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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언론에 시비거는 이주현 목사님을 아십니까?
이필완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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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8월 17일 (수) 10:39:00
최종편집 : 2011년 11월 29일 (화) 01:37:38 [조회수 : 1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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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9일 수원에서 열린 이주현 목사 출판 기념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역시나 교계 인사들보다 지역사회의 시민단체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축사하고 이정배교수도 서평하고 신앙과지성사 최병천 장로도 인사하고 저도 축하인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작은 공연도 겻들였구요.

 

 

   
산막에 돌아와서 며칠 후에 보니 과연 교보문고 인터넷에 이주현 목사의 책이 뜨더군요. 사정이야 늘 그렇지만 감히 가까운 지인들에게 나눠주려고 우선 5권을 주문하였습니다. 주문한 김에 그동안 읽고 싶던 한국기독교연구소의 스퐁의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 '소백산 지도' 등도 함께 구입하였습니다.

 

참 편리하고 좋은 세상입니다. 이렇게 깊은 소백산 달밭골 산막에 살면서도 sk 티로그인 인터넷 전국망으로 신간 서적을 주문할 수 있으니 말예요.  휴대폰조차도 잘 터지지 않는 곳임에도.... 출판모임 사진 몇 장과 이주현 목사의 인삿말 등 짧은 스케치 동영상 하나를 추가 합니다.  아래쪽에 '언론에 시비걸다' 머리글도 전재하겠습니다.(2011.8.24)

 

 

   

 

 

   

 

 

 


 

   
▲ 이주현 목사(수원 매원교회 부목사)

 

수원 매원교회 부목사인 이주현 목사가 ‘언론에 시비걸다’라는 책을 냈다. 최근 기독교 지성인을 위한 기독교 교양도서들을 활발히 펼쳐내고 있는 최병천 장로(공덕교회)가 운영하는 신앙과지성사에서 출판했다. 내일 8월19일(금) 오후6시30분 경기문화재단 다산홀에서 출판기념회도 열린다.

그런데 이 출판기념회를 여는 이들은 여니 동료 목사들이나 교회가 아니다. 이 모임은 수원지역의 내노라하는 진보 진영의 시민사회 지도자들이다. 도대체 이주현 목사는 감리교회 목사로 지역사회에서 어떤 일을 해왔고 어떤 책을 냈기에 기독교계가 아닌 시민사회진영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어주는 것일까?

그도 감리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농촌교회에서 목회하던 전형적인 농촌목회자였다. 그러던 그가 10년 전 김진춘 목사가 시무하는 수원매원교회 부목사로 부임하고 나서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약칭 경기민언련http://ggccdm.tistory.com/)을 조직하였고, 사무처장으로 공동대표로 꾸려오면서 언론 비평운동을 활발히 해왔다.

경인지역의 수십 개 일간 신문과 수백 개 주간신문, 경인지역 방송들을 비롯해서 조.중.동을 비롯한 주류 언론과 tv, 라디오 방송들을 모니터링하고 기사들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한국 언론의 나아갈 바른 방향을 제고하게 하고 언론의 지평을 넓혀주는 활동을 꾸준히 해오면서 수원을 중심한 경인지역 진보진영의 대표적 활동가가 되었다.

‘언론에 시비걸다’는 이 목사가 지난 10여년 동안 여러 진보적 신문과 방송에 발표한 칼럼 모음집이다. 이주현 목사는 동안(童顔)의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칼럼은 도대체 거칠 것이 없다. 때로는 독설에, 혹독한 비평에, 권력에 대들고, 대형 언론j과 방송들을 거침없이 메다꽂는 모습을 보면 시원하다 못해 통쾌하다. 늦어진 출간이 오히려 아쉽다.

우리 감리교회에 이렇게 바르고 올곧은 목사가 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비록 그의 활동 무대가 서울이 아닌 경인지역이라서 더구나 기독교계엔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목회와 생활, 그리고 생각과 삶이 함께 어울려 돌아가는 진정한 목회자의 모델로서 자리매김 해온 것이다.

오늘 날 이 땅에 목사는 많다. 그러나 목회와 삶이 함께 어우러지는 참 목회자를 찾기 힘든 세상이다. 8,000여명의 목사가 속한 우리 감리교회에서도 이런 목회자는 손꼽기조차 쉽지않고 매우 드물다. 혹은 진보진영에 속했고 나름대로 운동권이라고 칭함을 받는 목사들은 적지 않으나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여전히 보수적인 목회와 설교로 일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론과 방송은 종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이 이주현 목사의 생각이다. 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더구나 권력을 견제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서 언론과 방송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하니 자금 이주현 목사는 이 땅의 언론과 방송을 대상으로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목회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민언련 이주현대표 19일 '언론비평집' 출판기념회

| 기사입력 2011-08-10 11:39     

【수원=뉴시스】김경호 기자= 경기 수원지역에서 언론운동의 첫 깃발을 세웠던 이주현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가 언론비평칼럼집 '언론에 시비 걸다' 출판기념회를 연다.    

