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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바치면 복 받는다는 목사님들세속적 복에 명운을 건 한국교회
신성남  |  canavillage@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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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8월 25일 (수) 09:27:22
최종편집 : 2016년 03월 06일 (일) 16:59:01 [조회수 : 8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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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패한 종교의 공통적이며 상습적인 거짓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돈을 바치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물론 기독교 역사의 그늘 속에서도 가장 오래된 거짓말 중의 하나입니다. 심지어 중세 교회 사제들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돈을 바치면, 이미 죽어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다른 가족들의 영혼도 즉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고 기만을 하였습니다.  

사실 '마음을 다해 자발적으로' 하는 헌금은 매우 소중하며, 건강한 교회 운영을 위해서 꼭 필요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울러 적은 사례비에 연연하지 않고, 검소하게 사시며 묵묵히 교회를 섬기시는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도 이 나라 구석구석에 절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틈만 나면 성경을 왜곡하며 돈을 바치라고 신도들을 압박하는 극히 세속적인 목사님들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제자 된 도리를 망각하고 한 여름 상한 고등어보다도 더 심하게 변질된 이분들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속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돈을 거두고 있습니다. 

 

맘몬을 따르는 목사들

 

 

   
 

이런 목사님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성경을 객관적이며 종합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과 실제 처신이 서로 크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목사님들이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하며 신도들에게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헌금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왜 재물을 땅에다 쌓고 있는지요. 전혀 공감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의 설교가 옳다면, 스스로 과소유한 재물을 털어서 교회에 바치거나 가난한 이들을 돕거나 하여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이 아닌가요. 왜 자신들은 은행이나 부동산에 돈을 쌓아 두고 고가의 주택과 고급 승용차를 즐기며, 교인들의 평균 수준보다도 더 사치스럽게 사시는지 속 시원하게 해명을 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의 지적처럼, 입으로 하는 설교와 삶으로 보여 주는 설교가 너무 딴판입니다.

심지어는 "십일조 안 하면 구원 못 받는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인사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아예 논할 가치마저 못 느껴서 생략하고자 합니다. 다만 현재 세계에서 십일조를 실제 제대로 하고 있는 신도는, 가톨릭을 포함하여 아무리 크게 보아도 전체 기독교인의 5%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유일한 '십일조 왕국'인 한국교회와 미국의 극히 일부 교단 교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매우 사이비한 주장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제일 복 받는 믿음이 무언지 아는가. 바로 헌금이다. 뭐니 뭐니 해도 헌금이다"라는 말도 하더군요. 성경 어디에 이런 선동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지 필자는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여기서 '제일'이라는 단어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도 이런 진부한 속수가 복을 좋아하는 순진한 신도들에게는 의외로 잘 통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반찬 값을 절약하거나 아이들 학원비를 줄여서 어렵게 바친 교인들의 가슴 어린 헌금이, 거룩한 예배를 통하여 담임목사님 자녀의 해외 유학비나 고급 승용차 관리비 등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이적도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 인위적인 헌금 유도를 통하여 신도들이 실제로 복 받을 일은 별로 없겠지만, 대신에 상당수 목사님이 돈 복을 크게 받으시고 지나치게 잘 먹고 잘살게 된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매우 궁금한 점은 그렇게 '헌금을 잘 바쳐서' 제일 좋은 복을 많이 받으셨다면,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아예 나머지 재산도 다 바쳐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복을 몇 배로 더 확실하게 받으실 것이지, 왜 남은 십 분의 구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꼭 쥐고 계시냐 하는 것입니다. 계산이 단순한 필자에게는 그 점이 언제나 큰 의문입니다. 

반면에 감리교의 스승 웨슬리 목사님은 수입의 십 분의 구까지도 선교와 구제에 사용했고, 마지막에는 거의 빈손으로 생을 마치셨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목사님들이 꼭 그렇게까지 따라 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요즘 가식적인 귀족 목사님들의 분수를 모르는 처신과는 하도 수준 차이가 나서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돈이나 받고 복을 주시는 분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이 너무 부족하셔서 할 수 없이 미천한 인생들과 돈으로 거래하실까요.

 돈을 바쳐야 사업이 잘되고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저속한 사상은 '맘몬의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성황당 미신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를 따라 나누고 돕고 고난받는 '제자 된 삶'이 아니라, 편함과 안일만을 따르는 '이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타락한 솔로몬 왕이 천 명의 처첩들을 거느리고 이방 신을 좇으며 호의호식한 것을 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삶이 중요합니다. 돈이나 재물 그 자체는 축복의 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돈을 많이 바치고도 죽임을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도 이런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바리새인들보다 십일조와 기타 율법들을 더 잘 지킨 무리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복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큰 화를 입어 멸망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는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참혹한 오명을 얻었을 뿐입니다.

 

세속적 복에 명운을 건 한국교회

 

한국 보수 교단의 대표적 개혁 신학자이신 박윤선 목사님은 '교회는 십 분의 일이라는 숫자의 법령적 제재를 받지 않으며, 헌금의 수량 문제는 신자들 개인이 각기 정할 일이다'라고 하시며, 일찍이 '자발적'인 헌금의 중요성에 대하여 명확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또한 국제신대 이승구 교수님도 '십일조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강요하거나 표준을 세워 지령할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십일조와 연보의 참된 정신'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저 '복'이라는 사탕으로 유혹하며 돈만 거두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정신을 따라 나누고 섬기고 절제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모으고 쌓고 누리고 흥청대는 것이 복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계 교회사 어디에 헌금 종류가 무려 85가지나 되는 이상한 교회가 있었던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복' 비즈니스 덕분에 영세한 미자립 교회들은 급격히 위축되고, 중대형 교회들로 갈수록 돈과 사람이 넘칩니다. 이와 함께 목사들의 교만과 탐욕도 태산을 찌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몸소 져야 할 십자가는 단지 장식으로 만들고, 그저 '사람의 일'로 북적거리며 분주할 뿐입니다.  

거룩함과 순수함으로 위장한 대부분의 교회 프로그램들이나 행사들 역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갈급함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그저 돈과 사람과 세력을 모으기 위한 삼류 이벤트로 전락하고 있으며, 겉으로 요란한 눈가림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아마 지구촌 어디에서도 한국교회보다 더 행사를 좋아하고 여기저기에 떠벌이는 교회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남들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약하고, 실패하고, 가난하고, 낙심하고 그리고 병에 지친 사람들은 점차 구석으로 밀려나 조용히 소외를 당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복을 많이 받았다는 착각 속에서 잘나고, 부유하고, 그리고 힘 있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중요한 직분들도 이들이 대부분 다 차지합니다. 

그런 이유로 중대형 교회로 갈수록 가난한 장로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오늘날 세례 요한이 다시 와서 저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도, 아마 그 허름한 '약대 털' 옷 때문에 평생 서리집사 이상의 직분은 받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들은 그 초라한 옷이야말로 세례 요한에게 매우 소중한 큰 복이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세인들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가난해서 지지리 고생하거나, 몸이 아파서 고통받는 삶은 모두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란 일반적으로 물질적이며 현세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서 세속적인 복이 무조건 필요가 없다거나 나쁘다고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을 추구하는 목적과 우선순위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본질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복이고, 애통하는 것이 복이고, 온유한 것이 복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이고, 마음이 청결한 것이 복이고, 화평케 하는 것이 복이고,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를 따른다는 신자들에게 이것보다도 더욱 크고 귀한 '다른 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어디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제일 좋은 복'이라는 저속한 논리가 끼어들 틈이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복채에 눈먼 무당처럼 더 이상 '복'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들이 전심으로 전하여야 할 복음은 '돈을 바쳐서, 복을 받아라'가 아니고, '마음을 다해서, 서로 사랑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길은 결코 푼돈으로 산 복권이 대박 난 것처럼 편리하고 안락한 길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걸을 수 없는 '무거운 길'임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 신자들은 이미 '신령한 복'을 넘치게 받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추가로 무슨 대단한 복이 더 필요해서, 허구한 날 '세속적인 복'을 노래하며 허탄한 일에 인생을 지나치게 소모해야 하는지요. 잘 먹던지 못 먹던지 또는 잘살든지 못살든지, 그에 관계없이 신자들은 이미 '충분히' 복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어떤 경우든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분위기를 조장하여 인위적으로 압박하거나 강요하는 헌금은 비성경적이며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바쳐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자 된 삶 그 자체가 바로 복입니다. 이제 옛 사람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면, 돈과 허세로 어두워진 세상과는 그래도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사랑으로 모여야지, 돈으로 모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돈이라는 음란한 우상을 내려놓고, '돈이 없어도 다닐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 운영을 위해서는 약간의 헌금 강요가 불가피하다거나, 또는 교회 재정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라고 구차한 변명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헌금 강요나 다른 불의한 수단으로 돈을 걷어야만 운영할 수 있는 교회라면, 오히려 간판을 내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꼭 목회가 소명이라면, 차라리 자비량 사역을 각오하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이 크거나 가진 자들만이 나서서 설치는 쇼 무대가 되기보다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가난한 형제들도 편안하게 동참하고 나눌 수 있는 '쉴만한 물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 주며 아무런 선입관과 차별이 없이,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와 사랑을 마음껏 공유하며 누릴 수 있는 '복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들의 모임이지, 의인들만을 모으는 수도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더 이상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을 당하고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찌 돈이나 재물이나 세속적인 출세 따위가 감히 우리가 간직한 '하늘의 소망'과 '신령한 복'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것'을 복이라 하며 삶을 허비할 수 있을까요.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겔 13:7)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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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121.73.204.206)
2010-08-26 23:15:46
마음을 다해 연보를 하여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돕는 것은 성숙한 신자로서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견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이를 일률적으로 '수치화'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며, 또한 이렇게 모은 헌금으로 일부 목사님들이 치부를 하는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 가장 개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유감스럽게도 '목사님'들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소수의 존경할만한 목사님들은 예외입니다. 사실 헌금을 직설적으로 강요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문제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방법으로 그 수법이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 의무화, 헌금채 활용, 헌금자 명단 공개, '기복적'인 헌금 설교, 은근한 헌금 경쟁 유도, 그리고 임직시 십일조 헌금자 우대 등 일일히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많은 신도들은 교회의 부패가 너무 심각해서 예수교가 아니라 '목사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유독 목사님들만 아니다 괜찮다고 하시니 정말 웃지 못할 현실입니다.

