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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다 굼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부활 네 번째 주(20100425)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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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4월 21일 (수) 22:25:52
최종편집 : 2010년 04월 22일 (목) 10:46:24 [조회수 : 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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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 4 주(20100425)
성서일과/ 시 23; 행 9:36-43; 계 7:9-17; 요 10:23-30
본문/ 사도행전 9:36-43
다비다 굼

          (행 9:36-43)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이스라엘 서쪽에 욥바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다비다 또는 도르가라고도 불리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일찍 복음을 영접했고, 구제와 선행에 앞장섰던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그녀는 성경에서 제자로 표현된 유일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바느질에 솜씨가 있어 의지할 데 없는 괴부들을 위해 겉옷과 속옷을 지어서 많은 봉사를 했습니다.
단순히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형편 닿는 대로 바느질을 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그녀의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선(善)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必有隣)는 옛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찾아 슬퍼했습니다.

욥바 가까운 곳에 룻다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때마침 베드로가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중풍에 걸려 8년이나 누워있던 애니아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했으니 인근에 큰 반향을 일으킨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다비다가 사는 욥바는 룻다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베드로가 행한 놀라운 기적의 소식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죽어서는 인될 사람이 죽은, 인정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욥바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베드로에게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다시 살릴 것이라 믿고 베드로를 불렀을까요?
그랬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놀라움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고, 제자들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기는 했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욥바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비다의 주검을 그냥 묻어버릴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다비다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비다에게 받은 사랑이 많았지만 생전에 다비다를 위해 한 일이 없었습니다.
다비다가 가는 마지막 길에 무언가 그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말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에게 장례를 맡기는 것이 제자로 불리운 여자 다비다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 지체 말고 오라고, 다른 건 다 제쳐 놓고 급히 와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베드로는 방금 도착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되돌려 세워서 함께 욥바로 내달았습니다.
욥바에 당도하자 이내 다비다의 주검이 안치된 곳으로 들어가, 거기 있던 사람들을 다 내어 보내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되었을까?
이윽고 일어난 베드로는 몸을 돌이켜 다비다의 주검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다비다 굼!
다비다야 일어나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비다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키고 비로소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사람들의 놀라움이 어떠했는지는 새삼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기에 성경은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단지 온 욥바 사람들이 알고 주를 믿는 자가 많아졌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다비다는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 처음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결정적으로 증거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 그를 믿는 자들의 부활이 되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죽어서는 안 될 사람 다비다가 죽은 이유였습니다.
다비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 확증되고, 그를 믿는 자들도 함께 부활하리라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과 장소 그리고 때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에 이 모든 것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제 다시 자세히 살피는 가운데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그 사람, 그 곳, 그 때에 맞는 사람들이 되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몸에 지니는 자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누구에게 부활의 능력이 임합니까?

다비다의 주검을 안치한 다락방에는 많은 과부들이 찾아와 슬퍼했습니다.
남편을 먼저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개중에는 자식이 없거나 자식에게조차 버림받은 여인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다비다는 참으로 살가운 이웃이었습니다.
아니 유일한 식구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는 남편처럼, 어떤 이는 자식처럼 또 어떤 이는 형제처럼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들 대부분은 그녀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알고 함께 믿음의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 다비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이미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겪었던 그들에게 닥쳐온 또 하나의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다비다는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이건 귀신이 장난하는 걸 거야,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이건 아니야!
과부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비다를 아는 욥바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낸 마음의 한 가닥이었습니다.

룻다에서 욥바까지 한 달음에 달려온 베드로가 다비다의 시신 앞에 셨습니다.
다비다 생전에 그녀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했던 과부들이 그녀의 주검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앞에서 울며 다비다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한 땀, 한 땀 다비다의 사랑이 깃든 속옷과 겉옷들을 내어 보였습니다.

베드로가 이전부터 다비다를 알았을까요?
아마 알았다고 하더라도 속속들이 잘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선행과 구제에 많은 힘을 쏟고 있는 여제자가 욥바에 있다는 그저 들어서 알 수 있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베드로가 다비다를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다비다의 주검 옆에서 베드로는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욥바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생각입니까?
다비다는 그냥 이대로 땅에 묻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비다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있던 자리에 그냥 그렇게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사람, 꼭 있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 도처에 다비다가 살아 있습니다.
다비다는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오늘의 다비다는 누구이겠습니까?
겉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다비다의 자리는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바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다비다의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봉사와 구제 그리고 선행이 많은 자는 바로 섬기는 자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자는 많아도 섬기려는 자는 없다고 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 자리, 섬기는 자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다비다는 주님의 자리 곧 섬기는 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병들어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다비다의 부활은 같은 나무에 열린 열매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 섬기는 자가 되어 주의 자리, 다비다의 자리에 서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여 승천한 주님의 자리, 이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다비다의 빈자리를 메워 부활의 다음 열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비다가 부활하는 능력이 나타난 곳은 어디였습니까?

