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우산

정   호   승

오늘도 비를 맞으며 걷는 일보다

바람에 뒤집히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끝내는 바람에 뒤집히다 못해

빗 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비 오는 날마다

나는 하늘의 작은 가슴이므로

그대 가슴에 연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므로

오늘도 바람에 뒤집히는 일보다

빗 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행복합니다

*

*

*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창비시선 88. 1995. 10. 7쇄본

 

  벗님,                                                      2001. 8. 16

   늙은 농부가 평생 처음이라던 몇 십 년만의 가뭄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리던 봄날을 지나자 이번엔 또 비가 자주 내리는 무더운 여름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번 여름에 잃어버린 우산만 3개입니다. 부서진 우산이 두 개구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기념품으로 받은 새 우산을 쓸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기념품으로 우산을 나눠주는 그런 세상이니 요즘도 지하도 입구에서 파는 비닐우산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시집이 언제 나온 건가 보았더니 1990년 10월에 초판본이 나왔더군요. 그래요 10여 년 전에는 요즘처럼 국지성 소나기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릴 때는 비닐우산이 불티나게 잘 팔렸겠죠. 그리고 나서 바람 불면 뒤집어지고 비가 그치면 버려지고……

   벗님,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 사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참 힘든 일일 겁니다. 그것처럼 혼자 사는 일에 익숙한 생활 습성을 가진 사람들 틈에 살아야 하는 함께 사는 생활습성을 가진 사람도 참 힘이 들 겁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체계적인 생활훈련이 가능했던 사회였던가요? 지난 한 세기 동안 무너져 내린 이 땅의 대가족 생활 이후 핵가족화 된 가정에서 이 땅의 새로운 세대인 젊은이들은 함께 사는 생활습성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체질화되었을까요?

   벗님, 우리는 지난 격동하는 현대사를 힘들게 살아오면서 목회현장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도 무던히 하고 그렇게 함께 살기 위한 이런저런 남다른 노력도 하며 살아왔습니다. 더불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참 설레는 마음이었고 그렇게 가는 줄 알았습니다만 우리들의 생활 습성은 어느덧 서구화되고 이기적인 개인중심의 생활에 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함께 가야한다는 구호 아래 가보면 혼자 살기 위한 몸부림이 함께 모여 있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함께 살아가는 방식도 습성도 문화도 사라져버린 현대화는 잘 살게 된 풍요일지 모르지만 홀로 남은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절망의 밤길을 굳이 걸어 나서는 사람들 중에 함께 살아가는 일을 훈련하고 단련하는 사람들이 있음은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요즘 후배들과 사귀며 함께 가는 일에 대한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애씀과 정성이 늘 헛손질일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손발이 안 맞고 이렇게 생각이 다를까? 신기하기만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생활에 익숙한 후배들과 함께 사는 일, 함께 손발 맞춰 일하는 생활 그것이 나에겐 꼭 비를 맞으며 걷는 참담한 기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늘도 비를 맞으며 걷는 일보다

바람에 뒤집히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그래요, 시인의 상상을 따라 생각을 바꿔 뒤집어 보는 겁니다.

   힘들고 어려운 그 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더 즐거운 일로 여기자는 말이죠. 그러면 신기하게도 너를 향한 불만과 원망은 사라지고 생각 가득 묘한 자유로움과 충만감이 솟구쳐 오릅니다.

끝내는 바람에 뒤집히다 못해

빗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그래요, 한 평생이라는 게 그리 긴 것은 아니죠. 그렇다고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닙니다.

    함께 살다보면 내게 주어지는 역할이 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산다는 것은 비닐우산에게 비 오는 날처럼 어쩌다 찾아온 기회를 내가 잘하는 역할로 너를 향해 맘껏 펼쳐 내보는 것이죠.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사는 거죠. 그가 알던 모르던 그건 그의 실력이니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호흡을 맞추고 손발을 맞추는 길고 긴 훈련과 연습이 더욱 중하고 중요한데 요즘같이 제 뿔인 세상에 누가 그런 걸 귀중히 여기겠어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귀중히 여기는 이가 없다고 단 한 사람인 너마저 없겠습니까? 너마저 없으면 어떻습니까? 단 한 사람일지라도 나 지금 여기 있으니까요! 

비 오는 날마다

나는 하늘의 작은 가슴이므로

그대 가슴에 연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므로

그래요,

시인의 상상력을 따라 가보면 바람에 뒤집히는 일보다 빗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행복한 비닐우산이라는데 그 비닐우산만도 못한 함께 사는 일에 대한 내 생활의 가치 기준을 과감히 내던져 버리기로 합니다. 신바람이 일어나는 함께 사는 일! 그것조차도 고집하지 않고 내버리기로 합니다. 비로소 또 하나의 자유로움이 나를 찾아옵니다. 그래요, 신바람이 일어나는 함께 사는 일을 내버린다고 그게 버려지겠어요? 버려지는 것은 오히려 내 가치판단이요 내 편견과 아집일 뿐이니 비로소 자유로워 행복해진다는 말이지요. 내 후배들의 생활에 가 보시면 버려진 신바람이 일어날 함께 사는 일에 대한 내 무모한(?) 열정이 즐비할 겁니다. 그것이 내 분노와 아쉬움과 답답함이 되었는데 오늘 이 시를 만나고 마음 비워 행복한 길을 떠납니다. 다시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안녕!

오늘도 바람에 뒤집히는 일보다

빗 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