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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을 주러왔다예수의 가르침을 찾아서(불과 평화1)-예수의 말을 의심하라
한성영  |  h680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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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7월 11일 (일) 02:03:44
최종편집 : 2010년 07월 11일 (일) 17:26:50 [조회수 : 28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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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알지 못한다.


예수가 또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분열과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다"

불가의 선문답같은 예수의 이말은 무엇인가? 예수는 우리에게 2Km를 함께 걸어 가자고 부탁하는 이웃에게 4Km를 함께 걸어 가주고, 우리가 입고 있는 하찮은 겉 옷을 달라고 부탁하는 이웃에게 속 옷마저도 내어주라고 하며 왼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 뺨마저 돌려대라고 하던 사랑과 평화의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런데 그의 이 말은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예수는 우리를 희롱하며 개그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인가? 그대는 예수의 앞뒤가 맞지않는 말들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예수의 어록은 역설과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보다 부모나 형제를 사랑하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자에게도 그런 짓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두고 신경쓰지말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한다. 예수, 그는 누구이길래 이런 거침없는 언사들을 함부로 내뱉는가?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가 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는 이런 의문을 품어 본적이 있는가? 그렇다. 의문을 품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이 예수의 숨은 의도이며 전략이다.

예수는 지혜로 가득찬 사람이다. 그의 말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자라면 그의 말과 의도에 경외심을 품게 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는 데 천재이다. 예수의 화법은 길게 늘어지는 산문이 아니다. 산문은 그대에게 의문을 품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지루함을 주고 그대의 진리를 향한 열망을 꺽어 놓을 것이다. 짧고 간결한 시의 화법 , 그런 화법만이 그대에게 진리를 향한 의문을 품게하고 그 의문을 풀고자하는 열망을 불태우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자비요, 사랑이다. 예수는 하찮고 잡다하며 기괴한 용어들과 늘어지는 설명을 이어 붙이는 이론가나 강단에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메우기 위해 어설픈 언어의 관념을 붙들고 늘어지는 하이데거나 화이트헤드같은 강단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각자요. 제자들을 진리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최선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의 스승이다. 그에게는 현학적인 수사들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 그는 제자들을 가장 빠른 직관의 세계로 끌어 들인다. 소크라테스이후 서구철학은 나락의 길을 걸어갔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의 겉껍질을 붙들고 늘어졌다. 지금도 서구철학자들은 사유를 붙들고 이리저리 헤메다니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들은 직관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몇몇 유명하다는 서구철학자들의 글을 접할 때마다 나는 놀란다. 처음에는 그들의 사유가 너무나 어설프고 설익은 것에 놀라고, 그렇게 어설프고 설익은 사유로 현란한 용어들을 만들고 그럴싸한 글을 방대하게 써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이런 어설픈 사유들을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주총하는 것에 또 놀란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가장 수준 높은 진리가 있는데도 그것은 무시하고 어설프고 설익은 서구학자들의 글을 아무 생각없이 수입해서 흉내내며 팔아대며 거들먹 거리는 게으른 한국의 학자란 작자들의 작태를 보고서 가장 놀란다. 학자들의 말을 믿지마라, 그들은 사유라는 병에 걸린 정신질환자들이다. 특히 한국의 학자들은 남의 것을 흉내내기나 하는 모리배들이다. 한국의 대다수의 목사들이 양아치들이라면 학자들은 시다바리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대는 그런 그들을 시다바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직시해야한다.

그대는 공안이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중국 선불교의 선사들이 제자들에게 깨우침을 주기위해 고안한 공안은 천재적인 것이다. 학자들중에는 선불교가 중국의 도교적인 모습을 흡수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학자들의 말을 조심하라 그들은 구도자가 아니다. 그들은 직관의 사람들이 아니다. 언어를 파고드는 추상의 파티를 즐기는 자들이며 언어의 올무에 걸려있는 환자들이다. 그들은 본질을 보는 눈이 없다. 그들이 노는 세계는 선불교가 넘어서고자하는 언어의 늪이다.

선이 무엇인지 아는 자는 선과 불교와 도교와 기독교를 나누지 않는다. 고타마와 예수와 노자와 마하비라를 나누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은 선에서 하나가 된다. 중국의 선, 도교의 도, 불교의 깨달음, 기독교의 복음은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순간의 삶이며 모두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선과 하나가 될때 그대는 비로서 선을, 도를, 깨달음을, 복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문자안에서 선불교를 나누고 도교를 나누고 불교를 나누고 기독교를 나누고 있는 자들은 미친 자들이다. 선과 도와 깨달음과 복음은 이 순간의 실천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세계이다. 그대는 선과 도와 깨달음과 복음과 하나가 되던지 미쳐 있던지 둘 중 하나의 상태이다.

그러니 문자를 파고들며 선이란 도교와 불교가 어쩌구이고 기독교의 영지주의는 무엇이며 정통기독교는 어쩌구하는 자들은 그저 미친상태에서 헛소리를 하는 것일 뿐 그대가 귀담아들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그대는 붓다와 예수와 노자의 혼돈의 시어들을 품고 의심의 세계로 뛰어들어라.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며 이것이 예수가 원하는 방법이기도하다.

