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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역사의 진실 밝혀 !'환단고기에 나타난 환, 배달, 고조선의 강역'은 대륙이었다
류기석  |  yoogise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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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04월 19일 (목) 17:22:40
최종편집 : 2012년 04월 19일 (목) 22:36:25 [조회수 : 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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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후7시 종로구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는 이병화(65세) 역사연구가를 모시고,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나타난 상고시대의 강역-환 배달 고조선은 대륙의 중심지역에 있었다'라는 (사)국학원 국민강좌가 참석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역사연구가 이병화 선생님 ⓒ 2012 김용미
이 자리에서 이병화 역사연구가는 "환, 배달, 고조선 시대에 그 중심지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 있고 그것이 사실이다"고 단호히 밝혔다. 

강연요지는 우리민족 환, 배달, 고조선으로부터 조선초기까지의 역사는 대륙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핵심이다. 

현재 반도사관과 만주사관이 생긴 이유에 대해서는 "대륙을 명나라에게 빼앗기고 어떻게 해서든지 명에 사대하는 정책을 썼던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던 사관으로 허구인 역사관이다"이라고 이병화 역사연구가는 말한다. 

그러므로 "식민사관이라는 것은 반도사관이 없었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역사관으로 식민사관은 반도사관을 숙주로 하는 기생의 역사관이라고 볼수 있다. 이에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면 반드시 반도사관을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다"며 "우리는 고대사에 관심을 가져야 되고, 고대사는 대륙사관이므로 자연히 대륙사관을 연구하여 밝혀야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역사를 올바르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지금껏 우리의 왜곡된 역사 질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서를 그냥읽어보는 수준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가지고 읽고, 이와함께 부도지, 환단고기도 같은 역사서도 읽어야된다"는 것임을 이야기하셨다.

이와 더불어 이웃나라 중국사, 일본사도 같이 놓고 비교하며 읽어야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도 했다. 이제 천천히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이제까지 철저하게 감춰지고 뒤틀려져 있던 역사적 의문점들을 역사학자가 아닌 우리들이 하나하나 들춰 풀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래는 이병화 역사연구가의 국민강좌의 내용으로 참 진리로 자유케 되기를 바란다.

대륙을 반도로 착각한 역사 인식

언론인이며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단재 신채호선생은 대한제국 시기에서 지나온 천년의 우리역사를 살펴볼 때 가장 큰 사건으로 고려 인종시기에 묘청 등이 서경을 근거지로 해서 시도한 서경천도 운동과 금 정벌계획이 좌절된 일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고려가 초기에 중시했던 고구려, 발해의 정통성을 잇지 못하고 신라 중심의 역사로 전환함으로써 북서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지 못한 계기가 되었던 사건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사건이 서경천도 이후 3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에 일어났다. 바로 고려를 이어 건국한 조선이 도읍지를 대륙에서 반도로 이전한 사건이다.

조선은 대륙에서 건국했지만 건국한지 얼마 되지않아 세종대에 이르러 국가의 중심강역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겼던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고려나 조선이 대륙에 있던 나라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고려가 고구려, 발해의 전통을 계승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서경천도 운동의 실패가 천년 간의 가장 큰 사건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 역사연구가 이병화 선생님 ⓒ 2012 김용미

고려의 서경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한반도의 평양이 아니라 대륙 섬서성의 서안시가 고려의 서경이었다. ( 지도 1. 참조) 고려의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었다는 정황은 고려사, 고려사 지리지, 요, 금, 송의 지리지, 등을 종합해보면 그 실상이 드러난다. 또 조선의 중심강역이 세종 때 변화했다는 사실도 명사,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초기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알 수 있다.

세종재위 년간에는 그 이전과 비교해 볼 때 특이한 사안들이 발견된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훈민정음의 반포 사실이다. 세종시기에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게 했다는 것은 그 당시의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을 것이었다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기존의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나타났다면 언어소통에 문제가 발생될 것이다. 다음으로 농사기법에 대한 새로운 안내서인 '농사직설'이 발간되었다.