이번 출판기념회는 이달 19일 오후 6시30분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에서 열린다. 

목회자이면서 언론시민운동 실천가이기도 한 이 대표는 2001년 12월1일 언론운동의 불모지였던 수원지역에 언론운동 시민단체를 만드는데 함께 해 지역언론운동과 조중동 반대운동, 지역신문 모니터 활동 등을 통해 언론의 왜곡·편파보도에 맞서 왔다.     

이밖에도 이 대표는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는 기자들의 특종기사를 공모한 뒤 외부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수상자를 선정하는 '경기민주언론상'제도를 도입하는 등 지역언론 활성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김준혁 경희대 전임교수, 민진영 경기민언련 사무처장, 류명화 경기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이성호 수원시민사회단체협의회 상임대표 등 그의 후배들은 초청의 글을 통해 "눈물 많은 이, 분노를 가진 이, 저항하는 이,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고통스런 사회로 내던졌다"고 그를 표현했다. 

그들은 또 "사람이 가진 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 조국의 강토가 백성들의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고 행동하는 사람, 목회자이기도 실천가이기도 한 그의 삶은 고통과 희망의 연속"이라며 "그의 살의 이야기를 나누고, 글 속에서 그이의 참된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 대표는 경기 포천 출신으로 감리교신학대학을 나와 1994년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가 된 뒤 강원도 평창, 충남 태안, 경기 이천 등에서 담임목회를 하다가 1998년 수원 매원교회에 부담임목사로 부임한 뒤 2001년 언론시민운동에 투신, 지역사회에서 꾸준한 언론시민운동을 펼치고 있다.

   
수원 경기문화재단  약도

 

 

 

'언론에 시비걸다'에 실린 칼럼 중에서

[이주현칼럼]
대세’와 ‘대의’의 갈림길에서

종교를 비롯한 사회 모든 분야에서 힘의 논리만이 판을 치는 천박한 모습을 보면서 “철학”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도무지 사회 어느 분야에서도 “철학”을 찾을 수가 없다. 철학이 없는 종교, 이는 이기심을 충동질하여 자기도취와 욕구만족을 추구하는 탐욕스런 사교 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다.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정당한 방향과 그 이유 그리고 동기, 희망과 자유를 심어주는 이념적 근거지로서 터전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종교는 당연히 철학이 없는 삶을 만들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당연히 철학이 없는 사회가 되는 게 아니겠는가?

철학의 정신이라는 게 무엇일까? 바로 진리에 대한 무한한 정열로서의 애지정신(愛智情神), 어떠한 독단이나 편견도 용납하지 않는 비판정신(批判精神), 인류의 최선의 생(生)을 실현케 하기 위해 부단히 가치와 이상을 세워 가는 창조정신(創造精神)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철학은 현실을 떠나 있는, 양피지 냄새나는 이념이나 이론만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으면서 현실을 만들어가는 원동력(헤겔)이다. 부패한 아테네 시민사회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나 무지와 대항하여 민중에게 진리를 일깨워주려다 화형을 당한 부르너, 불의의 침략자에게 유린당한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독일정신의 복원을 설파한 피히테 등이 그 좋은 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온통 ‘힘의 논리’로 구축되어 가는, 그래서 정신을 혼란케 하는 세상에 편승된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철학이 있는 삶’의 첫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성찰은 자신을 마이너그룹이나 안티그룹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시대에 뒤쳐질 수도 있다. 그래도 철학이 없는 천박함보다는 나을 것이기에, 죽는 날까지 ‘철학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재정이 바닥났다. 정부 재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필자가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시민단체의 재정을 말하는 것이다. 4년여 넉넉하진 않지만 근근이 이어왔는데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바닥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허울 좋은 광역단위의 시민단체라는 우쭐함이랄까, 의욕이 앞서 일을 벌이는 바람에 지난 12월에 과다지출이 발생, 어렵사리 이어오던 재정이 드디어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재정이라고 하니까 뭐 대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고정 수입이 1백20여만 원, 회원들이 매달 한푼 두푼 내주시는 회비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몇몇 단체에서 후원을 하고, 활동가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발제를 하거나 토론회, 강연 등을 하면서 받은 사례비를 합해야 최고일 경우 2백여만 원이 채 안 되는 액수다. 흉내만 내는 두 사람의 상근 활동비를 제하면 사실, 남을 게 없는 액수지만 번듯한 사무실도 운영하고 창립기념식 때는 지역 언론사에서 화환도 보내줄 만큼 존재를 인정받는 단체로 성장했다. 혹자는 그런 사실을 도무지 믿질 못한다. 지자체나 공익단체 등에서 엄청난(?)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상상은 자유지만 그런 잘못된 상상을 진실인 양 우기는 건 옳지 않다. 그건 만용이기 때문이다. 23개 일간지와 정확한 수도 파악이 안 되는 주간지가 발간되는 경인 지역의 언론을 감시하는 언론 수용자 단체치고는 지나치게 왜소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건 언론 수용자나 언론사 모두에게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시민단체의 살림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재정적인 압박이 가끔 스트레스가 되긴 한다. 좀 쉬운 길을 택하고 싶은 유혹도 따른다. “이까짓 일 안 하면 안 되나.” 하지만 오기도 생긴다. 온갖 스트레스와 유혹과 오기를 물리칠 수 있는 건 순전히 ‘대의’다. ‘역사의 발전과 의식의 진전’이라는 대의는 움츠러드는 사지를 펴게 하는 신비한 동력이 되기도 하고 혼미한 사고를 명료하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시라도 뒤쳐지면 안 되는 세계화 물결 속에서도 ‘칼바람 속 물대포’를 맞을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역사는 그런 ‘대의’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온 게 아닐까?

