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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놔두고 죽 퍼먹는 교회구약으로 역주행하는 한국교회
신성남  |  canavillage@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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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05월 07일 (월) 11:22:03
최종편집 : 2016년 03월 06일 (일) 16:21:59 [조회수 : 5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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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시는 진실한 목회자들이 아주 많이 계십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지금 크게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별로 순수하지 못한 인사들이 속된 수단을 동원하여 부끄러운 인맥을 형성하고 여러 교단의 교권을 뿌리 깊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교권주의자들이 심한 월권으로 중앙선을 넘나들며 가슴을 졸이게 하더니, 요즘은 아예 한국교회를 구약 시대로 역주행시키고 있다는 자괴심마저 듭니다. 그 증거는 자명합니다. 시대착오적인 율법 중심, 성전 중심, 그리고 제사장 중심 사상이 한국교회에 전방위적으로 확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리상 스스로 율법 중심이라고 자인하는 교단은 하나도 없습니다. 겉으로는 복음, 십자가, 은혜, 그리고 만인 제사장을 노래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겉과 속이 많이 다릅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구약 율법의 참된 정신과 제도를 왜곡하여 백성을 억압하며 사욕을 취하던 바리새인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율법 중심

세계 유일의 한국형 십일조가 그런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는 명백히 복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율법의 무거운 짐입니다. 만일 어떤 특정 개인이 자율적으로 십일조를 한다면 이를 구태여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신도들에게 일률적으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분명히 큰 오류입니다.

하여튼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거나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하라고 강조합니다만, 사실은 하나님께 '거저 받은 은혜'를 율법의 십일조로 보암직하게 포장하여 순진한 신도들에게 아주 비싸게 팔고 있는 셈입니다.

율법의 중심축이었던 제사, 안식일, 그리고 할례를 모두 폐기한 한국교회가 왜 유독 십일조만은 이리 집착할까요. 그래도 마지막 남은 양심의 찌꺼기와 좁쌀만 한 체면 때문에 '돈이 된다'라는 솔직한 고백은 차마 못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십일조 없이 교회를 건강하게 잘 운영하고 있는 전 세계 교회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우리 피조물들로부터 돈을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다만 성도들이 물질을 서로 나누며 이웃 사랑을 직접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집이 부족하신가요, 아니면 재물이 부족하실까요. 돈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은 오직 교회 내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종교 업자들뿐입니다.

선교나 건축을 위해 십일조가 필요하다는 변명 또한 매우 부적절합니다. 구약에 제정된 십일조의 본래 용도는 결코 선교나 건축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몫입니다.

아울러 마치 이방 종교처럼 무엇을 '바치라'는 말 또한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생물을 바치듯 바침을 강조하는 것은 구약 제사 시대의 율법적 사고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따라서 이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몸이 된 상태인데, 무엇을 따로 더 바치라는 것인지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그렇게 바치는 것을 좋아하신다면, 차라리 필요 이상으로 사치스러운 중대형 교회 목사들의 고급 승용차와 두둑한 재산부터 먼저 바치시기를 권면합니다. 자신들은 호의호식하면서 생활고에 지친 교인들에게 열심히 바치라고 설교하는 것은 지독한 기만이며 위선입니다.

은혜 시대인 신약의 가르침은 '바침'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하나님은 연보나 십일조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연보는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어 쓰는 것입니다. 십일조의 참된 정신 역시 바침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들에게 주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십일조의 정신'은 죽이고, 그 껍데기인 '십분의 일'만 살려 열심히 바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나누지는 않으면서 계속 바치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이 돈의 대부분은 교회의 거품 성장과 교회 사유화에 악용이 될 뿐 가난한 이웃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전 중심

언제부터인지 한국에서는 교회당이 슬그머니 성전으로 둔갑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분히 사이비성이 있던 어느 교단에서 애용되던 이 기만적 호칭에 요즘은 소위 정통 보수라는 교단들마저 노골적으로 가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당 건물을 성전이라 하며 신성시하는 신앙 역시 극히 구약적인 사고에서 비롯됩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인 신자들 자신이 성전이라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울 만큼 배웠다는 목회자들이 단체로 합심하여 단지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인 교회당 건물을 거룩한 성전이라고 오도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장소 어느 건물에서 예배를 하던 그것은 단지 모임을 위한 처소일 뿐 성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장식된 건물 속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마음속에 직접 임재하십니다. 강단 역시 그저 설교의 편리상 세운 단이지 구약의 성스러운 제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빈말이라도 교회당이나 강단을 성전이니 제단이니 하며 함부로 호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무분별한 언사는 기독교의 무속화 또는 미신화를 촉진하고 다만 교권주의자들을 즐겁게 할 뿐입니다.

게다가 근자에는 교회당 부지를 '거룩한 땅'이라고 하며 십자가에 붉은 리본을 줄줄이 달아 마치 성황당처럼 차려 놓고 무속적 '땅 밟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는 지나가던 선무당이 다 비웃을 일입니다. 하여튼 한국의 일부 교회들은 성경에 시키지 않은 희한하고 기발한 일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에 아주 도가 텄습니다.

'건물 신앙'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성전이라는 '거룩하고 신성한 이미지'를 기복 신앙에 접합하여 신도들을 일단 감동시키고 이를 인위적인 교세 확장에 이용하려는 잔 수에서 출발합니다. 성장과 전도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런 통속적 수법의 배후에는 단지 '교회 사유화'라는 음흉한 욕망이 자라고 있을 뿐입니다.

강남의 어느 대형 교회가 성전이라는 미명으로 수천억 원의 초대형 건물을 지으며 당당하게 준비한 핑계가 '협소'해서라고 합니다. 또한 이미 충분히 큰 다른 대형 교회들도 같은 이유로 틈만 나면 계속 초대형 증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훈련된 제자들을 다른 지역에 흩어 파송하지 않고 암탉이 병아리 품 듯 끼고 있으니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비만한 모양이 된 것이 아닙니까. 들어오는 물길만이 있고 나가는 물길이 없으니 소금 덩어리 사해 바다처럼 그렇게 기형적인 모습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흩어져야 할 소금이 대형 창고에 재고품처럼 쌓여 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들은 일꾼이 너무 없어 날마다 울고 있는데, 훈련된 제자가 넘치는 대형 교회들은 이를 외면하고 고작 하는 말이 교회당이 협소해서 불편하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변변한 초막 하나 없는 야산이나 광야에서도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수도 없이 도살하며 키운 그 육식 공룡 같은 건물이 그리도 자랑스럽습니까. 유럽의 교회들이 과연 대형 건물이 없어서 그처럼 몰락했을까요. 우리는 큰 건물 헤롯 성전을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의 종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사장 중심

목사의 제사장화 또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전통이 되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 사제직을 폐하고 신설한 목사직이 교회의 삼권을 흔들며 사제보다 더욱 강력한 제사장적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 개신교만은 종교개혁을 거꾸로 한 느낌입니다.

중세 사제는 그나마 로마 추기경이나 교황의 통제라도 받았지만, 한국 중대형 교회 목사들의 월권은 누구도 쉽게 못 말립니다. 당회는 어용화되기 일쑤이고 많은 경우 노회, 연회, 그리고 총회 역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오히려 개 교회 목사의 부정을 비호해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재와 게는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목사 제사장화의 절정은 '교회 세습'입니다. 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대를 이어 담임목사직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제사장 직분과 전혀 다른 목사들이 제사장의 권위를 새치기하여 다른 직분보다 더 특별한 특한을 누리려 하는 데에 있습니다.

