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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목회세미나②] 김경재 교수의 주제강연 '하나님을 다시 찾아서'김경재 교수의 개인적인 간증과 하나님 다시 찾기
방현섭  |  racer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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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2월 14일 (월) 18:15:18
최종편집 : 2011년 02월 15일 (화) 13:06:47 [조회수 : 3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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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휴식을 가진 후에 제8회 예수목회세미나 주제강연을 시작하였다. 8회 예수목회세미나의 주제는 '하나님을 다시 찾아서'이다. 주제강연은 삭개오작은교회 원로목사이자 한신대 명예교수인 김경재 교수가 하였다. 다음은 김경재 교수의 강연내용 요약이다.

이번 주제가 '하나님을 다시 찾아서'라는 말을 듣고 별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솔직한 고백이어서 좋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이런 세미나를 통해서 신학이론에 매몰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다시 발견한다면 모를까 다시 찾는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어린 시절 계곡에 처박힌 빨치산의 주검을 보고 섬뜩한 느낌을 갖고 사람들에게 야속한 마음을 가졌다. 큰 형이 전사하여 한 줌의 재로 돌아온 것도 경험하였 다. 이런 어린 시절을 겪으면서 신학에 대한 통찰을 갖게 되었다. 나는 잘 모르면서 성령의 발길에 채여 이 길을 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억새풀 속에서 우짖는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세상의 현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영원한 것을 따르라고 나를 꼬드기셨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듭 예수로 인해 세상을 살 만한 맛이 나고,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목회할 용기가 나고, 패배처럼 보이지만 승리한 것을 알고, 더 나아가 승리와 패배에 연연하지 않고, 바로 그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교인 수가 적건 많건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예수를 바르게 다시 만나고 바르게 알고 바르게 찾는 것이 하나님을 다시 찾는 정도(正道)이다. 무슨 신비체험에서 하나님을 다시 찾는 것이 아니다.

신비주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승자독식의 시대에 자기의 것을 모두 다 내주면서 어질고 착한 마음, 사랑의 불길을 댕기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는 신비라고 생각한다. 분자생물학 등의 과학영역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그것은 월권이고 교만이다.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평가할 수도 없는 영역, 도덕적인 영역까지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재단하고 속단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성서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랑과 정의와 진실 등을 끝가지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이들이 있지 않는가! 그것은 그 누구도 끌 수 없는 불길이다. 역사적 패러다임 속의 종교는 사라지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지만 인간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그 의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 그 사실을 믿고 하나님이 바로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

종교는 다원론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종교이다. 역사적 종교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 절대적인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공동체의 고백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언어와 고백, 정서가 다르다. 그런데 왜 다른 것을 못 견뎌하는가? 기독교는 기독교의 색깔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해 하는 것이다. 7-80년대 예수를 민중적 예수로만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 관점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결국 기독교를 반토막 내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역사적 예수는 진짜 역사 속에서 살았던 생명체 예수이다. 비평적 성서연구 방법은 준비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예수는 예수의 인격에 대한 체험이다. 역사적 예수를 깊이 만나면 '당신이 나의 주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메타포로만 이해하지 말라. 가장 높은 수준의 신비가 바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바울의 고백이다.

지금 내 인생을 돌아보니 참으로 예수님을 따라 산 것 같지가 않다. 목사만큼 타락하기 쉬운 직업이 없는 것 같다.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 정상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 별로 없다. 자기만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까지도 망가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라성 같은 학자들과 식자들을 제자로 뽑은 것이 아니라 어부 무지렁이들을 선택하신 것 같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조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완벽할 수는 없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완벽한 이상에 경도되면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영성, 과학적 세계관, 예술적 감성, 이 세 가지가 목사와 함께 가야 한다. 김재준 교수는 '목사가 시를 쓰지 않더라도 시심을 잃어버리는 순간 목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시중에 나온 과학적 가르침을 주는 책도 많이 봐야 한다.

