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
왜 에크하르트인가?
박운양  |  loveneighbor@korea.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0년 09월 14일 (화) 20:34:29
최종편집 : 2010년 09월 16일 (목) 18:07:01 [조회수 : 4757]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13일(월) 감리교 농촌선교훈련원 영성수련부에서 주최한 영성세미나가 아현감리교회 신관 3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목회자들에게 월요일은 일주일 중 모처럼 만의 편안한 쉼과 개인적 휴식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들에게 있어서도 늘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바쁜 일상들을 숨가쁘게 감당해야 하는 가운데서도 월요일 점심시간 포함 5시간의 시간을 낸다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그래서 세미나를 준비한 이들은 아마도 참석자가 두 자리 수만 넘겨도 성공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필자도 적지 않게 행사들을 주최하고 주관하면서 준비한 경험에 비추자면, ‘영성가들에게 다시 묻는다’ 라는 주제로 첫 번째 시도된 영성세미나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당초 예상했던 십여명을 넘는 선에서 준비했던 자료집은 동이나 버렸고, 피치못할 사정으로 끝까지 세미나를 함께하지 못한 이들까지 포함하면, 참석자가 40명을 넘어 섰다.

일단 이 행사가 성공적으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은 정말 고무적인 사건이라고 표현할 만 하다. 적지 않게 귀한 행사라고 판단하고서 참석한 행사들이 준비한 이들이나 또한 강연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이들도 서로 힘이 빠지는 행사들을 그 동안 적지 않게 경험해 온 입장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물론 모임에 참석한 인원이 많고 적음이 행사를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는 아니다. 그러나 양질전환의 입장도 무시할 수 없다. 모임의 취지에 공감하고 자발적으로 각자의 일정한 이해와 학습이 선행된 다양한 이들이 자리를 함께 하면서 뿜어 내는 에너지는 모임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그 증폭된 에너지는 서로가 서로를 전유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키워드로 시도된 영성세미나가 성공적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자발적인 참여자 중에서 단지 신학적인 호기심을 떠나서, 개인적인 영성과 사회적인 영성이 어떻게 가다머의 통찰처럼 지평융합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고 씨름하며 때로는 그 ‘하나님의 허기’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 이들이 단편적인 예상보다 엄청나게 그 저변이 이미 선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영성가에 대한 관심이 그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의 저작을 번역하고 소개한 전문가들의 영역을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일상의 삶을 통해서 그가 목회자의 입장이든 평신도의 입장이든 그 차원을 에크하르트의 세 종류의 탄생을 통해서 표현하자면,

1.삼위일체 내의 성자 하나님의 탄생이라는 영원한 형이상학적 진리의 차원을 넘어
2.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입은 성육신 사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넘어
3.인간 영혼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의 단계로 진입한다고 했을 때, 바로 이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자신의 삶에서 전유하고 있고 전유하기 위해서 치열한 영적수행의 도정에 이미 진입해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세미나 현장에서 질의응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10여년 이상 에크하르트를 연구하고 자신의 영적수행의 과정이 더 풍요로워지고 그 깊어 졌다는 체험을 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강화도에서 화가로서 자신이 전유한 영성을 이미지로 표현해 오신 화가 김용님 님은 강화도 바닷가의 그 아름다운 일몰과 함께 관상기도를 드리고 그 가슴으로 품은 해를 담고서 캔버스를 통해서 표현하게 되면서 자신의 작품세계가 그 전과 후로 엄청난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는 소중한 체험도 전해주셨다. 그 분이 직접 전해주신 명함에 담겨 진 사진을 파일로 받아서 올려 본다

 

   

▲ 해를 안고 돌아오는 여인 <화가 김용님 작품>

http://blog.naver.com/savday 


 

   
▲ 김순현 목사
그리고 이 영성세미나가 이정표를 남기는 첫 걸음의 당당한 포문소리가 바로 증폭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에크하르트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오늘 영성의 잔치를 이끌어 준 탁월한 강연인들의 역할이 컸다.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관한 완역본 번역과 국내외의 연구성과를 꾸준히 소개해 오는 가운데 최근 한국 교회 성서읽기의 새로운 지평에 기여하고 있는 유진 피터슨의 신약성서 번역본 ‘메시지’ 등 엄밀하고 밀도있는 번역을 통해  깊은 영성에 목말라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독자들에게 그 내공을 인정받고 있는 여수 갈리리교회에서 목회
   
▲ 이민재 목사

하고 있는 김순현목사의 ‘왜 에크하르트인가?’와 영적물질주의를 포장한 거짓 영성으로 메말라가고 척박한 한국교회의 현장에서 관상기도를 통한 복음의 재맥락화를 위해서 그 대안적 목회의 지평을 제시하고 꾸준하게 초지일관 일이관지해 온 은명교회 이민재 목사의 ‘에크하르트 교회에 말하다’는 자칫 영성에 관한 주제들이 피상적으로 흐르기 쉬운 요소들을 서로 입체적이고 상보적으로 에크하르트의 영성을 통해 한국교회의 현실을 뒤돌아 보고 나 자신의 영성의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참석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공명을 주는 영성의 잔치마당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강연 내용에 대한 스케치는 가능하면 생략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 기사를 통해서 보다 더 깊은 영성의 지평을 전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품을 파셔서 정보를 찾는 노력의 과정 또한 영성을 지향하고 전유하는 징검다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리교 농촌선교훈련원의 ‘영성가들에게 다시 묻는다’는 매우 밀도있는 준비를 통해서 앞으로 계속해서 이어질 예정이다. 조만간 파커 팔머의 ‘배움과 가르침의 영성’을 주제로 ‘영성가들에게 다시 묻는다’라는 두번째 영성세미나를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나, 시작이 반이라는 교훈은 늘 유효하다. 첫 세미나를 기대이상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준비한 실무진들의 귀한 노력을 평가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시간공지를 12시로 하여서 준비된 소박한 식사를 함께 하면서 세미나자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모처럼 만의 벗들과의 만남의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한 실무진들의 섬세함이 고맙게 다가왔다

발표된 자료를 접하고 싶으신 분들은 감리교 농촌선교훈련원 www.hunn.or.kr 에 들리셔서, 감리교 농촌선교훈련원의 이모저모도 살펴보시면서 좋은 정보들도 확인하시고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세미나 현장을 영상자료로 준비하였다고 하니, 참석하지 못해서 아쉬움을 느끼셨던 분들은 영상을 통해서 현장감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이다.

행사도중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들을 실으면서 귀하고 소중한 아름다운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빛내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대신하고 한다

 

*사진 아래쪽에 이날 발표한 김순현 목사의 논문의 전문을 실었다.

 

   
▲ 4시간 동안 이어진 세미나는 에크하르트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참가자들의 진솔한 영성의 순례를 함께 할 수 있는 귀한 자리였다

 

 

   
▲ 여수 갈리리교회 바닷가 앞에서의 일출과 강화도 갯벌 앞바다의 일몰이 함께 소통되는 자리였다
   
   
   
   
   
   
   
   
   
   
▲ 최근에 <삶이 메시지다>라는 책을 통해서 산상수훈을 키워드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김기석 목사의 기도로 영성 세미나는 갈무리되었다

 

 

인간 마이스터 엑카르트
지음/ 디트마르 미트(Dietmar Mieth)
번역 및 발표/ 김순현


생애와 작품
최근 몇 십 년에 걸쳐 마이스터 엑카르트라는 인물이 역사의 어둠과 전설 형식을 박차고 기지개를 켜고 있다. 무엇보다도 독일어로 생생히 표현된 작품들은 진정성이 떨어지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쿠자누스Cusanus에 의해 수집되고, 늦어도 19세기에 독일 관념론과 문학적 엄밀성이 출현하면서부터 재삼재사 인용되었으나, 정작 엑카르트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가 “신비주의”를 설파했고, 교회당국과 충돌했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알려진 게 없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의 이력에 대하여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갖가지 추론에 의지하는 처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정도의 윤곽을 그려볼 수는 있다. 호크하임의 엑카르트는 에르푸르트 인근의 튀링겐 출신이다. 그는 1277년 도미니코회의 회원이자 대학생으로서 파리에 있었다. 흔히들 그 때를 기점으로 역逆 추산하여 그가 1260년경에 태어났음에 틀림없다고 추정한다. 그는 대학생 시절에 알베르투스 마뉴스Albertus Magnus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as의 학설에 대한 논쟁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는 알베르투스 마뉴스가 서거하던 해인 1280년에 쾰른에서 신학연구를 시작한 것 같다.
그는 관례를 따라서 “명제집 강사”lector sententiarum 자격으로 신학을 강의하기 시작한다. 그는 1293년에 교수 취임 공개 강의를 하는데, 그 강의는 1294년 4월 18일자의 부활절 설교와 함께 교수 생활 초기(1293/1294년)에 행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내지만 얼마 못 가서 에르푸르트 도미니코회 수도원장과 튀링겐 주교 대리라는 주요한 임무를 맡아서 1294년부터 1298년까지 수행한다. 그는 당시의 도미니코회 독일 관구인 “튜토니아”의 관구장 디트리히 폰 프라이베르크Dietrich von Freiberg와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그의 유명한 『교훈 담화』Reden der Unterweisung가 나왔다. 『교훈 담화』는 수도원 안에서 수도회 소속 신참회원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수도원 생활규범에 대하여 대화하는(“Collationes”) 가운데 작성된 것이다.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 속에서 결정적인 구상, 곧 신학적으로 숙고를 거친 영적 구상을 하고 그것을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다. 엑카르트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적인 하느님 경험과 실생활의 연결이 대단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가르침의 대가大家이면서 동시에 “삶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엑카르트는 파리에 세 번째로 체류하면서 실질적으로 “가르침의 대가”magister sacrae theologiae가 된다. 그는 파리대학교 신학부에서 프랑스 사람이 아닌 자를 위해 남겨 두었던 신학 교수직에 오른다. 당시의 쟁점들을 다룬 『논쟁집』Disputationen 두 권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존재와 인식의 관계를 묻는 문제가 가장 흥미롭다. (이 점에 대하여는 R. Imbach를 참조하라.) 1302/1303년은 엑카르트가 대학교수로 보낸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그는 수도회의 주요한 임무를 다시 맡는다. 1313년, 도미니코회의 독일 관구가 분할되었고, 엑카르트는 에르푸르트에 본부를 둔 신설 관구 “작소니아”의 초대 관구장이 되었다. 작소니아 관구는 독일어권의 북부, 곧 네덜란드에서 마르크 브란덴부르크에 이르는 영역을 관할했다. 엑카르트는 정력을 소모시키는 일(새로운 수도원 설립, 관구 총회 주재, 영성 생활 지도)을 8년 동안 수행했다. 그 시기에 그가 활동하면서 남긴 흔적 몇 가지가 남아 있다. 집회서 24장에 대한 설교들과 강의들은 그가 도미니코회 관구 총회석상에서 낭독한 것들이다.
1311년, 엑카르트는 파리에서 가르치는 일을 다시 맡는다. 그것은 흔치 않은 영예라고 할 수 있다. 엑카르트는 대학교수로 2년을 보낸다. 그 시기에 쓴 『파리 문집問集』Quaestiones Parisienses이 남아 있는데, 그것 역시 스콜라 풍의 논쟁 형식으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엑카르트는 도미니코회의 총장에 의해 슈트라스부르크로 파견된다. 그는 그곳에서 주교 대리로 활동한다. 그가 슈트라스부르크와 독일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며 남긴 자취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요하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와 하인리히 조이제Heinrich Seuse가 엑카르트와 학술적으로 가졌던 관계들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인격적인 접촉을 통하여 이루어졌을 수 있다. 이 시기에 유명한 논고 『신적 위안의 책』과 설교 “귀인에 대하여”Vom edlen Menschen가 나왔을 것이다. 한 짝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두 편은 남편과 아버지(1308년, 살해된 알브레히트 1세)를 여의고 1313년에 한 수녀원에 들어간 헝가리 여왕 아녜스Agnes에게 헌정된 것들이다. 네 번째 파리 체류 이전의 날짜를 정확히 담고 있는 자료도 몇 편 있다.
엑카르트는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적어도 1322년까지 활동한 다음 “스투디움 제네랄레”Studium generale의 교장으로 초빙 받아 쾰른으로 간다. 우리는 쾰른에서 독일어로 말하는 설교자의 흔적을 접하게 된다. 아직 설교집의 형성을 거론할 단계는 아니지만, 우리는 엑카르트가 그곳에서 작성한 두서너 편의 설교(예컨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를 소개할 수 있다.
하지만 전기와 작품을 연결하여 구성한 것은 극히 빈약한 편이다. 그리고 엑카르트의 작품은 엑카르트의 생애보다는 엑카르트의 사상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엑카르트는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삼부작』Opus tripartitum을 구성하였다. 『삼부작』은 『명제집』Opus propositionum, 『문제집』Opus quaestionum, 『주석집』Opus expositionum으로 이루어졌다. 『주석집』에는 설교작품도 들어 있다. 그 작품집들은 순서가 체계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순서가 발생 순서를 따른 것은 아니다. 엑카르트는 자기 작품의 단편적인 성격을 다음과 같은 원리로 만들기까지 했다. “모든 체계는 단편이며 단편으로 머무른다. 모든 단편은 저마다 하나의 체계, 하나의 체계적인 사상과 동등하다. 개개의 단편에는 전체가 들어 있으며, 그 전체는 인식 가능하다. 다만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Fischer, 1974, 40쪽) 방금 인용한 글귀의 편집인은 이렇게 확정한다. “우리는 엑카르트의 전全작품을 엄청난 축약으로 여겨야 하고, 읽을 때도 그런 식으로 읽어야 한다.”(같은 책, 43쪽) 작품집 수록 원리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아직 다루지 않거나 불충분하게 다룬 것을 수록하고, 가급적 말을 아끼고, 군더더기를 피하는 것이다. 엑카르트의 언어가 문체 면에서는 대단히 간결하면서도 내용 면에서 빈틈없이 촘촘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난해한 것도 그 때문이다.
『주석집』이 대단히 중요하다. 신학적으로 보건대, 그것은 결코 덤이 아니다. 왜냐하면 엑카르트의 신학과 철학은 설교를 통해 증언할 때와 마찬가지로 성서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가운데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집』에는 창세기 주석, 탈출기 주석,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서 주석이 실려 있다. (엑카르트는 본보기가 되는 이야기에 주석을 한정한다.) 애석하게도 몇 편의 주석은 유실되었다. 분명한 것은, 엑카르트가 “한처음에(태초에)”In principio라는 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주석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혜서 주석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엑카르트는 창조, 하느님의 자기계시, 신학적 지혜 그리고 육화한 로고스를 신학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스콜라 철학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신앙의 실천을 바탕으로 하되 합리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풀이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모든 활동 속에서는 물론이고 이 구절과 그 다음 구절들을 주석할 때에도, 철학자들의 자연스러운 논거들을 도움 삼아 거룩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르침과 신구약성서의 가르침을 풀이하겠다는 의도를 품고서 주석할 것이다.”(LW III, S. 4,5-7)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가 우위를 차지한다. 그것이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유비론은 “신앙의 이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엑카르트를 현대의 인물과 비교하고자 하는 사람은 칼 바르트라는 이름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바르트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Deus dixit에서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콜라 철학을 피하지도 않는다.
엑카르트는 자신의 작품을 신학적․학술적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의 그런 평가로부터 그의 설교들을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그의 설교들도 거기에 속한다. 그의 설교들은 철학적 논거들에 직관적인 비유들을 덧붙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통속적이지 않다. 오히려 철학적 논거들에 직관적인 비유들을 덧붙이는 것이야말로 그의 신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널리 전달될 때에만 받아들여진다.
엑카르트의 말년에 일어난 교회 당국과의 마찰은 무엇보다도 그의 설교들이 원인이었다. 게다가 걸핏하면 신학자-토마스 아퀴나스도 예외가 아니었다-의 오류와 이단성을 조사하는 시대였으니 그러한 마찰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엑카르트를 신학적으로 바로잡는 것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엑카르트가 사람들을 “혼란시키면 어쩌나” 하는 주교의 우려와 로마 가톨릭 당국의 우려도 문제였다. 마찰의 주된 원인은 엑카르트가 청중의 상상력을 그때그때 철저히 고려하면서도 청중의 상상력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1326년 9월부터 논제들을 낱낱이 담은 목록이 쾰른에서 작성되었고, 엑카르트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반론으로 작성한 『변론』Rechtfertigungsschrift이 논제 목록과 함께 아비뇽으로 보내어졌고, 엑카르트 자신도 자신의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는 아비뇽으로 가기 전인 1327년 2월 13일에 쾰른의 도미니코회 교회에서 자신이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어느 경우든 신앙적으로 바른 의도를 고수하려 했다고 해명한 바 있다.
추기경들과 신학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아비뇽에서 자료를 심사하고 판결을 준비했다. 엑카르트가 자신이 어찌 이단자냐며 대항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의 행위는 대단히 현대적인 것이었다.) 위원회는 논제들을 교의의 “객관적인” 진리와 비교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이다(참조. B. Weite, 1979).
엑카르트는 1328년 3월 이전에 서거한 것으로 보인다. 엑카르트의 서거 이후 쾰른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심문의 결과가 교황 요한 22세의 교서 “주님의 밭에서”In argo dominico에 담겨 (1329년 3월 27일) 공포되었다. 스물여덟 개의 논제들 중에서 열일곱 개의 논제는 이단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졌고, 나머지 열한 개의 논제는 위험스럽고 미심쩍기는 하지만 적절한 주석과 설명을 붙이면 고수할 만 것으로 여겨졌다. 알려진 것처럼, 엑카르트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실제로 철회하였는지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교서의 공포는 교황이 쾰른의 대주교 하인리히 폰 비르네부르크Heinrich von Virneburg에게 보낸 서간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하인리히가 심문 결과를 자신의 교구에 공표했을 가능성은 있다. 단순한 신자들에 대한 고려, 곧 사목적인 방침이 사건 전체의 의미인 것처럼 제시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건의 경우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인의 명성은 꺼질 줄 몰랐다.