구약 율법은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보다 더욱 위대합니다. 구약의 십일조 또한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가르쳐 준 자발적 연보는 그 보다 더더욱 좋은 것입니다. 즉 성경의 진리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시되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약시대보다 더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구태여 그보다 못한 것에 집착해야 하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장성한 성도들에게 밥을 주셨는데, 한국교회는 왜 구태여 계속 죽을 먹겠다고 하는지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죽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장성한 후에도 여전히 죽만 먹는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장한 신도들에게 죽을 먹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제자 훈련은 열심히 하는데 훈련된 제자를 품에 안고 쉽게 놓아 주지를 않습니다. 이제 성장을 했으면 나가서 일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예배당 바닥에 모여 앉아 어리광 부리며 해마다 돌잔치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대착오적 역주행을 멈추어야

이 세상에 우리 신자들 외에 감히 성전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란 절대로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구약의 율법과 관습으로 신도들을 얽매어서는 안 됩니다. 큰 건물을 짓고 세속적 복을 구하던 것은 구약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이미 넘치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다고 설교 때마다 복을 노래하며 남은 인생을 기복에 몰입해야 할까요. 이는 밥 놔두고 죽 퍼먹는 격입니다. 만일 육신을 위한 복이 그리도 중요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닌 로마 황제의 아들로 오셨을 것입니다.

이제 직분자들은 더 이상의 거짓말과 역주행을 멈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구약 제사장 행세를 하거나 율법의 무거운 짐을 또다시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바리새인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 같은 행위는 죽통에 머리를 박는 어리석은 짓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십자가 사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샬롬!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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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61.170.250.87)
2012-05-08 18:31:01
모든 원인은 돈때문
인터넷 에 보면 한국교회 비판이 하늘을 찌른다
모는 원인은 목사들이 돈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들은 성경구절 이나 들이밀고 합리화 한다
정말 한국교회 목사들은 다단계 에서 지인들 유혹하여
물건 강매 하는 피라밋 조직원 보다더 가증스러운 인간들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이라고는 도저히 믿을수가 없다
하나님의 소명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고 ,양들을 돌보는 주의종으로 , 정말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돈을 벌려면 일을 하라 사기치지말고
리플달기
17 1
익명 (211.253.82.235)
2012-05-13 16:00:48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리플달기
7 0
질문 (72.196.235.211)
2012-05-13 16:55:13
선생님과 교인들이 그 교회의
실체를 뻔히 알면서도 못 떠나시는
이유를 알고 싶군요.
리플달기
2 3
유러피언 (65.49.14.47)
2012-05-13 08:59:01
십일조는 폐지됐다
십일조가 없으면 교회 재정은 어떻하냐는 불평은 어리석은 말들이고 돈의 위력에 빠져버린 생각입니다. 먹고 살려고 목사 합니까? 교회에 헌금이 부족해서 가난해지는 상황이 두렵다면 애초부터 목사를 하지 말고 사업을 해서 먹고 살았어야죠. 노동은 하기 싫고, 그저 말로 설교하고, 교회 헌금(십일조)로 한평생 먹고 살려는 것이 소명받은 목사일까요?

평범한 사람들도 없으면 없는대로 아끼고 아껴서 가정을 꾸리고 먹고 살듯이, 교회도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검소하게 내핍하며 재정을 알뜰하게 꾸려나가면 됩니다. 꼭 교회건물짓고, 이것저것 프로그램을 돌리고, 승합차도 사고, 목사 차도 따로 뽑고, 다 하고 싶으니까 돈이 많이 필요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약에서 폐지된 십일조를 마치 지금도 진짜로 내야 하는 것처럼 설교해서 돈을 끌어모으려고 하죠.

유럽은 십일조가 없습니다. 유럽 성도들은 자기 가족과 협의해서 연초에 올해는 헌금을 얼마쯤 하겠다고 정합니다. 강제는 아니고, 자기 형편껏 할수 있는 만큼 교회에 헌금하기로 결정합니다.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중간에 형편이 어려워지면 헌금을 못내는 것이고, 그렇다고 눈총을 받거나 신앙이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습니다. 십일조 없이도 그렇게 모인 재정으로 목사 월급을 주고 다른 일에도 씁니다. 강제성이 없으니까 성도들이 자기 형편껏 기쁘게 내고 교회는 할 일을 다 하고 삽니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하면 됩니다. 신약에 폐지된 십일조를 여지껏 강요해서 성도들을 힘들게 하고 상처주고... 말로는 자발적이라 하죠. 하지만 그게 그런가요? 십일조를 안하고도 교회에서 자기 소신을 피력하거나 직분을 받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는 교활하게 강제적으로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죠. 설교로는 축복과 저주라는 명목으로 은밀하게 협박하고, 교회행정으로는 직분을 안주거나 신앙이 유아적인 자로 은밀히 평가해서 사람 마음에 상처를 주죠. 가난한 성도도 십일조를 내라고 설교해서 그렇게 모인 십일조로 쓸데없이 낭비하고 목사 월급부터 올리죠.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목사 월급부터 올리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예배당건축을 무리하게 추진해서 아까운 이자만 엄청 나가는 일도 많답니다.. 차라리 예배당을 무리해서 짓지 않았다면 그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겠죠. 꼭 토지를 매입해서 예배당건물을 지으려니까 무리하게 돈을 강요해야하고, 헌금을 걷는 중요한 수단이 십일조인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죠. 목사가 풍족하게 먹고 살고 싶으니까 성도들에게 ‘현재’를 희생해 헌금을 내서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설교하는데, 정작 성도들의 희생으로 그렇게 모인 피와 땀이 배인 헌금으로 목사는 자신의 ‘현재’를 풍족하게 삽니다.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지요.

더이상 십일조는 없습니다. 연보만 있습니다. 연보는 성도들이 나누는 겁니다. 마음에 정한 액수대로 형편껏 연보를 내서 사역자에게 검소한 생활비를 주고, 고난을 겪는 다른 성도들을 돕고 선교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엉뚱하게 인용해서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구약 제사장제도, 제사, 십일조, 각종 규례, 건물성전(구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기 전까지만 유효한 제도였고, 율법에 나와있죠. 구약 율법은 나중에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다 이루심으로써 저런 율법들은 폐지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써, 화목제물로써, 율법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히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제 구약 율법은 신약성도에게 구속력이 사라졌고 폐지된 것입니다. 이제는 제사장이 제물의 각을 떠서 태우고 먹는 일,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구약건물성전도 무너져서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성령님의 성전입니다. 벽돌에 시멘트 발라서 높이 올리는 건물은 성전이 아니죠. 그건 시멘트 덩어리, 벽돌 덩어리, 비바람 피하는 건물에 불과하죠. 구약 시대에 성전에 함부로 들어가면 저주 받아 죽었는데, 요즘 목사들이 성전이라고 우기는 교회건물에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잡상인까지 불쑥불쑥 들어가죠. 과연 요즘 교회건물이 ‘성전’인가요? 이런 사기를 치면 안되죠.

