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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의 "얼나"와 "진각인"(眞覺人)
류기종  |  rkch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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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7월 10일 (일) 16:34:40
최종편집 : 2011년 07월 10일 (일) 17:03:01 [조회수 : 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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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의 "얼나"와 "진각인"(眞覺人)

   
▲ 류영모
1900년대 곧 20세기는 우리 한국 사회가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를 경험한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일, 1945년 나라를 되찾은 일과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일, 1950년 6.25로 촉발된 남북 간의 전쟁, 1960 년대에 일어난 4.19 민주화 운동의 시동과 5.17 군사 혁명 및 급격한 산업화의 시동, 그리고 연속해서 유치한 전 세계인의 체육의 향연인 88년 하계 올림픽, 2002년의 월드 컵 경기와 2011년의 세계육상 선수권대회, 그리고 2018년의 동계 올림픽을 앞에 두고 있다. 이에 병행하여 우리 한국은 현재 정치만 빼고 경제 사회 기술 문화 여러 면으로 세계 수준에 진입해 있다. 그 결정체의 하나가 바로 "한류"(Korean Cultural Trend)라는 문화 콘텐츠이다. 한류라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소수의 음악인이나 예술인들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100여 년간에 걸친, 아니 지난 수천 년간에 걸쳐서 흐리고 있는 한국인의 혼과 열정의 결정으로 이룩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기간에 우리 한국에서 사상적으로 혹은 영성적(정신적)으로 세계에 내놓을 만한 사상가가 있다면 필자는 다석 류영모를 내놓고 싶다. 우리 한국은 지난 수천 년에 걸쳐서 뛰어난 사상가를 배출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면 신라시대의 원효와 고려시대의 지눌 그리고 이조시대의 율곡과 퇴계 4인을 들고 싶다. 왜냐하면 이 분들은 비단 우리 한국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세계인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20세기 기간에 활동한 최수운 같은 분도 독창적인 사상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수운의 사상은 현재 세계인들에 의해서 검증 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다석 류영모의 철학과 종교 사상은 이미 한국 사회 에서는 종교나 종파의 구별을 넘어서 상당수의 지성인과 학자들에 의해서 그의 사상의 독창성과 세계성이 인정받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 종교인들과 지성인들에게 의해서도 점점 더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세계의 학계에서 까지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한 증표가 최근에 영국의 에딘버러(Edinburgh) 대학에서 그의 강좌가 개설된 사실을 예로 들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사상연구로 석사논문과 PhD 논문이 속속 나오고 있는 사례를 들 수 있다.

