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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말한 "어린아이"(Child) 신앙과 "어른"(Adult)의 신앙
입력 : 2011년 04월 10일 (일) 16:34:10 / 최종편집 : 2011년 04월 10일 (일) 16:55:23 [조회수 : 1552] 류기종rkchg@hanmail.net

바울이 말한 "어린아이"(Child) 신앙과 "어른"(Adult)의 신앙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과정을 거쳐서, 즉 초기의 유치한 단계에서 시작하여 영적 성장과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 점차 심화되어가고 성숙되어 간다고 보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
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
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4:13-14)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초기의 단계를 어린 아이 즉 유아적(幼兒的) 신앙의 단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어린 이아(유아적)신앙의 단계의 특징을 그는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 어린 이이와 같이" 유치한 단계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유아적 단계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내면적 진리는 보지 못하고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현상대로 즉 외형적으로 나타난 현상만을 보고 판단하고, 그것을 (진리)라고 믿고 주장하는 것으로써, 단적으로 말하자면 문자주의적 신앙(faith of literalism)의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당시의 바리세파 사람들의 신앙의 단계는 바로 이 문자주의적 신앙의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문자주의적 신앙의 단계에 있던 바리세파 사람들은 예수의 영성적 교훈(복음)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사건건 반대하고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사도 바울의 자신의 신앙의 초기 단계 즉 유아적 단계는 바로 바리세파 사람들의 신앙의 단계인 성경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율법주의(문자주의) 신앙의 단계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신의 초기의 신앙의 단계 즉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는 유아적 신앙의 단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의 복음의 진수를 제대로/깊이 이해하지 못하던 단계, 즉 예수의 삽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예수의 제자들의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크게 거부감(반감)을 일으켰던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사도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말할 때, 그것을 몸(육체)의 부활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크게 분노하여 그들에 대한 박해와 핍박에 앞장섰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장면이 나온다. 스데반은 사울(바 울)과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며, 그(부활한 예수)가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본다고 말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
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7:55-58)

사도 바울의 초기 신앙의 단계는 바리세파 사람들의 율법주의적 신앙 곧 문자주의적 신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예수의 몸의 부활에 대해서 극도의 불쾌감과 적개심을 나타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직접 예수의 부활을 체험하고 또한 나중에 부활의 깊은 영적인 의미를 때달은 다음 예수의 부활은 부패할 몸(perishable body) 곧 육신(physical body)의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없는 불멸의 몸(imperishable body) 곧 영적인 몸(spiritual body)으로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런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So also is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It is sown a perishable body, it is raised an imperishable body; it is sown in dishonor, it is raised in glory,
it is sown in weakness, it is raised in power; it is sown a natur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If there is a natural body,there is also
a spiritual body(1Cor 15:42-44)

사도 바울이 나중에 깨달은 것은 "영의 몸"(靈身/spiritual body)의 실재에 관해서 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인간의 자연적인 신체(존재)로서의 육의 몸(natural body)이 있는 것같이 또한 썩지 않는 불멸적 존재 곧 천상적 존재에 해당하는 "영의 몸"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초기 그는 "영적인 몸"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불확실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몸이란 곧 육적인 몸 즉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가시적인 몸(visible body)만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그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예수의 부활을 육신의 몸(physical body)의 부활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그것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사료된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초기의 신앙의 단계가 바로 예수의 부활 혹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육신(육체)의 부활로만 생각했던 것을 상기하여, 자신이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는 그런 문자주의적인 유아적 신앙의 단계를 벗어나서 모든 것을 심층적으로 곧 영적으로 이해할 줄 아는 성년의 신앙으로 발전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클레멘트의 신앙의 2단계론: 3세기의 알렉산드라아의 교부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15AD)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단순한 신앙"
(simple faith)과 "완숙한/완전한 신앙" 곧 "영지적 신앙"의 두 단계 혹은 두 차원(two stages or two dimensions))이 있음을 말했다. 그에 따르면 믿음은 모두 다 동일한 것이 아니고 믿음의 내용 곧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 초기 단계의 신앙과 완숙한/완전한 신앙의 단계로 구분된다. 그가 말하는 단순한 신앙은 믿음의 초기 단계의 신앙을 지칭하며, 이는 교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 초신자들의 신앙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성경말씀을 문자대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 단순한 신앙의 단계는 성경을 문자대로 이해할 뿐 아니라 두려움과 권위에 대한 복종(여기에는 교권과 교회의 전통 혹은 교회가 강조하는 교리 등도 포함될 수 있다)으로 받아드리는 사람도 여기에 해당 된다.

