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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큐복음서와 도마복음에 대한 반박 (2)
김기천  |  abqk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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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9월 17일 (금) 02:47:32
최종편집 : 2010년 09월 17일 (금) 02:56:02 [조회수 : 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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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천 목사
『하버드에서 찾는 하나님』이란 책을 보면 목차 다음에 다음과 같은 엘리엇(T. S. Eliot)의 시가 소개된다.

 “이 사랑에 이끌려서,
이 부르심의 음성을 따라서,
우리는 탐구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한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탐구의 마지막은
우리가 출발했던 곳에 도착하게 되어
처음 그 장소임을 깨닫는 것이 될 것이다.”

1979년도에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시작된 나의 신학적 탐구는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신학을 시작하기 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신화 회복을 위한 시도

계몽주의와 더불어 자연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사고가 중세 교회의 억압에서 해방되고, 또한 코페르니쿠스 이후 과학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동안 인간의 자율이성과 과학을 옭아매고 있었던 기독교는 역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성서의 권위가 무너지고 기독교의 세계관이 증발되는 당시 상황에 칸트나 헤겔은 나름대로 도덕적인 면이나 인류 정신 역사의 발달 면에서 기독교를 변증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계몽주의 이후 지금까지 이성과 계시가 충돌하며 과학과 성서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기독교는 나름대로의 대응을 보여 왔다. 특히 기독교 신학의 주류는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사고를 접목시켜서 자연 역사나 종교 역사 발달에 근거한 합리적 성서이해를 제시해 왔다. 이로 인해 초월적인 예수의 모습은 점차 증발되어 버렸고, 유대 묵시사상에 열광하다가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실패를 시인하며 죽어간 한 미친 인간, 소위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만 논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현실 속에서 기독교는 스스로 살아 남아보려고 안간힘을 써왔지만 350여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는 오리무중이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초월적인 신과 연관된 이야기” 즉 “신화”(神話)가 있다. 그 신화는 종교에 있어서 생명과 같은 기반이다. 신화 안에 있는 실체를 잃어버리면 어느 종교든지 그 신화는 근거가 없는 거짓 이야기 즉 허구가 되어버린다.

신화세계에 있는 시간과 공간은, 과학의 세계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종교적 개념이다.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종교 신화는 거짓 이야기로 보일 수 있지만,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에게는 그것은 역사의 실체이며 삶의 기반이다.

그래서 종교의 신화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 신화의 실체를 경험하며, 어떤 이들은 그 신화에 목숨 걸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평생을 바쳐 수도를 한다. 이렇게 신화 속에서 실체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그 신화에 기초한 종교는 생명을 유지한다. 한 종교의 신화를 믿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자연히 그 종교는 사라지게 되고 신화는 허탄한 이야기로 남는다.

성서에 기록된 초대 기독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종교였다. 그런데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이런 예수의 초월성은 과학적 역사비평 이론과 타협하면서 해체되고 증발되어 왔다. 중세기까지만 해도 성서 속에 하늘에 대한 표현을 이해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해가 떠오르고 구름이 떠다니는 물리적인 하늘조차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래서 그 물리적인 하늘을 성서의 초월적인 하늘과 동일시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우주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물리적인 하늘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동일시 해왔던 초월적인 하늘은 증발되고 있다.

중세기만 해도 성서 속에 지옥을 이해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죄지은 사람이 죽으면 땅속 깊은 곳으로 떨어진다고 믿었다. 당시 사람들은 땅속에서 화산 불이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땅 밑에는 지옥불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질학을 통하여 지구 내부에 광물질들이 방사능 작용을 통해서 엄청난 열을 발산한다는 사실이 발견되면서 성서 속의 지옥도 증발하고 있다. 또한 종교개혁 당시만 해도 성서 속의 인간은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서 창조한 피조물이었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면서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따듯한 손길을 경험할 수 있는 신화 속의 인간은 사라져 버리고 무생물의 자연 발생적인 기원을 통해 설명되는 인간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더불어서 신의 창조로 시작해서 최후의 심판이라는, 성서 안에 있는 구원의 역사관 또한 45억년 지구 역사를 논하는 자연 역사관의 등장과 더불어 충돌을 빗게 되고 결국에는 사라져 버리고 있다.

신의 관한 이야기 즉 신화(神話)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해체되고 증발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성서의 내용을 증발시키는 시대정신(Zeitgeist)에 부응해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중간에 뛰쳐나온 포이엘바하(Feuerbach)는 신을 논하는 신학을 인간 심리를 다루는 인간학으로 끌어내렸다.

본래 유태인이지만 아버지로터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여 세례까지 받았던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이런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아 “종교는 아편”이란 주장을 하며 공산주의 이론을 세워나갔다. 또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어릴 때는 “소년 목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경건했던 니체(Nietzsche) 또한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아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정신병자로 인생을 끝냈다.

