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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구도자였고, 수행자였다.예수의 가르침을 찾아서(겨자씨10)- 수행없이 깨달음은 자랄 수 없다.
한성영  |  h680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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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7월 05일 (월) 01:42:10
최종편집 : 2010년 07월 05일 (월) 23:18:25 [조회수 : 3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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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이 기름진 땅에 떨어지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온갖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렇다. 씨는 기름진 땅에 떨여져야 한다. 기름진 땅에 떨어져야 씨는 잘 자라날 수가 있다. 얼마전 Tv에서 . ‘농약 한 방울, 비료 한 주먹’ 없이 사과를 키우는 일본의 기무라 아키노리라는 농부에 대해 방영을 했다. 그는 농약엘러지때문에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농약을 쓰지 않고 사과를 재배해보자는 결심을 했다. 그의 결심을 듣고 주변 이웃들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를 '아오모리의 돈키호테'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10년이나 노력했지만 사과는 한 개도 열리지 않았다. 농약과 비료에 길든 사과나무의 야성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수입이 없어서 밑바닥 생활을 했고 생계를 위해 나이트클럽 호객꾼으로 나서기도 했다. 폭력배에게 맞아 치아가 두세 개만 남고 모두 빠졌다. 목숨을 끊을 생각으로 산에 올랐다.

산에서 우연히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도토리를 보았고 섬광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비밀은 흙에 있었다. 그 이후 그는 과수원에 잡초도 뽑지 않고 관리도 하지 않으며 방치해 두었다. 흙이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비료나 농약을 수십년간 뿌려왔던 땅은 딱딱해져서 잡초조차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면 흙도 기름지게 된다. 세월이 10년이나 흘렀지만 사과는 한 개도 열리지 않았다. 농약과 비료에 길든 사과나무의 야성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무농약 자연농법을 시작한지 10년만에 결국 탁구공만한 사과 두 개를 얻게 되었고 다시 4년후에 많은 사과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의 농법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아오모리현에 상륙한 태풍때문이었다. 주변 과수원의 90%의 사과가 떨어졌지만 기무라의 사과는 80%가 멀쩡했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사과나무가 땅속 20m까지 뿌리를 내렸고 가지와 나무가 굵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과는 병충해에 강해졌고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도 자연치유력도 생기게 되었으며 썩지도 않았다. 단지 수분이 증발하며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돌아갔다. 사과의 맛과 질이 화학농법을 하는 사과들보다 훨씬 좋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토양이다. 깨달음의 씨가 자라기 위해서는 토양의 질이 좋고 풍성해야 한다. 그대에게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깨달음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대라는 토양이 깨달음이 자랄 수 있을 만큼 풍성해야한다. 그대의 내면의 밭은 화약비료나 농약같은 유해성분에 길들어져 있다. 그대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는 무엇에 의존하여 살아 왔는가? 그대가 의존해서 살아왔던 모든 것들이 바로 그대 자신을 말해준다. 그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수 많은 것들에 의존하고 집착해서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그대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마약을 팔고 있다. 아니면 화폐가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다른 사회적인 능력이나 명예, 성적인 매력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론때문에 과학이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는 것 처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살 수 있는 자본의 힘만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자본은 전에는 넘어서지 못했던 경계들마저 허물고 그것들을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돈은 실상 모든 안전과 만족을 줄 수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대에게 성적인 친밀감이 필요하다면? 돈으로 그것을 사면 된다. 그것을 공급해 줄수 있는 다양하고 세련된씨스템과 공급자들이 그대가 지갑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다. 의학과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간의 건강과 수명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듯이 보인다. 교육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도 그대는 돈으로 살 수 있다. 통계는 돈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상한가를 치고 있다는 결과를 버젓이 보여주고 있다.