반면에 완전한 신앙 곧 영지적(靈智的) 신앙은 성령의 조명을 받은 신앙의 단계로써, 영적 지혜로 성경의 문자적 의미 너머의 복음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 안 단계 즉 성경 말씀이 지닌 깊은 종교적/신비적/영성적 의미를 파악할 줄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신앙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완전한 신앙(perfect faith) 곧 영지적 신앙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 계속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단순한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신앙의 오묘한 이치 즉 신비 지극한 하나님의 실재와 구원의 참 도리 및 만물의 존재의 의미를 깊이 알 수 없으며 또한 참 기쁨과 자유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오리겐의 성경의 삼중적 의미론: 고대의 뛰어난 성경주석가이며 또한 영성신학자인 오리겐(Origen, 185-254AD)은 성경의 말씀엔 (1)문자적 의미, (2)윤리적 의미, (3)영성적 의미의 삼중적 의미(threefold meaning)가 들어있다고 말했다. 문자적 의미는 성경의 가장 표피적 의미로서 문자적 혹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성경의 가장 얕은 표면적 의미에 해당한다. 둘째 단계인 윤리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보다는 한충 깊은 의미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아름다운 윤리적 삶의 원리들을 말한다. 그리고 성경의 영적인 의미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깊은 의미로써, 신비 지극한 실재이신 하나님과 그분과의 관계에 관한 것 즉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뜻을 알아내고 파악하는 것에 관한 진리(의미)를 말한다. 오리겐에 따르면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바로 성경말씀이 지닌 문자배후의 가장 깊은 영적 의미(진리)를 파악하는데 있다.

성경의 영적 의미를 파악하는 사례로써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예수와의 대화(눅10:38-42)에 대한 오리겐의 해석을 예로 들 수 있다. 오리겐에 따르면 예수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는 단순히 마르다의 능동적인 신앙태도와 마리아의 정적이고 수동적인 신앙태도를 말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두 여인을 자매로서 차등 없이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두 측면 즉 능동적인 행동하는 측면(active aspect)과 사색적이며 관상적인 측면(contemplative aspect)의 양면이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들어내는 것이라고 오리겐은 이해했다. 이것이 오리겐이 의미하는 성경의 깊은 영성적 진리를 파악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영적 진리를 파악하는 일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치유행위들과 기적행위들에서도 적용된다. 예를 들면, 광야에서 떡 5개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인 기적 이야기는 문자주의 적으로만 이해하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자연법을 파괴/손상시키는 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떡(빵)을 영적으로 곧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행위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생명의 떡)으로 배불리 먹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문자적으로 이해하느냐 영성적 진리를 파악하느냐로 나뉘게 된다. 고대의 교부들이나 영적 큰 스승들은 문자주의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평신도들 특히 초신자들의 단계라는 것을 누누이 말해주었다. 따라서 신앙의 연조가 깊은 사람들은 문자주의적인 이해의 단계를 뛰어넘어야 할 것을 말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들을 양육하는 목회자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이해의 정도가 평신도들 특히 초신자들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목회자들의 고민이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주일 내내 성경말씀을 가지고 씨름해야하며, 자칫 잘못하다가는 즉 평신도들 수준 이상의 깊은 영적인 해석을 하면 자유주의자 혹은 이단적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하며 초신자(평신도) 수준의 문자주의적 이해의 단계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지도자인 목회자는 평신도 수준의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에 머물러 있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자주의적 성경이해는 성경에 대한 수박 것 핥기 식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고 성경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 일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깊은(영적) 진리를 바로 알려주는 일이 목회자의 최우선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진리를 파악한다고 해서, 성경을 임의적으로 엉뚱하게 해석해서는 물론 안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상당(오랜) 기간의 신학공부가 필요하며, 동시에 맑은 영을 얻게 하는 영적 수련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학 중에서도 특히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은 성경해석의 깊은 통찰을 얻는데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영성신학은 성경의 깊은 숨은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깨끗하고 맑은 영을 제공함과 동시에 성경말씀을 바로 해석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과 신학적 기반을 함께 제공하기 때문이다. 영성신학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비움의 신학, 전적인 자기부정의 신학 곧 옛 자아가 죽고 영적인 자아로 탄생되는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영성신학은 성경 속에 감춰진 깊은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비한 영적 진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자주의 신앙(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일은 매우 천박한(위험한) 일일뿐더러, 특히 심오한/신비한 영적 진리들로 가득한 요한복음을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다", "말씀이 육신/사람이 되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다"
와 같은 말씀들은 문자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성경의 깊은 영적인 진리를 바로 파악하는 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초신자들의 성경이해 단계인 문자주의적 해석의 단계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 첫째 과제이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특징(현상)은 많은 평신도들이나 목회자들이 보수주의 정통신앙의 고수라는 미명아래, 문자주의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다. 참된 보수주의는 올바른 복음주의를 의미하며, 참된 복음주의(evangelism)는 문자주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영적 진리)을 바로(깊고 옳게) 이해하고 또한 거기에 다가가고, 또한 그분(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문자주의는 복음주의의 정반대 심지어는 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율법주의와 문자주의를 거부하고 거기에 영적인 해석을 가하셨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해석과 태도이다(마12:1-8. 막3:1-4, 눅6:1-11) 특히 예수는 바리세파 사람들이 구약성경(율법서)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문자주의를 강하게 비판하셨고, 영성적 이해를 강조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의 문자주의를 크게 경계했으며, 복음의 참 뜻 곧 성경의 깊은 영성적 의미를 바로 파악하는 일을 가장 중요시했음을 알아야 한다. 특히 복음주의 신앙의 뿌리인 루터는 문자주의를 매우 경계했을 뿐 아니라, 복음(예수의 영성)의 색채가 약한 야고보서를 짚으라기 라고 비판했고, 반면에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를 높이 경가했다. 또한 복음서들에 대해서도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이 많은 공관복음서들 보다 예수의 말씀이 중심인 요한복음을 최고의 복음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특히 구약성경을 이해할 때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함을 말했다(참조, Paul Althaus, 루터의 신학. 이형기 옮김).