반면에 역사를 퇴보시키는 건 아무래도 기회주의자들이 즐겨 써먹는 ‘대세’라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대세 속엔 기득권이라는 세력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기에 안락함이 있다. 넘어져도 받쳐줄 든든한 배경이 있다. 하여 거기엔 스트레스가 없고 치열한 고민이 필요 없다. 물론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시대정신을 애써 거스르는 갈등 정도의 고통은 따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대의’로 변할 수는 없다.

그래서인가, 민주공화국의 기본적인 질서까지 파괴하려 한 삼성 엑스파일 파동은 ‘불법도청’이라는 의제로 변신, 전직 국장원장을 구속하는 사태로 변질되었다. 사학법 개정은 사학의 정상화라는 의제는 온데간데없고 한나라당과 개혁세력과의 정치권 싸움으로 변질되어버렸다. 덕분에 사학법 개정에 찬성하던 사람들의 비율이 조금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사학법 개정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이유를 알기나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한나라당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시기에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사학법은 16대 국회 때부터 논의되어온 법안이다. 4%도 안 되는 세력이 어떻게 사학을 통째로 접수할 수 있는 건지, 합법적인 교원단체인 전교조가 왜 그렇게 나쁜 단체인지 그분들의 구호만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되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 가운데 비록 소수지만 대의를 따르려는 세력이 있었다고 한다. 허나 단 일분간의 눈물연설에 대세로 돌아서는 저들의 선택에 아연할 뿐이다.

그나저나 고민이다. 바닥난 재정 말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노심초사는 되지만 별다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대의를 버리고 대세를 따르진 않겠다. 우리는 죽더라도 그 대의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대의 때문이다.


(2006/1/4 경인일보)

‘다름’과 ‘틀림’


‘다르다’와 ‘틀리다’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다르다’는 둘 이상의 사안을 비교하여 다른 점을 찾는 상대적인 진술임에 반해 ‘틀리다’는 한 개 사실에 대하여 내리는 가치평가다. 그러나 흔히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언어의 병리현상이다. 언어의 병리현상은 가치관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언어를 통해 형성된 의식 때문이다. 이는 치밀한 분석과 논리적 사고의 결여로 말미암은 일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만연된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짚어볼 만한 문제다.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가치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서 비롯된다.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상대방의 견해를 존중하는 것, 이는 분명 ‘다름’의 범주다. 그 다름의 범주 안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다수의 견해를 존중하는 태도가 존재하기에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름’의 범주를 ‘틀림’의 범주로 혼용하여 사용할 때 오는 언어의 병리현상은 가치관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상대적인 관점이 절대적인 관점으로 오용될 때 생기는 현상이다. 거기서는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 존중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상대적인 비교와 차이에 대한 논쟁 대신 ‘옳고’ ‘그름’을 밝히려는 치열함과 투쟁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다툼과 반목이 생기고 차별이 생긴다. ‘너와 나는 틀리다’라는 차별은 인권문제로 나아간다.
지적으로,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이들일수록 ‘다름’보다는 ‘틀림’의 범주에 익숙하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세상과 인간, 삶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생명’과 ‘존재’라는 것으로 묶이기에 차별이 없다. 그러나 미성숙한 사람일수록 그 차별성은 심해지는 법이다. 그것은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우주와 생명’이라는 가치와 ‘자신의 이익과 욕구’라는 가치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성과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이 땅의 소수자들의 인권문제도 그 본질은 차별성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차별성을 심어주는 ‘틀림’의 범주는 왜곡된 가치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틀림의 범주는 어쩌면 신의 영역이다. 하여 보편적 가치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이 땅에서 ‘틀림’의 범주를 찾는다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오만이다. 자신의 기득권 유지와 욕구 만족을 위한 치사한 변명일 뿐이다.
‘북한인권’ 이는 정말 뜨거운 감자다. 굶주리는 사람과 이탈자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과 이를 보는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냉전 보수세력들에게 있어 북한인권은 개혁과 진보를 외치는 세력들을 공격하는 데 있어 유용한 수단이 된다.
백주 대낮에 정권타도를 외치며 쿠데타 선동을 할 때도 등장하고, 지율 스님의 단식을 비판하는 「조선일보」 칼럼에까지 등장할 만큼 북한인권은 그들의 단골 메뉴다. 문제는 북한인권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라크를 침공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전범국가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들고 나오는 단골 메뉴는 늘 인권이다. 그래서 그들은 작년 10월 ‘북한인권법’을 만들었다. 참으로 주제넘은 짓이다. 언젠가 이라크에게 했던 것처럼 인권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려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왜곡된 가치와 모순은 순전히 ‘틀림’의 범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아집과 교만의 산물이다. 인권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삼는 일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살해한 중세의 마녀재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미세한 단어와 표현의 차이, 그 속에 담긴 의미의 깊이를 되새기는 치열함도 인권을 위한 작은 진전이 아닐까.
(2005/3/10 다산인권센터)