 

   


 

"하나님을 다시 찾아서" 주제 강연 / 김경재 교수

1. 들어가는 말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주제에 관한 ‘강연’이라면 할 말도 없고, 하고픈 뜻도 없다. 주최자측 기획의도 또한 ‘강연’하라고 귀한 이 자리에 세운 것이 아닐 것이다. 아주 편한 맘으로, 이 시대 목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살아가는 동료들과의 동병상린 속에서, 솔직한 속맘을 털어 놓는 ‘고백적 간증’ 자리로서 말하겠다. 따라서, 아주 제한 된 개인경험과 개인사의 내력이 반영됨을 피할 수 없다.

나의 아호는 ‘숨밭’(壽田)이다. 숨쉬는 땅, 생명기운의 밭이라는 뜻이다. 그리되기 원하는 기도의 염원이다. 숨밭의 오늘의 생명이 영글었던지 설익거나 쭉정이던지 간에, 혼자서 이뤄진 것 아니다. 신학교 들어간 후(1959) 지금까지(2011), 60년동안 신학순례와 신앙의 벧엘 찾기가 혼자서 이뤄진 것 아님을 고백한다. 많은 영향받고 빚진 사람들로서 12명만 거명한다면, K.바르트, P.틸리히, T. 샤르뎅, 리챠드 니버, D.본훼퍼, J.몰트만, J. 힉, J. 캅, 김재준, 함석헌, 서남동, 유동식 선생들이다. 개신교 신학 밖의 사람으로서 크게 빚진자들은 C.융, M. 엘리아데, H.G.가다머, K. 라너, R. 오토 선생들이다. 학자들보다도 신앙을 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의 영향도 컸다. 규암 김약연, 남강 이승훈, 성산 장기려, 오방 최흥종,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 알버트 슈바이쳐, 마더 테레사 등이다.

2. ‘하나님을 다시 찾아서’ 주제는 발상법을 바꿔야

이번 제8회 예수목회세미나 주제 ‘하나님을 다시 찾아서’를 받고서 맘에 안들고 거부감이 일어났다. 물론 주제를 설정한 의도를 새김질 해보면, 내가 다시 제시해보는 주제와 속 뜻은 다른 것이 아니지만, 동안거(冬安居)나 겨울피정에 들어간 선승들과 신부들이 듣고서는 개신교 성직자라고 하는 우리를 어떻게 볼가 염려가 되었다. 불교의 ‘십우도’(十牛圖)가 경고하는 과오 곧 우리의 참 하나님과 나의 참 모습을 마치 밖에서 잃어버린 소를 찾는 목동처럼, 밖에서 다시 찾으려는 무의식적 의도가 반영되지 않았을가 반성해 본다. 마땅이 우리 주제를 “하나님 안에서 다시 발견당하기”로 바꿔야 할 것이라는 것이 숨밭 발제의 시작이자 결론이다.

3. 숨밭의 신학적 화두로서 성경구절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의 원점과 원리로서 로마서 1:17절을 주춧돌로 삼았다고 신학교 교회사 교수에게서 들은바 있다. 신학순례 60년만에 뒤돌아보니, 나의 신앙과 신학을 기초지으며, 추동하고, 독려하는 4개의 성구를 다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는 누구인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를 어떻게 만나는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4:6)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나고 체험하는가? :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4-28)

4. 역사적 예수를 깊이 알면 알수록 예수를 사랑하고 주로서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계명을 단순한 맘으로 준행할 수록 부활한 그리스도의 신령한 현존을 느끼게 된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 보다도 일차적으로 더 중요시하고 내 맘을 끌고 사로잡는다. 신약 성경이라는 경전이 역사적 예수의 전기(傳記)로서 ‘예수전’이 아니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의한 ‘선포된 케류그마’에 의해 착색되었다는 역사문헌비평적 성경학자들의 진솔한 말을 받아드린다. 그렇지만, ‘선포된 케류그마로서의 예수 이야기 4개 복음서 ’ 안에서, 나는 나의 신앙에 필요충분한 역사적 예수의 숨결과 심장의 박동과 뜨거운 피를 느낀다. 예수는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의 속 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는 ‘생명적 실재’이시다.

