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5월15일 당당뉴스에 실렸다가 필자의 요청으로 내려졌으나 다시 필자의 허락을 얻어 원문 그대로 다시 싣는다.

영원한 사슬

▲ 채예진 양은 채현기 목사의 큰딸이다.동생과 함께 거창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현재 3학년이다.

시험 망 했어 으앙 죽고 싶다 진짜

시험이 끝나는 날에 낯설지 않게 들려오는 친구들의 푸념이 내 귀를 사로잡는다.
얼마나 못 봤 길래 죽고 싶다고...
라고 조용히 외쳐보지만 그 말끝에 붙은 '죽고싶다'는 습관적인 언어생활임을 알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적이 몇 번 있다
죽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별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지만, 그 말 한마디에 내 귀가 예민해진 것은, 바로 말처럼 쉬워져가는 죽음 때문이다.
며칠 전 일이다. 모의고사를 본 날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푸념들을 뒤로한 채 자습실 자리에 앉았다.
벙커를 울리는 '사그락' 시험지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내 시험지를 보려는데,
문득 작년에 우리 곁을 떠난 한 선배가 떠올랐다. 그의 이름은 '홍이레'. 자세히는 모르지만
나름의 우여곡절 끝에 복학하여 한 해 밑인 우리학년과 함께 2학년으로 지내던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고,
죽음의 소식만 남긴 채 긴 여행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죽음에 대한 의문이 그 선배와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한 나의 의문의 초점은 '도대체 왜?'라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친구들이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죽고 싶다고 말하는 건, 사실 더 잘하고 싶은데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하는 한탄이다.
결국 더 잘 살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런 한탄을 해보기도 하며 살기위해 발버둥 치는 것 보다 죽음을 택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여기서 난 내게 다가온 의문의 끝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갈 뿐, 그의 선택을 비난하거나 깊게 파고들어 자세히 알아내고 싶지도 않다.

모든 상황은 다르고, 그 입장을 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난 그를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일을 계기로 갖게 된 의문과 지금까지 생각해온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려는 것뿐이다.

가까이에서 일어난 죽음에 대해 많은 주변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얘기하기를 꺼려하거나 심지어 은폐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며, 난 세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는 우리가 기념하고 싶은 죽음과 그렇게 하지 않고 싶은 죽음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흐르기에, 우리는 눈앞의 현실에서 과거를 조금씩 잊어간다.
하지만 우린 그 자연스러운 흐름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그 들을 기념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기억되어야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바로 발버둥 친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적이 빛나든, 그 인격이 높임을 받든 그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명을 모두를 위해 갈고 닦은 이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겨져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은
결국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려있음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는 먼저 죽은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처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건 그 선배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느꼈던 것은 바로 두려움 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 주변의 사람들은 어떨까?,
조금 슬퍼하다가 또 다 잊어버리겠지?'
그 두려움은 죽음보다 존재감에 대한 걱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내가 그런 걱정을 했든 안했든, 결론은 첫 번째 생각에 대한 답과 같았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존재가 달라지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보다 소중한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생명의 연결고리가 우리를 만들었다면, 이젠 서로에게 기억되는 영원한 사슬로 나아갈 준비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는 동안에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아직 어린 나이에 할 얘기는 아니지만, 오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기에...죽음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당장 유서를 쓰거나 (있다면)재산을 정리 하자 는 게 아니다.

내게 주어진 이 시간, 이 하루를 내일 죽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말이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다.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의 종말이든 개인의 죽음이든 우리의 숨이 다하는 날까지 지금 '이 순간'을 후회 없게 열심히 살 때에 기억 속에 남을 우리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쉽게 내뱉었다고 쉬운 일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입력되는 세상의 우선순위와 그 실패에 따른 한탄이 절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모두가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날까지, 발버둥 치며 애쓰는 내 모습을 기대해본다.
부재함이 주는 깊이가 더 아름답게 부활하는 날까지... 영원한 사슬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