리는 세상이 완전히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일반 교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목사들도 모르죠. 기껏해야 성경과 신학교과서만 보고서 목사가 되었으니 알 턱이 없습니다. 신학이란 학문 자체가 그 시작부터 이렇게 그리스 철학과 이방종교의 틀 안에서 형성된 것을 그대로 머리에 담아두고 성경을 이리저리 분석하고 논리와 상상과 역사와 추론을 섞어가며 만든 학문이고 더군다나 자신들의 이론을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막아내기 위해 온갖 논리적 방법을 가지고 방어하는 변증법에 의해 두껍게 갑옷을 입혀놓은 채 지금까지 내려 온 것인데 어찌 목사들이 이런 사실을 알겠습니까? 물론 차후에 스스로 열심히 다양한 분야에 대하여 공부하고서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바로 찾아가려는 서구의 소수 깨어있는 목사들은 예외이기는 합니다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교회의 개혁이니 어쩌니 하는 수고를 하기 이전에 그 모든 수고가 예수를 따르려는 신앙심 때문이라면 예수가 정작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가부터 바로 아는 노력부터 해야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기독교의 교회는 관광객들이 들어와 기념사진 찍는 곳으로 변합니다. 인간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신을 위한 종교는 인류의 역사에서 항상 사라졌습니다. 어떤 분이 댓글에 교회가 망하는게 상책이라는 내용을 쓰였는데 예수가 말하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않고 무너진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박 선생님의 댓글들을 읽으면서 저도 박 선생님처럼 편한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지만 저의 천성이 무엇이든지 뿌리를 캐지 않으면 못견디는 성격이라 주제넘게 글을 남깁니다.
리플달기
5 0
박평일 (72.196.234.24)
2012-11-05 07:11:02
댓글 고맙습니다. 부족한 견해인 줄 알면서 다시 댓글을 씁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동부지역에 며칠 전 허리케인 샌디가
지나갔습니다. 지구의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세상이 온통
소란 스러웠으나 숲 속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합니다.

허리케인 샌디는 선도 악도 아니었습니다.
존재계를 잠시 스쳐가는 한 현상이고 자연의 질서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하늘과 땅, 빛과 어둠,
밤과 낮, 사랑과 미움, 선과 악, 음과 양...
있는 그대로 모습이 완벽한 아름다움입니다.
성경 창세기에는 하나님도 자신의 창조물에
감탄사를 수차례 연발하셨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절대적입니다.
이를 선과 악의 이분법적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은
인간들의 지식이고 관념입니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지식의 열매(선악과)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의 원인인
신과의 결별을 인간들의 지식에 대한 신봉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주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있는 지식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원죄입니다.

그런면에서 서구인들의 이분론적 철학과 가치관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예수의 가름침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진리안에서 두려움없이 자유하는 삶입니다.
이는 붓다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주의 존재 그 자체가 사랑이고, 축복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모세는 신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눈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그 사실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나는 나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신은 살아 있는 존재자체입니다.
아무런 다른 설명이나 토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은 관념적,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상도 아닙니다.
신은 "살아있는 나" 입니다.

모세가 신을 만나고 나서 만든 것이 10 계명입니다.
그 십계명의 첫번째가
"나(살아있는) 이외에는 어떠한 우상도 섬기지 말라" 는 계명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죽어있는 것만이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신은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신은 결코 우상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도 관념화 되면 죽은 우상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런면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봉하고 있는 관념적인 신, 율법, 교회, 성경, 교회건물,
물질적 축복, 성직자들...은 모두 모세의 십계명을 법하는 우상숭배행위입니다.
하물며 신학이라니, 이는 신을 모독하는 외경죄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글을 읽을 때마다
"좁은 길로 가라" 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예수는 몸소 넓은 길을 택하지 않고 좁은 길을 택했던 분입니다.
그 좁은 길이 그를 십자가 죽음으로 인도 했습니다.

쏘크라테스 도 좁은 길을 택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좁은 길이 그를 사약의 죽음으로 인도했습니다.

붓다도 좁은 길을 택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좁은 길이 그를 평생 세상으로 부터
버림받은 외로운 삶으로 인도 했습니다.

인도의 간디도 좁은 길은 택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좁은 길이 그를 흉탄에 맞아 죽게 했습니다.

이렇듯 좁은 길은 외롭고 험난합니다.
큰길을 택하여 살아가는 민중들로 부터 온갖 박해와 멸시, 버림,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또, 좁은 길은 자기 내면을 향한 홀로가는 깨달음의 길이지
교회나 조직, 단체와 함께 가는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의 12제자들은 예수와 3년간 동거동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의 좁은 길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이다" 라고 주장한 사도 바올은 예수의 가르침을
깨달음으로 맛 본 분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제자 아난다는 붓다를 20년 이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녔 던
사람입니다. 그도 붓다의 깨달음을 손톱 만큼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깨달음은 지식으로 가르침을 통해서 전달 될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진리든 붓다의 진리든 깨달음은 철저한 자기 부정, 비움, 공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몇십번 읽고,
신학책을 몇 권 읽었다는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수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까?
이는 진짜 허구이고 망상입니다.
입으로 시인만하면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가짜 약장수같은 믿음이면 모를까...