중세후기 철학과 신학 그리고
“독일 신비주의” 사조에서 본 엑카르트
엑카르트를 특정한 학파에 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초기의 엑카르트는 독일 알베르투스 학파의 일원이다. 그는 전통을 형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통을 자극하는 사람으로 활동했다. 피셔H. Fischer가 엑카르트의 사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당연하다. “그의 사상이 오늘날까지 참신함이라는 특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상이 그 정도의 강렬함과 일관성을 갖춤과 동시에 대단히 방대한 학문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방대한 학문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불편함을 안겨주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학문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사상을 끊임없이 숙고하고, 그의 사상에 정당한 물음을 던졌다.”(상게서, 11이하) 엑카르트의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그의 사상에 자연스럽게 매료되었다. 그들은 엑카르트를 자신들의 사상 구축을 위한 채석장으로 삼았다. 내가 보기에, 엑카르트의 정신에 매료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이며, 엑카르트가 품었던 의도들에도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엑카르트의 사상을 “품고” 지키는 것은 아마추어는 물론이고 전문가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대가들의 작품도 단편으로 머물러 있지만, 그들은 적어도 아퀴나스처럼 『신학대전』Summa theologia을 얻고자 애쓰거나, 보나벤투라와 여타의 대가들처럼 『강요綱要』Kompendium를 얻고자 애썼다. 엑카르트는 스콜라학파의 일원이기도 하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방법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지만,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부류의 스콜라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논증의 사원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알베르투스 마뉴스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알베르투스의 제자 내지 추종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전통, 철학, 교부들을 해박하게 알고 그들과 튼실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끊임없이 전통을 깨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전통의 수호자로 자처하지 않고, “새롭고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Nova et rara을 말하는 창조자로 자처했다. 그에게 사유와 신앙은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진술들은 동일한 평면에 고정되지 않고 변증법적으로 움직이며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그에게는 확정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이 종합이 아니라 미개척지로 나아가도록 다리를 놓는 것이 종합이었다.
엑카르트를 당대의 신학자들과 비교하기보다는 비슷한 유형의 독립적 정신의 소유자들(쿠자누스, 파스칼Pascal)과 비교하는 것이 더 용이하다.(참조. H. Rombach, Substanz, System, Struktur, Bd. 1) 그 이유는 우리가 엑카르트 당대의 신학자들에 대하여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엑카르트와 공통되는 구석이 많지만 사유에 대한 가르침이 “편협하고” 균형감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디트리히 폰 프라이베르크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게 거의 없다. 디트리히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참조. K. Flasch, Die Intention Meister Eckharts) 엑카르트도 토마스 아퀴나스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존재와 인식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 실체와 우유적 속성에 대한 가르침, 유비론에서 그러하다. 특히 엑카르트는 토마스와 달리 피조물의 독립성이 정적이고 확고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엑카르트가 과정적으로 사유한다는 사실에 거듭거듭 유의해야만 한다.(참조. J. Koch) 예컨대, 그는 창조와 구원을 부단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철학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을 신플라톤주의 사조들과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가였다.
엑카르트의 신학에서 단연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성서신학이다. 엑카르트는 성서의 몇몇 단어에 엄청난 신뢰를 보내는데, 그 단어들은 그에게 계시 전체를 투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단어의 역사적인 의미Literalsinn를 주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런 다음 그는 종말론적 해석을 전면에 내세우고 도덕적․우의적 해석이 그 뒤를 따르게 한다. 예컨대, 그는 『창세기 주석』Expositio libri Genesis에 『창세기의 비유들』Liber parabolarum Genesis을 덧붙인다. 개체 이해는 전체 이해에 달려 있다. 엑카르트에게서는 해석학적 전이해Vorverständnis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그러한 전이해를 바탕에 깔고서 단어의 역사적인 의미를 현재와 미래를 향해 열어젖힌다. 그가 용어의 배후를 이야기할 때면, 개개의 단어는 비유가 된다. 엑카르트는 성서 용어는 물론이고 일상용어도 접시처럼 둘로 쪼개어 그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끄집어낸다. 또한 그는 신앙과 사유, 신학과 철학, 성서주석과 지적 통찰의 상응 관계도 신뢰한다. 물론 그러한 상응의 기초가 되고, 그러한 상응을 결정하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를 확증하는 게 중요하지, 밖에서 신앙을 합리적으로(이성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상응 내지 일치는 처음부터 알려진 체계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적 반성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영적 실천을 통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엑카르트에게 하느님은 “세계의 비밀”(E. Jüngel)이다. 엑카르트는 인식의 방향을 신적인 영역으로 전환함으로써 모든 실재의 의미를 해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정한” 실재를 놓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학의 중심은 육화한(인간이 된) 로고스, 창조의 로고스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자렛 예수의 역사적 사건Faktum을 신학적 사색의 중요한 사실Daβ로 삼지만, 역사적인 “어떻게Wie?”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늘날 “구속사” 신학의 프로그램 뒤에 숨어 구원사건의 추이를 역사에 준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일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엑카르트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그가 창조 신앙에 치중한 나머지 그리스도 신앙을 소홀히 한다거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배제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는 “하느님의 탄생”을 삼위일체, 창조되지 않은 것과 창조된 것의 관계, 그리스도론적인 사건들, 신학적 인간학, 그리스도교 정신 등 구원과 관련된 모든 진술의 해석 원리로 삼는다. 게다가 우리는 그의 선험주의와 대질시키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엑카르트의 역사관을 다음과 같이 단순한 정식으로 묘사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은 자비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주시면서 행(작용)하시고, 인간은 (생성)된다wird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행함(작용)과 됨(생성)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목수가 움직이지 않으면 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도끼가 쉬면, 됨도 쉽니다. 하느님과 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나입니다. 그분은 작용하시고, 나는 됩니다.”(DW I, Pr. 6, S. 114,2-5)
그러나 엑카르트는 위와 같은 현세성을 진보사관이나 진화론적인 사관에서 하는 것처럼 공간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됨(생성)과 행함(작용)의 유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행함(작용)이다. 생성되는 것은 속된 것을 전혀 지니지 않고 자기 안에 머무르는 것보다 결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것으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엑카르트는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앙”(J. B. Metz)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현세적인 것, 육적인 것, 잡다한 것”으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카르트는 현재의 상태Status quo에 만족하는 모든 유형의 삶에 힘차게 맞서 싸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취된 인성의 일치를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개해 나갈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러한 부대附帶 요구는 사회구조와 연관된 요구가 되지 못하고, 영적인 요구에 머무르고 만다. 그 이유는 그의 신학이 이성을 풀어주어 세계를 틀 짓는 것을 꺼리기 때문인 듯하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엑카르트의 면모를 신학적으로 훑어본 사람은 신앙의 실천, 곧 영성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의 영성을 개인 경건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의 영성은 철두철미 “나를 여의는 일”Nicht-Ich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제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게 하라”Nichts Eigenes가 표어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분은 사랑으로서, 우리를 위한 존재로서 가장 잘 이해되신다. 그러므로 인간도 자기상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은 나를 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가난과 초탈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다는 보증이다. 여의고 또 여읠수록 얻고 또 얻는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엑카르트에게서 나타나는 사회 윤리적 성향을 “그리스도, 인간 안에 있는 사회성”(Christus, das Soziale im Menschen, 1972)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한 바 있다. 무조건적인 형제애는 엑카르트가 재삼재사 강조한 주제였다.
그것은 “독일 신비주의” 내지 “라인 신비주의”라는 문학사조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먼저 문학사적인 개념으로서 “신비주의”를 다루어 보자. 그 개념은 독일어로 작성된 텍스트들, 곧 하느님 경험과 영적 신앙의 실천을 중요하게 다룬 텍스트들에 덧붙여진 개념이다. 엑카르트의 설교 작품도 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자신의 선배들 및 후배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엑카르트의 선배로는 메히틸트 폰 마그데부르크Mechtild von Magdeburg와 플랑드르 출신의 여성 신비가들을 꼽을 수 있고, 그의 후배로는 요하네스 타울러와 하인리히 조이제 그리고 플랑드르 사람 로이스부르크Ruusbroec를 꼽을 수 있다.(참조. L. Cognet) 엑카르트의 면모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 엑카르트는 급진적인 사유를 통하여 활동한다. 그는 타울러처럼 “영혼의 안내”Seelenführung를 통하여 활동하지도, 조이제처럼 이야기체의 “자기표현”Selbststilisierung을 통하여 활동하지도, 로이스부르크처럼 종교적 자각 속에서 사람들을 “공동생활”gemeinsamen Leben이라는 관념으로 이끌지도, 내적 직관을 모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 구별을 분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도 나름의 신학적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엑카르트와 그의 지속적인 영향을 살필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경건을 통하여 안전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노력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그의 후배들도 그러한 비판을 제기하기는 하지만, “완덕의 단계들”Stufen der Vollkommenheit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비판을 제기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들은 “하느님의 친구들”Gottesfreunde이라는 반세계적 경건 모임을 결성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그들은 현실을 놓치고 말았다. 한 편으로는 세계 현실-타울러에게는 이 세계가 영적 훈련의 요소였는지 모르지만-을 놓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직관에 덤으로 붙은) 실천을 놓쳤다. 엑카르트는 교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믿음이 깊은 사람들을 “혼란시킬” 뿐 “심리적” 위안을 전혀 주지 않는다. 급진적인 사고 과정은 공동체형성에 유용하지 않다. 그것은 강인한 사람을 고무하여 자유롭게 해주지만(엑카르트는 자극하는 사람이다), 유약한 사람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엑카르트의 비극은 그가 언어적인 수단과 비유들에 의지해 “무지한 사람들에게” 이르는 길을 모색했다는 데 있다. 그는 『신적 위안의 책』 끄트머리에서 그 길을 명시적으로 옹호한다. 하지만 그가 “훈계”를 통하지 않고 사유와 신학을 통해 신적 위안을 전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비극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제였고 “삶의 대가”였지만 어디에서도 영적 가르침을 확인이나 증명을 통해 전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주의 깊게 듣고자 하는 사람은 그의 시도와 오류에 가담해야 했고, 그의 신앙을 믿고 그의 사고 실험에 자신을 맡겨야 했다. 흥미롭게도 전설들은 엑카르트가 촉매제가 아니라 교화하는 지도자였다고 전한다. 영적으로 비범한 그의 모습을 그의 순수한 인격에서 찾는 것도 안전한 방법이다. 그에게 달려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에게 감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의 말을 열심히 듣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를 아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를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몇몇 사람이 군데군데 떨어져 앉아 그의 독일어 설교들을 속기하면서 정확한 단어를 낚아채려고 애쓰지만, 정작 엑카르트 자신은 그들이 제대로 알아듣기나 하는 것인지 하는 의구심을 자주 품는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독일어 설교들을 듣고 속기하여 최종적으로 편집한 것을 인가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여 전승된 것을 진정성을 갖춘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P. G. Völker, Die Überlieferungsformen mittelalterlicher deutscher Predigten, 1963) 하지만 케리그마의 특별한 영향이 나타나는데, 말하자면 그의 설교들이 사고思考를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누구도 엑카르트가 사유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설교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고를 촉발시키면서 생생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부터 그러한 영향의 원인들을 잠시 추적해보고자 한다.