이런 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나님만 섬겨라...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도 율법인데 이런 율법은 여전히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신약시대에도 도덕법(율법)을 지키고 살아야죠. 도덕법(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아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 성도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성도들이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사는 방법으로 도덕법(율법)이 필요한 것이죠. 구약에서 저런 도덕법에 해당되는 많은 법들은 여전히 신약 성도들이 존중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많지만, 구약의 의식법, 제사법, 시민법에 해당하는 율법들은 이미 신약 시대에 구속력이 없어졌고, 제사제도도 사라졌으니까 의식법과 제사제도에 부록처럼 딸려있던 구약 십일조도 이제는 구속력이 없고, 사라졌습니다.

신약에서 사도들은 연보를 말할 뿐입니다. 연보를 말하면서 어려운 성도들과 사역자를 도우라고 하죠.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목사(교역자)에게 월급을 주지만, 저는 교회를 위해 열심히 사역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소정의 봉사료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집사나 장로가 일정기간 교회에 몸 바쳐 희생적으로 아주 열심히 일했다면 그 기간에 해당하는 봉사료를 교회가 집사, 장로에게 지급할 수도 있겠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역자입니다. 목사만 사역자가 아니고, 집사, 장로들도 교회에 상당히 봉사할때는 교회가 봉사료를 지급해야 합니다. 사역자는 목사와 장로, 집사, 또는 열심히 일한 직분 없는 성도들을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사역자에 대한 봉사료 지급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찰집사도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교회가 월급을 주던데, 봉사에 대한 댓가죠.

십일조는 폐지됐습니다. 이걸 인정해야죠. 십일조가 사라지면 내심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지 걱정돼서 계속 십일조를 붙들고 있는 분들은 목사직분을 내려놓고 사업을 하시거나 노점상이라도 해서 정직하게 땀흘려 먹고 살면 됩니다. 이제는 사라진 십일조를 마치 내야 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서, 궤변을 짜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짓은 멈추세요.

만약에 구원 받는 방법이 아니라 그냥 신앙의 유익을 얻기 위해 오늘날도 할례를 하자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할례는 폐지됐으니까요. 할례는 구약 백성들의 언약의 표였을 뿐, 한시적인 것이었고, 지금은 구속력이 사라져서 아무도 신앙 차원에서는 안하니까요. 이런 할례는 더 이상 하면 안되는데 할례보다 덜 중요했던 십일조는 악착같이 지키라고 강요하는 이유가 뭡니까? 돈이라서 그렇겠죠? 할례는 생식기 껍데기만 남지만, 십일조는 빵빵한 현찰이 남기 때문이죠. 구약 율법에서 아주 중요했던 할례는 목사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도 할례보다 덜 중요했던 십일조에는 눈에 불을 켜고 관심을 갖는 거겠죠.

이미 구속력이 사라진 것에 불과한 십일조를 신약에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분들께서는 구약 율법 중 일부가 폐하여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 아직도 구약 율법 전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혹시 아래 율법은 여전히 오늘도 지키고 있습니까?

오늘날도 새색시가 숫처녀가 아니면 장인 앞에서 돌로 찍어 죽입니까? 오늘날도 유출하는 아내와 몸이 닿거나 유출하는 아내가 앉은 자리에 남편도 앉으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합니까? 여전히 동물 기름 안먹고 선지 해장국 안먹습니까? 토끼, 돼지고기 안먹습니까? 구레나룻을 밀지 않고 길러서 다닙니까?

*남자는 결혼한 여자가 숫처녀가 아니면 친정집 문 앞에 끌어내서 돌로 쳐 죽이라.
*새신랑은 1년동안 집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 기간 동안 새신랑은 모든 의무에서 자유롭다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해야하고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
*안식일에 불을 피워서는 안된다
*짐승에게 짐을 싣거나 내릴 때 도와줘야 한다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

이것외에도 많은데 일단 이것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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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0
Picky (24.60.52.23)
2012-05-13 11:35:17
끝부분에 가서 재미있는 율법의 규례를 적으셨네요.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에서는 이 규례들이 왜 주어졌는제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지요.

이 중에 마지막 두 개의 규례는 참으로 흥미로운 것입니다.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야 한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

지붕에 난간을 만드는 것과 옷감을 만드는 이 두개의 규례가 도대체 왜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문명히 영을 위한 책이라고 했는데 이 집짓는 것과 옷감 짜는 게 도대체 영과 무슨 상관이죠?

팔레스타인 지방의 건축양식을 보면 지붕에 난간이 있는 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양털과 베실로 옷감을 짜는 바보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라고 해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규례가 왜 있을까요?

제 눈에는 이 두 개의 규례가 율법에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보이는데.

혹시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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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
유러피언 (65.49.14.47)
2012-05-13 17:10:12
이스라엘 지붕
고대 이스라엘 지방의 지붕은 평평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쉽게 올라갈수 있었다네요. 지붕에서 여름에 잠을 자거나 곡식을 저장해놓거나 기도하는 장소로도 썼다고 합니다. 사람이 올라가서 자주 활동하는 곳이니 당연히 난간을 설치해야 안전했겠지요. 누군가 지붕에서 떨어져서 피흘려 죽게 되면 안되니까요. 피흘림의 죄가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말이죠.(신22:8)

왕궁에는 떨어져서 죽거나 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물이 설치됐다고도 합니다.

Picky님이 이소리 저소리로 일관성 없이 갖다붙이는 주관적 해석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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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박평일 (72.196.235.211)
2012-05-13 11:20:48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당당뉴스에 실린 신성남씨 글들을 무척 좋아합니다.
제가 교회에 나가면서 느꼈던 문제점들을
대신해서 이야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선생님의 글마다 주제넘게 댓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문제들이기도 하고요.

저는 몇 해 전부터 미국인들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교회도 나름대로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내눈에는).
그러나 헌금문제만큼은 내가 다녔던 교회들과 아주 다릅니다.
그이유는, 우선 목사가 헌금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신도들이 내가 다녔던 한인교회 신도들과는
신앙관이 다릅니다.

교회에 나가는 목적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범사에 감사하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지,
헌금를 많이 해서 록펠러 처럼 부자가 된다든지
출세를 하겠다는 등, 터무니 없는 미신적 축복론에
젖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면에서 오늘날 한국교회들 문제의
일차적인 책임이 신도들에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만일, 일반신도들이 그렇게 타락한 교회들을
외면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교회들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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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5.211)
2012-05-10 22:45:32
저는 성경지식이 짧은 사람입니다.
대신,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댓글로 달지요.

몇년전에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중북부 한 도시에 동창회 모임차 며칠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주일날 친구가 몇십년째 열심히 나가고 있는 교회의
주일예배에 함께 참석했습니다.
체육관까지 갖추고 있는 아주 아름다운 교회건물을
자체교회로 가지고 있는 중형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몇년째 담임목사가 없이 타교회 목사님들을
주일마다 강사로 초빙해서 예배를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운영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유를 친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교회가 지난 수년동안 두파로 갈라져서
심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편에서 목사를 초빙하면
다른 한편에서 트집을 잡아서 쫓겨 내고, 또 다른
한편에서 다른 목사를 초빙하면 다른 한편에서 쫒겨내고..
몇년째 그런 싸움을 되풀이 하고 있었습니다..

몇주 후에 저에게 한통의 이메일이 그 친구로부터
날라들어 왔습니다.
새로운 담임목사 초빙을 앞두고 두파가 서로 싸우고
있는데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며칠 후에 있을 공동회의 투표 전에 신도들에게 돌릴
자기편 주장을 담은 격문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수정, 보완을 부탁했습니다.

