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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 새땅 새사람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부활 후 다섯 번째 주일(20100502)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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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4월 28일 (수) 21:42:39
최종편집 : 2010년 04월 29일 (목) 11:27:59 [조회수 : 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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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20100502)
성서일과/ 시 148; 행 11:1-18; 계 21:1-6; 요 13:31-35
본문/ 요한계시록 21:1-6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계 21:1-6)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전도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전 3:1-2) [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끝이 없다면 시작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에 라는 뜻이죠....
그 말 속에 이미 끝을 상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조성하신 세상 끝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요?
창세기는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를 혼돈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끝나면 다시 혼돈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의 끝을 이루는 계시록은 그 모습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끝은 혼돈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시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하나님이 지으신 지금 이 세상입니다.
이것들은 다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끝은 이 세상이 없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창조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다시 지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 세상의 주인이 되리라는 소망과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새 하늘 아래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처음 만들어진 하늘이 열린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린 하늘 사이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의 구원역사가 시작되는 그 때에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사람들은 이전에 들을 수 없었거나 볼 수 없었던 일을 듣고,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지으신 세상의 이치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일들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세상에서나 일어날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시니 귀신이 물러가고, 바람이 잠잠해 지고, 바다는 잔잔해졌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하늘이 열린 것을 보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이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가 본 것은 바로 이 후에 마땅히 될 일 곧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실 일이었습니다.
처음 하늘이 열리면서 땅에 나타났던 그 일들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 아래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놀랄 일들이 아닙니다.
하늘이 열리면서 나타난 일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하늘, 새 땅에서 일어날 일들에 관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 새 땅에서는 이전 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간을 당신의 동산에서 추방하시며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땀이 죄로 물든 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라면, 눈물은 흙으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는 영혼이 쏟아내는 물입니다.
인생은 평생 땀을 훔치고, 이 눈물을 씻으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훔쳐도 다시 솟고, 씻어도 다시 흐르는 것이 땀이요, 눈물입니다.
그런데 새 하늘 아래, 새 땅에서는 그 눈물이 아주 사라지게 됩니다.
          (계 21:3-4)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신다는 처음 인생을 지으시고 함께 동산을 거니실 때의 그 모습입니다.
그 때는 땀 흘릴 일이 없었습니다.
동산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땀 흘릴 일이 없으면 눈물 흘릴 일도 없습니다.
땀으로 되지 않을 때 흐르는 것이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땀 흘리고, 눈물 흘리던 날들이 다 지나간 일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의 세상이 사라지고, 새롭게 지은 세상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새 역사는 변화의 역삽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있던 것이 달라지는 변화가 아니라 다 사라지고 새 것이 되는 변화입니다.
변화가 너무나 철저해서 이전 것은 다 사라져 다시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의 세상에서 얻는 것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복, 거기 속한 자들이 바라는 복이 무엇입니까?
얻으려고 땀담을 흘리고, 없어서 눈물 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길어지고, 더해지는 복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땅에서의 삶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잠 4:10)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생명의 해가 길면 복입니다.
땅의 넓이가 커지면 복이고, 재물이 더해져 새로 창고를 지으면 복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덜어지고, 감해지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근심이 덜어지고 고통이 감소하면 복입니다.
근심과 고통, 염려와 슬픔은 없을 수 없는 것이긴 해도 덜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그게 복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모든 복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늘리려고 하고, 넓히려고 하는 인생의 욕망은 죽는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오래 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죽기로 정해진 목숨이기에 그렇게 오래 사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는 날 동안은 어차피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그 양을 줄일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일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창고를 짓고, 지경을 넓히는 것 다 그 때문입니다.
땀 흘릴 일을 줄이고, 눈물 흘려야 할 날들에 대비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소출이 많아 창고를 짓고 안심하는 부자를 향해 이르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그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어떻습니까?