철밥통 속에 머리를 묻은 이분들은 소통마저 거부하고 늘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큰 길을 막고 지나는 사람들께 한번 물어보십시요. '교회'나 '목사'라는 용어만 들어도 진저리치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이제 더 이상 보여 줄 무슨 '거룩'과 '순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요. 참된 주의 종들과 양들은 오늘도 가슴이 터져 울고 있건만, 거짓 선지자들과 이리들은 늘 평안하다고 웨칩니다.

아래 '선비'님, 저는 십일조를 안하는 95%의 신도들을 미화하거나 반대로 5%의 신도들을 비하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 중에 누가 참된 믿음이 있는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각종 탈세와 불법으로 번 돈으로 복받기 위해 십일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지구촌 여러 나라들에서는 십일조보다도 더 큰 자발적 헌금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십일조나 헌금으로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대안'이 있는 비판을 하라고 지적하셨는데, 정말 아직도 대안을 모르시는지요. 대안이 복잡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어려울 뿐이지요. '신자'들이 깨어나는 것이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의 감리교단과 제자교회 등을 한번 보십시요. '교인들의 맹신화'와 '목사들의 교권화'는 한국교회 부패의 쌍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배신자가 있었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은 자들입니다. 아마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는 이런 일들이 계속될 것입니다.

처음에 답변 댓글을 올렸다가 지웠습니다. 제글에 대한 비판은 독자님들의 몫으로 남겨 드리고, 구태여 불필요한 변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댓글도 유용한 소통의 수단이라는 생각에 다시 이렇게 올립니다. 많이 부족하고 미흡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깊히 감사드립니다. 특히 댓글로 따끔한 조언과 따뜻한 격려를 주신 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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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119.205.116.50)
2010-08-28 16:25:42
목사로서의 생각입니다. 목사의 교권화는 한국교회 소수의 정말 소수 교회의 일이고요. 목사가 성도가 무서워서 헌금설교 못하고, 성도들의 의회주의에 의하여 담임목사가 결정이되고, 담임목사가 되기위해서는 성도들의 면접을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현재의 한국교회입니다.

헌금으로 목사가 무엇을 하는줄 아시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교회의 조직에 대하여 너무 모르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헌금을 쓰면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있지를 못합니다. 어떤 교회가 헌금으로 자신의 치부한다고 합니까?? 그런 교회를 보셨다면 정말로 문제있는 교회를 보신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신성남님의 생각이 잘못되신 것입니다. 교회의 재정(헌금)은 당회나 구역회를 통하여 지출안이 만들어져서 집행이되고 특별한 지출이 되기위해서는 기획위원회의 합의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헌금을 목사마음대로 쓴다는 생각은 믿음생활하는 사람의 상식이하의 말씀입니다.
헌금생활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평가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목사들을 너무 모르셔요...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는데 십일조는 안하는 사람이 더 큰 자발적헌금을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궁금하고, 혹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기위한 모습은 아닐까? 개인도 할 수 있으나 교회를 통한 나눔이 더 갚지지 않을까요??
귀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리플은 감정을 건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는 좋은 장인 것 같습니다. 그저 제 생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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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
익명 (58.142.26.142)
2011-08-27 19:08:43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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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수민아빠 (121.139.234.29)
2010-09-02 14:30:28
죄송한 말씀인데 정말 목사님들께서 헌금을 정상적인 자금계획을 통해 한푼도 헛되이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선비님께서 목사시라면 정말 그렇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담임목사의 입김없이 교회 기획재정부의 재정 예산안을 통해서만 집행되고 있는 것입니까? 저희 교회만해도 그렇게 집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설교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헌금에 대한 헌신에 대한 권면과 가르침은 저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십일조에 대한 중요성도 설교해야 하구요.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게 문제지요. 저희교회도 십일조에 대해 헌신에 대해 년초에 목사님께서 설교하십니다. 전 찬성하고 은혜롭습니다. 하지만 예배당을 짓고 교육관을 짓는데 우리 장로들,권사들중에 충분히 더 헌신해야 하실분들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꾸지람을 설교중에 하십니다. 이건 강요가 아닌가요? 비단 제가 섬기는 교회의 설교자문제뿐이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그렇지요. 전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는줄 알았습니다. 선비님께서 목사시라면 현실을 직시해 보십시요, 지금 누가 변해야 한국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 신성남님이나 저처럼 교인으로서 교회에 변하라는 요구를 하는 사람은 교회안에 극소수입니다. 모두들 목사가 이야기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생각하지요. 이걸 무기로 사용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으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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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119.205.116.50)
2010-09-11 10:55:18
교회 제정을 저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하여 쓴 일은 없습니다.
교인가운데 왜 목사님 마음대로 교회 제정을 사용하십니까?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마음대로라는 말음 목사의 개인적인 신상을 위하여 쓰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목회를 하다보면 계획이외에 다르게 지출되어야 할 부분이 나옵니다. 이것을 제직회의에 안건을 올리고 회의를 합니다. 갑작스런 일들이 계획되고 그만큼의 교회재정이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다른 헌신으로 이 부분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목사 개인의 편안함고 만족을 위해서 쓰지는 않습니다. 만약 수민아빠가 다니시는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재정을 목사님의 마음대로 쓰신다면 그 교회는 문제있는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가 많으니 떠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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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아빠 (121.139.234.29)
2010-09-17 17:47:42
선비님 같은 목사들이 많아야 하지요.

목사는 교회공동체가 해야하는 올바른곳에 뜻을 두고 계획하고 예산을 집행해야 하지요.

우리교회의 예를 들면 연예인초청도 많이 하고 교인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이름난 사람들을 교회에 대거 불러 행사를 하지요. 매년 많은 행사들... 그러나 청년들이 낙도선교를 하거나 해외선교를 떠날 때는 교호예산이 전혀 집행되지 않습니다. 담당교사및 부장들을 세운 이유가 그런거 하라고 세워놓았다나요? 몇해전엔 친구집사가 청년간사를 할 때 작도선교를 위해 자금계획을 세우고 여러방법으로 충당하고 50여만원이 부족해 담임목사에게 찾아가 보고를 했는데 일언지하에 위와 같은 말로 거절당하고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예인초청이나 바자회엔 몇억씩 들이면서 선교자금중 정말 채워지지 않은 꼭 필요한 조금의 예산을 요청했는데 거절이라뇨...
구실은 목사 개인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는 개인목적아닙니까?
우리담임목사는 유명한사람입니다. 그렇게 유명해 졌습니다...
교인도 많아지고 예배당도 겁나 이쁘게 지었습이다.. 헌당하지 않은채....
왜 그럴까요?

이건 한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재정부는 담임목사에게 결재를 받고 예산을 집행합니다.
이건 담임목사가 재정집행을 맘대로 하는 것 아닌가요?
재직 재정부는 독립되고 교회공동체의 감사체계 안에서 예산안을 만들고
예산을 집행해야 합니다. 담임목사도 독립된 재직 재정부의 승인하에
예산을 집행해야 하고요.. 그러나 한국교회 중 몇이나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네요. 교회가 크든 작든 몇명의 목사가 이렇게 하겠느냐는 것이죠.
정말 실현 가능한 일일까라는 의구심이 드는군요.

아 왜 이교회를 떠나지 않느냐고요? 하나님께서 이곳에 나를 보내신 까닭이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다면 전 다른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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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121.73.202.218)
2010-08-29 08:25:38
한국교회에는 목사의 교권화는 물론, 장로나 제직들의 교권화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둘 다 잘못이지요. 교권화란 주어진 책임과 권한 이상의 힘을 남용하는 것으로, 저는 소수의 교회에서만 이런 일이 있다고 동의하기는 힘들군요.

