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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네가 낫고자 하느냐?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부활후 여섯 번째 주일(20100509)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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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5월 05일 (수) 10:48:49
최종편집 : 2010년 05월 05일 (수) 13:46:40 [조회수 : 3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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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 6 주(20100509)
성서일과/ 시 67; 행 16:9-15; 계 21:10, 22-22:5; 요 14:23-29(요 5:1-9)
본문/ 요한복음 5:1-9
진정,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루살렘 성전, 양문 곁에 한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연못의 물은 병자들을 치료하는 신통한 효험이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가히 생명수라 불러서 모자람이 없는 연못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 또는 친구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염원을 품고 몰려들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으며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노력과 고생을 하며 가산을 탕진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보듯, 병든 사람들은 병을 고치리라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고생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법입니다.
돈이 드는 일이라면 돈을 씁니다.
정성을 들여야 한다면 지극 정성을 쏟아 붓게 마련이죠.

그런데 양문 곁에 있는 그 연못은 그저 몸을 담그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병도 가리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병자들이 있었을까 싶도록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습니다.
연못의 신비한 능력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연못의 물은 어쩌다 한 번씩 간헐적으로 용솟음쳐 오르는데 그 때 가장 먼저 솟구쳐 오르는 그 물에 뛰어드는 사람 하나에게만 효험이 있었습니다.
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은 천사가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이 솟구쳐 오르는 시기를 짐작할 수 없어서 답답해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이 요동함을 보면서도 뛰어들 기회를 얻지 못해 안타까워했습니다.
되풀이되는 그 일에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병을 고치고, 기뻐 뛰는 모습을 보며, 나에게도 언젠가 저런 날이 오려니... 하는 소망 하나로 그 연못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병을 고쳐 떠나는 사람보다 연못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각자 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는데 모여 보니 거기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행각-나그네를 위한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언제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5 채의 행각이 지어졌고 거기에 베데스다-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그 신비한 연못도 그렇게 베데스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병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각색의 사람들이 그 행각에 머물며 물의 동함을 기다렸습니다.
부유한 사람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권세 있는 사람도 있었고, 미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학식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무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으며, 노인도 있었고,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형편이 다 달랐지만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점은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모든 사람들을 경쟁자로 만들었습니다.
어쩌다 닥치는 기회에 그것도 내가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소망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베데스다는 어느덧 연못 바깥의 사람들과 별 차이 없는 또 하나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연못의 신비한 능력을 듣고, 병든 몸을 추슬러 이곳에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병은 38 년이나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고쳐질 것 같았던 기대는 세월과 함께 사그라들었습니다.

본시 가난한 사람이었을까요?
아마 그랬을 것 같습니다.
솟구쳐 오르는 물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는 그 물에 몸을 던질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가난하다보니 도와줄 사람이 함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워서 지내는 형편이니 도와 줄 사람이 없으면 애당초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뻔 했습니다.
아니 차라리 오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찌어찌 베데스다까지 왔고, 이제는 그곳을 떠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도 꿈에 부풀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신비함이 그를 사로잡아, 부풀어 오르는 기대에 가슴을 울렁거리며, 자기에게도 그런 기회가 오기를 소망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물이 동함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는 물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두 해 지나다 보니 이제는 떠나는 일마저 어렵게 됐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누워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기가 여기 온 목적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는 것이 그에게 닥친 큰 문제였습니다.
이곳을 떠나서는 그나마 어찌 될지 모르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고자 했던 곳인데 이제 그만 집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질긴 목숨을 탄식하며, 새로울 것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 사람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다가와 발치에 섰습니다.
언뜻 보기에 병자는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따라 온 것을 봐서는 지체가 높거나 부자일 듯도 했지만, 남루한 차림새를 보면 그것도 아닌 듯 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감싸고 있는 듯 했습니다.
누워 있는 병자를 내려다보는 눈길은 온 세상을 다 빨아들일 것처럼 깊고 그윽했습니다.
병자는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녹음기처럼 되뇌던 ‘적선해 주십시오.’ 하는 말도 잊은 채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 사람이 입을 열어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나 마나한 빤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 올 일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빤한 질문에 대답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누워 있던 병자는 예수님에게 압도당했습니다.
그는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발치에 선 남자의 종이 되어서 대답했습니다.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낫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에 그 소망을 버렸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낫기 위해서 왔었는데 언젠가 모르게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그냥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이 동하지 않을 때에야 함께 사는 이웃 같아도, 물이 동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먼저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묻고 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몰라서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알기 위해서 질문을 합니다.