현재까지 진행되어 온 엑카르트 연구 단계들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모습이 다시 등장한 것은 낭만주의가 중세를 고찰할 때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텍스트들을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청년기의 헤겔Hegel에게 엑카르트를 소개한 사람은 프란츠 폰 바아더Franz von Baader였다. 몇몇 “대담한” 정식은 쇼펜하우어Schopenhauer와 니체Nietzsche가 인용하면서 독일어 설교들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었다.
19세기 전반기에 독일문학이 출범하면서 엑카르트의 텍스트들에 접근하기가 훨씬 용이해졌다. 처음에는 그의 독일어 작품들만 알려졌다. 흔히들 빈 출신의 독일어문학자 프란츠 파이퍼Franz Pfeiffer가 1857년에 엑카르트의 독일어 설교들, 논고들, 격언들, 전설들을 모아 출간한 것을 엑카르트 연구의 첫 단계로 꼽는다. 파이퍼의 판본에는 결점이 있었다. 계획된 비평 장치들이 없었고, 진위眞僞를 따지는 기준들에도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엑카르트를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가는 바흐J. Bach가 저술한 책의 제목 『마이스터 엑카르트, 독일 사변思辨의 아버지』Meister Eckhart, der Vater der deutschen Spekulationsis(Wien 1864)가 여실히 보여준다. 당시 사람들은 “독일” 신비주의 사조를 명료하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특히 프레거W. Preger(1874-1893)가 그랬다.
데니플H. S. Denifle이 엑카르트의 독일어 저작들을 찾아내어 연구하자(1886), 엑카르트에 대한 관념론적인 관심들이 수그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관심의 방향이 “스콜라 철학자” 엑카르트에게로 기울어졌다. 사람들은 신스콜라철학의 관점에서 엑카르트를 평가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낮은” 단계의 인물로 평가절하 했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중심을 차지한 것은 엑카르트의 “정통 신앙”에 관한 논쟁이었다. 그 결과 1920년대에 엑카르트의 『변론』과 재판문건들이 발견되어 출판되었고, 그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었다.(A. Daniels, 1923; G. Théry, 1926) 그 후 신학적으로 적극적인 시각을 가지고 엑카르트를 대하는 이들이 생겨났다.(O. Karrer, H. Piesch, J. Koch 등등)
엑카르트 연구의 네 번째 단계는 독일 연구공동체의 의뢰로 (1935년부터) 비평작업을 거친 전집의 편집이 착수되면서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전후戰後에 빚어진 일이긴 하지만, 원문 자료가 점점 더 많이 비평되고 처리되었다. 특히 1950년대에 일련의 엑카르트 해석본들이 나왔다. 몇몇 사람(특히 J. Quint, J. Koch, K. Weiβ, H. Fischer)은 엑카르트의 독일어 작품들과 라틴어 작품들을 편집하고 표준적으로 해석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새로운 기초 위에서, 특히 엑카르트의 유비론을 토대로 하여 기존의 것과는 다른 엑카르트 상像이 나오게 되었다.
독일어 작품들의 진위眞僞문제는 독일어 작품들에서 『변론』 및 라틴어 설교들과 일치하는 부분들을 하나하나 찾아내고, 그것들을 이미 진품으로 확정된 텍스트들과 비교하여 가려낼 수밖에 없었다. 독일어 저작 전집(제1권~제3권은 엑카르트의 독일어 설교들이고, 제5권은 엑카르트의 독일어 논고다)의 형태로 출간된 요제프 크빈트Josef. Quint의 어마어마한 역작은 그에게 엄청난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는 적은 분량의 연구서 몇 권 이외에 엑카르트의 독일어 설교들과 논고들을 번역하여 묶은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1955) 그 번역서는 엑카르트에게 접근하는 길을 광범한 독자들에게 열어주었으며, 그런 점에서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수준의 엑카르트 해설서들이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데, 그것들은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들의 인식론과 철학적․역사적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몇몇 편집자들이 그때그때마다 그러한 작업의 흐름(참조. “문헌목록”)에 맞서 진정한 이해를 지키려고 시도했으나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네 번째 단계가 와해되었고, 그 와중에 “해설서들의 갈등”이 노골화되기는 했지만 논쟁의 투명성을 높였다. 역사가 발전하면서 엑카르트 상像도 변하기 시작했다. 관념론, 생철학, 신스콜라철학, 국가 이데올로기, 사회비판, 지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신비주의-엑카르트는 유럽 이외의 신비주의에도 알려졌다-가 그러한 변화에 한몫했다.
엑카르트는 신학으로 치장한 철학자라는 둥, 엑카르트는 독특한 언어론 내지 말씀의 형이상학으로 무장한 성서주석가라는 둥, 엑카르트는 내면의 그리스도론을 전개한 성육신 신학자라는 둥, 엑카르트는 은유의 지평에서 자신의 진술을 전개한 사람, 곧 은유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둥(예컨대 엑카르트는 영혼과 하느님을 상像과 거울에 빗댄다), 엑카르트는 영적 길라잡이라는 둥, 엑카르트는 참된 자기인식의 선동가라는 둥-엑카르트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니콜라우스 라르기어Nikolaus Largier가 중세 고지독일어와 라틴어로 된 원문들을 현대 독일어로 번역하여 펴낸 두 권의 훌륭한 책이 훨씬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풍부한 각주들의 안내를 받으며 훑어보려면 로리스 슈투르레제Loris Sturlese와 게오르크 슈테어Georg Steer가 편집하여 시리즈로 내고 있는 『엑카르트 선집』Lectura Eckhardi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고, 신비주의의 역사를 정리하려면 버나드 멕긴Bernard McGinn이 쓴 몇 권의 책과 쿠르트 루Kurt Ruh가 쓴 몇 권의 책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고, 연구 성과를 살펴보려면 발터 하우크Walter Haug와 슈나이더 라스틴KW. Schneider-Lastin이 펴낸 전집(2001)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학 연구를 살펴보려면 특히 라이너 만슈테텐Rainer Manstetten의 작품(1993)과 마우리티우스 빌데Mauritius Wilde의 작품(2000)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후자는 마이스터 엑카르트 상像과 그 신학을 연구함으로써 각기 다른 해석모델들을 또 한 번 제시하고 그 모델들의 갈등을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작업은 원문 하나하나의 진정성을 지나치게 따지고 대가의 “본래” 의도를 지나치게 따지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신뢰할 만한 토대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사상에 대하여

