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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 이야기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23 주(20101031)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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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10월 28일 (목) 16:24:12
최종편집 : 2010년 10월 28일 (목) 19:59:47 [조회수 : 17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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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제 23 주(20101031)
성서일과/ 시 32:1-7; 사 1:10-18; 살후 1:1-4, 11-12; 눅 19:1-10
본문/ 눅 19:1-10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은 키 작은 삭개오의 이야기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흔히 주를 향한 열심이 주를 감동시켜 구원을 받았다는 식으로 설교하고, 이해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알아도 큰 문제는 없겠습니다마는 오늘 저는 다른 각도에서 본문을 보며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령이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

본문은 삭개오를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부자가 아니고 세리장이면서 부자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의 직업과 생활 형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삶의 목적과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가 무엇을 했는가를 알게 하는 말입니다.

세리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로마의 앞잡이라고 불리며 손가락질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매국노로 여겨졌고,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따라서 세리는 유대인이면서 유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인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을 율법이 엄격하게 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가 되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 일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 곧 세리 중에 우두머리였습니다.
그가 부자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죄인으로 욕먹기를 마다하지 않고 세리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생각한 바를 이루었습니다.
성공한 것입니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9:23-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이면서 또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목수의 일과 학자의 일은 다른 일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목수이면서 성공한 학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자가 되든지 천국에 들어가든지 둘 중에 하나만 택해야지 둘 모두에 성공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부자가 되는 일과 천국에 가는 일은 서로 다른 푯대이기 때문입니다.
푯대가 무엇입니까?
목표입니다.
영어로는 Goal 이라고 합니다.
Goal in! 하면 끝입니다.
다시 시작해야만 합니다.

푯대는 항상 하나입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푯대를 향하여 달립니다.
축구장에는 골대가 두 개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골을 넣어야 할 골대는 항상 하나입니다.
만약 내가 넣어야 할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차 넣는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자살골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부자가 되려는 푯대와 하나남 나라에 들어가려는 푯대는 축구장의 골대와 같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곳에 있는 것이어서 두 곳을 모두 목표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빌 3:13-14)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과 삭개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예수를 아는 사람, 예수를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삭개오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푯대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었습니다.
삭개오의 푯대는 땅에 있는 커다란 창고였습니다.
바울은 아직 당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상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이미 이룬 사람입니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삭개오와 바울 사이에 유일하게 같은 점이 있다면 그들은 목표를 향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전에 지녔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습니다.
삭개오는 부자가 되기 위하여 죄인이라 불리는 것을 감내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어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고...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본문 가운데 없습니다.
본문은 삭개오가 어떻게 변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본문은 삭개오가 변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땅에 있는 푯대를 버리고 하늘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던 푯대를 하늘로 옮긴 삭개오의 증거는 참된 것입니다.
이미 땅에 있는 푯대를 정복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보려다가 예수께 보여진 삭개오

별 일없이 잘 살던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유대 전체에 널리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분으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그 말씀에 권위가 있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여자들이나 어린아이들에게 친절하다고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죄인들과 잘 어울리셔서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받는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여자들, 죄인들이 수도 없이 그를 따르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것에도 관심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예수가 자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예수님도 자기처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와는 다르게 예수님 곁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율법을 범하는 죄인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일까?
삭개오가 예수를 보고 싶어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여리고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행렬은 굉장했습니다.
그를 따라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를 보려고 나온 여리고 사람들로 예수님 주변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삭개오도 그들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을 볼 재간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에게 가까이 갈 수도 없었거니와 키가 작아 발돋움을 해도 예수님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를 보기 위해 몰려든 그 많은 사람들을 보노라니 정말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의 눈에 가로수로 심어 놓은 뽕나무가 보였습니다.
체면 불고하고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뽕나무 잎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예수가 계신 곳을 향해 눈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예수님도 삭개오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나무 밑에 숨었던 때를 상기시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몰라서 물으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은 차라리 내가 너를 보고 있으니 너는 나를 피해 숨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 앞으로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별 수 없이 나무 그늘에서 나와 하나님 앞에 선 아담과 하와는 나뭇잎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나뭇잎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죄인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습니다.
예수를 보러 나무에 올라 갔는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어디 삭개오 뿐이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모두를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
주를 보고자 하는 사람을 주께서 보십니다.
주를 피해 숨어도 주는 보고 계십니다.
          (시 139:7-10)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더 놀라운 일은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사정을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어디 삭개오만이겠습니까?
주님은 무리 모두를 아시는 분입니다.
두루뭉수리, 한 덩어리로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과 형편을 알고 계십니다.
일찍이 이아야가 한 말입니다.
          (사 40: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주님이 다 알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런데 더 더욱 놀라운 일은 삭개오의 집에서 머무르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죄인일지라도 내가 상관치 아니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가죽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어디 삭개오만이겠습니까?
우리 모두를 향한 주의 사랑이요, 긍휼입니다.
죄인이어도 사랑하시고, 병들었기에 더욱 긍휼히 여기시는 주의 은혜에 감사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푯대를 바꾼 삭개오

죄인인 자신을 보고, 알고, 은혜를 베푸신 예수 앞에서 삭개오는 말합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땅에 쌓는 일을 포기하겠다는 말입니다.
푯대를 바꾸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잘 했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의 말로 칭찬할 수 없을 정도로 만족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땅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주님의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땅에 푯대를 정하고 사는 사람들의 푯대가 옮겨지기를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한 가지 이유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제대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려면 예수님께 주권을 드려야 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님이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주님이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삭개오 집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보기를 원하면서 막상 예수께서 자기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주께서 나를 보고 계시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더 알기 원한다고 말하면서 예수께서 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깊이 아는 것은 믿는 자의 의무입니다.
주님이 나를 깊이 알고 계시는 것은 은혜입니다.
주님이 나를 모른다 하시는 것이 가장 큰 저주입니다.
          (눅 13:25-27)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그런데 정작 주님이 나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은혜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누구나 예수를 향해 주(主)라고 부르지만 정작 종이 되어 그를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어땠습니까?
그가 주를 보기 원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사모함이 아니었습니다.
호기심 내지는 궁금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께서 그를 눈여겨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그는 예수를 몰랐지만 예수는 그를 알았습니다.
그런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자 머뭇거림 없이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즐거워했습니다.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리고 그를 주인으로 섬겼습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

그가 하시는 바 사랑의 일을 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그가 원하시는 바 의를 이루었습니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본시 바울은 삭개오보다 더한 자였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자에서 나아가 예수를 훼방하는 자였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훼방자요 핍박자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진정한 주로 섬기시기를 기원합니다.
내가 예수를 본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가 말해야 주께서 아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일을 하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주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서라도 차지할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매달고서라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가치는 삭개오처럼, 바울처럼 진정으로 주를 만난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를 만나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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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116.33.84.49)
2016-09-28 23:35:40
삭개오를 사랑으로 품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사회적인 약자들뿐만이 아니라 모든사람들이 미워하는 직업인들을 원없이 사랑으로 배풀어주신 진정한 스승이시다~!!!!
리플달기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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