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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적(表層的) 종교인과 심층적(深層的) 종교인 (3)
류기종  |  rkch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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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8월 14일 (일) 14:10:53
최종편집 : 2011년 08월 14일 (일) 15:17:18 [조회수 : 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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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적(表層的) 종교인과 심층적(深層的) 종교인 (3)

'영성'(Spiritual/Spirituality)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영성'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심층적 신앙태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성'이란 바리세파 사람들의 신앙태도인 문자주의 혹은 율법주의적인 신앙태도 곧 표층적 신앙 태도/단계에서 벗어나 심층적 신앙 태도/단계로 옮겨가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복음(가르침의 말씀들)의 참 뜻을 올바로/깊이 이해하고/깨닫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 사는 일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이 지니고 있는 깊은 의미를 올바로 깨달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았느냐고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마13:19)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나니라"(마13:23)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마13:51)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15:10)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15:16)
"진리를 깨달을지니 그 진리의 깨달음이 너희를 저유하게 할 것이다"(요8:32)

예수의 복음은 구약성경의 문자적 이해를 전적으로 뛰어넘어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간파하여 알려주신 말씀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들이다. 그런 점에서 구약성경의 영적 진리들은 예수의 복음 속에 다 스며들어 녹아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복음의 말씀들만 바로 다 이해하면 구약성서의 모두를 다 이해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적 원리들을 팔복이라는 8개의 영성원리 즉 지복(至福)의 원리로 집약해서 말씀해 주고 있다.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예수의 팔복은 바로 인간완성과 인간의 궁극 행복(지복)의 원리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절대평화 세계 실현의 8가지 원리이다. 그것은 바로 (1)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낮추는 '겸손'과 (2)타인에 대한 친절함과 부드러움 곧 '온유함', (3)깊은 자아성철에서 오는 영적인 슬픔과 아픔, (4)공의와 정의에 대한 한없는 갈망, (5)타인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자비/긍휼의 실천, (6)종교적 수행/수덕의 목표인 청정심(淸淨心/pure mind)의 달성, (7)화해자 곧 평화 창조자(peace-maker) 즉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화실현의 도구가 되는 일, (8)진리(정의)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이 예수의 팔복 곧 8가지 영성 원리는 바로 우리 종교인들/신앙인들을 표층적 종교인(신앙인)에서 심층적 종교인(신앙인)으로 변화시키고 승화시키는 영성원리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복음은 전적으로 심층적 종교인/신앙인이 되게 하는 영성원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복음에 기초한 '복음주의'(evangelism)이란 바로 반 문자주의, 반 율법주의, 반 형식주의, 반 교리/교의 주의, 반 교권주의, 그리고 그 대신에 말씀에 내포된 깊은 영적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서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영성주의적 태도와 입장이 루터(Luther)나 칼빈(Calvin)이나 웨슬리(Wesley)가 주장하고 일어난 복음주의이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개신교회(The Reformed/Protestant Church)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세파 사람들의 문자주의/율법주의적 성경이해 태도와 표층적 종교형태를 거부하고, 말씀의 영적 이해를 강조하고 신행일치를 강조한 심층적 종교/신앙 태도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의 개신교회는 어떻게 된 것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토록 거부하고 배격한 바로 그 율법주의 문자주의를 '축자영감설'이란 원리를 내세워서 다시 바라세파 사람들 보다 한 층 더 심한 문자주의로 회귀하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올바른 신앙 태도인가?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또한 문제 중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이 특별히 숙고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개신교를 가리켜서 예수 없는 (예수)교회 혹은 예수 없는 기독교 또는 심지어 (특히 젊은 층들의 기독교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적 표현인) '개독교'란 말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오늘의 교회가 예수의 영성주의 곧 심층적 종교형태를 거부하고 바리세파 사람들의 종교형태인 문자주의 즉 표층적 종교형태로 퇴보시키거나 또는 이상한 기형적 종교 즉 반지성적인 기복적/무속적 종교에 가까운 종교로 변질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개신교)에 있어서 가장 잘못 이해된 것 중의 하나는 '성령'(the Holy Spirit)에 대한 이해이다. 성령은 진리/지혜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신비한 영적 실재(pneuma/spiritual entity) 곧 진리와 지혜의 영으로서(요14:17; 16:13) 우리 인간을 초이성적 지혜(supra rational wisdom)를 지닌 가장 최고의 지적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 가장 완전한 본보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완전한 성령 충만자 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영적 지혜 곧 초이성적 지혜를 지니셨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 충만자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지고한 영적 지혜를 지닌 곧 초이성적 지혜를 지닌 최고의 지성적인 사람(highest intellectual person)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령을 단순히/주로 사도행정 2장에 나오는 오순절의 성령감림/임재 사건으로 이해하고, 은사 중심적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성령의 초이성적 지혜인 지적인 요소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 자'(Spirit-filled person)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바로 우리의 신앙의 궁극적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깝게 닮은 사람, 즉 초이성적 지혜인 영적 지혜로 충만한 사람, 다시 말하면 보통 사람이 따라 