만약 예수가 이땅에 오셔셔 그에 대한 경전의 해석이니 신학서적을
읽으신다면 아마도 놀라서 기절초풍을 하고 말 것입니다.
신학대학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지 않고는
도대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단 한줄도
이해하지 못 할 것이 분명합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문자나 말로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이야기들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그러니 참깨달음을 얻는 자들을 숫적으로
아주 극소수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이치가 정작 문제입니다.
모든 세상사들이 좁은 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넒은 길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때문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곳은 히말라야 산의 정상입니다.
바다에서 가장 깊은 곳은 마리아나 해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높은 산봉오리나 심연의 바다를 등산으로 오르고
현대과학을 동원해서 탐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 곳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환경여건이
인간생활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순수하게 맑은 물과같습니다. 맑은 물 속에서는 고기들이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썩음과 부패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완전하고 완벽한 치료나 청소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상대적인 개선이나 개혁만이 가능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불완전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완벽에 대한 환상은 우리 인긴들이 비워야 할 집착이고
오만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험없이 선한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진실하고 솔직한 분입니다.

이 것이 나의 단편적 생각이고 견해입니다.

의견교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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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이 (118.47.234.227)
2012-11-02 17:55:19
근데 대통령 외손자의 재산이 왜 불편한 진실에 속하지요?
그냥 궁금해서요...ㅎㅎㅎ 불법으로 취득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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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11-02 18:40:54
글쎄요~~
변칙 증여나 상속 등의 불법 여부를 떠나... 불과 5세의 아이가 9억이나 갖고 있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지시는지요? 서민들에게는 평생 벌어도 모으기 힘든 돈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왜 그런 큰돈이 필요할까요?

과거 일부 재벌들은 그런 수법으로 어린 아이 주식을 계속 늘이고 굴려 편법으로 재산을 상속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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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에 희망이,- (112.144.221.112)
2012-11-02 12:10:26
한국개신교 역사에 금번기 감리교회의 시련이 "희망의 뿌리입니다"
다듬고 다듬고,- 종교(다듬을 종/宗)성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0대-40대 감리교 목사님들의 아픔속에서 자라고있는 "높은 도덕률"
미안하지만/감사합니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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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170.20.186.188)
2012-11-02 05:48:13
흥함이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부패했는가?
신성남 님의 개혁에 관한 글을 꾸준히 읽어 본 사람입니다.

제가 오래 전 부터 해 온 이야기이지만 또 다시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흔히들 말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많은 소리들이 있지만 대동소이할 뿐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본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을 가지고 진단하고 표층적인 분석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급을 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부패를 언급하지만 기독교의 부패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본 기사에서도 중세교회의 부패를 말하지만 그 이전의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본 기사에서는 중세교회의 부패를 말하였고 한국의 교회의 부패를 한 세대 이전까지 확장시키면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역사를 볼 때에 중세 이전의 교회는 어떠하였겠습니까? 또 한국의 경우를 본다면 일제강점기와 그 이전 개신교가 형성되는 과정 동안의 교회는 어떠하였겠습니까?

한국의 기독교사를 볼 때에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기독교 그 자체에 많은 문제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소리는 거의 듣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시대적인 연장선상에서 보면 개신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이미 그 시작부터 교리적으로 많은 문제를 지닌 채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패란 단어는 부패 이전에는 온전한 상태에 있었다는 가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에 따라서 중세의 기독교가 부패하였다고 말한다면 그 이전에는 온전한 상태에 있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 형성 초기부터 본래의 예수의 정신과는 매우 동떨어진 상황을 전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환원시켜 말한다면 최소한 정통주의를 지향하는 기독교는 교리 자체가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재구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고 이것은 결국 정통주의가 지향하는 신학적 이해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서구유럽의 신학은 이런 변화를 모색하면서 기독교의 교세가 많이 누그러들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유럽의 기독교를 보고 죽어가는 교회라는 평가를 내리지만 그 반면에 유럽의 교회에서는 한국의 교회에서 보여주는 부패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기독교에 대한,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 교회의 부패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벗어난 모습을 부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무관하게 사회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회적 윤리와 개인적 도덕의 수준으로 평가할 때에 비난할 수 있는 부패입니다.

쉽게 말해서 목사가 일반인보다 사랑이 넘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성문제, 횡령문제 등등이 목사들 사이에서도 나타나는 것이 주목해야 할 문제입니다. 목사들이 그 정도라면 일반 교인들의 감추어진 사생활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목사나 교인은 소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통계에 따르면 절대 소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태생적인 환경을 보면 누구나 목사라면 이런 부패의 구렁텅이로서 스스로를 몰고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특징을 현 개신교, 특히 한국의 개신교의 상황은 지향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지금이나 중세나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형성 당시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여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내세우며 정말로 존경할만한 삶을 걸어간 기독교인들을 소개하지만 많은 경우에 왜곡된 평가에 의해 미화된 경우이며 또 그런 인물이 과장없이 소개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정도의 인물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기독교가 인간을 정화시키고 변화시킬까요? 저는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만일 기독교가 인간을 정화하고 변화시킬 힘이 있다면 타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제 생각이 틀렸다면 세상은 이미 달라져도 한참 전에 달라졌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오히려 기독교 때문에 더 혼탁해졌습니다. 동의하시기는 힘드시겠지만 제가 공부하고 연구한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최소한 4세기 초반 이후부터는 역사의 흐름은 저의 견해와 일치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없이 시작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를 4세기 초로 잡은 이유는 그때부터 기독교는 지하에서 목숨을 걸고 박해를 받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의 중심에 다가서서 세상을 손아귀에 쥐려는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예수는 기독교에서 이름만 남아있고 그 정신은 사라졌습니다.

교회의 부패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과 한국 교회의 부패가 보여주는 공통분모를 보면 복음주의 기독교의 교리가 그 안에 숨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주의의 뿌리는 기독교 정통주의에 있습니다.

