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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유일신교는 편협할 수 없다한국 교회 교우님들에게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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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3월 11일 (토) 00:00:00 [조회수 : 3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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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기독교는 유일신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는 유일신교이기 때문에 배타성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유일신교가 무엇입니까? 유일신관의 핵심 개념은, “신은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신은 우주만물 전체를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유일절대자이며, 사랑과 정의, 평화의 신으로서, 인류 전체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고백됩니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신, 즉 진정한 유일신은, 어느 특정인들에게만 계시되거나 그들과만 관계를 맺는 ‘편협하고 지엽적이며 유한한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즉 하느님의 ‘유일성’은 전체 포용으로서의 ‘유일’이며,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크게 품으시는 ‘한 울’님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유일하신 참 하느님이 우리(종교)만 인정하셨고, 우리(종교)를 통해서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좁고 편협한 원시 유일신 신앙이 인류 역사에 수많은 갈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유일신 신앙을 가진 대표적인 세계종교로,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유일신교라도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기독교처럼 배타적이지는 않습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공격적인 선교를 감행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다른 종교, 다른 신념체계를 존중할 줄 모르고 무모하고 공격적인 선교를 감행해 왔습니다. 그 결과 아름다운 인류 문화와 자산을 무수히 파괴했을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을 살상했습니다. (아,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인류와 역사 앞에 사죄드립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구약에 계시된 여호와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여호와가 아니라 알라를 믿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알라’라는 말은 아랍어로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아랍어 성경에는 우리말 성경의 ‘하나님’이 ‘알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결국 유대교인과 이슬람교인,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이 믿는 하느님은 완전히 같은 분입니다. 세 종교의 신도는 똑같이, 그 분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섭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요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슬람교인들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여 인류의 시조로 삼았고, 노아와 아브라함을 부르셨으며,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꾸란(코란)에 나타난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형제교회로 생각합니다. 비록 “기독교인이 위대한 선지자이신 예수님에게 신성을 부여한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형제종교라고 할 수 있는 위의 세 종교는, 마치 부모님의 생각을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삼형제처럼, 하느님과 그의 뜻을 자기들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통 유대교인은 하느님의 뜻을 자기들이 제일 잘 알고 있으며,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히브리성서(현대 종교학자들과 개혁적 신학자들은, ‘구약’이라는 표현이 유대교인들에게 결례가 된다고 하여 ‘구약성서’라고 하지 않고 ‘히브리성서’라고 합니다.)를 통하여 충분하고 완전하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으므로, 신약성서와 꾸란은 하느님의 뜻을 오히려 혼동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교인 역시 유대교와 기독교를 존중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히브리성서와 신약성서에도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하느님께서 ‘위대한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직접 ‘꾸란’을 불러주심으로써 당신의 뜻을 완전하게 계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전달해준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 가브리엘입니다).

기독교인 역시 기독교가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종교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한 술 더 떠서, 아직까지도 많은 보수 정통(?) 기독교인들 중에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단언하며, 심지어 “사탄의 종교”라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처럼 같은 유일신 종교지만 유대교나 이슬람교에 비해 기독교, 특히 한국 주류 개신교는 훨씬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독선과 배타성이 옳은 것이냐 하는 것인데,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렇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나 사도행전 기자가 그렇게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객관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애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진실로’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 교우님들이여,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은 좋으나, 성경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임을 잊지 말고 읽어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출애굽때 “이집트의 장자를 모두 죽였다”는 성서의 기록은, 당시 사람들의 고백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어찌 사랑의 하느님께서,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집트 왕 파라오 한 사람의 고집을 꺽기 위해 죄없는 아기들(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의 생명을 몰살시킬 수 있겠습니까? 만일 교우님이 그 때 그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래도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성서는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7절,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그렇다면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놓고는 그를 벌주는 괴팍한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또한 출애굽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섬겼다고 하여 모세가 레위족속 사람들에게 살인면허를 주어 자기 동족 삼천명을 몰살시켰다는 기록이 성서에 나옵니다.

성서기자는 이 사건을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출애굽기 32장 35절,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의 만든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그것은 기록자의 고백일 뿐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아, 성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무모한 신앙인지요. 그 신앙으로 그 옛날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소위 ‘정통’ 종교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러한 ‘성경의 성격’이나, ‘형성 배경’, ‘당시 시대와 역사의 정황’ 등을 무시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이상한 폭군이며 변덕스럽고 무시무시한 신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원시적 교리에 갇힌 하느님이며, 교리주의자에 의해 만들어진 허깨비 하느님일 뿐입니다.

한국 교회 교우님들이여, 교리에 의해 만들어진 ‘원시 신앙의 하느님’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만나고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성경의 문자 속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서를 넘어 계시며, 성서는, 그 문자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성서의 문자를 그대로 믿는 것은, “저 달을 보라”고 말할 때,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교우님이 이란이나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면, 기독교에 대해서는 소개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면, 아마 교우님은 독실한 이슬람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평화를 사랑하는 진실한 이슬람 자매형제님들에게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그럴 경우에, 기독교의 정통적 구원관에 따르면, 교우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그냥 선지자 중의 한사람으로 존경하는 차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보내지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진실되고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참사람으로 살아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었기에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구원관이 맞다면, 여러분에게 생명을 이어주신 조상님들도, 사랑하는 부모님도, 존경하는 선생님도, 역사상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성현들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모두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 유일하신 참 하느님”으로 고백되는 우리의 하느님이 진정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거의 2~3천년 전입니다. 2천년 전 사람들은, 그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기록을,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정통(?) 교리 때문에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리에 의한 배타적 유일신교 신앙’이 아니라, ‘진정한 유일신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은 그 전체를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시는 ‘한 울’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 ‘한 울’님은 전체 포용으로서의 한 울님이며, 그 신앙에는 배타성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독선에 사로잡혀 인류의 아름다운 종교 유산과 신념체계를 모두 부정하는 ‘배타적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로 가둘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교회에만 계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주만물 전체를 창조하시며 섭리하시는 분, 모든 종교의 틀을 넘어, 인류 전체를 크게 품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을 기독교만의 하느님으로 만들어 교회 안에 가두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며, 하느님의 성품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 분의 성품을 모독하는 것, 그것을 기독교 용어로 ‘신성모독’이라고 합니다.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문제에 대해 바른 판단을 내리려면, 양쪽의 얘기를 모두, 진지하게 듣고 나서 판단해야 합니다. 한 쪽 얘기만 듣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에는, 지금까지 거의 일방적으로 보수적인 얘기만 들어왔습니다. 심지어 목사님들도 ‘다른 견해’를 소개받지 못한채 보수적인 신앙만 옳다고 일방적으로 들어온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 교우님들이여, 제가 왜 이렇게 여러분에게 ‘다른 견해’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시대에, 소위 정통 유대교인들은,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찾아 해석하신 예수님을 ‘율법을 부정하는 자’라 하여 이단자로 배척했습니다. (예, 마태복음 5장 38-39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출애굽기 21:24 참조)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붙들기’에서 벗어나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주시기를 두손 모아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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