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가지 복잡한 생각들을 마음에 담고 끊임없이 그 생각들을 굴리는 삶을 사는 것이 이 시대 지식인의 마땅한 역할이라고 믿기라도 했었던가! 생각이 생각을 불러내고 생각들끼리 현란하게 꼬리잡기 하는 것을 살아있음으로 믿는 도시적 생활방식이라지만 인간이 가진 인식과 사고의 한계로 인해 이내 머리가 지끈거린다. 도시인은 결국 상시적 두통을 안고 사는 사람이 아닌가!

문득 길을 나서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길들여진 자동차 문화였다. 조금 생각할 줄 아는 나이가 되자 자동차 문화가 얼마나 반생명적인가 하는 생각도 하였지만 일상적 두통꺼리에 노예된 현실을 깨닫고 문득 길을 나서고 싶은 충동이 들 때는 더없이 감사하다. 교회에 매어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 기관에서 일을 하다 보니 쉼과 휴가라는 단어가 이처럼 설렐 줄이야. 일주일 휴가를 얻어 주일 낮예배를 드리자마자 가족과 함께 소백산 달밭골로 달렸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감리교회 사태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게다가 남북관계가 심각한 지경으로 치달리니 대북지원사업을 하는 사람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오지체험이랄까, 문명과 단절된 곳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언젠가 불쑥 찾아가 며칠 묵었던 이필완 목사님이 계신 소백산 달밭골의 입구 산골민박에 도착하니 저녁시간이 되었다. 산골민박에서와 권정생 선생 추모식에서 단지 두 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인 달밭골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직접 만들었다는 두부를 몇 모 잘라 김치와 함께 내오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정이다. 그동안 인정머리 없는 도시 생활에서 인정이 목말랐었나보다. 더없이 살갑다. 민들레교회 최완택 목사님과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장님이 우리 가족을 이렇게 극진하게 맞아주니 최 목사님 덕을 본 셈이다. 감사합니다!!

새로 마련한 이필완 목사님의 산막은 허름하지만 정겹다. 잘 다듬어지고 깔끔하게 정리된 사각형 틀 안에서 하루 24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분명 고통스러운 풍경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겨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원시에의 동경 때문일 것 같다. 흐트러짐, 허름함에 대한 막연한 향수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삽겹살을 구워 먹으며 쏟아질 듯 모여 있는 별의 무리를 기대했으나 흐린 하늘은 결국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렇게 사족과 함께 하는 소백산 달밭골의 첫날밤은 신혼의 첫날밤처럼 수줍고 설레게 지나갔다.

햇살 따갑지 않은 흐린 날씨 덕에 힘들이지 않고 소백산 비로봉으로 올랐다. 밤새 내린 비탓인지 우리 가족과 이필완 목사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열 걸음 마다 피어난 형형색색의 버섯들이다. 아이들은 버섯의 이름을 생각해내며 연신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른다. 덕분에 걸음은 늦어졌지만 무릎이 좋지 않은 이필완 목사님은 아이들과 함게 와서 그나마 편하게 산을 오른다고 웃으신다.

비로봉 정상을 300미터 앞둔 지점에서는 햇살 대신 제법 살갗을 따갑게 두들기는 소나기를 만나 우비까지 챙겨 입고 산길을 오른다. 빗방울 덕분에 가장 가파른 고개를 정신 없이 올랐다. 산꽃이 군데군데 군락을 지어 피어난 볼록한 초원이 펼쳐진 마지막 언덕은 이미 희끗희끗 덮은 구름으로 인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렇게 오른 돌무더기정상은 비로봉이라고 쓴 돌기둥을 세찬 바람이 넘어뜨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불어대고 있었다. 세찬 바람과 구름으로 안경은 금새 뿌예졌다.

우리 가족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카메라를 잡은 이필완 목사님은 카메라의 뷰파인더가 흐리게 보인다고 투정을 하지만 정작 뿌예진 건 목사님의 안경이어서 한바탕 웃었다. 날이 맑고 구름이 걷혔다면 멋드러진 장관이 펼쳐졌을 텐데 아쉽다. 아쉬움은 한번 더 오겠다는 약속이 되었다. 비로봉의 돌기둥과 들꽃, 그리고 구름에 대한. 참, 바람도 빼먹으면 안 되겠다. 내려가는 길은 왜 그렇게 멀고 지루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힘들이지 않고 오른 산이었건만 내려가는 길이 오히려 쉽지 않았다. 다섯 시간을 오르내리면서 산막으로 돌아왔다.

새롭게 밝아온 하루는 손님과 함께 찾아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라고 해야겠지. 이필완 목사님 사모님과 작은 아들이 이른 아침에 산막에 들어왔다. 식구들을 맞이하는 이 목사님은 자신이 직접 재배한 채소들을 자랑스럽게 꺼내놓았다. 다섯이서 먹던 밥보다 일곱이서 먹는 밥이 더 맛있었다.

점심까지 차려 먹고 아래쪽 초암사에 가보기로 했다. 불이 났었다고 했나, 초암사 자체는 너무 현대식으로 잘 만들어놔서 별로 볼 것이 없었다지만 가는 길의 계곡은 장관이었다. 계곡물이 크고 작은 폭포들을 요리조리 헤집고 다니며 시원한 물소리에 하얀 거품을 만들며 신나게 달려간다. 쨍쨍 햇빛이 내리쬐지는 않아도 여름철 산행이라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으니 물이 넉넉한 소를 볼 때마다 그냥 첨벙 뛰어 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국립공원 계곡에 몸을 담그는 것은 300만원인가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범법행위이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소녀 같이 아기자기 예쁘기도 하고 또 여왕처럼 품위 있기도 한 계곡의 모양새를 보는 것만으로도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만물과 더불어 공존한다는 것은 이처럼 삶에 기운을 북돋고 힘이 솟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도시인에게는 치유의 능력이 된다. 특히 도시인의 복잡하고 시스템화 된 사고구조를 깨끗하게 지워 새로운 것을 그릴 수 있는 백지로 만든다는 점이 특별한 치유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연은 이처럼 우리의 건강한 삶의 일부분이다. 단, 우리가 자연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을 인정할 때에만 그렇다. 굳이 4대강 사업이니 무분별한 개발이니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그저 며칠 깊은 산속, 3G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안 통하는 곳에서 그저 자연의 일부가 돼본다면 우리와 자연의 근원적이며 태생적인 유대를 확인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연의 배려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들어갈 것도 없이 꽉 차 뒤엉키고 설킨 뇌를 가진 현대의 도시인들이여,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고민과 생각을 멈추고 깊은 자연에서의 며칠 휴가를 계획해 보라! 우리 삶의 기준이 새롭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