 

추천의 글 Ⅰ

소를 그려내는 인간학

김진춘 목사(매원교회 담임)





나는 이 시대의 매연과 소음에 대한 내성이 부족하여 문밖출입을 거의 못 하는 약골이다. 더구나 시대를 이렇게 만들어가는 데 큰 책임이 있어 보이는 일부 폭주세력의 난폭운전에 두려움까지 느끼면서, 아예 문을 닫아걸고 공포감 속에서 알량한 분노를 달래는 부끄러운 소심증 환자다.
그런데 『언론에 시비 걸다』의 저자 이주현 님의 추천사 요청은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받아들였다. 시대의 아픔을 아파하면서 역사가 바르게 돌아갈 수 없을까를 고뇌하는 저자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거들어 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림 전문가의 생각은 상식과는 정면으로 달랐다. 귀신을 그리기보다는 소를 그리는 일이 더 어렵다는 의외의 말이다. 현실 속에 있는 소는, 누구나 보고 알고 있으니까, 그리는 이가 아무리 잘 그려도 비평이 따라오게 마련이란다. 반면에 귀신의 경우는, 그리는 이가 제멋대로 그려도, 귀신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제멋대로가 그냥 귀신 그림으로 통하게 된다는 말이다.
제멋대로 그려진 터무니없는 귀신 그림이 홍수를 이룬다. 종교계를 보면 정말이지 가관이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하여 이제는 종교 밖에서 귀신을 찾아야 될 판이다. 종교계뿐만 아니라 백성의 몸과 마음을 보살펴야 하는 정치권이나 경제계나 문화계나 어디를 들여다봐도 귀신 그리기 잔치판이다.
이제는 귀신 그리기를 멈춰야 할 때가 되었다. 소를 그리는 힘든 작업을 시작해야 할 때다. 저자가 이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 그의 글은 소박하면서도 정연하고 호소력이 강하다. 그의 글은 조용하지만 울림이 깊다. 그러나 그의 소 그리기는 고뇌의 연속이리라 짐작한다.
저자가 목사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생각을 더 하게 만든다. 신학은 인간학을 위한 서론에 불과하다는 평범한 이치를 온 세상이 받아들여야 한다. 신학은 이제 터무니없는 귀신 그리기를 멈추고 소를 그려내는 인간학에 힘을 쏟아부어야 할 때다. 인간학으로 나가지 않는 신학은 저급한 코미디일 뿐이다.

추천의 글 Ⅱ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사는 한 목회자의 삶

이정배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그가 대학 4학년 시절인 1986년에 우리가 만났으니 햇수로 25년이 지난 셈이다. 당시 우리는 초자 교수와 나이 든 학생으로 만났으나 그때의 정감이 아직도 남아 있어 세월이 흘렀으되 볼 때마다 설레고 마음속까지 따사롭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1회 졸업생으로서 후배들 앞에 떳떳하고자 그가 흘린 땀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아주 짧은 세월 함께 공부했기에 배운 것이 얼마 되지 않겠으나 그래도 이 사람을 스승이라 여겨 연락을 주고 이렇게 귀한 책의 출판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니 참으로 고맙다.

이주현 목사가 신문지상에 칼럼을 쓴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으나 실상 그 글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이토록 무심했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나지만 그 역시도 내게 그런 내색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주변 지인들의 관심 여부에 관계없이 그는 긴 세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출판을 앞둔 그의 글들을 대하고 보니 치열하게 현실을 인식하며 살았던 그의 지난 삶이 한없이 존경스럽다. 사실 그의 칼럼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분석에 근거했으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신학적 통찰이 함께했다.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서 살고자 했던 옛적의 본회퍼 목사처럼 이주현 그도 일상의 언어로 세상을 넘는 이야기를 쏟아 놓고 있다. 우리 시대 수구언론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비판은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사는 한 목회자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교회 속의 청중을 위해서도 설교했으나 교회 밖 세상 사람들, 특히 경인 지역 주민들에게 비종교적 방식으로 예언자의 소리를 질러댔던 것이다.