엑카르트와 그의 시대의 종교 운동들
엑카르트는 영적인 삶을 설파하고 가르친 설교자이자 지도자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 체험을 하도록 돕고 그에 따른 존경을 얻었다. 타울러와 조이제, 몇몇 수녀원과 엑카르트 전설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 한 편으로 교회 당국의 판단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독일어 설교와 문서들로 사람들을 “현혹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그런 판단을 받게 된 것은 보통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과 (베가르트Begard라는) 평신도 종교운동의 가르침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했기에 빚어진 것 같다. 몇몇 동시대인들의 견해에 의하면, 라인강 하류 지역에서 엑카르트가 본보기로 단죄되긴 했지만, 그것은 사실 엑카르트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그는 공식적인 이단 죄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엑카르트의 권위에 기대려고 했던 베가르트 평신도 운동들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엑카르트는 자신이 자국어로 썼고, 단죄된 논제들 대다수가 들어 있는 『신적 위안의 책』 끄트머리에서 그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흔히들 그러한 가르침을 무식한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기술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무식한 사람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는 결코 배운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가르치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을 가르치는 이유는 그를 무식한 사람에서 배운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새로운 것이 없으면, 오래된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의사가 존재하는 것은, 병든 사람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그 사람에게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요?”(DW V, S. 60,27-S. 61,5)
위의 인용문은 신학자의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자기이해라고 할 수 있다. “평신도들도 신학을 숙고하고 실행에 옮길 권리가 있다. 그들은 미숙하고 무식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는 자각한 평신도 운동들의 새로운 종교적 자기이해를 받아들인 것임에 틀림없다. “신학과 교회에서는 새로운 것, 곧 ‘새롭고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Nova et rara(엑카르트가 이따금 사용한 표현)도 말하고 가르쳐야 한다. 지금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새 학설을 배우고 안전장치를 강구하는 상태이긴 하지만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는 경건한 해방을 받아들인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것은 반교권적인 정서가 수그러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사목의 과제로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력자가 병상으로 다가가고(자국어를 활용하고), 사람들이 있는 곳, 특히 사람들이 신앙생활과 경건생활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신앙생활 및 경건생활의 중심과 그 미래를 확고히 다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독자는 그러한 소리를 들으면서 엑카르트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한 편으로는 낡은 경건 기법과 새로운 유심론 및 정적주의에 맞서 싸우고, 또 한 편으로는 신앙을 통제하는 행위와 신앙을 경시하는 풍조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단”을 위험으로 본 것이 아니라 편협한 종교의 통제 성향을 위험으로 본 것 같다. 이는 자신의 영적 경험을 솔직하게 표현하거나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음에 틀림없다. 엑카르트는 자신의 옹골찬 신앙을 확신했으며 자신이 그리스도교와 교회법을 충실히 준수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또한 그는 자신을 이단 축에 끼지 못하는 자로 여기고, 신학자로서 참된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은 것 같다. 그는 말씀의 오용 가능성에 맞서 싸운 것이 종교 재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신학자의 권위가 위험에 처하여, 교회 당국 내지 종교 운동들로부터 공식적인 교의들에 견주어 평가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보듯이, 공의회 이후에 격상된 신앙의 위상 속에서 위의 문제들이 명료해져야 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실천을 움직여, 평신도들이 보다 성숙해져서 협력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운동들은 좀처럼 지지를 받기가 어렵고 심지어 “통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진퇴양난의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한 쪽에서는 “새로운” 학설을 깎아내리고,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보다 넓게 펼치려 하고, 진보적 중도를 표방하는 쪽은 두 전선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엑카르트 이래로 교회 안에서 신학자가 차지하는 위치는 결정적으로 바뀐 것이 많지 않다. 심문방법도 엑카르트의 시대에는 비교적 인간적이었던 반면 오늘날에는 필요한 변경을 가하여 비인간적인 훈계방법으로 계속되고 있다. 문맥에서 문장을 떼어내 이단으로 단죄하는 것보다는 덜하겠지만, 엑카르트가 오늘날과 같은 방법으로 심문을 받는다면 신학적 폭발력이 엄청났을 것이다. 성직자의 교도권 내지 사제직, 신학적 자격, 신앙실천 사이의 문제들은 여전히 불명료한 것으로 남아 있다. 엑카르트는 수도원 개혁자이자 시찰자였다. 그는 철두철미 교회를 위해 봉사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가 교회법에 명시된 교도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라거나, 회의론을 엄단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의 신학은 체계를 세우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그가 말년에 자신의 저작들을 정돈하면서 명제집이라는 체계를 전면에 내세우기는 하지만, 그것은 청중들의 관심이 눈에 띌 정도로 증대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러한 출판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원한 것은 체계가 아니라, 사유를 전개하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삶을 새롭게 하는 일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체계를 세우는 사람, 낡은 것에게 새 것의 의미를 풀어주는 조직가였다.
엑카르트는 설교자였다. 그는 수도원과 교회에서 설교했고, 쾰른과 그 인근 지역에는 그가 설교를 베풀었던 장소 몇 군데가 있다. 하지만 그가 설교를 베풀었던 대부분의 장소와 시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그는 성직자들에게는 라틴어로 설교했다. 그가 라틴어로 설교하면서 소위 “혼란”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속한 수도회(도미니코회)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여러 부류였을 것이다. 그는 수도원에서는 평신도들,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설교했을 것이고, 교회 내지 “신학교에서”는 자신의 제자들(신학생들)과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설교했을 것이다. 그는 대상이 누구이건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신학적 쟁점들을 넌지시 언급한다. 인식 내지 사랑, 세계의 영원성, 죄의 결과 등등.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무에게나 설교하는 것은 아니다. “가련한 사람들”은 본향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자리에 앉아서 내 빵을 먹으면서 하느님을 섬길 테야!” 엑카르트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설교하지 않는다. 그는 “타향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하느님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설교한다.(Pf LVI, 181,20-25, 본서에 수록된 독일어 설교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마라.”) 엑카르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수도원 안팎에서 영적으로 새로운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평신도들이었다. 엑카르트는 그들에게 특정한 “장소,” 특정한 “방법”을 설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자기만의 길을 걷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엑카르트는 베르톨트 폰 레겐스부르크Berthold von Regensburg 같은 “평신도 묵상회 인도자들”과 다르다. 쾰른에서 엑카르트를 모함한 두 명의 도미니코회 수도승은 그러한 유형의 평신도 묵상회에 관여했을 것이다. 흔히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엑카르트는 “지적인 사람들”Intellektuelle에게 설교했고, 그들에게 설교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이성에 부합하는 것,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사상이 지적으로 오해될까 염려하지 않았다. 그가 염려한 것은 혹시 자신의 사상이 야비하게 변조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지적인 사람들”이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종교에 초점을 맞춘 학교 교육의 수혜자들이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자국어(독일어) 성서를 알고, 특히 종교 문헌과 궁정 문학작품도 읽었을 것이다.
도미니코회 수도원이 자리한 도시들은 시민 세계였다. 그 세계에는 부르주아적인 삶에 반대하는 운동들이 있었다. 그 운동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안이 될 만한 생활 형식을 추구했다. 여기서 부르주아 계급의 자녀인 페트루스 발데스Petrus Waldes와 아씨시의 프란체스코Fanziskus von Assisi를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경향이 엑카르트의 시대보다 1백 년 가량 앞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프란체스코가 평신도 자격으로 그러한 운동에 가장 먼저 불을 지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몸소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성서의 말씀을 따르고, 성서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공동체 형식을 실험하고, 신학 교육을 받고자 힘썼다. 그러한 운동의 일부가 한창 번창하던 탁발수도회(도미니코회)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엑카르트의 시대에도 다수의 수도원이 새로 설립되었고, 그에 따라 독일 도미니코회관구도 분할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한 운동의 또 다른 일부는 경건 공동체들로 규합되었다. 그러한 공동체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공동체가 바로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뿌리를 둔 베긴회Begine라는 여성 공동체다. 여성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생겨난 베긴회는 수도원, 교육 시설, 양로원, 세속 생활이 뒤섞인 공동체였다. 결혼한 회원은 그 공동체를 떠날 수 있었다. 짐작하건대, 엑카르트는 그곳에서 수도원의 독거 속에서는 물론이고 세속의 삶 한가운데에서도 영적 가난을 이룰 수 있다고 설파했을 것이다. 베긴신비주의Beginenmystik는 당시의 “평신도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새로운 수도회의 승인으로 위와 같은 운동들의 물꼬를 터주었지만, 그 운동들이 반교권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성향을 띄자마자 곧바로 거부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와 이단자가 동일한 온상에서 나왔다. 밀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예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일을 유보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유보를 떠올리지 않았다.) 독자는 사목적인 돌봄과 종교 재판 사이의 긴장을 마음에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중세후기의 사회․문화․종교적 격변기에 반속반승의 공동체 운동들과 실제적인 이단들이 출현하게 된 것은 유대-이슬람 사상과 영지주의적인 가르침 그리고 영지주의적인 생활방식의 유입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은 영적인 갈망들을 통합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교황권과 관련한 정치적 분규, 성직 금지의 세속적인 남발 등을 떠올릴 것이다. 무소불위의 카리스마는 이단을 척결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아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근절하게 마련이다.
그토록 긴박한 상태에서 한 설교자가 닳고 닳은 경건 기법의 준수 내지 제도 준수를 요구하지 않고, “새롭고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 곧 하느님의 탄생이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설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엑카르트는 사람들, 곧 소시민적인 생활방식의 대안이 될 만한 것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음과 동시에 그들을 “해방하는” 힘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전부 다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중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받아 적은 것이 가급적 진정성을 갖추게 하려고 몇 가지라도 확실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재판정에서 남들이 받아 적은 자신의 독일어 저작이 진정성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그가 설교를 통해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성을 근거로 삼아 신앙을 풀이하고, 신앙경험과 신앙실천을 심화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그가 의도한 바였다. 여기서 그의 일관성이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일관성은 무엇보다도 그의 순수한 인품과 그의 순수 영적 현실 참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청중은 자신들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설교하는 엑카르트, 자신들의 생각과 어법에 어긋나게 설교하는 “난해한” 엑카르트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길 원했고, 그렇게 이해한 것을 실생활의 자극제로 삼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엑카르트가 하느님 경험을 향한 “돌파”Durchbruch를 이야기하고, 게다가 교황의 앞잡이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느님에게로 들어 올려진 지성”intellectus in deum ascensus을 말하고, 현세에서 하느님과 동행하고 하느님과 함께 사색하고 하느님에게 협력하라고 말한 것은 그야말로 사람들을 “해방하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성서의 용어, 곧 일상의 영적 경험을 담고 있는 기본 용어(가난Armut, 초탈Abgeschiedenheit, 초연Gelassenheit)를 하나씩 동원하여 새로운 삶 전체를 풀이하였을 것이고, 청중은 그러한 의미 풀이를 듣고 자신들의 신앙이 밑바닥에서부터 해방되어 본질적인 곳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엑카르트는 숙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설교 본문으로 삼았다. 사색이 없으면 진리가 있을 수 없고, 상응하는 삶의 실천이 없으면 진리를 사색할 수 없을 것이다. 청중은 삶의 실천을 따를 수는 있어도 진리를 사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엑카르트가 사유思惟와 실제적인 경험을 어떻게 연결지었는가 하는 물음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난제로 남을 것이다.



하느님 사유와 하느님 경험
엑카르트의 영성은 우선 사유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비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철학에서 상당 부분을 찾아내는데, 이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성적인 것(이치에 맞는 것)이 명료한 것(이해하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는 설교 도중에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깊이 숙고한다. “오늘 나는 이곳으로 오면서 ‘여러분이 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이해하기 쉽게) 설교할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비유 하나를 떠올렸습니다.”(DW II, Pr. 48, S. 416,1ff) 중세 고지독일어 원문에서 “이해하기 쉬운”verständlich이라는 낱말은 “이성적인(이치에 맞는)”vernunfteclîche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성에 부합하는”vernunftgemäβ을 의미하기도 한다. 엑카르트는 사유가 추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설교들 속에서 비유들을 말하고, 당시의 관습대로 이따금 옛이야기들도 언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방금 인용한 설교에서 청중의 눈앞에 보이는 설교단, 나무로 이루어진 설교단의 비유를 구체적으로 들면서 봄Sehen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주체와 대상의 합일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청중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추상 능력이다. 추상 능력은 사유의 영성에 속한다. 예컨대 엑카르트는 “초탈”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러한 추상 능력을 표상과 이미지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보는 능력이라고 뜻매김한다. 초탈은 하느님이 세계와 섞이지 않음을 표현하는 데 소용되는 용어다. 하느님 자체가 세계와 섞이지 않는 이유는, 그분의 존재가 곧 “사유”intelligere이기 때문이다.(참조. R. Imbach, 1976)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철학자의 하느님이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유가 이루어지는 문맥이 이미 계시되어 있는 신앙의 사실과 다를 때에만 그런 경우가 빚어진다. 신앙은 하느님의 상像을 만드는 경솔한 행위를 금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사유된(생각된)” 하느님만이 지킬 만한 하느님이라고 하겠다. 사유는 우리가 우리를 위해 만들어낸 상像들로부터 하느님 경험을 깨끗하게 지켜준다. 또한 사유는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것만을 받으려고 하는 우리의 경험 내지 우리의 사랑보다 하느님을 더 높인다.
하지만 우리는 보다 고차적인 것을 경험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다. 엑카르트는 『교훈 담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름지기 사람은 생각된 하느님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사라지면, 하느님도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DW V, S. 205,5-7)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몸소 일컬으신 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상상하거나 바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사랑과 더 큰 자비로 존재하시게 해야만 한다. 본서에는 그것을 주제로 삼은 설교 몇 편이 들어 있다.
사유는 자신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유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보다 고차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사유만큼 멀리 가지 못한다. 사유는 우리가 선한 것들에 대해 상상하는 것들의 한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상들을 생각하더라도, 하느님은 사랑이 무엇인지 직접 말씀하실 수 있다. 엑카르트는 한 설교에서 자비야말로 지식과 사랑을 능가하며,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일 가운데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순수한 일이라고 말한다.(참조. DW I, Pr. 7, S. 123,3ff.) 생각이 그치는 곳에서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다.(참조. LW IV, Sermo VI, n. 52, S. 51) 엑카르트의 작품들을 읽을 때에는 사유를 사랑보다 우선시하는 수많은 구절들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러한 우선시는 변증법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사유가 사랑으로 하여금 단순한 의지의 행위를 넘어서 “이유 없이”ohne Worumwillen 하는 사랑, 곧 하느님이 하시는 것과 동일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주석자들이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온 것을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엑카르트는 그러한 생각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그는 우리가 느낀 것(겪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보다 고차적인 경험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경험이 보금자리를 치고 있는 곳, 즉 하느님 자신 안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참조. DW I, Pr. 4, S. 66,8) 우리는 찾고 있는 것이지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은 같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경험은 우리가 우리의 사유를 통해 찾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를 보려고 하는 사람은 진리와 같아져야만 한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사색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경험할 수도 있다. 그가 진리와 같아지면, 진리 자체가 그와 담소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유 내지 사색은 존재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엑카르트는 사유와 신앙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흔히들 오성을 통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러한 태도는 교만과 불손함의 표지가 아닐 수 없다. 흔히들 자기가 믿는 것을 자연스러운 이성의 숙고와 비유를 통해 탐구하려 하지 않는데, 그러한 태도는 비겁함과 게으름의 표지가 아닐 수 없다.”(LW III, Expositio sancti evangelii secundum Iohannem, n. 361)
우리는 엑카르트의 설교들에서 “마음으로 인식하기”mit dem Herzen erkennen라는 정식을 이따금 발견하게 된다.(DW II, S. 41,5) 엑카르트가 말하는 마음은 감정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자리가 아니다. 마음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첫 열매이자 인간 현존재의 중심이다.(참조. DW III, Pr. 71, S. 217,7ff.) 또한 마음은 신적 존재의 중심과 깊이를 가리키는 은유이기도 하다.(참조. DW I, Pr. 1, S. 31,5-8) 사유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초탈과 순수함이야말로 마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현대에는 엑카르트의 지적 깊이를 오해하여 사유를 정신노동으로 여겼다. 그 결과, 엑카르트가 말하는 “마음”이라는 용어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마음”이라는 용어가 하느님 탄생의 전통과 맞물려 있음을 놓치고 말았다.(참조. H. Rahner, 1935)
그가 말하는 신앙경험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사유는 그러한 신앙경험을 신뢰하고 걱정 없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러한 경험을 특별한 경험으로 소개한 적이 없다. 그는 늘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한 경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자명한 전제라도 된다는 듯이. 그의 작품들 속에서 “속으로 봄”innere Schau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지 않고, “환상”Vision이나 예언 같은 표현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엑카르트가 예언서들을 주석하지 않고 지혜서를 주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가 제시하는 신앙이라는 표현은 사유를 가리키는 표현이자, 사유로부터 비롯되었으되 사유를 넘어서는 것을 가리키는 은유다. 그래서 그는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도 읽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피조물을 아는 이는 설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개개의 피조물은 하느님이 쓰신 책이기 때문입니다.”(참조. DW I, Pr. 9, S. 156,7-9)
또한 엑카르트가 말하는 사유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소재로 삼은 설교에서 볼 수 있듯이 실생활 경험을 전제한다. 실천이야말로 확실한 통찰의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타향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하느님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것도 통찰할 수 없다.(본서에 실린 설교 “나를 따라라.”를 참조하라.) 실천 없는 하느님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이 한결같이 제시하는 가르침이지만, 엑카르트는 그 가르침을 특유의 방법으로 선명하게 하였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하느님 경험은 “관찰”이나 “체험”이 아니라 숙련된 경험, 습관이 된 경험을 의미한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는 “신비주의”에서 특히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준비”로 규정하는데, 우리는 그의 규정을 따라서 “준비”라는 표현을 “경험”이라는 표현 대신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준비’라는 표현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곳에서 ‘경험’이라는 표현은 보다 깊은 곳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신비주의의 가치 전체가 바뀌는 것이다.”(H. Urs von Balthasar, 1974, 57ff.) 실제로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위해 준비해야 할 습관으로서 자기 여읨, 가난, 초연을 가르친다.
엑카르트의 습관을 살펴보자. 그는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자세를 종종 생각하고 언급한다. 그가 제시하는 기도의 자세는 먼저 입을 다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하느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초탈한 사람이 하는 기도는 침묵의 기도다.(참조. DW V, Von Abg., S. 426,6ff.) 성서주석자 엑카르트는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보다 신앙이 먼저라고 증언한다. 신앙은 인간 삶의 시작 신호나 다름없다. 엑카르트가 자신의 성서본문들을 선택한 것은 그러한 관점에서였다. 주석은 설교에 봉사하고, 설교는 생활론에 봉사하는 것이다.



