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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절망하라!!예수의 가르침을 찾아서(불과 평화2)-구원은 절망으로부터 온다
한성영  |  h680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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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7월 18일 (일) 20:14:31
최종편집 : 2010년 07월 18일 (일) 21:01:43 [조회수 : 5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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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알지 못한다.


   


예수의 이말을 잘 경청하라, 그대는 정말 예수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가? 학자들이나 목사들이 하는 것처럼 어록의 자구들에 제멋대로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경청이 아니다. 그것은 억지이며 게으름에 가깝다. 근본주의자들처럼 자구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고 완고한 신념을 키우는 것도 경청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폭력에 가깝다. 수많은 교회들에서 소비되고 있는 3류 판타지 소설 같은 설교들을 보라, 판타지소설들은 재미라도 주지만 그들의 설교에서는 그대가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소위 지성인이라는 자들도 그런 설교들에 넋이 나가 있다.

나는 지식인들에게서 종교적 문맹을 더 많이 보아왔다. 지성이 머물 수 없는 곳, 그곳이 오늘의 교회이다. 오히려 나는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성을 무속인과 역술인들의 집에서 본다. 무속인과 역술인들은 적어도 완전히 죽었던 사람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팔지는 않는다. 21세기 대명천지에 가장 천박한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 곳, 그곳이 교회이다. 슈퍼맨과 배트맨과 핸콕을 버무려 놓은 "예수"라는 영화는 교회 CGV에서 아직도 가장 흥행성있는 블록버스터 SF스릴러이다. 7일 만에 천지를 만들고, 지팡이로 바다가 갈라지고 맨발로 물위를 걸어 다니며 죽은 자를 살리고 죽었던 사람이 삼일 만에 살아나고 유토피아가 펼쳐질 종말의 파노라마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 이들이 피터 팬 증후군을 알고 있는 교회인간들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

잘못된 신념에 근거한 종교는 마약과 다를 게 없다.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들과 예화, 억지로 가져다 붙인 스토리와 논리들, 확대, 왜곡, 과장으로 점철된 말의 수사들, 그대의 감성을 자극하며 웅변조로 질러대는 저질스러운 어조의 소리들, 어떤 자들의 설교는 지성의 외피를 두르고 있어 고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자들은 그대의 마음을 사로잡아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도덕적 감수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서구의 진지하고 양심적인 현대 신학자들의 믿을만한 연구 결과물들은 절대로 그대에게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그대가 현명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대의 무지를 먹고 자라는 기형의 불가사리이다. 목사들과 학자들은 그대가 영원히 피터 팬으로 머물기를 바라며 환각제를 먹이고 있다. 그들은 그대를 끊임없이 위로하고 격려한다. 도덕적 갱생을 다그치기도 하고 그대의 불안을 달래려고 한다. 실소를 머금케하는 말장난을 파는 자들도 있다. 언제나 이런 식이고 그것이 다이다. 그리고 항상 그들의 결론은 이제는 과학마저도 비웃다 지쳐버린 빛바랜 유토피아이다. 그들의 설교는 허무한 말의 잔치이며 사기이다.

 

그대는 왜 교회에 다니지?


그대는 왜 교회 다니지?
구원?
ㅎㅎㅎㅎㅎㅎㅎㅎ

그대는 왜 교회에 다니지?
십자가?
ㅎㅎㅎㅎㅎㅎㅎㅎ

그대는 왜 교회에 다니지?
부활?
ㅎㅎㅎㅎㅎㅎㅎ

답을 말해줄까?
외로워서지, 너무 외로워서..... 불쌍한 그대

그대가 외로워 질 수록
그대는 교회의 밥이 되지
먹사들의 밥이되고 반찬이 되고 먹사자녀들의 등록금이 되고
사택이 되고, 차량유지비가 되지

아니 그들이 별다른 세종대왕을 요구하지않더라도
그들 허영심의 한 귀퉁이를 장식해주는
노점의 악세사리가 되지

그대가 별다른 금전으로 화하지 않더라도
그대가 그 허접한 말들에 청중으로 쪽수가 되어 주는건
그들 대외 영향력의 방패막이, 그럴싸한 그림의 일부.......

