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 민중항쟁 30주년을 반추하며

삼십년 전 이 땅에서
학살의 총칼을 앞세우고
노예 앞에 군림하는 독재의 핏발 선 광기 앞에
숨 한번 길게 토해내지 못하고
모두가 주눅 들어 살아야 할 그 시절
아, 그러고 보니
그 시절, 악마가 쳐놓은 그물 속에서
예배하는 자들 속에
교회의 첨탑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가기만 하고
거룩을 가장한 바리새인들의
찬송소리가 충만하던 그 시절
칠흑 같은 어둠
기만과 허위로 분칠한 숨 막히던 그 시절
번쩍이는 빌라도의 가슴에 단 훈장에
경의를 표하며 조찬기도회의 가증스런 기도소리
귓전에 맴돌던 그 시절
수많은 민초들의 주검으로 이어진 항거는
검붉은 피를 흘리며
계엄군의 총칼에 의해 치떨리는 분노의
함성으로 우리 곁을 사라져 갔다

이 땅에 새날이 오기를
이 땅에 새봄이 오기를
더 이상의 허위의 가면이 사라지고
독재의 음흉한 웃음이 사라지고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이
농부들의 억센 농투성이의 갈라진 손바닥이
한 인간의 삶의 표상으로 인정되는 참 세상이 오기를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지랄탄의 포화와 온갖 냉소와 빈정거림도
당연히 우리의 몫으로 여기면서 지난 세월을 버텨왔다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함 가늠할 수 없는 미래
맘몬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유혹의 손길
솔직히 때로는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지금껏 이 땅의 민초들이 당한 수난과
주검으로 항거한 열사들의 피맺힌 절규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인지
과연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이상향은 무엇인지
서양귀신들은 신식민지의 전형적인 수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존과 위신을 깡그리 무시하고
문화적 침탈과 식량 안보에 목을 죄여 오고 있다

잃어버린 10년 세월을 탓하며
온갖 가식과 거짓으로 등장한 MB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용산참사를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북한과의 관계는 전쟁을 촉발할 만큼 강경일변도로 나가더니
급기야는 백령도 천안함 참사가 터져
무고한 46명의 젊은이가 차가운 바닷물 속에 수장되고 말았다
한반도 대운하 건설이라는 거짓 명분이 씨도 먹히질 않자
이번에는 4대강 살리기라고 이름을 바꾸어
강물을 가로막아 보를 만들고
생명의 강을 죽음의 강으로 만들고 있다

잿빛 가득한 이 가뭇한 조국
언제 그 먹장구름이 걷히고
광명천지가 이루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아,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지난 세월 맞잡고 살아온 동지들이여
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려 하는가
멍든 역사 동강난 반도의 상처
강도 만난 여리고의 현장
민초 민중들의 가슴속 깊은 한 맺힘
악마의 유혹의 그물 속에서 유희를
즐기려 하는 무리들 틈바구니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새로운 변신을 꿈꾸는 것인지

우리의 힘 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또 시작하지 않고서는 안 될
운명적인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가 한줌의 거름이 되어서라도
우리를 죽이고 우리를 버려야 할
분명한 삶의 명제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류역사의 모든 선각자(先覺者)들이나 해맑은 지성들은
결국은 이름없이 사라져 갔을 때
그 빛이 더 영롱하지 않던가
그러니 동지들이여 나의 동지들이여
너무 실망하거나 자조하지 말게
그대들이 정녕 예수를 사랑하고
하느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음을 알고
끝까지 이 민족의 그루터기로
한 줌의 거름이 라도 좋으니
연기처럼 사라지는 아침 이슬이어도 좋으니
또 새날을 꿈꾸는 일이야 얼마나 신명나는 일이겠는가

이 땅에서 악마의 음흉한 웃음이 사라지고
매판자본 독점재벌이 잘못했다 사과하고
서양 귀신이 두 손 들고 물러가고
땀 흘려 일하며 하느님의 창조작업을
쉬지 않고 이어가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세상이 오기까지
동지여 어찌 우리가 가던 걸음을 멈출 수 있겠는가
빌라도의 번쩍이는 훈장에 경의를 표하는
교권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참목자에 의해
목양이 풍요롭고 평화가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를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찌 그 꿈을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정녕 그대들이 예수와 바울의 제자들이라면
어찌 이 민족의 십자가의 길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이제 삼십년 세월만큼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이 민족의 고난의 들판에 꺼지지 않는 들불로 타오르길
더 이상 패배주의에 감금되어
찰나적 환상과 자기위무의 연민에 빠져드는
나약한 속물근성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 자유한 삶을 위해
한 알의 밀알같이 자신을 버리고 또 버리기
이 땅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탐욕을 버리고 끝까지 섬기는 자로서 헌신하기
이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의 역사를 위해서라면
십자가에 달리시어 용서의 기도를 바치신
그리스도의 인간사랑과 그 한없이 낮아짐을 실천하기
절박함 목마름으로 생명의 심지에 불을 당기어
이 민족의 등불이 되기
그리하여 그대들 있음에 더 이상 절망이 없는
넉넉한 위로와 희망이 되지 않겠는가

이 시대 남은 거룩한 심지들이여, 그루터기여
아, 이 민족의 거름더미여 부활이여!

박철 목사(부산 좋은나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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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2010년 5월 9일 광주망월동 국립묘역에서 예수살기 주관으로 열린 광주민중항쟁 30주년 기념 현장예배 시 발표(좋은나무교회 박혜영 낭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