생활론은 존재론이다
우리가 엑카르트에게서 주목할 전제는 “생활론은 존재론이다.”라는 것이다. 도덕적인 덕목들에 대해 이야기하건, 완덕의 기초가 되는 용어들(의로움, 초탈, 초연, 가난, 속성을 여의기, 이유 없이 행하기)에 대해 이야기하건 간에, 엑카르트는 그것들의 뿌리가 존재 안에서 존재 자체와 다르지 않음을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러한 것들은 유추의 형식, 곧 유비의 형식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유사한 것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차이가 너무 커서, 이 세상에서는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세계와 다르지 않은 분이 되시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느님은 타자가 아니며, 가장 가까운 분이시면서 동시에 가장 먼 분도 되신다.(참조. LW IV, Sermo XXIV. n. 304, S. 270,7f.) 하느님이 세계이심을 부정하고, 하느님이 세계를 부정적으로 읽으실 수 있음을 부정하는 자, 이중으로 부정하는 자라야 하느님의 존재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만 하느님을 긍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역 속에 본질적인 삶과 그 완전의 원리들이 머무른다. 열매는 꽃 속에 있는 것이지 꽃의 결과물이 아니다.(참조. LW II, Sup. eccl. n. 22) 엑카르트는 그런 식으로 생활론을 단순화한다. 왜냐하면 모든 덕의 바탕은 신적인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존재, 생명, 그리고 사유”는 신적인 사건의 양상들이다.(참조. DW I, Pr. 8, S. 129,6-130,4) 엑카르트가 주제로 삼은 완전의 양상들은 다층적이다. 하지만 그는 그 가운데서 한 가지를 의욕적으로 풀이한다.



매이지 않음
엑카르트가 말하는 단순화 내지 하나 됨이라는 에토스는 “완덕의 단계들”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꼭 필요한 한 가지,” 이른바 초탈만은 의욕적으로 숙고하라고 분부한다.(본서에 실린 『초탈에 대하여』Von Abgeschiedenheit의 서두를 참조하라)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는 다른 이름들도 가지고 있다. 매이지 않음의 과정들, 곧 매이지 않음이 지닌 여러 이름(초연, 가난, 자기 여읨)은 서로를 비쳐 보인다.
논고 『초탈에 대하여』와 설교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도식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엑카르트는 먼저 경건에 대한 잘못된 전이해를 공격한다. 초탈은 고독 속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고, 가난은 외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수련기법을 통해 하느님을 가까이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초탈은 제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을 완전히 여의는 것이고, 가난은 소유하지 않고Nicht-haben, 알지 않고Nicht-wissen, 바라지 않는Nicht-wollen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차원의 삶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몸소 초탈하여 가난하게 머무르시는 곳을 들여다보고 그곳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한 차원의 삶만이 정녕 “소유할” 만한 삶이다. 말하자면 아집을 정점으로 하는 인간 현존재의 모든 소유구조들을 분쇄하고, 바람과 행위의 모든 이유를 끊고, 이기심 위에 세워진 목적의 왕국을 버리고, 확실하고 분명한 신적 존재가 삶의 구석구석에 온통 스며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그러한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천 년 동안 삶에게 ‘그대는 왜 사는가?’라고 묻는다면, 삶은 그에게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산다.’ 그 이유는 삶이 자신의 근저로 살고, 스스로 솟구치기 때문입니다. 삶이 이유 없이 사는 까닭은, 그것이 스스로 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동기로 움직이는 정직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움직이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리고 그가 그 물음에 제대로 답한다면, 그 대답은 아마도 ‘나는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인다.’가 될 것입니다.”(DW I, Pr. 5b, S. 91,10-92,6)
삶이 “단순해지려면” 하느님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삶만이 제대로 된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만이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초연하게” 사는 것이지 일체의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초연”이라는 용어는(DW I, Pr. 12, S. 192-203) 매이지 않음의 바람직한 전망을 제공하는 것 같다.
매이지 않음은, 엑카르트가 가난을 주제로 삼은 설교에서 말한 대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시간적으로 오해한 나머지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것도 버려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을 새로운 빛에서 보아야 한다. 엑카르트는 그 참된 현존을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은유로 표현한다. 우리는 본집(하느님의 집)에서 나왔으나 그 안에 머무르고 있다.(참조. Pf LVI, 181,6f.) 하느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혼이라는 거울 속에 늘 자리하고 있다.(참조. DW I, Pr. 9, S. 154,1-4) 인간은 하느님의 외침이 일으키는 메아리와 같다.(참조. DW I, Pr. 22, S. 383,1-3) 인간은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는 밀랍과 같다.(참조. DW II, Pr. 32, S. 136,2-6)
인간은 “밖에 있음과 동시에 안에 머무른다.”(DW III, Pr. 86, S. 488,4) 하느님께서 그를 끊임없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창조와 성육신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사건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단 한 순간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피조물의 존재는 존재를 주는 은총의 신적인 작용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매이지 않음을 통해 그러한 사건의 심층으로 들어가고, 진리, 곧 하느님 안에 머무를 준비를 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네가 되어라.”야말로 엑카르트의 초탈론을 관통하는 주제다. 금욕생활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그러한 주제가 마뜩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에토스는 존재를 주시는 하느님의 움직임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무가 아니라, 존재에 일치되게 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교훈 담화』에서 그러한 에토스의 가장 단순한 정식을 찾을 수 있다. 엑카르트는 품격 높은 의지를 그리스도인의 에토스로 간주한다. 품격 높은 의지의 척도는 자기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의지 안에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은 나를 위하십니다.”라는 핵심문장이 첫 번째 담화의 중심을 차지한다. 엑카르트는 두 번째 담화에서 그러한 준비의 조건으로 “빈 마음”을 꼽고, 세 번째 담화에서는 “자기가 보이거든 그것을 여의십시오.”라고 말하고, 네 번째 담화에서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마음을 쓰십시오.”라고 말한다. 존재에 마음을 쓰면 쓸수록, 행위도 좋아지게 마련이다. 하느님께 달라붙는 사람은 모든 품격 높은 도덕의 바탕을 붙잡은 것이나 다름없다.(다섯 번째 담화) 세계를 등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엑카르트는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붙잡으라.”고 말한다.(여섯 번째 담화) 하지만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붙잡는 것은 하느님을 꾸준히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붙잡으라는 말은 하느님을 위해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상태가 되라는 뜻이다. 내적으로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야말로 초연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훈련한 사람만이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새로운 차원의 삶은 어떤 사람이 갈망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건, 그가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는 갈망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또한 새로운 차원의 삶은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가 어디에 있건, 그가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그는 사랑을 떨쳐버리지 못한다.(참조. DW V, S. 206,1-13)
엑카르트는 (일곱 번째 담화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가 행동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성과 공평함이다. 그는 도덕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 전통을 따른다. 인간은 이성을 신중히 사용함으로써만 본집에 있을 수 있고 하느님 안에 있을 수 있다.



돌파와 재탄생
인간의 실천적인 “준비”가 이루어질 때, 신적인 영역으로의 “돌파”Durchbruch가 가능해진다. 그러한 “돌파”는 사유의 에토스에 따른 깨달음의 과정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경우에도 사유는 실천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인간답게 실천하는 사람은 보다 큰 인식능력도 얻게 마련이다.
“돌파”는 번개처럼 급작스럽게 일어난다. 그것은 모든 상像을 깨부순다.(참조. Pf IV, S. 28,34-29,7) 하느님의 행위가 창조주의 행위로 진술되는 한, 돌파는 그러한 하느님 상像까지 깨부순다.(참조. Pf LVI, S. 181,13f.) “돌파” 속에서 새로운 일치가 순식간에 이루어지지만, 그 순간도 곧 사라지고 만다. 초연의 상태(준비)가 지속되고, 사람이 은총을 잃어버리지 않는 동안만, 새로운 일치는 유지된다.
그러한 과정은 “영혼의 불꽃” 속에서, 즉 영혼 속에 신적인 것이 출현함으로써 아들의 재탄생이 이루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리게네스가 말한 대로, 그러한 재탄생은 모든 선한 생각, 모든 선한 노력, 모든 선한 행위 속에서 일어난다.(참조. Pf XLIII, S. 147,35-37) “준비”-“돌파”-“재탄생”의 은총. 이 세 가지는 시간적인 단계들이 아니라 동일한 과정을 바라보는 관점들이다. 그러한 과정의 신학적 중심은 아버지의 품, 인간의 인성, 개개인의 근저에서 일어나는 아들의 탄생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기뻐하든 슬퍼하든, 여러분이 자고 있든 깨어 있든 간에, 하느님은 여러분 안에서 자신의 외아들을 낳으십니다. 그분은 그저 자신의 일을 하실 따름입니다.”(DW I, Pr. 22, S. 387,3f.)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단순화”를 보게 된다. 로고스의 탄생, 성육신, 개인의 그리스도화,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사건 속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왜냐하면 하느님 안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예수의 현세적 실존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의 현세적 실존을 새로운 삶의 창시로 이해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실제적 증거다.(DW I, Pr. 22, S. 377,13) 인간이 그러한 사랑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들의 재탄생이다. 나를 낳으신 분을 내가 다시 낳는 것이다.(DW I, Pr. 22, S. 382,9f.) 신적 사랑의 신비는 이웃사랑 속에서 드러난다.
돌파-론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사유의 에토스고, 재탄생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사랑의 에토스다. 그렇지만 사랑에 들러붙은 상들을 깨끗이 제거해주는 것은 사유의 에토스다. 곁다리가 들러붙은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무것도 들러붙지 않은 사랑,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사람이 진짜 아들입니다.”(DW II, Pr. 26, S. 33,6f.) 선을 이러저러한 상으로 그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불충분한 짓인지 알 때에만 사랑은 정화된다. 그런 이유로 엑카르트는 정화되지 못한 사랑보다 초탈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직접 길어 올리는” 자다.(DW II, Pr. 32, S. 145,2)