성서가 현실, 곧 신문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상황과 마주치지 않을 때 그것은 죽은 언어일 뿐이다. 예수가 대답이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일수록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신문은 신학적·목회적 실존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매체다. 신문이 파헤친 현실 이해 없이 성서언어를 강단에서 선포하는 것은 죽은 하느님을 선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언론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가치를 왜곡할 때, 정부의 감시견이 아닌 애완견으로 전락할 경우 이보다 무섭고 어처구니없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현실은 너무도 쉽게 사실과 가치를 뒤집고 만다. 이 점에서 이주현은 목사로서 언론을 향해 하느님의 진노를 토해내었다.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을 조직하여 언론의 타락을 막아내고자 혼신의 마음을 기울였던 것이다.
언론에 매를 든 한 사람의 목회자를 향한 찬사도 있었겠으나 그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숫자가 더욱 많았을 듯싶다. 더욱이 교회 안에서도 목사인 그의 행보를 수용하지 못한 성도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목사였기에 홀로 이 싸움을 할 수 있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현실을 보았고 세상을 읽었기에 거짓된 보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이주현 목사가 너무도 자랑스러워 이제 그가 나의 선생이 되었음을 세상에 말하고 싶다. 긴 세월 골방에 앉아 무엇이 진실인가를 고민했을 것이고 거짓을 파헤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했을 터, 그 과정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그가 쓴 내용 모두를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쓴 칼럼의 목차만 보아도 그가 인생을 헛살지 않았음을 익히 알 수 있다. 하루하루를 기도하며 성찰하며 살았다는 명백한 증거라고도 하겠다. 기독교의 원죄에 해당하는 것이 불교의 경우 탐진치(貪嗔恥)다. 욕심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이 그의 전통적 풀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개인 윤리 차원을 넘어 달리 해석되고 있다. 즉 탐(貪)은 끝없는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체제를 적시하고, 진(嗔)은 분노의 집단적 표현인 군사문화이며, 치(恥)는 인간에게 어리석음을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을 일컫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주현 목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벗겨내는 우리 시대의 현자, 지혜자인 것이 틀림없다. 앞으로도 그의 지혜가 날로 빛을 발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응원하고 싶다. 이제 그의 이름으로 나오는 첫 책 『언론에 시비 걸다』를 필두로 더 많은 지혜의 책들이 그의 손으로 쓰일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작업이 결코 이주현 목사 혼자 힘으로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를 도와준 여러분들이 계실 줄 안다. 앞으로도 힘을 합하여 그로 하여금 지혜자와 예언자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본 책의 출간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추천의 글 Ⅲ

시비 거는 언론과 언론에 시비 거는 사람

박종수 교수(수원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오늘날 매스미디어는 그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정치뿐 아니라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여론정치를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삼고 있는 나라들이 늘어나면서 언론의 역할이나 그에 의한 영향들은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1920년대부터 시작한 라디오와 신문의 발전은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고자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소위 독점적 언론기업으로 발전해 나아감으로써 사회적 이미지의 획일적 현상이 점차 사회를 지배하게 되고 획일화된 정보로 인한 대중의 사회에 대한 의식은 결국 몇몇 재벌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언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된다.
지금까지의 언론, 특히 신문조직은 흔히 공공성이나 속보성, 또는 정기성 등의 것을 기본으로 해 왔으나 어느새 상업성과 오락성을 기반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국가 통제하의 언론이 기업 통제하의 언론으로 자리바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의 언론은 경제활동의 일부로서 각종 언론 관련 산업의 발전은 물론 소위 공적 역할을 가장한 수익사업의 경제활동을 재포장해 독자나 사청자에게 권력행사를 공공연히 하고 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특정의 사회적 실체나 사회적 형상들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하고 구성해 나간다. 따라서 인간이 사회환경 속에서 접하는 “세계들”과 “살아 있는 실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동시대에 접하고 있는 실체로서의 실체가 아니라 허상으로서의 구성된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월터 리프만은 1922년도에 발표한 Public Opinion이란 책에서 한 사회 내에서 신문이 전달하는 이미지란 가상의 현실로서 실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단지 허위환경(pseudo-environment)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한 사회 내의 시민들이 접하는 것은 단지 그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유형화된 틀을 제공받음으로써 그 사회의 허위환경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시민들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 또는 결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신문의 정보를 통해 획득한 이미지에 따라 특정의 사실을 해석하고 평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고유한 선택이나 결정일 수가 없다.
결국 사회의 결정권은 언론이 사회 내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집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시민 각자의 주권을 바탕으로 한 안정된 민주주의 기본원칙에 기초한 안정된 민주주의는 사실상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들 자신이 여론을 주도하고 올바른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의 언론에 대한 역할관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인간의 참된 주체성을 회복하며 언어와 행동을 일치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언론이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전파자, 즉 지배계급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전락한 언론을 비판해야 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오늘 우리 사회의 언론 역시 노동자를 기만하고 노동자로 하여금 그들이 착취당하고 소외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일깨우는 미디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은 단지 노동자들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소외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진정한 존재 의의를 체계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 특히 언론인의 임무란 허위의식을 참 의식으로 바꾸는 전위대 구실을 해야만 한다.