올수 없는 최고의 지성과 지혜를 소유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 자와 보통 사람과의 차이는 바로 그러한 영적 지혜(통찰력)와 지성의 소유의 유무로 구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면 바로 그러한 초이성적 지혜의 소유자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층적 종교인/신앙인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진리와 지혜의 영인 성령으로 채움을 받은 자 곧 심오한/신비한 영적 지혜를 지닌 숭고한 지성(noble/supreme intellect)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의 교부들 곧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라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카파도키아 교부들, 성 어거스틴과 성 버어나드, 성 푸란시스, 아빌라의 테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그리고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 개혁자들과 18세기의 경건주의자들(Pietists)에 이르기 까지 모든 영성가들(spiritual thinkers)이 바로 이러한 지고한 지성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주고 있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다는 것은 바로 표층적 신앙인에서 심층적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점을 특별히 유념해야 하다. 성령운동 또는 영성운동은 사람들(신앙인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표층적 신앙인에서 심층적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는 운동(movement)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문자주의적 성경이해나 율법주의 혹은 교리나 교권주의적인 신앙 태도에서 영성주의적 신앙태도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로만 성령 충만, 성령 충만 하면서 아직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밖에 이해 못하는 문자주의적 신앙태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진정한 성령 충만의 태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령은 하나님의 신비 즉 지극히 신비한 경지까지를 깨닫게 한다고 말했다(고전2:10).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상태 혹은 성령 충만자가 되는 일은 바로 성도들이 표층적 신앙 단계에서 심층적 신앙 단계로 옮겨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심층적 신앙 태도란 단적으로 말하면 어떤 것인가? 요약해서 말하면 심층적 신앙 태도란 바로 성경의 말씀을 문자대로 이해하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에 함유된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달음과 동시에 그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는 신앙 태도를 말한다. 예수는 표층적 신앙인과 심층적 신앙인의 차이를 그들의 삶 곧 그들의 열매로써 안다고 말씀했다. 즉 심층적 신앙인이란 바로 자신이 신앙하는 바를 깊이 이해함과 동시에 그 깨달은 대로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 곧 믿음과 생활이 일치하는 신행일치(信行一致)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 20). 그리고 특히 산상수훈의 말미에서 나의 복음을 듣고 실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지혜로운 자 곧 현자(賢者) 같으며, 나의 이 말(복음)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 곧 우매자(愚昧者)와 같다고 말씀했다(마7:24-27). 그런 점에서 심층적 신앙인은 깊은 영성과 지혜를 지닌 지혜자 곧 현자를 지칭하며 표층적 신앙인은 그런 깊은 영성과 지혜를 갖지 못한 우매자(the ignorant)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오는 말: 오늘날 진정으로 이 사회와 세계가 요구하는 사람은 표층적 종교인/신앙인이 아니라 바로 심층적 종교인/신앙인이다. 왜 그런가? 표층적 신앙인은 불신앙인 곧 세속인과 별로 차이가 없기 때문에 종교의 중요한 기능이며 사명인 사회정화(social renewal/renovation)에 기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들이란 말이다. 종교의 근본 기능은 개인과 사회의 내면적(정신적) 변화 곧 실질적 변화에 기여함에 있다. 그러나 표층적 종교인/신앙인은 이 세상과 사회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사회를 정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사회를 혼탁케 하고 오염시키는 역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표층적 종교인/신앙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종교와 함께 사회가 부패하고 타락하기가 쉬운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자정능력이 없다고 비판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표층적 종교인/신앙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표층적 종교인/신앙인은 자신의 개인적 안위나 축복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에 기복신앙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려우며, 따라서 이 땅위의 하나님 나라 실현이나 이 세상의 정의나 평화 실현 등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표층적 종교인/신앙인은 그가 속한 공동체(종교)의 발전에도 저해 요인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분열과 부패와 타락의 원인이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표층적 종교인들은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이득(축복)에 더 관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의 공식을 만들 수 있다. 즉 표층적 종교인/신앙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종교는 더 경직되거나 혹은 타락하고 부패하기 쉬우며, 심층적 종교인/신앙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종교(교회)는 더 생명력이 있고 활기차며 창조적 힘을 발위하며 또한 사회정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오늘날 교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미스런 사건이나 문제들은 바로 종교인들이 종교의 본연의 자세인 심층적 신앙형태에 이르지 못하고 표층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오늘의 기독교(교회)뿐 아니라 모든 종교들에 해당하는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표층적 종교화된 유대종교 특히 모세의 율법(혹은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맹신하는 율법주의/문자주의 종교 형태를 심층적 영성적 종교 행태로 변혁시키는 지고한 영성운동(spiritual movement)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표층적 신앙 형태에서 탈피하고 심층적 신앙 형태로 도약하게 하는 일에 총력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이점은 누구보다도 특히 오늘의 종교/교회 지도자들이 크게 관심하고 수행해야 할 일이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반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심층적 종교/신앙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자인가 아니면 표층적 종교/신앙 형태에 머물러 있는 자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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