삶은 존재의 기술
삶의 에토스는 뒤집힌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에토스를 위한 원리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을 찾으려거든, 하나가 되어라.”(DW V, VeM, S. 113,8f.) “이유 없이 행동하라.” “하느님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하라.”(DW V, BgT, S. 44,7f.) 존재의 기술은 인간 실존을 단순화시키고 단일화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하나 되어 움직이게 하는 기술이다. “하느님은 작용하시고(일하시고), 나는 된다.”(DW I, Pr. 6, S. 114,5) 하느님은 일하시고, 나는 그것을 감내한다.(참조. DW II, Pr. 52, S. 501) 존재의 기술인 삶은 하느님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엑카르트 윤리의 출발점이다. 말하자면 모든 도덕적 의무가 그러한 기술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신적 사랑의 활동을 통하여 “영혼은 하느님께로 가라앉고, 신적인 본성으로 세례를 받는다. 거기에서 영혼은 신적인 생명을 받고, 신적인 질서를 받는다. 그리하여 영혼은 하느님을 따라서 가지런해진다. 우리는 자연과학자가 말하는 비유에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아이가 임신되면, 곧바로 사지와 특정한 외모가 형성된다. 하지만 영혼이 아이의 몸속에 주입되면, 아이가 처음에 가졌던 형체와 외모는 사라지고, 아이는 단일체가 된다. 아이는 영혼의 기능을 통해 영혼의 다른 형체를 받고, 영혼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외모를 받는다. 영혼에게는 이런 일도 일어난다. 즉, 영혼이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신적 본성의 세례를 받으면, 영혼은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과 약점과 변덕스러움을 잃고, 완전히 신적인 생명으로 새로워진다. 다음과 같은 빛의 비유로 알 수 있듯이, 영혼의 모든 습관도 신적인 습관을 따라서 가지런해진다. 심지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불꽃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흐려진다. 반면에 심지로부터 높이 솟으면 솟을수록, 불꽃은 더욱 더 밝아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넘어서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영혼은 점점 더 순수해지고 맑아지며, 하느님도 자신의 모습을 닮은 영혼 안에서 자신의 신적인 일을 더욱 더 완전하게 행하신다.”(DW III, Pr. 60, S. 23,1-26,3)
덕을 근저에서, 곧 신적 존재 안에서 얻는 사람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참조. DW I, Pr. 16b, S. 276,1-5) 새로운 존재만이 선을 행할 자격이 있다. 어떤 사람이 새로운 존재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선을 행하여 맺은 열매로 알 수 있다. 삶은 존재의 기술이고, 존재의 기술은 하느님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것, “하느님이 행하시는 것과 똑같이 행하는 것”이다.(DW II, Pr. 40, S. 275,2)



활동, 하느님 경험의 표지
엑카르트는 “활동 한가운데에서도 (내적으로) 매이지 않는 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DW V, RdU, S. 275,10) 테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은 그것을 “활동하되 활동에 매이지 않기”로 정식화한다. 그것은 생각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 활동과 구원 활동이 개입할 수 있도록 훈련함으로써만 되는 일이다.
엑카르트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열매 맺음이라는 성서적 주제를 붙잡고 씨름한다.(DW I, Pr. 2) 나는 그 주제를 “탈자아적 실존”enteignete Existenz과 “사회적 실존”soziale Existenz의 조화로 기술하고자 시도한 바 있다.(1972)
활동이 중요한 것이지, 활동의 산물, 곧 업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업적은 덧없는 인공물일 뿐이다. 활동이 인간 속에서 일으키는 변화는 의미심장하다.(참조. Pf XV) 하느님도 활동하시되 생성되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심으로써 하느님이 되신다. 활동의 “사실”과 활동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이 이유 없이 활동하시고 전혀 이유를 달지 않으시듯이, 의인도 무언가를 해야 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이유 없이 활동하시듯이, 의인도 이유 없이 활동합니다. 생명은 그저 자신을 위해서 살 뿐, 다른 어떤 이유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인도 이유 없이 활동합니다.”(Pf XLIII, 146,20-24) 하느님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데에는 이유를 묻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묻는 사람은 아직 하나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강제로 자신을 다그쳐 행동하게 마련이다.
활동은 하느님 자신의 것이다. 활동이 하느님 경험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늘 일하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다름 아닌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DW II, Pr. 43, S. 319,6f.)
창조, 성육신, 완성은 그러한 신적 활동 속에서 일치한다.(LW III, In Jo n. 185, S. 154) 활동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활동 속에서만 창조를 수행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말하는 곳에서 하느님이 되신다.”(Pf LVI, 181,1f.)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 곧 신성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신성은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의 길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보는 것도 아니고 겪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활동하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모두 순수 활동만을 목표로 삼습니다.”(DW II, Pr. 52, S. 495,6) 엑카르트는 라틴어 설교 “나를 따라라!”의 서두에서도 그것을 명료하게 진술한다.