이주현 대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목회활동을 하는 목사로서뿐 아니라 경기민언련 공동대표로서 언론과 맞장 뜨는 일을 기꺼워하고 있다. 그래서 이주현 대표가 그 동안 쓴 글을 모아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떤 책이 될지 기대를 가지게 했다. 요즈음같이 언론과 언론인의 모습이 굴욕적이고 무책임한 상황에서 “언론에 시비 걸다”라는 그의 책 제목을 접하면서 문득 돈키호테 같은 무모함도 느껴졌다.
그의 야심찬 계획은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실제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문득 반가움과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의 글은 누구나 쉽게 말하고 쉽게 쓸 수 있는 그런 글이 아니다. 그의 글은 오직 실천하는 자만이 몸으로 쓸 수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의 언론에 대한 관심과 생각들은 바로 언론에 대한, 그리고 언론인에 대한 단순한 비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지녀야 할 언론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참 언론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와 함께하는 한 우리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차례


머리글┃언론을 바로 볼 수 있는 ‘작은 지침서’ - 이주현 목사 ∙ 3
추천의 글Ⅰ┃소를 그려내는 인간학 - 김진춘 목사 ∙ 7
추천의 글 Ⅱ┃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사는 한 목회자의 삶 - 이정배 교수 ∙ 9
추천의 글 Ⅲ┃시비 거는 언론과 언론에 시비 거는 사람 - 박종수 교수 ∙ 13

언론 뒤집어 보기

지단과 마테라치, 그리고 북한 미사일 ∙ 24
한미동맹, 그 실상을 제대로 보여달라 ∙ 27
북의 ‘아리랑’ 공연, 보면 안 되나? ∙ 31
6월에 보는 서울시청 광장의 성조기 ∙ 34
히딩크 신드롬과 냄비언론 ∙ 37
수구언론의 경박함 ∙ 40
타락한 가치관이 만든 변태언론 ∙ 43
수구언론의 변신, 아직 멀었다 ∙ 46
수구언론의 악마적 속성 ∙ 49
짝퉁신문의 짝눈 짓 ∙ 53
자칭 비판신문이라니 ∙ 56
부패 종교 비호하기 ∙ 59
그들만의 국익 ∙ 62
분열과 갈등의 주범 ∙ 65
실패한 역사에 대한 열등감 ∙ 68
본질을 알면 생각이 바뀐다 ∙ 71
강정구, 강만길도 구분 못하는 언론 ∙ 74
사학법 논란과 보도에 나타난 오류들 ∙ 77
심히 우려되는 관언 유착 ∙ 80
북 핵실험 보도에 나타난 오류들 ∙ 83
탈레반보다 더 잔인한 언론 ∙ 86
칼럼 “시민단체의 허울”에 대한 유감 ∙ 89
군용비행장 활주로도 옮기는 재벌 ∙ 92
세종시와 수정법 폐지법안 논란을 보며 ∙ 95

언론의 본질과 사명

당신들은 분하지도 않은가? ∙ 100
지금 수도권은 전쟁 중 ∙ 104
삼성과 언론 ∙ 108
존재의 가치를 먼저 논해야 할 신문들 ∙ 112
헌재의 위헌 판결에 대한 보도 유감 ∙ 116
다시 언론의 사명을 생각한다 ∙ 119
자본의 야만성 편드는 언론 ∙ 122
스스로 권력화 된 언론, 그 자화상 ∙ 125
궤변·선동 판치는 족벌신문 ∙ 128
그들만의 세상, 그들만의 언론 ∙ 131
‘맥아더 논쟁’ 입 틀어막는 신문 ∙ 134
평양행 기내에서 본 어떤 부자 신문 ∙ 137
황우석 박사를 위한 촛불시위자들에게 ∙ 140
정언 유착, 부적절한 상호이해 ∙ 143
수도권규제철폐, 적절한 의제인가? ∙ 146
‘바다이야기’의 몸통 ∙ 149
언론에 나타난 악의 평범성 ∙ 152
어느 지역 신문의 호연지기 ∙ 155
촛불은 없고 결과만 난무하는 언론 ∙ 158
수도권규제철폐 논란과 언론의 자리 ∙ 161
말보다는 말귀를 전해주는 언론 ∙ 164
한류우드와 562돌 한글날 ∙ 167
언론은 무얼 먹고 사나 ∙ 171

시민이 미디어다- 언론 수용자 주권 찾기

민방위다 이놈아! ∙ 176
시민단체와 지역 언론의 파트너십 ∙ 180
경인 지역 채널권 확보를 위하여 ∙ 183
경인 지역의 새로운 언론 지형 ∙ 186
경인 새 민방과 ‘한겨레 정신’ ∙ 189
언론 수용자의 자유 되찾기 ∙ 192
정파 반년, 희망 심기 반년 ∙ 195
방송위원회에 대한 유감 ∙ 198
‘불신의 정지’를 해제하라! ∙ 201
산동에서 들은 ‘목동 애가’ ∙ 206
감동,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이유 ∙ 209
SBS가 경인 지역 시청자들을 위해 할 일 ∙ 212
시방새, 마봉춘, 김봉순을 아십니까? ∙ 215
대한민국의 베를루스코니 ∙ 218
언론 수용자의 알 권리와 인권 ∙ 222
미디어법, 국민의 여론에 따라 처리해야 ∙ 225
언론 관련법 처리 유감 ∙ 228