기독교 정통주의의 뿌리는 초기 기독교의 신학적 이해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스틴 마터, 터툴리안, 어거스틴 등으로 이어지는 초기 기독교의 정통주의자들의 신학적 유물이 아직도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그 교리를 통하여 교회론과 같은 조직신학적 기둥이 형성되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본 기사에서는 흥한 뒤에 부패하는 중세교회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신중히생각해 봅시다. 교회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가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흥한다는 것은 진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흥함이 아니라 세상과 관계를 끊어나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한다면 세상에서 마음을 잘라내는 것이고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라면 무념무상의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노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위의 도를 깨우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이래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흥했다고 말하는 역사는 없습니다. 예수가 그랬고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동양의 석가모니, 노자, 공자, 맹자 모두가 진리와 가까왔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 모두가 흥함이 아니라 오히려 망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니 망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고 이렇게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주위에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진리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개나 소나 신학교 다니면서 목사가 되었다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절에 들어가 수양을 몇년 정도 했다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목사가 되어서 개척하여 교회를 시작한다는 것은 종교장사를 개업했다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그렇게 죽 먹듯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데 몇년 책상머리에 앉아서 인간들의 머리로 쥐어짠 이론을 가지고 자격고시 보고 난 뒤에 합격증을 받고 건물을 임대하여 간판을 걸고 사람을 모읍니다. 이처럼 종교장사꾼들은 정통이라는 간판을 내다걸고 마치 원조 족발집이라는 간판만 걸면 장사가 잘 된다고 착각하듯이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해 온 것입니다. 그것도 거의 이 천년이나 된 상술을 그대로 가지고 해 온 것이죠. 그런데 인간의 역사에 전통으로 이런 종교적 장사가 인정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대우를 해주고 이런 식의 종교 장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니 사람들 사이에 인식이 변화되는 기간이 아주 느린 속도로 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를 통해 좀 더 멀리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은 종교장사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고 그렇지 못한 범부들은 그것에 여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으로 들리겠지만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이 남긴 신학적 변증론은 복음서에서 보여준 예수의 가르침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들의 신학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기 위한 변증법적 결과이고 그리스 철학과의 혼합적 사상일뿐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역사가들 그리고 철학자들이 이런 사실을 지적하고 있고 또 이런 사실이 수용된 지가 이백년도 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목소리를 듣기 원하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이 종교의 담벽을 높게 쌓고 자기들만의 아성을 지킨 것이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이고 그것을 직수입한 것이 한국의 개신교이기 때문에 한국과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에는 시대적인 변화에 따른 새로운 각도에서의 기독교의 이해와는 아예 담을 쌓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교권주의를 만들어내고 그런 교권주의는 결국 부패의 바이러스를 낳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였지만 루터에 관하여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는 개혁 이전에 존재하였던 로마 카톨릭의 교권주의를 그대로 이어받아 오히려 더 높은 보좌를 세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의 형식적인 부분만 간소화 하고 난 이후에 교권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많은 교황을 만들어내는 체제를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외형적으로는 제도의 문제라고 보이지만 결국은 이런 제도를 예수가 중심이 된 기독교의 성경적 제도라고 신학적 결론으로 만들어낸 사상 자체가 바르지 못한 사상입니다. 루터가 믿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말살하다시피한 그의 사상이 개신교의 저변에 깊게 깔려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교리의 기저 위에 교권주의가 더해지고 이런 혼합물이 신학적 논리와 함께 교회론의 틀을 형성하였으니 교회가 부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루터 시대인 16세기에도 이미 개신 교회의 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마녀사냥은 19세기 미국의 보스턴에서도 자행되었을 정도로 인간의 생명을 가장 극심하게 위협한 것이 교권이고 그 교권을 정당화시킨 것이 교리입니다.

자주하는 이야기이지만 예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울을 내세워서 사도적 전승을 주장한 초기 교부들에 의한 비극입니다.

신학자들 가운데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종교의 중심적 인물로 내세우지만 그 모든 종교적 형식의 근간에는 바울을 내세웠던 당시의 변증론자들에 대하여 교회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조차 왜곡하고 은폐하고 미화하여 사라진 예수의 정신에 대하여 지난 이십세기 동안에 예수의 잃어버린 정신이란 단어조차 빛을 보지 못하엿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적 발굴이 초기 기독교에 대하여 물음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기독교라는 종교가 역사에 남긴 수 많은 죄악의 흔적을 보면서 이런 의문은 더 깊은 이성적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본 기사에서 한국 개신교의 부패가 지금 세대에 나타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며 "이 모두가 한 세대 전의 이야기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이 모두가 기독교가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세력을 추구하던 기독교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중세의 교회는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채워졌다고 말하지만 지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성경이 주어졌고 교인들은 매일같이 열심히 성경을 읽는다고 말하지만 교회내에서 성경에 대하여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선 목사들부터 신학교에서 배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운 지식마저도 교권을 수호하는데 방해가 되면 자신의 지식 리스트에서 지워버립니다.