정상적인 교회라면 조직상 목사가 헌금을 직접 손대기는 사실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저런 명분으로 꼿감 빼어 먹듯이 돈을 취할 수 있습니다. 우선 헌금이 늘면 목사의 사례비를 늘릴 수 있는 것은 기본입니다.

또한 자신의 교회 부흥회에서 설교하고 강사비로 수백만원씩 챙기는 분도 있지요. 또한 몇몇 대형교회에서 이미 드러난 것처럼, 더 심할 경우는 거액의 교회재정을 목사가 임으로 사용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금 횡령이지요.

아울러 외부 강사를 상호 교차 청빙해서, 서로 상대 교회의 돈을 빼어 먹기도 합니다. 이분들의 수법은 워낙 고도화하여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지요. 물론 일부의 이야기로 전체를 매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너무 부패가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일부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수십억씩이나 돈을 모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선비님처럼 정상적인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의 경우는 상상도 하지 못하실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제 가족들과 친구들 선후배들 등 제 주변에는 많은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목사님들을 너무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자발적 헌금을 십일조보다 더 많이 하는 경우는, 주로 지구촌 외국 교회 신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유산의 상당 부분을 교회에 바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소에도 필요한 경우 큰돈을 헌금하기도 하구요.

교회를 통한 나눔은 물론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제가 잘 아는 한 친구는 평생 십일조 이상을 무기명 헌금으로 해 오고 있습니다. 필요시 건축헌금도 하구요. 이런 것이 자발적인 헌금의 한 예가 되지 않을까요.

답변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비님의 귀한 댓글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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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61.82.31.190)
2010-09-20 18:50:01
많은 논란이 있지만..
제 생각은 한국교회 중-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맹,광신도들에 의한 목사의 우상화로 그들 목사들이 교회를 독단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서 십일조의 허구가 비롯된다고 봅니다. 위의 신성남 님도 지적하셨지만 기감교회 40년 신앙생활중 교회재정을 농단하는 목사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사람입니다.우선 목사들이 교리장정 알기를 지나가는 개 보듯 한다는 말이지요.안지킵니다.제 마음대로 장로를 안세우고 견제받기를 죽어도 싫어하지요.자기에게 쓴소리하는 사람은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장로 안세웁니다.자기 마음대로 교리와 장정의 법조문들을 무시하고 개교회 나름대로 변경,시행하지요.교회설립 16년된 이 교회에서는 지금 시무장로가 한명이랍니다.300명의 교인에...견제받지 않는 권력..이거 부패의 지름길이죠?또 교회의 본질인 선교,구제 여기에는 눈꼽만큼 예산 배정하고 교회건물과 각종 외형장식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하죠.제가 300명 정도의 지방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기뢱위원,감사등을 해 보았는데 1년에 4-5억 정도의 헌금이 모이는 이 교회에서 목사에게 들어가는 경비(사례비,상여금,자녀교육비,도서비,목회비등등 각종명목에 전기세,수도세등 사택관리비...심지어는차량구입비,유류대, 쌀은 교회에서 거저 가져다 먹지요)가 1억에 가깝다면 믿으시겠습니까?세금 한 푼 안내는데 돈이 안모일래야 안 모일수가 없습니다.무일푼일지라도 일단 10년 이상 목회해서 돈이 모이면 그다음엔 아무것도 두려운것이 없습니다.문제가 제기되어 분쟁이 나더라도 버티고 버티다 끝내 버틸수 없으면 헌신짝처럼 교회를 버리고 떠나죠. ...참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맹신과 광신이 들끓고 있는 한국개신교회의 참람한 모습입니다.제가 글한편 인용하겠습니다.이렇게만 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건강한 교회재정운영방법

