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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마음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일곱 번째 주일(20100711)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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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7월 08일 (목) 10:54:08
최종편집 : 2010년 07월 08일 (목) 23:27:56 [조회수 :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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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일곱 번째(20100711)
성서일과/ 시 25:1-10; 신 30:9-14; 골 1:1-14; 눅 10:25-37
본문/ 신명기 30:9-14
농부의 마음

          (신 30:9-14, 개정)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10] [9절]과 동일함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오늘 본문은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이스라엘에게 선포한 유언과 같은 말씀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전한 모든 율법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鳥之蔣事其鳴哀 人之蔣事其言善 이라, ‘새가 죽을 때는 그 소리가 애닲고, 사람이 죽을 때 그 말이 선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경중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죽음 앞에서 한 말씀이니 더욱 무겁게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율법을 복음과 대비시켜 무시하거나 그 가치를 낮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빈번히 이런 구도를 사용하여 복음의 능력을 역설하는 바울도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맡은 그것이 다른 민족보다 나은 점이라고 말합니다.
          (롬 3:1-2)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곧 복음은 율법과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완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믿는 자들은 율법과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긴 다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그 다리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다 건널 수가 없지만 율법의 말씀이 없으면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쓰임새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어항에 있는 물고기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물고기를 어항에서 꺼내서 죽지 않을 만큼 밖에 두었다가 다시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5분으로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서 6분, 또 7분 이런 식으로 물 밖에 나와 있는 시간을 늘려 갔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제 물고기는 물에서 있는 시간보다 물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이 몇일 간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항을 들고 갈 수가 없어서 그냥 갔다가 돌아와 보니 물고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물 밖에서 사는 데 익숙해진 물고기가 너무 오래 물속에 있어 그만 물에 빠져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럴 듯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아야 하고 소는 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물론 물 속에도 여러 가지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 때문에 물 밖에 나가서는 안 됩니다.
물 밖으로 나가면 잠시 살아 있을 수는 있으나 결코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물고기에게 있어서의 물과 같습니다.
그 안에 속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율법-말씀이 귀찮고 어려울 때도 있으나 그렇다고 율법-말씀을 떠나면 잠시 살 수는 있으나 결코 오래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잠시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시 1:1-10)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물 밖에서 사는 법을 말하는 것이 악인의 꾀입니다.
물 밖에서도 능히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물 밖에 나가서 한 번 살아 보자고 말하는 것이 죄인의 길입니다.

의인이 복이 있습니다.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계약을 했습니다.
그 계약의 핵심이 예레미야 7:23에 나와 있는데 같은 말이 11:4에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계약의 중심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전능하셔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여호와.
그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여호와.
그 여호와를 내 하나님으로 삼는 길이 말씀을 따라 사는 일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사민(四民)이라고 해서 백성의 반열을 넷으로 나누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그것입니다.

사(士)는 선비입니다.
도(道)와 진리(眞理)의 표상입니다.
선비는 도리(道理)를 따져 사는 사람입니다.
법을 말하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 진짜 선비입니다.
진짜 선비는 발걸음 하나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몸가짐부터 도리에 맞게 갖추어야 했습니다.
이런 것을 일러 법도(法度)라고 했습니다.

어떤 선비 집에 하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하인이 생각하기를 자기는 하루 종일 일만 하는데 주인 선비는 하는 일 없이 책상머리에 앉아 책만 읽고 있었습니다.
선비가 부러웠습니다.
나도 양반으로 태어나 선비가 되었다면 이 고생 안하고 편안했을텐데...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자연히 일에 꾀가 생겨 맡은 일을 등한히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인의 생각을 눈치 챈 선비가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선비가 되어 보겠느냐?“ ’정말이요?‘ 하인이 놀라 물었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하인은 사흘 동안 선비로 살아보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하인은 목욕을 하고 머리를 틀어 상투를 지어 올린 다음 깨끗한 옷을 갖추어 입고, 머리에 망건을 썼습니다.
그리고 책상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책을 폈습니다.
글자를 알지 못해서 읽지는 못하고 그저 책장을 뒤적거릴 뿐이었지만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면서 온 몸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리에는 쥐가 오르고, 머리에 쓴 망건은 머리통을 파고드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선비가 되려면 참아야 하겠기에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러나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시작했는데 점심때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점심때까지라면 혹 몰라도 이렇게 사흘을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하인은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참지 못하고 주인을 불렀습니다.
‘ 더 못하겠습니다.’ 말하고서는 머리에 쓴 망건부터 벗었습니다.
날아갈 듯 시원했습니다.
하인은 다시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이랴! 이랴!’ 소를 모는 소리에 힘이 실렸습니다.
그렇게 즐겁게 일을 하는데 갑자기 소가 딴청을 부렸습니다.
가라는 대로 가지 않고 자꾸 딴 곳으로 가는 겁니다.
하인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랴! 이 눔의 소,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망건을 씌워서 맹자를 읽게 할까 부다.“

