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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십시오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19 주(20101003)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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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9월 30일 (목) 10:55:55
최종편집 : 2010년 10월 01일 (금) 19:58:27 [조회수 : 2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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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제 19 주(20101003)
성서일과/ 시 37:1-9; 합 1:1-4; 2:1-4; 딤후 1:1-14; 눅 17:5-10
본문/ 시 37:1-9
믿음으로 사십시오.

          (시 37:1-9, 개정) 『[1] [다윗의 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 두 말할 나위가 없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어쩌다가 좋은 나무에 나쁜 열매가 열리기도 하고, 나쁜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리는 경우가 있으나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지는 경우처럼 그야말로 어쩌다가 그렇게 되는 수가 있을 따름입니다.

같은 이치로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재앙을 만나는 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처럼 자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이런 이치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그러나 우리 앞에 보이는 세상일은 하나님의 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 선한 자를 괴롭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초를 겪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런 것 같으니 이상하다는 겁니다.

시 73편은 이런 사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악인이 형통한 모습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정도입니다.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악인이 그 형통함에 기대어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행하는 일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이런 꼴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이 과연 알고나 계신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선한 자는 어떻습니까?
선을 구하고 행하느라고 애를 쓴 것이 모두 괜한 일인 것만 같습니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마침내 악하지 않으면 형통할 길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악인의 형통함은 그들이 악하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이제는 악한 자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며 악한 자를 닮고 싶어 합니다.
          [2]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이런 사정이 어찌 시인이 살았던 옛날 이야기이겠습니까?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사정이 배경이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왜 선한 자가 고초를 당하고 악한 자가 형통할까요?
왜 있을 수 없는 일,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세상에서 고난 당하는 선한 사람들,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직면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해답이 없는 질문입니다.
이 문제만큼은 왜? 라고 물어서는 길이 없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마주치는 모든 문제에 대답을 해주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오직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왜? 라고 묻지 못할 일이라면 어떻게?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 길밖에 없으니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다려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입니다.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불평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인이 형통한 꼬락서니를 보고 어찌 불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건 아닌데... 저래선 안 되는데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평하지 말라고 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이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되어 마침내 선한 길을 버리게 될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평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데에 이르지 않을까 염려하여 잠잠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라고 하지만 언제까지입니까?
어느 때까지입니까?
선한 자들이 고초를 당하며 가장 애타게 던지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 7: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왜 고초를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언제까지 당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도 해답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날-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리라는 것입니다.
왜? 라는 의심을 풀 길이 없어 애태우던 시인이 당도한 곳도 거기까지 였습니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깨달은 것은 오직 하나, 악한 자들의 결국입니다.
주께서 마침내 저들을 파멸시키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그렇게 분명한 일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같습니다.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20]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34]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악인이 끊어질 날을 목도하지 못하고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거두지 못하면 내 자손이라도 거두게 됩니다.
          [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그것이 땅을 차지하리로다라는 말씀의 뜻일 것입니다.
땅은 정직합니다.
뿌린 대로 내는 것이 땅입니다.
수고한 대로 거두게 하는 것이 땅입니다.
30배, 60배, 100배로 거두어서 올해 먹고 내년에 뿌릴 씨앗을 만드는 것이 땅입니다.

믿음은 참고 기다리는 자들의 양식입니다.

속한 결국을 바라는 것이 사람의 상정입니다.
기다림의 날이 길어질수록 약해져 가는 것이 인정입니다.
그래서 나도 남들처럼 악해져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말라기 선지는 말합니다.
          (말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더니 악한 자들이 우리는 선하다고 합니다.
악한 자들이 우리가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자라고 우기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공의의 하나님 따위는 계시지 않고 자기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하나님만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사는 의인들은 괴롭습니다.
          (시 42:1-3)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 육신이 당하는 고초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너무나 자명한 하나님의 의가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더욱 괴로운 일입니다.
이 괴로움을 어떻게 견디며 기다리겠습니까?