교회가 예수님의 의도했던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병들고 부패한 교회재정운영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할 교회의 머리 자리를 노리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바로 경제적 부로 표현되는 맘몬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맘몬의 힘을 과소평가해선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필적해서 사람들의 충성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맘몬임을 인정하셨습니다(마 6: 24). 맘몬은 끊임없이 교회를 공략해서 진정한 머리되신 예수님의 뜻을 좇게 하기 보단 맘몬축적과 소비 논리에 충성할 것을 유혹합니다.
호주머니의 주인이 진짜 주인입니다. 아무리 입술로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주장해도 교회의 호주머니를 맘몬이 주장하고 있다면 그 교회의 주인은 맘몬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뜻에 따라 교회재정을 건강하게 운영하고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하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맘몬의 힘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재정운영은 병들고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 건강회복을 위해선 재정운영과 관련된 잘못된 관행들을 뿌리 뽑고, 건강한 교회재정운영을 위한 원칙을 확립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1. 잘못된 관행들
1) 수입에 관련된 관행들
교회재정 역시 수입과 지출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수입과 관련된 잘못된 관행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수입이 건강해야 지출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부정직한 방법으로 번 돈이나 땀흘리지 않고 벌어들인 돈은 대체적으로 낭비되거나 잘못 쓰여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교회 역시 수입이 깨끗하고 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수입확보를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잘못된 관행을 수용하고 묵인해 왔습니다.
첫째, 성경을 왜곡하여 헌금을 강요해왔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겐 헌금의 의미를 잘 깨달아 헌금생활을 정성껏 해야 할 본분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헌금을 강요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헌금강요의 좋은 예를 오덕호 목사의 『교회주인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책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부흥회 기간 중에 그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 교단의 선교대회를 위해 헌금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부흥강사의 설교가 끝나고 광고시간에 담임목사가 이렇게 광고했다. ‘이번 선교대회에 우리 교회가 작정한 헌금 액수는 5백만 원입니다. 내일 밤 집회 때 이를 위해 헌금하겠습니다. 정성껏 준비하셨다가 헌금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강사가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더니 담임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돼. 내가 할 테니 봐!’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자, 이런 귀한 사업을 혼자 할 사람 없어? 혼자 5백만 원 헌금할 사람 일어나?’ 그러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교인들을 둘러보고 한 번 꾸짖은 강사는 다시 말했다. ‘그럼 두 사람이 나눠서 하지. 2백5십만 원 헌금할 사람’. 하지만 아직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라고 다시 꾸짖은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 십일조 감당할 사람! 5십만 원 할 사람이 일어나 봐. 이건 많을 거야’. 과연 두어 사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나고 얼마 후에 열 사람이 다 찼다.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강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 여전도사 뭘 해, 빨리 이 사람들 이름 적어!’
강요되었기 했지만 결국 그 돈이 좋은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되었으니 좋은 일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도 잘 된 일이고 당사자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돈 자체라기보다는 돈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 자세와 신앙입니다.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고후 8:12; 9:7). 헌금에 대해 잘 가르쳐도 사람에겐 허영심에서 우러나오는 헌금을 하게되는 죄악된 경향성이 있습니다. 헌금강요는 이러한 본능적 허영심을 더욱 극적으로 자극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켜 결국 외식적인 헌금을 하게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부정하고 거짓된 헌금을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을 잘 거두어 드리는 부흥사를 추켜세워가며 성도들로부터 헌금을 강요하고 걷힌 헌금 중에 사례비라 하여 부흥사와 담임목사가 몇 대 몇의 비율로 나누어 챙기는 관행을 말끔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둘째, 십일조를 왜곡해서 축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선 안 됩니다. 십일조와 관련해서 가장 애용되는 말씀이 말라기 3:8-10절입니다:
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9 너희 온 백성이 나의 것을 훔치니, 너희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 10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본문을 그대로 교회 성도들에게 적용하여 십일조를 안하는 사람은 하나님 것을 도적질 한 것이라고 윽박지릅니다. 십일조를 개인주의적인 경제적 축복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제시합니다. 아주 성경적인 적용인 것 같지만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많은 폐해를 끼쳐왔습니다. 이런 협박과 유혹으로 교회에 많은 헌금이 거쳐 물질적으론 좋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교회와 성도들의 심장은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손익계산으로 대신 채우게 되었습니다.
우선 십일조와 관련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입니다. 말라기가 속해있는 구약시대엔 성전예배가 중심이었고 레위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십일조는 경제수단인 토지가 없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할 수 없는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신 12:5-19; 민 18:21-32). 또 이와는 별도로 3년마다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 그리고 대표적인 경제적 약자들인 외국인,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신은 예수님을 통해서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성전제사의 종결과 함께 십일조라고 하는 제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전제사가 있기 전부터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했고(창 14:20)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점(창 28:22)을 들어서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과 관련 없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단회적 행동 자체를 들어 십일조는 신약시대 성도들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데엔 신학적으로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이들을 본받아 감사의 표시로 십일조를 계속 드리고 싶다면 말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기서와 똑 같은 맥락에서 십일조를 안하는 것을 도둑질이라고 꾸짖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열정 그리고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을 강화시켜나갈 수 있는 창조적이고 헌신적인 방법을 새롭게 찾아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 기만을 책망하기 위해 강한 어휘를 쓴 것이 사실입니다. 교육효과를 노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헌금 드리는 자세와 관련해서 성경전체의 균형 잡힌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도둑놈이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헌금을 드리는 마음의 전부라면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과 아울러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는 성숙한 자세를 갖도록 성도들을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대가로 축복을 약속하신 것도 공동체 전체를 향한 것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십일조를 제대로 드린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한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신앙을 회복하면 이스라엘 전체를 축복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골고루 풍성한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맥락을 싹 빼어버리면 말라기서 말씀은 자본주의적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풍조에 편승하게 만드는 잘못된 관행을 철저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셋째, 교회직분의 매직행위를 통한 재정확충입니다. 안수집사, 권사, 장로에 임직하면서 일정한 헌금을 하게 하는 관행입니다. 교회규모에 따라 그 액수는 일정하지 않습니다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실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모두 임직하게 되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겠지만 정직한 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인천 임마누엘교회의 아무개 목사는 2002년 6월말 장로 후보자들에게 장로자격 기준 14가지를 명시한 문건을 나눠주면서 ‘2000만원에서 3,000만원의 헌금을 낼 수 있느냐'는 조건을 끼어 넣어 물의를 일으킨 바 있습니다.
이런 관행으로 말미암아 교회직분을 마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매우 미워하시는 바입니다(행 8:14-24).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베드로와 요한이 빌립을 통해 전도 받은 이들에게 안수를 해주자 성령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능력이 몹시 부러웠던 시몬은 돈을 드려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부탁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라고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반대로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교회 직분을 살 수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넷째,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 강조와 차입경영입니다. 교회건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사역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배전용 공간이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사역을 염두에 두고 교회건물을 건축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흐름을 보면 교회건물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건물을 짓는가를 마치 신앙의 척도요 목회성공의 비결이요 기준인 양 과장합니다. 하여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건축을 위해 거두어 드립니다. 건축헌금하고 축복 받은 사례들을 강조함으로써 그릇된 동기부여를 합니다.
여기엔 교회건물이 구약적 의미의 성전이라는 신학적 오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에서조차도 하나님은 너무 광대하셔서 특정 건물에 국한 될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왕상 8:27; 사 66:1). 하나님이 교회건물에 특별히 임한다는 생각은 구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허물면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요 2:19-21). 즉 예수님은 구약성전이 자신의 몸으로 대체될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성전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지게 됨으로 성취되었습니다(히 9-10장). 이렇게 잘못된 헌금을 하다보면 막상 교회 본연의 사명실현을 위한 헌금을 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를 병들게 만들고 그 위상을 추락시키는 주범 중에 하나입니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건축에 당장 필요한 액수가 채워지기 어렵기 때문에 상당수의 교회들이 은행에서 거액의 자금을 차입하게 됩니다. 결국 교회는 무거운 부채의 짐을 지게 되기 때문에 설교나 목회방향이 하루 빨리 돈을 갚을 수 있도록 조정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성경이 왜곡되기도 하고 기독교복음의 전체적 균형이 깨지기도 합니다. 그나마 헌금이 잘 걷혀서 은행 빚을 정한 기간 내에 갚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교회는 갈등과 분쟁에 휘말려 깨지기도 합니다.
다섯째, 헌금의 질보다 헌금의 양을 더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 부자들이 드리는 거액의 헌금보다 더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2:41-44). 그 두 렙돈은 그 과부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삶이 담겨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액이 필요한 한국교회는 헌금의 질 보단 양을 강조합니다. 무조건 액수가 높으면 좋고 칭찬을 더 많이 받습니다. 헌금의 출처에 대하여도 묻지 않습니다. 김홍도 목사는 ‘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인가’라는 설교에서 모교회의 한 장로가 IMF 위기가 터져 사업이 부도나기 직전에 건축헌금을 드리고 보자는 심정으로 2억을 드렸더니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는 예를 듭니다. 이는 엄격히 말하면 채권자에게 돌아가야 할 돈을 의도적으로 건축헌금으로 드려버린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회가 성도들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진지하게 권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2) 지출에 관련된 관행들
첫째, 불투명한 지출이 많습니다. 2년 전 소망교회 간접세습 문제를 다룰 때 였습니다. 아들을 위한 분당소망교회를 건축하는 데 소망교회재정에서 80억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공식적으로 결정되었을 땐 이미 그 돈이 지출된 다음이었다는 점입니다. 담임목사와 재정담당 장로 등 최 측근의 결정으로 실행된 것입니다. 기독교신문기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소망교회 당회 서기 장로는 개혁연대 측에 소망교회는 예산 지출항목의 약 40%까지 예비비로 잡혀있다고 시인했습니다. 이는 교회 재정의 수입과 지출이란 것이 워낙 불확실한 것이라 불가피한 것이라고 설명 아닌 설명을 하였습니다. 예비비는 결국 담임목사와 그 측근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대형교회 목사들 중엔 이렇게 교회재정의 상당 부분을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는 것이 목회성공의 기준인양 내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재정이 불투명하게 이루어질 때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3년에 있었던 김홍도 목사의 31억 원에 달하는 교회재정관련 횡령 및 배임 사건입니다. 김홍도 목사는 측근들과 결탁하여 방송사 로비자금, 업무상 배임 및 위증 혐의 관련 변호사 비용, 감독회장 선거비용, 신문광고 및 변호사 선임비용, 불륜의혹 관련 합의금, 교회개척을 위한 토지매입 그리고 수련관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교회재정에서 지출한 혐의로 결국 실형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이와 관련해서 자세히 알 리가 없습니다. 김홍도 목사 측은 이런 항목들이 비로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교인전체 회의에서 통과된 예산안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합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 교계 지도자들로 구성된 한국기독교교회수호대책위원회는 재판장에게 보내는 탄원서에서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습니다: ‘감독회장이나 총회장 선거 비용을 목사 개인이 부담하는 경우는 전혀 없고 교회가 전적으로 비용 부담을 책임지는 것이 관행인데 이러한 교회의 관행을 범죄행위로 보는 것은 교회의 현실을 잘못 알고 있는 무지의 소치이며 종교탄압의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경악을 금치 못할 일입니다.
둘째, 담임목사 사례비 항목이 정직하지 않습니다. 담임목사를 위해 지출되는 재정은 여기저기로 분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수 생활비로 지급되는 목회자 사례비 외에 추가되는 항목이 많습니다. 각종 공과세금, 자동차에 관련된 일체의 비용, 주택에 관한 비용, 자녀교육비, 도서비 등을 비롯한 목회연구비, 접대비 등을 포함하는 목회활동비 등이 그 예입니다. 담임목사에게 지출되는 재정의 총액의 과다는 둘째로 하더라도 성도들에게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 않는 것은 상당히 부정직한 행위입니다.
셋째, 목회자간의 사례비 차이가 심각합니다. 일단 같은 교회의 교역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심각합니다. 이를 감추기 위해 상당수의 교회들이 담임목사와 교육전도사를 다 합해서 사례비의 총액만 보여줍니다. 이는 정직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또한 교회규모나 지역에 따라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가 지나치게 차이가 많이 납니다. 최근 예장 통합 교단에선 미자립교회 목회자 사례비 평준화를 위해 노회가 일괄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진일보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가난한 목회자들만 평준화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목회자들 사이에 부당한 위화감을 조장할 수도 있습니다. 꼭 물량적으로 큰 교회를 목회해야만 탁월한 영성과 능력을 갖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에 따라 사례비가 지나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성경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 의하면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이 똑 같은 칭찬을 받은 것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마 25:14-30). 물론 목회규모에 따라 활동비에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재정지출이 조정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왜 생활수준에서 그렇게 극명한 차이가 나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교회가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함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 교회지출 항목간 비율이 교회 본연의 목적에서 빗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교회의 본질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본질에 의하면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예배, 교육, 증거, 교제, 봉사, 사회참여 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재정은 교회가 이런 기능을 잘 감당하도록 지출되어야 마땅합니다. 물론 교회가 처한 상황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런 기본적인 기능 보단 다른 데에 지나치게 많은 재정이 지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재정과 관련된 자료를 구하기가 너무 어렵고 자료를 구한다고 해도 예산․결산 항목에 있어서 교회간에 너무나 큰 편차가 있어 본격적이고 철저한 분석이 아직은 나와 있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 동안에 시도되었던 분석결과에 대하여 노치준 목사가 복음과 상황 98년 6월호에 잘 정리하였습니다. 참고로 인용합니다:
먼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1979년의 한국 교회 재정지출의 항목별 비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즉 교역자 생활비 38.45%, 교육비 16.76%, 선교비 15.50%, 상회비 5.25%, 교회관리비 24.04%이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 교회 100년 종합조사연구 (동연구원, 1982)>