한국에는 교회개혁연대와 같이 교회의 개혁을 말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이런 연합적인 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도 개혁에 대하여 강한 의견을 주장하는 목사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목사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도 개혁의 대상이라고 질타하는 목사들과 별 다름없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는 결국 생존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십일조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대외적으로는 개혁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주는 말을 하지만 자신의 교회에서는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라는 설교를 하면서 교묘한 수사적 표현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물질을 쌓아나갑니다. 물질 없이는 교회가 운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교권주의의 산물이고 좋게 말하면 희생양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사라지면 자신의 생계부터 걱적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으로부터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천막짓는 일을 하면서 교회를 섬겼다고 가르치면서 자신은 교회에서 계속 생활비를 받는 상황을 가지고 현대에는 바울 시대와는 다르다는 말로 사람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보다도 못한 목사들이 대부분의 목사들이고 이런 작자들이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칩니다. 자신은 신학교에서 비평학도 배우고 문서가설도 배웠으면서 정작 교인들에게는 이런 내용은 입에도 담지 않고 성경무오설이나 영감설을 가르칩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는 가운데 그 절대적 권위속에 자신의 권위도 은근슬쩍 끼어넣는 것입니다. 이런 목사들에게 성경을 배운 교인들이 성경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목사의 입에서 나온 내용만을 알고 있는 것이 교인입니다. 교인들이 서점에 가서 성경에 대한 책을 사서 보아도 대부분 서점에 있는 책은 유사한 배경을 지닌 목사나 학자들이 쓴 책이지 오십보 백보입니다.

주석성경 외에 한국에서 많이 팔리는 책 가운데 그랜드 종합주석이 있습니다. 그 책을 쓴 저자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신학자와 목사들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말이 실감나는 책입니다.

신성남 님이 말하듯, 신학교를 나와 성경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없어도 모여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도 좋다고 말하지만 그런 공동체를 만들려는 사람은 이미 기성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적 틀에 오염되어있는 사람입니다. 자신들이 지닌 성경적 혹 종교적 지식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더 열심을 내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을 자기들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였는데 그것이 기성 교회의 가르침과 충돌된다면 이런 모임은 이단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요?

이 문제는 간단히 말하면 기독교의 기성 세력과의 갈등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라서 기성 기독교와 교리적 마찰을 빚는다고 해도 목숨의 위협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안심하라고 할 것인가요?

본 기사에서 부패한 교회를 나와서 바른 교회를 찾으라고 제시하지만 부패한 교회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바른 교회를 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형성되어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썩은 우물을 먹고 자란 사람은 이미 부정한 존재입니다. 예수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가라고 가르쳤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부패의 순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부패를 인식한 사람들이 부패의 고리를 끊고자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런 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사한 부패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부패의 고리를 이어나간 이유는 그들은 기독교의 초기부터 이어져 온 변질된 사상을 유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정통주의자들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교파에도 부패는 존재합니다. 아미쉬나 메노나이트와 같은 집단은 예외라 하더라도 기독교의 모든 교파에는 부패가 존재합니다.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가 종교로서 인류사회에 남아있는 한 이런 부패는 피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썩은 우물을 닫아버리고 새로운 우물을 찾지 않는 한 말입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아무런 가망이 없습니다. 유일한 가망은 기존의 신학교의 문을 닫거나 완전히 다른 신학교로 바꾸는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벌어졌던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처럼 말입니다.

총신, 장신, 고신등과 같은 대형교단의 수구세력의 하녀 노릇을 하는 신학교는 물론이고 군소잡다한 신학교 모두 문을 닫아버려야 합니다. 뿌리를 잘라버리는 일이죠. 물론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교도 있겠지요. 그런 신학교는 제외하고라도 말입니다.

돌대가리들만 모아서 무뇌아들로 만들어 목사자격증을 주면서 교권을 수호하는 로보트들을 양산하는 멍청이 교수들부터 쓸어버려야 합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상태까지 가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정신의 부활입니다. 이 천년 동안 기독교라는 종교에 갇힌 예수의 정신을 부활시키는 것이죠.

기독교는 사라지고 예수만 살아나는 것입니다. 장확히 말하자면 예수도 아닌 예수의 정신만 살아남는 것입니다. 예수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느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예수가 말하는 천국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기 전에 최소한 우리는 예수가 말하려는 포인트는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천국에 방점을 찍으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에수의 가르침은 영생, 천국과 같은 개념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가르침 즉, 인간세계에서 인간들이 함께 행복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가치가 사랑에 있다면 그 사랑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생명을 부지하고 있을 동안에 추구하여야 할 가치입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원죄를 말하고 그 원죄의 결과로 지옥이라는 형벌을 만들어내어 공포를 조장하면서 인간들의 심리에 호소하며 종교적 세력을 키워나간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전통이 현대의 기독교에도 그대로 전해져서 전도를 할 때에 인간의 죄를 먼저 언급하면서 죄의 열매로 사망이란 주장을 서슴지 않고 들이댑니다.

예수는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소용이 있겠느냐고 가르침으로써 그의 가르침은 우리의 현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간과하면 예수의 가르침은 허공에 뜬 망상을 주입하는 가르침이 됩니다. 기독교가 신비주의를 추구하고 현실에서 발생하는 도덕과 윤리와 정의의 문제에는 오히려 죄악을 조성하는 주인이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정통주의 신학은 예수의 가르침을 종교적인 교리로 변형시키는 도구입니다. 이것부터 인식하지 않으면 개혁은 없습니다. 서구유럽의 신학은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학문으로서의 중립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성의 눈알을 빼어버리라고 말한 루터나 교권을 수호를 신성시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교리를 가지고 말살한 칼빈이나 그들이 숭배한 어거스틴의 망상이 인류를 향한 예수의 정신을 꽁꽁 묶어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증거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개혁이란 단어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 주장의 가능성은 계몽주의 이후의 유럽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자정능력을 잃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원래부터 자정능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저의 의견에 반대하신다면 기독교내에 존재하고 있던 자정능력이 발휘된 사건을 예로 보여주실 수 있는지요.

