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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교회개혁, 이렇게 하면 어떨까 [5]원시 유일신 신앙 극복하여 이웃종교와 상생하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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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1월 01일 (토) 10:49:06
최종편집 : 2011년 01월 01일 (토) 15:37:54 [조회수 : 2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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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이기에 어느 정도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진정한 유일신 종교라면 배타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 유일신은 특정 종교인에게만 계시될 수 없다

유일신교란 무엇입니까? 유일신관의 핵심 개념은 글자 그대로 ‘신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유일신은 어느 특정 종교인들에게만 계시되거나 그들과만 관계를 맺는 편협하고 지엽적이며 유한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즉 하느님의 유일성은 전체 포용으로써의 ‘오직 하나(唯一)’이며,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크게 품으시는 ‘궁극 실재(ultimate-reality)’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유일하신 참 하느님이 기독교만 인정하셨고, 기독교를 통해서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편협한 원시 유일신 신앙이 인류 역사에 수많은 갈등을 만들어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오랫동안 배타와 독선에 빠져있었던 이유는, “성서의 모든 기록은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며, 또한 절대 권위를 부여받은 기독교 성서가 자기 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확신하는 기독교인들의 신념을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기록자들의 고백을 수없이 많이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의 복음서 14:6)라는 문장과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행전 4:12)라는 고백의 문장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2. 성서의 언어는 ‘객관적 진술’이 아닌 ‘고백의 언어’

제 글에서 여러 번 반복했지만, 너무나 중요하기에 여기서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나 사도행전 기자가 그렇게 전하고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객관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애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진실로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이 성서를 열심히 읽는 것은 좋으나 성서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라는 사실은 잊지 말고 읽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몇 가지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기독교 성서의 출애굽기(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에 관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장자를 모두 죽이셨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한밤중에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아들을 모조리 쳐죽이셨다. 왕위에 오를 파라오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땅굴에 갇힌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에 이르기까지 다 쳐죽이셨다.” (출애굽기 12:29)

“그 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야훼께서는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실 수밖에 없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처음 난 것은 모조리 죽이셨다.” (출애굽기 13:15)


그러나 성서의 이 기록은 당시 사람들의 고백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또한 파라오 한 사람의 고집을 꺾기 위해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을 죽이는 신이라면 인류 전체의 신으로 경배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혹 그가 이스라엘 민족만의 수호신에 그친다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편협한 신으로 지탄받아 마땅하지 않을까요?

성서의 모든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그때는 ‘율법의 시대’였기에 ‘복음의 시대’인 지금과는 다르며, 하느님께서 지금은 그런 일을 하시지 않는다고 자위하는 기독교 보수 신앙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 때 그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래도 여전히 하느님을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성서는 “야훼께서는 파라오로 하여금 또 고집을 부리게 하시었다.”(출애굽기 10:27)고 기록함으로써 하느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믿게 되면 야훼는 파라오의 마음을 그렇게 조종해놓고는 신의 섭리에 거역할 능력이 없는 불쌍한 그에게 책임을 묻고 벌을 주는 파렴치하고 괴팍한 성격을 가진 신이 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섬겼다는 이유로 모세가 레위족속 사람들에게 살인면허를 주어 자기 동족 삼천 명을 몰살시켰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성서기자는 이 사건을 ‘야훼께서 하신 일’이라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32:35, “그 뒤에 야훼께서는 백성이 아론을 시켜 수송아지를 만든 데 대한 벌을 내리셨다.”) 이 기록은 신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지 않으면 이방민족 뿐 아니라 자기 백성들도 가차없이 죽이는 신의 잔인무도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납고 반인륜적인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과 기록자의 신인식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의 기록은 당시 사람들과 기록자가 하느님을 그런 분으로 믿고 해석했음을 반영하는 것이지 그 기록 자체가 객관적 사실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2~3천 년 전입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은 그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편협하고 반인륜적인 기록을 “성서는 오류가 없다”는 정통 교리 때문에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믿는 것은 2천 년 전의 원시신앙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을 ‘인격신’이라는 교리적 전제에 가두지 말라

