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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岐路)에서...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15 주(20100905)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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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9월 01일 (수) 15:47:53
최종편집 : 2010년 09월 01일 (수) 16:45:22 [조회수 :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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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 15 주(20100905)
성서일과/ 시 1; 신 30:15-20; 몬 1:1-21; 눅 14:25-33
본문/ 신명기 30:15-20
기로(岐路)에서...

          (신 30:15-20)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유언(遺言)과 유언(流言)

죽음은 이별 곧 헤어짐입니다. 살아 가까이 하던 모든 것들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별은 어떠한 종류의 것이라도 아프고 슬픈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이별-떼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서도 이별의 아픔을 맛보지만 다시 만날 기약이 있다면 능히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죽음 이외의 모든 이별은 설혹 기약이 없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다시 만날 소망이 남아 있지만 죽음은 소망없는 이별이기에 모든 이별 중에 가장 아프고 또 슬픈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단장의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遺言은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남기는 말입니다.
몸은 죽음으로 영영히 떠나거니와 산 자의 곁에 남겨 두고 간 말이라는 뜻입니다.
죽음 앞에서 한 말이기에 다른 어떤 말보다도 진실함이 있는 말입니다.
한 번 함으로 다시는 바뀔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갖는 독특성이 유언을 하는 자나 유언을 듣는 자가 다같이 유별난 진실함을 갖게 만드는 것임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면서 요셉의 유골을 수습하였습니다.
엊그제 죽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400여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한가한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길가는 중에 먹을 빵에 누룩을 넣을 경황도 없을 만큼 긴박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장사한지 400년이 넘은 무덤을 파서 유골을 수습하는 일을 했습니다.
유언-요셉이 남긴 말 때문이었습니다.
(창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류언(流言)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유언비어라고 할 때의 그 유언입니다.
흘러다니는 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遺言이 流言이 되면 안 됩니다.
말은 남아 있어야지 흘러 가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도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왕상 2:1-4) [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처음에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지켰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리고 여호와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유언은 세월이 흐르면서 함께 흘러가 버렸습니다. 류언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둘로 갈라졌고 마침내 멸망케 되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모세의 유언입니다.
그토록 소망하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모세는 이스라엘과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에게도 참으로 큰 아픔이요 슬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비통한 기운이 온 이스라엘에 감도는 가운데 모세는 말을 남겼습니다.
모세가 없어도 모세가 있는 것처럼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말을 모세가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 진실하게 곁에 둔다면 걱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류언(流言)이 되면 이스라엘에게는 큰 화가 닥치게 됩니다.
그 때의 아픔과 슬픔은 모세와 이별하는 오늘의 아픔과 슬픔에 비교할 수 없는 큰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말씀이 남겨져졌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셔도 예수님이 곁에 계신 것처럼 살라고 남겨 주신 말씀입니다.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는 말씀이 아니라 심비(心碑)에 새겨져 남는 말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一路와 岐路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두 길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에는 오로지 한 길(一路)이었습니다.
광야는 길이라고 할 만한 곳이 따로 없는 곳입니다.
길과 길 아닌 곳의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 전체가 곧 길이 되기도 하고, 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 곧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광야가 길이 된 것입니다.
한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길이 하나면 어느 길로 가야할 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참고 견디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한 길을 가면서 몇 가지 죄악을 범했습니다.
첫째는, 편치 못해서 불평하고, 원망한 죄입니다.
둘째는, 믿음이 부족해 두려워한 죄입니다.
셋째는, 금붙이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는 그저 알지 못하여 범한 죄였습니다.
오랜 노예생할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연고로 지은 죄였습니다.
잠깐씩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놓쳤기 때문에 범한 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저지른 죄로 인하여 그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광야에서 온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거기서 오직 한 길 여호와만 바라고 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간혹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왔으나 말이 그렇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었으니 부질없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눈앞에 있는 가나안에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많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언제나 두 갈래 길-기로(岐路)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항상 기로에서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는 일로매진(一路邁進), 오직 한 길-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힘써 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야 할 길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이 이스라엘을 인도하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유혹입니다.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이런 길에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죄입니다.
알지 못하고 짓는 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죄입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도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반드시 망한다고 합니다.
잠시 고생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길이 좀 더 길어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망하는 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상