종교개혁을 자정의 능력이 발휘된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크 오산입니다. 종교개혁은 개인의 신념과 기존의 기득권의 교권간의 갈등일 뿐입니다. 루터가 처음부터 로마 카톨릭에 등을 돌리려는 의도는 없었고 또 그의 반발에는 개인적인 욕망이 부분적으로나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처음부터 이 순간까지 부패일색의 자취만 남기고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나마 정화되는 모습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건도 개인적 견해의 차이로 인한 일부 제도의 수정이거나 기존 세력과의 알력 다툼으로 인한 분리일 뿐입니다. 역사상 기독교에서 개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건은 단 한번 이 천년 전에 예수 의해 일어난 사건뿐입니다.

제도적 교회는 그 제도 자체가 뿌리하고 있는 사상적 기반을 거부하기 전에는 제도 자체의 모순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목사제도가 사라진 기독교를 상상한다면 목사제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교권주의가 부활 할 것이며 십일조를 교회에서 제하여 버린다면 그럴듯한 수사법을 동원하고 변증법적 수법으로 정당화된 다른 이름의 방법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수단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종교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종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원래부터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가의 통치자 곁에 늘 있어왔습니다. 지금도 정치가들은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고 또 이런 사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구도와 개신교의 관계를 보아도 알 수 있고 한국의 정치가들의 행보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바로 깨닫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가 정치의 도구로 이용당하는 악습을 끊는 방법은 오직 하나 제도는 사라지고 정신만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님은 개혁을 주장하였지만 님이 지닌 종교적 사상의 틀은 그들이 가르친 교리와 신학적 논리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님이 보시기에 이런 님의 모습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한들 어떤 작은 변화라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냥 간판만 바꿔달고 장사하는 종교장사가 계속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역사가 증명하는 종교의 역사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름만 달리하며 표출된 인간 욕망의 추구수단입니다. 위정자는 이런 사실을 이용할 뿐입니다. 말에게 당근이 달린 막대기를 갖다대고 말이 달리게 하는 것이죠.

현 한국의 개신교의 구조를 가지고 본다면 목사는 교인들에게 당근이 달린 막대기를 들이대고 있고 그 목사가 속한 교단이나 소속단체는 그 목사에게 동일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 위의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속고 속이는 집단 최면에 걸렸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부패의 역사가 왕과 제사장으로 부터 시작된 집단 최면의 역사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개념을 가지고 볼 때에도 진리는 다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일부가 독점할 수 있는 소유물도 될 수 없고 더군다나 특정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더욱 더 아닙니다. 진리는 깨닫게 되면 깨달은 자는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진리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 것이지 진리를 들고 사람들 앞에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가르치지만 진리는 이미 세상에 있어왔으며 그것을 깨달으라고 예수는 말한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이 길이고 생명이며 예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갈 자가 없다고 말할 때에는 배타적인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유대 사회에는 부패한 유대교만이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직 예수의 가르침만이 당시의 종교적 부패와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죠.

은혜, 하나님의 역사 혹 성령의 감동과 같이 교회에서 배우기만 했지 실체도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신을 먼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보다 훨씬 전부터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때문에 우리는 가장 약한 생명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볼테르같은 지성인들은 인간의 이성에 합하는 종교적 가르침만 수용한다는 지침을 가지고 기독교의 정신적 틀을 수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유럽의 기독교가 형성되었고 현대신학의 모체가 당시에 탄생하였으며 기독교는 교세는 미미하게 되었지만 교권의 남용이나 성직자의 부패와 같은 양상은 일체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썩어 문드러져서 악취를 내기보다는 작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나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의 거울입니다.

제퍼슨은 교권주의자들이 악용하고 또 악용할 소지가 있는 성경의 구절들을 모조리 면도칼로 오려냈습니다. 저는 제퍼슨과는 다른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면도칼로 오려내는 대신에 교권주의자들이 악용한 구절들에 대한 재해석을 추구하였습니다. 일부 선구자적 학자들이 택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다수의 한국의 기독교인은 거부하겠지만요.

기독교에 예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이렇게 썩은 우물 속에는 말이죠. 그 안에 있는게 더 이상한 거죠. 그러니 개혁을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는 것입니다. 개혁 한다고 해서 예수가 다시 오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예수는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했죠.

개혁해서 새부대가 된다면 예수는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했겠죠.

예수의 사상에는 흥함이란 없습니다. 죽기까지 자신이 낮아지는 것이 예수 사전에 나타난 흥함의 의미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사전이 보여주는 흥함이란 단어로 속고 속이는 역사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속에 흐르고 있었고 이제는 이것을 멈추려는 노력이 지난 이 백년 동안에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한국은 무지하고 불쌍한 교권주의자들이 쌓아놓은 높은 담벽 때문에 이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보시기를 권합니다.

예수 없는 곳에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긴 얘기하다보니 여기까지 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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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내요... (58.230.129.91)
2012-11-03 13:22:55
신은 허상이고 종교는 허상을 산물일뿐 아무것도 아니내요 어쩌다 나온 위대한 사람의 사상만 존재할뿐,, 이것도 허상입니다..
모든 굴레도 그저 존재하니까 존재하고 있지 죽으면 그만이군요
학문으로만 모든것이 이렇다 저렇다 할뿐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내요
인간이 이 지구라는 우주에서 그냥 살아가니 그 살아가는 방법과 방식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신이 이땅을 만들고 사람을 만든것도 허상....
도대체 무엇이 진짜인지 어찌 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읍니다.. 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질은 무엇인지여.. 무식해서 잘 모르겠네여..
신은 존재한다고 말하지 마세여..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니까..
모든것이 지구에 사는 생명체가 만든 허상일뿐.. 그 허상에서 우리들은 논 할뿐..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라것...소수가 옳든 다수가 옳든... 그것은 모두 허상이군요... 해박한 논리 저의 머리로는 아둔해서 모르겠읍니다.. 죽으면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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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11.187.2.91)
2012-11-02 09:13:01
동감합니다.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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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11-02 07:59:39
교회 부패의 일차적 원인은 직분에 '세속적 이권'을 인위적으로 가미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긴 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지적하신 많은 내용에 공감합니다만, 부분적으로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도 다소 있습니다. 간단한 댓글 토론 몇마디로 교회의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결론을 구하기란 쉽지 않겠지요.

