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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 JSA를 가다.고난함께가 주최한 DMZ평화기행. 32명의 기행단이 판문점을 찾았다.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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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5월 25일 (수) 21:37:51
최종편집 : 2011년 05월 31일 (화) 00:02:48 [조회수 : 9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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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함께가 주최한 DMZ평화기행. 32명의 기행단이 판문점을 찾았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이사장 신경하)’ <고난함께>에서는 매년 DMZ 지대를 여행하며 통일을 향한 상상과 평화의 감성을 만끽하는 ‘민통선 평화기행’을 진행해 왔다. 특별히 올해는 판문점, 임진각, 도라산 전망대 등 민간인이 쉽게 통행할 수 없는 지역을 여행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어 한반도 통일시대를 상상하기조차 어려워지는 요즈음, 많은 염려들을 뒤로하고 평화로의 힘찬 한 발을 내딛는 여행으로 마련한 자리였다는게 <고난함께>의 설명이다.

판문점을 방문하하기 위해 석 달 전 부터 신청서류를 내고 정부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했다. 비전향장기수를 돕고 있는 <고난함께>에게 그 민감한 곳, 판문점 방문을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우려는 피해의식일 뿐이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정부로서는 이들에게 반공과 안보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판문점 방문을 허락하였을 거라 생각되었다. 어쩌면 정부와 국정원, 통일부 등에게 <고난함께>의 판문점 방문은 굴러들어온 떡 정도로 여겨졌을 것 같다. 그만큼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현장이었다.

판문점,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분단국가이며 아직도 군사적 충돌이 빈번한 아시아의 화약고가 우리나라의 현실임을 일반 국민들에게 가장 강하게 어필 할 수 있는 곳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루에 800여명이 판문점을 방문하는데 그중에는 ‘관광’이 목적인 이들도 많다고 한다. 분단이 ‘상품’이 되는 기가막힌 나라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5공시절 교련과목 수업의 일환으로 일주일동안 전방의 DMZ 경계근무를 서게 하는 것으로 안보교육을 시킨적이 있었다. 당시 기자를 포함해 100여명의 학우들이 전방입소교육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고 분단을 공고히 하는데 이용될 뿐이라며 입소를 거부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자진해서 가본다고 하니 대체 무엇이 달라진 건가? 이제 그곳으로 가보자.

 

   

 


자유로

5월 24일 11시, 감신대 앞에 삼삼오오 모여든 32명의 ‘평화기행단’은 약대교회에서 제공한 대형버스에 올랐다. <고난함께> 이사장인 신경하 목사님께서 동행하기로 했는데 갑작스런 일정이 생기면서 기도만 해 주시고 떠나고 우린 바로 출발했다.

버스는 금화터널을 빠져나와 연대앞을 지나 자유로에 접어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잔뜩 찌푸렸던 날씨가 오늘은 아주 화창하다. 차량이 적은 평일 한낮의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를 달리는 기분은 늘 상쾌하다. 문산에서 목회를 했었기에 지난 10년간 이 길을 수도 없이 다녔지만 버스를 타고 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기행을 기획한 <고난함께> 사무총장 진광수 목사가 버스안의 사람들을 일일이 불러 세우며 소개를 시킨다. 대부분이 목회자였고 몇몇은 신학생, 교회의 성도 등이었다. 직장을 휴가내고 온 분도 있고 수업을 거르고 온 이들도 있었다.

색동교회에서 비교적 많은 분들이 참여했는데 당당뉴스에 꽃꽂이 강좌를 연재하시는 류만자 집사는 특히 반가웠다. <고난함께>의 간사인 김신애 목사가 소속한 혜성교회 성도분들도 몇 분 오셨다.

 

   

 

행주대교 인근부터는 자유로변에 철책선이 바싹 붙어 있다. 민통선이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초소가 있고 그 안에는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길 끝에 긴장의 정점이 있음이 암시되며 이 나라가 누군가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나라임을 웅변하는 풍경이다.

일산을 지나면서 부터는 철책선 너머로 갯벌과 갈대숲이 펼쳐지는데 한눈에 봐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상태로 오래동안 보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자연의 보고다. 자유로의 어느 지역에는 철새를 보호하기 위해 경적이 금지된 구간도 있다. 이 천혜의 자원이분단의 혜택이라면 좀 서글픈가?

헤이리를 지날 때 쯤 부터 임진강 너머로 북한땅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곳에 ‘위장마을’이라고 알려진 북한마을이 맨눈으로도 보이는데 처음 얼마간은 그 마을이 김포인줄 알고 아무 생각없이 지나다니다가 사실은 북한마을이라는 소리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멈췄지만 한때 거대하게 쌓아놓은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대북방송소리가 귀청을 찢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각 평화누리

마냥 북으로만 달리고 싶은 자유로는 임진강이 동으로 꺾이는 어귀에서 끝이 나고, 일반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서북쪽 끝의 임진각에 도착했다.

우린 버스에서 내려 너른 언덕에 조성된 ‘평화누리’로 이동했다. 오색의 팔랑개비가 돌아가는 바람의 언덕이 저 쪽으로 보이고 그 옆엔 커다란 사람모양의 조형물 ‘통일부르기’ 네 개가 북쪽을 바라보고 서있다. 언덕 능선을 따라 붉은 깃대가 열 지어 서있고 그 아랜 따가운 햇살을 피할 파라솔이 우리 같은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 평화로운 풍경이다.