다음으로 필자가 1982년과 1992년 2회에 걸쳐 조사한 재정지출 항목별 비율은 다음과 같다 (앞은 1982년 자료이고 괄호 안은 1992년 자료이다). 교역자 급여 32.2%(27.28%), 예배비 5.3%(4.02%), 교육비 7.9%(7.41%), 선교비 4.8%(5.34%), 상회비 2.2%(2.75%), 관리비 16.2%(12.70%), 운영비 10.4%(13.33%), 건축비 10.3%(13.16%), 사회봉사비 2.3%(3.88%)였다. (노치준, “한국 교회 재정구조의 사회학적 연구” 기독교사상 1983년 10, 11월호, 1984년 1월호 / 노치준, “한국 교회 재정구조 연구” 기독교사상 1994년 9,10,11월호)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원에서 1989년 한국 교회 재정지출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비율이 나온다. 교역자생활비 20.65%, 예배 및 설교 10.20%, 교육 및 문화 11.28%, 선교비 15.06%, 건축 및 시설 16.61%, 교회 유지비 17.13%였다.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원, 한국 교회 자원봉사사업 조사연구(성광문화사, 1990)>
1994년도 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교회들의 재정지출 항목별 비율을 1995년도 총회보고서에 근거하여 필자가 계산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사례비 23.08%, 예배비 4.80%, 교육비 7.61%, 선교비 8.70%, 상회비 2.67%, 건축비 4.53%, 운영관리비 14.06%, 토지 2.15%, 비품 0.48%, 차량 0.65%로 나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제80회 총회보고서(동총회, 1995)>
가장 최근의 연구는 기독경영연구원에서 1997년에 조사한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재정지출 비율은 인건비 35.3%, 재산관리비 15.7%, 선교비 15.2%, 교육비 8.7%, 일반관리비 8.2%, 봉사비 6.5%, 예배비 5.0%, 기타 5.4%이다. <국민일보 1998년 4월17일>
노치준 목사는 위의 통계들을 종합하면서 선교비는 실질적으로 10%이하이고 교회내부의 나눔이 아닌 교회 밖의 세계와 나눔을 가능케 하는 사회봉사비(혹은 구제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불과 5%에도 못 미치는 저조한 상태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가장 많은 지출은 인건비와 교회운영을 위한 관리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경영연구원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예배, 교육, 선교 및 봉사 등 고유목적비용과 이를 지원하는 지원비용과의 비율이 1:3 정도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관행들을 뿌리 뽑고 건강한 교회재정운영 원칙을 확립해야 합니다.
2. 건강한 교회재정운영 원칙
1) 건강한 교회회계제도의 확립
우선 교회의 민주적 정관에 건강한 교회회계제도를 삽입해야 합니다. 개혁연대가 제시하는 모범정관에선 예산의 부문별 균형을 강조하고 지출은 예산의 범위 내에서 공동의회 의장의 동의를 얻어 재정부장이 시행하도록 했습니다. 단 예산 항목 변경 및 교회 총예산 기준 20% 미만의 초과지출은 공동의회 의장의 동의를 얻어 재정부장이 시행하며 20%이상의 증액이 요청될 때에는 재정부가 이를 편성하고 사역자회의와 임시공동의회의 의결을 거쳐 최종 확정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교회재정이 담임목사와 몇몇 측근들의 담합에 의해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또한 재정운영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매월 재정부는 사역자회의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교회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했습니다. 내부감사와 외부감사를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교회재산은 교인 총유의 것으로서 재산에 관한 결정권은 공동의회에 있으며 등기는 원칙적으로 교회명의로 해야 하나 행정상의 편의 혹은 법적 요건에 따라 공동의회 의장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 목회자 사례비에 관한 원칙 정립
둘째, 목회자 사례비에 대한 원칙을 잘 세워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황호찬 교수는 합리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우선 흩어 놓았던 항목을 한 군데로 모아서 투명하고 정직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목회자에게 지급되는 모든 항목이 장부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사회통념상 인정되는 생활비 산정이 필요합니다. 직책, 지역, 교회규모, 가족의 특수상황 등이 합리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받는 사례비 이외의 부수입에 대한 지침이 필요합니다. 목회활동에 필요한 비용은 교회경비로 처리하고 생활비는 목회자 인건비 형식으로 지급되어야 합니다. 목회활동비에 해당하는 것으론 도서비, 차량유지비, 통신비, 접대비, 교육비, 퇴직금 등을 들 수 있고, 생활비로는 주택비, 식품비, 의료 및 보험료, 자녀 교육비, 문화비, 의류비, 통신비, 차량유지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 사이엔 직책에 관련된 활동비나 근무년수에 따른 호봉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그 외의 차이는 최대한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3) 투명성에 대한 의식개혁
투명성에 대한 의식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는 목적만 좋으면 방법은 좀 틀려도 좋다는 잘못된 생각이 만연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투명하지 않은 곳에 어둠의 세력이 틈타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이 들어오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행 5:1-6). 그들은 어쨌든 헌금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재정에 도움을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유를 판 돈 일부를 전부인양 속임으로 말미암아 결국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거짓이 교회 안에 틈타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국교회는 불투명한 재정운영 속에서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거짓의 위험성을 아직도 잘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깊이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헌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허영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원하는 마음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4) 사회봉사비의 신학적 중요성 확립
마지막으로 교회재정지출의 건강성 특히 사회봉사를 위한 지출의 신학적 중요성을 절감해야 합니다. 사회봉사를 위한 교회재정지출이 단순히 좋은 일이라는 것에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회봉사를 위한 건강한 재정지출이 바로 교회의 정통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즉 교회와 사회의 약자를 위해 아낌없이 재정을 지출하는 구체적인 삶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의 정통성을 가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사정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십니다(사 1:1-17).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식에서 소나 나귀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방인으로 취급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교리나 종교적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제사와 각종 성회 그리고 기도에 관한 교리들을 철저히 수호하였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제사, 성회와 기도 자체를 싫어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종교적 위선과 거짓이었습니다. 즉 겉으로는 정통성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리와 형식에 있어서는 그럴듯해 보이는 데 정말 중요한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악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공의를 저버렸습니다. 구약에서 공의의 핵심적 내용은 약한 자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즉 힘이 없어 억압받는 자, 부모가 없어 돌볼 자가 없는 고아들과 남편이 없어 지켜 줄자가 없는 과부들을 잘 돌보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이고 법적인 차원과 직접적인 물질적 도움의 차원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중대한 사명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축복을 얻은 것은 억압적인 애굽과는 상반된 공의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깊은 뜻은 이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시사된 바가 있었습니다(창 18:17-19).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결국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잃는 민족적 비극을 겪게되고 맙니다.
예레미야 역시 그 멸망을 예견하면서 그 이유가 공의를 저버리고 사회적 약자를 정치적으로 물질적으로 돌아보지 않은데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렘 22:3).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와 본질상 같다는 것입니다(렘 22:16). 아무리 입술과 형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은 다른 신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최종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정치․경제적으로 보살피는데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렘 22:16). 이와 같이 성경은 정통교리(orthodoxy)와 정통실천(orthopraxis)이 한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분리되는 순간 양면이 분리된 동전처럼 그 정체성을 상실하고 쓸모 없는 존재가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실천의 내용은 바로 가난하고 의지할 때 없는 약한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들을 끌어안아 존엄성을 회복시켜주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의 길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마 19:16-22). 예수님께서는 그가 익히 아는 십계명 중 사람에 대한 의무들인 5-9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명령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모든 것을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계명들에 대한 그의 피상적 이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핵심을 찌르시면서 영생을 누리려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만 예수님의 요청을 감당할 수 없어 근심 빛을 띤 체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말씀하심으로서 그 부자 청년이 진정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행위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그 진정성과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면 이러한 삶이 동반되어야만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명령이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기계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그들을 위해 물질을 기꺼이 나누어 줄 헌신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은 신앙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신앙적인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다양한 객관적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해도 결국 쓰레기처럼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양과 염소 비유가 이 점을 너무나 극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마 25:31-46). 사회적 약자를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삶의 여부에 따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진정성과 정통성이 결정되며 영생과 영벌이 갈라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해방신학자들이나 민중신학자들의 해석처럼 행위구원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암시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교훈의 전체적 그림 속에서 이 본문을 볼 때 그 점은 더욱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을 맺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없다면 어떠한 신앙적 고백이나 종교적 행위도 백해무익함을 가르치셨습니다(마 7:21-23). 이렇게 신앙과 교회의 정통성에 대한 교훈에 있어서 예수님은 구약의 가르침을 완성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도 같은 교훈을 배웁니다. 오순절 성령경험과 베드로의 능력 있는 복음 설교를 통해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됨으로 예루살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행 2:1-47). 그 공동체 안에는 국외에서 거주하던 유대인, 유대교에 귀의한 이방인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통성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들의 물질생활입니다. 그들은 서로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아낌없이 자신들의 모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공동체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자신의 재물에 대해 배타적인 사적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행 4:32).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주목하면서 해방신학자 미란다(José P. Miranda)는 ‘누가에 의하면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이다’라고 까지 선언하였습니다. 즉 기독교를 선택하는 것은 자유에 속하지만 일단 기독교를 선택한 이상에는 자신의 배타적 소유권을 포기함으로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무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미란다는 사유재산권의 자발적 포기를 마르크스의 제도적 공산주의와 등치하고 그 포기를 역사적 상황과 무관한 절대적인 기독교인의 보편적 사명으로 주장함으로서 단선적이고 기계적인 해석학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정통성이 있는 교회라고 하면서 주변에 가난한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심하거나 가난을 해소하기 위한 나눔의 삶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진정한 성령충만과 정통복음주의를 증명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설교, 방언, 뜨거운 예배, 착실한 성경공부, 열정적인 기도, 가득 찬 다양한 교회 모임들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재정지출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구색 맞추는 수준에 머물거나 입술로만 떠든다면 그러한 교회의 신앙적 정통성은 의심되어 마땅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두 렙돈의 연보를 칭찬한 것에 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것은 재정지출의 절대적인 액수가 아니라 전체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입니다. 예컨대 대형교회의 사회봉사비가 절대액수에서 그럴듯하다해도 그 비중이 여전히 5%를 밑돈다면 교회의 정통성과 관련해서 다른 작은 교회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근거가 전혀 돼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정통성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물질적 헌신도의 진정성에 의해서 판가름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여된 모든 종교행위는 아무리 그럴듯하고 열정적이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 역시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정성껏 돕던 예루살렘 교회의 전통은 바울을 통해서 이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깊이 인정하고 동역자로서의 연대를 굳건히 하면서 한 가지를 부탁하였습니다(갈 2:9-10). 그것은 바로 가난한 자들을 돌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부탁을 받으면서 자신도 원래부터 그 일을 힘써 행해 왔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예루살렘을 방문한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방교회에서 마련한 헌금을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행 24:17; 롬 15:25-27).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구제헌금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 진 예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고후 8:9). 아울러 시편 말씀을 인용하면서 가난한 사람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일이 바로 하나님 정의의 핵심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고후 9:9; 시 112:9).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신앙의 주변적인 표현이 아니라 핵심적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아름다운 교회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은행 빚을 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다양한 대내적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서도 물질을 풍성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하여는 인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우선순위의 왜곡은 교회의 정통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적적인 부흥을 경험했다는 자만감에 젖어서 뼈아픈 자성의 길을 외면한다면 타이타닉호의 비참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정통성을 새롭게 하심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로 새롭게 발돋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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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인 (122.45.134.7)
2010-09-16 23:41:34
저는 오지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입니다. 이시골에는 조부모의 자녀들이나 편부모의 자녀들이 많습니다. 이 아이들 자비로 가르치기도 하고 도와주다보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뭐 목회자니까 혹은 교회돈이 다 목사돈이니까 당연한듯이 봅니다.
교회헌금 목사돈이 아닙니다. 다 재정부가 따로있고, 예산 편성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전기세, 유지비가 펑크나면 사례비는 받지도 못합니다. 사실 제 경험으로는 제일먼저 감축하는곳이 사례비입니다. 외제차 꿈도 안꿈니다. 저는 봉고차 연료 걱정하고 있습니다. 연료대도 안내시는 분들이 자손들한테 차가있어도 교회봉고차는 또 열심히 타고 다니싶니다. 뭐 돈 아끼시고 좋지요! 사실 그게 사람이니까요. 교회만 나와줘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것에 대다수 교회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상위 5% 내외의 목회자들을 시기한적은 없습니다. 뭐 필요하니까 쓰시겠지요.
그리고, 목회자가 가장 싫어하는 설교 죄송하지만, 회개하라는 설교, 전도하라는 설교, 십일조 하라는 설교, 부담갑니다. 십일조하라는 설교 했다가는 교회 안나오기 십상입니다.
한번 여쭤볼께요^^, 십일조하라고 하면 합니까?! 보통믿음 없으면 안합니다. 하지만 52주 예배중에 최소한 한주는 설교합니다.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부담되도 해야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물질을 죄악시 하지 않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었을때 욕심이 잉태하여 죄와 사망에 이를 뿐이죠.
물론 큰교회 목사님들 작은 교회는 축에도 안들고, 정치적에다, 자기 교회에 유명인이라도 있으면 자신이 유명인이 된듯 하시죠, 어차피 익명성이나 부담가지 않기위해 큰교회로 더많이 몰리지 않나요. 외제차 그분들이 직접삿을리도 만무하고 돈많은 사람이 사주면 그교인 체면봐서라도 타고 다녀야죠!
하지만 저희 같은 대부분의 교회는 어렵게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5% 내외의 교회만 교회로 보이시는 듯 일반화에 오류에 빠져있습니다. 현실을 보시고, 성경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전 부러워 안합니다. 사실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저 빚진자의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그저 갈길 갈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이들을 외도하는 듯한 글을 볼때는 사람인지라 저두 속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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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아빠 (121.139.234.29)
2010-09-17 18:00:50
목사님!
신성남님의 글이나 찬성하는 많은 댓글자들이 목사님 같은 분을 향해 토해내는 절규가 아닙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목회의 열정이나 구령의 열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들을 향해 말씀드리는게 아닙니다. 이상하게 흘러가는 교회의 흐름중에 특히 중대형교회 및 작아도 이상한 교회운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그런 목회자들을 향해 쏟아내는 그런 진심어린 외침입니다.