즉 루터는 구약은 신약의 말씀과 연결시킬 때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조명 받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됨을 말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유대교의 경전 곧 율법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구약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 때 특별히 유념해야 할 점이다. 예수의 제자인 오늘의 목회자가 유대교의 랍비처럼 구약을 문자주의적으로 풀이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예수의 복음)의 틀을 벗어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바로 이러한 오류를 자신도 모르게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루터에 의하면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어계신 구유라고 말했다. 이것은 성경은 곧 하나님의 계시 곧 하나님의 자기(마음의) 표현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성경이 될 수 없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을 해석할 때는 문자적으로 하지 말고 예수의 마음 곧 예수의 복음의 정신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영적(신학적) 성숙의 초기 단계 즉 문자주의적 이해 단계를 "어린아이의 단계"라고 말하고 "성숙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어린아이의 단계를 다 버렸다고 힘주어 말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의 이 말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그래서 클레멘트가 말한 초신자들의 신앙 수준인 문자주의적 이해 단계에서 벗어나 성경의 문자 배후에 들어있는 깊은 영적 진리를 발견해 내는 어른(성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될 때 한국의 교회는 한층 성숙한 교회로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성숙의 길로 가는 가장 빠르고 올바른 길은 바로 어린아이 신앙의 단계(the level of childhood)인 문자주의보부터의 탈출(exodus)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끝

최종편집 : 2011년 04월 10일 (일) 16:55:23  
류기종
평화영성신학 연구원 원장
클레아몬트대 과정사상연구소 코리아 프로젝트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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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기종 (76.XXX.XXX.232)
2011-04-11 00:51:41
관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답은 사도 바울의 말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것을 버렸다는 말씀이 최상의 답인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말씀은 겸손과 순수한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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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지 (72.XXX.XXX.125)
2011-04-10 23:28:14
류원장님 글을 늘 관심을 가지고 읽는 펜 중 한사람입니다. 우선 영성에 대한 좋은 글들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원장님의 신앙의 단계에 대한 해석과 다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가지만 질문(?)을 하고져 합니다. 무식한 질문,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어린애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수 없다고 말씀 하시면서 오히려 어린애같은 순수한 신앙을 강조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
둘째는 원장님께서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경계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오랜 신학공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이율배반적 견해가 아닐까요 ?
셋째로 깨달음의 단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산을 아주 좋아 합니다. 산은 계곡, 중턱, 그리고 정상에 따라 보는 모습이 아주 다릅니다. 그러나 나름데로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산의 모습일 뿐, 보는 높이에 따라서 수준이나 옳고그름의 눈으로 해석 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지적으로 크고작음이나 낮고높음으로 구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원장님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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