 

   

 
우리는 ‘평화누리’에서 미리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주최측이 도시락 종류를 네 가지나 준비했다. 치킨도시락, 불고기도시락, 돈가스도시락, ... 개인의 기호를 배려해준 세심한 준비가 돋보였다. 식사하는 중에 김포 고촌교회의 박정훈 목사님이 합세했다.

점심식사를 마쳤을 때 우리는 시간의 여유가 좀 있었다. 최종목적지인 공동경비구역(JSA)을 방문하는 시각이 3시 10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자유롭게 평화누리와 자유의 다리, 놀이공원 등을 돌아볼 수 있었다. 주말에는 소란스럽지만 평일인 오늘은 여유를 즐길 만 했다.

평화누리 바람의 언덕은 출사지로도 꽤 유명한 곳이다. 필자도 감리회가 이지경 되기 전까지 사진찍으러 많이 찾던 곳이다. 교회에서 불과 10분 거리였고 주일학교 단골 소풍장소였다. 풍경에다가 사랑을 담아 추억으로 가져가기에 더 없이 좋은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어 서 간단하게 드라이브를 떠난 연인들의 회귀점이기도 하다.

 

   

 

평화누리에서 주차장을 지나 반대편으로 가면 임진각 전망대와 자유의다리, 놀이시설 같은 것이 있다. 자유의 다리는 건널 수가 없다. 입구까지 이어진 나무다리 끝에서 철책선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철책 너머로 임진강을 가로질러 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자유의 다리이다. 철책에는 통일의 염원을 적은 리본이며 태극기가 넝마처럼 매여져 있다. 그 날을 기다리다 머리는 풀어지고 속이 까맣게 탔다는 듯.

 

   
▲ 자유의다리 - 남과 북의 전쟁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던 역사적 현장, 북한군 포로가 되었던 1만3천여명의 국군이 이 다리를 통해 자유를 찾아옴, 현재 이 다리는 분단된 남과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 자유의 다리



자유의 다리는 1998년 통일대교가 개통되기 이전 임진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진 후 전쟁포로 약 13,000여명이 이 다리를 통해 돌아오면서 "자유만세"를 외쳤다 하여 "자유의 다리"로 불린다.

자유의 다리옆에 끊긴 철로위에서 달리기를 멈춘 거대한 증기기관차가 벌겋게 녹슨 몸체를 내놓고 북쪽을 향해 서있다. 북으로 달리고 싶다는 퍼포먼스중인 게다. 한국전쟁 중 피폭되어 반세기동안 방치되었다가 분단의 상징물로 지정되어 지방문화재로 보존중이라고 한다. 1,020개의 총탄자국과 휘어진 바퀴는 참혹했던 당시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한국전쟁 중 피폭되어 반세기동안 방치되었다가 분단의 상징물로 지정되어 지방문화재로 보존중이라고 한다. 1,020개의 총탄자국과 휘어진 바퀴는 참혹했던 당시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아직 서로를 적으로 여기며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임진각. 매년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망배단에 모여 실향의 한을 달래며 통일을 기도하는 곳이다. 분단 60년이 넘었으니 고향을 기억하는 이들은 칠순이 다 지났을 테다. 시간이 많지 않다.

 

   
▲ 망배단 - 평화로운 강산의 풍경이 그려짐, 북쪽의 가족 친지를 그리며 실향의 아픔을 달래는 곳

  

   
▲ 임진각 - 6천여 평의 대지 위에 지하1층,지상3층 규모로 세워진 임진각에는 북한의 군사,정치,사회등 생활상 전반에 관한 각종 자료 및 화보 4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북한관과 한국 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탱크,비행기 등이 전시된 야외전시장으로 꾸며져 있다.

 


도라산전망대

임진각을 출발하여 도라산 전망대로 향했다. 통일대교를 건너기 전에 통일의 관문에서 허가를 받기위해 잠시 멈췄는데 이제부터는 모든 행동이 군인들의 통제를 받기 시작한다. 평화분위기가 아닌 전쟁분위기가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몇 달전에 판문점 방문(정부는 ‘견학’이라고 표현)을 신청해서 허락을 받아 놓았기 때문에 쉽게 통과했다. 버스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명예회장이 황소 1001마리를 끌고 방북할 때 이용했다는 1번국도를 따라 가다가 개성으로 들어가는 남북출입사무소 앞에서 우측으로 크게 꺾어 산길을 따라 도라전망대에 올랐다.

 

   
▲ 통일대교와 통일의 관문 - 1988년 6월15일 개통.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북한으로 몰고 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으로 가기 위해 이용했던 다리이다. 또한 비무장 지대와 판문점 투어를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민간통제구역의 초입에 있다.

  

   

  

   
▲ 남북출입사무소. 여기서 우측으로 크게 꺾어져 산으로 올라가면 도라전망대로 갈 수 있다. 비탈이 심해 버스가 멈추었다가는 다시 올라가기 힘들다.
   
▲ 도라전망대- 도라 전망대는 민간인통제선 북방지역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오르면 멀리 개성과 송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바로 옆에는 제 3땅굴이 위치하고 있으며 땅굴 내부 관광도 가능하다.북한의 생활상을 바라볼 수 있는 도라 전망대는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평 304평에 좌석은 500석이다. 시설이 낙후되어 있다.