하느님 경험 그리고 세계에 이르는 길
관상 생활과 활동적인 삶의 일치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을 간략하게라도 이해하고자 한다면, 엑카르트의 『교훈 담화』와 “마리아와 마르타”를 다룬 설교를 붙잡는 게 좋을 것이다. 그 두 편에만 윤리적인 성찰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 단어들의 윤리적 해석은 성서를 풀이하는 네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다. 그러한 해석은 역사적-문자적 해석에 덧붙여지기도 하고, 비유적인 해석에 덧붙여지기도 하고, 예표론적豫表論的 해석에 덧붙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도덕적인 의미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으며, 예표론적 해석도 즐기지 않는다. 그는 성서 원문에 있는 단어의 의미, 곧 각각의 단어가 신앙의 의미 전체 속에서 갖는 의미를 중시한다. 그는 성서 단어를 신앙의 의미 전체와 연관지어 풀이하면서 새롭고 광범위한 의미, 전체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전체를 열어 보이는 의미를 찾아낸다. 그는 성서의 단어들 하나하나를 대단히 중요시한다. 그는 자신의 설교들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단어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전체와 연관지어 차례차례 풀이하고, 설교의 본문이 된 성서 구절 전체를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상징이 되게 한다.
엑카르트는 존재론적이고 신학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삼고 거기에 도덕적인 의미부여를 연결한다. 그는 존재론적이고 신학적인 주제를 통하여 도덕적 의무를 존재의 기술로 치환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도덕적 의미부여가 아니라, 존재의 기술과 실천의 연결이다. 엑카르트는 성 엘리자베스를 기리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부와 명예가 있는 바깥세상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내면으로 돌아서서 참된 가난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바깥세상의 위로를 버리고 만물의 피난처이신 분께로 피했습니다. 그녀는 세상과 자기 자신을 경멸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자기 자신을 넘어섰으며, 남들이 업신여겨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들이 업신여겨도 슬퍼하지 않고 자신의 완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병든 사람들과 더러운 사람들을 깨끗한 마음으로 씻어주고 열심히 보살펴주었습니다.”(DW II, Pr. 32, S. 147)
엑카르트는 방금 인용한 설교의 끄트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름지기 자기 영혼을 보살피고, 일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는 신비주의와 실천의 일치를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엑카르트 자신이 그러한 일치의 증인이었을 것이다.
같은 방향에서 말하는 또 다른 구절들도 있다. 세상을 등진 사람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우리는 모름지기 “난로가나 마구간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해야 한다. 세상을 등지거나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도망치는 그 사람 자신이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활동을 통하여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 (로마 9장 3절에서 말한 대로) 사람을 돌보는 것이 황홀경보다 더 낫다. 죄지을 위험이 있다고 해서 선의의 행위를 멀리해서는 안 된다. 저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사랑을 행하면서 하느님과 협력해야 한다. 이상은 엑카르트가 여러 설교들과 『교훈 담화』에서 말한 것들이다.
신비주의는 의식의 확장 내지 명상이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하는 활동이다. 그렇다면 엑카르트를 “활동신비가”로 분류하고, 그를 유럽(과 독일)의 활동에 대한 열의Tatendrang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내세워 활동 없는 침잠을 강조하는 타문화의 신비주의에 맞서게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 배후에는 “한처음에 행동이 있었다.”라는 파우스트의 음성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엑카르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을 예찬하는 데 있지 않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식화한 도미니코회의 원칙을 따른다. 그 원칙은 이러하다. “관상한 것을 활동을 통하여 알리기.”contemplata aliis tradere 그렇게 하기 위해 먼저 할 일은 인생의 애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역설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미증유의 예리함을 지닌 내용, 곧 초탈, 매이지 않음, 가난, 초연을 설교함으로써 사람들을 슬픔과 기쁨이 지배하는 곳, 이른바 “인간 상황”Situation humaine으로부터 데리고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역설은 과정상(절차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전통은 이미 활동과 관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활동은 신앙경험을 심화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자 예비요소다. 활동은 신앙경험을 확고하게 해주고 지속시킨다. 흔히들 모든 것을 포기하면 그것을 다시 얻는다고 한다. 영성의 역사에서 그것은 종종 여러 단계로 이해되곤 하였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떠남과 귀환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까닭에 초탈을 피상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엑카르트는 행위의 내적인 난제難題를 분명하게 폭로한다. 말하자면 모든 행위의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고요히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삶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이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바른 길에 들어서고자 하는 사람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행위들 속에서 하느님을 붙잡고 간직하는 법을 배우든지, 아니면 일체의 행위를 포기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승에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행위가 없을 수 없고, 여러 가지 행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소유하는 법을 배우고,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매이지 않고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DW V, RdU, S. 211,6-10)
앞서 암시한 대로, 엑카르트의 “신비주의”가 “행위” 쪽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자, 엑카르트를 마치 현대인이라도 된다는 듯이 이해하려는 시도가 잠시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이해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요제프 크빈트의 유명한 개론에 실린 구절을 꼽을 수 있다. 크빈트는 이렇게 말한다.(1955) “하지만 하느님과 하나가 된 의인은 어떻게 사는가? 영적 가난 속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않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영원이라는 고요한 빈들을 한가로이 응시하기만 하는 빈 그릇은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엑카르트의 신비주의에는 서양의 세계감각, 곧 끝없는 발전욕구와 행동욕구가 도장처럼 분명하게 찍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엑카르트는 주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을 영원한 충동과 생성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S. 34)
크빈트는 한 편으로는 옳고 또 한 편으로는 그르다. 요한복음서의 서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엑카르트의 진술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가 옳다. “생명은 무언가가 스스로 솟구쳐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속속들이 가득 채우고, 급기야 밖으로 넘쳐흐르는 일종의 유출이다.”(LW II, In Exod. n. 16)
엑카르트의 존재론과 생활론이 역동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의 글에서 세계도피라든가 둔세遁世라는 표현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생철학의 관점을 표현하는 “충동”이라든가 “서양의 세계감각” 같은 표현은 엑카르트에게 낯설다. 그러한 표현들은 (“한처음에 행동이 있었다.”라고 말한) 괴테가 처음으로 언급한 것들이다. 엑카르트의 역동성은 행위자의 속성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엑카르트의 역동성은 철학적으로는 존재의 힘Energie에 맞추어져 있고, 신학적으로는 은총에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활동적인(능동적인) 삶”vita activa을 “수동적인 삶”vita passiva으로, 곧 은총의 작용을 위한 준비로 풀이해야 함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관점, 곧 과학, 기술, 세계변혁의 관점은 엑카르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적주의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을 “등에” 업지 않은 모든 활동은 방해이자 소외일 뿐이다. 행위로는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다. 하느님을 한 번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으로 있게 하고, 그리하여 삶을 역동성으로 가득 채우는 초탈만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 일에 협력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감당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엑카르트가 활동과 고난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존재의 기술로 치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깥일에 매달리는 마음과 내적인 일에 몰두하는 마음은 다르다. 사랑과 슬픔을 겉으로만 접하는 마음이 있고, 사랑과 그 대가인 고통에 속속들이 흔들리는 마음이 있다. 사랑이 인식과 경험의 정화를 통해서만 정당한 권리를 얻듯이, 활동도 모든 이유를 끊어버릴 때에만 자유로울 수 있다. 엑카르트는 정화된 활동의 신학적 원동력을 탐색한다. 활동의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활동의 원천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활동이 하느님의 “현실”에 푹 잠길 때에만, 활동의 적실성適實性은 커진다. 엑카르트의 언어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역설들을 해결하려면, 다음과 같이 영적으로 일관된 과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 끊어버림을 통해 새로운 성격을 얻고, 소유구조들로부터 벗어나 신적 생활로 이행할 때에만, 세계와 동료인간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 변함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사물과 상황을 조작할 수 있다는 현대의 확신을 물리칠 수 있다. “인간에게” 유효한 “용기”는 인간의 자기신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엑카르트의 지식론에 대해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엑카르트는 우리가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되 그것들 자체를 위해 추구해야 한다고 엄밀하게 말한다.(참조. LW II, In Eccl. n. 28, S. 255f.) 그것들은 써먹기 위한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자신들에게 마음을 씀으로써만 “현실”을 완수할 수 있고, 실제적인 길을 걸을 수 있다. 지식의 열매는 존재 자체의 실제적 특성에 속한다.
모든 열매에도 동일한 것이 적용된다. 성과와 내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열매는 활동 자체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열매는 꽃 속에 있다.(참조. LW II, In Eccl. n. 22, S. 249-256) 달리 말하면, 인간은 활동 속에서만 창조주의 모상이 될 수 있다. 그가 만들어낸 산물들은 신적 “현실”의 희화戱畵일 뿐이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활동 속에서만 창조주의 모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술의 세계정복 및 조작을 통한 역사 변경과는 현격한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관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후기 변증법적 사고가 전문으로 삼았던 인간의 실천이라는 난제다.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염세주의적인 후기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실천은 구원을 일그러뜨리고 만다. 물론 현대적인 난제와 그 상징(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시지포스 신화)에는 엑카르트의 다음과 같은 희망에 찬 유비가 빠져 있다. 즉, 행위의 결과 속에는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없지만, (초탈한) 활동 속에는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만연하여 스스로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세救世 행위는 그다지 옹호할 만한 게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에 이르는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를 자처하는 것으로는 “세계에 이르는 길”을 모색할 수 없다. 또한 의미부여를 바라는 것으로는 “세계에 이르는 길”을 모색할 수 없다. 의미부여는 인간의 이유(바람)를 넘어선다. 그것은 활동 자체에 부수하는 결과와 내적으로 거리를 유지할 때에만 드러난다. “해방 신학”에는 정적주의라든가 개인의 영혼 구원 같은 것이 결단코 들어 있지 않다. 나는 “해방 신학”이 “관상”의 그러한 의미(정적주의와 개인의 영혼 구원)를 재차 폭로했다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세군도 갈릴레아Segundo Galilea는 이렇게 말한다. “해방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차원과 명상적 차원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상충시킨다.” 칠레 출신의 그 신학자는 “도피적 신비주의”와 “탈출”(참여적 명상가들의 타개打開 신비주의)을 구분한다.(참조. Concilium 10/1974/388-395) 엑카르트의 신비주의를 예언자적 신비주의로 해석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알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상가다. 게다가 그의 문서들은 정치적인 것 같지 않다. 그의 자유로운 사상은 (교회)정치에 도전하지만 동시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관상과 활동의 일치를 믿었고, 자기중심성을 정화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사회 참여의 기초가 됨을 알았다.
엑카르트의 관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면, “마리아와 마르타”를 다룬 그의 설교를 일별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 설교에서 그는 『교훈 담화』에서 피력한 친親세계적 노선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엑카르트가 마리아와 마르타에 대하여 설교한 것은 대단히 확고한 전통에 따른 것이다. 오리게네스 이래로 사람들은 설교의 본문이 된 성서 구절(루카 10,38-42)을 활동적인 삶과 관상 생활의 관계에 적용해왔다. 우리는 그 성서 구절의 풀이를 보고서 그러한 관계의 역사가 중세후기에 이르기까지 신학 내에서 진행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께서 명상에 잠긴 마리아를 두둔하신 것이 결과적으로는 사회 참여보다 도피적 신비주의를 두둔한 셈이 되고 말았음에 틀림없다. 이는 그리스 철학과 성서 구절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홉 가지 근거와 성서 구절들을 나란히 제시하면서 관상 생활의 우위를 주장한다.(참조. S. th. 2-2 q 182 a 1) 그리스 철학과 성서 구절을 일치시키려고 하는 시도는 엑카르트 풍의 중세 고지독일어 작품들 속에서도 발견된다.(참조. Pf 328,27-330,29) 그것은 하나의 전통이지만, 엑카르트는 그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먼저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루카복음서 10,38-42는 관상을 활동보다 우위에 두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본문은 초기 그리스도교 순회설교자들의 시대에 설교 경청을 소홀히 한 채 손님 접대에만 매달리는 주부들에 대한 경고로 이해되었다.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은 크리소스토무스의 글은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활동-관상의 모델을 수단으로 삼은 해석은 그릇된 해석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해석이 오늘날까지도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 루카복음서 10,38-42를 해석할 때마다 유형론적인 전제들(마리아=관상, 마르타=활동)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엑카르트는 역사-비평적인 지식에 의지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신약성서 전체와 일치하는 해석을 추구한다. 바로 거기에서 엑카르트의 대가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예수께서 마리아와 관련하여 하신 말씀을 그녀의 미래에 대한 언질로 이해하고, 예수께서 마르타를 꾸짖으신 대목을 무시함과 동시에 그녀의 사회 참여를 모범적인 사례로 삼기까지 한다. 그것은 이미 뒤틀린 것을 또 한 번 뒤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루카복음서 10,38-42의 역사적 의미를 얻지는 못하지만, 철학적 왜곡에 단호히 맞서 싸우면서 성서적 영성을 재건하고 있는 것 같다.
엑카르트가 예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비방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다. 내가 위와 같은 점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제프 크빈트가 엑카르트의 설교들을 출판할 때 그릇된 견해를 고집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를 “복음의 객관적 의미”에 반대 입장을 취한 사람으로 그린다면, 그것은 그를 회의론자로 그리는 짓이 되고 말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명상적 기질의 마리아를 칭찬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현재의 삶보다는 미래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예수께서 어찌하여 교회통솔의 직임을 “명상적 기질의” 요한에게 맡기시지 않고 “활동적 기질의” 베드로에게 맡기셨는지를 숙고하기까지 하였다. 엑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상세히 설명한 것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엑카르트만 그러한 설명들을 넘어선 것이 아니다. 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이 중세초기까지만 이어졌다고 기술하자, 피셔H. Fischer가 하인리히 폰 겐트Heinrich von Gent와 알베르투스 마뉴스의 주석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 같다고 내게 비판적인 조언을 주었다. 그들과 비교해보면 엑카르트의 길이 조금 더 진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엑카르트의 그림은 그들이 재해석하여 그린 거대한 그림을 상대화시킨다. 하인리히 폰 겐트는 이웃사랑이 “개인의” 하느님사랑보다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엑카르트와 달리, 마르타의 친절한 환대가 그러한 필요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알베르투스 마뉴스의 루카복음서 주석은 훨씬 진보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활동적인 이웃사랑이 이따금씩 필요하다고 말한 반면, 알베르투스 마뉴스는 활동적인 이웃사랑이 늘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알베르투스 마뉴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넘어선다. 알베르투스 마뉴스의 주석에는 엑카르트가 거듭해서 말하는 다음과 같은 논거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하나를 원하는 사람은 잡다한 것에 마음을 쓰게 마련이다. 마르타는 꼭 필요한 한 가지 일을 하는 사람이므로 여하한 꾸지람으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그녀가 마리아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르타는 그런 이유로 주님으로부터 마리아에 관한 위로의 말씀을 얻는다. 이는 엑카르트의 설교에도 등장하는 대목이다. 알베르투스 마뉴스의 주석에서 마리아는 천상의 하느님을 관상하는 상징으로만 머무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뼈대를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 차츰차츰 마르타의 가치를 절상시키고 있다. 이는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성서적으로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관상을 활동보다 우선시하는 그리스적 모형에 맞서 싸우면서 서서히 자립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엑카르트는 마리아의 미래 모습, 곧 사회 참여에 열심인 모습을 봄으로써 알베르투스 마뉴스를 넘어서 종지부를 찍는다. 그는 마리아를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인물로 간주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마르타에 대한 예수의 꾸짖음을 빼거나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르타의 실천을 높이 평가한다는 점에서 알베르투스 마뉴스와 엑카르트는 서로 닮았다. 하지만 마리아유형과 관련하여 엑카르트가 내린 결론은 알베르투스 마뉴스의 결론과 다르다. 엑카르트는 마리아가 초보자나 다름없으며, 그녀가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려면 마르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엑카르트의 설교에서 드러나는 그 같은 사상은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 사상이다.
해석의 역사로 보건대 엑카르트는 얽히고설킨 길, 곧 성서적 근거들(들음과 행함의 일치, 기도와 행동의 일치,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일치)에서 출발하여 관상과 활동을 구분하고 여가와 일을 구분하는 그리스의 정신세계로 뛰어들었다가 서서히 성서로 되돌아가는 길의 끝에 서 있다. 엑카르트는 관상 생활과 활동적인 삶에 대하여 일부러 말하지 않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그나티우스가 말하는 “활동 중 관상”in actione contemplativus, 테야르 드 샤르댕이 말하는 “활동하되 활동에 매이지 않기,” 실천으로 이론을 검증하는 현대적 성향-이 모든 것은 엑카르트가 이미 선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저속한” 활동(자비의 실천)과 “고차적인” 활동(설교자수도회의 설교)의 정교한 구별을 시도하는 가운데 후자가 그리스도를 훨씬 고상하게 한다고 말하지만, 엑카르트는 그러한 일을 아예 할 줄 모른다. (이 장章의 서두에 인용된 구절들, 곧 성 엘리자베스와 연관된 구절들을 참조하라.) 그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서적이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너무 치우쳐 있고, 너무 귀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엑카르트가 해석의 전통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엑카르트가 마르타를 어떻게 서술하는지 살펴보자.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 경험 그리고 세계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제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타 상像에서 엑카르트의 신비주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도피 내지 침잠은 엑카르트의 “신비주의”가 아니다. 엑카르트의 신비주의는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하느님을 바탕으로 삼아 시간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엑카르트는 침잠의 신비주의를 네 가지 방법으로 논박한다. 첫째, 흔히들 하느님 경험의 위로를 구하면서도, 그것을 분명한 사회 참여를 통해 입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신비주의는 활동적인 사랑이 되지 못하고 영혼의 연애 기술에 그치고 만다.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일어나서 주님을 떠나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둘째, 흔히들 세계와 사회의 손길이 더 이상 미치지 못하는 곳, “희비喜悲”가 일지 않는 곳 내지 그런 “상태”(R. Musil)를 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초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엑카르트는 『초탈에 대하여』라는 논고에서 그러한 오해에 맞서 싸운 바 있다. 물론 그의 글들에도 그러한 오해를 야기하는 구절이 많이 들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희비喜悲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가 죽은 듯이 처신해야 한다.”(참조. DW I, Pr. 8, S. 128,2; S. 135,4f.; DW V, Von Abg., S. 412,1ff.) 방금 인용한 글은 세계가 주는 스트레스와, 세계가 마음의 움직임 속에 비쳐 일으키는 스트레스에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를 기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설교는 마음의 아파테이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결같은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존재방식이 바뀌어도 감정의 상태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그리스도인도 고난을 견딜 수 있을 때에만 사회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다.
셋째, 침잠의 신비주의는 감각의 지양止揚을 주장하고, 성가신 환경요인들을 차단하라고 말한다. 엑카르트는 그러한 차단에 맞서 싸운다. 넷째, 엑카르트는 정적주의 자체를 반박한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참된 존재는 참된 활동 속에서만 나타난다고 할 수 있고, 신학적으로 말하면 사회 참여는 은총의 증빙문서라고 할 수 있다. 마르타 상像은 생활경험, (에페 5,16에서 “시간을 잘 쓰십시오.”라고 한 대로) 시간을 적절히 안배하는 능력, “덕”(본질적인 것)을 실천하는 능력을 고루 구비하고 있다. 엑카르트는 경탄할 만한 문장들을 쏟아놓는다. “삶만큼 가장 고귀한 지식을 제공하는 것도 없다.”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은 하느님과 결합하는 것만큼이나 고귀하다.” 그는 “이교도들”(철학자들)의 윤리를 기린다. 왜냐하면 그들의 윤리는 모든 것을 무턱대고 하느님과 연결시키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해서 기피하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 행위는 도덕적 의무의 전제인 까닭에, 우리는 행위를 통하여 배우는 수밖에 없다. 교육적인 관습과 엑카르트의 역동적 존재론을 뒷받침하는 기초는 다음과 같다. “존재는 활동 속에 보금자리를 친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자비 속에서 자신을 내어주신다. 그러니 인간은 자비의 실천을 사양해서는 안 된다.” 엑카르트가 조건 없는 사랑을 변호하는 대목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신비주의에 대해 말할 때, “활동적인 삶”vita activa을 “신비에 환원하여”reductio in mysterium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엑카르트는 그 점을 『교훈 담화』에서보다는 마르타 상像에서 훨씬 입체적이고 훨씬 구체적으로 다룬다. 바로 여기에서 앞서 언급한 “활동-관상” 모델 전통이 감히 따라잡지 못할 엑카르트의 전혀 새로운 면이 드러난다. 그것은 “낡은 것”을 폐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장차 관상의 열매를 활동 속에서 드러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리아가 마르타처럼 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한 단초는 이미 마련되었지만, 현세적인 관상과 천상적인 관상의 결합이 활동적인 삶의 가치를 드높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었다. 엑카르트가 언어적으로 이미 익숙한 연상을 피하기 위해 “활동과 관상”이라는 그리스적 개념 쌍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설명한 것들을 다음과 같이 확정하여 말할 수 있다. 하느님 경험과 세계에 이르는 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이르는 길로서의 하느님 경험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곁다리도 아니고 부수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알맹이 그 자체다. 윤리 신학자가 엑카르트에게서 드러나는 (사회 참여의) 실마리를 현대적으로 뽑아 쓰려면, 마리아와 마르타를 다룬 설교로 곧장 달려가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엑카르트는 행위에 대하여 말하는 자리에서 이교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것과 내용적으로 다른 인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의 인성은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활동은 그리스도처럼 해야 한다. 그리스도처럼 하는 활동은, 엑카르트의 정식을 차용하여 말하면, “차이가 있으면서도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타他신앙형식들에 비해 실제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인성을 원하면서도, 타他신앙형식들이 하는 것처럼 도덕을 종교적으로 실체화하지 않고, 도덕의 뿌리를 인간 활동의 결과에 두지도 않으며, 오히려 엑카르트처럼 활동의 “원천”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한 종교 경험은 “활동적인 삶”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현대의 행위자들과 달리 인간 실천의 난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따라서 요점은 활동 속에서 “생생한 진리와 그것의 유쾌한 현존을 감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엑카르트가 마리아와 마르타에 관한 설교에서 경험의 우위를 설파했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그가 활동적인 삶의 맥락에서 경험의 우위를 설파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002년 판에 붙이는 기록: 몇 가지 잘 알려진 이의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에게 반복적으로 제기됨에 따라 최근에 이 설교와 씨름한 내용이 로리스 슈투르레제와 게오르크 슈테어에 의해 편집되어 『엑카르트 선집』 제2권의 모습으로 슈투트가르트(콜하머)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그 책에서 나는 내용상 마이스터 엑카르트에게 제기되어서는 안 될 이의들을 반박하였다. 내가 보기에, 엑카르트는 인간 활동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사상을 대변하는 것 같다.
1. 하느님은 순수 활동actus purus이시다.
2. 하느님의 활동은 나의 발달(생성) 속에서 계속된다.
3. 인간이 먼저 준비를 갖추었을 때, 하느님은 인간 안에서 “수동적으로” 활동하신다.
4.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준비는 하느님이 속속들이 활동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5. 그런 상태가 될 때에만, 인간의 행위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6. 그러한 열매 맺음은 이웃의 궁핍을 마주해서도 증명된다.
7. 하지만 행위의 열매는 행동하는 인간 속에 있다. 열매는 꽃 속에 있다.
8. 따라서 행위의 외적인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9. 하느님이 속속들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인간이 준비를 갖춤으로써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탄생이 이루어지는데, 행위자가 덕과 행위를 통하여 거듭나는 것도 하느님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은 그러한 덕과 행위 속에서 하느님에게 돌아갈 준비를 한다.
10. 의인이 의로운 것은 그의 근원과 그의 근저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증명되어야 한다. 삶을 활동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식(내지 “경험”)을 제대로 증언하는 길이다.