글을 대충 읽어 보았습니다.
목사, 장로들의 비리, 금전적인 의혹, 성직자의
여자문제등....내용이 흔이 들어 온 교회 비리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메일을 컴퓨터에서 지워버린 후,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
"그 교회에 나가면 행복하느냐 " 고 물었습니다.
그는,
" 다른 놈들이 꼴보기 싫어 전혀 행복하지 않다 " 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나가는 교회를 바꾸 던지
마음 맞은 분들과 힘을 모아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느냐 " 고 권했습니다.
그는,
" 우리들이 그동안 어떤 온갖 고생을 해서
힘들게 장만한 교회건물인 데 우리들에게 포기하라고 하느냐 " 고
은근히 불쾌해 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건물을 당신들이 지키든, 떠나든
직접적으로 개인적 재산상 피해가 있느냐 " 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런 개인적인 피해는 전혀 없다" 고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나같으면 개인적인 재산도 아닌데
교회건물에 집착하지 않고 미련없이 떠나겠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서 교회를 나가면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고 미워하는 감정, 증오심으로 불행을 느낀다면
굳이 그 교회에 나갈 필요가 있겠느냐 ?
내경험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으려다가
오히려 내 자신의 신앙을 망치고 말더라.
그것은 빈대 한마리를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불태우는 것과 같은 바보 짓이다 " 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 교회는 아직도 두파로 갈라져서
서로 불행을 교환하며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리플달기
3 0
Picky (24.60.52.23)
2012-05-10 14:43:36
신성남님,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에 동의를 한다고 따로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봅니다.

한국 교회의 현대식 율법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저는 그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입이 아프게 십일조는 잘못된 율법주의적 행위라고 더 이상 떠들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니 목사의 권위니 하는 것도 말할 필요도 없구요.

하지만 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님의 글을 읽고 두 가지 견해를 말씀드립니다.

첫번째는 제목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죽 퍼먹이는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가 독초를 먹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무른 음식을 먹는 단계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단계로 나아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는 무른 음식은 커녕 처음부터 독초만 잔뜩 먹이고 있는 셈이죠. 죽이라도 먹였으면 비실비실할 망정 개독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죠.

이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저의 글을 읽으시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두번 째는 구약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님의 글을 읽다보니 구약의 율법이 이제는 복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부분이 있고 또 댓글을 쓰신 분 가운데에는 구약의 율법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서 제가 좀 저 나름대로의 이해를 적어볼까 합니다.

제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이해하고 구약의 율법과 그 율법을 이은 복음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매우 기초적인 질문을 가지고 이 문제를 접근해 봅시다.

예수는 분명히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온전케함 혹 완성이라고 보통 말하죠. 그런데 님께서 인용한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은 이제는 폐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예수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는 말을 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모순이죠.그러나 모순이 아니기도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렇게 때로는 분명하지 않게 보이는 성경의 구절들을 가지고 필요에 따라 이런 저런 해석을 하면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변하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먼저 명확하면 아런 저런 긴 설명이 필요 없게 됩니다.

정작 모순은 인간의 잘못된 이해이지 성경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것은 율법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복음의 준행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말하는 율법이란 것이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서 눈에 보이는 율법이 아니란 것을 먼저 이해하셔야 합니다. 율법을 종교내의 행위적 제도로 이해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종교로서의 제도적인 장치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율법이란 제도적인 행위의 규범으로 이해하고 있는 히브리인을 대상으로 말하기 때문에 폐하여졌다고 말하는 것이고 예수는 율법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가지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는(유대인들은) 폐하려 온줄 알거니와 온전케하려 (본질적 의미를 온전케하여)"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이 문장을 가지고 율법에 대하여 말하지만 여기서 대부분 간과하는 것이 바로 선지자에 관한 말입니다. 예수는 율법뿐만 아니라 선지자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이 문장외에는 선지자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어떻게 된 것이죠? 이 또한 율법과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가 구약에서 자신의 백성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냅니다. 즉, 선지자의 역할은 대변인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예수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바로 제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구요.

성경에 대한 이 모든 부적절한 이해는 구약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구약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한 책으로 보는 견해에서부터 잘못된 것이죠.

성경은 분명히 영을 살리는 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교 혹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적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해석입니다. 고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구약의 사건들 대부분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소재로 한 개인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역사에 관련된 내용이 마치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처럼 보일 뿐입니다. 노아의 홍수나, 출애굽 사건이나, 요셉의 총리통치의 역사나, 가나안 점령 사건이나, 아멜렉과의 전쟁이나, 솔로몬의 찬란한 왕국이나, 에디오피아의 시바의 여왕이나, 갑자기 성경에서조차 사라진 법궤나, 다니엘의 이야기와 같은 모든 구약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아직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도 70년이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실제로는 70년이 조금 넘습니다. 그 이유도 70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가지고 이야기 하기 때문이고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가 유난히도 많이 나타나는 이유도 고대인이 지니고 있던 숫자를 통한 상징적 의미의 부각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고대 중근동의 셈족의 언어에 대한 언어학적 이해가 당시에 히브리어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고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율법은 사회의 제도와 도덕성 두 가지를 동시에 강조하기 위한 법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유대사회의 제도적 법율이지만 그 내면적으로는 영적 구원의 원리를 내포하며 구원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례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할례뿐만 아니라 십계명도 구약에만 있는 율법이 아닙니다. 구약이 나타나기 500년 전에 수메르에서도 십계명과 거의 동일한 계명이 있었음을 고고학적 발굴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례가 그 당시의 문화에 율법적인 관습으로 준립하게 된 이유는 그 행위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남성의 성기의 표피를 자르는 행위입니다. 이런 행위말고도 다른 행위가 가능할텐데 당시 사람들이 할례를 정결의 기준으로 삼은 이유는 그 당시 고대인들이 지니고 있던 성에 대한 개념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성관계를 남녀간의 동물적 본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정복의 의미로 성관계를 이해하였습니다. 특히 서구인의 경우에는 그런 사고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남성우월주의가 나타났다고 보는 학자도 많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정복한다는 말의 유래가 바로 그런 이유때문입니다.

고대에 미동을 대상으로 남색이 유행하던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정복력을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할례라는 행위가 발생이 됩니다. 종교적인 세력의 확산이죠. 그런데 이것은 단지 전쟁과 같은 영토의 확산과는 달리 순수함이 요구되는 종교적 세력의 확산이기 때문에 정결함이 필요하고 따라서 남성의 성기의 표피를 잘라 불순물을 제거하는 의미를 정결함으로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제사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련된 송아지를 잡는다든지 곡식을 잘게 빠는다는든지 하는 구체적인 행위의 규례에도 다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매우 논리적이기도 하지만 현대의 기독교에서는 전혀 다루지 못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간단히 소제와 같이 곡식을 가루로 빻는 부분만 설명을 드립니다. 소제에서 곡식을 빻아 제사를 드리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곡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빻는 이유는 아직은 하나님의 단단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는 자들이 그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즉 말씀을 잘 설명하여서 나누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고운 밀가루 세아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이유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무교병은 곡식을 잘 빻아 곱게 가루를 만든 뒤에 효소를 넣지 않고 불에 구운 빵입니다. 효소란 밀가루를 부풀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문인 인간의 생각을 넣어 부풀렸다는 의미입니다.