예수는 언제나 ‘은혜와 진리’라는 하나님 심장의 두심방, 두심실의 핵심을 보여주는 신령한 내과의사였다. 은혜없는 진리, 진리를 외면한 은혜, 그 두가지 형태는 복음의 변질이거나 심지어 반복음의 근본뿌리라고 느끼고 있다. 은혜와 진리는 빛의 이중성(파동성과 입자성) 처럼 신적 실재현존의 이중적 존재양태이다. 은혜와 진리, 은총과 진실,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 심장의 좌우심방에서 울려나오는 생명박동소리 이며, 건강한 교회의 피돌기 모습이다. 한국교회는 한때에 흔히 말하기를 보수교단 교회는 은혜(은총, 사랑)는 충만하데 진리(진실,정의)가 결여되어 있고, 진보교단 교회는 그 반대라고 말했지만, 현재는 보수나 진보나 ‘은혜와 진리’ 둘다 통체로 망실되어 있다. 그래서 교회에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설교는 있으나 ‘예수’가 없고 , 정통신학교리로 수식되는 ‘교리적 하나님 설교’는 우렁차게 들리는데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고 있다. 그 공간여백을 타고 종교 모리배들이 명예욕, 권력욕, 재산욕으로 발호하면서, 복음과 교회를 능욕하기를 식은밥 먹듯 맘대로 하는 형국이다.

나는 기독교란 실천적 삶의 종교라고 믿는다. 예수계명을 준행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느끼고, 부활한 예수의 현존을 체험하는 종교라고 확신한다. 신학과 교리가 아무리 정교하고 위대하고 완벽 할지라도, 그런 것을 통해서는 예수와 하나님에 ‘관하여, 대하여, 아는 지식’일 뿐 산체험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진정한 심도깊은 ‘역사적 지식’과 ‘신앙적 고백’은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고 병행한다(서남동). 현대 성서신학에서 ‘역사적 비평학’은 예수에 대한 참다운 ‘역사적 지식’에 이르기 위한 예비단계일 뿐, 복음서에 대한 ‘역시적 비평연구’가 곧바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적 지식이 아니다. 진정한 역사적 지식은 인격적 지식이며, 인격적 체험이며, 인격적 만남과 합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치 이후 무신시대에서 현대인들이 무신적 세계체험,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의 하나님 ‘부재 체험’은 하나님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계명준수의 부재’ 때문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본시 ‘없이 계신 하나님’(다석 유영모) 이시다. 중력이 눈에 안뵈이듯이 하나님도 안 보인다. 평지를 걸을 땐 중력을 안느끼듯이 평범한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현존을 못느낀다. 그러나, 지구중력보다 작은 달표면 위에서 걷는 우주인의 걸음걸이를 보거나, 짐을 지고 높은 계단을 오를 땐, 새삼스럽게 중력의 현실적 실재성을 깨닫는다.

현대 그리스도교회의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의 부재체험’은 두가지 이유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그 하나는 교회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욕심으로 가득차서 맘이 청결하지 않기 때문이다(마5:8). 다른 한가지 이유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준행하지 않기 때문이다(요14:21). 교회와 교인의 심령이 청결하게 되고, 한국 기독교 교회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예수도 돌아오고 하나님도 당신의 현존을 느끼도록 하나님 백성들의 심령속에 은혜와 진리의 빛으로서 자기를 계시하실 것이다고 믿는다. 중력이 언제나 거기에 작용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현존은 언제나 여기에 ‘없이계심으로 늘 계신이’ 이다. ‘하나님의 은폐’가 아니라 ‘인간성의 은폐와 타락’이 문제라고 본다.