신화를 잃어버린 기독교는 개인의 도덕성이나 사회 윤리만을 가르치는 종교로 전락되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떠나 그나마 동양에 남아 있는 다른 신화들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유럽의 교회는 교인 없는 박물관이 되어버리고 미국의 어떤 교회는 팔려 술집으로 변한 곳도 있다. 기독교의 종말이 다가왔다. 본 책은 이런 기독교의 종말 때에 잃어버린 기독교의 신화를 회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방황하는 자를 위한 책 『큐복음서』

본 『큐복음서』 Q/마 18:10-14절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들 중에 하나가 방황하면 그 산들 위에 아흔 아홉을 남겨두고 가서 방황하는 것을 찾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일 그것을 찾게 되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방황하지 아니한 아흔 아홉을 인한 것보다 더 기뻐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계몽주의(1620-
1781) 이후 지금까지 지난 35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하다가 방황하게 되어 신학교를 뛰쳐나간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무엇이 원인인지를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이들이 없었다. 이 책은 그 대답을 위한 시도이다. 본 『큐복음서』는 오늘도 신학 안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큐(Q)와의 만남

하버드 대학 신학부의 학생으로 있었을 때의 일이다. 1996년 1월 31일은 “신약 고급 세미나”(Seminar for Advanced New Testament Students)가 있는 날이었다. 이 세미나는 두 주일에 한 번씩 있는 것으로 두 학기동안 계속되었다. 세미나 때가 되면 하버드에 신약에 연관된 교수들과 신약 전공 학생들이 모두 참석해서 정해진 논제를 가지고 토론을 했다. 모두 모였다 해도 기껏 스무 명 남짓 되는 적은 수의 모임이었다. 모일 때마다 교수나 학생 중에서 한 명이 논문을 발표하고 다른 한 명이 논문에 대하여 비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날은 내가 쾨스터(Helmut Koester) 교수의 논문을 비평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아무리 늦어도 두 주일 전에는 논문을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두 주일도 안 남았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스턴의 겨울바람이 제법 부는 저녁이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쾨스터 교수였다. 우리 집 주소를 물었다. 이유는 자기가 논문을 이제 마쳤기 때문에 우리 집에 갖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학생인 나로서는 당혹스러웠다. 은퇴가 가까운 나이든 교수가 젊은 자기 학생 집을 찾아와서 자신의 논문을 전해준다는 것이 동양인인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쾨스터 교수는 성서신학계에 널리 알려진 불투만(Rudolf Bultmann)의 수제자로서, 하버드 대학 신학부에서 신약과 구약을 포함한 성서학과 과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미 한국에서 신학을 시작하면서 교수가 하는 말을 성서에 기록된 말보다 더 권위 있게 여겨왔던 나로서는 현 상황이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바람도 불고 어두우니 교수님이 우리 집에 찾아오는 것보다 제가 교수님 집으로 가는 것이 훨씬 좋겠다”고 하면서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주소를 들어보니 교수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다는 렉싱톤(Lexington)이었다. 쾨스터 교수 집을 찾아가서 받아든 원고가 「종말론, 큐 어록 그리고 거기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Eschatology, the Sayings of Q and Their Image of Jesus)이었다. 이 원고 서두에서 쾨스터 교수는 기념 논문집에 발표할 논문 초안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스승인 불투만의 기념 논문집(Bultmann Festschrift)에 제출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이 원고를 받아들고 비평하기 위해서 관련된 자료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큐(Q) 본문을 다루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신화”의 정의 책을 시작하기 전에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신화”에 대한 정의이다. 말 그대로 ‘신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이해하면 문제가 없다. 특히 성서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묘사나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면 기적, 예언, 계시, 섭리 등과 같이 과학적인 이해를 초월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말한다. 본 책에서 “잃어버린 신화”란 바로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제는 “신화”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데에 있다. 구약에서는 “신화”란 용어나 그 파생어들이 거의 전무하다. 외경 시락서 20:19절에 단 한번 언급될 뿐이다. 신약에서는 “신화”를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해서 완전히 거부한다(딤전 1:4, 4:7, 딛 1:14, 벧후 1:16, 딤후 4:4). “신화”를 ‘허탄한 이야기, 그럴듯하게 지어낸 이야기’로 이해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반인들조차 “신화”란 용어를 쓰면 당연히 ‘거짓말, 꾸며낸 말’이란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

신약 성서연구에서 “신화”란 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이다. 이후 양식비평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궁켈(Hermann Gunkel, 1862-1932)은 창세기 1-11장과 예언서에 들어 있는 구절들에 “신화”란 용어를 적용하였다. 양식비평학자들은 성서 안에 초월적, 신비적, 계시적 이야기들을 고대 근동에 있었던 유사한 자료들과 비교하면서 “신화”라는 하나의 문학적 유형으로 규정했다. 하나의 문학 양식으로 “신화”라고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신화”를 ‘거짓말, 꾸며낸 이야기’란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면 혼란이 생긴다.

종교 역사가들이나 문화 인류 역사가들 또한 여러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신화들을 연구하면서 “신화”란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사유방식’으로 이해한다. 신화는 이미 학술적으로 정착된 용어이다. 사실 요즘 신학교에서 자주 듣게 되는 용어 중에 하나가 “신화”이다.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본 책에 언급한 “신화” 또는 “신화적”이란 표현이 여전히 거북하거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 표현 대신에 ‘초자연, 예언, 계시, 신비, 기적’ 또는 ‘초월적, 영적, 신앙적, 종교적’ 중에서 독자에게 익숙한 용어로 바꾸어 이해하면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신화는 이런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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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우 (121.XXX.XXX.86)
2010-10-07 19:38:56
좋은내용의 책을 접하게되어 이해의 다양성을 갖게되에 매우 기쁘게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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