 

1사단 전진부대에 속한 도라전망대에서는 개성이 보였다. 개성공단의 모습도 보이고 남한의 대성동 자유의 마을과 북한의 기정동 선전마을, 멀리 송악산도 보인다. 건물 외부에는 관람용 망원경이 열지어 설치되어 있는데 500원 동전을 넣고 이용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북쪽을 향해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북한 모습촬영을 금지하려는 게 아니라 전망대와 휴전선 사이의 한국군 시설물이나 지형이 찍히는 것을 막기위한 조치로 보였다. 북한에게 정보가 될 수 있다는 뜻이겠다. 전망대 담장으로부터 약 3미터 앞에 그어진 노란 포토라인 밖에서는 어디를 찍어도 상관이 없었다.

전망대에 막 도착했을 때 그 노란 포토라인을 보지 못하고 라인을 넘어서 사진을 찍었더니 어디에선가 군 사병이 나타나 “아버님 방금 찍으신 사진 확인 좀 해도 되겠습니까?”하고 묻는다. 이때 정말이지 내 좌우와 뒤를 돌아다 봤다. “아버님이라니.... 저 말인가요?”

삐져나온 입으로 사병에게 방금 직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군인에게 확인된 사진 몇 컷은 포토라인을 넘어서 찍었다는 이유하나로 별 보안상의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인물사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삭제되었다. 이 지역주변은 간단한 인터넷 지도검색만으로도 지형뿐 아니라 시설물위치 식별이 가능한데 이렇게 통제한다고 기밀이 유지되는 것도 아닐텐데 ...

 

   
▲ 노천 전망대 - 뒤쪽에 북쪽을 볼수 있는 커다란 쌍안경이 있어 보다 가까이서 개성을 볼수 있다. 사진아래쪽에 보이는 노란색의 포토라인을 넘어가서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 도라전망대 내부 - 전방의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개성을 바라볼수 있다. 좌석앞엔 커다란 전방의 모형이 있다.
   

 

600고지 도라전망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녘. 이곳에서 개성은 불과 12km의 거리다. 시야가 좋은 날에는 맨눈으로도 휴전선과 양쪽 2km의 비무장지대(DMZ), 남한의 대성리마을, 1.8km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북한의 기정동마을, 각각의 마을에 높이 게양된 태극기와 인공기, 그리고 개성공단과 개성시내, 멀리 송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 개성공단


개성공단, 연평도 포격사건이후 금강산 관광은 물론 적십자 라인, 인도적차원의 대북지원까지 다 끊어진 상태에서도 123개 업체가 가동중에 있는 개성공단은 작은 실낱같은 희망처럼 남아 있다. 이는 남과 북 누구도 개성공단의 실패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개성공단을 포기하면 남북이 감당해야할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이 개성공단의 힘이기도 하겠지만 경색일로의 남북간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평화의 사도역을 감당하길 바란다.

의외로 중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50만명인데 그 중에 중국인이 70%라고 한다. 그러니까 연간 35만명이 찾는 셈이다. 이렇게 중국인이 많은 이유가 이곳이 1952년 3월 17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될 때까지 해병 제1연대와 인해전술로 맞선 중공군이 치열하게 싸운 전적지였기 때문이라니 그들은 이곳에서 중공군전사자들을 기리고 있을게 틀림없다. 난 한국군인들을 기렸는데...

 

   

 


 

   
▲ 캠프 보니파스와 JAS경비대대 입구. 미군이 공동경비구역의 경비를 맡아 오다가 현재는 한국군이 이양받아 경계업무를 서고 있다.



방문자 서약서

도라산전망대를 내려와 버스는 판문점을 향했다. [CAMP BONIFAS JAS 경비대대]라는 안내간판이 있는 검문소에서 우리는 30여분을 기다렸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왔기 때문이다.

그사이 키가 크고 잘생긴 상병계급장의 헌병이 차에 올라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며 일일이 신원을 확인한다.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방문 중 예측불허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지만 군인들은 방문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만일 적의 적대행위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방문자 서약서’를 쓰게 했다. 무책임하다는 느낌이 들게 하면서도 긴장하게 만드는 서약서였다.

거기엔 방문자 주의사항도 있었다. 북한군과 말을 하지 말 것과 손가락질이나 비웃는 표정을 해서는 안되며 견학이 끝날 때까지 단체행동을 할 것. 이동중의 사진촬영을 불허한다 등등의 내용이다. 사전에 방문신청시 청바지도 안된다는 주의사항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이유를 물으니 요즘 유행하는 헤어진 청바지가 북한군인들이 볼 때 ‘남한이 가난해서 찢어진 청바지 입고 다닌다“고 생각하고 또 북한체제 선전에 이용되기 때문이라나?

 

   
▲ 방문자 서약서 - 주의사항과 함께 사고가 날 경우 군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라는 내용이다.

 

약속된 방문시간이 되자 조금 전의 그 헌병이 다시 차에 올랐다. 그는 이후 우리 일행이 비무장지대를 떠날 때까지 가이드하며 여러 설명을 해줬다. 검문소를 통과한 버스는 공동경비구역쪽으로 향했다. 약 5km를 더 가야 한다.

