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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삽니다.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11 주(20100808)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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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8월 04일 (수) 22:41:57
최종편집 : 2010년 08월 05일 (목) 00:46:43 [조회수 :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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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제 11 주(20070812re)
성서일과/ 시 50:1-8, 22-23; 사 1:1, 10-20; 히 11:1-16; 눅 12:32-40
본문/ 히브리서 11:1-3
믿음으로 산다는 것

          (히 11:1-16)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 그리고 바울의 증거를 통해 헛된 인생과 참된 인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가는 인생에 무언가를 덧입히고자 하는 모든 일이 헛된 것이며 그것은 욕심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거듭나서 하늘에 속하면 참된 인생을 살게 되고, 그 인생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 말씀의 연장선에 있는 말씀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짚어 본 터라 새로울 것이 없는 말씀일 것 같습니다.
어쩌면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한다는 불평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4:32-34) [32] ...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양식입니다.
듣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입니다.
들으면 머리에 머물지만, 먹으면 온 몸에 퍼집니다.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 됨은 우리로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머리의 작용이 아니라 몸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시는 말씀을 먹고, 믿음으로 사는 자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믿음 없이 사는 자들은 무엇으로 삽니까?

염려와 두려움으로 삽니다.
염려와 두려움은 욕심의 다른 말입니다.
염려와 두려움을 없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여호와께서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

이렇게 볼 때 믿음의 반대말은 욕심입니다.
믿음이나 욕심은 다 같이 염려와 두려움을 몰아내고자 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믿음과 욕심은 한 줄의 양 끝에서 마주 보는 말입니다.
반대말이죠.

이스라엘이 믿음을 배운 곳은 광야입니다.
          (신 29:2-6)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 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5] 주께서 사십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 하였으며 [6]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마시우시고, 입히시며,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고, 내 생명-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대대로 전하여, 잊지 않으려고 한 사실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느혜미야가 말합니다.
          (느 9:19-22) [19]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20]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21] 사십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22]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저희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저희가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고,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배운 것은 믿음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매일의 양식을 그날그날 공급해 주셨습니다.
안식일 전날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하루 먹을 만나만을 거두어 들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내어 항아리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헛된 일이었습니다.
하루 먹을 양식 이외의 것은 모두 썩어버렸던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염려가 욕심을 낳고, 욕심이 믿음을 죽인다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시편에서는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 106: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욕심을 낼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는 빈들이 광야입니다.
광야의 욕심은 바로 염려와 근심, 불안의 다른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고, 이것 때문에 금으로 소를 만들어 절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땅에서 사는 자들이 피할 수 없는 염려와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힘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것은 믿음의 힘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도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을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욕심을 이루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만 욕심이라는 말 대신에 꿈이라든가, 소망이라든가, 마음의 소원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게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과 욕심은 함께 있을 수 없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의 반대가 “욕심으로 산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성서일과 중 히브리서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뚜렷한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듣고 떠났습니다.
그가 향한 곳은 그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곳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염려스러운 곳입니다.
두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몰라서 탈이지, 알고 나면 별 것 아닌 법입니다.
믿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대하는 일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손에 잡히지 않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손에 쥐고, 눈으로 보듯이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땅에서 살지만 하늘에 속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사는 길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 11:13-16)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나온바 본향이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갈대아 우르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흙으로 지어진 첫 사람 아담입니다.

땅을 사모하면 땅으로 돌아가겠으나, 더 나은 본향 곧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품을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하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곳은 땅에서 나지 않은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람, 흙에 속한 육신에 죄를 정하고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예비하신 성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것을 보고, 사모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땅에서 나와 땅으로 가는 자가 되지 말고, 땅에서 나왔으나 하늘로 가는 자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다시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파파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을 받았을 때 이미 늙어 있었는데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염려가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더 늙기 전에 어떻게 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보나 아내 사라를 보나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가 끊어진다는 두려움이 밀어 닥쳤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이 주시겠다던 아들은 얻지 못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들에게 대를 이으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궁리하고 또 궁리하는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자신을 긍휼히 여기셔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께 말씀은 드려야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아들을 주시겠다는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더 이상 이 일로 하나님을 난처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제 뒤를 이을 아들은 제 집에 사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 정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창 15:4-5)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아들을 보고 살기로 말없이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잠간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보이는 것에 집착했습니다.
늙도록 아들이 없는 자신의 집이 보였습니다.
쓸쓸했습니다.