5. 아래오바고의 바울 설교가 숨밭 맘을 사로잡고 히브리적-이스라엘적 신앙의 본류에로 돌아가도록 돕고 살려내었다

숨밭이 ‘무등산의 벧엘체험’을 한 후(1957-58), 신학교에 입학하여(1959) 신학순례를 한지 40년이 지날무렵(1999), 나는 마틴 루터의 소명처럼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에 강렬하게 심령이 이끌리고 집중됨을 느꼈다.

나의 ‘무등산의 벧엘체험’이란 무슨 신비한 황홀경의 신비체험은 아니었지만, 인생진로를 놓고 고민하던 청소년이 잊을 수 없는 일종의 ‘누미노제 체험’(R. Otto) 이였다. 무한 거룩 지고자에게 “당신의 이름과 나의 나아갈 앞길을 알려주소서”라고 요청하는 청년을 엄습하는 ‘무한자 앞에서의 티끌같은 유한자로서의 무화(無化)경험’이었다. ‘무한시공 속에서 찰나같은 실존의 무상성에 대한 느낌’, ‘세상사 위대한 업적성취가 바닷가 모래성 쌓기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억새풀잎 속에 붙어 울어대는 귀뚜라미가 인격적 영물 사람을 알수 있느냐는 되물음’,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복음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소명’을 철저하게 느끼는 체험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나름의 벧엘이 있듯이 나에겐 ‘무등산의 벧엘’ 체험이 있었다.

신학교엔 어떤 종류학교가 있는 지도 모르고, 교파나 교단소속의 신학교가 따로 있는 줄도 모르고, 영적 지도목사의 안내를 받아 장공문하(長空門下)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숨밭의 신학수업과정에 대한 간증에서 고백한대로 20세기 세계신학계의 거성들의 신학적 사상을 조금씩이나마 맛보게 되었다. 20세기 신학계 거성들과 동시대를 살면서 그들의 사상을 배우게 된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말해서 서구 기독교 신학사는 너무나 형이상학화 되었고,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콘스탄틴적 로마제국을 닮았고, 너무나 역사지평에 경도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신학순례 40년의 소감이었다. 다른 한편 1970-90년 어간에 한국 교회에 불어닥친 ‘교회성장론을 핵심으로 한 미국식 선교신학’의 홍수에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를 구해주고 위로해준 것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웅장한 위엄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설파하고 ‘아레오바고의 설교’을 당당하게 설파하는 시도바울의 멧시지였다. (i) 하나님은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만든 성전 안에 계시 않는다는 것 (ii) 무엇이 부족한 것 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iii)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주시는 이요,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는 것이 설교의 핵심이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소위 말하는 ‘피조물과 질적 차이를 가지신 초월자 하나님, 유한은 무한을 포용 할수 없다는 교리, 우주 대자연은 창조주의 조성물이지 그 안에서 하나님 영광의 임재를 말해서는 않된다는 칼빈-바르트-하비 칵스의 강조신학, 인간성 안에 신성의 내주(內住)를 부정하며 인간본래성의 전적타락을 말하는 원죄론’등등을 제대로 새롭게 이해해야 겠다는 자각이 확실하게 섰다.