악인들은 흔히 묻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이 내 편이시니 내가 흥왕하지 않겠느냐고....
선한 자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복 받고 사는 내가 의인이 아니겠느나고...

의인의 답변은 악인이 듣기에 궁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마침내 심판하실 것이다.’

악인은 다시 묻습니다.
그 때가 언제냐고....

의인의 답변은 여전히 궁색합니다.
‘속히 하시겠지만 더딜지라도 반드시 온다.’

궁색한 답변에 악인들은 비웃습니다.
기다리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 비웃음을 견디는 일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참기 힘든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그냥 기다리라고 하시지 않고 참고 기다리라고 하셨겠지요.

어떻게 이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겠습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하박국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한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가진 것은 믿음 외에 달리 없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흔히 말합니다.
없이 사는 것은 견딜 수 있는데, 교회의 크기가 사람의 크기와 같이 취급되는 것은 참기가 어렵다고.....

무엇을 심고 있느냐를 따지지 않고, 무엇을 거두고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세상입니다.
악한 것을 심으면서도 좋은 것을 거두고 있으면 의인 행세를 합니다.
힘써 선한 것을 심지만 당장 거두는 것이 없으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내가 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심는 것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따지 못해도 누군가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선한 씨를 심는 일입니다.

땅은 성실합니다.
땅의 성실함을 닮는 일이 곧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오늘 뿌리고 내일 먹을 수 있는 씨앗은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내가 먹지 못할지라도 좋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세상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악한 자가 형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어디선가는 선한 자가 복을 누리고 악한 자가 멸망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가 영원히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또 다른 악한 자가 형통하는 모습이 보이니 악한 자가 늘 형통한 듯이 보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법만이 영원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납니다.
이 영원한 법을 의뢰하고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의인이 악한 세상에서 괴로운 것은 육신이 당하는 고통 뿐 아니라 당장 하나님의 공의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마침내 심판하시리라는 소망 가운데 삽시다.
조롱과 멸시는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이깁시다.
성실한 땅을 본 받아 사십시다.
정직한 땅의 결국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려면...

믿기만 하면 된다고들 말합니다.
믿는 일이 제일 쉬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도 합니다.
악인이 멸망하고 의인이 형통함을 믿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지키는 일-믿음으로 사는 일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닙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 권세는 말 그대로 공중에 뜬 권세입니다.
헛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세상에서 악인의 형통함을 바라보는 자들은 유혹에 걸리기 쉽습니다.
지금 당장 좋은 것을 거두지 못하면 믿음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것이 사단이 의인을 유혹할 때 쓰는 가장 흔한 미끼입니다.
다 평안하고 잘 살고자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 사단의 수법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채워 주신다는 하나님이 바로 내 하나님이 아니냐고 되묻기도 하는 것이 사단의 계교입니다.
그 중에도 세상이 다 그러는데 너 혼자 의로우면 무얼 하겠느냐고 묻는 것이 가장 간교한 사단의 술책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가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어렵고 힘들어도 견딜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도 그렇게 말합니다.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단순히 모여 든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기에 함께 감당하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라면 굳이 교회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흔히 예배와 봉사와 전도와 교육을 교회의 4대 기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 혼자서 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양보해 말해도 한 가정에서 모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굳이 교회를 만들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되어 간 자들 중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이 생각납니다.
금으로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하는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단 3:17-18) 『[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었습니다.
풀무불 속에서도 또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가능한 믿음입니다.
믿는 자가 당연히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누구나 말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보시는 그들의 믿음은 그 다음 말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런 믿음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이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와 같은 자가 하나도 없을 것만 같은 남의 땅이었으나 나처럼 사는 또 다른 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분명한 것은 혼자일 때 보다는 여럿일 때 믿음을 지키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여럿이 함께라면 같은 믿음이라도 그 능력이 더 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악한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참된 교회는 서로 힘이 되어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 교회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믿음이 강한 자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도와 강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롬 15:1-2) 『[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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