오늘날 다석의 사상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동양의 정신문화의 큰 유산인 유불선(儒彿仙/유교,불교,도교)과 그리고 서구문화의 근간인 기독교의 중심사상들을 관통하고 조화시킨 그의 통전적(統全的) 영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한국 역사에 있어서 어느 누가 그리고 이 세상의 누가 이런 엄청난 일을 해냈으며 또한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다름 아닌 다석 류영모가 지난 20세기 동안에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다석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석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석의 종교 사상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사상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을 그의 "얼나" 사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얼'이란 '영'(靈/Spirit/Pneuma) 혹은 '영적인'(Spiritual)의 순수 우리말로서, '얼나'는 영적으로 거듭난/깨달은 나 곧 '영적인 사람'을 뜻하며, 그 반대는 '제나' 곧 육적인 사람 즉 탐(탐욕) 진(분노와 미움) 치(어리석음과 색정)의 죄성 혹은 동물성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석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삶(인생)의 최대 목적과 과업은 '제나'에서 '얼나'로 거듭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종교와 종교인의 지상의 과업이며 목표이다. 사실 종교의 존재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을 '제나'에서 '얼나'로 변화시키고 승화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 구원하고 말을 많이 말하는데, 구원 혹은 구원 받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제나'에서 '얼나'로 변화되는 것 혹은 다시 태어나는 것 그리하여 모든 얽매임과 두려움과 질고에서 온전히 자유함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는 개인이건 가정이건 또는 사회 (민족과 국가와 종교 혹은 어떤 공동체 이건)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인간의 자연적/본능적인 상태인 '제나'의 상태에 머물러 있음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 밖이나 혹은 종교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바로 우리 인간이 '얼나'에 이르지 못하고 '제나'의 상태에 머물러 있음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류영모는 바로 이점을 분명하게 깨달았으며, 그리하여 이것을 그의 사상의 중심에 놓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얼나'의 사상은 예수의 복음/가르침과 그의 영성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것은 요한복음의 중심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당시 유대교의 정통파로 자처하는 바리세파 사람이며 동시에 원로원격인 산헤드린 회원이고 또한 최고의 지성인으로 보이는 니고데모를 향하여,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영으로 다시 난다'는 말은 바로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 혹은 보통의 인간적인 상태인 '제나'에서 영적인 사람인 '얼나'로 거듭나는 일 곧 영적인 사람으로 '질적/본질적 변화'(essential-substantial change)를 입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다석의 얼나' 개념(사상)의 단초는 바로 이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니고데모를 향해서 한 이 말씀에 기초한 것으로 사료된다. 예수는 이때 니고데모를 향해서 다시난다 혹은 거듭난다는 말은 인간의 질적/영성적 변화를 지칭하는 것으로써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연적 육적인 상태에서 지고한 영적인 상태로의 질적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조금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요3:6)고 일러준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영으로 다시 난다는 것은 바로 진리의 영인 '성령'으로 다시 난다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요3:8). 그러면 여기서 예수가 말씀한 성령으로 다시 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류영모에 따르면 성령으로 다시난다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제나'에서 '얼나'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자연적인 (혹은 동물적인) 상태인 '제나'에서 지극히 영성적 모습인 '얼나'로 변화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예수는 진리의 영인 성령의 의해서 즉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 같이 신비롭게 작용하는 성령에 의해서와 그리고 궁극적 진리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아 앎으로서 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 것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8:32).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3장 8절과 8장 32절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제나'에서 '얼나'로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은밀한 활동에 의해서인데, 이 성령은 바로 진리의 영 혹은 지혜의 영으로서 우리를 눈에 보이는 것 밖에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지자에서 우주만물의 존재의 신비를 깨달아 아는 진정한 지혜자 곧 영지자(영적 지혜자)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진리/지혜의 영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 곧 궁극적 실재(진리)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즉 진리를 알게 함으로써 우리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게(자유케) 한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진리를 깨달아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한 것이다.

진리를 안다/깨닫는 말은 우리의 전통적 개념 즉 동양의 종교철학적 개념으로 말하면 '견성'(見性) 혹은 '진각'(眞覺)을 의미한다. 따라서 류영모가 말하는 '얼나'는 바로 진리를 깨달은 자, 진리를 깨친 사람 곧 '진각자'(眞覺者) 혹은 '진각인'(眞覺人)을 지칭한다고 말 할 수 있다. '견성'이나 '진각'이란 바로 우주 만물의 신비 곧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나고 죽음의 신비 그리고 그것의 본질/참모습/실상과 그리고 그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자인 하나님과 우주 만물과의 신비한 관계/비의(秘意)까지를 깨달아 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복음 8장에서 말하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는 말은 바로 우리 인간이 이러한 신비를 깨달아 알게 될 때 즉 진정한 의미의 진각자/진각인이 될 때 비로써 우리 인간은 모든 질고에서 놓임 받아 참 자유함을 얻게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다석 류영모에 따르면, 우리 인간이 '제나'에서 '얼나'가 되는 길은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 나타난 현상대로만 보고 아는 상대지(相對智)에서 벗어나 우주 만물의 실상 곧 그들의 시작과 끝의 신비를 깨달아 아는 지혜 곶 절대지(絶對智)를 얻어서, 우리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근원자인 하나/하나님(一者 혹은 全一) 곧 없는 듯이 있는(없이 계시는) 하느님에게서 비롯했으며 또한 그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그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는 이치를 깨달아 알게 될 때 비로써 진정한 '얼나'가 될 수 있음을 말해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없는 듯이 존재하는 하나님의 실재를 "하나님은 영(靈/Spirit/Pneuma)이시니"란 말로 표현했다(요4:24). 왜냐하면 '영'이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즉 시공을 초월하는 신비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대승불교 학자 물티(Murti)는 불교에서 말하는 '순야타'(공 혹은 무)는 바로 영(靈/Spirit/Pneuma) 혹은 영적 실재를 지칭한다고 말해 준바 있다(참조, T.R.V. Murti,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