다시말해서, 기독교장로회 교단의 성직자를 양성해내는 과제를 떠맡은 한신대 신학교육의 색깔은, 그 에큐메니칼한 개방성과 학문 연구의 자유보장에도 불구하고, 소위 ‘개혁파교회신학전통’ (Reformed Church Tradition)의 영향이 무의식중에 많이 작용하는 학문풍토였다. 그 신학적 전통의 무개로 부터 탈출은 숨밭에게 적지 않는 지적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점점 가톨릭의 칼 라너(K. Rahner)의 목소리가 좋아지고, 마이스테르 엑하르트의 영성신학과 죤캅(JohnCobb. Jr.)의 과정신학적 사유가 나에게 더 이끌리게 되었다. 깊이 알고보면 후기 바르트의 원숙한 신학적 사유나 1세대(30년) 후배 신학자인 칼 라너의 신학적 사유가 크게 다름없는 줄을 깨닫지만, 정통바르트학파의 한국 제자들은 ‘로마서 강해’를 출판하던 예언자적 바르트를 더 많이 사랑하는듯 했다. 나와 비슷한 동년배인 70대 인생여정을 걸어가면서, 활발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서구신학자 폴 니터나 샐리 맥페그 최근 저서는 내 맘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6. 에베소서 4:6절 ‘한 분 하나님은 만유 위에, 만유를 통하여, 만유 안에 계신다’는 구절은 후기 초대교회 공동체의 성서적 하나님신앙고백을 조직신학적으로 압축한 총괄적 표현이라고 읽는다. 그 총괄표현은 인간의 론리적 사유에서 보면 반리성적이고 반논리적이다. 변증법적 사유라기 보다는 삼중적 명제를 하나로 통전시키려는 역설적 논리이다. 루터의 로마서 1:17절이 16세기 종교개혁을 추동한 다이나마이트 였듯이, 에베소서 4:6절은 21세기 종교개혁을 이끄는 신학적 다이나마이트 성경구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은 흔히 혼동하듯이 ‘일신교적 신앙’(henotheistic faith)이 아니라 ‘유일신론적 신앙’(monotheistic faith)임을 내게 분명하게 깨닫도록 해준 책은, 리쳐드 니버의 명저「Radical Monotheism and Western Culture」였다. 리쳐드 니버는 다신론(polytheism)ㆍ일신론(Henotheism)ㆍ유일신론(Monotheism)이 신의 숫자에 관계된 어린아이들 세계의 신학담론이 아니라, 우주만유를 통일하는 궁극적 원리나 실재가 있다고 인정할 것인가 말것인가, ‘궁극적 가치나 실재’가 존재한다면 몇가지나 된다고 볼 것인가의 문제에 관계된 것임을 깨닫게 해준 신학자였다.

다신론은 원시시대의 다령신앙형테나 신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는 미개시대 신론신념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신론의 본질은 우주대자연과 이념들과 가치세계엔 그것들을 하나로 꿰뚫어 통전시키고 가능케하는 궁극적 원리 혹은 실재가 없다는 신념의 종교적 표현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철저한 ‘상대주의 세계관’이다. 다양성과 차이와 순간순간 드러난 존재들의 현상들이 있을 뿐이다. 다양성과 차이는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세계관적 신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다신론적 사회’인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리챠드 니버 표현으로 말하면, ‘하나’는 곧 ‘다수’로서 존재한다(One as Many).

일신론이란 신은 ‘한분’이라는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여려신들 중에서 최고신으로서 권능과 통치력이 뛰어난 신이 있다는 신념이다. 하위 신적 존재들을 통어하고 지배한다. 그리하여 신들 세계에서나 지상의 만물가운데 통일된 질서를 유지한다. 이것이 사회정치사상으로 반영되면 강력한 군주적 통일제국의 정치철학 이념이 된다. 그러나, 이 최고신은 그 아래 하위급 신들이나 이념들과 ‘질적차이’가 아닌 권능면에서 ‘양적 차이’만을 가지기 때문에, 신들, 이념들, 세계만유를 완전히 초월할 수 없다.

고대 이스라엘 ‘엘신앙’ 모세종교시대 ‘야훼’신관은 ‘일신론’(Henotheism)에 가깝다. 그러한 신은 리차드 니버 표현대로 ‘여럿중의 최고로서 하나’(One among Many)일 뿐이다. 다른 종교들이 섬기는 신들을 경쟁관계로서 파악한다. 리쳐드 니버의 통찰에 의하면, 제4-5세기 제2이사야 시대에 이르러 참된 ‘유일신론’(Monotheism)의 단계로 이스라엘 신앙이 승화되었지만, 서구 기독교 역사는 로마제국의 통일 이념이념으로 복무하면서 ‘일신론’(Henotheism)적 종교사회문화에 머물렀다고 문명비판적으로 성찰 한다.