유월절에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짚고 무교병을 먹으라는 명령은 그 하나 하나에 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은 말씀의 중심이 되는 허리에 힘을 주는 말씀인 띠를 가지라는 말이고 지팡이를 가지고 먹으라는 말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혼자가 아닌 동역자와 함께 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제자를 보낼 때에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한 모든 이야기는 구약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이미 사라진 율법 혹, 복음으로 대치된 종교적 율법이 있는 책으로 보면 안됩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모든 핵심적 내용이 구약의 율법과 역사속에 숨어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을, 즉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구약속에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중에 히브리서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겠지만 히브리서는 구약의 율법 속에 함축된 구원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내용입니다.

간단히 말해 히브리서는 구약의 율법의 신약적 해석인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히브리서를 봅시다.

몇 개 안되는 님이 인용하신 구절 모두를 설명하는 것도 많은 양의 설명이 필요하니 몇 구절만 가지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제사 직분이 바뀌었다는 것은 율법이 바뀌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율법속의 제사의 본질적 의미가 이제는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수면 위로 모두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때마다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단번에 드리는 단회성의 영적 제사로 바뀌었다는 것이죠.

구약시대는 인간의 이성이 신약시대보다 훨씬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나타낸 것입니다. 제도적 행위를 반복적으로 행함으로 인해 그 행위가 함축하고 의미를 경험적으로 깨닫게 한 것입니다.

쉽게 맗해 우리가 어린 아이에게 예절의 중요성을 말하며 어른에게 인사하는 것의 의미부터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일단은 어른에게 인사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왜 우리는 인사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예법이라는 것이 사회에 왜 필요한지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왜 자기가 어려서부터 어른에게 인사를 하라고 배웠는지를 깨닫게 되죠.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의 내면적 의미를 알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인을 놓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 여년이 지난 신약 시대는 달랐죠. 인간사회의 지성의 수준이 변하고 이성적 사고의 능력이 증가하면서 구약의 율법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율법을 그대로 행한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죠. 우리가 어른이 되어 인사의 의미를 완전히 알고 있다고 해도 인사는 계속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문제는 유대교가 점점 종교화되어 율법의 본질적의미는 오히려 점점 깊이 감추어둔 채 표면적 행위만 가지고 종교화되고 부패하고 변질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지적하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인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행위의 죽은 법으로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율법을 온전케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 것이고 이 말에서 언급된 율법이란 율법에 내재하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지 표면적 행위를 규정하고 있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은 폐하여졌다고 말할 때에는 그 독자가 율법에 내재하고 있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표면적 행위의 규정으로 나타나는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율법이 바뀌었다는 말은 바로 이런 말입니다. 즉, 제도적인 율법의 규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원래 율법이 지니고 있던 본질적 의미가 이제는 완전하게 예수로 인해 공포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사 직분이 바뀌었다는 말은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속죄제를 행할 때에 그 행함의 의미를 알고 있고 백성은 단지 그 제사를 지내는 정도이었는데 이제는 예수가 개인 각각이 어떻게 영적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이 되었고 따라서 그 본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은 그 본질적 의미와 함께 영적인 제사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구약의 제사처럼 백성은 뭣도 모르고 제사장을 통해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그런 제사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이 말이 바로 위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림자란 실체가 드리우는 모습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그림자를 보고 그 그림자를 따라가서 실체를 찾았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한 거죠. 그들은 실체를 직접 보고 그 모습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의 영적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자를 통해 점진적으로 실체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인데 그림자를 실체로 알고 그 자리에 머물러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장차 올 일이란 그림자를 드리운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 주어질 때부터 이미 실체는 존재하였죠. 언젠가는 발견되어지리라는 예상과 함께 주어졌지만 그냥 그림자에만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늘 드리는 것 가지고는 온전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제사를 드린다고 온전케 될 수 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아무리 해마다 드려도 그것은 단지 그림자만 바라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여호와는 인간이 매년 제사를 드리면서 그 제사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인간이 깨닫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림자를 통해 점점 실체에 가까와지기를 바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장차 올 좋은 일'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장차 올 일'이 예수의 출현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유대인은 신약시대를 위한 들러리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질 때에는 이 '장차 올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주어졌지만 인간들이 그 길을 아예 막아버려서 예수가 온 것이죠.

결론을 말합니다.

율법은 그 모든 모든 조항을 다 행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하나도 행하지 않아도 그것을 다 지킬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전자의 경우는 계속하여 그림자만 보고 있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림자를 통하지 않고 실체를 보는 것이죠. 물론 율법도 행하고 그 본질적 의미를 마음에 새겨둔다면 그림자와 실체를 둘 다 보는 것이구요. 그래서 바울은 둘 다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요? 율법의 실체를 보여주나요? 그림자와 실체를 구분하지도 못하고 그것이 그림자인지 실체인지 완전히 소경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말하고 있죠. 그 실체 자체가 복음인데 반쪽짜리 예수가 보라고 하는 구약 속의 실체는 커녕 그것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그것이 어디 복음인가요?

그래서 독초를 먹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은 그냥 껍데기 뿐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의미하는 영적 제사에 대하여는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어서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십일조니 성전이니 혹 제사장과 같은 것들의 본질적인 영적 의미, 즉 실체를 모르면 백년을 떠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는 말을 가지고 십일조를 하라는 말로 우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가 하라는 말은 실체를 놓고 하는 말이지 그림자를 좇아가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하고자 하는 얘기입니다.
리플달기
3 3
박평일 (72.196.235.211)
2012-05-10 20:25:20
율법에 대한 글을 읽고 평소에 개인적인
의문점을 몇가지 말씀드리고 그 해답을 구하고져 합니다.

저는 솔직히 구약성경을 한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시편, 잠언, 전도서는 비교적 자주 읽는 편입니다.

구약을 읽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이유는 구약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거부감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혼돈스럽고
역겹기까지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첫째,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이란 성경말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그 말씀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두째, 예수가 말하는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 는
율법밖에 없다.

솔직히 오늘날 일반인들이 접하는 성경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인쇄술 발달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일반인들은 성경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전무했습니다. 신약성경의 경우, 예수사후에 쓰여진 것이니까
예수제자들도 구경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약에 예수가 성경책을 가지고 다녔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추측해 보면 예수자신도 구약 성경책을
한번도 접해보지 못했다는 가정이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한권의 책으로 묶어진 성경도 없었고)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율법은 누가 읽고,
누구를 위한 것들이었을까 ? 또, 일반신도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
구약에 나오는 율법이 없이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는가 ?
성경을 접하지 못했던 시대애 살았던 사람들이나,
성경보급이 되지 않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될수 없는가 ?
그렇다면 기독교는 성경지식에 기초한
관념적 철학이나 학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

저는 개인적으로 "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람하라" 는 예수말씀이
율법과 성경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
리플달기
3 0
Picky (24.60.52.23)
2012-05-11 08:50:04
님의 말씀 이해가 갑니다.
님께서 가지시는 구약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거부감도 이해가 갑니다.

사사기 끝에 보면 어떤 남자의 첩을 유대 사람들이 죽이고 그 시신을 열두 토막내는 살인사건이 있죠. 그런데 그 남편이란 작자는 그 토막난 시신을 전국에 보냅니다. 그리고는 이 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납니다.

롯의 딸들은 아버지와 돌아가면서 근친상간을 하고요.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구역질이 나는 것이 아니라 미친짓으로 가득하죠.

그런데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때에 구역질이 나는 것이죠.