다비다의 주검은 다락방에 누여 있었습니다.
다비다가 누여진 다락방에 들어선 베드로는 다비다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다 내어 보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죽은 다비다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베드로도 몰랐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찌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홀로 하나님 앞에 대면하여 그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몸소 보여 주신 기도가 다 그러했습니다.

욥바에 사는 과부들의 마음은 곧 베드로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비다가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림이지만 그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하실 일이었습니다.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기도했습니다.
자신과 욥바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전하고 주의 응답을 기다렸다.

어떤 응답을 받았겠습니까?
욥바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그리고 베드로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베드로는 다비다를 일으켜 세우고, 밖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들여 다시 살아난 다비다를 보게 했습니다.
하나님도 다비다를 다시 살리기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뜻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과 심정만 통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한나가 그랬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기도를 일러 주와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태를 열어 생명을 서눌로 주셨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이 통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과 심정을 통하는 기도를 함으로 마음의 모든 소원을 이루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지나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락방이라는 말입니다.
다락방이 어떤 곳입니까?
사도행전에서 다락방은 매우 중요한 뜻을 감추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흩어졌던 제자들이 모인 곳도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행 1:13-14)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행 2:1-4)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다락방에 모여 기도함으로 성부의 시대, 성자의 시대를 잇는 성령의 시대 곧 부활의 영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락방이어야 합니까?
다락방이 하늘에 보다 가까운 곳이라서?
아닙니다.
다락방이냐, 안방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다락방은 예수님이 청소하신 성전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막 11:17) ... 기록 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기도가 없는 성전과 기도가 있는 다락방이 대비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성전이라 할지라도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이 보지도, 찾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락방이라 할지라도 기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들으시고, 보시며,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즐겨 산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가 없을 때 그 산은 그저 산이었으나, 주님이 찾아 기도하실 때 그 산이 성전이 된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자주 외딴 곳으로 홀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가시는 길은 홀로였으나 기도하실 때는 홀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곳이 어디가 되었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는 그곳이 성전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성전도 참된 성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그 순간만은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가 되었든지 기도하는 그 시간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사람 가운데 있어도 외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디에 있든, 기도로 그곳이 성전이 되게 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홀로 있어도, 기도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영광에까지 이르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다비다가 언제 살아났습니까?

기도를 마친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를 향해 외쳤습니다.
다비다 굼!
다비다야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같은 이치로 죽은 자는 들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에게 그렇게 외친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다비다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보시고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주를 비웃었습니다.
그들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주님은 야이로의 딸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다시 살아나라 라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 앞에는 죽은 자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20: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주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산 자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산 사람에게 말하듯 그렇게 말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외친 것은 주님이 그날 외치셨던 것과 같았습니다.

주의 마음이 곧 베드로의 마음이었습니다.
주의 믿음이 곧 베드로의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민망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무릇 하늘로부터 임하는 모든 은총은 하나님이 인생을 긍휼히 여기실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실 때에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아픔이 있는 사람, 슬픔이 있는 사람, 질고가 있는 사람들은 다 주를 향해 외쳤습니다.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불쌍히 여겨 주소서! '                                                                                                                                소경거지 바디매오도 그렇게 외쳤고,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비도 그렇게 외쳤습니다.
부활의 능력 곧 모든 흑암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능력은 주의 불쌍히 여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생전에 다비다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다비다의 주검 앞에 모인 사람들이 누굽니까?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 보이거늘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요한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다비다가 살았을 때, 불쌍히 여겨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이 죽은 다비다를 불쌍히 여겨 그 앞에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이라고 달랐겠습니까?
거기 있는 모두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다비다의 주검 앞에서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죽은 다비다의 마음까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 죽은 자가 다시 사는 크고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먼 훗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벧전 3:8-9)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품는 것이 부활의 큰 능력이 땅에서 나타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땅의 기름진 복과 하늘의 영원한 복을 유업으로 받는 길입니다.
서로가 불쌍히 여김으로 하나 되면, 그 순간 흑암의 모든 세력을 쳐서 굴복케 하는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불쌈히 여김으로, 부활의 능력 곧 땅과 하늘에 걸친 복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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