그대는 두려운 게지, 그래서 외로움도 무서운게야
교회와 먹사들은 그대의 두려움을 먹고 사는 뒷골목의 들개라네

교회는 항상 그대가 모르는 습한 퇴폐의 얼굴이 있어
그리고 그걸 세련되게 가려주는 기술도 있지

그대가 느끼는 따듯함, 소속감, 장례식장과 개업장을 채워주는
쪽수의 미덕에는 언제나 날카로운 댓가가 따르지
그리고 그대는 그걸 반드시 치뤄야만 할거야

조금만 용기를 내어봐... 홀로인 것에 익숙해지면
두려움도 바로 보게 되지, 그리고 외로움이 그대를
키워줄거야 홀로 있을 수 있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대는 알게 될거야, 홀로 있음만이 그대를 깨울 수 있어

그대가 언제나 무엇에 기댄다면 그대는 언제나 어린아이
다 자란 징그러운 어른 얼굴의 어린아이......

자 한번 교회에 반항을 하는거야 한번 욕설을 퍼부어봐
그 답답함을 표현해봐, 목사들을 조롱해봐, 장로들과 권사와 안수집사와
그 전도사들과 선생들을 걷어 차봐,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해보는 거야

그리고 난리들을 치면 과감히 나오는 거야
그런다고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않을테니까?

그리고 일요일날 산사에도, 강에도, 바다에도 가보고
게으름도 피워봐 ㅎㅎㅎㅎㅎ 그대의 하나님은 그걸 원하셔
그대가 유연해지길, 바람이 되고, 허공이 되어 자유가 되길 원하시지

그런데 먹사들은 자꾸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하지, 그들도 두려워서 그런거야
먹사들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두려워지지

차라리 나무의 소릴 들어, 차라리 강의 속삭임을 들어, 차라리 바다의 외침을 들어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목사들의 반복되는 중얼거림에 있지 않아

그건 허무라는 떡에 실없음이라는 고물을 무친 퓨젼정크 푸드일뿐이야
하나님은 바람의 계곡이나 그대가 비스듬히 기대앉은 방구석 뒤편에 계시지

그러니 그대, 조금만 용기를 가져봐 , 외로움이 그대를 튼실하게 할때까지 말야.....................



그러나 예수는 다르다. 예수는 그대를 위로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대에게 환각의 미래와 성공의 신화를 약속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대의 모든 희망과 비전과 미래를 부숴버린다. 오히려 예수는 그대가 제대로 절망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대의 모든 희망과 비전과 미래가 절망한 자리에서 예수의 진리가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키에르 케고르!! 서구의 교회인간중에서 나는 키에르케고르 보다 진지한 크리스천을 찾아보지 못했다. Kierkegaard라는 이름은 교회정원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이 맞았다. 절망은 그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예수는 그대가 절망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대는 자신의 모든 것으로 부터 절망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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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나누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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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 (210.2.52.131)
2010-07-20 08:21:28
불교나 기독교의 용어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의 언어일뿐 그 뜻은 같다고 본다.
불국정토나 하나님 나라란 서로 같은 용어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일뿐이다. 불교의 깨달음과 다시 태어남이란 용어 또한 같은 맥락의 말이 아닐까? 다만 신화를 역사로 가르치며 이를 고백하는 기독교의 형식이 거슬린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말씀이 더 치열하다. 난 불교돈 아니다. 다만 두 종교를 비교해 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불교의 연기를 공부해보면 신이 들어설 자린 없어 보인다. 종교 제도를 위하여 성서 자체도 변개되는 사실에 놀란다. 어차피 인간들의 치졸한 놀음이었다. 가장 으뜸 위선이 종교에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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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7-19 08:33:53
불과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이 절망해야 한다는 뜻이란 말인가? ㅋㅋㅋ
아니면 아직 그 말씀에 대한 풀이는 하지 않았고 다음 번에 하겠다는 것인지...
예수님을 운운하는데, 이왕에 그러려면 그분의 대화 방식까지도 따르면 좋으련만.
예수님은 위 글의 방식과 같이 뭔가 있는 체하며 질질 끄는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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