구약은 종교적 경전입니다. 역사책이 아니죠. 그것을 역사책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구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라지게 됩니다. 기독교에 dispensationalism 이 들어오면서 이렇게 된 것이죠.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을 하기 위해 구약은 장황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두 창기를 놓고 송사를 처리하는 이야기가 솔로몬이 지혜가 있는 왕이었다는 역사를 말하려는 것일까요? 천만에요. 본래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창기에게 촛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엉뚱하게 솔로몬에게 촛점을 맞추니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죠.

아담이 동물들을 모아놓고 이름을 지어주는 내용이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이름의 유래에 관한 내용일까요?

절대 아니죠.

율법안에는 공의와 공평과 정직이 있고 그 원리에 따른 질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잘못 이해한 해석을 가지고 가르쳤기 때문에 재미없고 따분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에봇이 뭐 그리 영적으로 대단하게 중요한 문제라고 미주알 고주알 설명을 하겠습니까? 에봇을 만들 때에 금실 홍실로 옷감을 짜서 호마노 보석을 달고 어쩌구 하는 그 상세한 내용이 단지 에봇 만드는 방법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였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영을 살리기 위한 책이 아니죠. 에봇을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제사장이란 영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영적 자세를 하나 하나 자세히 상징적으로 설명을 하고있는 거죠.

역대상에 보면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에봇을 어떻게 만들라고 그렇게 자세히 가르쳤는데 제사장도 아닌 다윗이 베로 만든 에봇을 입다뇨? 말도 안되는 얘기죠. 베옷은 죽음을 깨달은 자가 입는 옷입니다. 인간은 항상 죽음을 인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구요, 그래서 전도서에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영적인 지도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에봇을 입어야 하지요. 그런데 다윗은 이미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자신은 이 세상에서는 죽음을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다고 말하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에봇이되 베로된 에봇인 것이죠.

예수든, 사도들이든 그들이 하는 모든 얘기는 구약을 근거로 나타난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은 구약에 기초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이후에 무엇 하나 가감된 것이 없습니다. 구약에 모든 핵심적 내용이 있다는 말이죠. 그 핵심이 들어가 있는 구약이라는 종교적 경전을 역사책으로 보기 때문에 알맹이 없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님께서 자주 읽으신다는 잠언과 전도서 그리고 추가로 욥기를 율법에 비추어 자세히 읽어보십시요. 뭔가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욥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가장 표본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성경 중 가장 오래된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모든 다른 성경의 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사법이나 정결법이나 공의와 공평과 정직의 논리나 모든 것이 욥기에 다 있습니다.

사무엘이나 역대기와 같은 책은 인간들이 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 어떻게 인간들이 반응하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역사서의 많은 왕들이 여호와 앞에 죄를 범하는 사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가 세워지고난 이후에 시간이 흐르면 순수함이 점점 사라지면서 변질된 종교로 전락하고 그러면 다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그래서 해 아래 새것이 없는 것이죠. 구약시대나 예수때나 중세나 종교개혁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선지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신의 뜻을 변질시키는 인간세계에 대한 경고이자 패악한 인간들이 어떻게 신의 뜻을 변질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똑 같습니다.

선지서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창세기만 보아도 이미 인간들이 하는 짓이 지금이나 그 때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탑의 사건이 가장 좋은 예죠.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 11장 전반부에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10장은 노아의 후손에 관한 족보이고 11장의 바벨탑 사건 뒤의 이야기도 노아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즉, 바벨탑 사건은 노아의 후손에 관한 족보가 나열되는 가운데 불쑥 튀어든다는 것이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아무리 고대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의 전개입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해가 갑니다.

바벨탑을 만들 때에 사람들은 하늘에 닿으려는 목적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즉, 종교적인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닿는다는 말은 신이 존재하는 하늘에 닿는다는 말이고 따라서 신의 뜻을 더 잘 알려고 노력을 경주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신앙적인 노력을 경주하기 이전의 상황을 성경은 설명합니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 이 문장은 10장의 족보의 나열과 바벨탑의 사건의 연결구라는 것이죠. 즉, 홍수 이후에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하여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이 가르친 말 그대로 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어가 하나이고 입에서 나오는 구음이 하나인 것이죠.

그런데 그들의 종교적 열정이 비뚫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노력을 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합니다. 이것이 바벨탑입니다. 비뚫어진 종교적 열정이 가지고 오는 비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갈라진 유래라고요? 천만에요. 성경이 그런 역사를 기록할 아무 이유가 없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종교의 경전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그들이 어떻게 허망한 짓을 하는 지를 자세히 보여주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들은 벽돌을 만들어 굽습니다. 그리고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을 대신하여 진흙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열정은 순수합니다. 그들은 지면에 흩어지지 않고 오직 하늘에 닿으려는 목적만 가지고 탑을 쌓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열정이 아니라 그들이 택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과 같이 단단합니다. 반석에서 자연적으로 갈라져 나온 것이 돌입니다. 하늘에 닿기 위해서는 돌로 성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에서 오랜 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역청을 가지고 그 돌들을 연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아는 역청을 사용했지요. 그런데 그들은 역청을 대신해서 진흙을 사용합니다. 진흙은 흙을 물에 개어서 만든 것입니다. 벽돌도 땅에 있는 흙을 물과 섞어서 반죽하여 불에 굽는 것입니다.

즉, 모든 피조물이 죽으면 돌아가는 흙을 가지고 하늘에 닿으려는 목적으로 탑을 쌓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의 생각과 철학과 사상과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변질시키기 시작한 것이죠.

하늘에 오르려면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인 돌을 가지고 그 돌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잘 연결이 되도록 역청으로 이어 나가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이리저리 얼기설기 나름대로의 논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무녀져 내립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니 장로교니, 감리교니, 천주교니, 개신교니 나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과 인류가 기독교를 통하여 보여준 역사 그대로입니다.

노아의 후손의 족보를 말하면서 인간 세계속 부패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고 계속하여 그 뒤의 족보가 나타납니다. 이게 인간 세계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들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것을 보면서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약이 보여주는 인간 세계의 모습은 너무도 리얼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구약을 좋아합니다.

저는 원래부터 구약을 보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읽을 때면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그 안의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분명히 아닐 것이라는 일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죠. 그리고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그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저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을 유대인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 하고 전통적으로 민족 종교를 통해 전해져 려오기 때문에 보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대인들 가운데 그 뜻을 바로 알 수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보존의 역사는 시작되었으리라는 것이 저의 짐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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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박평일 (72.196.235.211)
2012-05-11 20:40:32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구약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됩니다.

저도 구약 창세기에서 신앙지도자들의 죄와 허물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밝힌 점을 구약성경의
추함이 아니라 위대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오는 율법은 모든 인간들을 불행한 죄인, 위선자들로 만들어
버리지요.

어떠한 종교도 경전의 해석에 매달리다 보면
진리의 본질을 놓치고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철학, 육법전서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혼란스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신앙이 깨달음을 통한 삶이 아니라 성경공부로 타락해 버렸지요.

예수님께서 어린이같이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이 아니면 천국(진리)을 맛볼 수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식은 진리를 깨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뜻이겠지요.

성경에 하나님 이외에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말씀을 예수님의 "진리안에서 자유하라" 는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데는 어떠한 우상도
있을 수가 없지요. 진리는 물처럼 얽매임도 막힘도 없어야지요.

분명한 것은 그 진리는 이성이나 지식을 통해서
깨달을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에서 관념적인 하나님이나
지적인 성경해석은 참 하나님과 만남을 가로막고 있는
일종의 우상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분적인 저의 생각입니다.
유익한 대화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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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Picky (24.60.52.23)
2012-05-11 22:30:50
맞습니다.
명심보감에 보면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공자도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말합니다.