역사의 발전, 의식의 진전을 위하여

철학이 있는 삶 ∙ 232
이 시대 최고의 모순 ∙ 236
실패한 역사에 대한 열등감 ∙ 239
‘다름’과 ‘틀림’ ∙ 242
4월에 부르는 남도의 노래 ∙ 245
성공한 역사를 위하여 ∙ 248
‘개똥녀’의 인권 ∙ 251
삼성에 멱살 잡힌 민주주의 ∙ 254
‘대세’와 ‘대의’의 갈림길에서 ∙ 257
한류우드, 명칭 왜 안 바꾸나? ∙ 260
구린내 나는 두레교회의 정치후원금 ∙ 263
우울했던 성탄절 풍경 둘 ∙ 266
무엇이 우리를 못살게 하는가? ∙ 269
한미 FTA, 인간으로서의 ‘난파’ ∙ 272
무분별 공안탄압, 당장 중지해야 ∙ 276
대한민국의 양심거울 ∙ 279
2007 대선 유감 ∙ 282
무엇이 국익인가? ∙ 285
청소년 자살 부추기는 교육 현실 ∙ 288
쌍용차 옥쇄 파업 77일이 남긴 것 ∙ 291
사교육비와 외고 폐지 논란 ∙ 294
문명시대 야만의 법 ∙ 297
‘빨갱이’란 문명시대 야만어 ∙ 300

'언론에 시비걸다'에 실리지 않은 최근 칼럼 중에서

[이주현 칼럼]
'살림'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살이'

 

   

우리말 가운데 '살림살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보통 "살림에 쓰이는 온갖 물건" 즉, '세간살이'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태도와 자세를 나타내는 참으로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림살이'란 말은 '남을 살린다'란 뜻의 '살림'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살이'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복합명사입니다.

'남을 살려야 자기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상생과 공생의 원칙을 담고 있는 말인 셈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존재하기까지 억겁의 세월과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 수많은 연계 속에서 존재 하는 생명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 과정과 연계 속에서 어느 한 부분이 생략되거나 제외되었다면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사상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던 과정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N. Whitehead 1861~1947)는 세상의 본질을 Nexus(연계)와 Process(과정)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틀리다는 평가를 함부로 내리질 않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넓어지고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규정하는 '절대'라는 영역이 얼마나 부질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긍정이 곧 자신의 삶의 전제이자 근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살림살이'란 말도 그런 뜻을 품고 있습니다. 굳이 '살림' 뒤에 '살이'를 배치한 배경 속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우선순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살이'를 위해 '살림'을 먼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동서고금에 나타난 경전과 성현들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낭패와 꼬임은 바로 이러한 순서의 뒤바뀜 결과가 아닐까요?

'살리기'로부터 삶을 시작하면 '살이'이는 저절로 되는 법일 텐데, '살리기'없이 '살려고'만 하니 일이 제대로 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문을 열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미련함'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요?

최근, 북한에서는 현대의 금강산 관광 독점권 취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초강수를 둔 것은 지금까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기 위한 해법이 보이지 않자 북한이 주목을 끌기 위해 현대의 사업 독점권 취소를 결정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대북 문제에 관한 한 한 번도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희망적인 소식은 없었던 터라, 충격적이기 보단 일상적인 소식으로 받아드려 집니다. 뭔가 발상의 전환이나 획기적인 변화 없이는 이러한 대결과 긴장은 지속될 거란 생각이 들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똑똑한 사람들의 분석과 전망 그리고 비평은 난무하지만, 남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남북관계가 이토록 파탄지경에 오기까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논리의 부재도 아니고 정책의 부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통일에 대한 의지와 철학의 부재였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수원에서 작은 통일운동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하루 100원씩 기금을 모으자는 운동입니다. 통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하자는 취지입니다.

남북관계의 파탄에 대한 책임공방 속에서 무책임하게 방치되는 남북관계를 보고만 있는다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입니다. 역사와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는 기분입니다. 통일을 위해서 서로 도와야 하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출발점에 다시 서고자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모으는 운동인 셈입니다.