다석에 따르면 '얼나'의 완전한 모형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 모든 인간에게 '제나'에서 '얼나'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열어준(제시해 준) 인도자/안내자라고 말 할 수 있으며 또한 '얼나'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모범으로 보여준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모든 거짓에서 떠나서 진리의 세계를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바 있다. 진리의 세계를 사는 사람이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 곧 '제나'에서 '얼나'로 거듭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석이 말하는 '얼나' 곧 진리의 사람이란 바로 예수가 말씀한 진리/지혜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즉 진리와 지혜의 영에 의해서 온전히 (진리를) 깨닫고 또한 진리에 온전히 동화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참조, 요14:17, 26; 16:13).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은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하나님의 거저 주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구호만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을 '제나'에서 '얼나'로 거듭나게 하는 일 곧 진리를 깨달은 '진각인'(眞覺人/truly enlightened person)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에 심혈을 기우려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한 (사실은) 다석이 강조하는 진리를 깨달은 자 혹은 진리의 사람으로서의 '얼나'는 비단 기독교의 중심 목표일뿐만 아니라 또한 동양(우리나라)의 전통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의 근본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종교들이 다 우주만물의 신비인 진리를 깨달은 '진각인'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리서 기독교를 포함한 이들 종교들은 진각(眞覺)을 통하여 '진각인'이 되게 하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와 이들 동양의 전통 종교들은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한 층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끝
   
▲ 류기종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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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소 (121.136.228.194)
2011-07-12 03:48:03
저는 수원에서 목회하고있는 감리교목사입니다. 같은 교단의 한참 후배로서 선배님의 저서나 자주 올라오는 당당뉴스의 글을 읽고 많은 바를 배워 평상시에 존경해오고있습니다. 글로나마 인사드리게 됨을 영광스러우나,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다름이아니라 선배님의 글들을 읽고 느끼고있던 소견을 몇가지 말씀을 드리고자합니다. 저는 종교학을 전공해 (한국종교사,상.중.하)라는 저서를 출간한 바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타종교에 대해서 알고 잇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국종교사 연구에는 (1) 타종교에 대한 포용성 (2)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 (3) 한국인의 정서라는 3대요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선배님의 글에는 한결같이 포용성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공통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결국에는 기독교신학에로 되돌아가는 환원주의에 빠지고마는 오류를 범한듯 싶습니다. 따라서 선배님의 타종교에 대한 연구에는 배타성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국인의 정서에관한 언급이 전혀없습니다. 당연히 류영모역시 한국인이상 그애대한 정서에 따른 언급이 있어야할 줄로 사료됩니다.이에 선배님의 타종교에 대한 연구는 한마디로 말해서 종교학의 아류로서 신학의 한분과인 비교종교학에 불과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때문에 오히려 선배님의 연구는 한국교회에 안락의자신학같다는 감이 듭니다. 한국인의 정서를 언급하면서 타종교를 논의할때만이 한국교회에 유익을 주는 연구가 될수있습니다. 묻고싶습니다. 감히 선배님의 타종교에대한 배타성은 어떻게 나타났으며 한국인의 정서는 무엇인지? 고견을 말입니다. 여러번 망설이다가 용기를 갖고 글을 무례하게 올립니다. 만일에 배타성과 한국인의 정서와 함게 타종교를 연구하게 된다면 한국교회에 큰 도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역시 모르는 것 많아 선배님으로부터 배우겠습니다.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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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소 (121.136.228.194)
2011-07-12 04:15:33
선배님의 연구를 한마디로 종교학의 아류라고 한것애대해서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배운 종교학(Religiology)에서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고있는 타종교에대한 교육을 비교종교학으로서 아류(비주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류의 큰 함정은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즉 타종교에대한 객관적 연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타종교를 있는그대로(as it is) 관조할 때만이 그 연구가 한국교회와 목회에 도움을 실제 현실적으로 줄 수 있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그런 일련의 맥락에서 아류라고 한 것이지 선배님의 연구를 폄하하고자 한 것이 아님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만에 하나 오해가 있으실 것같아 첨언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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