엑카르트의 “신비주의”는 어떤 신비주의인가?
앞서 살펴본 대로, 엑카르트의 독일어 저작은 전통적으로 14세기 독일 신비주의 내지 라인 신비주의로 분류된다. 엑카르트는 요하네스 타울러, 하인리히 조이제, 로이스부르크의 선배로 간주되었다. 혹자는 13세기 여성신비주의와의 연속선상에서, 특히 그 여성운동에 의해 형성된 언어(독일어)와 관련하여 엑카르트를 조명하기도 한다. 엑카르트는 새로운 추상 명사들을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사변적인 생각을 구어口語로 탁월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엑카르트의 언어적 업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
“신비주의”는 영성 생활 신학을 의미한다.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신적 현존을 “감지하는 것”(“bevinden”=“experiri”)이다. 14세기의 영적 거장들은 세계 친화적이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von Kempen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정적주의의 성향, 순수 개인적 내성의 경향은 후기에 등장한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황홀 체험, 별난 경험, 환시, 환상 등등은 엑카르트에게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엑카르트는 침잠의 신비주의(참조. A. M. Haas, 1974) 내지 도피적 신비주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는 “감지感知”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엑카르트를 신비주의에 배속시킨 것은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 아닌가라는 물음은 던져볼 만하다. 엑카르트의 설교에 제도나 성사聖事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러한 오해의 근본 원인이기는 하지만, 자유분방한 평신도운동들, 베가르트 운동들이 엑카르트를 잘못 이해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가 자신의 사유와 선포의 여러 동기들, 예컨대 역사적 예수를 인식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도 그러한 오해에 한몫했다. 엑카르트의 신학은 주제를 선별해서 다룬다. 그것은 그가 전통과 제도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인정하고 전제한 까닭에 빚어진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남아 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평신도들에게 신학의 권위자가 되면서, 그의 “단편 전체”가 일방적으로 유포되어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종합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오해가 그를 신비주의에 배속시켰는지는 의문이다. 엑카르트가 딛고 서 있는 전통의 기초 위에서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방법을 고려하여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가 대단히 명석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철학적 전제들을 이해하고 원문 훼손의 문제를 배제하면, 그가 사용한 용어도 모호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전설들이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개별적인 발언들로 전해진 극단적인 것들, 기괴한 것들만을 붙잡았다. 그 결과 엑카르트의 신학에서 드러나는 철학적 명료함과, 생활론에서 드러나는 정밀성, 곧 사유의 에토스에 의해 운반된 정밀성은 “신비주의적 불명료함”과 비밀스런 현상이 되고 말았다. 엑카르트가 제시한 비유들도 그것들이 운반하는 사상을 배제한 채 독자적으로 활용되었다.
다음과 같은 현대적 사례가 그러한 과정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20세기 전반기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는 새로운 우주론의 창시자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결과가 빚어진 것은, 사람들이 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한 데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신비화한 데 따른 것이다. 논쟁의 여지없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엑카르트에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다루려는 것은 신비화가 아니라 신비주의다. 다른 개념의 신비주의, 곧 의식 신비주의와 체험 신비주의로부터 출발하면 문제가 새로워진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는 “뮈에인myein”(눈을 감고 침잠하는 것) 내지 “뮈스테스mystes”(밀의집단에 입회하는 것)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니라, “뮈스테리온mysterion”(실체의 비밀)과 관련이 있다. 엑카르트의 신학적 해석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엑카르트의 철학, 신학, 그리고 영성 생활론을 “신비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계시된 비밀-숨어 계시면서 속을 터놓으시는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비밀-에 초점을 맞추고, 신학의 대상영역 전체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이해의 차원을 심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엑카르트가 버금(차극Vorletzten)이 아닌 으뜸(궁극Letzten)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고, 그러한 관심을 “철저하게” 밀고 나아가 우리 현존재의 뿌리를 건드리는 것을 허락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엑카르트의 “신비주의”는 뿌리를 건드리는 “철저함”으로 인해 모든 기초신학과 단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초신학은 본질적으로 신적 자기계시의 비밀을 다루지 않고, 신앙과 사유의 역설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라고 해도 결정적인 지점에서는 “신비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애써왔지만, 나의 답변이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신비주의”가 대단히 상대적이고 부정확한 개념이 될 것이라는 항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 신학에 관하여 말하려면 어느 단계에 도달해야 하는가?
신비주의를 관상과 동일시하는 전통, 신비주의를 교부들과 스콜라 신학자들이 말하는 신적 진리 직관과 동일시하는 전통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관상이란 현세에서 천상을 미리 보는 것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연관시켜 베푼 설교 “귀인에 대하여”가 보여주듯이, 엑카르트는 그러한 전통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전통 속에서 약간의 능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그는 당시에 통용되던 논고 『관상에 대하여』De contemplatione를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성서의 인물인 마리아와 마르타만을 다룬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훨씬 급진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엑카르트가 당시에 “신비주의”의 꼬리표가 붙은 것들, 이를테면 무아경, 관상, 환시 등을 다루지 않은 것은 그가 신비주의를 반대하고 공격했다는 표지가 아닐까? 나는 그 물음을 기회로 삼아서 엑카르트의 설교에 나타나는 “어법 파괴” 현상에 주의를 기울인 적이 있다. 엑카르트는 이미 확정된 어법을 반복적으로 어기고, 개념보다는 핵심어를 붙잡아 점층적으로 풀이하고, 자신의 어법을 일일이 검토하고 반복적으로 깨뜨리며 나아간다.(참조. Christus, 1972, 59-71) 엑카르트는 사고 과정 속에서 자신의 관점과 입장에 따라 존재, 사유, 사랑이라는 단어와 씨름하고, 심지어 “하느님”이라는 호칭과도 씨름한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사유 방식, 생활 방식, 사랑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을 막는다. 엑카르트의 방법을 일컬어 “구조기능주의Strukturfunktionalismus”라고 한 것은 타당한 것 같다.(H. Rombach, 1965) 또한 엑카르트는 경건(고행)의 “방법들”도 끊임없이 비판한다. 그는 확정적이라고 하는 모든 고정 관념과 개념을 부수거나 녹이려고 하였다. 그는 사유와 경험에 “신비주의”라는 울타리를 둘러친 적이 없다.
바로 이 부분에서 더 나아가면, 신학이 철학으로 바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엑카르트를 무신론적으로 해석하기도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참조. H. Ley, 1966) 또한 엑카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생활론은 근본적이고 철저한 인간학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신비주의적”인가?(참조. S. Ueda, 1965,2)
엑카르트가 신비주의를 반대했다는 시각은 선명하기는 하지만 명백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엑카르트는 종교 경험을 단순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정화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법을 무너뜨리려는 동기에서이긴 하지만 자신이 부정했던 것을 받아들여 “변증법적으로” 지양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신비주의를 반대하려는 동기에서이긴 하지만 “신비주의”를 받아들인다. 그것은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다. 무언가와 싸우는 사람은 그 무언가의 영향도 받게 마련이다. 반대는 일종의 관심이자 영향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엑카르트 특유의 “신비주의”가 따로 있는 것인가? 그런 “신비주의”가 있다면, 그 특징은 앞서 부분적으로 답변한 의미에서 신적 자기계시의 신비를 지향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엑카르트는 그러한 객관적 근거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이 그러한 사건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긴다. 주관적인 것에 대한 관심, 곧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엑카르트의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없었을 것이다. 엑카르트는 주관적 경험을 관념으로 고착시키는 것에 맞서 싸우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정화하여” 갈무리하는 데 있다. 방법 없이 하느님을 찾을 때에만 다양한 형태의 주관적인 길이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누구나 방법 없이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사항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엑카르트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보기를 인용할 수 있다. “어느 나라의 부유한 왕이 아리따운 딸과 함께 살다가, 한 가난한 사람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 가난한 집의 온 식구도 결과적으로 신분이 높아지고 고귀해질 것입니다. 한 대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의 신분이 높아지고 고귀해졌다. 실로 우리는 기뻐 뛸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은 실로 옳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떠받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관적인 참여가 없으면 객관적인 근거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나에게 부유한 형이 하나 있다고 한들, 내가 가난하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에게 지혜로운 형이 하나 있다고 한들, 내가 바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DW I, Pr. 5b, S. 85,6-86,7) “하느님이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것보다는 각각의 처녀에게서 혹은 각각의 선한 영혼에게서 영적으로 태어나시는 것이 훨씬 고귀한 일입니다.”(DW I, Pr. 22, S. 376,3-5)
엑카르트는 인간에게 효과적으로 베풀어진 은혜의 “사실Daβ”에도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그것을 “어떻게Wie” 경험할 것이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경험 방법을 특별한 직관이나 특별한 생활 방식에 고정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는 성직자들을 위해서도 말하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글을 쓴다.
엑카르트의 신학에는 “신비 경험”의 차원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차원은 변증법적으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열거하는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지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엑카르트의 “신비주의”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엑카르트처럼 신비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엑카르트의 “신비주의”는 신비의 객관적 현존일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끊임없이 정화하여 갈무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는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하느님을 긍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엑카르트에게 그것은 주관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개인적인 놀람 속에서 말하거나 글을 쓰기 때문이다. 전설에서도 그러하지만 당시의 수녀원 안에서도 엑카르트는 학자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 사람으로 비쳐진다. 설교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에서는 그의 분위기를 덮고 있는 베일이 조금 벗겨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나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으로 인해 눈물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어지는 글에서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는 감정의 경험을 억누르는 것에 대하여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설교 “귀인에 대하여”에서 그 이유를 대단히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는 그 설교에서 단순히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과 하느님을 감지하고 보고 사랑하는 것을 구분한다. 그는 그러한 “감지”를 일컬어 “귀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하나 됨의 표지일 수는 있지만 하나 됨 자체는 아니다. 세상의 모든 신비가는 무언가를 보고 느낀 뒤에만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엑카르트는 단순히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을 인식과 감각에 비쳐진 것보다 더 중시한다. 자신을 하느님을 보는 사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 되어 활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을 보고 사랑한다는 의식이 없으면 행복이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의식이 행복의 토대인 것은 아니다.(DW V, VeM, S. 116,21-117,10)
위의 사실로부터 우리는 엑카르트가 활동을 하나 됨의 표지로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 곧 하느님 자신이 활동하시도록 투명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로마서 9장 3절에서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사회 참여, 엑카르트가 종종 인용하는 것처럼, 동포를 위해서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까지 감수하겠다고 하는 자세야말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특징이다. 하지만 하느님과 하나 되어 활동하고 있음이 반사되지 않으면, 그것을 알릴 방법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자각)은 필요하다. 자신이 실천을 통해 정화되었음을 증명하는 한에서만.

 



 

[관련기사]

박운양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38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2개)
0 / 최대 22400바이트 (한글 11200자)
- 금지어 사용시 댓글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 [댓글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도배성, 광고성, 허위성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김일형 (121.188.185.253)
2010-09-17 17:57:08
가고 싶었는데, 못 갔는데, 좋은 시간이 되었군요. 영성가들을 통해서 우리가 영성 있는 삶을 삶을 살아가는데, 큰 힘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예수님을 따라서 본을 보이고, 쉽게 사람에게 다가오시고 알려주시고, 전해주시는 그런 영성의 대가들을 만나고, 그런 영성의 사람들이 되면 좋겠군요. 준비하시느라 애들 많이 쓰셨습니다!!!
리플달기
0 0
서동은 (110.14.131.175)
2010-09-17 10:24:02
와우,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학교 다닐 때 뵙고, 오랜 만에 김순현 목사님을 사진으로 뵙네요^^. 저도 요즘에 에크하르트와 류영모의 요한복음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음이 있었다니, 저도 알았다면 참석했을텐데 말입니다.
리플달기
0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