이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살림살이'를 실천하려는 움직임입니다.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문을 먼저 열어야 한다'는 아주 평범한 상식을 삶 속에서 실천해 보려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통일은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일 것입니다.
(부천타임즈 2011년4월19일)

 

머리글

언론을 바로 볼 수 있는 ‘작은 지침서’


목회자의 신분으로 언론운동을 한 지 10년이 되었다. 목회자의 길과 얼핏 연관 짓기 쉽지 않은 길을 함께 걸어온 셈이다. 그럼에도 그 길을 걸은 것은 목회라는 영역과 시민운동이라는 영역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목회자에게 있어 성서의 가르침은 최고의 가치이며 삶의 근거이며 판단의 기준이다. 그 근거와 기준으로 볼 때, 왜곡과 오류로 얼룩진 이 시대 언론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일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목회라는 영역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언론운동이라는 시민운동 영역까지 확장된 셈이다. 결국 이 책에 나온 글 가운데 신앙적인 용어나 표현은 없지만, 그 속에는 나의 목회철학과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언론은 사회를 보는 창이다. 현실에 대한 왜곡은 시민들에게 왜곡된 가치를 심어주게 된다. 따라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보도를 통해 대중의 알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게 언론의 책무다. 그 속에서 형성된 여론과 건강한 가치관을 통해 역사의 발전을 이뤄내고 의식의 진전을 이뤄내는 일은 또 다른 차원의 인간 구원이자 사회 구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언론이 기여한 바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더 많아 보인다. 권력과 자본에 굴종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을 뿐 아니라 이제는 아예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른바 족벌언론을 중심으로 한 부자신문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저널리즘’이 사라진 세상에 살면서, 언론이 언론의 자리를 찾게 하는 것은 일정 부분 언론 수용자의 몫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언론 수용자의 자유와 주권을 언론 수용자 스스로 지켜내야 할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과정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누구를 비판한다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다. 무엇보다 잘잘못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소신이 있었던 터라, 목회자로서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비판은 감정적 반발심에서 나온 ‘비난’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가급적 비난은 삼가고, 보편적 가치와 상식적 차원의 판단에 근거한 성찰을 전제로 정당한 비판을 하려고 노력했다.
아무튼 이 책 속에는 왜곡된 언론과 사회 현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과 분노 희열과 같은 감정이 뒤범벅된 채 ‘언론비평 칼럼’이란 글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같은 길을 가는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언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신의 정지’에 익숙한 평범한 시민들이 언론을 바로보는 작은 지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언론운동을 하면서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주로 신문과 방송을 통해 이미 발표된 내용들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고한 날짜와 언론사를 명시했다. 10여 년 간의 글을 모은 터라 시의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그간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언론을 보는 관점과 시각을 스스로 세워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책의 구조는 크게 4부로 나누었다. ‘1부 언론 뒤집어 보기’에서는 언론 소비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를 다뤘다. 일종의 언론 바로 보기다. ‘2부 언론의 본질과 사명’에서는 언론사와 종사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다뤘다. ‘3부 시민이 미디어다’ 편에서는 언론 수용자들의 자유와 주권에 대한 생각들을 다뤘다. ‘4부 역사의 발전과 의식의 진전’ 편에서는 목회와 시민운동이 함께 지향해 나가야 할 가치와 목표를 제시했다.
사실 이 책을 출판하기까지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과연 이 책이 나무 한 그루 가치를 해낼까?”라는 고민 말이다. 그 자문에 대한 답변이 늘 궁색했기에 출판 작업도 늦어졌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 질문에 대한 자신 있는 답변은 솔직히 준비가 안 되어 있다. 그런 나의 고뇌와 고백을 독자와 함께 공유하면서 역사의 발전과 의식의 진전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된다면 큰 보람을 느낄 것 같다.
끝으로 시민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고 뒷바라지 해주신 김진춘 목사님과 매원교회 교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무엇보다 까칠하고 부담스런 글들이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도록 지면과 전파를 빌려준 언론사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망설이는 나에게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신 이필완 목사님과 신앙과지성사 최병천 사장님, 꼼꼼한 교정과 편집을 통해 거친 글을 품위 있게 만들어주신 편집실무자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기쁜 맘으로 추천의 글을 보내주신 이정배 교수님과 박종수 교수님, 정연우 교수님, 이강택 위원장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긍지와 보람 하나로 버티며 함께 언론운동을 하고 있는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와 회원들에게 머리 숙여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보내드리고 싶다.

2011년 7월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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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119.205.111.175)
2011-09-29 14:35:57
선배님 멀리서 그 행보에 부러워 하면서 존경해왔는데 이리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니 경외스럽습니다 몸 건강 잘 챙기시고 그 예언자 소리로 세상이 변화되길 소원합니다 89 김지현 올림
리플달기
7 13
김희태 (118.40.207.127)
2011-08-31 17:25:41
형님 존경 합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고,
건강 하세요.
리플달기
9 15
gus (112.153.209.41)
2011-08-27 02:19:58
거의 여기는 자기 동창 자랑하기 싸이트네요. 동문회 카페 같네....
리플달기
7 21
샘터 (221.140.251.44)
2011-08-22 17:03:15
이름과 얼굴이 끊겨진 채로 지내왔는데

이제 제대로 연결되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책은 구입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리플달기
8 16
성곡 (175.196.143.206)
2011-08-18 13:41:39
박수를 보냅니다.
리플달기
9 16
창공 (218.144.172.217)
2011-08-17 13:13:56
이주연 선배님, 종교철학도다운 행보에 박수를 보냅니다.
살림살이의 의미.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리플달기
1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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