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이 다가오고 있다. 가족의 생일보다도 먼저 분명하게 떠오르는 날이다. 내 삶에 중요한 가르침과 깨우침을 준 사람이 귀천한 날!

1970년 스물 두 살의 청년 전태일이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한 줌의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 날이다. 내 나이 두 살 때 일이니 내가 그 이름을 알 리가 만무하지만 역사는 나에게 전! 태! 일! 그 이름 석 자를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내가 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한국노동운동계에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 한 몸을 기꺼이 분신했던 의기 때문도 아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보여주었던, 가난한 사람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위해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그 마음이 내 인생에 질문을 던졌고 내 인생 방향을 수정하게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이불 속에 엎드려 읽으면서 끓어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던 기억, 그리고 전태일깥이 사랑할 수 있는, 온 몸을 던져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다짐했던 기억.

그런데 그 전태일의 출생연도가 1948년인 것을 최근에 알고는 깜짝 놀랐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아버지보다 네 살 적은 정도라니 말이다. 그는 어느 시대에나 항상 아름다운 청년으로 남아있을 텐데 실제로는 함부로 전태일 전태일 부를 수도 없는 연세가 드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태일은 전태일이다. 전태일이 전태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일 수 있는 것은 사랑과 베풂으로 꽉 찬 그의 삶이 천상 청년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전태일이 열사로 승화한지 40년째 되는 해이다.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오늘날이, 비좁은 공간에 적당한 환기시설도 없는 곳에서 원단 먼지를 마시면서 피를 토해가며 일했던 전태일 당시의 상황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절대적 상황이야 호전됐다지만 상대적 상황은 그 시절 못지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각박해진 인정머리들과 노동자들끼리도 경쟁해야 살아남는다는 발상들을 생각하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40이라는 상징적인 숫자가 있는데 올해 노동자들, 가난한 이들,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확 달라지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하고 은근히 바래보는 것은 망상일까?

전태일을 그리스도라고, 작은 그리스도라고 부르던 시대가 있었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의 의식이 깨어나게 되었고 노동조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노동자들에게는 분명 그리스도적 죽음이었고 죽은 듯 굴종하는 노동자 동지들을 깨우는 부활의 죽음이었다. 이런 칭호들이 불쾌했었는지 펄쩍 뛰면서 분노하던 이들도 있었다. 소위 스스로를 신실하다고 자부하던 기독교인들과 종교의 방패 뒤에 숨은 기독교인 자본가, 기업가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전태일이 결코 그리스도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고 단지 제 몸을 함부로 굴리고 자살한 무능력자, 루저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전태일을 작은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전태일 산화 40년을 맞아 전태일 재단이 작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청계천 6가인가 7가인가, 전태일이 분신하였던 장소 앞에 생긴,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 이름을 전태일다리로 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마 지금 그 다리는 버들다리인가로 명명된 것 같았다. 다리 이름을 지은 사람들도 그렇지 그런 자리에 다를 설치하면서 이름을 그렇게 지을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긴 권력의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는 이들에게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불편하고 듣기 싫은 이름이기도 하겠다. 사람들은 작은 성금을 내고 염원을 새긴 동판을 제작하여 그 다리 바닥에 까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10월 14일(목) 늦은 일곱 시 반, 우리가 이미 ‘전태일 다리’라고 부르는 그 다리에 촛불교회가 모였다. 전태일 재단과 함께 72번째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행진’이 열렸다. 하늘샘교회 김종수 목사(집행위원장)의 사회와 영등포산업선교회 이태훈 목사의 기도로 시작된 이날 예배에는 약 30명이 모였다.

시대의 증언자로 나선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박계현은 ‘전태일 동지는 열서넛 된 어린 여자시다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었다. 그 어린 소녀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여 버스비로 풀빵을 사서 나누어 주고 자기는 두세 시간을 걸어서 집에 가기도 했다. 그가 어린 여공들에게 건넨 풀빵은 그것은 자기도 넉넉지 않지만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연대의 표시였다. 그것은 전태일 정신이 사랑, 연대, 나눔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지금 많은 정규직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 주기 바란다. 40주기를 맞아 전태일 정신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어 이은영 총무(감리교청년회)가 전태일을 기리는 마음을 ‘사랑노래’라는 제목의 노래로 표현하였다. 노래가 끝나자 마자 빗방울이 돋기 시작하면서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서둘러 처마가 있는 인도로 올라갔다.

두 번째로 시대의 증언에 나선 조헌정 목사(향린교회)는 ‘커피 한 잔에 50원 하던 시절에 전태일은 하루 50원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를 당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으로, 하나님은 만나의 기적으로 먹이셨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은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약자, 빈자가 부자, 강자의 먹잇감이 된다. 전태일이 사라있다면 지금 어떻게 하였을까? 전태일은 이미 그때에도 자기가 가야할 길,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엠마오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가던 길을 되돌아 서슬 퍼런 유대인들이 이를 갈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 이들이 있다. 그들이 되돌아 간 것은 그리스도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했던 부활 예수 때문이다. 우리는 전태일을 만나, 자유와 해방의 해, 40년을 맞이하는 이때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예배를 마치니 다행히 비가 그쳐 10여 미터 떨어진 분신장소를 향해 한 바퀴 돌아갔다. 인원도 적고 거리도 가까우니 채 2-3분도 안 걸렸다. 그런데 그 자리에 트럭을 대고 물건을 내리려던 사람이 우리로 인해 방해를 받자 와서 ‘일해야 하지 않느냐’며 귀찮아한다. 결국 두말 않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전태일 반신상 앞에 울러 서서 기도를 하고 예배를 마쳤다. 일해야 한다는 말도 맞지만 전태일의 존재가 그처럼 귀찮게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좀 속이 불편했다. 그러나 아마 전태일이 살아 있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오히려 기뻐하면서 그 자리를 비켜주었을 것 같다. 그가 바란 것은 민중의 행복한 삶이었을 테니까!

전태일이 분신했던 자리에는 현란한 조명광고장치가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전태일 반신상이 마주보이는 곳에는 하늘 높이까지 의류매장인 두타빌딩이 위충당당하게 서 있었다. 두타빌딩 앞에 선 전태일 반신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마치 거대한 자본과 인간의 탐욕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같은 모습니다. 노동자가 자본의 힘 앞에 결국 고개를 숙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담담하게 민중의 삶과 노동자들의 여건이 좋아진 것에 대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으로 느끼고 싶었다. 전태일은 이미 부활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살아서 움직일 것이다. 노동해방의 그날까지, 민중이 모두 행복해지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