근본적으로 본다면 교회 부패의 문제는 인간 죄성의 문제입니다. 다만 문제를 좀 단순화하여 본다면, 어느 시대이건 결국 교회가 부패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어떤 형태이든 직분에 '이권'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물론 성경이 정한 이권이 아니라, 인간이 교묘하게 인위적으로 가미한 세속적 이권입니다.

따라서 저는 제도권 교회이든 아니든, 인간이 부당하게 첨가한 세속적 이권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 때 부패는 보기 힘들었습니다. 교회 부패는 언제나 물량적으로 흥행할 때 극심했습니다. 즉 먹을 것이 많은 곳에 구더기가 많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본래 성경에 정해진 직분에 무슨 세속적 이권이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중직을 맡을수록 때로는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만일 목사나 장로가 되어도 부와 명예를 얻기 힘든 상황이라면, 교회는 이리 쉽게 부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직분자에게 주어진 과도한 연봉, 과도한 권한, 그리고 세습이나 윤리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개혁이나 갱신의 촛점을 그 '부당한 이권' 제거에 둔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교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부패한 인간의 심성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새로운 사상과 제도와 가르침도 이 세상을 결코 완전케 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머지 여러 문제들은 이글에 참여하신 여러 독자님들의 몫으로 돌리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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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Picky (24.60.52.23)
2012-11-02 09:07:39
저는 인간의 심성에 죄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 철학에 물든 기독교가 가르친 내용입니다. 선과 악 그리고 악을 행하는 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입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것이 죄에 대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죄성이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직분에서 이권을 제거하여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예수가 말하는 내용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죄를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을 제거하여 죄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예수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현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도 인간에게 죄성이 있음을 깨닫고 그 죄성을 멸하기 위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죄로부터 멀어지려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이 죄성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여야 한다면 그것은 수동적인 회피이지 인간의 죄성을 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의견이 옳다고 여기는 이유는 세상에 널려있습니다. 굳이 기독교의 문제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런 예는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이권이 있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게 그 자리에서 맡겨진 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황희정승같은 사람이 그 예입니다. 이권이 널린 자리가 내미는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도덕성과 청렴에 대한 의지는 인격에 관련된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한 기독교가 인간의 도덕성을 바꾸지 못한다는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직분의 문제입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는 제도적 교회 그리고 그 교회내의 직분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직분이란 개념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에 의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예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상기시킬 수 있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 기독교의 제도적 뿌리는 처음부코 끝까지 바울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생각이 예수의 생각이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초기의 정통 기독교가 성경에 신적 권위를 두면서 정통 기독교를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성경에는 신적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포장지를 벗기고 성경을 보면 바울도 예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예수의 재림에 대한 오해가 바울의 태도에 분명히 나타나고 다른 사도들과의 알력 다툼이 드러나고 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동족이지만 당시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유대인들보다 교회내에의 로마 시민들에 대한 우호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정통주의 기독교에서는 예수 다음으로 바울을 받들고 있습니다.

직분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의 생각이고 또 그의 생각도 초기의 교부들에 의해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그런데 직분에서 이권을 빼어버리면 된다는 발상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방법론일 뿐이라고 보입니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런 제도적 교회에 장로, 교사, 목사라는 직분을 세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직분이라는 개념조차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의 의중 가운데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베드로는 초대 목사나 장로가 되어서 나머지 열명을 이끌었을테고 바울은 사도는 커녕 서리집사부터 시작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모두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을 대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던 바울에 의해 기독교는 그 교세가 커집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교부들 거의 모두가 그리스식 교육을 받고 이방종교의 영향 아래에 사상적 기틀을 형성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까?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제도적 종교로 그 출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도적 교회, 직분, 인간의 죄성 - 님이 말한 이런 모든 단어들은 예수의 머리에는 없던 단어들입니다. 복음서를 다시 읽어보시면서 생각해 보시지요. 만일 예수에게 이런 개념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개념이 있는 예수의 언행이 있었다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그리고 님께서 언급하신 순교라는 것도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개념입니다. 예수는 순교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순교란 저스틴 마터 이래로 기독교에서 자신들을 과시하기 위한 개념으로 삽입시킨 것입니다. 바울의 순교., 베드로의 순교 이런 전통적인 내용 모두 초기의 기독교가 만들어낸 전승일뿐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가 왜 목숨을 내어걸고 예수를 따라야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기대는 하지 않지만 수고하시는 만큼 열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 밖에는 전할 말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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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2-11-02 23:03:17
선생님의 댓들을 읽을 때마다 해박한 지식, 뛰어난 통찰력,빈틈없는
논리에 감탄하곤 합니다. 감히 댓글을 달기가 두렵습니다.