진정한 ‘유일신론'(Monotheism)은 한분 이신 하나님이 만유에 예속당하지 않고 온전한 자유로서 초월하지만, 역설적으로 스스로 만유에 내재하고, 만유위에 자신의 존재능력과 영광과 생명을 분여(分與)함으로서 스스로 만유와 함께한다. 초월/내재는 충돌이 아니라 진정한 유일신의 속성이 된다. 리챠드 니버는 ’만유를 초월한 하나‘(One beyond Many)라고 표현했다. 유일신론이 주장하는 것은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 할수 있는 분은 여럿이 아니고 ‘한분 뿐’이라는 것이며, 역사적 종교들은 ‘신비로우신 이 한분’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이요, 그들의 문화역사에서 경험한 다양한 표현들이 나타낸 ‘다양한 긍극적 실재 이름들’이라고 본다. 매우 역설적 표현처럼 들리지만, ‘종교다원론’을 주장하는 죤힉을 비롯한 대표적 신학자들은, 진정한 ‘유일신관’의 입장에서만 종교다원현상을 자유롭게 수용할수 있다고 본다.

나는 에베소서 4:6절이 성서적 유일신앙의 성숙한 표현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초월/내재라는 이중면의 역설적 통일만이 아니라, 또다른 차원 곧 “만유를 초월하시고 만유 안에 내재하신 이”가 동시에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는 한 분’임을 고백함으로서, 진화론적 사유체계와 과정사상적 사유세계를 포용하는 사유지평을 갖게되었다. 동양종교 일반이 특징으로 갖는 ‘영원한 현재, 순환론적 사유체계’를 넘어서 ‘새로움을 열어가는 진정한 창조신앙’을 담보하게 되고, 인간의 참여적 분깃을 담보하고 시공간의 세속적 삶의 전체활동을 ‘성례전적 과정’으로서 이해하는 (떼이야르 샤르뎅) 이해지평을 열었다. 이것이 동양종교에 수혈시킨 그리스도교 신앙의 ‘새로움’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실존적 신앙고백에 의하면,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 신앙’은 일체의 상대적인 것을 신격화, 우상화, 절대화 하는 유혹의 덫에서 나를 지켜준다.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간적 초월 또는 피조물과 배타적 분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규정 할 수 없는 분, 신비 그 자체, 존재의 지반과 능력, 없이계신 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이기에 곧 우리와 매우 가까이 계신이요, 내안에 계실수 있다.

하나님의 ‘인격성’ 고백은 관점의 주체를 인간에게 둘 때 문제가 된다. ‘인격성’이란 말 자체가 ‘인격성을 알고 체험’하는 인간진화단계의 현재수준에 빗대어 하는 말이다. 인간의 인격성을 기준 또는 표준으로 하여 하나님을 생각할 땐, 많은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인격성의 특징으로서 의식이 자기를 알고, 응답하며, 책임을 느끼고, 자유와 자기초월경험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적 인격자”라고 보는 성서적 신앙고백은 지탱되어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의 절대어둠과 침묵 속에서 ‘주 하나님, 아버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만유 안에 계신 하나님’ 신앙고백에서 나는 대자연의 생명활동과 땅위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양하며 향유하는 자유를 찾았다. 자연과학적 진화론은 ‘창조적 진화과정’을 설명하려는 학문의 아주 단순한 기초설명이다. 과학적 진화론은 ‘창조적 진화’를 필요충분하게 다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게는 터무니 없이 불완전하게 느껴진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연과 필연’, ‘복잡계의 혼돈가운데서 질서형성’, ‘물질의 자기조직화 원리’등등은 내가 경험하는 생명의 신비함을 이해하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과학의 진화’를 더 기다리고 있다.

전통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창조주 신앙을 관념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고백하려면, 우주대자연을 바라보는 전통적 관점을 혁신해야한다. 거기에 하나님이 영광과 솜씨가 빛난다. ‘자연이 곧 하나님의 몸’이라고 과감하게 고백한다고 해도 그 고백이 ‘범신론’인 것은 아니다.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는 한분 하나님’ 신앙에서 나는 ‘창조적 진화사상’의 기초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실존적으로 하나님신앙을 선한 사람들의 생명 안에서 신비하고 경이로운 불꽃으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하고 있다.

