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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20 주(20101010)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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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10월 07일 (목) 16:25:23
최종편집 : 2010년 10월 08일 (금) 01:29:56 [조회수 : 4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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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제 19 주(20101010)
성서일과/ 시 111; 왕하 5:1-15; 딤후 2:8-15; 눅 17:11-19
본문/ 눅 17:11-19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개정)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이 돌아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했습니다.
나머지 아홉이 어디에 계신지 궁금해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머지 아홉도 너와 같이 깨끗해 졌을 텐데 그 아홉은 왜 오지 않았느냐?’
책망하고 나무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들어야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차라리 탄식에 가까운 혼잣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쩌면 멀리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홀로 우시던 그 때와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 주님은 결코 멸할 수 없는 주님의 도성이 멸망할 운명에 처한 것을 내다보시며 우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당연히 돌아와 감사해야 할 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시며 탄식하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실 수밖에 없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일이 왜 일어나게 될까요?
단순히 그저 감사를 모르는 인간의 죄악 때문이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끝을 맺는 것은 너무 쉽게 말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될까요?
오늘 본문 그리고 함께 주어진 성서일과를 통해 하나님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아홉은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주님이 물으셨으나 대답할 사람이 없었던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한번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이 되어서 대답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믿음없이 어떻게 치료를 받아겠느냐?’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이 그들을 어떻게 치료하셨다는 분명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는 절차도 없었습니다.
그저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 따름입니다.

14절에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라는 말씀이 있으니 저들이 치료를 받은 것 만큼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깨끗함이 예수님에 의한 것이라는 믿음은 오직 돌아온 한 사람만이 가졌을 것입니다.
19절에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이 무엇을 보고 네 믿음이라고 하셨습니까?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천형-하늘이 내린 형벌이라고 불리는 문둥병이 저절로 낫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을 목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하나님을 잘 아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너무 쉬웠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는 말씀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열왕기 하 5장은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나아만이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왕하 5:11]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그 아홉도 나아만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특별한 격식과 절차를 갖추어 자신들의 문둥병을 고치셨다면 주 앞에 무릎을 꿇고 사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차와 형식이 없었습니다.

그 아홉은 십중팔구 나아만과 같은 마음으로 투덜대며 길을 갔을 것입니다.
‘무언가 특별한 말이나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문둥병이라는 큰 병에 어울릴만한 그런 일을 하실 줄 알았는데....’
‘기도라도 해 주실 줄 알았는데....’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수군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제사장에게로 향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아만이 내 고향에 요단강 보다 크고 깨끗한 물이 없어서 나로 요단강에서 몸을 씻게 하느냐고, 분노하며 고향으로 되돌아가던 일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그들의 이런 마음은 그들이 깨끗함을 입었을 때에 그것이 뉘로 말미암았는지를 잊어버리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 하고 먼저 말씀하셨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탄식하실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믿는 자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믿음의 능력이 아닙니다.
되어진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되어지는 일의 과정이나 절차가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일의 결과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달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으로 사람 되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 아홉에게는 이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너무 좋은 나머지 돌아와 감사할 겨를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열 명의 병자가 주님을 불렀을 때 그들의 생각은 한결 같았을 것입니다.
병만 나을 수 있다면.....
눈 하나를 빼지 못하겠습니까?
아니 소경이 되어도 문둥병을 지니고 사는 괴로움만 하겠습니까?
그저 낫기만 한다면 낫게 해 주신 그 분을 위해 무엇인들 바치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부자들의 돈을 탐내는 분도 아니고 오히려 가난한 자를 깊이 사랑하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사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가까이 하시는 온유함과 자상함도 지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이나 여자만도 못한 처지였습니다.
문둥병은 그 병이 있는 동안 부정한 몸이 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 곁에 가까이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한다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주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지닌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소리칠 수 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도 그들을 가까이 오라고 하신 것 같지는 앟습니다.
단지 그들의 애절한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바라 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눈에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멀리서 당신을 부르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다 저렇다 하심이 없이 아주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율법이 정한 바에 따르면 문둥병자가 그 병을 고치더라도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하게 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사람들 곁으로 가서 생활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로 그 일-확인받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미 고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하실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고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 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멀리 서서 외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 앞에 가까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그 길로 예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와도 되는데 오히려 더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있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일이 벌어진 곳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였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제사장이 있는 예루살렘까지는 상당히 먼 길입니다.
그들은 가다가 깨끗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아서 이게 어찌된 일인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아홉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예루살렘에 가서 그 지긋지긋하게 아팠던 세월을 청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밖의 일은 모두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 후에 해도 될 일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지나서는 이제 깨끗해진 몸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고 분주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먼 길이라 해도 그때에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돌아와 예수님 앞에 서기 위해서 한나절 아니면 길어야 하룻길 정도 되는 길을 되짚어 오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성경에서나 보던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그 기쁨을 누리는데 열중했습니다.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생각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 누리는 이 터질 듯한 기쁨이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서 있을 수 있는 족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신다는 믿음이 이스라엘의 터전입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여 이웃에게 행할 바를 결정해야 하는 족속이었습니다.
지금 누리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지 그들은 옛일을 기억해야만 하는 족속이었습니다.
          (시 77:11)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사 46: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그 아홉이 자신의 옛 모습을 기억했다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겠습니까?

멀리서나마 주를 바라보던 그들이 아예 주를 떠나 버린 것은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조금 전의 일,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일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왜 잊었습니까?
지금 누리는 즐거움에 취해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풍요에 취해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을 잊을까 염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늘날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교회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믿음을 말하지만 그 믿음이 어떠합니까?
만에 하나라도 자기의 생각을 믿음과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와 다르면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 볼 겨를도 없이 이방인이라고, 마귀라고, 사탄이라고 저주하지 않습니까?

은혜를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옛 모습을 잊고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온 세상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부흥을 이룬 것이 혹시라도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 주신 주께 돌아와 무릎을 꿇을 겨를도 없이 주께서 주신 것을 누리는 데에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믿음과 세상에서 말하는 신념이 같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념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신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는 자가 신념을 믿음으로 착각하면 하나님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를 세습하는 문제가 큰 교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는데 그 중에 많은 경우가 세습문제일 정도로 흔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은퇴하는 목사의 아들이 목사라면 반 이상이 세습문제로 몸살을 앓게 되어 버렸습니다.
불과 20년 전의 일을 잊어버리고 크게 부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취해 버린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내가 고생해서 이룬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
주께 무릎을 꿇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과 나아만의 이야기가 한결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아람 사람입니다.
그것도 군대장관입니다.
그가 문둥병을 고쳤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께 엎드려 사례한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피를 받았으나 이방인들과 혼혈이 되어 유대인들로부터 개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족속입니다.
예수님은 아예 이방인이라고 하셨습니다.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9]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로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편견에 치우친 믿음으로 자칫 주님으로부터 외면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나 같은 죄인을 잊어버리고, 놀라운 은혜에 취해 있으면 교회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에 속하지 마시기를 기원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지니시기를 기원합니다.
죄인인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신 그 은혜를 기억하여 진정으로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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