외모가 문제가 된다면 돈을 투자라라 기술은 그것마저 극복할 것이고 문제는 그대가 지불할 능력이 있는가이다. 노후생활도 돈이 있다면 그대는 안전하고 매끄럽게 넘어갈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가 문제가 있는가? 사회생활? 가정생활이 문제가 있는가? 돈을 지불하라. 전문가들이 그대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오감의 만족을 긍정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는, 지불능력의 인간상을 자신도 모르게 제시하고 있다.우리는 지금 소비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최대의 미덕으로 부상하는 사회를 향하여 소리없는 전진을 하고 있다. 상업자본가들은 인간의 나약한 약점을 파고들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암암리에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우리는 쉽고 편하게 얻을 수 있는 만족때문에 더 큰 댓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대가 가시적인 외적 토대들에 집착하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내면의 토양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가? 천박한 성공주의와 승리의 신화를 교리와 적당히 버무려서 팔고 있는 현실 기독교를 보라 그들은 말한다. 성공하고 싶은가? 돈을 벌고 싶은가? 자녀가 성공하기를 바라는가? 존경받기를 원하는가? 그대의 오감과 자아가 만족을 얻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여기 이곳 십자가 밑에 돈을 지불하라, 그리고 그대의 영혼을 교회에 저당잡혀라 그리고 그대의 그 모든 욕구와 열망을 긍정하라 아브라함을 보라! 기독교의 신은 생육과 번성의 신이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무뇌아처럼 야훼의 명령을 지켜 이삭을 죽이려 했듯이 그대가 교회십자가 밑에 얼마나 의리를 담보해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 여호와는 계산이 빠른 신이다. 헌금 봉투안에 그대의 의리를 담아서 그것을 입증해 보이라. 그 마저 힘들다면 각종예배와 행사에 머릿수를 성실하게 채워줘서 나 여호아의 체면을 세워주거나 교회일에 노동력을 제공하라, 내 나와바리에서 충성한 것들은 그 댓가를 반드시 보장하겠다"

그대는 아니라고 부정할지라도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대가 얼마나 많은 것들에 터무니 없이 의존해 왔는 지 확인하게 된다. 그대의 내면의 토양은 너무나 부실하다. 깨달음이 자라기는 커녕 깨달음이 일어날 수도 없다. 아니 그대는 그것을 아예 무시하고 쳐다보려하지조차 않는다. 땅이 농약과 화학비료에 중독되어 있는 것처럼 그대의 내면의 토양이 어설픈 것들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오히려 그 모든 농약과 화학비료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고 있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듯이 보인다. 아니 벗어나다니 오히려 그대는 그런 짓을 아마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기무라 아키노리가 10년의 고생 끝에 풍성한 자연토양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목격했듯이 그대가 의지하던 허상에서 벗어나 예수의 복음의 정수속으로 들어가 깨닫고나서 그 깨달음이 자라나야 예수의 가르침의 위대함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그대는 기무라처럼 예수처럼 고타마처럼 위험을 무릎쓰고 그대가 기존에 의존했던 모든 것들을 내려 놓고 진리를 향한 열망을 가지고 예수의 복음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야 한다. 그러면 그 나무는 실한 열매를 맺고 이웃들이 그 자리에 둥지를 틀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된다. 예수도 부처도 전부 그 길을 걸어 갔다.

예수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구도자였고 위험하고 불안한 길을 기꺼이 걸었던 수행자였다. 그리고 그 길이 옳았음을 온 몸으로 확인한 무상정등정각을 이루고 십자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대가 깨닫고 수행을 하게 된다면 예수처럼 십자가 속으로 걸어들어 가지는 않더라도 아키노리의 사과나무처럼 건강해지고 실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웃과 그 열매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교회안에는 구도자와 수행자들은 없고 말도 않되는 교리의 마약을 팔고 있는 환전상들과 비둘기상인들만이 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대가 그 판을 둘러 엎고 걷어 차고 나와 예수가 말한 진리의 문, 그 좁은 문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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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 (210.2.47.224)
2010-07-12 14:14:10
그가 살았는지 신화의 인물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성서를 통한 그의 행동은 필자님의 주장과 같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선 그의 달변이 희랍 철학적 운문이 많이 등장하는 고로 이는 해석서가 맞다고 여겨집니다. 도마 복음서를 보면 선문답하는 고승으로 비치기도 하구요. 어떤 것 하나 실증할 수 없는 주장만 난무하는 기독교의 경전은 불교의 경전에 비해 그 중량감이 많이 떨어진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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