율법이 인간을 자유로 이끌지 못한 이유는 율법 때문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어 간 것이죠. 법대로 행함을 즐기는 대신에 그것으로 종교를 세우고 종교위 틀 안에서 정죄함을 일삼았고 법의 테두리가 나의 삶의 가치관이 되지 못하고 법의 테두리를 넘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면서 인간은 괴로와 한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종교를 만들고 율법을 통해 나와 나의 적을 만들면서 인간은 싸우고 죽이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큰 불행입니다.

예수가 말한 진리가 주는 자유란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무슨 짓을 해도 법의 테두리를 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가치관이 그 법의 테두리 안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것을 즐길 수밖에요.

그러나 교회는 자유를 만끽하는 인간의 모습을 저버리고 인간을 종교적인 울타리 속에 가두어 그 울타리를 넘어서는 자들을 정죄하고 울타리 안과 밖의 사람들을 구분하여 적개심을 조장하는 감시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지식도 폐한다는 말이 바로 지식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님의 말씀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 또한 소유일 뿐입니다. 소유는 내 자신이 되지를 못하지요. 때로는 그것이 내 자신으로 둔갑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음 기회에 더 많은 것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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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05-10 17:52:14
자세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아래의 댓글에서 부연하였듯이, 저 역사 단순히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약에도 복음이 들어있고, 신약에도 율법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다만 율법의 조항 중에 일부는 본 형상이 나타남에 따라 폐지된 것들이 있고, 그 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제사, 안식일, 할례, 십일조라는 것이지요.

한국교회가 율법의 참 정신을 바로 실천하도록 함께 기도하며 격려하면 좋겠습니다. 긴 글에 깊히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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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풀 (183.98.117.69)
2012-05-10 08:51:22
십일조 없는 교회,뭘로?
한국 기독교에서 십일조헌금을 없앤다는건 불가능에가깝지요.
십일조가 없는 다른나라의 교회는 어떤 헌금으로 어떻게 재정충당을 한답니까? (예배에 물질봉헌이 없던가요?)
구체적 사례와 샘풀을 제시, 현실성있는 이해를 구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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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7
박평일 (72.196.235.211)
2012-05-10 06:32:03
잘 읽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한술 밥에 배가 부를 수는 없겠지요.

조금씩, 조금씩 무지의 어둠이 걷이겠지요.
저의 경우 교회건물, 율법, 성직자들에
대한 집착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모두들 예수님이 경계했던 우상들이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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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05-10 08:16:53
그러고 보니...
정말 모두 예수님이 경계하셨던 우상들이군요. 예리한 지적에 깊히 감사드립니다.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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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신도 (61.170.250.87)
2012-05-08 20:01:07
개신교 목사님들게 부탁드립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지금의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 깊은 유감을 느낍니다.

안티들의 비난성 글을 보면 물론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귀를 열고 들어야 하는 내용도 분명 있다고 봅니다.

한국 교회가 성장한 모습을 보면 자본주의에서 한국 경제가 성장한 것과 모습이 상당히 흡사합니다. 그 천박성과 부패함에 있어서도 어찌 그리 똑같은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기득권층 목사들의 야망과 명예욕은 하늘을 찌르고 있고, 그로인해 금권선거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참된 목자의 영성과 도덕성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정능력이 회복돼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는 공생애를 사시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비량으로 주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건물 크게 지어놓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식이 아니라, 가정 교회들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니며 신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식의 사역을 했습니다.

목회자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돼야 하는데, 사회적 재력이 큰 사람에게 경솔하게 직분을 주어 건물부터 크게 지으려는 모습들을 보면 너무 답답합니다.
신앙도 전부 가진 것으로, 세속적인 성공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양극화 현상 같은 것이 기독교 내에 있다는 것도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물질적 대우를 받고, 지역에서 애쓰는 작은 교회 목사들은 간간히 생계만 이어나가고 있는 정도의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신학교 과잉현상으로 사역자들이 교세 확장을 위해 우후죽순으로 무분별하게 양성되고 있고, 정치에 관여를 하는 목사들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가 빗나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은 믿는 이들에게 정치를 논하지도 명하지도 않습니다. 복음 전파와 영혼의 구원에 주력하는 것이 가장 교회다운 것입니다.
기독당 창당, 단군상 철거, 이라크 파병 찬성 등등 이러한 것들은 현대판 십자가 원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세속적인 힘에 호소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 믿습니다. 비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에게는 격려와 위로로 신앙을 견고히 세우는 것이 바른 목회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지도자들께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국 교회 목사님들 중 반 이상이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사학위 취득하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목자는 진실한 목자입니다.

겸손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며 늘 기도하고 성도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목자들이 한국 교회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기에 박사학위로 채워지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이런 풍조를 따라가는 것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정당한 가치관이 회복되고,

자정능력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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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는 샛강 (211.187.2.91)
2012-05-08 18:42:06
십일조, 성전, 안식일, 제사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글쓴이의 뜻이지요. 물론 십일조를 이행하고, 성전을 짓느라 솔로몬처럼 백성의 고혈을 짜내고, 율법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목사가 제사장 역할을 하는(카톨릭도 마찬가지, 오히려 더 함) 것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말씀까지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위험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현대화되고, 발전하고 앞으로 어떤 시대가 오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말씀에는 구약 그대로 완전한 것이고, 신약은 신약 그대로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기 마음대로 유용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원래 주어진 말씀을 마치 필요없는 말씀인냥 말하지 마십시오. 내 조상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구약이 있기에 신약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필요 없다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왜 구약이라는 역사 후에 예수를 보내셨나요? 아담이 죄를 지은 다음에 곧바로 예수를 보내시면 될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난 이 시대의 잘못만 지적하십시오. 스스로 하나님이 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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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61.170.250.87)
2012-05-08 19:27:50
하늘로 가는 샛강님
1. 잔머리를 잘 굴린다.
2. 번지르한 말을 그럴듯 하게 잘 한다.
3. 그 사탕 발림에 대부분이 다 넘어 간다.
4. 자기의 유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포장을 잘 한다.
심지어는 잘못된 것을 감추고, 고치고, 위조하고, 파기 까지 한다.
5. 자기를 막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맹렬하게 비난 내지는 모함해서 자기를 방어하며심지어는 역으로 그런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공격한다.
6. 대부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말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
7. 사기친 것이 발각되어도 개의치 않고 반복해서 같은 류의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8.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다.
9. 뻔뻔하고, 음흉하고, 야비하고, 흉물스럽다.
10.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계속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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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05-08 19:11:12
구약이 완전한 것이라구요? 진정 그리 믿으신다면...
십일조 부지런히 하시고, 성전 열심히 지으시고, 안식일 열심히 지키시고, 제사장들 잘 모시세요.