"신은 평범한 사람들을 가장 사랑하신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을
가장 많이 창조하셨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지지고 복으며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모순덩어리이고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가끔, 몇 세기에 몇 사람정도(?) 초인적 깨달은 분들이
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인간들은 그들을 성인 내지는
예언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분들은 우리 인간들이
어둠과 무지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 깨달음은 소수의 깨달은 자들만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고 삶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들의 삶은 글이나 말로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경전이나 책에 담을 수도 없습니다
빛은 자신이 빛이 되어야 이해할 수 있고,
공은 자신이 공이 되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같이 평범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입니다
.
종교는 인간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들에게 두려움이 없다면 종교, 신비, 신앙, 미신이니
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나 붓다는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인간들의 본능적 두려움을 삶으로 극복하신 분들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신 후 자유와 사랑를 온 삶으로 체험하신
분들입니다. .

인간들은 이 자유와 사랑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그분들이 그 진리를
세상의 정치나 제도를 통해서 실현시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야 간단합니다. 진리는 조직이나 집단을
통해서 실현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결국 그분들은 인류에게 진리에 대한
화두만 던지셨을 뿐입니다.

그 화두를 정치, 경제, 사회 속에서
풀어 가고 실현시켜 나가는 것은
탐욕스럽고, 무지한 우리 평범한 인간들의 몫입니다.

인생이란 어둠고 막막한 대해의 항해입니다. .
진리는 항해길은 인도해 주는 등대불입니다..
인간들은 험란한 항해길에는 일정한 로드멥도 정도도 없습니다.
순간순간을 극복해 나가는 게릴라적 항해술만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좌초, 풍랑과 태풍을 만나 좌절되고 부서지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가끔은 배가 완전 파선되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평범한 인간들의
인생이고,운명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는 전부가 아니면 낫싱이라는 공식은
먹혀들어가지 않습니다. 죽으면 살리라는 공식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죽으면 말 그대로 죽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또,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를 오고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평범한 사람들의
변증법적 삶입니다... .

그러면에서 혁명은 소수의 깨달은 자들만의 특권적 꿈입니다.
이 세상은 점진적인 개혁과 진화를 통해서 바뀌고 변화되어 갑니다.
혁명은 이상이고 개혁은 현실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에머슨의 성공에 대한 정의를
좋아라고 즐깁니다.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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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0
신성남 (49.50.206.22)
2012-11-03 20:04:04
"혁명은 이상이고 개혁은 현실입니다."
박 선배님, 이 구절이 하루 내내 제 마음을 맴도는군요. 매우 유익한 댓글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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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박평일 (72.196.234.24)
2012-11-01 22:56:28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예배는 제물을 바치고 숭배하는 구약의 수직적 예배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친구 되신 주님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수평적 예배입니다."

신 선생님, 오랫만입니다. 교회에 관한 논쟁에는 가급적 끼어들지 말자는
것이 저의 결심이고 입장입니다. 그런 나의 결심을 깨고 신 선생님의 글에
댓글을 쓰게돼서 죄송합니다.

저는 신앙적인 깨달음은 남과 나눌 수도, 배우고 가르칠 수도,
또 증명할 수도 없다고 믿고있습니다.
신앙는 하나님과 나와 홀로함 속에서 나오는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개혁에 관한 몇가지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지요.

첫째 신앙인들이 숫적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9 마리 양을 어둠 속에 남겨두고 두고 한마리 양을
찾는 것이 예수정신입니다. 이는 교회를 숫자나 크기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의 믿음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은 단 열명의 깨어있는
신앙인이 없었 던 탓이요, 노아의 홍수는 단 한사람이
인류를 구하는 상징적인 이야기들이지요.

참고로 제 개인적인 체험을 이야기를 하나 하지요. 제가 아주 오랫 동안
친구로 가깝게 지냈던 목회자 두분의 이야기 입니다.
두분 다 선교사로 오랫 동안 봉사를 했던 신실한 신앙인들이
었습니다.
그분들은 나를 만날 때 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예수만 믿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권면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두분 다 자기 가정과 신도들의 가정을 파괴하는 간음을
범하게 됐습니다.저도 그럴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에 돌팔매질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이해하고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정작 나의 실망은 그분들의 간음해위가 아니라
사건의 사후 처리과정에 신앙인으로써 그분들이 보여 준
태도였습니다.
나는 그분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회개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목사직은 말 할 것도 없이
스스로 사임해야지요.
그러나 그분들의 태도는 나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자기들의 죄는 이미 하나님으로 부터 사함을 받았다.
그러니 굳이 자기들의 죄를 신도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빌 필요는 없다.
만약 신도들이 이 사실을 알게되면
자기들이 지금까지 애써 구원한 신도들이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양을 치는 목사로써 책임있는 자세가 아니다."

제눈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무서운 자기합리화요,
독선이며 위선이었습니다. 두분들은 아직도 목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계십니다. 전도와 복음이 숫자놀음의
환상에 빠져있는 좋은 예지요.

두번째는 개혁의 주체입니다.
교회의 개혁은 깨어있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왕들의 개혁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피를 먹고 태어나서
피를 먹고 성장한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 입니다.

종교의 개혁은 정치제도의 개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개혁은 일부 깨어있는 성직자들에 의해서
주도 되어 왔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장 좋은 예지요.

성직자들에 의한 개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성교회가 성직자들의 권위와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부패한 도구로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부패는 조직의 본질적 생리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부패하고 마는 것이 조직입니다.

설령 신실한 깨달음을 얻은 신도들의 주도하에
일시적으로 교회가 개혁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가면 그 결과는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신앙인들은
새벽에 등불을 켜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들 처럼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셋째 개혁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의 자세입니다.

