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바울 여정) 여행기입니다. "성지는 없다." 예,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성지 순례' 혹은 '성지 답사'란 말을 대치할 길이 없어, 그냥 그런 제목으로 글을 이을 것입니다. 정말 '성지'란 없습니다. 다만 거룩하고 모범적인 신앙인들이 밟았던 땅은 있습니다. 또 성경 속의 땅도 있습니다. 이 글은 그 땅을 후에 밟아 본 사람의 기록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그 땅을 밟았던 사람들처럼 되고 싶은, 어쭙잖은 착각에 빠져도 봅니다. 혹 잘못 알고 쓴 게 있으면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필자 주

이고니온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했다. 사도 시대에 안디옥은 두 군데가 있는데 한 곳은 이미 첫날 들렀다. 수리아의 안디옥이 그곳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이방인들이 많이 따른 곳이다. 이곳에서 전도하다 유대인들의 핍박을 만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13:13,14)

비시디아 안디옥에는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 회당이 있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모임이 있었고 바울도 이곳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누구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도 회당을 자주 이용하셨다. 바울은 이곳이 그에게는 낯선 곳인데도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공회가 굉장히 개방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바울이 명 설교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그리스 로마시대의 바실리카 유적만이 남아 있다.

사도행전 13장이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사역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곳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걸 밝혔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 것과 무덤에서 살아나셔서 부활했다고 설교했다.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복음의 핵심을 설교한 내용이 바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다. 이 설교가 기록으로 남은 바울의 첫 설교가 되었다.

▲ 비시디아 안디옥의 바울이 명설교를 한 곳으로 추정되는 바실리카 회당 유적지 표지판     ▲ 엉겅퀴가 널려 있는 유적지에서 한 컷 찍었다.

사람들은 경청했고 다음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했다(행13:44). 바울의 설교를 듣는 대상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행13:16)이었다. 이곳은 전 사역지에서 핍박을 받고 온 곳인데 사역이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핍박은 계속되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13:50-52)

그러니까 우리 일행은 바울의 전도 여행 코스와는 정반대의 코스로 거슬러 간 것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지금은 터키의 작은 도시로 ‘얄바츠’로 불린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복음을 전함으로 소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이 퍼지는데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한 곳이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핍박으로 쫓겨났지만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 이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믿음이 굳건하도록 지도했다. 믿음은 받아들이기도 힘들지만 지키기가 더욱 힘들다. 요즘도 그렇지만 사도 시대에는 핍박이 심했으므로 더욱 그랬다. 바울은 어떤 환난과 핍박에도 넘어지거나 배교하지 말고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한다. 그때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한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14:21,22)

역사적으로 비시디아 안디옥은 실루쿠스 1세(BC 321~281)가 자신의 아버지 안디오쿠스의 이름을 따 세운 도시다. BC 25년에는 비시디아 안디옥이 로마제국의 갈라디아주에 편입되었으며 갈라디아인들이 이 지역에 많이 살았다. 갈라디아서는 이 지역에서 복음을 받은 자들이 유대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이 기록한 책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는 성전과 회당, 연극장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있는데, 아크로폴리스 중앙에 아우그스투스 신전터가 있고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상수도 유적이 있다. 가장 큰 로마의 목욕탕도 있다. 이곳은 아직 발굴 중이며 그렇게 유적이 잘 정비되어 있질 못하다.

▲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적지에 있는 부조상     ▲ 바울기념교회를 알리는 미주한인들이 세운 표지판

우리는 성지순례라는 목적에 부합되게 바울의 명설교를 한 곳으로 추정되는 큰 바실리카 회당 유적만 둘러봤다. 항상 성지순례가 그렇듯 돌무더기와 무성한 잡초, 남아있는 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누가 말했던가. 성지순례는 유적을 보러 가는 게 아니고, 그 시대 성도들의 숨결을 들으러 간다고. 맞는 말이다. 유적을 못 보아도 신앙을 지켰던 선조들의 믿음의 숨결을 읽으면 된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바실리카 유적을 보았지만 그 유적보다 더 큰 바울 일행의 전도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양산을 쓰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햇살이다. 햇살이 참 날카롭다. 날씨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이 그들에게 없었다면 핍박으로 얼룩진 땅에 복음의 뿌리는 내리지 못했으리라.