사망도 없고...
사망의 때가 미루어져 사는 날이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망이 없으니 사는 날을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끝이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969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이것이 그 끝입니다.
심지어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도 지금 보이지 않습니다.
부활의 두 번째 열매였던 다비다도 지금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처음 세상에 속한 생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시는 그 하늘 아래 땅에서는 더 이상 얼마를 사느냐고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이 아주 없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큰 슬픔이 변해 작은 슬픔이 되고, 극심한 고통이 참을만한 고통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라져 버립니다.
핍절한 때를 대비하여 창고에 쌓아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땅을 넓히고, 울타리를 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것들은 다 땀과 눈물을 줄이며 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일들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수명을 십오년이나 연장받은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대하 32:27-30) [27]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국고를 세우매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떼의 우리를 갖추며 [29] 양떼와 많은 소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저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30]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 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

그도 한때는 병에 걸려 운 적이 있었습니다.
짧은 인생에 할 일은 많아 하나님께 울며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고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아픔과 슬픔에서 그를 위로하시고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도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역시 처음 세상에 속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영화를 맛보았던 솔로몬이 고백했습니다.
          (전 1:2)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지으시는 하늘과 땅, 새로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헛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참되고 영원할 따름입니다.
죽음이 없고, 애통이 없는 세상, 말 그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는 것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은 요한 사도를 통해 그 날이 마침내 오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증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 정하신 그 날, 새 하늘이 열리고, 새 땅이 펼쳐지는 날이 이르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사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되겠습니까?

새 사람입니다.
지금 하늘과 땅의 주인은 흙으로 지음 받은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은 두루 도는 화염검을 동산 둘레에 치셔서 사람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의 후손은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 새 땅의 주인은 새로운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위가 변해서 모래가 됩니다.
연한 순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됩니다.
놀라운 변홥니다.
그러나 이것도 본성의 변화가 아닙니다.
바위와 모래는 그 본성이 같은 것입니다.
작은 열매 안에 큰 나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변한 것이지 다시 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의 모습이 변한 사람이 아닙니다.
조금 달라진 사람, 좀 나아진 사람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럼 어떻게 새 사람이 될수 있습니까?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주님 주시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죄악이 유전하는 더러운 피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 본성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부활이라는 말도 같은 말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은 옛 사람이 죽고, 예수의 피로 씻은 새 사람으로 다시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을 지으시고 제 칠일에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달력에는 본시 제 팔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제 팔일이 있다면 그 날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상을 창조하시는 첫 날이 될 것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제 팔일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부정한 자가 정결케 되는 것은 모두 제 팔일 째 되는 날부터입니다.
병으로 말미암아 부정케 되었던, 죄로 말미암아 부정케 되었든 정결케 하시는 은혜를 입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날이 팔일 째 되는 날입니다.

제 팔일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에게 할례를 행한 날이기도 합니다.
피 가운데 나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아들에게 팔일 째 되는 날 할례를 행함으로, 그가 하나님께 속한 약속의 아들임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삭은 두 번 난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혈육을 받아 모태에서 난 것이 첫 번째요, 제 팔일에 할례의 피를 흘려 죽고,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두 번째입니다.
이삭에게 제 팔일은 새로운 생명이 시작하는 날이 된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이와 같이 두 번 난 자들입니다.
육으로 난 것이 첫째요,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 두 번째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죄 가운데 난 몸을 죽이고, 십자가의 은혜로,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를 따라 다시 난 자들입니다.
제 팔일에 다시 난 자요, 하나님의 집을 이을 상속자요, 그의 기업을 물려받을 후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도 안식 후 첫날 곧 제 팔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시작하셨으니 반드시 끝이 있을 것입니다.
그 끝이 말 그대로 끝이 되는 것이 저주요,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 끝이 새로운 시작이 되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믿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부활의 주와 함께 제 팔일의 삶, 새로운 삶에 참여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말씀과 같은 이치입니다.
믿는 자가 되어 새 세상,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나기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여전히 처음 세상에 속해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하긴 했지만 아주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옛 사람의 본성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아직 다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는 한 새 사람이 될 기회는 없습니다.
새 사람이 되지 못하는 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될 기회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어야 삽니다.
끝이 나야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제 팔일은 죽은 자에게만 허락된 날입니다.
이삭이 할레 받을 때 흘린 피는 처음 난 그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삭의 참 생명은 그가 죽고 다시 산 날 곧 제 팔일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어야 삽니다.
조금 변하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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