기로에 선다는 것은 선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생명과 복은 바른 선택에 대해 주어지는 상이고, 사망과 저주는 그릇된 선택에 대한 벌입니다.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는 불을 보듯 빤하지만 막상 기로에서 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살았던 묵적(墨翟)이라는 사람은 ‘나는 기로에 서면 울고 돌아섰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울며 오던 길로 다시 갈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망하는 것 보다 차라리 이렇게 하는 게 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에도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을 살면서 더럽혀진 영혼을 치유하거나, 어렵고 힘든 문제에 부딪혀 선택의 기로에 서거나 할 때에는 요단강을 건너 광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보낸 것도 그런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세상은 없고 하나님과 나만 있는 곳에 있으면 어디로 가야할 지가 분명해 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길이 없어서가 아니요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빈들입니다.
아무 것도 없어서 볼 것이 없는 땅입니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땅입니다.
풍성해서 볼 것이 많은 땅입니다.
볼 게 없으면 탈도 없습니다.
볼 게 많으면 탈도 많습니다.
볼 게 없으면 마음을 빼앗길 일이 없지만 볼게 많으면 마음이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를 기억하십시요.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어제도 거기 그렇게 서있었는데 보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사단의 유혹을 받아 쳐다보니 달랐습니다.
다른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보이는 것이 풍성한 그 자체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그것에 마음까지 빼앗기면 그것이 곧 미혹케 되는 것입니다.
미혹이란 유혹을 받아서 길을 찾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세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보였던 곳이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모든 것이 흘러넘치는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있었던 것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변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있는 것들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얻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기 쉬웠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사야가 말합니다.
          (사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광야의 하나님이 가나안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잊기가 쉽습니다.
이미 있는 것은 절로 그렇게 있었던 것이라고 여기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하나님이 가나안의 하나님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의 대표적인 우상인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바알은 곡물 ·과실 ·가축 등의 결실 및 성장을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점차로 눈앞에 보이는 풍요로운 결실의 원천이 바알이라는 생각에 미혹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예레미야의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오늘날 하나님이 교회의 하나님에 머물고 세상의 하나님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행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만의 하나님이고, 남의 하나님은 아니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따로 있고, 세상에서 얻을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롬 3: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의 하나님이 곧 이방인의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당신을 드러내셨던 하나님이 곧 가나안에서 함께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교회에서 예배하는 중에 만나는 하나님이 곧 세상 만물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곧 있는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전에 내가 바라던 것을 공급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우상입니다.
나로 곤고케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나로 부요케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내가 의뢰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사도가 말했습니다.
          (빌 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항심(恒心)과 기심(機心)

오늘의 성서일과 중 시 1 편은 복있는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시 1:3-4)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복이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시인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말하며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대조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람에 나는 겨입니다.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내리면 더 이상 옮겨 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모세는 가나안에 뿌리를 내리지 말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마음에 다른 생각이 깃드는 것을 기심(機心)이라고 합니다.
기심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길 때 나타나는 법입니다.
정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겨와 같은 마음입니다.

항상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항심(恒心)이라고 합니다.
형편과 사정이 어떠하든 변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뿌리를 여호와 하나님께 깊게 내려서 복된 인생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蛇足

옛말에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늘 같은 마음이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항산(恒産)이란 일정한 물질입니다.
그 기준은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물질적 기반을 의미합니다.
항산(恒産)의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정도,
둘째, 처자식과 함께 살 수 있는 정도.
셋째, 풍년이 들었을 때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흉년이 들어도 굶어 죽지 않는 정도의 물질적 기초를 말합니다..
이런 물질적인 기초만 유지된다면 민중들은 항심(恒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이 항산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이 항산의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항심을 잃게 됩니다.
실제로 넘쳐서가 아니라 마음에 넘치는 것을 기대하는 기심이 있었기에 그렇게 됩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허락하신 모든 것이 항산입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의 욕심이 그들 자신에게는 넘치게 하고, 없는 자들에게는 모자라게 해서 항산의 상태를 깨뜨립니다.
마침내 함께 망하는 결과를 빗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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