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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삽니다.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제 3주(20100613)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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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6월 11일 (금) 16:01:35
최종편집 : 2017년 12월 13일 (수) 02:06:12 [조회수 : 2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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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제 3 주(20100613)
성서일과 / 시 32; 삼하 11:26-12:10, 13-15; 갈 2:15-21; 눅 7:36-8:3
본문/ 갈 2:15-21
은혜로 삽니다.

(갈 2:15-21)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옛날 중국의 황제는 천자 곧 하늘의 아들로 받들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권력이 너무나 커서, 황제 자신도 자기 권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백성들은 황제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므로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천재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귀신과도 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백성 뿐 아니라 대부분의 황제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절대 잘못이 있을 리 없다고 믿었습니다.
가장 높은 자이니, 왕이 스스로 죄인이라 말하기 전에는 왕에게 죄를 물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누구도 왕에게 죄를 물을 사람이 없었다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도 비슷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이 그 모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왕은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가 곧 하나님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은 어느 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옥상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벗은 몸을 본 다윗은 눈이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흔적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육에 속한 정욕에 이끌렸습니다.
그 순간부터 다윗은 큰 죄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한 죄가 또 다른 죄를 낳았습니다.
간음하는 죄를 범하니, 속이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속이는 죄로 덮어지지 않으니 죽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다가 죄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려고 하다가 더 큰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도무지 숨길 수가 없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다윗에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오리려 모두가 다윗의 죄에 협력했습니다.
밧세바를 데려오고, 우리야를 죽이는 일에 수족이 되어 거들었습니다.
죄를 물을 수 없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밧세바를 데려다가 첩으로 삼았습니다.
지금까지 지은 죄를 알았더라면 거기서 멈추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죄에 죄를 더해가며 살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렇게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다윗이 바라던 대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예언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여호와께서 보내서 왔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왕이 재판해 주셔야 할 일이 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마을에 아주 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이웃해서 살았다.
부잣집에는 소와 양이 굉장히 많았고, 가난한 집에는 새끼 암 양 한 마리밖에는 없었다.
한 마리뿐이었지만 암놈인지라 장차 많은 양을 낳게 되리라는 소망이 걸린 귀한 놈이었다.
그래서 마치 자식이나 되는 양 애지중지 길렀다.
잘 때나, 먹을 때나, 마실 때, 자식과 꼭 같이 대했다.
심지어 마시는 잔을 같이 쓸 정도였다.
딸과 다름이 없었다.

어느 날 부잣집에 귀한 손님이 왔다.
손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야겠는데 아무리 귀해도 소를 잡을 수는 없기에 양 중에 적당한 놈이 없나 두루 살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잡을만한 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큰 놈은 너무 크고, 작은 놈은 너무 작고, 이 놈은 예뻐서 못 잡겠고, 저 놈은 곧 새끼를 배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었다.
부자는 문득 가난한 집에서 기르는 암 양 새끼를 생각했다.
그만하면 적당했다.
더구나 그 집에는 양이 한 마리밖에 없으니 있으나 마나할 것 같았다.
부자는 종을 시켜 그 양을 잡아오게 했고 그것으로 손님을 대접했다.
자식 같은 양을 생으로 빼앗기는 주인의 심정은 알 필요가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다윗의 마음에는 분노가 가득 차올랐습니다.
세상에 그런 악랄한 놈이 있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다윗은 크게 소리쳤습니다.
“이런 천벌을 받을 놈이 있나! 그런 놈은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내가 꼭 죽이겠다. 이 악을 반드시 갚아야 하겠다.”

길길이 뛰는 다윗에게 나단이 가만히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죽어야 할 자가 바로 너라고.....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 왕과 같이 사는 자들입니다.
권세가 왕과 같고, 신분이 왕과 같은 자가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왕과 같은 것입니다.

왕과 같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죄에 대하여는 숨기려 합니다.
더 많은 죄, 더 큰 죄로 처음 지은 죄를 덮으려고 하면서도 정작 그 죄로 아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왕이기에 아무도 그가 지금 죄를 범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에 대해서 스스로 눈 감으면 죄인이라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기 죄는 감추면서, 남의 죄에 대하여는 심판합니다.
양 한 마리 빼앗은 일에 그렇게 분노하면서 반드시 죽이리라고 말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놔두면, 왕으로서 할 일을 못하고 사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아닙니까?.
우리가 왕과 같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도 우리가 죽을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도 나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죽을 죄를 범했으면서도 자기를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의 죄에 대하여는 어김이 없습니다.
반드시 죽이리라, 그래서 그런 일이 없게 하리라 다짐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그렇게 악을 행하고, 속이고, 심지어 죽이는 죄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반드시 죽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지만, 스스로 죄를 숨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왕을 죽여야 합니다.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어야 할 사람 다윗이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왕이 아닌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남에게 말하고, 남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주인의 말을 듣고, 주인의 심판을 받는 자입니다.

다윗이 살아남아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말을 듣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을 달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다시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의 집을 영원히 평안하고 견고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의 집은 바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어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에게서 완성된 그 집입니다.
후일 다윗이 노랬습니다.
(시 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어떻게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왕이 되지 않고,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왕이었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 말을 들었습니다.
죄를 짓는 일에도 순종하고, 죄를 감추는 일에도 순종했습니다.
왕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마음을 찢었습니다.
더 이상 죄를 숨기지 않고, 토설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게 죄가 없다 말하지 않으셨으나, 그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다윗은 죄를 죄로 덮으려 했는데 하나님은 은혜로, 사랑으로 덮어 주셨습니다.