둘째는, 책임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을 추궁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도움 받는 자가 도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피기 위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하신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죄를 정하기 위해 물으심도 아니었습니다.
그 질문은 실망한 채 그냥 그렇게 하루를 살던 그 병자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그에게만 해당되는 새삼스러울 것도 유별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데스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서로에게 물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남의 문제가 곧 내 문제였기 때문에 새삼 물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물어 본다 한들 도와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어 보셨습니다.
도와주겠다고 먼저 말하지 않았어도 이심전심으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 병자로 하여금 생전 처음 보는 예수님을 일러 “주여!” 라고 말하게 한 까닭입니다.

새는 경계심이 유별난 동물입니다.
그런 새들이 사람의 손바닥에 날라 와 먹이를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의 경계심을 허물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만 한번 길이 들면 사람이 손만 펴면 새가 날라 와 앉게 됩니다.
그러나 매일 손바닥에 모이를 주는 사람이라도 오늘은 한 번 새를 잡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품으면 새는 절대 날아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걸 기심(機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기미가 있다, 없다’ 하는 식으로 쓰는 말과 비슷한 뜻입니다.

병자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이 분의 질문은 나를 돕기 위한 것이로구나 하는 기심을 느낀 것입니다.
그는 물어보시는 예수님을 대뜸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분명합니다.
그 병자에게 낫겠다는 소망, 잃어버렸던 그 소망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접어 두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눈앞에 선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처음 베데스다를 찾아 왔을 때의 그 설레었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분이 나를 도와주시리라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물에 들어갈 힘이 없어 더 이상 필요가 없었던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 예수님을 본 사람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보고 주여! 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종이 되어 당신을 의지하겠나이다 라는 고백이 그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의 짧은 대답에 깃들어 있는 소망과 믿음을 아셨습니다.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지체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병자는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만큼은 뜻밖이었습니다.
병자가 바랄 수 있는 소망은 물이 동하기를 기다려 주님과 그 일행이 그를 들어다가 물에 넣는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은 즉각적이고도 단순했습니다.

지금입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물에 들어가는 절차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일어나 걸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물이 동해야 한다고 되풀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즉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할렐루야!!

짧지만 긴 이야기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는 이유로 성전에 속한 유다인들에게 미운 털이 박히고 마침내 그들의 손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사족(蛇足)

사실 저의 설교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뱀을 그린답시고 다리를 그려 넣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혹시 하는 마음에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설교자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연못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모두에게 주어졌으나 모두가 그 능력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 전까지 이 땅에 허락된 은총의 능력이지만 지극히 제한된 사람들만이 이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각은 성전 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연못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행각이 지어졌으나 결국에는 행각이 연못을 포함하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행각에 모인 자들은 교인들입니다.
처음 행각을 세운 사람들의 뜻은 자비롭고, 선했으나 점차 행각을 유지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행각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먼저 행각에 머무는 사람들의 일용품을 공급하여 이를 취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순서를 정하고 대표를 뽑기도 했을 것입니다.
개중에 힘 있는 자들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있다가 다음 사람에게 돈을 받고 넘기기도 했을 것이고, 자기 식구들에게 넘겨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먼저 온 사람이 뒤에 온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괜한 시비를 걸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문의 병자와 같이 돌아보는 사람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성전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세상의 다른 곳과 다를 바가 없는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그곳을 일러 강도의 굴혈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베데스다 행각에 오신 예수님은 어쩌다 솟아오르는 연못의 물과는 달리 항상 흘러넘치는 생명수의 근원이십니다.
(계 22:1-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 샘물은 언제 누구에게나 흘러넘칩니다.
먼저 달려가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그가 던지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그는 물어 보시는 분입니다.
왜 행각-교회에 왔느냐고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필요하냐고 물으십니다.
행각이 집이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질문입니다.

