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늦은 오후, 왠지 찬송을 부르고 싶었다. ‘가을을 타나?’ 마음 한 구석에 무엇인가로 채워졌으면 좋을 허전함이 있다. 어디론가 멀리 훌쩍 떠나고 싶다. ‘올해도 단풍구경은 틀렸나보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나를 찬송 속으로 끌어 갔는지 모른다. 아내를 불러 피아노를 치게하고 나는 노래했다. 잘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함께 살아 온 세월 속에 어우러진 화음이 되었다.

“사랑이 식어진 곳, 거기 주님이 계시네··· 세상 모두가 사랑 잃은 사람들이고 깊은 슬픔에 잠긴 자라.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로 능력입어 나도 사랑을 심는 자라.”<김석균 님의 이 복음성가는 아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곡 중 하나다>

둘이서 그렇게 한참이나 찬송에 빠져 있을 때였다. 열린 현관문으로 슬그머니 들여다 보는 사람이 있었다(우리는 사택의 2층에 살고 있다). ‘교인인가?’ 현관 쪽으로 가니 허름한 옷을 입은 낯선 얼굴의 모자가 서 있다. 20대 후반이 됨직한데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몹시 수줍어 하며 웃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바깥에 있다가 찬송소리를 듣고 마음이 끌려 왔어요.”

아내는 얼른 방으로 들어 오라고 권했다. 사과와 배 그리고 포도를 내어왔다. 세살박이 아이의 이름은 ‘이상재’였고, 상재 엄마는 남편과 함께 꽃을 팔러 왔단다. ‘아하, 그렇구나. 오늘 교회 앞 거리에서 꽃을 파는 낯선 부부가 있었지.’ 우리는 예상치 않은 손님과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조금은 슬픈, 그리고 조금은 힘든 삶을 사는 듯한 그러나 차분하고 됨직한 사람의 분위기다.

상재 아빠는 꽃 도매상을 했는데 잘못되어 지금은 차를 가지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거리에서 꽃을 팔고 있다고 한다. 천안 외곽에 사는 상재 엄마는 오늘 처음 남편을 따라 이곳 예산에 왔다. 처녀 땐 교회에도 다녔는데 지금은 바쁘기도 하고, 남편이 이해하지 못해 못나간다고 한다. 과일 몇 쪽을 먹더니 “남편이 기다리겠어요.” 하고는 금새 일어 선다.

------------------------------------------------

교회 앞, 예산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이다. 여기에는 매일 만나는 낯익은 얼굴들이 있다. 교회 정문 바로 맞은 편에 허름한 천막을 치고 과일을 파는 정씨 할머니 부부. 때로 맛있는 과일이 들어오면 아내를 불러 “이번 사과는 맛있어요.” 하고 귀뜸해 주곤 한다. 오늘도 아내는 “이번 홍시 참 맛있는게 들어 왔어요.” 하는 말에 선뜻 홍시 몇 개를 사가지고 들어 온 터였다. 가끔 다섯 살 난 아들 한신이가 앞에 기웃거리면 “옜다” 하며 귤 하나, 바나나 하나 들려 보내는 인정 많은 할머니. 지난 주일 전 교인 운동회 땐 드링크제 한 박스를 사서 차에 얹어 주더니, 오후에 슬그머니 운동장에 찾아 와 구경하고 가시던 할머니다.

또 요즘은 조금 밖으로 옮겨 앉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 옆 교회 차고를 점령하고 앉아 구색을 맞춰 야채 몇 가지를 진열해 놓고 하루 종일 앉아 사람을 기다리는 등이 굽은 이씨 할머니. 이 할머니 때문에 나는 종종 차를 차고에 넣지 못하고 다른 곳에 주차하곤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나이 많은 할머니에게 차 들어가니 치워 달라고 말하기 차마 민망해서였다. 때로 자리를 비켜 달랄 때면 내 쪽에서 오히려 연신 미안한 표시를 해야한다. 구부정한 허리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거리에 나와 앉는 할머니다.

닷새만에 서는 장날이 되면 교회 앞 게시판 위에 줄줄이 옷을 걸어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백씨 아저씨. 게시판 광고물을 완전히 가리고도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다(물론 백씨 아저씨가 처음 이곳에 와서 교회 담에 줄을 치고 옷을 걸 때는 미안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맡아 놓은 안전한(?) 자리다. 지금은 옷을 걸기 위해 게시판 위에 아예 굵은 못까지 듬성듬성 박아 놓았다. 그래도 전혀 밉지 않은 아저씨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어 정이 가는 이랜드의 두 자매. 만날수록 푸근해서 여선교회 회원들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러 재잘거리다 가는 신발가게 김 집사님, 빵을 살 때면 으례 덤으로 한 두개 더 넣어주는 50줄이 가까와도 아직 싱글로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독일빵집 처녀 아줌마, 내가 항상 천사같은 분들이라 부르는 교회를 관리하는 아랫 층의 이 집사님 부부, 모두가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정다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은 새로운 얼굴의 젊은 부부가 길에 있었다. 수요예배 시간 30분전, 교회를 가려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한 다발의 국화가 가을 향기를 토하며 놓여 있다.

“여보, 문 앞에 국화가 놓여 있네.”

국화 다발을 안고 우리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말을 안해도 이 꽃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를 안다. 아, 이 상큼함. 이 풋풋함. 나른한 오후 설록차 한 잔의 개운함. 주님께서 단풍구경보다 더 좋은 사랑이 담뿍 담긴 국화 향기를 보내셨다. 국화 향기보다 더 진한 사랑의

향기. 사랑이 식어진 곳 거기에 주님이 계셨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진짜 가을의 단맛을 보았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캄캄한 길에서 젊은 부부는 남은 꽃을 차에 싣고 있었다. 상재 어머니, 또 오세요. 그리고 행복하게 사세요.

                                    이기철(예산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