버스는 먼저 안보견학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안보교육을 받았다. 그 내용은 DMZ형성과정과 이후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났던 북한의 도발을 고발하며 북한이 얼마나 무모하고 호전적인 집단인가 하는 것을 강조하는 영상을 10분간 보는 것이었다. 이런식의 안보교육은 판문점 외에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 평택항에 전시되고 있는 천암함 앞에서도 실시되고 있다.

 

   
▲ JSA안보견학관. 지난 2월에 개관된 이 건물엔 1층엔 교육장, 2층엔 안보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좌측에 보이는 총형 건물의 1층엔 기념품가게가 있다.
   
▲ 안보교육장 내부. 10여분간 JAS를 영상으로 보여주며 안내자인 헌병이 육성으로 설명한다.
   




대성동 마을, 기정동 마을

안보교육을 마치고 우리는 군에서 제공한 버스로 갈아탔다. 가슴에는 방문자임을 알리는 하늘색 패찰을 달았다. 카메라, 망원경, 지갑, 전원이 꺼진 휴대폰 등만 소지가 허락되었다. 부피가 큰 물건은 북측이 폭발물로 오인할 수 있다며 가방은 모두 타고온 차에 두고 내려야 했다. 이제부터는 화장실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며 미리미리 화장실을 다녀오라고 한다.

 

   
▲ 대성동 마을과 태극기

 

공동경비구역으로 가는 길에 산 너머로 높게 게양된 커다란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대성동 마을이다. 대성동마을은 정전협정 체결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에 각각 1곳씩 마을을 둔다'는 규정에 따라 그해 8월 3일 북한 기정동 마을과 함께 조성됐다. 이른바 전략촌 이라고 불리며 심리전의 방편으로 만들어 진 서글픈 내력을 지녔다. 민통선에 위치한 전략촌(통일촌)은 우리나라에 다수 있지만 현재 DMZ 내에 위치한 전략촌은 대성동 마을 밖에 없다.

현재 대성동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은 50세대에 180여명이며 전쟁 전 마을인구수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실제 거주자는 100명 남짓으로 대부분 1953년 정전협정 이전에 살고 있던 사람들로서 이들의 직계만 거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주권 심사가 까다로운 것도 마을인구가 변함없는 이유이다. 이 마을 주민이 되는 방법은 여자가 시집오는 경우 외에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시집 온 며느리는 주민이 될 수 있지만 결혼한 딸은 떠나야 한다고 한다. 남자가 들어가 살게 된 경우는 딸 셋 둔 가정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산 예가 딱 한건 있었다고 하는데 딸 자식이 모두 떠나면 노부모만 남게 되는 상황을 고려해 준 것 같다.

이 마을엔 여느 마을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규정들이 있다. 납세·병역 의무는 면제되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 등엔 제약이 있고,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있으며 대한민국정부가 아닌 유엔군사령부의 통제하에 있다. 한국휴전협정 제1조 10항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의 부분에 “민사. 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치외법권지대는 아니며, 대성동 주민이 범법 행위를 하면 일단 대성동에서 추방되는 형식을 거친 후, 대한민국 법률에 의하여 규제를 받는다.

또 주민들이 논에 나올 때마다 우리 군인들이 경호를 해주며 논밭에 나갈 시간을 2~3일 전 미리 정해 군에 보고해야 하고, 매일 오후 7~8시 집집마다 찾아온 군인들에게서 점호를 받아야 한다. 그간 북한에 의한 몇 건의 도발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1년에 최소 8개월을 머무르면 주민 자격이 유지되기 때문에 농한기인 겨울에는 주로 외지에서 생활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농민들이 웬 여행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곳 주민의 농가소득이 상당하다. 1가구당 평균 10만 평방미터(3만평 이상)를 경작하는데 주로 쌀농사, 논농사와 더불어 인삼을 재배해 농가당 6,500-1억여만원의 연 수입을 올리며 살고 있다. 불편과 위험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단, 경작지를 넓힐 수는 있어도 땅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곳엔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대성초등학교의 학생수는 현재 25명밖에 안된다. 그런데 교사가 21명으로 거의 1:1 수업을 받는 최고의 교육환경을 갖추고 있다. 전교생 30명 정원에 입학 희망자가 몰려 추첨으로 선발하고 문산·파주·일산 등지에서 전학 오기를 기다리는 학생도 늘 10여명씩 된다고 하는데 4년 전부터 인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소속 미군들이 주 2~3일 학교를 방문해 영어를 직접 가르치면서 인기가 높아진 것이라고 한다.

매년 3-5명의 졸업생은 전국 어디나 자기가 원하는 중학교에 들어 갈 수 있다. 졸업식 때는 인근부대 장교나 군인, 각계인사 등 200여명이 참석하는데 선물을 어찌나 많이 가지고 오는지 리어카로 실어 갈 정도라고 한다. 작년에는 한명만 졸업했는데 그 학생은 트럭을 가져와야 했다고... 그 학생은 또 우수상, 개근상, 교육감상, 교장상 등등도 모두 쓸어 갔다고 한다.

 

   
▲ 기정동 인공기 게양대. 높이 160m로 세계최고이다. 게양된 인공기의 크기는 100평이며 무게는 275kg이다. 대성동의 태극기는 100m 높이의 게양대에 60평크기이며 100kg.