모든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약자를 배려하고 우정과 동지애를 도답게하는 ‘자기희생적 사랑의 불꽃’, 죽음과 고난을 예견하면서도 ‘정의를 지키는 양심의 불꽃’, 생사를 두려워않고 ‘진실과 진리를 증언하는 지성의 불꽃’ 을 통하여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그와 같은 꺼질 수 없는 불꽃의 발화자요, 산소공급자요, 그 불꽃의 광휘속에 지금도 일하는 분이시다. 포이에르밧하의 ‘소외론’을 나는 다시한번 뒤집는다. 인간본질의 가장귀한 보물들을 밖으로 투영하여 신관념이 탄생한 것 아니라, 신비이신 하나님이 신적본질을 만유속에, 특히 사람 속에 끊임없이 육화함으로서 인간성이 되었고 더 영글어 간다고 본다. 인간 속에만이 아니라, 피조물 속에 이 신비한 불꽃들이 타오르는 한 나는 무신론자가 될 수 없다. ‘신의 부재’를 말 할 수 없다. 예수 안에서 투명하게 범례적으로 ‘육신이 되신 하나님’을 보는것이 그리스도교라고 믿는다.

7. 마지막으로 교회론에 관한 나의 이해를 토로한다. 성경에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이해에 관하여 많은 은유적 표현이 있다. 새 이스라엘, 택함받은 회중공동체, 선교의 전진기지, 구원의 방주, 예수의 제자공동체, 등등이다. 그러나, 가장 심원하고 본질적인 은유로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사도바울의 표현을 가장 심원한 이해로서 보고자 한다.

현대신학의 교회론에 있어서 본 훼퍼의 공헌은 지대하다. 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제자 공동체’로서 보았고, 말년엔 특히 세속 한 가운데 형체를 입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파악 했다. 1960-80년대까지 ‘제자직’을 강조하는 본 훼퍼소리가 더 강렬하게 들려왔다. 어려웠던 군부독재시대에 ‘저항과 진리에 순종’이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 속에서, 시공 속에서 형체를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고백적 통찰을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주목하라고 촉구하였다. 그것은 은유적 표현이거나 상징 이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스도의 현실적 실재라는 것이다. 몸은 구체적인 실재를 말한다. 세포의 신묘한 유기체로서 집합체이듯이, 그리스도 예수를 심령에 모신 살아있는 작은 산 생명세포들 신자들이 모여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룬 것, 이루려는 것이 교회이다.

몸은 유기체이다. 개체와 전체가 상호공속적 이다. 전체 몸둥이 중에서 작은 암세포의 발생은 전체를 사망에 이르도록 할수 있는만큼 치명적이다. 오늘의 교회는 신령한 예수의 몸으로서 세상 한 복판에 있는 ‘거룩한 표징, 세크라맨트’가 아니라, 종교기관이 되고 교회사업체가 되었다. 영혼의 치유활동 대신에 교회경영론이 인기있고, 교인의 영적 풍성함이 아니라 교회당의 위용이 목회성공의 표준이 되었다. 골방기도는 살아지고 매스컴을 타는 ‘대형집회’가 아니면 시시하게 느끼는 교계풍조가 되었다.

그 모든 교회의 타락과 변질과 종언의 책임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져야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집요하게 종교지도자를 따라붙는 명예욕, 권력욕, 지배욕, 과시욕을 털어내고, ‘예수의 복음 전하는 사람’되기로 다짐했던 처음약속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예수 전하기’가 아니라 ‘예수 살기’ 운동을 실천해야 한다. 비록 작은교회 목사직일지라도 대통령직하고 바꾸지 않는다는 성직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지켜내야 한다. 교회는 땅 위의 하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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