그리고 반드시 '구약대로'... 간음한 여인을 보면 직접 돌로 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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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가 정말 그렇게 문제인가? (175.207.159.64)
2012-05-08 14:37:41
십일조가 그렇게 문제인가>
십일조가 반 복음적인가? 십일조하면 안 되는 건가?
'율법'이라는 말은 원래 [토라]를 의미한다. 토라는 '법'이라는 의미보다 [가르침]을 뜻한다. 70인역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토라라는 말을 nomos로 번역하므로 토라의 의미가 법을 의미하는 것처럼(우리말) 되었지만, 토라는 법이라는 의미보다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십일조를 법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을 가르쳐 준 것이다. 구약의 토라가 폐지 되었다는 전제로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데, 예수님은 토라를 폐지한 적이 없다. 즉 전제가 잘못되었다.
"내가 율법(토라)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태 5:17)
만약 구약이 폐지되었다면 무엇 때문에 구약을 가지고 다니는가?
신약성서만 가지고 다니면 되지 않겠는가?
신성남이한 분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너무 일방통행하지 말고 신구약성서를 통합적으로 보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물론 한국교회의 잘못된 부분은 분명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외눈박이 주장은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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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61.170.227.24)
2012-05-28 13:48:03
하나님은 돌려주신다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는데도 불구하고 삶에 복이 임하지 않을 때에는 진정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3년안에 부자가 안되면 신앙생활을 잘못 하는것 입니다

십일조 생활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100배 1,000배 더 복을 주십니다

20평 아파트 사는 사람은 50평 아파트로 이사하고 소나타 타는 사람은 에쿠스로 바꾸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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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05-08 18:50:24
본문 어디에 율법이나 "구약이 폐지되었다"는 논조가 들어있는지요?
다만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이 참 형상이며, 그리스도 복음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밥 놔두고 죽 퍼먹지 말자는 것이구요...

누구라도 좋으니 율법 중에서 제사, 안식일, 할례는 왜 폐지했고, 구태여 십일조는 왜 폐지하면 안 되는지 그 구체적 근거를 논리적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전 세계의 외국 신학자들이 모두 한국의 신학자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울러 아래 구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엡 2: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히 7: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 7: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히 10: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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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
위에 언급한 율법은 (175.207.159.64)
2012-05-08 23:17:52
구원에 관한 문제 아닌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위에 인용한 '율법'은 구원과 관련된 성구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율법인가? 복음인가?
제5계명인데 지켜야 하는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10계명은 예수님 이후 불필요한 것이 되었는가?
성구를 이해함에 있어서 확실히 많은 오류를 보이고 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히브리서가 어떤 책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주장하는 있는 것이 아닌가?
성구를 무조건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어떤 의미로 위 성구들을 나열했는가?

마태 5:17절의 완전케 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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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신성남 (49.50.206.22)
2012-05-09 06:24:50
그러면 안식일도 구원과 관계가 있나요...
구원과 관계가 있는 율법만이 폐지되거나 달라졌다는 말씀이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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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유대인의 구원관 (175.207.159.64)
2012-05-09 07:32:37
율법준수+할례=유대인=구원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유대인이 되어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유대인이 되기 위해 두 가지가 요구되었다. 바로 율법수용과 할례수용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도 유대적 기독교인 중에 보수적인 자들은 여전히 할례와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했고, 결국 예루살렘회의를 통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신약성서의 대부분은 구원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 여타 문제를 세세히 다룰 여지가 없었다.
당장 사느냐 죽느냐의 상황에서 여타문제는 문제될 수 없다. 일례로 십자가 상에 달린 두 강도에게는 그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죽지 않는 한 믿는 자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주일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여건되는 대로 지키면 되는가? 이런 문제는 구원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문제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신앙의 표준으로 성경(신구약)을 받아들인다면, 십일조를 폐지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할례를 율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할례는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다. 성별의 의미로 주어진 것이다. 율법은 그 이후 5백년 이상 지난 다음에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 그리고 할례는 율법화 되었다.
안식일이 과연 폐지된 것인가? 제도화된 것인가? 구약의 안식일제도는 아예 제도화 되지 않았는가? 안식일제도 이전에 노예나 여타 낮은 계층에게는 쉬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 생기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주 5일제가 되면서 쉼의 중요성이 오히려 부각되고 있다.
이게 안식일의 한 정신이 아니겠는가?
주일과 안식일의 개념이 다른 점이 무엇이고 같은 점이 무엇인가? 안식일이 과연 폐지된 것인가? 토요일에 쉬지 않으면 안식일은 없어진 것인가?
너무 편협하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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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05-09 09:47:55
신앙의 표준으로 구약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그 표준에 따라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고, 동성애자를 죽여야 하겠군요.

하지만 지적하신대로, 지금도 안식일의 정신이 살아 있지만 과거처럼 안식일을 문자대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십일조의 정신이 '연보'로 계승된 것을 왜 부인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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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59.30.106.91)
2012-05-08 13:41:16
공감합니다만
글의 내용도 알겠고 현대 교회의 세속화와 교권에 대한 고민과 비판은 공감 하고 중심이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어서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신약과 함께 구약이 주어졌고 경전 삼아 함께 읽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개념들 예를 들어 언급하신 십일조 성전 제단 제사장에 대한 신학적이고 성서적인 의미들이 있지를 않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울러 생각하시면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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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05-09 06:43:27
본문에 구약의 개념을 부인하거나 경시하는 내용이 있었던가요...
무슨 근거가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군요. 신약 성경에 분명히 율법은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라고 했습니다.

글의 핵심은 구약시대로 역주행하는 것은 바울의 표현대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헛되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다시 할례를 하자는 것과 유사한 행위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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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49.50.206.22)
2012-05-09 10:59:49
단순히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도 복음이 들어있고, 신약에도 율법의 정신이 있습니다. 다만 율법의 조항 중에 일부는 본 형상이 나타남에 따라 폐지된 것들이 있고, 그 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제사, 안식일, 할례,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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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49.50.206.22)
2012-05-08 19:02:21
<십일조 성전 제단 제사장에 대한 신학적이고 성서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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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무엘 (173.74.240.88)
2012-05-08 18:09:45
글쎄요.헌그은 강요가아니고 자발적으로하는데 11조뿐이아니라 나의 몸도 다 바쳐도 주님의은헤 못다갚습니다.근데 그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날마다 성전짓고 종교지동자들의 배나 채우는데 사용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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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61.170.250.87)
2012-05-08 19:35:27
헌금이 자발적인가요 ?
어제 시골에 어머님을 뵈러 댕겨 왔습니다.
이웃에 사시는 먼 촌수의 형수님(권사님)이 마실을 오셨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사연을 들었는데 입을 봉하고 있을 수 없어 올립니다.

얼마전에 사모가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해서 면허증을 취득했다나.
담임목사 설교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복주시려고 기회를 주셨는데

여러분 놓치지 마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모님 자가용 한대 사주시면 하나님께서 크신 복을 주실것입니다.
자가용 구입 헌금하십시요.

그 다음 주일
설교시간이 지나고 헌금시간입니다.
사모 자가용 구입헌금을 한 사람은 몇명 없었답니다.
목사와 다툼이 있어서(사실 목사가 다 내 쫓았음, 이 얘기는 후에 하기로 합니다)
헌금 바구니를 열어보니 목사 마누라 자가용 헌금을 한 사람은 노인들 몇사람 (결국 몇 푼/몇 만원정도로 짐작됨)
뿐이었답니다. 목사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북을 주시려고 기회를 주셨는데 이게뭐요?
하면서 성도들이 드린 헌금봉투를 성질이 나서 강대상위에서 빡빡 다 찢어 버렸답니다.

이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열이 나던지요....
그런 개아들 같은 목사가 얼마나 많을까요?
너무 기가 막힙니다.

헌금이 자발적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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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124.78.248.99)
2012-05-11 06:39:56
목사는
칼만 안들었지 강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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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9
통합교인 (118.37.124.97)
2012-05-17 23:04:23
목사는
총만 안들었지 강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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