"사랑은 인간을 창조했고 겸손은 인간를 구원했다" 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겸손은 인간들을 부패로부터 보호하는 소금입니다.

한 사막교부의 이야기로 댓들을 맺겠습니다.`

마귀가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어떤 수도사에게
나타나
" 나는 가브리엘 천사다. 주께서 나를 네게 보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수도사가 말했다.

"정말로 내게 가라고 명을 받았소? 다른 사람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오? 나는 주께서 천사를 보낼 만큼 그렇게
가치있는 사람이 아니오!" 순간 마귀가 사라졌다.

늘 좋은 글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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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
신성남 (49.50.206.22)
2012-11-02 07:11:56
깊히 공감합니다...
박 선배님의 댓글에서 늘 많은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 이땅의 교회들이 '조직의 함정'에서 벗어나 순수한 본 모습을 회복하고... 그래서 앞으로는 이처럼 부끄러운 개혁 논의가 구태여 더 이상 필요 없는 밝은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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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바름이 (14.43.192.5)
2012-11-01 18:54:32
한국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원인,,,
오늘날 한기총은 장로교 중심으로 모인 단체이다. 장로교등 한기총 소속의 대부분 교단들은 솔로몬(이스라엘)이 이방신에게 절하고 섬긴 죄로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한 것(왕상11장)같이, 일제 시대에 일본 천황 신에게 절하고 찬양하였다.

이방신에게 절한 한기총을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교단이 나누어지고, 부패하고 타락한 것은 당연한 일,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신앙인들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한기총 소속 예장통합측은 삼신론을 주장한 최목사를 이단 감별사, 이대위(이단 대책위원회)로 세우고 이단을 만드는 공장 역활을 하게 해 왔다. 그리고 그 소속 분과를 맡은 목사들이 지금 개종 교육을 활발히 하고 있는 황,진,김,이 등이 목사들이다.
그런데 한기총은 어느 날 최목사를 최악질 이단으로 규정하고 쫓아 내었다. 이는 최고의 이단이 이단 감별사를 해 왔다는 말이 된다. 이 직책은 정통교단이라고 자처하는 곳에서 준 사명이다.

한기총은 어떠한 곳인가? 돈을 주고 회장자리를 사고 돈을 받고 권세를 파는 곳이 한기총이다. 신학교 문턱에도 못간자도 돈만 주면 목사 안수를 받는 곳이다.

이것은 칼빈교의 교법이다. 이들은 예수교가 아니며 예수교의 진리를 믿지 않고 오히려 예수교의 진리를 믿는 교단을 이단으로 취급한다. 바리새인 목자 같이,,,

이러한 곳에 부흥이 있겠는가? 있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도 거짓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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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
주 안에서 (123.109.111.47)
2012-11-01 20:33:11
장로교만 문제가 아니라 감리교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대형사고는 감리교단에서 더 많이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문에 어느 교단, 어느 목사라고 할지라도 이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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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8
신성남 (49.50.206.22)
2012-11-02 07:04:33
교단에 관계 없이...
모든 성도들이 함께 자성하며 잘못은 고치고, 잘하는 일은 서로 격려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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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0
바름이 (14.43.192.5)
2012-11-01 18:59:33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종교의 종말이다.
이것이 종교세계의 종말이다.
이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씨를 뿌린 밭에서 알곡들은 추수해서 천국 곡간으로 들이시고 밭(교회)에 남아 있는 가라지는 불살라 버린다고 말씀하셨다.

참된 알곡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씨(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 계14장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계시는 시온산에 추수된 첫 열매 144000인이 있다. 이들이 약1:18절으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으로 맺어진 참된 알곡들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부패한 밭(교회)에서 성경을 길로 삼아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계신 시온으로 추수되어 가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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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0
나 홀로 (211.253.98.34)
2012-11-01 09:04:30
흥한 뒤에
부패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나중에 어쩔 수없었다 변명이라도 할 테니까요.

흥한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교인수가 많고 헌금이 많아지는 것
주님도 외형적인 것을 보시고 잘하였도다
너희가 부패를 통해서라도 흥하였구나!
하실까요?

오호 통재로다.
십자가의 도는 목사의 나홀로 길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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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신성남 (49.50.206.22)
2012-11-02 06:59:59
흥한다는 것...
바른 교회에서는 영적 '성숙'을 의미하고, 부패한 교회에서는 물량적 '흥행'을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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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0
그런데요 (222.98.132.163)
2012-11-01 08:05:16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교회 담임목사 제도를 없애야합니다

교회의 담임의 폐단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담임을 교회 책임관리자로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걱정은

천주교를 보시면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진정 올바른 교인이라면

담임 목사님을 딴 곳으로 보내 드려야 합니다

교단에서의 파송 목사님을 수용해야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고요? 그런 목사님이 아니라구요?

진짜 참 목사님이라구요?

그렇다면 더욱 더

목사님은 지금의 교회를 버리셔야 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처럼 담임을 떠나 선교하셔야 합니다

교인 또한 담임 목사님을 보내 드려야합니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99%가 가짜 목사 가짜 교인들입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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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9
신성남 (49.50.206.22)
2012-11-02 06:54:04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작은 교회는 인적 자원에 제한이 있기에 담임목회제가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대형 교회는 얼마든지 담임목회제를 폐지하고 공동목회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경우 목회 전문화를 통한 유익이 있고, 또한 교권 집중을 완화하여 교회 부패를 크게 견제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부교역자들이 모두 대등한 동역자가 되어 보다 능동적인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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