 

이 마을에서 불과 1.8km 거리에는 북한의 기정동 마을이 있다. 전쟁전에는 왕래가 잦은 ‘건넛마을’이었지만 이후 60년간 마을의 역사는 남북관계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해왔다. 현재 기정동 마을엔 원래주민들보다 개성공단 관련인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

‘자유의 마을’로 불리는 남한의 대성동 마을과 북한의 기정동 마을엔 각각 태극기와 인공기가 게양되어 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셈이 된 태극기와 인공기는 이곳이 남북 분단의 최고조 갈등 지점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기정동 선전마을의 대형 인공기는 가로 30m 세로 15m로 100평 크기이다. 무게만도 275kg에 게양대 높이는 160m로서 세계 최고높의의 게양대이다. 이에 반해 대성동의 태극기는 60평 크기에 무게는 100kg 정도이고 게양대의 높이는 100m로서 북한보다 규모면에서 작다.

이 두 국기는 체제의 우월성을 경쟁하던 냉전시대에 깃대싸움을 하면서 만들어진 상징적인 유물로서 높이싸움을 하다가 소모적 경쟁이라 여겨 한국측에서 먼저 경쟁을 멈췄다고 한다. 태극기는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바람에 빨리 마모되어 2~3개월 마다 교체하는데 그 비용이 무려 180만원씩 들어간다고 한다. 이 비용은 전액 파주시에서 부담한다고.



   

 

판문점

대성동마을에 얽힌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인 판문점에 도착했다. 판문점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이뤄진 곳이며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 군사분계선상에 설치돼 있다. 250여 km에 달하는 비무장지대안에 위치해 있음에도 이 지역에 철조망은 없고 흰 말뚝으로 휴전선을 표시해 놓았을 뿐이다.

북측의 판문각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 측 자유의 집은 기존의 낡고 초라했던 벽돌집을 헐어내고 1998년 7월 9일 현재의 건물로 완공되었다고 한다. 자유의 집은 건물 중앙에 투명한 지붕을 가진 4층 건물로서 남북연락사무소, 남북적십자연락사무소가 설치되어 남북간의 연락업무를 수행하는 건물로 쓰이며, 각종 남북회담, 접촉, 교류시 이를 지원하는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자유의 집 우측에 판문점의 상징이었던 팔각정이 보인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자유의 집으로 들어갔다. 건물안으로 들어가니 푸른 제복에 헬멧을 쓰고 검은 잠자리 선글라스를 쓴 헌병들이 긴장된 자세로 우리를 쏘아본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일행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 졌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들었다.

“북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거나 수근대지 마십시요. 우리 대원들을 긴장시키고 북한병사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바싹 긴장하게 만드는 여러 주의사항을 듣고 계단을 올라가니까 커다란 유리벽 뒤로 TV나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이 나타났다. 남북회담장소로 쓰이는 푸른색 컨테이너와 그 뒤로 판문각이 보였다. 판문각에는 황토색 군복차림의 북한군 병사가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앞의 일행이 견학을 마치고 갈때까지 그렇게 자유의집 유리문 뒤에서 숨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특이한 것은 JSA 경비대원의 근무모습이었는데 푸른건물뒤에 몸을 반쪽만 내놓은 채 북쪽을 응시하며 서 있는 것이었다. 북한병사가 총을 쏘면 빠르게 몸을 숨기기 위함이란다.

 

   
▲ 판문점. 푸른건물이 회담장소다. 오른쪽부터 T-1, T-2, T-3



우리 차례가 되어 밖으로 나갔다. 도로로 나갈 수는 없다는 설명에 회담장을 가로질러가는 도로변의 계단에 올라서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게 허락되었다.

T-1이라고 적힌 오른쪽의 푸른건물은 국가 영빈급 인사들이 회담하는 장소라 하여 통제를 하고 있었으나 T-2라고 적힌 왼쪽의 건물은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한다. 판문각의 북한군 병사는 쌍안경을 들었다 놨다 하며 우리를 관찰하는 모습이 보였다. 불과 몇미터 거리에 북한 땅이 있고 북한 사람이 있는데 막상 마주하게 되니 인사를 건넬수도, 손을 흔들어 줄 수도 없었다.

 

   
▲ 우리 일행에게 관심이 많은 북한 병사. 병사가 서있는 좌측 창문에 커튼에 가려진 쌍안경이 보인다. 그 쌍안경이 우리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견학인원이 없을시엔 병사들은 내부로 들어가 있는다고 한다. 그것은 한국군도 마찬가지.

 

건물사이에 시멘트로 낮게 선을 그어 놓은 곳은 휴전선이다. 회담장의 절반을 정확하게 가로지르는 이 선 너머가 북한이다. 이 구역의 좌우에는 그저 흰 말뚝으로만 휴전선을 표시하고 있을 뿐이어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방문객에게 강조하고 있다. 말 그대로 공동경비구역인 이곳은 1953년부터 양측에서 자유롭게 통행했으나 1976년 판문점 도끼살인사건 이후로 왕래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 북쪽에서 바라본 남측 자유의 집 전경.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5분여가 지나자 안내자는 우리를 좌측의 회담장 T-2안으로 인도했다. 푸른색 벽의 회담장은 단순한 구조였다. 중간에 커다란 탁자가 남북을 마주하여 놓여있고 탁자위엔 통역마이크 3 개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한켠에 헌병이 주먹을 불끈 쥐고 지켜서 있다. 이 헌병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경호를 서주고 있는 것이다.  