ㅋㅋ 이건 제생각입니다. 글쓴이의 관점과 좀 다를 수 있겠네요.....ㅎㅎㅎ

시골에서 목회하시는 제 친구아버님도 목사님 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을 뵐 때마다 인격적인 포스에 자연히 고개가 숙여지는 그런 분입니다.

목사는 그런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가 가끔 도를 넘게 되는군요.
적어도 인격적으로 기존은 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상처를 주는것을 볼때마다 욱하거든요....
목사님의 목회가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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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민들레 (상정) (220.81.151.201)
2010-09-09 00:52:43
큰 교회들 .개척을 해서 커진 교회 빼고는 목사님들이야 바지 사장들이 많은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장로교회엔 당회장이 목사님이지만 장로님들의 마음에 안들면 사직해야 하는것이 비일비재하다
재정이야 제직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공고를 하니 마음되로 쓰는것은 모르시는 말씀인것 같고
어떤 편법을 써서 교묘히 가져가는것은 있을 수 있겠다 어차피 먹고사는 일이니 스님이나 신부님이나 목사님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일터이고 일가를 이루었다면 거기에 딸린 식구들의 의.식.주 문제가 있으니 메일것이 당연하여
자기가 하고싶은 말씀들을 온전히 외칠 수 없고 교인들이 듣기좋은 말들만 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의 종교를 따라가는 우를 범하지 않겠습니까 예로 부터 우리 민족은 종교성이 강하기 때문에
복 받는 일이라면 물 불을 가리지 않으니까 목회자들께서 무당들의 굿 판으로 변질되어야만 자신도 편안하게 대접 받으며
신분을 보장 받을 수 있으니 그렇게 흘러가는것 같네요. 저가 아는 많은 수의 목회자들께서는 밥먹을 걱정 자식들의
양육및 교육 걱정을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는것을 말씀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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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제자 (121.73.203.20)
2010-09-09 21:32:58
충분히 공감이 가는 지적이십니다. 문제는 밥먹을 걱정을 극복하지 못하신 분들이 쉽게 목회에 나선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지요.

구체적인 생계 대책이 없이 목회에 나선 후, 왜 우리에게 밥을 안주느냐고 항변하는 모양이 된 셈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목회만 하면 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이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정말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목회를 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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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119.205.116.50)
2010-09-11 10:44:14
말씀이 과하십니다. 자녀 양육비를 걱정하며, 가정의 경제를 걱정하며, 하루하루 삶을 고민하는 목사, 작은 교회 목사는 개나 소라는 말입니까?
자신이 쓴 글을 보고 깊이 묵상하시고 회개하셔야 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큰 곳에도 작은 곳에서도, 삶의 고민의 자리에서도 임하십니다. 섭리의 다양성에대하여 개나 소나라는 말은 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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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제자 (121.73.203.232)
2010-09-11 14:34:47
그렇게 들으셨습니까. 제가 언제 작은 교회 목사님들을 개나 소나 라고 지칭했는지요.