이책이 나오기 전에는 '농상집요'라는 책이 지침서였는데 새로운 책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농사방식도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질병치료에 필요한 약초에 관한 책도 새로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이다. 이책은 각 지역에서 채집할 수 있는 토종약초를 수록하고 있다. 세종 이전과 다른 질병이 발생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안을 종합해 보면 세종대에는 사람들 사이에 말과 글이 원활하게 소통되기 어려웠고 기후와 풍토에 변화가 있어 과거의 농사방식으로는 농사가 어려웠고 질병의 발생원인이 과거와 달라 새로운 치료법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한양도성의 축성시기와 그 규모,궁궐 조성과정, 팔만대장경의 이동경로,불교행정과 주요 사찰의 상황, 국가의 중요 제사처의 변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그 이전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이한 시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도사관의 성립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반도사관은 세종시기에 준비되어 문종을 거쳐 세조시기에 구체화 되어 성종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반도사관을 정립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작업이 옛 사서를 없애는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옛 사서를 접할 수 없게된 까닭은 조선왕조와 일제가 강제수집해 소각하는 등 철저하게 없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 사서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 정치세력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시에 당과 신라가 불태웠고 발해 멸망 시에는 요가 불태웠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고 은밀하게 전해오던 전적이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의 세조, 예종,성종 시기에 우리민족의 상고사에 관한 역사서와 선도사상서를 거의 다 수거해 없앴던 것이다.

왜 이시기에 고사서와 사상서를 없애는 작업을 했을 까 ? 대륙의 근거를 상실하면서 반도로 이전한 조선왕조는 우리역사가 반도와 만주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위장했다. 찬란했던 대륙의 역사인 단군 이전의 역사는 민족의 의식에서 지워버리고 단군의 역사마저도 신화로 둔갑시켜 모호하게 함으로써잃어버린강토의 회복은 아예 잊어버리고 새롭게 등장한 대륙의 명에 철저히 사대했던 것이다.

고조선과 고조선을 이은 북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는 축소 ,비하,왜곡하고 한,당,송,명으로 이어지는 화하족의 역사는 확대,과장,존숭하면서 조선은 대중화에 부속된 소중화를 자처, 축소된 강역을 감지덕지하면서 기득권에 안주했던 것이다.

반도사관에 기생하는 식민사관

반도사관이라는 허위의 이데올로기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식민사관이 기댈 언덕이 없다. 반도사관이 구상되고 실현될 수 있었던 기저에는 사대사상이 깔려있다. 고려때 금을 정벌해야 한다는 이념이나 원의 지배를 무력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삼별초의 신념이 실현되었다면 반도사관은 발붙일 근거조차 없다.

요동정벌을 포기한 인물이 일으킨 정당성 없는 역성혁명의 성공이 사대주의를 낳았고 사대주의의 비굴함에서 반도사관은 잉태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도사관에서 조작된 우리역사 강역의 핵심을 각국의 도읍지로 보면 1)조선이 반도의 개성시에서 건국하고 서울로 옮겼으며 2)고려의 도읍지는 개성시,피난도읍지는 강화읍, 서경은 평양시, 동경은 경주시이며 3)고구려의 도읍지는 평양시,길림성 집안시 등이며 4)신라의 도읍지는 경주시이며 5)백제의 도읍지는 공주시,부여읍 등이며 6)가락의 도읍지는 김해시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반도사관에 기초해서 한단계 더 조작된 식민사관의 핵심은 1)고조선은 은에서 고조선으로 건너온 기자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이어졌는데 위만조선은 한에 의해 멸망,그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허위 주장 2)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의 대동강유역과 강원도북부,압록강유역과 함경도 서부지역이었다는 날조된 주장 3)한반도 황해도 서부지역에 위의 대방군이 설치되었다는 억지 주장 4)한반도의 남동부를 왜가 점령,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통치했었다는 날조된 주장이다.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의 허구

우리는 우리역사가 반도가 아니라 대륙이었을 것이라는 사념적 단초를 삼국사기가 전하는 지진,홍수 ,메뚜기떼에 의한 농작물 피해 등 기상정보와 자연현상,그리고 일식 관측했던 위치 등 천문정보에서 찾는다. 그렇지만 역사의 강역을 추정하는 객관적 자료는 무엇보다도 문화생활유적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한반도에서는 조선의 건국초기에 송경이나 한양에 있었다는 궁궐들이 그 위치나 흔적조차 알 수 없다든가 고려의 남경이었다는 서울시에는 고려때의 궁궐이 흔적도 없고 고려의 오랜 도읍지였다는 개성시에는 고려사에 기록을 남긴 궁궐, 사원,사당 등 주요 건축물은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반도사관의 초라한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대륙의 사정도 반도와 다르지 않아 원의 도읍지였다는 북경시에서 원의 역사유적이 발견되지 않으며,대륙의 동부와 중부에서 화하족의 상고사를 입증할 수 있는 역사유적을 찾을 수 없어 '하,상,주단대공정'이라는 잃어버린 역사찾기 작업을 벌일 수 밖에 없었던 처절한 현실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고려사에는 고려의 도읍지 개경에는 수십곳의 궁궐과 수십곳의 대형 사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반도의 개성시에는 그러한 정황을 증언하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고려의 피난 도읍지 강도와 송도에는 여섯곳에 궁궐이 있었고 서경에는 일곱곳에 궁궐이 있었다고 하는데 강화읍에는 도저히 궁궐이었다고 할 수 없는 단 한곳만이 고려궁지라는 궁색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평양시에는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추정할 수 있는 건물이 한곳도 없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궁궐이 서른 다섯곳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경주시에서는 단 한곳도 확인할 수 없다. 공주시나 부여읍 그리고 김해시가 고대왕국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믿어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하는 제도권의 역사학자들을 측은하다고 밖에 다른 표현이 어울릴까 ?