 

   
▲ 회담장 T-2내부. 중앙의 헌병은 남과 북의 땅을 양발로 밟고 서 있다. 그러나 회담장 내부에는 휴전선이 없으며 넘나들 수 있다.

 

북쪽의 출입구에도 헌병이 지키고 있다. 북측이 이용하는 문이다. 그 뒤로 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북한이다. 별로 두꺼거워 보이지도, 튼튼해 보이지도 않는 문이 남과 북을 저렇게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더 견고하고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는 이념의 문만 열리면 손도 안대고 열릴 문일 뿐인데 말이다.  

 

   
▲ 헌병과 포즈를 취한 혜성교회 성도들과 진광수 목사. 헌병은 항상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 이는 상대에게 눈동자를 틀키지 않으려는 것이라고한다. 예전에 북한병사와 눈싸움하다가 사고가 난적이 있었다고 한다. 헌병 뒤쪽으로 보이는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북한이다.



특이한 것은 이 회담장안에서 만큼은 휴전선을 넘어가는 것이 허락된다는 것이다. 창문밖의 시멘트 경계선을 넘어와 북쪽에 서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 집을 한반도 만하게 지으면 어떨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북한에서도 이곳을 견학하러 하루 80여명이 온다고 하는데 그 경우엔 북한군 병사가 경호를 한다고 한다. 이 회담장안에서는 사진촬영이 자유롭게 허락되어 우리는 헌병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기억을 담았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짧았다.

 

   
▲ 회담장안에서 바라본 외부풍경. 건물사이로 가로지르는 시멘트 블록이 휴전선이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기자는 월북(?)을 한 상태인 셈이다. 남측엔 자갈이 깔려있어 넘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건물 끝에 한국병사가 몸을 반쪽만 내놓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 판문각을 배경으로 선 색동교회(송병구 목사) 성도들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공동경비구역(JSA)을 캠프 보니파스 부대라 부르는데 이 이름은 1974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의 희생자 보니파스 대위를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감독·경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북한군 장교 2명과 수십 명의 사병이 나타나 작업중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측 경비병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인근 초소에 있던 경비 병력을 요청하여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인민군 사병들은 가지고 온 몽둥이와 UN군측 노무자들이 나무 밑에 두었던 도끼 등을 빼앗아 휘두르며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은 UN군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해 미군 장교 2명(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배럿 미군 중위)이 피살되었으며, 나머지 9명이 중 ·경상을 입었고, UN군측 트럭 3대가 파손되었습니다.

사건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내 군화와 철모를 당장 가져오라”며 당장 야전사령관으로 전쟁을 할 참이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원색적인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 폴 번연작전 - 미류나무 제거작전. 미류나무하나를 제거하기 위해 건십헬리콥터 26대, B-52 중폭격기 3대, F-4 및 F-111 폭격기 수십 대가 판문점 상공을 엄호하는 가운데 3백여 명의 한미 양군 기동타격대가 투입하였으며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한국해역으로 항진시켰다. 이틈에 한국군은 북한의 도발을 유도해 그것을 구실로 전면전을 치를 작전을 짰으나...

 

 

폴 번연 작전

사건 발생 후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데프콘 3’(경계상태돌입)을 발령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미군은 F-4 전폭기 1개 대대와 F-111 전폭기 1개 대대를 한국에 증파하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한국해역으로 항진시켰으며, B-52 폭격기를 출동시키는 등 강경한 대응을 취했습니다.

3일 후인 8월 21일 UN군은 '데프콘 2(전쟁돌입상태)'를 발령한 가운데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업에 나섰습니다. 포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미 양국간 협의결정으로 실시된 이 작전에는 건십헬리콥터 26대, B-52 중폭격기 3대, F-4 및 F-111 폭격기 수십 대가 판문점 상공을 엄호하는 가운데 3백여 명의 한미 양군 기동타격대가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한국군은 손톱도 깎고 머리카락도 잘라 편지봉투에 넣어놓고...군화도 벗지 못하고 비상대기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기세에 놀란 북한군이 이에 대응하지 않고 물러서서 더 이상의 무력사태로까지 확대되진 않았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사과문을 국제연합군측에 전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9월부터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경비하게 되었습니다.

 



도발유도작전

이른바 폴 번연작전이라고 불린 이 작전은 고작 미루나무 한그루를 베기 위해 취해진 6.25이후 전면전에 가장 근접했던 작전이었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까지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폴 번연 작전시 교전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포병이 북한영토인 개성의 인민군 막사를 포격하고 개성 위쪽의 시변까지 포격하여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인민군의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의 사용도 고려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작전 중 남한은 미국몰래 도발유도 프로그램을 가동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군은 폴 번연 작전과 함께 북한의 도발 유도계획을 세우고, M16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으로 무장한 카투사로 위장시킨 특전사 요원 64명을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폴 번연 작전에 투입하여 북한의 도발을 유도하였다.

이들은 공동경비구역내에서 북한군의 도발을 유도하느라 총도 없이 도끼 하나만을 들고 벌목을 시작했다. 물론 그 뒤엔 한, 미 연합군이 은밀하게 숨어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를 다 베어내도 북한군의 반응이 없자 북한 초소까지 넘어가 초소 4개를 공격하여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북한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초소에는 북한 병사가 아예 있지도 않았다. 이유는 김일성이 이미 손을 써놨기 때문. "남측이 어떤 도발을 하더라도 절대 대응하지 말라"는 전문이 하달된 것이다.