제 댓글에서 '개나 소나'라는 뜻은 무조건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크기에 관계없이 '사리사욕'을 가지고 '앞으로' 목회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기존 목회자들 중에도 이런 분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큰 곳에도 작은 곳에서도, 삶의 고민의 자리에서도 임하십니다.'는 말씀은 전적으로 공감하며,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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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고 (125.190.205.25)
2010-09-03 22:25:52
이제는 목사들도 바울사도처럼(천막제조업)자영업내지는 알바를 해야 할 시대가 오지않았나 여겨집니다. 양떼 소떼 젖을 먹으면서 목회하는 시대는 지나간것 같군요. 왜요, 이놈의 돈 때문에 신실한 목사님도 싸잡아 먹사로 오해를 받으니 말입니다. 조금이나마 신실한 주의 종이라는 평을 얻을 길이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렵니다. 그렇게해서 목사들의 진실성이 만천하에 알려졌으면 하는 맘입니다.보십시오들...큰 교회목사님들은 막말해도 그러려니하고, 아에 작은 목사님들은 말도 못하고 꿍꿍 앓고 있어도 누가 알라주기라도 합니까? 제발 우리목사님들 옛날 그옛날 가난하지만,만인이 응원 해 주던 그 시대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욕하시렵니까? 저는말입니다. 십일조봉투없읍니다.그저 허연 봉투만 꽂아놨답니다. 그것도 없으면 너무 교회다움이 희석 될까봐서요...혹자는 헌금설교도 좀 해야한다는둥,십일조설교도 해야한다는둥 뭐 말이 많습니다만,,이 부족하고 무능한 종은 돈에 관한 설교 절제합니다. 제가 목회하는 동안은 아마 그렇게 할겁니다. 좋은 충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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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119.205.116.50)
2010-09-11 10:49:07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그 자체입니다.
내 생각이 앞서면 내 신앙이 됩니다.
목사이기에 하나님의 마음, 구원은 믿음에 있으나 축복은 행한대로 아니겠습니까?
심은 곳에 거두는 삶이 있지 않겠습니다.
땀흘리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선한자의 헌신을 우리는 기억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는 인도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예물이 대하여 설교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고 하면 하는 것이 설교가 아닐까요?
물질의 풍요로움은 분명히 온전한 예물을 드릴때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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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제자 (121.73.203.232)
2010-09-11 14:41:20
'물질의 풍요로움이 분명히 온전한 예물을 드릴 때 온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기복신앙이 아닌가요.

보다 중요한 것은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을 정말 원한다면,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면 될 것이구요.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성경의 법칙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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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124.58.137.73)
2010-09-10 14:49:02
말씀대로 목회 하시려 애쓰시니 하나님께서 높혀 주실것입니다.

복받으려 내는 억만금보다 값진 헌금이 될것입니다.

곧 천국은 목사님 것이지요.

차믿음이라면 목사님같은 목회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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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제자 (121.73.200.237)
2010-09-04 20:52:33
목사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비록 힘드시겠지만,
옳은 길을 가고 계신 듯 합니다.
격려를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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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121.73.204.206)
2010-08-26 23:15:46
마음을 다해 연보를 하여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돕는 것은 성숙한 신자로서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견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이를 일률적으로 '수치화'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며, 또한 이렇게 모은 헌금으로 일부 목사님들이 치부를 하는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 가장 개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유감스럽게도 '목사님'들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소수의 존경할만한 목사님들은 예외입니다. 사실 헌금을 직설적으로 강요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문제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방법으로 그 수법이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 의무화, 헌금채 활용, 헌금자 명단 공개, '기복적'인 헌금 설교, 은근한 헌금 경쟁 유도, 그리고 임직시 십일조 헌금자 우대 등 일일히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많은 신도들은 교회의 부패가 너무 심각해서 예수교가 아니라 '목사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유독 목사님들만 아니다 괜찮다고 하시니 정말 웃지 못할 현실입니다.

철밥통 속에 머리를 묻은 이분들은 소통마저 거부하고 늘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큰 길을 막고 지나는 사람들께 한번 물어보십시요. '교회'나 '목사'라는 용어만 들어도 진저리치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이제 더 이상 보여 줄 무슨 '거룩'과 '순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요. 참된 주의 종들과 양들은 오늘도 가슴이 터져 울고 있건만, 거짓 선지자들과 이리들은 늘 평안하다고 웨칩니다.

아래 '선비'님, 저는 십일조를 안하는 95%의 신도들을 미화하거나 반대로 5%의 신도들을 비하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 중에 누가 참된 믿음이 있는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각종 탈세와 불법으로 번 돈으로 복받기 위해 십일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지구촌 여러 나라들에서는 십일조보다도 더 큰 자발적 헌금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십일조나 헌금으로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대안'이 있는 비판을 하라고 지적하셨는데, 정말 아직도 대안을 모르시는지요. 대안이 복잡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어려울 뿐이지요. '신자'들이 깨어나는 것이 대안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의 감리교단과 제자교회 등을 한번 보십시요. '교인들의 맹신화'와 '목사들의 교권화'는 한국교회 부패의 쌍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도 배신자가 있었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은 자들입니다. 아마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는 이런 일들이 계속될 것입니다.

처음에 답변 댓글을 올렸다가 지웠습니다. 제글에 대한 비판은 독자님들의 몫으로 남겨 드리고, 구태여 불필요한 변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댓글도 유용한 소통의 수단이라는 생각에 다시 이렇게 올립니다. 많이 부족하고 미흡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깊히 감사드립니다. 특히 댓글로 따끔한 조언과 따뜻한 격려를 주신 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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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119.205.116.50)
2010-08-28 16:25:42
목사로서의 생각입니다. 목사의 교권화는 한국교회 소수의 정말 소수 교회의 일이고요. 목사가 성도가 무서워서 헌금설교 못하고, 성도들의 의회주의에 의하여 담임목사가 결정이되고, 담임목사가 되기위해서는 성도들의 면접을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현재의 한국교회입니다.

헌금으로 목사가 무엇을 하는줄 아시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교회의 조직에 대하여 너무 모르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헌금을 쓰면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있지를 못합니다. 어떤 교회가 헌금으로 자신의 치부한다고 합니까?? 그런 교회를 보셨다면 정말로 문제있는 교회를 보신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신성남님의 생각이 잘못되신 것입니다. 교회의 재정(헌금)은 당회나 구역회를 통하여 지출안이 만들어져서 집행이되고 특별한 지출이 되기위해서는 기획위원회의 합의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헌금을 목사마음대로 쓴다는 생각은 믿음생활하는 사람의 상식이하의 말씀입니다.
헌금생활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평가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목사들을 너무 모르셔요...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는데 십일조는 안하는 사람이 더 큰 자발적헌금을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궁금하고, 혹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기위한 모습은 아닐까? 개인도 할 수 있으나 교회를 통한 나눔이 더 갚지지 않을까요??
귀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리플은 감정을 건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는 좋은 장인 것 같습니다. 그저 제 생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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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58.142.26.142)
2011-08-27 19: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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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아빠 (121.139.234.29)
2010-09-02 14:30:28
죄송한 말씀인데 정말 목사님들께서 헌금을 정상적인 자금계획을 통해 한푼도 헛되이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선비님께서 목사시라면 정말 그렇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담임목사의 입김없이 교회 기획재정부의 재정 예산안을 통해서만 집행되고 있는 것입니까? 저희 교회만해도 그렇게 집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설교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헌금에 대한 헌신에 대한 권면과 가르침은 저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십일조에 대한 중요성도 설교해야 하구요.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는게 문제지요. 저희교회도 십일조에 대해 헌신에 대해 년초에 목사님께서 설교하십니다. 전 찬성하고 은혜롭습니다. 하지만 예배당을 짓고 교육관을 짓는데 우리 장로들,권사들중에 충분히 더 헌신해야 하실분들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꾸지람을 설교중에 하십니다. 이건 강요가 아닌가요? 비단 제가 섬기는 교회의 설교자문제뿐이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그렇지요. 전 신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는줄 알았습니다. 선비님께서 목사시라면 현실을 직시해 보십시요, 지금 누가 변해야 한국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 신성남님이나 저처럼 교인으로서 교회에 변하라는 요구를 하는 사람은 교회안에 극소수입니다. 모두들 목사가 이야기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생각하지요. 이걸 무기로 사용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으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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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119.205.116.50)
2010-09-11 10:55:18
교회 제정을 저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하여 쓴 일은 없습니다.
교인가운데 왜 목사님 마음대로 교회 제정을 사용하십니까?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 마음대로라는 말음 목사의 개인적인 신상을 위하여 쓰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목회를 하다보면 계획이외에 다르게 지출되어야 할 부분이 나옵니다. 이것을 제직회의에 안건을 올리고 회의를 합니다. 갑작스런 일들이 계획되고 그만큼의 교회재정이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다른 헌신으로 이 부분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목사 개인의 편안함고 만족을 위해서 쓰지는 않습니다. 만약 수민아빠가 다니시는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재정을 목사님의 마음대로 쓰신다면 그 교회는 문제있는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가 많으니 떠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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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아빠 (121.139.234.29)
2010-09-17 17:47:42
선비님 같은 목사들이 많아야 하지요.

목사는 교회공동체가 해야하는 올바른곳에 뜻을 두고 계획하고 예산을 집행해야 하지요.

