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최근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학생회의 요청을 받고 신학과 학생회지 '밥'에 싣기 위하여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하여 작성한 글임을 밝힙니다.

먼저 감신대 신학과 학생회지 ‘밥’에 다시 글을 실을 수 있는 영광을 주어서 감사하다. 90년대 후반 학교에 다닐 때 몇 번 써본 이후로 처음인데 다시 글을 쓸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겠다.

‘신학생과 이데올로기’인가 아무튼 뭐 그런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이수진 회장의 전화연락을 받고 잠시 의아했다. 요즘도 감신대 후배들이 이런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나 해서였다. 솔직히 말하면 단지 신학과 학생회 임원들만의 관심인지 아니면 요즘 신학과 학생들의 관심인지 궁금하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모습을 가끔 보고 무슨 교내 영성집회에 몇 백 명이 모였다 하는 소식만 듣다보니 이런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안타까움도 있다. 교회는 교회 안에, 신학은 신학 안에서만 머물러야 한다는 이상한 공식이 어느샌가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흔히 교회 안에서는 회당세를 내는 문제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말올무에 ‘시저(가이사)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마치 하나님 나라의 권력과 세속적 권력의 영역이 나누어져 있다고 규정하는 것으로 호도되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해석이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는 시저의 영역이 따로 있지만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는 시저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역에 들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구절은 일종의 반어법이다. 결국 신앙인은 모든 것이 다 어버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사회의 제반 현상에 대해 신앙적 고백으로 참여해야 한다.

더 이상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정치에 무관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국민들이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더욱 첨예하게 정치적 광장에 나서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광장으로 나서는 것은 국민들이 비로소 참 인간됨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이와 일치한다. 교육전도사로 지내던 시절에 담임목사님이 주일 저녁예배 시간을 당시의 변화에 따라 주일 오후 시간대로 변경하는 투표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찬성 측만 거수를 하고 반대 측은 거수 자체를 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찬반에 대한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일종의 의사표시를 한 것으로 전제하여 결정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침묵하는 것도 정치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자기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나는 진보적 가치를 좋아한다. 진보는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보수는 기존 혹은 현 상태를 유지하자는 생각이다. 진보는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는 것이고 보수는 머물러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하고 운동한다. 멈추어 있거나 성장하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을 잃은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피를 먹지 말라는 이유는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인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순리를 따르는 것이고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고 운동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도덕성이나 윤리의식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과거의 수준과 기준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율배반이고 자폐적 퇴행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너무 일방적이고 획일적이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경험을 통해 민족 내부에 학습된 흑백논리 때문이다. 좌 아니면 우밖에 없다. 나와 우리가 아니면 다 적이다. 중간이 없고 대개가 극단적이다. 어쩌면 진정한 보수나 진보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도 문제이지만 진보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보수가 극단적이다 보니 진보 쪽도 극단적인 행보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와 보수가 한민족 내부의 이념적인 구분으로 규정되다 보니 정치의식이 매우 왜곡될 수밖에 없다.

사실 기독교 정당의 창당은 당연하다. 정당이라는 것이 어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치에 관철시키기 위한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니 기독교의 이익을 지키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모여서 정당을 만들 수도 있다. 기독교정신으로 직접적인 정치활동을 하는 정당은 세계 여러 나라에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전 모 목사 중심의 기독교정당 창당 움직임은 한 마디로 참담하다. 기독교의 수준이 어떤지를 너무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수의 극단주의자, 수구주의자,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천만 기독교인들을 동원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도덕적으로도 하자가 많은 이들이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를 자처하는 것이야 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기독교라는 외피를 입고 있으나 그 내면은 탐욕에 근거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요즘 진보니 보수니 하는 개념보다 상식과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에 더 많이 마음이 간다. 하나님은 성서와 더불어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다(선악과를 먹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 양심을 나는 상식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이상하게 상식과 비상식이 전도된 것 같다.

하나님 나라도 나에게 매우 중요한 한 축이 되는 개념이다. 나는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나님 나라와 대한민국의 이상이 동일하다면 문제될 것이 없는데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하나님 나라와 대한민국의 가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는데 신앙인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하다. 대한민국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합당하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모든 인류)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기관이 된다면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국가주의자나 애국주의자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로 보일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척도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사셨는가, 누구와 함께 어울리며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가를 생각한다면 신앙인의 삶의 지향점은 명백해진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입으로 부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너도 나도 부자가 되기를 바라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미안하지만 유대교경전(구약)에는 부자가 되어 많은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내용이 있지만 기독교경전(신약)에는, 특히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쓰여진 부분에는 전혀 없고 오히려 가난해지라고 가르친다. 움켜쥐지 말고 나누고 공유하고 베풀라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을 진보냐 보수냐로 나눈다면 아마도 진보 쪽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미안하게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고 싶지는 않다. 교회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국 역사에서 교회는 사회를 견인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사회발전의 장애물이 돼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나는 교회, 신앙인이 진보냐 보수냐의 딜레마, 특히 한국의 정치적 딜레마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이 단어 자체는 이미 당파성을 내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뜻에 합당한지, 상식적인지로 판단할 것을 권한다.

교회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종교를 지탱하는 경전이 옛 언어이자 옛문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경전이 여전히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되고 오늘의 언어로 풀이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내딛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 있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보수적인 일면과 진보적인 일면이 함께 공존한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냐 진보냐를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다. 이제는 상식의 바탕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사고와 실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친 웨슬리의 신앙과 삶을 기억한다면 이 시대 한반도라는 특이한 상황을 살고 있는 신학생, 목회자들이 어떤 정치의식을 갖고 살아야 할지 자명하다고 확신한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