 

   
▲ 문제의 미류나무가 잘린 터와 희생자 기념비. 멀리 흰색의 아군초소가 보인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오른 뒤 회담장을 출발하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쪽으로 향했다. 회담장으로부터 다리 간 100여 미터의 그 구간에 문제의 미루나무가 잘린 터가 있다. 그 터 위에 당시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는데 기념비 아래의 둥근 시멘트 받침은 미루나무의 밑둥 크기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 이 구간에서는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잠시 멈추어 준 버스안에서 역사의 현장을 보아야 했다.

그 미루나무를 지나치면 바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지척에 있다. 왕래가 없어 시멘트 길의 갈라진 틈으로 잡초가 자라고 있고 다리의 남쪽엔 푸른 말뚝이 박혀있어 차량통행을 막고 있었다. 도끼사건 당시 북한군이 트럭을 타고 넘어왔던 통행로였다.

 

   
▲ 돌아오지 않는 다리. 푸른말뚝으로 통행을 통제하고 있다. 휴전 후 9만3천명의 남북한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던 다리로서 당시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 있는 이 다리 앞에서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의 도끼에 살해당했다. 사진의 오른쪽 모서리로 보이는 구조물은 아군초소.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영화 ‘공동경비구역’에 등장했던 바로 그 다리이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남북한 초소가 있는데 영화에서는 양측 군인들이 다리를 넘나들며 서로의 초소에서 우정을 다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는 13년전 일어났던 김훈중위 사건이 모토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영화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휴전선에서 보초를 서는 군인들의 이야기다보니 자연스럽게 경계선이라는 주제어가 다루어지는데 이는 굳이 남북간에 세워진 경계선이 아니더라도 국가와 국가 사이에, 단체와 단체 사이 그리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선이 그어질 수 있음을 경험한다. 나누어진 선은 상대를 타자로 인식하고 경계하며 막연한 적대의식도 가지지 않는가.

그런데 막상 만나서 내면을 대하고 보니 그 선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영화속 주인공들은 깨닫게 된다. 그래서 서로의 초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는다. 그러고 보니 경계선은 허구가 되어버리고 서로가 적이라는 사실을 넘어가 버린다.

서로를 구별하며 우월함을 자랑하던 단호한 군복은 풀어헤쳐지고 모자들은 교환되어 씌여지나 반듯하지 않고 삐딱하다. 이념과 정치가들, 그리고 자본가들의 욕심이 만들어 낸 선을 허물고 만들어 낸, 이 영화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언제고 다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한반도에서나 내가 속한 불쌍한 감리회에서도 말이다.

 

   

 

 


JSA 경비대대

사람들의 발길이 없어 도로변을 제외하고는 다리와 초소주위가 수풀로 우거졌다. 거기엔 지뢰들이 매설돼 있다. 음산하고 위험한 지역을 뒤로하고 버스는 비상도로를 따라 안보견학관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안내를 맡은 헌병이 여러 질문을 받았다. JSA 경비대대원인 그는 경비대대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2004년 주한미군 10대 임무 전환에 따라 JSA 경비가 한국군으로 넘어왔다. 같은 해 7월 1일 창설된 한국군 JSA 경비대대는 JSA를 오가는 유엔군사령부 관계자를 비롯해 하루 평균 800여 명의 방문객을 경호하고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과 도발사태에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유지해 오고 있다.

북한이 수 십여년간 저지른 정전협정 위반 사례는 42만여 건에 달해 대원들은 어떤 위기 상황도 ‘5분 내 종료’를 목표로 항상 실탄이 장전된 K-5 권총을 휴대하고 있으며 제복안에는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전 병력의 80% 이상이 늘 영내에 대기해야 하며 휴무일도 없다.

JSA 외곽 초소에 배치된 기동타격대는 유사시 60초 안에 JSA에 투입돼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잘 때도 전투복과 전투화를 착용한다고 한다. JSA 경비대대원은 장교와 병사 모두 최고 수준의 체력과 사격술에다 건전한 국가관을 갖췄으며 적에게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기 위해 실전과 똑같은 고강도 전투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돌아 오는 길

일행은 JSA 안보견학관 옆에 마련된 기념품 가게를 들러 기념이 될만한 것을 샀다. 나는 그사이 2층에 있는 전시관으로 갔다. 거기엔 판문의 역사, 김일성이 사인했다는 정전협정서, 818도끼만행사건을 재현한 모형, 문제의 절단된 미류나무 실물, 북한의 호전성을 강조한 각종 도발사건 내용, 그리고 얼마간의 전시물 등이 진열되어 있다. 이 견학관은 지난 2월에 신축 개관되었다.

우리는 출발했던 서울을 향해 왔던길을 되 짚어 돌아갔다. 버스안에서 <고난함께> 진광수 사무총장이 일행들에게 소감을 묻는다.

색동교회 이정숙집사는 “통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영미 집사는 “이런 곳에 아이들과 함께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시간이었다”고 한다.