1)고조선은 단, 조선, 대부여로 이어지고 대부여는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세나라로 구성된다. 이중 가장 서쪽에 있던 번조선이 전323년 기자의 후손인 기후가 왕이 되었고 전194년 위만조선이 되었고 전108년 자체 붕괴 된다. 진조선과 막조선은 북부여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2)한사군은 원래 존재했던 사실이 없고 후한 광무제 때(44-49) 고구려의 서쪽 변방을 침입한 후한이 그곳에 낙랑군과 현도군을 설치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지도 2. 참조 )

3)위가 설치한 고구려의 강역이었던 대방군(238-242)은 감숙성 천수시 지역으로 추정된다.

4)임나일본부는 일본이 설치한 행정치소가 아니라 임나가 일본이라는 지역에 설치한 행정치소로 광서자치구 용현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소가야의 도읍지였고,후에 왜, 신라, 당의 강역이 된다.

조선왕조가 우리민족의 고사서를 없애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애국지사들의 손으로 은밀히 전해온 사서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부도지, 환단고기, 규원사화 등의 없어질 위기를 벗어난 역사서를 접할 수 있다. 삼국사기가 유교의 관점에서 편찬되었고,삼국유사가 불교적 이념의 바탕에서 찬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환단고기는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 발해를 이어온 선도의 사상에서 기록된 역사서이다.

민족사에서 사라질 뻔했던 이 사서들은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여실히 밝히고 있다. 명과 조선이 조작한 반도사관은 조선의 민족사적 번영을 제약하는 사상적 질곡으로 작용함으로써 그 이데올로기가 우리사회에 끼친해악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이 반도사관은 청과 일제가 조작해낸식민사관의 숙주가 되었다. 식민사관은 외침의 빌미를 제공하면서 찬란했던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흉악한 도구로 악용되었던 것이다.

대륙사를 기술한 환단고기

1) 고조선의 강역 고조선은 진한, 번한, 마한의 세나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이 세나라 중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번한과 마한에는 각각 왕이 따로 있어 나라를 통치하였다. 고조선의 핵심강역은 이 세나라의 도읍지를 중심으로 펼쳐졌고 진한의 도읍지에 가까운 곳에 고조선의 도읍지가 위치했다. 중앙에 위치한 진한의 도읍지는 부소량(또는 소밀랑), 번한의 도읍지는 안덕향(또는 오덕지), 번한의 도읍지는 백아강이라 불렀다.

   

이 세 도읍지는 일직선을 이룬 저울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고 전한다. 진한의 도읍지는 저울대에 해당, 중앙에 위치하고 안덕향은 저울추에 해당,서쪽에 자리하고 백아강은 저울접시에 해당, 동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실제 거리는 진한에서 번한까지 약 210 Km, 진한에서 마한까지 약 170 Km 로추정된다. 진한등 세나라는 각각 세나라로 구성된다. 진한은 개마를 중심으로 청구와 예맥으로 이루어지고 번한은 진번이 중심국으로 숙신과 남을 아우르고 마한은 구려가 중심이 되어 부여와 옥저로 국가를 이룬다.

이 중에서 번한지역이 화하족의 국가들과 선비족의 국가들과 국경을 접하고,그들과 국토를 빼앗기거나 빼앗는 등 전쟁을 겪어왔던 것이다. 번한지역 서쪽에 진이 축조한 장성과 연이 축조한 장성이 있었다. 고조선의 도읍지는 1) 아사달 2) 금미달 3) 장당경 4) 백악 5) 영고탑 으로 다섯곳이었다.