지금 세상에 행각은 많아도 연못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연못 때문에 지어진 것인데 정작 연못은 잊혀졌습니다.
어쩌다 물이 동할 때 잠시 주목을 받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연못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본시 교회-행각이 없습니다.
그가 곧 교회-집이시기 때문입니다.
(계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러나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이 무익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 오셔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분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만든 교회에 살며, 들으려 하기보다 너무 많은 질문과 요구를 하고 삽니다.
언제 물이 동하지?
어떻게 하면 빨리 들어갈 수 있지?
좋은 자리가 어디지?
이번에는 누가 고침을 받았지?
저 사람은 언제 왔지?
저 사람은 누구야, 병자도 아닌데 왜 왔어?

질문이 많아질수록 엉뚱하게 변합니다.
본래의 일은 더 이상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고, 전혀 다른 일들에 관심을 쏟게 만듭니다.
적선을 구하는 일이죠.
먹을 것을 구하고, 안락한 잠자리를 구하고, 은과 금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그와 눈길을 마주하고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잊고 살았던 소망을 다시 찾고, 주를 믿어 그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차이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없는 교회는 베데스다 행각과 같습니다.
주님을 모셨다면 그곳은 어디나 교회일 수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 우물가에서 한 여자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요 4:21-24)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주를 모시는 일에 사람의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일에 순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는 일에 빈부귀천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를 믿고 순종하는 일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가 진정한 교회이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관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를 모시고, 그를 바라보며, 그의 음성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무리들이 모인 곳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처음 주를 찾을 때의 소망이 사라지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직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꿈과 소망을 이루어 가는 참되고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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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99.119.11)
2011-05-25 22:54:43
연못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각은 교회로, 행각에 모인 자들은 교인들로, 끼워 맞추는 오류(말도안되는 비유)를 범하고계시네요.
「아스클레페이온(Asclepeion)」, 즉 베데스다의 탄생의 배경입니다.

의학의 신이며 아폴론의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 (헬)Aesculapius (영)Asclepius」는 헬라의 잡신들(gods) 중 하나이다. 그는 죽은 사람까지 살려낼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보통 긴 외투를 입고 가슴을 드러낸 채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를 나타내는 상징은 진정한 의술을 상징한다고 하는 뱀(메디나 웜)이 감겨진 지팡이인데 이 지팡이는 진정한 의술을 상징한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자꾸 죽은 사람을 살려내어 저승에 죽는 사람이 더 이상 오지 못하게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지하세계(저승)의 신 하이데스가 제우스에게 찾아가 하소연했다. 하이데스의 뜻을 받아들인 제우스가 벼락을 던져 죽여 버렸다고도 한다.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그 당시의 병들을 치료하는 병원이었다. 이렇게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이 되었으며, 고대인들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서 하루를 보내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신앙을 가졌다. 그의 상징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로 알려진 지팡이로 뱀(메디나 웜) 한마리가 똬리를 틀면서 지팡이를 기어오르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현재 ‘미국 의학협회(AMA/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심볼마크’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주전(BC) 700년경부터 그리스 본토에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의학의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했고 주전 6세기에는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클리닉 「아스클레페이온(Asclepeion)」이 세워졌다. 깨끗한 물을 마시고 목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치료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스클레페이온」의 한 가운데는 맑은 물이 흐르는 분수대와 저수장이 있었다. 이 아스클레페이온의 하나가 바로 기원전 2세기 헬라제국의 유대통치기간(알렉산더-주전 336-323년)중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에 세워진 「베데스다」(요5:1-16)이다.

결론)
베데스다: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그 당시의 병들을 치료하는 신전 겸 병원이었다. 그러므로 연못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각은 교회로, 행각에 모인 자들은 교인들로 끼워맞출 수 없다.
리플달기
7 10
*** (24.199.119.11)
2011-05-25 23:24:15
위의 글 결론의 계속입니다.)
우리는 베데스다가 역사적으로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인 아스클레페이온으로 건설 된 그 당시의 병들을 치료하는 신전 겸 병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베데스다를 방문하여 38년된 병자를 자의적으로 고치심으로서 당시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인 베데스다의 허망 됨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38년된 병자의 고침을 통해 베데스다의 허무성과 병폐를 고치시고 동시에 이방 의학의 신전인 베데스다를 무너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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