우리교회의 예를 들면 연예인초청도 많이 하고 교인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이름난 사람들을 교회에 대거 불러 행사를 하지요. 매년 많은 행사들... 그러나 청년들이 낙도선교를 하거나 해외선교를 떠날 때는 교호예산이 전혀 집행되지 않습니다. 담당교사및 부장들을 세운 이유가 그런거 하라고 세워놓았다나요? 몇해전엔 친구집사가 청년간사를 할 때 작도선교를 위해 자금계획을 세우고 여러방법으로 충당하고 50여만원이 부족해 담임목사에게 찾아가 보고를 했는데 일언지하에 위와 같은 말로 거절당하고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예인초청이나 바자회엔 몇억씩 들이면서 선교자금중 정말 채워지지 않은 꼭 필요한 조금의 예산을 요청했는데 거절이라뇨...
구실은 목사 개인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는 개인목적아닙니까?
우리담임목사는 유명한사람입니다. 그렇게 유명해 졌습니다...
교인도 많아지고 예배당도 겁나 이쁘게 지었습이다.. 헌당하지 않은채....
왜 그럴까요?

이건 한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재정부는 담임목사에게 결재를 받고 예산을 집행합니다.
이건 담임목사가 재정집행을 맘대로 하는 것 아닌가요?
재직 재정부는 독립되고 교회공동체의 감사체계 안에서 예산안을 만들고
예산을 집행해야 합니다. 담임목사도 독립된 재직 재정부의 승인하에
예산을 집행해야 하고요.. 그러나 한국교회 중 몇이나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네요. 교회가 크든 작든 몇명의 목사가 이렇게 하겠느냐는 것이죠.
정말 실현 가능한 일일까라는 의구심이 드는군요.

아 왜 이교회를 떠나지 않느냐고요? 하나님께서 이곳에 나를 보내신 까닭이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다면 전 다른교회를 섬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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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121.73.202.218)
2010-08-29 08:25:38
한국교회에는 목사의 교권화는 물론, 장로나 제직들의 교권화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둘 다 잘못이지요. 교권화란 주어진 책임과 권한 이상의 힘을 남용하는 것으로, 저는 소수의 교회에서만 이런 일이 있다고 동의하기는 힘들군요.

정상적인 교회라면 조직상 목사가 헌금을 직접 손대기는 사실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저런 명분으로 꼿감 빼어 먹듯이 돈을 취할 수 있습니다. 우선 헌금이 늘면 목사의 사례비를 늘릴 수 있는 것은 기본입니다.

또한 자신의 교회 부흥회에서 설교하고 강사비로 수백만원씩 챙기는 분도 있지요. 또한 몇몇 대형교회에서 이미 드러난 것처럼, 더 심할 경우는 거액의 교회재정을 목사가 임으로 사용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금 횡령이지요.

아울러 외부 강사를 상호 교차 청빙해서, 서로 상대 교회의 돈을 빼어 먹기도 합니다. 이분들의 수법은 워낙 고도화하여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지요. 물론 일부의 이야기로 전체를 매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너무 부패가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일부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수십억씩이나 돈을 모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선비님처럼 정상적인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의 경우는 상상도 하지 못하실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제 가족들과 친구들 선후배들 등 제 주변에는 많은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목사님들을 너무 모른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자발적 헌금을 십일조보다 더 많이 하는 경우는, 주로 지구촌 외국 교회 신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유산의 상당 부분을 교회에 바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소에도 필요한 경우 큰돈을 헌금하기도 하구요.

교회를 통한 나눔은 물론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제가 잘 아는 한 친구는 평생 십일조 이상을 무기명 헌금으로 해 오고 있습니다. 필요시 건축헌금도 하구요. 이런 것이 자발적인 헌금의 한 예가 되지 않을까요.

답변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비님의 귀한 댓글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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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119.205.116.50)
2010-08-26 10:54:25
기독교의 역사속에 믿음과 행함의 우위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참된 믿음에는 행함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설교할때 헌금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분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행위로서 믿음의 척도를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명한 믿음에는 그 행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이로서 자녀교육에 욕심을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고, 무소유의 삶을 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도할 뿐입니다.
당당뉴스와 논객들의 글을 읽으면서 대안없는 비판이 많은 느낌이 들고 비판에 동감은 하지만 어딘지는 모르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믿음은 있는 것 같으나 왠지 이 믿음이 진짜믿음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예로 5%의 십일조하는 성도를 말했는데 95%의 십일조 못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그렇다면 참된 믿음일까? 십일조가 아까워서 헌금을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이 아까워서 천국을 소망할까???
비판은 있어야 함에도 비판이 무서운 것은 전체가 아님에도 전체인줄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목사님을 향한 칼럼을 쓰시면 필자의 믿음은 더 아름다움 믿음이 되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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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124.58.137.73)
2010-08-26 20:40:24
덧글의 내용이 본문의 의도와 다른것같습니다.

본문은 십일조가 아깝다는 것도 안한다는 뜻도 없고

다만 갈수록 물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구원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고

이것은 전도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믿는자라면 십일조와 필요한 헌금은 능력내에서

당연한 것입니다.하지않거나 못하거나 강요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기본으로 놔두고 오히려 성화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성도들에게 본받도록 해야합니다.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주님과 바울이 보여준 답안입니다.

성화된 삶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구조도 하게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변화 시킬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빛을 발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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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119.205.116.50)
2010-08-28 16:13:39
좋은 지적이십니다. 헌금을 통한 목사의 사리사욕은 거의 없습니다. 월급많이 받으시는 목사님 해봤자 생각보다는 몇분 안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큰 교회목사님 월급이 30년 근무하신 공무원월급정도되지 않을까요?
대부분 거의 60%의 이상의 목사님들이 국민최저인금의 수준을 못미치지 안을까합니다.(제 생각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또한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외적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헌금생활을 통하여 믿음의 척도를 평가하기가 문제라고 하는데 예수님도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을통하여 그의 믿음의 승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라 헌금할 수 있는 그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지요.
자발적인 헌금은 말씀의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십일조, 감사, 주일, 여러가지의 목적헌금이 이루어진다면 헌금에대한 강요는 없을것입니다. 저희교회는 담임목사님의 적절한 설교로 헌금이 이루어지고 있고, 강요나 협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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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언자 (116.47.27.101)
2010-08-26 09:58:08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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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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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돈궤를 맡은 자인데, 돈궤에 넣은 돈을 훔치는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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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사도(지금의 목사와 같은 직분임)인데, 예수님의 돈궤를 맡아서 정직하게 않고, 돈궤에 있는 돈을 훔치는 도적질을 한 ‘도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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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교회의 돈궤를 맡은 목사들 중에는, 가룟 유다와 같이 돈궤에 있는 돈을 훔쳐가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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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사들은 돈궤에 있는 돈을 훔쳐서, 자식들에게 여러 개의 기업체를 차려준 목사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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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짓을 한 목사들이 하나님께 회개를 하려면, 돈궤에서 훔쳐간 돈을 전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며, 그리고 중심으로 통회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지은 죄를 혹 사하여 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행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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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록 (211.204.31.254)
2010-08-26 01:32:02
이글 쓰신분은...아마...중대형 승용차 사절하고...소형차 이용하시는 분일테고...집회나 강연 나가시면..사례비는 일체 사양하거나..교회재정에 단돈 10원도 남기지 않고..넘기는 분이실테고...큰 교회 사양하고...홀로 힘들고 외진 곳에 찾아가셔서 이름도 없이 빛도없이 개척하고 봉사하며 사시는 분일겁니다...그런분이 맞다면...이글 전적으로 찬성...혹 삶은 그렇지 않고...글만 이런식이라면...가식...편견...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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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 (121.73.199.242)
2010-08-27 12:50:32
'공병록'님,
설사 사도 베드로가 말을 했어도 '틀린 말'은 틀린 것이고, 반대로 서당개가 짖었더라도 '맞는 말'은 맞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글의 내용을 판단하셔야지, 필자에 대한 불필요한 상상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지요.

사실 저는 서당개보다도 못한 사람입니다. 다만 미흡한 제글에서 함께 공감하실 수 있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에게는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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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록 (211.204.31.254)
2010-08-27 17:36:30
아시다시피 글은 인격이요, 성품이요, 삶입니다..그것과 분리된 글은 먹물에 불과할 뿐입니다..자신의 삶과 전혀 다른 글은 그것이 아무리 옳다해도..다 틀린것에 불과할 뿐입니다...자신을 서당개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하시니...삶이 진실하신 분이라고 믿고 싶습니다...먹물 가득한 세상에 더 이상의 먹물쟁이가 머가 필요하겠읍니까?...시체(죽은 글) 위에 시체 하나 더 얹을뿐인데...스스로 생수같은 삶이면...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펜이요 붓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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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아빠 (121.139.234.29)
2010-08-25 15:56:46
우리교회 목사님도 그러신건가? 잘나가는 차세대 교회지도자인데...ㅋㅋ
벤쯔사서(어떤장로님이 사주셨다는데..) 집에다 놓고 교회올때는 카니발타고오시고 다른데 나가실때만 타고..
전에 에쿠스 타고 다니실땐 교회마당에다 세워 놓으시더니 왜그러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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