선비로 산다는 것, 법도를 따져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여간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요즘으로 치면 법 만드는 국회의원, 법을 집행하는 판. 검사나 변호사, 가르치는 일을 하는 선생님 등이 여기에 속하겠습니다만 이들이 법도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소나 돼지보다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선비는 아무리 추워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데 요즘 선비들에게는 그런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비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농(農)은 농사짓는 사람들입니다.
법(法)의 구현입니다.
법을 연구하고 말하지는 않아도 그 삶 자체가 법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고 땀 흘린 만큼 수확하는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난다는 사실을 절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씨앗 하나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로 거두게 되는 하나님의 복을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콩을 심고 메주를 거두려고 하지 않고, 씨앗 하나로 1,000배 10,000배로 거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방법을 농법이라고 하고, 농사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천재지변이라도 있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수도 있지만, 심은 대로 나고, 수고한 대로 거둔다는 법을 의심하는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어서 의인이 아니요, 믿음으로 의인인 사람들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다들 기피하는 형편이지만 이들이 없이는 사람의 삶 자체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공(工)입니다.
기예(技藝) 기술과 예술의 표상입니다.
하나님이 내신 것에 손질을 보태서 그 가치를 높이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수공하는 기술이 뛰어남을 일컬어 ‘공교하다’ 합니다.
공교한 장인이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묘한 것은 개역성경에 33회 나타나는 이 표현이 두세 번의 예외를 빼고서는 모두 단 두 가지 일에 한정되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성막과 성전을 지을 때 가장 공교한 장인을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공교한’ 이라는 말이 출애굽기에 집중적으로 나타타고 있습니다.
          (출 35:35, 개역) 지혜로운 마음을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사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은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고 공교로운 일을 연구하게 하셨나니...

다른 하나는 우상을 만드는 일에 공교한 장인이 동원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40:19-20) [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이로 미루어 볼 때 공-장인의 일은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첫째는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처음 모습입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은 찌그러지고 혼탁해진 인간의 영혼을 바르고 맑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일러 예술이라고 합니다.
          (시 33: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둘째는 편리함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물체로 만드는 것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술이라고 합니다.
편리한 것이 불편한 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리한 것을 좇으면 나중에는 사람이 기계의 종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편리한 것은 일하는 시간을 줄여주는 큰 장점이 있는데 이상한 것은 일 하나 하나를 따지면 편리하고 쉬워지는데 사람 사는 전체 모습은 더욱 바쁘고 힘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그것이 없을 때에 하루가 걸리는 길을 한 시간으로 단축시킵니다.
이치대로 하면 그 남은 시간만큼 한가로워야 하는데 오히려 더 바빠진다는 것입니다.
공이 최고조로 발달한 시대가 현대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처럼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역사 이래 없다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넷째는 상(商)입니다.
술(術) 그것도 사술(詐術)의 표상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장사는 물건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아가는 중에 이윤을 붙여 값을 올립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정작 물건에 어떤 변화도 없다는 점입니다.
같은 물건인데 파는 사람에 따라 값이 달라지기도 하고 팔리는 장소에 따라 값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때로 터무니없는 값이 매겨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건도 없이 돈만 왔다 갔다 하는 수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 버는 일에는 장사만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같은 장사를 해도 사람에 따라 망하기도 하고 떼돈을 벌기도 합니다.
씨앗 하나로 만 배, 백만 배로 거두는 길입니다.
한마디로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어떻게 사람을 잘 속이느냐가 장사를 잘 하는 비결이 됩니다.
이런 일을 술수라고 합니다.
술수는 정당한 법이 아닙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방법입니다.
          (시 58:5)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그래서 옛날부터 장사하는 사람이 잘 살기는 해도 사람대접은 온전히 받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말씀에 순종하여 산다는 것, 율법을 지켜 행한다는 것은 농사꾼의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수고한 만큼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30배, 60배, 100배로 거두는 복을 주십니다.
헛되이 수고하는 법이 없습니다.
9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선비로 사는 일은 어렵습니다.
없다고 해야 합니다. 선비 같은 선비 하나만 있으면 망해야 할 나라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렘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바울은 말했습니다.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농부로 사는 사람은 많이 있었고 여전히 많습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뜻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점점 그렇게 사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농사를 지어야만 농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농부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기술자가 되어도, 장사를 해도 농부의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농부의 마음을 지닌 기술은 예술이 됩니다.
농부의 마음을 지닌 장사는 상술이 아닌 상도가 됩니다.
기술자에게 농부가 되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장사꾼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농부의 마음을 지니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달린 일입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농부의 마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일입니다.

사족(蛇足)

그러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이미 말씀드렸듯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 인생이 땅에서의 삶으로 마친다면 율법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막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오는 세상이 습니다.
어떤 모양일지는 말과 글로 형용할 수 없으나 우리 인생은 지금 이렇게 살다가 죽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는 세상-내세가 있습니다.

복된 삶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지닌들 무엇하겠습니까?
복된 삶이라고 한들 오는 세상에 거할 자리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 안에서 복되게 사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입니다.
금세에만 해당되는 복은 온전한 복이 아닙니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을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요, 복의 완성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온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복음을 믿는 자가 되어 금세와 내세에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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