다원화된 사회에서 여러 이웃종교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교리에 의한 배타적 유일신 신앙’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기독교 전통이 고백하는 ‘유일하신 참 하느님’은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인류의 아름다운 종교 유산과 신념체계를 모두 부정하는 ‘배타적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자’이며 우주만물을 크게 품어주시는 ‘궁극 실재’로서의 하느님입니다. 그런 유일신 신앙에는 배타성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설정해 놓았던 모든 교리적 전제를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그 마지막 하나의 교리까지 다 내려놓고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처음부터 다시 재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모순들이 보이게 될 것이며, “이것만은” 이라며 그토록 소중히 붙들었던 그것이 바로 우상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진정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이웃종교와 더불어 상생 발전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은 인격’이라는 전제까지도 돌파되어야 합니다. 그 전제에 매인 착한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은 사람을 심판하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착한(?) 결론을 내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신으로 믿고, 성서의 기록을 오류가 없는 신의 말씀으로 믿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서가 가진 기록상의 오류와 한계뿐 아니라 기록자의 의도적인 왜곡에도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채 이성이 매몰된 폭력적 종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구절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엘리사는 그 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갔다. 그가 베델로 가는 도중에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사십이 명을 찢어 죽였다.” (열왕기하 2:23~24)

이 글에는 신에 대한 원시적 인식 내지는 기록자의 의도적인 왜곡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 중에는 이 글마저도 ‘신의 절대 권위에 의해 기록된 성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 기록에 의해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놀려댔다는 이유만으로 철없는 수십 명의 아이들을 곰을 보내 찢어 죽이는 잔인무도한 하느님에 대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그대로 오늘날의 ‘목사’와 일치시켜 교회 안팎으로 범죄를 저지른 일부 파렴치한 목사들이 자신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내세우며 불가침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는 웃지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그런 신으로 인식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은 물론이며 기독교인 전체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말이 신을 믿는다면 그 신은 말을 닮았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이 사람을 닮았다는 원시신앙의 전제를 비꼬는 말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인격’이라는 말을 신에 대입하면 그 순간 하느님은 우리가 규정한 그 ‘인격’ 속에 갇힐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느님은 ‘사람의 격(人格)’을 가진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격(神格)’을 가진 분이며,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초인격적인 그 무엇’입니다. 인격의 범위와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격’이라는 교리적 전제도 돌파되어야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제 우리는 ‘하느님은 누구신가?(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느님은 무엇인가?(What is God?)’라고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물을 수 있다면 하느님을 더욱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격’이라는 개념은 신성의 신비와 독특성을 우리의 경험과 논리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인격’이나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적절하고 아름다운 말일 수 있지만, 그 용어를 절대화하게 되면, 하느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안에 갇혀버리고 말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매여서는 안될 개념과 규정에 매여 틀을 만들고, 그 틀 속에 우리의 신앙과 삶, 심지어 하느님까지 모두 구겨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잔을 비우지 않고는 새 술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도 이제는 비우고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과 구원의 길에 대해, 또한 신과 그 섭리에 대해 지금까지 규정했던 모든 교리의 굴레와 전제를 돌파하고 뛰어넘지 않으면 21세기에 기독교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 이 칼럼은 격월간지 <공동선> 2011년 1+2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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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173)
2011-01-01 22:21:54
당당에서 다시 목사님의 글을 접하니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뜻이
이땅에 개독교를 기독교로 민드는 일에 일조를 할것입니다
계속 좋은 말씀을 이곳을 통해 주실것을 기대 합니다
올한해 강건하시고 평화가 함께하시며 행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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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
나원참 (61.82.31.187)
2011-01-09 03:34:43
당당뉴스를 읽다보면 "아!이 하나님의 실종시대에 그래도 바른 말 하시는 목사님도 계시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위로릉 받습니다. 계속 건필하시고...그런데 이 아래 무슨 개혁본부라는 닉 네임을 쓰는 인간,,,참 한심한 개독먹사들의 알바가 이런 곳에도 출몰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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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개혁본부 (121.134.176.179)
2011-01-03 13:36:27
참으로 세상이 어찌될려구 ㅉㅉㅉㅉ

글쓴사람 목사 맞나요???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어느종교이든 세상일들에서 다소 협력관계하여 세상을 따뜻하게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당연! 당돌빳다! 당근! "유일신" 이실진데...