자기에 대하여 왕으로 사는 인생은 죄를 죄로 덮으려고 합니다.
더 큰 죄, 더 많은 죄를 쌓아가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로 그 죄를 덮어 주십니다.
죄에 덮인 죄는 여전히 죄의 냄새가 나지만, 사랑과 은혜로 덮은 죄는 사랑의 향기, 은혜의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죽을 죄인이 죽지 않고 사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왕이 되어 나를 지배하는 그 나를 죽이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죽을 자가 죽지 않고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스스로 죽이지 못하면 하나님께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이 인생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뼈를 쇠하게 하고, 진액을 말려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의 정체를 밝히 드러내 주는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양 한 마리를 빼앗은 부자에게 이 등불을 들이대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죽어야 할 죄인은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주의 은혜를 구했을 때,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워 주시는 여호와의 은혜가 임했던 것입니다.
시 5편은 다윗의 그 심정을 노래한 것입니다.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5]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다윗에게 악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오만한 자였습니다.
행악자였고, 거짓말하는 자였습니다.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였습니다.
의로울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하며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은 것입니다.
주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누가 받습니까?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종의 자리에 서는 자에게 임합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왕의 죄를 물어 왕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스스로 죽든지, 그에게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죽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죽으면 안 됩니다.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죽이면 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자가 되는 길입니다.
스스로 죽는 일 그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는 일이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입니다.

북이스라엘에 아합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왕으로서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은 자입니다.

아합의 궁 가까이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아합이 그 포도원을 탐내어 사려고 했습니다.
후하게 값을 쳐주겠다고 했고, 더 좋은 다른 포도원으로 바꾸어 주겠다고도 해봤지만 허사였습니다.
나봇이 율법을 들먹이며 팔 수가 없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욕심을 이루지 못하고 안달하는 아합에게 왕후 이세벨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정을 전해들은 이세벨이 말합니다.
(왕상 21:7)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이르되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아니 당신이 왕인데....
무슨 그까짓 일로 고민을 해서야 왕이랄 것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그 길로 사람을 시켜 나봇을 모함하게 했습니다.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증언케 하고,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 그를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죄 없이 죽어버린 나봇의 포도원은 아합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죄 없는 나봇을 율법의 조항을 이용하여 죽였던 것입니다.
다윗이 지은 죄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듯이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말하게 했습니다.
(왕상 21:19)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의 죄를 지적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누구도 아합의 죄를 죄라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네가 그 죄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아합도 하나님의 엄중하신 말씀 앞에 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왕상 (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그러나 아합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왕인 자기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저주 앞에 잠깐 수그리는 듯 했으나 끝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대적했습니다.
자기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성경은 아합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상 22:37-38) 『[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하니라 [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녀들이 더러워진 몸을 씻는 곳에서 그 피를 씻었다고 했으니, 씻어도 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어서도 그 죄를 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목욕하는 곳은 몸을 씻는 곳이지, 죄를 씻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사하고, 죄를 가리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이십니다.
그의 종이 되어 그에게 은혜를 구할 때 죽을 죄를 씻고, 살 길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아합은 같은 줄에 있는 사람입니다.
빼앗고, 속이고, 죽이는 그 일에 한 치도 틀림없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은혜로 말미암아 살았고, 아합은 저주 가운데 죽었습니다.
무엇이 그 둘을 그렇게 다르게 만들었습니까?
아합이 왕인 자기를 죽이지 못하여, 종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사는 것인데, 은혜 받는 자리에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말하거나와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서 왕과 같이 행하는 그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은혜로 사는 자는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누가복음 7장에는 주를 대접한 바리새인과 주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죄인 소리를 듣던 마리아는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 맞추며. 그 머리털로 발을 닦고, 옥합을 깨뜨려 그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이 광경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39] ....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죄인인 주제에 별 짓을 다한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도 그렇지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면 저렇게 하도록 버려두지 말아야지...
그의 심중을 꿰뚫어 아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41] ...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사랑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녀의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은혜 받은 자는 은혜 베푼 자를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많은 은혜를 받을수록 더 많이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그렇게 깊이 사랑한 것은 그에게 받은 은혜가 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 하느니라

바리새인과 마리아는 예수를 대접하는 자였다는 점에서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책망을 들었고, 마리아는 더욱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바리새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의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종이 하는 일 곧 물로 발을 씻고, 입 맞추고, 감람유를 붓는 일 가운데 어는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앞에서 종이 되지를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를 대접하여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받은 은혜 때문에 주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종이 되었습니다.

눈물로 물을 대신했습니다.
발에 입맞춤으로 입맞춤을 대신했습니다.
향유로 감람유를 대신했습니다.
다른 종들이 하는 것과 같은 일로는 주를 향한 그녀의 큰 사람을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 말하거니와 종이 되지 않으면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주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받은 은혜가 클수록 주를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종의 자리에 서시기를 기원합니다.
은혜 받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 받은 자는 주를 사랑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7:47) ...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 하느니라

은혜 받지 못한 자는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은혜를 받고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은혜가 헛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 바울이 말합니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주님의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고난 받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혭니다.
우리가 이 은혜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은혜로 산 자는 사랑하며 사는 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살리심을 받았으면 마땅히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는 그 은혜로 죄를 덮고 사는데 사랑하지 않으면 덮였던 그 죄가 다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헛되이 죽은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말합니다.
[20]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랄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은혜로 살았음을 믿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사랑하는 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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