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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의 순수로 돌아가 주시오개혁을 추구하는 젊은 목사들, 특히 구교형 목사에게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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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3월 21일 (화) 00:00:00 [조회수 : 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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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형 목사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남달리 영특한 아이였음에 틀림없는 것 같소. 그 어린 시절에 이미 종교가 만들어내는 혼란과 폐해에 눈뜨고 있었다니, 어린아이로서는 이성으로도 신앙으로도 감지하기 어려운, 오로지 어린아이다운 본능적 순수함과 아울러 그대가 가진 남다른 세밀함과 영특함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구교형 목사, 그 때의 순수함으로 돌아가 주시오. 어떤 ‘전제’도 설정하지 않은채, 어떤 ‘교리’에도 매이지 않은채,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며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돌아가 달라는 말이오.

그대가 설정해 놓고 있는 전제를 모두 내려놓으시오. “이것만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그 마지막 하나를 내려놓아보시오.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될 것이며, 그대가 “이것만은” 이라며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그 놈이 바로 우상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오.

그대는 말하였소.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통해야만” 한다고. 또한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석된 성경의 이해 속에 있다”고 말이오. 결국 계시와 성경이 남는구려.

보수적인 신학교를 나왔으면서도 교회개혁을 위해 일하는 그대의 비교적 열린 신앙과 삶에 대해 한편으로는 존경심이 들면서도, 결국 골수 개신교 목사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그대의 논지를 살펴보며, 참으로 한국 교회가 갈 길이 멀다는 실망감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요.

그대의 논지에는 마치 “계시는 기독교에만 존재한다” 혹은 “일반 계시는 세상에 편재할 수 있으나 특수계시는 오직 기독교의 것이다” 라는 전제가 있는 듯 하오. 그 전제를 붙들고 있는 한, 그대 역시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교리적 독선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할 것이요.

하느님의 은총과 계시를 기독교 안에 가두지 마시오. 그 분의 은총과 자비와 계시는 (우리 기독교 용어로) “그가 창조하고 섭리하는 곳 그 어디에나” 나타나 있소. ‘계시’란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뜻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오. 그 ‘감추인 것’은 교리의 틀에 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와 비움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며 참다운 영성을 통해 만나지는 것이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를 참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비움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오. 모든 전제를 부정하고 교리의 틀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오. ‘하느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교리적 전제는 물론, ‘하느님은 인격적인 분’이라든가 ‘전지전능하다’는 신학적 전제, 심지어는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영성적 전제까지 내려놓고 비우지 않고는 하느님의 궁극 계시와 만날 수 없을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라고 하였소. 맞는 말이오. 하느님은 그대나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은 이런 분”이라고 단정하거나, “이렇게 믿어야만 한다”고 함부로 규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대는 ‘하느님은 인격’이라고 하였소. 그러나 그런 전제까지도 내려놓는게 어떻겠소? 그 전제에 매이면 자칫 하느님의 존재의 차원을 사람의 수준으로 깍아내릴 수 있기 때문이오. 그 전제에 매인 착한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은 사람을 심판하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착한(?) 결론을 내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소.

그러나 조아무개 목사의 망언대로, 철없는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려댔다는 이유로 ‘곰을 보내 수십명씩 찢어죽이는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을 넘어 기독교인 전체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대 생각은 어떻소? 이런 말이 있소. “말이 신을 믿는다면 그 신은 말을 닮았을 것이다.”

하느님을 놓아주시오. 우리가 ‘인격’이라는 말을 신에 대입하는 순간, 하느님은 우리가 규정한 그 ‘인격’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이오. 엄밀히 말하여 하느님은 ‘인격’을 가진 분이 아니라 ‘하느님격’을 가진 분이며,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초인격적인 그 무엇’이오. 인격의 범위와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말이외다.

그러니 앞으로는 ‘하느님은 인격’이라는 전제도 돌파해 보시오. ‘하느님은 누구신가?(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느님은 무엇인가?(What is God?)’라고도 물어보시오. 그러면 하느님을 더욱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신성의 신비와 독특성을 우리의 경험과 논리, 교리로 설명하려다 보니 ‘인격’이라는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소. 그 분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인격’이나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적절하고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 용어를 절대화하게 되면, 하느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안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이오.