그런것 마저 은근히 버리게 하는 뒷꼼수는 "마귀"들이 가장 좋아하는 논리에 의한 회유? 그런거 인가?....매우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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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
신밧드 (110.8.61.122)
2011-01-03 23:05:01
타인의 주장을 반대하려면 구체적인 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혁본부, 그것참!, 이름이 아깝군요, 무엇을 개혁하기 위한 본부입니까? 유일신이면 사람을 마구 죽여도 되는 것이군요. 그게 아니라고 목청껏 외치신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주인을 기다리며 허리띠를 두르고 깨어있었던 종을 칭찬하며, 오히려 주인 자신이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종에게 수종든다는 이야기,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그 이야기 못읽어보셨습니까? 아니면 듣지도 못했습니까?

기독교의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든, 휴양지에서 쓰나미를 맞아 죽든 (혹시 당신들 김ㅎ도 추종자?), 아니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유대인들처럼 대학살을 당해도 당연하다는 것이 목사의 입장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반대하면 마귀의 논리에 빠진 겁니까?

유일신은 절대권력을 가졌기에 사람 목숨을 파리 죽이듯 해도 괜찮다는 사고방식, 박 아무개나 전 아무개도 절대권력을 가졌으니까 무슨 일이든 그것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졸다는 사고방식, 그 때문에 이 땅에 인혁당 사건과 광주사태의 비극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리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런 정권을 구국기도회라는 명목으로 응원했고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권력을 나누어 가진 것이지요.

예수님도 대제사장들과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예수님은 갈릴리를 통치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제 국민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권력추구에 속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염증을 느껴 아예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겁니다. 정말 그것도 모르십니까? 그렇다면 이슬람 국가로 가셔서 유일신 알라를 섬기십시오. 그곳에서는 실패할 염려가 아직은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유일신의 절대권력이 통하고 있다니까요.

솔직히 저는 개혁본부가 뭐하는 곳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좋은 일 하시는 분들이겠지요. 하지만 어느 기독교 단체가 고의로 나쁜 일을 하겠습니까? 문제는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행한 일들이 자칫하면 인혁당 사건이나 광주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과 인간학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개혁본부라는 필명에 제가 조금 흥분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께서 크게 이해하여 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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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지킴이 (121.134.176.179)
2011-01-04 10:32:13
흥분?~ㅋㅋㅋ별로 흥분하신 티 가 잘 안나는디~ㅎㅎㅎ

하나님이 정 하신 것은 인간이 바꿀수 없드시! 하나님의 포지션 도 인간이 바꿀수 없습니다.

감히! 인간이 하나님을 해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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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밧드 (110.8.61.122)
2011-01-02 18:25:55
이사야님의 응원에 용기를 내어 다시 몇 자 올려봅니다. 우리는 흔히 어릴 적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 교회를 떠나도 언젠가는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 때문에, 주일학교 부흥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주입시키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배타성입니다. 어린이들에게 10가지 재앙은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입니까? 그중에서도 모든 맏이가 죽고 심지어는 파라오의 장남까지도 죽는 마지막 재앙을 이스라엘의 집들은 신기하게도 피해갑니다. 아마 이보다 더한 배타성은 없겠지요. 어릴 적에 주일학교에 다니다가 교회를 떠난 후 다시 올 때에는 어릴 적에 생성된 배타성을 그대로 안고 돌아옵니다. 그것을 몰아내려면 또다시 긴 세월과 우여곡절이 필요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같은 것들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기독교가 이웃종교와 더불어 상생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분부의 골자인것은 틀림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모두 도망갔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교리화를 완성한 후에는 기독교가 타종교와 상생할 수 길이 막히게 됐습니다.