이중 고조선이 건국한 곳이 1)아사달이다.이곳에 불함산이 있었다. 진, 한 시대에 이곳을 빼앗겨 그들이 어양군을 설치했던 곳이다. 그들은 이곳의 지명을 비하했다. 2)금미달은 후한이 쳐들어와 낙랑군을 설치했던 곳이다.아사달은 요서지역에 위치하며 금미달은 요동지역에 위치한다.

두곳 모두 고구려와 진,한의 접경지대에 위치했던 곳으로 고구려의 내륙지방이 아니었다.고조선시대에 화하족의 국가는 요의 당 ,의 우, 설의상, 우의 하, 은, 주, 등의 국가가 이어졌다. 이들 국가들은 서국(西國), 중국(仲國), 지나 (支那) 등으로 호칭되었다.

환단고기에는 은, 주가 고조선에 복속했던 약소국이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지도 3. 참조) 2) 배달의 강역 환웅천왕이 환국에서 갈라져 나와 태백산 신시에 배달국을 건국할 당시 하화족의 조상인 반고도 같은 시기에 환국에서 갈라져 나와 삼위산에서 나라를 세웠다.

반고의 나라는 제대로 번영하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을 지속한 반면 배달국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문자의 창제, 목축과 농업생산의 증대,혼취법 제정, 군사제도의 확립, 야금술이 발달했고 역법을 만들어 생활문화의 개선이 이루어졌다.환웅시대는 두시기로 나눌 수 있다.배달시대와 청구의 시대다.배달의 도읍지는 태백산 신시였고 청구의 도읍지는 낙랑홀이었다.신시가 북쪽이라면 낙랑홀은 남쪽에 위치했다.

화하족이 그들의 조상으로 떠받들고 있는 무리를 복희는 배달의 제5대 태우의환웅의 아들이다. 그는 수인의 무리를 정벌하고 그곳의 군주가 되어 화하족의 조상들의 번영을 이룩했다. 화하족의 조상들은 신농 때에 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자의 길을 걸었다.그들은 청구를 건국한 자오지천왕 때에 청구에 병합되었다가 청구가 고조선으로 이어질 때 요가 당을 건국하고 고조선에 대항했던 것이다.

결국 배달과 청구 두시대에 대륙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다가 다시 분열되었던 것이다.배달의 도읍지 신시는 요가 건국한 당의 도읍지였던 평양(平陽)과 같은 곳이고 순이 건국한 우의 도읍지 포판(浦坂)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이 후한의 수도권이었던 하동군이었다.청구의 도읍지 낙랑홀은 후한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연주의 동군(東郡)으로 송대에 금이 점령했던 복양이다. 화하족은 하대에 영역을 확장했고 진,한대에 동쪽으로진출했다가 신라,백제에 밀려 축소되었다가 수,당대에 다시 차지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만해도 대륙의 서쪽 일부를 차지했을 뿐이었다.그러다가 조선이 반도로 이전한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명이 대륙의 중부와 동부까지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명과 청, 일본 그리고 조선이 우리민족의 상고사에 관한 사서를 없애고 철저히 왜곡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도 4. 참조)

3) 환의 강역 환의 강역은 천해의 동쪽에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천해는 지금의 청해성에 있는 청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청해성 동쪽지역이 화하족의 국가인 주, 한, 당 등의 중심강역이었기 때문이다. 종주의 도읍지인 호경, 전한과 후한의 도읍지 장안, 당의 도읍지 상도가 이곳에 위치한다.

   

청해성의 서녕시이다. 조선이 대륙에 있을 때의 명의 장안이었다. 명이 조선의 강역을 차지한 후 장안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로 옮겨놓았던 것이다. 후한서 지리지 량주 조를 보면 한양군에 환도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평양도 있어 우리민족사의 주요 지명인 한양, 평양, 그리고 환도가 모여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환도성, 지금의 반도에 위치한 서울이나 평양의 지명과 연결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하족들은 환도(桓都)를 멧돼지에 비유하고 있다.그들은 우리민족과 관련되는 주요 지명을 철저하게 비하시켰다.환의 도읍지는 지금의 청해성 대통현으로 비정할 수 있다. 과거 중공의 문화혁명 당시 이곳에 있던 문화유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환의 강역은 파나류산, 또는 적석산 지역인 환도를 중심으로 북쪽의 금산, 남동쪽의 태백산, 남쪽의 삼위산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청해성 동부와 감숙성의 중부, 내몽고자치구의 서부,그리고 녕하자치구 지역이다.환을 이은 배달은 태백산에서 건국했고 화하족의 조상인 반고도 삼위산으로 가서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 지도 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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