그래서 불교에서는, 개념이나 허상에 매이지 않고 실재를 바로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개념을 돌파하기 위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오. 선불교에서 말하는 ‘살부살조’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오. 깨달음에 방해가 되거든 부처도 죽이고 조사(선사)도 죽이라는 것이오. 이전에 “이것이 진리다”라고 규정했던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말고,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서 오로지 참에 이르라는 뜻이오.

우리 기독교에 부족한 것이 바로 그런 점이오. 매여서는 안될 개념과 규정에 매여 틀을 만들고, 그 틀 속에 우리의 신앙과 삶, 심지어 하느님까지 모두 구겨넣으려 하고 있소. 그러나 잔을 비우지 않고는 새 술을 담을 수 없소. 우리 기독교도 이제는 비우고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하오. 신과 그 섭리에 대해, 사람과 구원의 길에 대해 규정했던 모든 교리의 굴레와 전제를 돌파하고 뛰어넘지 않으면 21세기에 기독교는 살지 못할 것이오.

구목사! 차라리 성경을 찢어버리시오. 어찌 감히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쓰여진 기록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한단 말이오? 차라리 예수를 죽이시오. 그대가 믿는 예수는 어쩔 수 없이 ‘그대가 이해한 예수’일 수밖에 없으며, 물론 내가 믿는 예수 역시 ‘내가 이해한 예수’일 수밖에 없소.

그대가 규정한 예수, 내가 규정한 예수, 기독교 교리가 규정한 예수, 사도들이 규정하고 덧입힌 예수에 대한 교리를 모두 죽이지 않고는 우리는 참 예수를 만날 수 없소. 예수의 제자들이 덧입힌 옷, 사도 바울이 덧입힌 옷, 베드로가 덧입힌 옷을 모두 벗겨내야만 우리는 참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아니, 우리가 집착하는 예수 자체를 죽이지 않고는 참 예수를 만날 수 없을 것이오.

개혁적이고 열려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벽을 느낄 때가 있소. 이웃종교를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열린 기독교인들조차 ‘기독교의 절대성’이라는 교리적 전제를 내려놓지 못하고, 그 절대성에 대한 확신이 (어쩔 수 없는 논리적 귀결로) 이웃종교를 상대적이며 열등한 것으로 깍아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때요.

‘기독교’라는 ‘신념체계’는 틀이며 그릇일 뿐이요. 그 틀이라는 ‘수단’에 매이지 말고 ‘본질’을 보시오. 그릇(기독교 교리)을 씹지 말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생명과 사랑, 자유와 환희, 진리와 정의,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본질적 가치를 통해 완성되어가는 ‘참사람’을 보시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오.

“기독교는 개혁되어야 하지만 ‘기독교의 절대성’은 놓아서는 안된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이다. “이웃종교도 훌륭하지만, 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이오. 이른바 포용주의(Inclucivism)인데, 바로 그런 교리적 한계 때문에, 나는 기독교는 근본 교리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이오.

포용주의의 중심 개념이, 칼 라너에 의해 정립된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에 있음을 잘 알 것이오. 참으로 그럴듯한 논리요. “부처님도 구원받을 수 있고, 착하게 살아간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 왜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는 너무나 크고 넓어,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 사람에게는,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모른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없더라도, ‘이름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어 그의 피로 구속해주신다”는 논리가 되겠소.

칼 라너의 개념을 사용하여 그런 논리를 펴던 기독교 학자의 강변에 어떤 힌두교 학자는 이렇게 반박했소.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당신들을 ‘익명의 힌두교인’이라고 부르겠다.” 그릇을 깨뜨리지 않는 한, 기독교 교리의 열등함과 원시성에서 벗어날 길은 요원하오.

기독교인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소. ‘하느님은 절대적 존재’라고 설정해 놓고는, ‘그러니까 기독교도 절대적’이라고 연결짓고 있소. ‘하느님은 절대적’이라는 설정 역시 개념의 굴레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절대성’이지 ‘기독교의 절대성’이 아니요. 하느님이 절대적이라고 해서 어떻게 그것이 ‘기독교의 절대성’이 된다는 말이오?

