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대립이 없는 세상은 만들기 어렵겠지만, 갈등과 대립이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세상은 만들 수 있습니다. 경쟁이 없는 세상은 만들기 어렵겠지만, 공존의 숲에서 평화롭게 경쟁하는 세상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 종교계 33인 원탁회의 대국민 호소문 내용 중 -

태풍 산바가 한반도를 강타하던 어제(17일) 오후 무렵, 개신교 이해학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장 외 7명), 천주교 황상근 신부(천주교 인천교구 원로사제 외 4명), 조계종 도법 스님(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외 4명), 원불교 강해윤 교무(원불교 환경연대 상임대표 외 4명), 천도교 이우원(천도교 한울연대 상임대표 외 3명),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지아나대학교 비교종교학 외 6명) 등 5대 종단의 대표들과 각계 인사 33명으로 구성된 ‘5대 종단 33인 원탁회의’가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 제목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한 100일 국민실천 종교계 33인 기자회견, 사랑합니다. 함께 삽시다!’

애초 계획은 원탁회의 후에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었던 탑골공원 내 3.1운동 기념 부조 앞에서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종교인 33명이 모였는데... 태풍 때문에 탑골공원에서 행사가 무산된 것이 못내 아쉽기는 했지만, 어차피 뭐 3.1운동 당시에도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에서 모였었으니까.  

하지만 수운이 누구인가? 당시 도탄에 빠졌던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던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선생님이 아니신가!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선생의 그 자애로운 기운이 그대로 전해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기자회견을 지켜보았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의한 자살 등으로 벌써 22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인구 10만 명당 31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OECD 1등이다. 그러나 쌍용자동차의 경우는 전체 해고 노동자 2,646명 중에서 22명 사망에 자살자는 12명. 국내 자살률의 15배가 넘는 수치란다(공지영의 의자놀이 148p).

이 죽음의 사기(邪氣)를 막기 위해 종교계 33인 원탁회의는 앞으로 10월 13일부터 12월까지 격주 토요일, 모두 5차례에 걸쳐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한 생명살림 국민행진’을 진행할 계획이다. 또한 이 기간 동안 5대 종단별로 모금운동도 함께 전개하여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전달할 것이며, 국민들의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사랑합니다. 함께 삽시다.’ 대국민 캠페인도 함께 전개해 나갈 예정이다.

한편 원탁회의는 이명박 대통령, 박원순 서울시장, 문재인·안철수·박근혜 등 대선후보, 허창수 전경련 회장, 양대 노총 위원장, 아난드 마힌드라 쌍용차 회장 등 정·재·노동계 인사들을 만나 쌍용차 문제의 해법도 적극 찾아 나가기로 결의했다.

문제는 디테일이다.

성서를 인용하게 돼서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창세기에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서사가 짤막하게 등장한다. 선악과를 베어 먹은 아담에게 하느님께서 형벌을 내리신 즉, 죽는 날까지 수고(work hard)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조금 거칠지만 이 말 자체로 오늘날 소위 ‘노동’ 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다.

‘노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한 듯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이것은 평생 노동을 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존재론적 수사일 뿐이다. (대학생 시절. 캠퍼스에서 ‘남과 북은 하나’라는 식의 현수막을 매일 보며 살았다. 바꿔 말하면 ‘바로 지금은’ 남과 북은 갈라져 있다는 뜻. 하나 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1계명은 ‘바로 지금은’ 여러 신을 섬기고 있는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의 결과물.)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노동자다. 그런데 유독 대한민국에서는 노동자가 찬밥 신세다. 모두 노동으로 먹고 살고 있는 데도 말이다. 쌍용 자동차 사태의 본질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노동자를 잘라 버릴 수 있는 ‘정리해고법’이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그냥 회사가 어렵다고 나가라는데, 나가지 않고 싫다고 파업하는 건 불법이다. 나가라는 회사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어떤 방법을 쓰든 모두 불법이다. 단 6개월 치 해고 수당이 전부다.(공지영 159p)’ 이것이 정리해고법이다.(‘악법도 법이다’까지는 참아주겠는데, 악법을 만들고 고칠 생각조차 않는 정치인들은 정말이지 못 참아주겠다. 두고보자 니들.) 이 ‘정리해고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쌍용 자동차 사태는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이다.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머물고 있는 대한문 바로 건너편 재능교육 본사 앞에는 재능교육 노조가 1730여일 째 파업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법적 신분은 특수고용 노동자다. 이들은 노동하지만 노동자가 아니다. 따라서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이들에겐 없다.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모험 모집인, 화물차 운송, 대리운전, 퀵서비스 기사 등이 이에 속한다. 특수 고용자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노동자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 또한 ‘노동조합법’이 개정돼야만 한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 2012년 3월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자료에 의하면 비정규직 비율은 47.8%며, 또한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이다.(49.7%) - 이 자료도 정부 발표에 근거 한 것이며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890만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들에게는 지금 ‘근로자 파견법’의 합리적 개정이 절실하다.

용산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은 영세 자영업자들이다. 전체 노동인구의 30%가 넘는 자영업자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선심쓰듯 재례시장 상품권을 사주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재벌 규제법' 시행으로 골목상권이 파괴되지 않도록 지켜내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멋진 레토릭으로 치장한 '선언'이나 '구호'가 아니다. 모든 감동은 구체적인 실천에서 나온다. 예수님의 말씀이, 부처님의 설법이 권위를 갖는 것은 그분들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에 오르고, 출가해 보리수 나무 아래에 앉았기 때문이다. 기왕에 대한민국의 종교지도자들이 유력한 정,재계 인사들을 만난다고 하니, 제발 3.1운동 때의 대표들처럼 하지 말고, 목숨걸고 강력하게 요구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제발 더 이상은 국민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달라고 말이다.

국가는 국민경제의 성장과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가할 수 있다”  - 헌법 119조 2항

P. S. 노동자, 노동조합 혹은 골목상권을 지키려는 영세자영업자들의 단체행동을 말할 때 꼭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말이 있다. 바로 '대립'과 '갈등'이다. 그런데 이거 하나만 꼭 기억하자. '대립'과 '갈등'이라는 이 가치 중립적 단어들 사실은 동등한 권력관계에서만 성립하는 단어들이다. 초등학생 자녀와 대립하고 갈등한다는 부모는 뭔가 어색하다. 동등한 권력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가한 자녀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언제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진짜 '대립'하고 '갈등'한 적이 있기나 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