태가 닫혀 잉태할 수 없게 된 사라의 늙은 몸이 보였습니다.
불쌍했습니다.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게 된 자신의 쭈그러진 몸둥아리가 보였습니다.
안타까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차례로 뒤쫓고 있는데 난데없이 염려가 나타났습니다.
뒤를 이어 두려움도 솟아올랐습니다.
더 이상 보이는 것이 없을 만큼 깜깜했습니다.
다시 힘을 주어 눈을 뜨고, 보이는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보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남이지만 그래도 그만한 사람이 없다 싶었습니다.
이 사람으로 내 뒤를 이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엘리에셀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염려가 사라진 것 같았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겠느냐?
주님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모든 계획을 헛되게 하셨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셨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뭇별과 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보이지 않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자기의 후손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형편들은 밤의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눈을 들어 본 후의 일이었습니다.

무엇을 느끼십니까?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을 돌리는 것이 믿음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고쳐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9:39-42)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보는 눈을 달리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에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떠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관(空罐)

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붓글씨를 배웁니다.
제가 처음 붓글씨를 배운 분은 김흥호 목사님입니다.
평생 하루에 한 끼만 잡수시는 분이고, 목사님으로는 드물게 대학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을 가르치셨던 분입니다.
잘 쓰기 위해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씨를 쓰시는 분입니다.

제가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얼마나 써야 잘 쓰게 되겠습니까?
목사님이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소견이 트여야 하고, 둘째는 법안이 열려야 하고, 마지막으로 공관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각 단계마다 7 년 이상, 최소 2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글씨 잘 쓰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평생 마음 공부하기 위해 글씨를 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그 말씀이 다르게 들렸습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문득 믿음의 세계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 후로 잊어버리지 않고 때때로 묵상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소견(所見)은 보고서 아는 단계입니다.
글씬지 아닌지, 글씨라면 무슨 글잔지, 같은 글씨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걸 알면 일단 글씨는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철없는 아이들 보고 소견머리가 없다고 하지요?
바로 그 말입니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앞뒤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소견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법안(法眼)은 글씨 쓰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쓴 것처럼 보여도 법을 따라 쓰지 않으면 좋은 글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글씨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인데, 그리지 않고 잘 쓰기 위해서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법을 따라서 쓴 글씨는 그 모양이 어떠하든지 잘 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의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법이 정한 죄는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죠.

마지막 공관(空觀)은 빈 곳을 본다는 뜻입니다.
진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보이는 글씨를 잘 쓰기 위해 애를 쓰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빈 칸 곧 글씨를 쓰고 남은 여백을 어떻게 남기느냐에 마음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붓글씨는 붓에 까만 먹물을 묻혀서 흰 종이 위에 글자를 쓰는 일입니다.
그런데 진짜 잘 쓴 글씨는 까만 먹이 칠해진 자리를 보고 아는 게 아니라, 글씨가 없는 비어 있는 곳을 보고 안다는 것이니 여간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경집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세 가지 단계에 모두 본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소견의 見, 법안의 眼, 공관의 觀.......

무엇을 뜻합니까?
글씨라는 게 손으로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가 이와 같습니다.
소견은 있는 그대로 보는 일입니다.
세상을 세상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법안은 그렇게 된 이유, 이치를 따져 보는 것입니다.
이치를 따라 살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막 4: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공관은 보이는 것들을 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을 지으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빈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까만 글자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 집착하면 자꾸 덧칠을 하게 됩니다.
헛된 일입니다.
욕심입니다.

빈 곳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거기에 손을 대면 더 이상 빈 곳이 아닙니다.
믿음은 비어 있는 그곳에 우리의 손으로 무엇을 채우려는 노력을 멈추고 하나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 곳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에셀이나 이스마엘은 바로 그 빈 곳을 자기 손으로 채워 넣으려는 아브라함의 노력입니다.
모두가 헛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드리는 일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아들 이삭이 말합니다.
“아버지, 땔감은 가져가시면서 정작 제물은 가져가지 않으십니까?”
그때에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시겠지....”
말문이 막혀서 나온 말만은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곳, 보이지 않는 약속을 향하여 걸어온 아브라함이 비로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이는 곳에서 눈을 돌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땅에서 살되 하늘의 법으로 사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내 손으로 염려와 두려움을 없애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준비하셨음을 믿고, 승리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 이레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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