그대는 진정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예수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 한 것이다" 이말을 보고나서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혈기방장한 청년이었던 나에게 성욕은 식욕보다 자주 빚쟁이처럼 쳐들어와서 원금과 이자를 토해내라고 아우성을 질러댔다. 진지한 크리스챤 청년이었던 나는 예수의 이 말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원치않았던 성적 판타시가 나를 엄습할 때마다 나는 예수의 등줄기를 잔인하게 쏘아대며 그는 미친놈이 분명하다고 소리쳤다.

'세상은 오히려 매력적인 여자를 보고 성욕을 느끼지 않는다면 환자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아 저 여자의 허벅지! 저 가슴! 저 것이 천국이 아닐까? 저 육감적인 엉덩이 그래 나는 정직하게 말해서 그것을 원하고 원하고 원한다. 이것이 나의, 내또래의 가장 솔직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는 뭐라고? 그냥 보고서 섹시하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여자들을 따 먹은 것이라고? 이런 말라비틀어진 개소리를 지껄여댄 저의가 뭐냐?"

나는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패 죽이고 싶었던 놈들을 용서해 보려고 하다가 가슴이 다 무너지고 속만 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놈들은 진하게 봐줘을 때는 오히려 속이 다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리고 예수의 이해가 되지 않는 몇 가지 말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와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작자를 심하게 패주고 싶었던 충동을 느꼈다. 예수의 이런 말들이 선가의 화두처럼 내 가슴을 휘어잡고 의심을 돈발케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전략이다. 그대는 예수의 이 말을 진지하게 물고 늘어져야 예수가 그대에게 알리고 싶은 세계를 향해 넘어갈 수 가 있다. 이것이 선의 공안이며 제자를 가르치는 전략이다. 진리를 알고 싶다는 열망이 없다면 결코 그대는 이 공안들을 물고 늘어질 수 없다. 진지하게 물고 늘어지는 자만이 이 세계를 넘어 고타마 붓다가 도달했던 저 피안의 언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올라갔던 하나님 우편의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선가의 공안하나를 소개 하겠다.

향엄 큰스님이 말했다.

"가령, 누가 나무 위에 매달려 있다고 하자. 두 손은 등뒤에 꽁꽁 묶여 있고, 발판도 없이 다만 입으로 가지를 물고 있다고 하자. 그때 나무 아래서 누군가 나무 위에 있는 사람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면 어쩔 것인가. 대답하지 않으면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되고(즉, 죽게 되고), 대답하면 입을 열어야 하므로 목숨을 잃는다.

그대가 산을 오르다가 산적을 만나서 두 손이 묶인 채로 발판도 없이 절벽에서 입으로 가지를 물고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절박한 상황인데 누군가가 그대를 항하여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이냐? 대답하지 않는다면 활로 너를 쏘아 죽이겠다."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그대가 입을 열어 대답을 한다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것이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활에 맞아 죽을 것이다. 자 그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날 것인가?

이것은 선가의 대표적인 향엄상수(香嚴上樹)라는 공안이다. 그대가 이 공안을 풀고자 한다면 진지하고 절박하게 참구하며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대가 이 공안을 풀어 낸다면 선과 도와 복음의 정수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예수가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과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다'라고 하는 말도 공안과 같다. 예수는 이 말을 그대에게 툭 던져주고 아무런 설명도 해주고 있지 않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이러한 불친절은 오히려 가장 친절한 태도이다. 장황한 설명을 덧붙였다면 제자들은 말의 홍수속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다.

예수는 왜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사랑의 사도가 아니었던가?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사람들은 예수시대만큼 절박하지도 않다. 그대는 예수의 화두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파고들어가기보다는 친절한 설명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안목이 없는 자들의 너무나 많은 오해와 잘못된 주석이 예수의 말들에 덧붙여져서 예수가 가르쳐 주고 싶어했던 진리는 너무나 오랬동안 길을 잃어왔고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엉뚱한 곳에서 헤메고 있다. 이제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자!! 그대는 예수의 이 말의 숨은 의미가 궁금한가?


한성영 / 블로거(http://blog.daum.net/steppingstone77/17198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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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나누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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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규 (211.227.112.71)
2010-07-14 10:35:30
근데 왼뺨이 먼저가 아니라 오른뺨이 먼저 인데요~ 약간 미묘한 차이가...
'미우라 아야꼬' 여사에 의하면 오른편 뺨을 때릴려면 손등으로 때려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적습니다. 매우 모욕적인 구타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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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83.103.29.11)
2010-07-13 16:39:27
나도 궁금하네요.
뭐라고 설명할런지.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를 바르게 드러낼런지.
아니면 뻥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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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 (210.2.47.224)
2010-07-12 14:07:28
대단히 궁금합니다.
왜,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는지?
최근에 현응 스님이 집필하신 깨달음과 역사란 책을 거의 다 보아가는데
보디 샤트바의 용어로 불교를 쉽게 다가가게 하는 글 솜씨가 석학이십니다. 기독교의 용어가 불교의 용어와는 그 사용하는 언어만 다를 뿐 그 뜻은 거의 같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벗어버린다면 종국적인 깨달음의 범주에선 같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달음과 역사 "보디 샤트바"의 균형잡힌 실천이 결국 불교의 목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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