비시디아 안디옥은 유적지에 대한 관리 또한 허술한 게 그냥 눈에 보인다. 아마 이슬람 문화권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들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들어갔던 길을 잃어 나오는 길에선 일행이 좀 흩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나와 몇 사람은 들어갔던 길이라고 생각하여 내려왔는데 도로보수 중인 이들이 그쪽은 길이 아니니 다른 데로 돌라가라고 해(말을 못 알아들으니 정확히 그런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들의 만류로) 돌아 나왔다. 그들은 다른 터키인들과는 좀 다르다. 친절함이 없다. 한참 점심을 먹고 있는 자신들 곁에 나타난 낯선 이방인이 침입자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우여곡절 속에 주차장으로 오니 신발에 온통 먼지가 자욱하다. 먼지를 떨며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에서 먼지를 떨었다는 성경이 생각났다.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행13:51)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바울 사도가 신발의 먼지를 떤 곳에서 나도 신발의 먼지를 떨다니.

근데 같은 먼지를 떠는 모습에 그 의미는 너무나 다르다. 사도들은 핍박을 받아 먼지를 떨었지만 난 그냥 먼지를 떨었다. 그들이 성경을 이루려고 먼지를 떨었다면 난 신발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먼지를 떨었다. ‘그럼 그렇지. 어찌 바울을 따라갈 수 있으랴.’ 다시 한 번 나의 부족이 송두리째 드러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먼지를 떨고 나서 바울 일행이 간 곳이 우리가 이미 다녀 온 이고니온인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140km다. 우린 차를 타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이곳에 왔다. 성경에서 지명이 나올 때는 바로 이웃 동네처럼 나온다. 실제로 성지순례를 하다 보면 그 먼 거리에 놀랄 때가 많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 일행이 이웃 동네처럼 드나들던 곳들이 이리 먼 곳들이다. 우린 차로 이동하면서도 거리감을 느끼는데 그들은 걸어 다니면서도 이웃을 드나들 듯 한다. 무엇 때문에 이런 거리감의 이질화가 있게 될까. 그것은 아마 우리가 찌든 현대 문명의 이기 탓이기도 하지만, 사명감의 결여가 아닐까 생각한다.

잠깐 동안 바실리카 회당 터를 들러 보고 아직 잘 정비되지 않은 몇몇 유적들을 둘러보는 데도 이리 힘드니 바울 일행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길이 아닌 곳이면 가지를 말라.’했던가? 근데 길을 모르니 어쩌란 말이냐? 물으려도 아는 사람이 없고. 참으로 난감한 비시디아 안디옥 순례 길이었다. 가시 돋친 엉겅퀴나 우리의 여정이 까칠하기가 똑 같은 모양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에 부딪히면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을 확신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8) 비시디아 안디옥은 이처럼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명이 이방인 전도에 있음을 깨닫게 한 중요한 장소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공동체를 떠나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교회를 세웠다.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은 AD 325년의 니케아회의부터 소아시아에서 개최된 모든 종교회의에 참석했다. 이곳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우린 둘러보지 못했다. 바울기념교회에서 발견된 제단, 세례 물통, 십자가 장식, 서기오 바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서기오 바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이곳 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보아 구브로 섬의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의 친족들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 사도가 서기오 바울을 구브로 섬에서 만나 전도하고 소아시아의 버가에 도착하자마자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온 것은 서기오 바울의 주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주차장으로 오는 길옆에 있는 바울기념교회는 한국 순례객들을 위해 미주교포순례단이 세운 한글 안내문이 하나 붙어 있다. 주변의 폐허에 비하면 그게 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길거리에 있어 안을 들여다보니 별 것이 없었다. 우리 일행은 이 교회는 들르지 않았다. 지나는 길에 입구에서 나는 사진만 한 컷 찍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