내가 다원주의 신학을 수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오. 다원주의는 기독교만이 하느님의 계시를 독점한다는 ‘계시의 절대성’에 집착하지 않소. “다른 종교, 다른 문화도 훌륭하지만 결국은 기독교”라는 생각은 그대가 말하는 ‘계시’와 ‘성경’에 근거하고 있지만, 백번을 양보하여 하느님께서 기독교에만 계시를 온전히 내려주셨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을 기록했다는 성경은 ‘계시를 담은 그릇’에 불과하오. 그 ‘그릇을 씹는 것’과 ‘하느님의 계시를 깨닫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소.

그대와 내가 벌인 논쟁도 각자의 신념일 뿐이오. 어느 누가 절대 진리를 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인생 40~50년 살면서 각자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나누고 고백한 것 뿐이오. 그러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는 자기고백적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야지 “이건 반드시 이렇다” 혹은 “누구나 이렇게 믿어야 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일이 아니겠소?

내가 가슴아프게 기억하는 안티기독교인의 호소를 그대에게 소개하고 싶소. “기독교인들아, 당신들이 얼굴에 똥칠을 하고 똥을 먹고 살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제발,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강요하지 말아 달라.”

‘예수천국 불신지옥’도 좋고, ‘기독교의 절대성’도 좋고, 다 좋소. 그러나 제발, 모든 사람이 그 신념체계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그래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고집부리는 골수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성에 거름을 주지는 말았으면 좋겠소.

앞서 말했듯이, 그대는 비교적 열린 신앙과 신학을 갖고 있소.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그대만 같아도 좋겠소.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 보시오. 그대가 개혁하려는 것이 무엇이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를 그대로 두고 무엇을 개혁할 수 있다는 말이오?

윤리적인 개혁도 좋고 제도적인 개혁도 좋소. 그러나 기독교가 진정으로 개혁해야 할 것은 윤리적인 것도, 제도적인 것도 아니요. 개혁의 중심 대상은 바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에 있소. 혹자는 묻더이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부정한다면 기독교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고.

그러기에 아무 것에도 매이지 말라는 것이오. 기독교가 태생적으로 잘못되었다면 차라리 소멸되는게 낫지 않겠소? 본 훼퍼 목사는 말했소. “예수님이 진정 원하신 것은 종교가 아니라 삶이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종교가 되지 못하고, 끝없는 갈등을 심는 종교라면 차라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게 낫지 않겠소?

다시 말하지만, “이것만은 내려놓을 수 없다”는 전제가 있는 한, 진정한 개혁은 불가능하오. 자신이 송두리째 무너질 각오까지 하지 않는 한, 버리지 못하는 그 전제에 의해 끊임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오.

도덕성 회복 운동으로 한국 교회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도덕성 문제는 표피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대형교회 목회자의 재정적 비리나 도덕적 탈선이 개인의 도덕성과 무관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도덕적 긴장에서 해체되도록 만든 보다 깊은 원인을 찾아보면 역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에 닿아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오.

한국교회의 미래는 30~40대 젊은 목회자들인 그대들에게 달려 있소. 나 역시 이제 갓 오십 줄에 접어든 (내 생각에 아직은) 젊은 나이이고, 할 일이 태산같이 남아있지만, 진정 세상을 밝히는 빛과 소금으로 거듭나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해야 할 한국 교회의 미래는, 더욱 젊은 그대들 손에 달려있다 할 수 있겠소.

교회가 “이전에 규정해 놓은” 모든 틀로부터 자유하시오. 그대의 마음과 양심을 통해, 이성과 분별력을 통해 자유롭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시오. ‘종이에 기록된 말씀’은 그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왜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우리의 ‘마음 안에서 직접 하시는 말씀’은 소홀히 여기는 것이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를 그대로 두고는, 아무리 개혁을 외치더라도 한계가 있을 것이요. 지성인들로부터 멸시와 조소를 받는 ‘반이성적이고 폭력적이며 열등한 종교’가 아니라, 진정 이 시대와 사회의 존경을 받는 건강한 한국교회로 거듭날 때까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봅시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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