혜성교회 방정순 집사는 “북한분이신 친정아버님께서 생전에 고향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임종 전, 북에 남겨놓고 온 딸들의 이름을 무의식중에 부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님이 이 자리에 같이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조이제 목사는 “오랜만에 가이드 하는 부담 없이 마음 편하게 다녀왔다. JSA교회 한반도 지도를 크게 그려놓고 거기에 십자가를 그려놓은 것을 보며 감동받고 돌아간다”며 아무도 들어가 보지 않은 교회를 다녀 온 소감을 말한다. JSA교회는 안보견학관 맞은편에 있었다.

진광수 사무총장은 “분단이 반세기를 넘다 보니 분단시대가 익숙해져 굳이 통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생각이 만연해 있는데 판문점 같은 분단의 현장을 찾아 가서 우리가 아직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민족의 하나됨과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기도하고 확인하는 것이 평화기행의 취지”라고 밝혔다.

 

   
▲ 돌아오는길에 다시 들른 JAS안보견학관. 2층에 전시실이 있다.

 

 

   
▲ 정전협정서.

 

 

   
▲ 안보전시실을 한 외국인이 관람하고 있는 모습

 

 

   
▲ 818사건의 모형

 

 

   
▲ 문제의 미류나무 실물

 

 

   
▲ JSA교회

 



평화기행을 다녀와서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났을 때 판문점이 얼마나 긴장했을 지가 이번 기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껴진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일상에서는 거의 잊고 살아가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그렇기에 통일이나 평화의 가치에 대해서도 추상적일 수 밖에 없었다.

평화의 현실적 가치와 목적, 그리고 평화가 실현된 모습은 각 문화와 사회가 당면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규정된다. 분단을 정권유지와 인권유린의 기회로 삼았던 부도덕한 시대가 있었던 게 사실이고 그 시대의 정권에게는 그게 평화였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표면적으로 평화로운 사회이다. 연평도 포격사건까지 겪었지만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모르겠다. 연방정부형태로 통일이 될지 전쟁을 통한 흡수통일이 될지 통일에 대한 이해와 해법이 저마다 달라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게재도 여기서는 아니다.

이번 기행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물리적 충돌이 사라진 소극적 평화를 넘어 모든 형태의 폭력이 사라지고 사회 구성원 모두의 안녕과 행복이 성취되는 적극적 평화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단으로 인한 긴장은 그 커다란 틀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어 지는 문제라고 본다.

그런면에서 관광객이 찾고 학생들이 찾아오는 분단의 현장인 판문점에 평화를 바라고 모색하는 친절한 제안들이 없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자 한계였다. 분열과 대결의 현장을 일반인에게 그렇게나마 공개함으로 통일을 빨리 이루어야 한다는 당위성만큼은 강조되고 있어 그것도 수확이라면 큰 수확이겠다. 체제의 우월성이나 이념단속이 주목적이었겠지만.

소수 활동가나 신앙적 동기에 의해 작은 집단으로 일어나는 운동차원의 평화활동은 언제나 외롭다. 한켠에선 평화를 위한 몸짓들이 권위와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오해속에 박해를 받기도 했다. 어떤이는 이상적 이념이나 정치적 승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다양한 가치와 방법론이 충돌하면서 구체적인 목표와 방법들이 수정되고 수용되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통일이 되기 전과 후의 평화운동은 다른것처럼 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얼마나 상대를 수용하고 이해해 주려 하는가, 평화라는 큰 가치를 이루려는 의지는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신뢰와 동반의 관계를 확인해 가는 일은 중요하다.

이번 DMZ평화기행이 남과 북의 통일이라는 주제를 넘어  보다 다양한 평화의 주제를 담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길 바란다. 평화의 내용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그 모두가 합해져서 궁극적으로 평화를 확산시키고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의 성취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짐 같이.


 

   
▲ 마지막 기념촬영.
   
▲ 돌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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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성도 (210.94.41.89)
2011-05-30 15:04:13
아직 판문점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위 사진과 글의 내용만으로도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8.18도끼 만행 사건은 제가 국민학교 재학 시절에 발생된 사건으로
영화로도 나왔었습니다.
북괴는 아직도 대남 적화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수시로 남한에 도발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안보의식과 반공사상만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호하고 수호할 수 있다는진리를 새삼 느껴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는 아직 남과 북이 서로 군사적 대치 관계에
있으며 북괴는 분명 우리나라의 최대 위협이 될 군사적 주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몇 명 좌파 이념을 가진 자들이 이를 부정하고 흐리게 함으로서 남한 내 갈등을 부추기지만 국민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판단하고
있으며 그들의 대남 책동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확고한 안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몇몇 썩어빠진 정치인과 어느 단체에서 북한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고 그들이 우상화 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좌파 세력들이
아직도 이 땅에 버젓이 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들을 발본 색원하여 다시는 진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해 야할
것이며 우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도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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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섭 (121.160.87.21)
2011-05-30 12:05:56
옛날 생각 나네요. 일주일에 한 번식 판문점에 올라갔었는데... 변한게 별로 없네요... 세상은 변해가는데 판문점의 시계는 멈추었나봅니다...
옛날에 누가 더 깃발 높이 올리나 경쟁을 했었는데 남쪽에서 세운상가 사람들이 와서 엄청 높이 올려놔서 조선이 포기했었다고 하던데 어느새 그쪽이 더 높이 올렸네요.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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