소위 다원주의 세계에서, 비록 소수이지만 기독교인들이 교회 밖에서는 움츠리는 시늉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배타성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태도로 기독교가 타종교와 상생할 수 있겠습니까? 상생은커녕 기독교가 타종교와의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를 수정할 수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 감리교에서는 특히 감독님들의 개혁정신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들을 개심시키겠습니까? 그들에게는 현재의 권력과 금력보다 더 중요한 게 없습니다. 최후에는 심판이 있고, 천국에 입성하는 문제? 그들에게 그것은 죽고나서 잘 대응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아주 하찮은 문제일 뿐입니다. 과연 그들이 최후의 심판을 믿기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가 시작된지 벌써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가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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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 (210.2.47.57)
2011-01-02 08:03:20
목사님의 좋은 글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같은 목사님인데 왜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도 다를까 생각해 봅니다.
같은 신학을 하시고도 이런 개혁의 말씀을 하시는 목사님이 계시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종교란 어차피 인간사의 사회현상 중 하나라면 제도라는 이해를 위하여 쓰인 점을 간과해선 안됀다고 봅니다.
고백의 언어를 역사적 사실인양 객관하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에 많은 혐오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제도적 이해를 위하여 쓰인 것이며 4세기 이후 많은 변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미루어 짐작하고 있습니다.고증을 통하여 이를 반박할 수 없는 논리적 지식이 없음을 안타까워 한답니다.

종교의 언어란 존재의 의미와 가치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과학적인 언어나 사실관계를 논하는 역사의 언어와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면 역사화 한다는 사실은 많은 왜곡을 낳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의 역사적 성립 과정만을 보더라도 종교의 진리왜곡을 목격하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고 목사님의 좋은 가르침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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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 (121.162.90.242)
2011-01-01 19:15:19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모처럼 신앙적, 영적 지평이 넓은 글을 대하며, 이러한 관점이 한국교회안에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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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밧드 (110.8.61.122)
2011-01-01 18:10:14
통찰의 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추상적입니다. 독자에게 그렇구나 하는 공감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주일성수,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 주일만큼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버스운전사나 전철운전자처럼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분은 그런 직업을 택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는데, 그런 태도가 바로 배타성이고 무책임한 것입니다. 주일성수는 대한민국 백성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하에서만 주장할 수 있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이 그러한 상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이 되면 이스라엘에서는 차량들은 물론이고 모든 활동이 정지된다고 합니다. 안식일 규정에 남종이나 여종이나 하물며 부리는 짐승까지도 쉬게 하라고 했기 매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국민 전체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을 최대한 조성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텔과 같은 일부 업종은 안식일에도 영업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이교도가 일을 하게 되는데, 가령 이슬람교는 안식일이 금요일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일할 수 있다는 겁니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일성수를 해야만 복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목사님들이 많았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겁먹은 초신자들은 아예 고향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목사님이나 고참 신자들의 행동거지에 실망하게 되면, 그제야 주일성수를 포기하고 고향을 찾게 됩니다.

이런 문제들, 즉 집사 이상의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새벽기도 등의 각종 집회 참석, 십일조, 주초문제를 신앙과 직접 결부시키는 태도 등에 대하여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각성과 교리에 대한 손질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님께서 쓰신 글의 취지에 맞는지요? 새해부터 타박을 하고나니 죄송한 마음입니다. 용서하여 주시고, 새해에도 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형통하시길 비오며, 계속해서 통찰의 좋은 글을 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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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173)
2011-01-01 22:17:11
님께서는 류 상태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하시며 바른 방향에서 진실한
말씀을 해주신것 입니다 현실적인 사람의 삶속에서 왜곡돼 왔던 잘못된 것을 잘 지적해주셨습니다..이성을 겸비한 믿음 ...모두를 인정하며
넘어서 함께하는 기독교가 되야만 합니다
먹사나 막사들의 세치혀에 희롱당하는 기독교가 되서는 아니됩니다
신 밧드님 감사합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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